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인 경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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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인 경씨는 중국 진양의 초나라 공족에 기원을 둔 한국의 성씨이다. 고려 시대에 지추밀원사를 지낸 경차를 중시조로 하며, 경상조가 태인 경씨를, 경상록이 해주 경씨로 분관하였다. 태인은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일대의 지명에서 유래되었으며, 시산 경씨라고도 불린다. 태인 경씨와 해주 경씨는 과거 급제자 12명을 배출했으며,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황해도 해주시, 경상북도 경주시 등에 집성촌이 있다. 주요 인물로는 경청, 경응순 등이 있으며, 대한민국 초대 정보통신부 장관 경상현, 배우 경수진 등이 있다.

태인 경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가문 이름태인 경씨
한자 표기泰仁 景氏
로마자 표기Taein Gyeong ssi
다른 이름해주 경씨(海州景氏)
관향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황해도 해주시
원시조경여송(景汝松)
시조경차(景磋)
저명한 인물경수진, 경성환
인구 (2015년)3,603명
기원
국가한국
민족한국 민족
지역정읍시
창립
창립자경여송(景汝松)

2. 기원

경(景)씨는 중국 진양(晉陽)의 초나라 공족(公族)에 연원을 두고 있다. 《태인경씨계묘족보(泰仁景氏癸卯族譜)》에 의하면 경여송(景汝松)이 기자(箕子)를 호종(扈從)하여 조선에 들어와 평양에 정착함으로써 일문의 문호가 열렸다고 한다.

3. 역사

중시조 경차(景磋)가 고려조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를 지내고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올라 태산군(泰山郡)에 봉해졌다고 한다.

경차의 아들 경설정(景洩淨)은 동북면(東北面) 도순문사(都巡問使)와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냈고 태산군에 습봉되었다고 한다.

3.1. 고려 시대

경차(景磋)가 고려조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를 지내고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올라 태산군(泰山郡)에 봉해졌다고 한다.

경차의 아들 경설정(景洩淨)은 동북면(東北面) 도순문사(都巡問使)와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냈고 태산군에 습봉되었다고 한다.

3.2. 조선 시대

경차(景磋)가 고려조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를 지내고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올라 태산군(泰山郡)에 봉해졌다고 한다. 경차의 아들 경설정(景洩淨)은 동북면(東北面) 도순문사(都巡問使)와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냈고 태산군에 습봉되었다고 한다.

4. 분관

경상조(景祥祖)는 경설정(景洩淨)의 맏아들로 사공(司空)을 역임하고 태인 경씨를 승계하였다. 경상조의 동생인 경상록(景祥祿)은 좌복야(左僕射)를 지내고 해주 경씨(海州 景氏)로 분관하였다고 한다.

태인(泰仁)은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泰仁面) 일대의 지명이다. 본래 백제의 대시산군(大尸山郡)이었는데, 신라 대산군(大山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고부군(古阜郡)에 속하였다. 1409년(조선 태종 9년)에 인의현(仁義縣) 합하여 태인(泰仁)으로 고쳤다. 세종실록지리지에 태산(泰山)의 토성(土姓)으로 박(朴)·시(柴)·(許)·전(田)·경(景) 5성이 기록되어 있다. 1895년 태인군이 되었고, 1914년 정읍군에 병합되었다. 태인의 옛 지명을 따서 시산 경씨라고도 한다.

경상조(景祥祖)는 사공(司空)을 역임하고 태인 경씨를 승계하였으며, 경상조의 동생인 경상록(景祥祿)은 좌복야(左僕射)를 지내고 해주 경씨(海州 景氏)로 분관하였다. 해주(海州)는 황해도 해주시의 지명이다. 본래 고구려의 내미홀군(內米忽郡)인데, 신라에서 폭지군(瀑池郡)으로 고쳤고, 고려 태조(太祖)가 군의 남쪽이 큰 바다에 임하였다 하여 해주라 하였다. 고려 성종 초에 해주목(牧)을 설치하였고 현종 때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를 거쳐 예종 때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하였다가 고종 때 다시 해주목(海州牧)으로 환원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황해도 해주목의 토성으로 (鄭)·(吳)·민(閔)·(崔)·임(林)·경(景)·임(任) 7성이 기록되어 있다. 1896년 황해도의 도청 소재지가 되었고, 1945년 해주시로 개편되었으며, 1954년 황해남도에 편입되었다.

