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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의 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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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크의 메리(1867-1953)는 영국의 왕족으로, 요크 공작 조지(후에 조지 5세)의 부인이자 에드워드 8세와 조지 6세의 어머니이다. 켄싱턴 궁전에서 태어나 1893년 조지와 결혼하여 웨일스 공비, 여왕을 거쳐 왕대비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윈저 왕가로의 개명과 국민적 지지 확보에 기여했으며, 1936년 에드워드 8세의 퇴위에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자녀들의 결혼과 관련된 문제에도 관여했으며,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배드민턴 하우스에서 생활했다. 메리는 왕실 보석 수집과 관련한 일화와, 큐나드 여객선 명명과 관련된 에피소드, 그리고 여러 논란으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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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의 메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메리 왕비가 티아라와 목걸이,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착용한 모습
공식 초상화, 1920년대
본명빅토리아 메리 오거스타 루이즈 올가 폴린 클라우딘 아그네스
출생일1867년 5월 26일
출생지영국 잉글랜드 런던 켄싱턴 궁
사망일1953년 3월 24일
사망지영국 잉글랜드 런던 말버러 하우스
배우자조지 5세 (1893년 결혼, 1936년 사별)
자녀에드워드 8세
조지 6세
메리
헨리, 글로스터 공작
조지, 켄트 공작
매장일1953년 3월 31일
매장지윈저 성 성 조지 예배당 북쪽 복도
메리 왕비 서명
메리 왕비 서명
왕실
왕비영국 왕비
영국 자치령
황후인도 제국
통치 기간1910년 5월 6일 – 1936년 1월 20일
대관식1911년 6월 22일
대관식 종류조지 5세와 메리의 대관식
인도 제국 대관식1911년 12월 12일
인도 제국 대관식 종류델리 더바
가문
가문테크 가문
아버지프란츠 폰 테크
어머니메리 아델라이드 오브 케임브리지

2. 생애

어린 시절 부모와 함께


테크의 빅토리아 메리 공주는 1867년 5월 26일 런던의 켄싱턴 궁전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그녀의 고모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이 48년 2일 전에 태어난 방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아기를 방문하여 "아주 훌륭하고 예쁜 작은 이목구비와 풍성한 머리카락을 가졌다"고 썼다.[28]

공주의 아버지는 프랜시스, 테크 공작으로, 뷔르템베르크의 알렉산더 공작과 그의 귀천상혼 아내인 클로딘 레데이 폰 키스-레데히 백작부인의 아들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케임브리지의 메리 아델라이드 공주로, 조지 3세의 손녀이자 아돌퍼스 캠브리지 공작과 헤세-카셀의 아우구스타 공주의 셋째이자 막내딸이었다.[74] 아기는 1867년 7월 27일 캔터베리 대주교인 찰스 토머스 롱리에 의해 켄싱턴 궁전의 왕실 예배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가족, 친구, 그리고 대중에게 그녀의 생일 달을 따서 "메이"라는 애칭으로 알려졌다.[2]

메이의 성장 과정은 "유쾌했지만 꽤 엄격했다".[28][3] 그녀는 4명의 자녀 중 장녀이자 외동딸이었다. 그녀는 세 명의 남동생들의 사소한 어린 시절의 다툼을 해결하면서 "타고난 분별력, 굳건함, 그리고 재치를 발휘하는 법을 배웠다".[4] 그들은 비슷한 나이의 웨일스 공의 자녀들과 사촌끼리 함께 놀았다.[5] 그녀는 켄싱턴 궁전과 리치먼드 공원의 화이트 로지에서 자랐으며, 이곳은 빅토리아 여왕이 영구적으로 대여했다. 그녀는 어머니와 가정교사에게서 가정 교육을 받았다(남동생들은 기숙학교에 보내지기 전까지).[6] 테크 공작 부인은 당시와 같은 계층의 여성치고는 이례적으로 오랫동안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고,[3] 가난한 사람들의 집을 방문하는 것을 포함한 다양한 자선 사업에 메이를 참여시켰다.[7]

메이는 조지 3세의 증손녀였지만, 영국 왕실의 주요 구성원은 아니었다. 그녀의 아버지인 테크 공작은 상속 재산이나 재산이 없었고, 부모의 결혼이 귀천상혼이었기 때문에 전하라는 낮은 왕실 작위를 받았다.[8] 테크 공작 부인은 영국 의회의 연금으로 £5,000을 받았고, 어머니인 케임브리지 공작 부인으로부터 연간 약 £4,000를 받았다.[9] 하지만 그녀는 수십 개의 자선 단체에 아낌없이 기부했다.[28] 프랜시스 공은 빚에 시달렸고, 1883년 절약하기 위해 소수의 직원을 데리고 가족과 함께 해외로 이주했다.[10] 그들은 여러 친척들을 방문하며 유럽 전역을 여행했다. 한동안 그들은 이탈리아의 피렌체에 머물렀는데, 메이는 미술관, 교회, 박물관을 방문하는 것을 즐겼다.[11] 그녀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28]

