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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라도 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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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콜로라도 준주는 1861년 2월 28일에 설립된 미국의 자치령으로, 이전에는 캔자스, 네브래스카, 유타, 뉴멕시코 자치령의 일부였다. 파이크스 픽 골드러시 이후 급증한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덴버를 비롯한 여러 도시가 수도로 지정되었다. 남북 전쟁 중에는 연방에 충성하며 남부 연합의 뉴멕시코 침공을 저지하는 데 기여했으나, 주 승격은 여러 차례의 시도 끝에 1876년에 이루어졌다. 이 지역은 원래 아라파호족, 샤이엔족 등 여러 원주민 부족의 터전이었으나, 골드러시와 백인 정착으로 인해 갈등이 심화되었고, 특히 샌드 크릭 학살 사건으로 인해 원주민들은 강제 이주되었다. 콜로라도 준주는 광업, 농업, 철도 개발을 통해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으며, 덴버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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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라도 준주
지도
기본 정보
정식 명칭콜로라도 준주
일반 명칭콜로라도 준주
국가미국
하위 구획조직화된 통합 준주
시작 이벤트콜로라도 조직법
시작 날짜1861년 2월 28일
종료 이벤트주 승격
종료 날짜1876년 8월 1일
이전캔자스 준주
네브래스카 준주
뉴멕시코 준주
유타 준주
이후콜로라도주
수도덴버 시티 (1861년-1862년)
콜로라도 시티 (1862년)
골든 시 (1862년-1867년)
덴버 (1867년-1876년)
정부 형태조직화된 통합 준주
지도자 직함주지사
지도자주지사 목록
원주민 이름해당 없음
인구 통계해당 없음
현재해당 없음
문장
콜로라도 준주 문장
콜로라도 주 문장 (삽화, 1876년)
지도
1860년 콜로라도 준주 지도
콜로라도 준주 (1860년 네브래스카, 캔자스, 뉴멕시코, 유타 준주 지도에 표시)

2. 역사

콜로라도 준주가 된 땅은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1819년 애덤스-오니스 조약에 의해 조정됨), 1845년 텍사스 합병, 1848년 멕시코 할양을 통해 미국의 영토가 되었다. 텍사스 공화국의 영유권 주장은 초기에 논란이 있었으나, 멕시코-미국 전쟁 이후 1848년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으로 미국과 멕시코 간 국경이 재조정되었고, 1850년 타협으로 텍사스주의 최종 국경이 확정되었다.

1858년 파이크스 픽 골드러시가 시작되면서, 캔자스 준주 서부(현재의 콜로라도)에서 금광 개발 붐이 일어났다.[1] 광부들은 블랙 호크와 센트럴 시티에 광산촌을 세웠고, 윌리엄 A.H. 러브랜드 등은 덴버 서쪽 산기슭에 골든 시티를 건설하여 광부들에게 물품을 공급하려 했다.

덴버 시티와 골든 시티 시민들은 정착 1년도 안 되어 새로운 준주 설립을 요구했다. ''로키 마운틴 뉴스'' 발행인 윌리엄 바이어스와 초대 준주 지사를 꿈꾼 윌리엄 라리머 주니어가 이 운동을 이끌었다. 1859년 주민들은 제퍼슨 자치령을 세웠으나, 미국 의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준주 설립은 노예 문제로 인한 상원하원의 대립으로 지연되었다. 미국 남북 전쟁 직전인 1861년 초, 남부 출신 민주당 상원 의원들의 사임으로 공화당이 양원을 장악하면서 승인이 가능해졌다. 1861년 2월 28일, 의회 법령에 따라 콜로라도 준주가 공식 조직되었다. 캔자스, 네브래스카, 유타, 뉴멕시코 준주의 일부 지역이 포함되었다. "콜로라도"라는 이름은 1850년 헨리 S. 푸트 상원 의원이 캘리포니아 남쪽에 제안했던 주의 이름이었다.

1860년대 콜로라도 골드 러시와 개척민들의 서부 진출로 미국과 원주민 간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이후 콜로라도 전쟁이 발생했고, 1864년 11월에는 샌드 크릭 학살이 발생했다.