4.1. 태인 경씨

경상조(景祥祖)는 경설정(景洩淨)의 맏아들로 사공(司空)을 역임하고 태인 경씨를 승계하였다. 경상조의 동생인 경상록(景祥祿)은 좌복야(左僕射)를 지내고 해주 경씨(海州 景氏)로 분관하였다고 한다.

태인(泰仁)은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泰仁面) 일대의 지명이다. 본래 백제의 대시산군(大尸山郡)이었는데, 신라 대산군(大山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고부군(古阜郡)에 속하였다. 1409년(조선 태종 9년)에 인의현(仁義縣) 합하여 태인(泰仁)으로 고쳤다. 세종실록지리지에 태산(泰山)의 토성(土姓)으로 박(朴)·시(柴)·(許)·전(田)·경(景) 5성이 기록되어 있다. 1895년 태인군이 되었고, 1914년 정읍군에 병합되었다. 태인의 옛 지명을 따서 시산 경씨라고도 한다.

4.2. 해주 경씨

경상조(景祥祖)는 사공(司空)을 역임하고 태인 경씨를 승계하였으며, 경상조의 동생인 경상록(景祥祿)은 좌복야(左僕射)를 지내고 해주 경씨(海州 景氏)로 분관하였다. 해주(海州)는 황해도 해주시의 지명이다. 본래 고구려의 내미홀군(內米忽郡)인데, 신라에서 폭지군(瀑池郡)으로 고쳤고, 고려 태조(太祖)가 군의 남쪽이 큰 바다에 임하였다 하여 해주라 하였다. 고려 성종 초에 해주목(牧)을 설치하였고 현종 때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를 거쳐 예종 때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하였다가 고종 때 다시 해주목(海州牧)으로 환원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황해도 해주목의 토성으로 (鄭)·(吳)·민(閔)·(崔)·임(林)·경(景)·임(任) 7성이 기록되어 있다. 1896년 황해도의 도청 소재지가 되었고, 1945년 해주시로 개편되었으며, 1954년 황해남도에 편입되었다.

5. 인물

경인(景寅)은 경차(景磋)의 11세손이며, 산원(散員) 경광유(景光侑)의 아들이다. 순유학생(諄誘學生)으로 1377년(고려 우왕 3년) 진사시(進士試)에 3등으로 합격하여 감무(監務)를 역임하였다.

경청(景淸)은 경인(景寅)의 아들로 전라도 부안에서 태어났다. 1369년(공민왕 18)에 명나라에서 과거에 응시하여 3등에 급제하였다. 급제 후에는 건문제를 섬겼으며, 관직은 좌첨도어사(左僉都御使)에 이르렀다. 1402년(태조 2)에 연왕 주체가 그의 조카인 건문제를 몰아내고 천자가 되자, 경청은 복수하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연왕에게 복수하려던 사실을 털어놓자, 연왕은 솔직함에 감탄하며 관직을 유지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복수하려는 마음을 품고, 칼을 품고 조회에 참석하였다가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후에 호상(湖上)에 그의 넋을 기리는 충신사(忠臣祠)가 세워졌다. 이에 대한 내용은 『명사』 권 141 「방효유전(方孝孺傳) 경청(景淸)전(景淸傳)」에 실려 있으며, 『조선왕조실록』 「정조 24년 4월 12일(갑오)」기사에도 간단히 언급되어 있다. 조선에는 두 동생 경빈(景濱)과 경용(景溶)이 있었는데, 경빈(景濱)의 아들 경집(景輯)을 양자로 하여 그의 대를 잇게 해 주었다. 1444년(세종 26)에는 고부군(古阜郡)에서 북쪽 20리 떨어진 거촌면(巨村面) 수탕리(水湯里) 신방동(新房洞)에 장사지내고 공적을 기록한 비(碑)를 세웠다.

경응순(景應舜, ? ~ 1592년)은 조선 중기의 역관(譯官)이다. 본관은 태인(泰仁)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학통사(倭學通事)로 상주를 방어하고 있던 이일의 진중에 있다가, 왜장 고니시에게 포로로 잡혔다. 고니시는 그로 하여금 도요토미의 강화를 요청하는 서계(書契 : 일본과의 외교문서)를 조정에 전달하게 하였는데, 그 내용은 일찍이 선위사(宣慰使)로 왜사(倭使)를 접대한 적이 있는 이덕형을 강화사절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조정의 명에 의하여 이덕형을 따라 다시 충주로 향하여 가던 도중, 충주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덕형을 가지 못하게 만류하고 스스로 적정(敵情)을 살피러 나섰다가 가토의 군사에게 잡혀 피살되었다.

