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발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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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탁발의로는 295년 서부탁발부를 통치하며 용병술로 흉노와 오환을 격퇴하고 위조의 진언에 따라 진나라 사람들을 이주시키는 등 세력을 키웠다. 307년 탁발부를 통일하고 모용외와 친선을 맺었으며 서진의 유곤과 협력하여 흉노에 대항했다. 유곤의 추천으로 대공·대선우에 봉해졌으며 서진에 협력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중국식 도성을 쌓아 한족 관료를 등용했다. 315년 대왕으로 봉해지고 국가 체제를 정비했으나, 막내아들을 총애하여 장남과의 갈등 끝에 316년 장남 탁발육수에게 살해당했다. 이후 북위가 성립되면서 목황제로 추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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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의로 | |
---|---|
기본 정보 | |
이름 | 퉈바 이루 (拓跋猗盧) |
칭호 | 대왕 (代王) |
재위 기간 | 310년–316년 |
작위 | 310년–315년: 대공 (代公) 315년–316년: 대왕 (代王) |
추존 시호 | 목황제 (穆皇帝, 북위에서 추존) |
묘호 | 없음 |
연호 | 없음 |
성 | 퉈바 (拓跋) |
이름 | 이루 (猗盧) |
출생 정보 | 알 수 없음 |
사망 일자 | 316년 |
아버지 | 퉈바 사막한 |
배우자 | 알 수 없음 |
자녀 | 알 수 없음 |
통치 | |
통치자 | 대의 통치자 |
전임자 | 없음 |
후임자 | 퉈바 푸건 |
2. 생애
295년, 숙부인 탁발녹관이 대인이 되면서, 탁발부를 3분하여, 탁발의로는 서부탁발부를 통치했다. 탁발의로는 용병에 능숙하여 서쪽의 흉노와 오환의 여러 종족을 토벌하여 이들을 모두 격퇴했다. 또한 위조의 진언을 받아 진나라 사람들을 탁발부로 초빙하여 많이 이주하게 했다.
304년, 흉노의 유연이 이석에서 병사를 일으키자, 7월에 병주자사사마등은 탁발부에 원군을 요청했다. 탁발의로는 형인 탁발의시(拓跋猗㐌)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서하에서 유연을 격파했다. 그 후 분동에서 사마등과 동맹을 맺고 귀환했다.
307년, 탁발녹관의 뒤를 이어, 3분 된 탁발부를 다시 통일했다. 또한, 선비대선우를 자칭한 모용외와 친선을 다졌다. 서진(西晉) 말기, 서진의 병주자사 유곤(劉琨)과 형제의 인연을 맺었다. 흉노의 유연에 대항하여, 310년 유곤의 추천을 받아 서진의 조정으로부터 대공·대선우에 봉해졌다.「진서」에서는 영가 6년으로 기록되어있다. 서진에 협력하고 흉노와 싸우면서 세력을 확대, 중국식의 도성을 쌓아 올려, 한족 관료를 등용해 지배 체제의 확립을 도모했다.
313년 겨울, 탁발의로는 성락성(盛楽城)을 북도(北都)로, 평성(平城)을 남도(南都)로 삼았다. 314년, 유곤은 탁발의로에게 한(漢) 공격을 의뢰했고, 평양(平陽)에서 합류하기로 했으나, 탁발의로에 속한 여러 종족 1만여 호가 석륵에게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켜 실패했다.
315년, 서진 민제가 탁발의로를 대왕(代王)으로 봉하고, 대, 상산 2군에 관속을 두는 것을 허락했다. 백관을 두고 형법을 제정하는 등 국가 체제를 정비했다. 탁발의로는 병주 종사(并州従事)였던 막함(莫含)을 부하로 삼고자 유곤에게 요청했고, 유곤의 설득으로 막함은 대(代)로 가 탁발의로의 중용을 받았다. 탁발의로는 법을 매우 엄격하게 적용하여, 나라 사람이 법을 어기면 그 부족 전체를 주살하기도 했다.
탁발의로는 막내아들 탁발비연(拓跋比延)을 총애하여 후계자로 삼으려 했고, 장남 탁발육수의 어머니를 왕후에서 폐위시키고, 탁발육수의 명마를 빼앗아 탁발비연에게 주었다. 316년, 탁발육수가 방문했을 때 탁발비연에게 머리를 숙이도록 명했으나 거부당하자, 탁발의로는 탁발육수를 토벌하려 했으나, 도리어 탁발육수에게 역습당해 살해되었다. 이후 탁발보근(拓跋普根)이 탁발육수를 격파하고 죽였다. 그의 형제 자손에 의해 북위(北魏)가 성립되자, 목황제(穆皇帝)로 추시되었다.
2. 1. 초기 활동과 서진과의 협력 (295년 ~ 310년)
295년, 숙부인 탁발녹관이 대인이 되면서, 탁발부를 3분하여, 탁발의로는 서부탁발부를 통치했다. 탁발의로는 용병에 능숙하여 서쪽의 흉노와 오환의 여러 종족을 토벌하여 이들을 모두 격퇴했다. 또한 위조의 진언을 받아 진나라 사람들을 탁발부로 초빙하여 많이 이주하게 했다.304년, 흉노의 유연이 이석에서 병사를 일으키자, 7월에 병주자사사마등은 탁발부에 원군을 요청했다. 탁발의로는 형인 탁발의시(拓跋猗㐌)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서하에서 유연을 격파했다. 그 후 분동에서 사마등과 동맹을 맺고 귀환했다.