미국 남북 전쟁 기간 동안, 콜로라도 연대는 글로리에타 패스 전투에서 남부 연합군을 격파하여 연방의 보급선을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쟁 후, 주 승격 운동이 일어났으나 앤드루 존슨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좌절되었다. 이후 11년간 그랜트 대통령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의회의 무반응으로 주 승격은 정체되었다. 콜로라도 준주는 1876년에 주로 승격되었다.

2. 1. 초기 역사와 원주민

콜로라도 준주가 된 땅은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1819년 애덤스-오니스 조약에 의해 조정됨), 1845년 텍사스 합병, 1848년 멕시코 할양을 통해 미국의 영토가 되었다. 텍사스 공화국의 영유권 주장은 초기에 논란이 있었으나, 멕시코-미국 전쟁 이후 1848년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으로 미국과 멕시코 간 국경이 재조정되었고, 1850년 타협으로 텍사스주의 최종 국경이 확정되었다.

콜로라도 준주는 여러 원주민 부족의 터전이었다. 유트족은 콜로라도 서부와 동부 고원 평원에 걸쳐 살았고, 아나사지는 콜로라도 남서부, 남부, 남동부 일부 지역에 살았다. 코만치와 히카리야 아파치는 준주의 남동부 지역에, 아라파호와 샤이엔은 동부 및 북동부 평원에 거주했다.

이 지역을 처음 방문한 유럽계 탐험가는 코로라도와 같은 스페인 탐험가였다. 1540년부터 1542년까지 코로라도 탐험대는 콜로라도 준주의 남쪽과 남동쪽 경계 지역만 지나갔다. 1776년, 프란시스코 아타나시오 도밍게스와 실베스트레 벨레즈 데 에스칼란테는 도밍게스-에스칼란테 탐험대를 이끌고 콜로라도 남부를 탐험했다.

다른 주목할 만한 탐험으로는 제불론 파이크가 이끈 1806년~1807년 파이크 탐험, 1820년 스티븐 해리먼 롱의 탐험, 1845년~1846년 존 C. 프레몬트 탐험, 1869년 존 웨슬리 파월의 파월 지리 탐험 등이 있다.

1861년 준주 설립 10일 전, 아라파호 족과 샤이엔 족은 대부분의 땅을 백인 개척자에게 포기하는 대신, 마을 근처 홈스테드 농민 개척자와 고향 땅에서 공존할 것을 미국과 합의했다. 그러나 1865년 남북 전쟁이 끝날 무렵, 하이 플레인스에서 원주민의 존재는 거의 사라졌다.

2. 2. 골드러시와 준주 설립

1858년 그린 러셀이 이끄는 조지아주 출신 탐사대가 사우스플랫 강과 체리 크릭 합류 지점에 오라리아라는 광산 캠프를 세우면서 파이크스 픽 골드러시가 시작되었다.[1] 이듬해 봄, 캔자스 준주 서부의 사우스플랫 강변은 콜로라도 골드 러시로 불리는 금광 개발 붐이 일어났다.[1] 광부들은 블랙 호크와 센트럴 시티에 광산 캠프를 세웠고, 윌리엄 A.H. 러브랜드를 비롯한 시민들은 덴버 서쪽 산기슭에 골든 시티를 건설하여 광부들에게 물품을 공급하려 했다.[1]

덴버 시티와 골든 시티 시민들은 정착 1년도 안 되어 새로운 준주 설립을 요구했다.[1] ''로키 마운틴 뉴스'' 발행인 윌리엄 바이어스와 초대 준주 지사를 꿈꾼 윌리엄 라리머 주니어가 이 운동을 이끌었다.[1] 1859년, 주민들은 제퍼슨 자치령을 세웠으나, 미국 의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1]

준주 설립 승인은 노예 문제로 인한 상원의 민주당과 하원의 공화당 간 대립으로 지연되었다.[1] 미국 남북 전쟁 발발 직전인 1861년 초, 남부 출신 민주당 상원 의원들의 사임으로 공화당이 양원을 장악하면서 새로운 준주 승인이 가능해졌다.[1]

1861년 2월 28일, 의회 법령에 따라 콜로라도 준주가 공식 조직되었다.[1] 캔자스, 네브래스카, 유타, 뉴멕시코 준주의 일부 지역이 포함되었다.[1] "콜로라도"라는 이름은 1850년 헨리 S. 푸트 상원 의원이 캘리포니아 남쪽에 제안했던 주의 이름이었다.[1]