경상현(景商鉉)은 대한민국 초대 정보통신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경주현(景周鉉)은 삼성종합화학 회장을 역임하였다. 경선식(景宣植)은 영어 강사이며, 경수진(景收眞)은 배우이다.

5.1. 고려

경인(景寅)은 경차(景磋)의 11세손이며, 경광유(景光侑)의 아들이다. 1377년(고려 우왕 3년) 진사시(進士試)에 3등으로 합격하여 감무(監務)를 역임하였다.

경청(景淸)은 경인(景寅)의 아들로 전라도 부안에서 태어났다. 1369년(공민왕 18) 명나라에서 과거에 응시하여 3등에 급제하였다. 급제 후 건문제(建文帝)를 섬겼으며, 관직은 좌첨도어사(左僉都御使)에 이르렀다. 1402년(태조 2) 연왕(燕王) 주체(朱棣)가 건문제를 몰아내고 천자가 되자, 경청은 복수하려 하였다. 그러나 연왕에게 복수하려던 사실을 털어놓아 연왕은 솔직함에 감탄하며 관직을 유지하게 해주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복수하려는 마음을 품고 칼을 품고 조회에 참석하였다가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호상(湖上)에 그의 넋을 기리는 충신사(忠臣祠)가 세워졌다. 이 내용은 『명사(明史)』 권 141 「방효유전(方孝孺傳) 경청전(景淸傳)」에 실려 있으며, 『조선왕조실록』 1800년(정조 24) 4월 12일(갑오)」기사에도 간단히 언급되어 있다. 조선에는 두 동생 경빈(景濱)과 경용(景溶)이 있었는데, 경빈의 아들 경집(景輯)을 양자로 하여 그의 대를 잇게 해 주었다. 1444년(세종 26) 고부군(古阜郡) 거촌면(巨村面) 수탕리(水湯里) 신방동(新房洞)에 장사지내고 공적을 기록한 비(碑)를 세웠다.

5.2. 조선

* 경인(景寅) : 경차(景磋)의 11세손이며, 산원(散員) 경광유(景光侑)의 아들이다. 1377년(고려 우왕 3년) 진사시(進士試)에 3등으로 합격하여 감무(監務)를 역임하였다.
* 경청(景淸) : 경인(景寅)의 아들로 전라도 부안에서 태어났다. 1369년(공민왕 18)에 명나라에서 과거에 응시하여 3등에 급제하였다. 급제 후에는 건문제(建文帝)를 섬겼으며, 관직은 좌첨도어사(左僉都御使)에 이르렀다. 1402년(태조 2)에 연왕(燕王) 주체(朱棣)가 그의 조카인 건문제를 몰아내고 천자가 되자, 복수하려 하였다. 그러나 계속해서 복수하려는 마음을 품고, 칼을 품고 조회에 참석하였다가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후에 호상(湖上)에 그의 넋을 기리는 충신사(忠臣祠)가 세워졌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명사』 권 141 「방효유전(方孝孺傳) 경청전(景淸傳)」에 실려 있으며, 『조선왕조실록 1800년(정조 24) 4월 12일(갑오)」기사에도 언급되어 있다. 조선에는 두 동생 경빈(景濱)과 경용(景溶)이 있었는데, 경빈의 아들 경집(景輯)을 양자로 하여 그의 대를 잇게 해 주었다. 1444년(세종 26)에는 고부군(古阜郡)에서 북쪽 20리 떨어진 거촌면(巨村面) 수탕리(水湯里) 신방동(新房洞)에 장사지내고 공적을 기록한 비(碑)를 세웠다.
* 경응순(景應舜, ? ~ 1592년) : 조선 중기의 역관(譯官)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학통사(倭學通事)로 이일의 진중에 있다가, 왜장 고니시(小西行長)에게 포로로 잡혔다. 고니시는 그로 하여금 도요토미(豊臣秀吉)의 강화를 요청하는 서계(書契 : 일본과의 외교문서)를 조정에 전달하게 하였는데, 그 내용은 일찍이 선위사(宣慰使)로 왜사(倭使)를 접대한 적이 있는 이덕형을 강화사절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조정의 명에 의하여 이덕형을 따라 다시 충주로 향하여 가던 도중, 충주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덕형을 가지 못하게 만류하고 스스로 적정(敵情)을 살피러 나섰다가 가토(加藤淸正)의 군사에게 잡혀 피살되었다.