307년, 탁발녹관의 뒤를 이어, 3분 된 탁발부를 다시 통일했다. 또한, 선비대선우를 자칭한 모용외와 친선을 다졌다. 서진(西晉) 말기, 서진의 병주자사 유곤(劉琨)과 형제의 인연을 맺었다. 흉노의 유연에 대항하여, 310년 유곤의 추천을 받아 서진의 조정으로부터 대공·대선우에 봉해졌다.「진서」에서는 영가 6년으로 기록되어있다. 서진에 협력하고 흉노와 싸우면서 세력을 확대, 중국식의 도성을 쌓아 올려, 한족 관료를 등용해 지배 체제의 확립을 도모했다.
2. 2. 유곤과의 동맹과 세력 확장 (310년 ~ 315년)
310년 10월, 병주 자사 유곤은 아들 유준을 인질로 보내 동맹을 강화했고,[3] 백부와 철불부의 유호가 반란을 일으키자 탁발울율에게 2만 기병을 주어 진압을 도왔다. 유곤의 상소로 탁발의로는 대선우·대공에 봉해졌으나, 왕준이 대군을 넘겨주지 않아 갈등이 있었다. 유곤의 요청으로 보병과 기병 2만을 파견하여 낙양 구원을 도왔다.탁발의로는 본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대군 대신 1만 호가 넘는 부락을 이끌고 안문으로 옮겨 형북(안문관 북쪽)을 봉지로 요청했다. 유곤은 이를 막을 수 없어 누번·마읍·음관·번지·곽의 백성을 형남으로 이주시키고 5개 현을 탁발의로에게 주어 세력이 더욱 커졌다. 유곤은 탁발의로와 함께 유총과 석륵을 토벌하려 했으나, 사마월이 거절하여 무산되었다.
311년 유곤의 부하 형연이 반란을 일으키자 군대를 보내 토벌하고 유총을 물리쳤다. 312년 3월 근충 등이 진양을 공격하자 구원군을 파견하여 격퇴했다. 8월, 유곤의 요청으로 유총과 석륵 토벌을 위해 탁발육수, 탁발보근 등을 선봉으로 보내고 20만 군대를 이끌고 진격했다. 유찬은 후퇴하고, 탁발육수는 유요를 격파했다. 11월, 추격하여 유유, 유풍, 간령, 장평, 형연을 참수하고, 수양산에서 대규모 사냥을 했다. 유곤은 탁발의로에게 진군을 요청했으나, 탁발의로는 병력의 피로와 적의 강함을 이유로 거절했다.
이후 유찬이 다시 공격하여 진양을 함락시켰으나, 탁발의로는 군대를 이끌고 격파하여 유곤은 다시 진양에 입성했다. 탁발의로는 유곤에게 물자를 지원하고 장수를 남겨 수비하게 하고 귀환했다. 313년 5월, 왕준의 요청으로 탁발육수를 보내 단질륙권을 토벌했으나 패했다. 6월, 유곤과 형북에서 만나 평양 공략을 논의하고, 7월 탁발보근을 파견했으나 한군이 움직이자 퇴각했다.
2. 3. 대나라 건국과 최후 (315년 ~ 316년)
295년, 숙부인 탁발녹관이 대인이 되면서 탁발의로는 서부탁발부를 통치했다. 307년, 탁발녹관의 뒤를 이어 3분된 탁발부를 다시 통일했다.서진 말기, 병주자사 유곤과 형제의 인연을 맺고 흉노의 유연에 대항했다. 그 공적으로 310년 유곤의 추천을 받아 서진으로부터 대공·대선우에 봉해졌다. 「진서」에는 312년으로 기록되어있다. 서진에 협력하고 흉노와 싸우면서 세력을 확대, 중국식 도성을 쌓고 한족 관료를 등용해 지배 체제 확립을 도모했다.
313년 겨울, 탁발의로는 성락성(盛楽城)을 북도(北都)로, 평성(平城)을 남도(南都)로 삼았다. 314년, 유곤은 탁발의로에게 한(漢) 공격을 의뢰했고, 평양(平陽)에서 합류하기로 했으나, 탁발의로에 속한 여러 종족 1만여 호가 석륵에게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켜 실패했다.
315년, 서진 민제가 탁발의로를 대왕(代王)으로 봉하고, 대, 상산 2군에 관속을 두는 것을 허락했다. 백관을 두고 형법을 제정하는 등 국가 체제를 정비했다. 탁발의로는 병주 종사(并州従事)였던 막함(莫含)을 부하로 삼고자 유곤에게 요청했고, 유곤의 설득으로 막함은 대(代)로 가 탁발의로의 중용을 받았다. 탁발의로는 법을 매우 엄격하게 적용하여, 나라 사람이 법을 어기면 그 부족 전체를 주살하기도 했다.
탁발의로는 막내아들 탁발비연(拓跋比延)을 총애하여 후계자로 삼으려 했고, 장남 탁발육수의 어머니를 왕후에서 폐위시키고, 탁발육수의 명마를 빼앗아 탁발비연에게 주었다. 316년, 탁발육수가 방문했을 때 탁발비연에게 머리를 숙이도록 명했으나 거부당하자, 탁발의로는 탁발육수를 토벌하려 했으나, 도리어 탁발육수에게 역습당해 살해되었다. 이후 탁발보근(拓跋普根)이 탁발육수를 격파하고 죽였다. 그의 형제 자손에 의해 북위(北魏)가 성립되자, 목황제(穆皇帝)로 추시되었다.
3. 가족 관계
탁발의로는 슬하에 여러 아들을 두었다. 장자는 탁발육수이고, 차자는 탁발비연이다.
4. 평가
4. 1. 긍정적 평가
4. 2. 부정적 평가
4. 3. 종합
참조
[1]
서적
China's Northern Wei Dynasty, 386-535: The Struggle for Legitimacy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20-12-21
[2]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Medieval China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2017-04-06
[3]
문서
資治通鑑では、311年に劉遵を人質として派遣することになっ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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