2. 3. 콜로라도 전쟁과 원주민 이주

1851년 제1차 라라미 요새 조약에 따라, 미국은 샤이엔족과 아라파호족에게 노스플랫 강과 아칸소 강 사이의 동부 평원과 로키 산맥 동쪽 콜로라도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인정했다.[5] 그러나 1860년대 콜로라도 골드 러시와 개척민들의 서부 진출로 미국과 원주민 간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861년 2월 18일, 포트 와이즈 조약에서 샤이엔족과 아라파호족 족장들은 미국 대표와 합의하여, 10년 전 지정된 토지의 대부분을 백인 정착에 양도하고 아칸소 강과 샌드 크릭 사이의 일부 지역만 남기기로 했다.[7]

하지만 많은 원주민들은 이 조약을 거부하고 족장들의 서명 권한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사냥터를 침범하는 백인들에게 적대적으로 변했다. 1862년, 존 에반스 콜로라도 자치령 주지사는 남북 전쟁 참전 용사들로 자경단을 조직하고, 절도 혐의를 받는 인디언에 대한 강경 노선을 취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후 콜로라도 전쟁으로 불리는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했고, 1864년 11월, 800명의 콜로라도 자경단 병력이 샌드 크릭에서 샤이엔족과 아라파호족 야영지를 공격, 150~200명의 노인, 여성, 어린이를 학살했다. (샌드 크릭 학살) 1865년 3월과 4월, 미국 의회 전쟁 수행 합동 위원회는 이 사건에 대한 청문회를 열고,[5] 1865년 5월 4일 보고서에서 존 치빙턴 대령과 자경단의 행동을 "사악하고, 비겁하고, 잔혹하고, 비열하다"고 묘사했다.

그러나 학살 책임자들은 처벌받지 않았고, 콜로라도 전쟁은 아라파호족, 샤이엔족, 카이오와족, 코만치족을 콜로라도에서 오클라호마로 추방하는 결과를 낳았다.

2. 4. 남북 전쟁과 주 승격 운동

콜로라도에 자치령(준주)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은 덴버 시티와 골든 시티 건설 직후부터 나타났다. 도시 건설 1년도 채 되지 않아, 윌리엄 바이어스(로키 마운틴 뉴스 발행인)와 초대 자치령 지사를 열망했던 라리머의 주도로 자치령 지위를 요구했다.[1] 1859년, 정착민들은 제퍼슨 자치령을 설립하고 선거를 치렀으나, 미국 의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아 법적 지위를 얻지 못했다.[1]

자치령 지위 부여는 노예 문제로 인한 의회 내 교착 상태로 지연되었다. 그러나 미국 남북 전쟁 발발로 상황이 바뀌었다. 1861년 초, 탈퇴한 주 출신 민주당 상원 의원들의 사임으로 공화당이 양원을 장악하면서 새로운 자치령 승인이 가능해졌다.[2] 그 결과, 사흘 동안 콜로라도(2월 28일), 네바다(3월 1일), 다코타(3월 2일)의 세 자치령이 승인되었다.[2]

콜로라도 자치령은 1861년 2월 28일 의회 법령()에 의해 공식 조직되었으며, 이전 캔자스, 네브래스카, 유타, 뉴멕시코 자치령의 일부였던 땅에서 만들어졌다.[2] 기술적으로는 1857년 드레드 스콧 판결에 따라 노예 제도가 허용되었지만, 임박한 남북 전쟁과 자치령 내 다수의 친연방 여론으로 인해 무의미해졌다.[2] "콜로라도"라는 이름은 1850년 헨리 S. 푸트 상원 의원이 현재 캘리포니아 남쪽에 제안했던 주의 이름이었다.[2]

남북 전쟁 기간 동안, 광부들의 유입은 감소했고, 많은 이들이 전쟁 참전을 위해 동부로 떠났다. 남은 주민들은 두 개의 의용 연대와 향토 방위군을 구성했다.[3] 콜로라도 연대는 1862년 헨리 홉킨스 시블리 장군과 텍사스 병력의 뉴멕시코 준주 침공 이후, 글로리에타 패스 전투에서 남부 연합군을 격파하여 연방의 보급선을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3]