5.3. 현대

경인(景寅)은 경차(景磋)의 11세손이며, 산원(散員) 경광유(景光侑)의 아들이다. 순유학생(諄誘學生)으로 1377년(고려 우왕(禑王) 3년) 진사시(進士試)에 3등으로 합격하여 감무(監務)를 역임하였다.
경청(景淸)은 경인(景寅)의 아들로 전라도 부안(扶安)에서 태어났다. 1369년(공민왕 18)에 명나라에서 과거에 응시하여 3등에 급제하였다. 급제 후에는 건문제(建文帝)를 섬겼으며, 관직은 좌첨도어사(左僉都御使)에 이르렀다. 1402년(태조 2)에 연왕(燕王) 주체(朱棣)가 그의 조카인 건문제를 몰아내고 천자가 되자, 경청은 복수하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연왕에게 복수하려던 사실을 털어놓자, 연왕은 솔직함에 감탄하며 관직을 유지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복수하려는 마음을 품고, 칼을 품고 조회에 참석하였다가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후에 호상(湖上)에 그의 넋을 기리는 충신사(忠臣祠)가 세워졌다. 이에 대한 내용은 『명사(明史)』 권 141 「방효유전(方孝孺傳) 경청전(景淸傳)」에 실려 있으며, 『조선왕조실록』 1800년(정조 24) 4월 12일(갑오)」기사에도 간단히 언급되어 있다. 조선에는 두 동생 경빈(景濱)과 경용(景溶)이 있었는데, 경빈의 아들 경집(景輯)을 양자로 하여 그의 대를 잇게 해 주었다. 1444년(세종 26)에는 고부군(古阜郡)에서 북쪽 20리 떨어진 거촌면(巨村面) 수탕리(水湯里) 신방동(新房洞)에 장사지내고 공적을 기록한 비(碑)를 세웠다.

경응순(景應舜, ? ~ 1592년)은 조선 중기의 역관(譯官)이다. 본관은 태인(泰仁)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학통사(倭學通事)로 상주(尙州)를 방어하고 있던 이일(李鎰)의 진중에 있다가, 왜장 고니시(小西行長)에게 포로로 잡혔다. 고니시는 그로 하여금 도요토미(豊臣秀吉)의 강화를 요청하는 서계(書契 : 일본과의 외교문서)를 조정에 전달하게 하였는데, 그 내용은 일찍이 선위사(宣慰使)로 왜사(倭使)를 접대한 적이 있는 이덕형(李德馨)을 강화사절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조정의 명에 의하여 이덕형을 따라 다시 충주로 향하여 가던 도중, 충주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덕형을 가지 못하게 만류하고 스스로 적정(敵情)을 살피러 나섰다가 가토(加藤淸正)의 군사에게 잡혀 피살되었다.

경상현(景商鉉)은 대한민국 초대 정보통신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경주현(景周鉉)은 삼성종합화학 회장을 역임하였다. 경선식(景宣植)은 영어 강사이며, 경수진(景收眞)은 배우이다.

6. 과거 급제자

태인 경씨와 해주 경씨는 과거 급제자 12명을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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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 경씨 과거 급제자
시대종류이름(한자)비고
고려사마경인/景寅중국어
조선무과경귀익/景貴益중국어
조선무과경귀일/景貴一중국어
조선무과경시환/景時煥중국어
조선무과경운린/景雲麟중국어
조선무과경유재/景維再중국어
조선무과경유헌/景維憲중국어
조선진사시경수춘/景壽春중국어
조선진사시경승명/景承明중국어
조선진사시경우승/景宇昇중국어
조선생원시경거륜/景居綸중국어
조선의과경변/景變중국어
조선취재경유겸/景惟謙중국어

7. 집성촌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황해도 해주시, 경상북도 경주시 등에 태인 경씨 집성촌이 있다.

8. 인구

1985년 조사에서는 태인 경씨가 382가구 1,631명, 해주 경씨가 313가구 1,251명으로 총 2,882명이었다. 2000년 조사에서는 태인 경씨가 504가구 1,617명, 해주 경씨가 310가구 933명으로 총 2,550명이었다. 2015년 조사에서는 태인 경씨 1,223명, 시산 경씨 1,347명, 해주 경씨 1,033명을 합하여 총 3,603명으로 집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