전쟁 후, 주 승격 운동이 일어났으나 앤드루 존슨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좌절되었다.[4] 이후 11년간 그랜트 대통령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의회의 무반응으로 주 승격은 정체되었다.[4]

한편, 콜로라도 준주는 철도 부족으로 위협받았다. 덴버 주민들은 덴버 퍼시픽 철도를 건설하여 북쪽 샤이엔의 미국 대륙 횡단 철도와 연결하고, 캔자스 퍼시픽 철도를 덴버까지 연결하여 도시의 쇠퇴를 막고 미래 지역 중심 도시로서의 입지를 굳혔다.[4] 콜로라도 준주는 마침내 1876년에 주로 승격되었다.[4]

3. 정치

콜로라도 준주의 정치 상황은 여러 변화를 겪었다. 준주 초기에는 제퍼슨 자치령이 설립되었으나, 미국 의회의 인정을 받지 못해 법적 지위를 얻지 못했다. 미국 남북 전쟁으로 인해 노예 문제로 인한 의회의 교착 상태가 해소되면서, 1861년 콜로라도 준주가 공식적으로 조직되었다.

미국 남북 전쟁 이후 주 승격 운동이 일어났으나, 앤드루 존슨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인해 여러 차례 정체되었다. 율리시스 S. 그랜트 대통령이 주 승격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의회는 오랫동안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콜로라도 준주는 철도 부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덴버 주민들은 덴버 퍼시픽 철도를 건설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고, 캔자스 퍼시픽 철도까지 완공되면서 덴버는 지역 중심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콜로라도 준주는 결국 1876년에 미국의 주가 되었다.

3. 1. 준주 정부

콜로라도 준주의 수도는 다음과 같이 변천했다.

기간도시
1861년 2월 28일 ~ 1862년 7월 7일덴버 시
1862년 7월 7일 ~ 1862년 8월 14일콜로라도 시
1862년 8월 14일 ~ 1867년 12월 9일골든 시
1867년 12월 9일 ~ 1876년 8월 1일덴버



콜로라도 준주 정부는 대부분 기간 동안 자체 청사가 없었고, 건물을 임대하여 사용했다. 준주 정부가 사용했던 건물 중 현재 남아있는 것은 두 곳이다. 하나는 콜로라도 시의 역사적인 통나무 건물이고, 다른 하나는 골든 시내에 있는 러브랜드 블록이다. 러브랜드 블록은 1866년부터 1867년까지 전체 입법부, 준주 도서관, 그리고 대법원을 수용했으며, 도서관은 1868년까지 남아 있었다.

그 외에 준주 정부가 사용했던 건물로는 다음이 있다.


  • 오리지널 러브랜드 빌딩 (1859–1933, 골든의 워싱턴 애비뉴 1107번지): 1862년부터 1866년까지 준주 하원을 수용했다.
  • 오버랜드 호텔 (1859–1910, 골든의 워싱턴 애비뉴 1117번지): 1862년부터 1866년까지 준주 의회를 수용했다.
  • 준주 행정 빌딩 (시기 불명, 골든의 14번가와 아라파호 거리 인근): 1866년부터 1867년까지 정부 행정부를 수용했다.

3. 2. 주 승격 논쟁

콜로라도의 현재 경계 내에 자치령을 만들려는 움직임은 덴버 시티와 골든 시티가 세워진 지 1년도 채 안 되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로키 마운틴 뉴스''의 발행인 윌리엄 바이어스와 초대 자치령 지사가 되기를 열망한 라리머에 의해 추진되었다. 1859년 정착민들은 제퍼슨 자치령을 설립하고 선거를 치렀지만, 미국 의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아 법적 지위를 얻지 못했다.

이 지역의 자치령 지위 승인은 노예 문제로 인한 미국 상원의 민주당과 하원의 노예 반대 공화당 간의 교착 상태로 지연되었다. 이 교착 상태는 남북 전쟁으로 해소되었고, 1861년 초 탈퇴한 주 출신 민주당 상원 의원들의 사임으로 양원 모두 공화당이 장악하게 되면서 새로운 자치령 승인의 길이 열렸다. 사흘 동안 콜로라도 (2월 28일), 네바다 (3월 1일), 다코타 (3월 2일)의 세 새로운 자치령이 만들어졌다.

콜로라도 자치령은 1861년 2월 28일 의회 법령에 의해 공식적으로 조직되었으며, 이전에는 캔자스, 네브래스카, 유타, 뉴멕시코 자치령의 일부였던 땅에서 만들어졌다. "콜로라도"라는 이름은 1850년 헨리 S. 푸트 상원 의원이 현재의 캘리포니아 남쪽 35° 45'에서 만들어질 주로 제안했던 이름이었다.

미국 남북 전쟁 이후 주 편입 운동이 일어났고, 1865년 말 미국 의회는 콜로라도 준주의 편입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앤드루 존슨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후 11년 동안 준주 편입 운동은 여러 차례 정체되었다. 그랜트 대통령은 1870년에 준주의 주 편입을 지지했지만, 의회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동안 콜로라도 준주는 철도 부족으로 위협받았다. 1860년대 말 덴버의 많은 사람들은 사업을 팔고 다코타 준주의 라라미와 샤이엔으로 이주했는데, 이 지역은 미국 대륙 횡단 철도를 따라 생겨났다. 덴버는 쇠퇴 가능성에 직면하여 덴버 주민들은 자본을 모아 덴버 퍼시픽 철도를 건설하여 덴버에 철도망을 연결했다. 캔자스 퍼시픽 철도가 두 달 후에 덴버까지 완공되면서 덴버는 미래의 지역 중심 도시로 굳건해졌다. 콜로라도 준주는 마침내 1876년에 연방에 가입되었다.

4. 경제

1848년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 당시, 체로키족 일행이 캘리포니아로 가던 중 사우스플랫 강과 그 지류에서 소량의 금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1858년 그린 러셀과 조지아 출신 일행은 이 소식을 듣고 채굴을 시작, 사우스플랫 강과 체리 크릭 합류 지점에 오라리아 광산 캠프를 세웠다.[1]

윌리엄 라리머 주니어는 이 기회를 활용, 오라리아 맞은편에 캔자스 준주 지사 제임스 W. 덴버의 이름을 딴 "덴버"라는 도시를 건설하고 광부들에게 부동산을 판매하며 도시를 홍보했다.[1]

1859년 봄, 콜로라도 골드 러시로 사우스플랫 강 일대는 광부들로 붐볐고, 이들은 블랙 호크, 센트럴 시티 등에 광산 캠프를 세웠다. 윌리엄 A.H. 러브랜드 등은 덴버 서쪽 산기슭에 골든을 건설, 광부들에게 물품을 공급하려 했다.[1]

미국 남북 전쟁 이후, 미국 대륙 횡단 철도가 샤이엔을 지나가자 덴버는 쇠퇴 위기에 놓였으나, 주민들은 덴버 퍼시픽 철도를 건설하여 샤이엔과 연결하고, 캔자스 퍼시픽 철도도 덴버까지 완공되면서 지역 중심 도시로 성장했다.[1]

4. 1. 광업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 기간인 1848년, 체로키 족의 한 무리가 캘리포니아로 가기 위해 사우스플랫 강과 캐시 라 푸드르 강 계곡을 건넜다. 그들은 산길을 따라 이동하면서 사우스플랫 강과 그 지류에서 미량의 금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1858년, 그린 러셀과 조지아 출신 일행은 캘리포니아에서 돌아온 체로키 족으로부터 사우스플랫 강에서 금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묘사한 지역을 채굴하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 그들은 사우스플랫 강과 체리 크릭이 합류하는 지점에 오라리아라는 광산 캠프(조지아의 금광 캠프에서 이름을 따옴)를 세웠다. 조지아 사람들은 이듬해 겨울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아칸소 강을 따라 있는 벤츠 요새에서 러셀은 캔자스 토지 투기꾼 윌리엄 라리머 주니어에게 그들이 발견한 사금에 대해 이야기했다. 라리머는 이를 활용할 기회를 깨닫고 오라리아로 급히 달려갔다. 1858년 11월, 그는 오라리아에서 체리 크릭 건너편 지역에 토지 소유권을 주장하고, 당시 캔자스 준주의 지사였던 제임스 W. 덴버를 기려 그곳을 "덴버"라고 명명했다. 라리머는 직접 금을 채굴할 의도는 없었고, 새로운 도시를 홍보하고 열성적인 광부들에게 부동산을 판매하려 했다.

라리머의 새로운 도시 홍보 계획은 거의 즉시 효과를 보았고, 1859년 봄까지 사우스플랫 강을 따라 서부 캔자스 준주는 콜로라도 골드 러시로 알려진 강바닥을 파는 광부들로 북적였다. 초기 도착자들은 사금의 원천을 찾아 빠르게 산으로 이동하여 블랙 호크와 센트럴 시티에 광산 캠프를 세웠다. 윌리엄 A.H. 러브랜드를 포함한 경쟁 관계에 있던 시민 단체는 덴버 서쪽 산기슭에 골든을 세우고, 증가하는 광부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려는 의도를 가졌다.

4. 2. 철도

미국 남북 전쟁이 끝난 후, 덴버 주민들은 미국 대륙 횡단 철도가 북쪽의 샤이엔을 지나가자 도시가 쇠퇴할 것을 우려했다. 이에 덴버 주민들은 자본을 모아 덴버 퍼시픽 철도를 건설하여 샤이엔까지 연결했고, 캔자스 퍼시픽 철도도 두 달 후에 덴버까지 완공되었다. 이로써 덴버는 지역 중심 도시로 자리 잡았다.[1]

5. 사회

콜로라도 준주는 파이크스 픽 골드러시가 일어난 로키산맥 지역(대륙 분수령 양쪽)에 설치되었다. 1861년 준주 설립 10일 전, 아라파호 족과 샤이엔 족은 대부분의 땅을 백인 개척자에게 넘기는 것에 합의했지만, 마을 근처 홈스테드 농민 개척자와 고향 땅에서 공존하는 것은 인정받았다. 1865년 남북 전쟁이 끝날 때쯤에는 하이 플레인스에서 원주민의 존재가 거의 사라졌다.

1851년 제1차 라라미 요새 조약에서 미국은 샤이엔족과 아라파호족에게 콜로라도 동부 평원( 노스플랫 강과 아칸소 강 사이, 로키 산맥 동쪽)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했다.[5] 그러나 1860년대 콜로라도 골드 러시와 개척민들이 인디언 영토로 침입하면서 관계는 악화되었다.

1861년 2월 18일, 포트 와이즈 조약에서 샤이엔족과 아라파호족의 몇몇 추장들은 미국 대표와 합의하여 10년 전 부족에게 지정된 토지의 대부분을 백인 정착을 위해 양도하고, 원래의 인디언 보호구역의 일부만 남겨두기로 했다. 그러나 이들 부족 중 상당수는 조약을 거부하고, 추장들이 서명할 권한이 없거나 뇌물을 받고 서명했다고 선언했으며, 이 합의를 무시하고 사냥터를 침범하는 '백인'에 대해 더욱 호전적이 되었다.

1862년 존 에반스 콜로라도 자치령 주지사가 남북 전쟁에서 돌아온 콜로라도 의용병 연대로 구성된 자경단을 창설하고 절도 혐의를 받는 인디언에 대해 강경 노선을 취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후 콜로라도 전쟁으로 불릴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한 후, 1864년 11월, 800명의 콜로라도 자경단 병력이 샌드 크릭에서 셰이엔족과 아라파호족의 야영지를 공격하여 150명에서 200명의 인디언(주로 노인, 여성 및 어린이)을 학살했다. (샌드 크릭 학살)[5]

이 학살은 1865년 미국 의회 전쟁 수행 합동 위원회에서 공식적인 청문회를 열게 했으며, 청문회 후, 의회 합동 위원회는 보고서에서 존 치빙턴 대령과 그의 의용병들의 행동을 비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살의 책임자들은 처벌받지 않았고, 콜로라도 전쟁의 지속은 아라파호족, 샤이엔족, 카이오와족, 코만치족을 콜로라도 자치령에서 오클라호마로 추방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5. 1. 인구 구성

파이크스 픽 골드러시가 일어난 지역을 포함하여, 대륙 분수령 양쪽의 로키산맥에 콜로라도 준주가 설치되었다. 대륙 분수령 동쪽으로는 캔자스 준주 일부, 네브래스카 준주 남서부 대다수 및 뉴멕시코 준주 리오그란데강 수원에 해당하는 불규칙한 지역도 포함되었다. 대륙 분수령 서쪽으로는 유타 준주 동부의 유트 족과 쇼쇼우니 족이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던 지역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동부 평원은 샤이엔 족, 아라파호 족, 포니 족, 코만치 족, 카이오와 족이 느슨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1861년 준주 설립 10일 전, 아라파호 족과 샤이엔 족은 자신들의 땅이었던 평원 대부분의 지역을 백인 개척자에게 넘기는 것에 미합중국과 합의했지만, 마을 근처 홈스테드 농민 개척자와 고향 땅에서 공존하는 것은 인정받았다. 1865년 남북 전쟁이 끝날 때쯤에는 하이 플레인스에서 원주민의 존재가 거의 사라졌다.

5. 2. 원주민과의 관계

1851년 제1차 라라미 요새 조약에서 미국은 샤이엔족과 아라파호족에게 노스플랫 강과 아칸소 강 사이, 로키 산맥 동쪽 콜로라도 지역의 동부 평원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했다.[5] 1860년대 콜로라도 골드 러시와 개척민들이 인디언 영토로 침입하면서 미국 시민과 원주민 간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861년 2월 18일, 포트 와이즈 조약에서 샤이엔족과 아라파호족의 몇몇 추장들은 미국 대표와 합의하여 10년 전 부족에게 지정된 토지의 대부분을 백인 정착을 위해 양도하고, 원래의 인디언 보호구역의 일부만 남겨두기로 했다. 이 지역은 아칸소 강과 샌드 크릭 사이에 위치했다. 미국은 포트 와이즈 조약을 통해 인디언들이 새로운 보호구역에서 농부로 정착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들 부족 중 상당수는 조약을 거부하고, 추장들이 서명할 권한이 없거나 뇌물을 받고 서명했다고 선언했으며, 이 합의를 무시하고 사냥터를 침범하는 '백인'에 대해 더욱 호전적이 되었다. 1862년 콜로라도 자치령 주지사 존 에반스가 남북 전쟁에서 돌아온 콜로라도 의용병 연대로 구성된 자경단을 창설하고 절도 혐의를 받는 인디언에 대해 강경 노선을 취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후 콜로라도 전쟁으로 불릴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한 후, 1864년 11월, 800명의 콜로라도 자경단 병력이 샌드 크릭에서 셰이엔족과 아라파호족의 야영지를 공격하여 150명에서 200명의 인디언(주로 노인, 여성 및 어린이)을 학살했다. 이 샌드 크릭 학살은 1865년 미국 의회 전쟁 수행 합동 위원회에서 공식적인 청문회를 열게 했다.[5] 청문회 후, 의회 합동 위원회는 보고서에서 존 치빙턴 대령과 그의 의용병들의 행동을 비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살의 책임자들은 처벌받지 않았고, 콜로라도 전쟁의 지속은 아라파호족, 샤이엔족, 카이오와족, 코만치족을 콜로라도 자치령에서 오클라호마로 추방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참조

[1] 웹사이트 An Act To provide a temporary Government for the Territory of Colorado https://www.loc.gov/[...] 1861-02-28
[2] 웹사이트 Proclamation 230—Admission of Colorado into the Union https://www.presiden[...] The American Presidency Project 1876-08-01
[3] 서적 Colorado Post Offices 1859-1989 Colorado Railroad Historical Foundation 1990
[4] 간행물 Population of the States and Counties of the United States: 1790–1990 https://www.census.g[...] United States Census Bureau
[5] 서적 United States Congress Joint Committee on the Conduct of the War, 1865 (testimonies and report) http://quod.lib.umic[...] University of Michigan Digital Library Production Service 1865-05-11
[6] 웹사이트 An Act to provide a temporary Government for the Territory of Colorado http://www.colorado.[...] Thirty-sixth United States Congress 1861-02-28
[7] 웹사이트 United States Congress Joint Committee on the Conduct of the War, 1865 (testimonies and report) http://quod.lib.umic[...] University of Michigan Digital Library Production Service
[8] 웹인용 An Act to provide a temporary Government for the Territory of Colorado http://www.colorado.[...] Thirty-sixth United States Congress 2006-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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