1885년, 가족은 런던으로 돌아와 한동안 체스터 스퀘어에 살았다.[28] 메이는 어머니와 매우 가까이 지냈고, 파티와 사교 행사를 조직하는 것을 돕는 비공식 비서 역할을 했다. 그녀는 또한 고모인 메클렌부르크-스트렐리츠의 아우구스타 대공녀와도 가깝게 지냈고, 매주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스웨덴의 왕세자비는 메이로부터 독일 독일 제국 영토에 살았던 아우구스타에게 편지를 전달하는 것을 도왔고, 아우구스타는 1916년에 사망했다.[12]

2. 1. 유년기

1867년 영국 런던의 켄싱턴 궁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뷔르템베르크의 방계 왕족 출신 프란츠 폰 테크 공작이고, 어머니는 빅토리아 여왕의 사촌 여동생인 케임브리지 공녀 메리 아델라이드이다.[74] 캔터베리 대주교인 찰스 토머스 롱리에 의해 켄싱턴 궁전의 왕실 예배당에서 세례를 받았다.[1] 어릴 때부터 가족, 친구, 대중에게 생일 달을 따서 "메이"라는 애칭으로 알려졌다.[2]

메이의 성장 과정은 "유쾌했지만 꽤 엄격했다".[28][3] 4남매 중 장녀이자 외동딸이었던 메이는 남동생들의 다툼을 해결하며 분별력, 굳건함, 재치를 발휘했다.[4] 비슷한 나이의 웨일스 공의 자녀들과 사촌끼리 함께 놀았다.[5] 켄싱턴 궁전과 리치먼드 공원의 화이트 로지에서 자랐으며, 어머니와 가정교사에게서 가정 교육을 받았다.[6]

메이는 조지 3세의 증손녀였지만, 영국 왕실의 주요 구성원은 아니었다. 아버지 테크 공작은 상속 재산이나 재산이 없었고, 부모의 결혼이 귀천상혼이었기 때문에 전하라는 낮은 왕실 작위를 받았다.[8] 어머니 테크 공작 부인은 영국 의회의 연금[9]과 친정어머니로부터 지원을 받았지만, 수십 개의 자선 단체에 기부했다.[28]

프랜시스 공은 빚에 시달렸고, 1883년 절약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해외로 이주했다.[10] 그들은 유럽 전역의 여러 친척들을 방문하며 여행했다. 이탈리아의 피렌체에 머물면서 메이는 미술관, 교회, 박물관을 방문하는 것을 즐겼다.[11] 그녀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28]

1885년, 가족은 런던으로 돌아왔다.[28] 메이는 어머니와 매우 가까이 지냈고, 비공식 비서 역할을 했다. 또한 고모인 메클렌부르크-스트렐리츠의 아우구스타 대공녀와도 가깝게 지냈으며, 매주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스웨덴의 왕세자비는 메이로부터 독일 독일 제국 영토에 살았던 아우구스타에게 편지를 전달하는 것을 도왔다.[12]

2. 2. 결혼과 왕비 즉위

1902년 요크 공작 부인 메리


빅토리아 여왕의 배려로 1885년 영국에 돌아온 테크 가문은 리치먼드 파크(Richmond Park)에 위치한 화이트 로지(White Lodge)에 정착하여 런던 생활을 시작하였다. 빅토리아 여왕의 눈에 든 메리는 1891년 왕세손 클래런스와 에이번데일의 공작과 약혼하였으나,[79] 6주 뒤 공작이 폐렴으로 사망하면서 혼사는 깨졌다.[13][81] 그러나 메리를 국왕의 배필감이라고 판단한 여왕은 1893년 그녀를 차손 요크 공작 조지와 결혼시켰다.[14][82]

1891년 빅토리아 메리("메이")와 앨버트 빅터 왕자


몸에 꼭 맞는 코르셋 드레스를 입은 젊은 메리
1893년 요크 공작과의 결혼 직전의 메리 공주


|thumb|left|upright|1893년 7월 6일, 요크 공작 조지 왕자와 테크의 빅토리아 메리 공주의 결혼 사진]]

메리는 1893년 7월 6일 런던의 세인트 제임스 궁전의 채플 로열에서 요크 공작 조지 왕자와 결혼했다.[16] 부부는 노퍽의 샌드링엄 영지에 있는 요크 코티지와 세인트 제임스 궁전의 아파트에서 살았다. 요크 코티지는 왕족에게는 소박한 집이었지만, 비교적 단순한 삶을 좋아하는 조지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었다. 그들은 에드워드, 앨버트, 메리, 헨리, 조지, 존을 포함하여 여섯 자녀를 두었다. 장남에게는 여왕이 고인이 된 앨버트 왕배의 이름을 따서 '앨버트'를 붙여줄 것을 원했지만, 고인이 된 에디의 이름을 따서 '에드워드'를 세례명으로 했다.[83] 차남은 앨버트 왕배의 기일에 태어나 '앨버트'로 이름 지어졌다.[83]

아이들은 보모의 보살핌을 받았는데, 무례함과 학대등의 이유로 보모가 교체되는 일이 있었다.[17] 메리는 엄격한 공적인 이미지와 사생활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상한 어머니였으며 남편의 엄격한 훈육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을 위로했다.[15]

요크 공작과 공작 부인은 다양한 공무를 수행했다. 1897년, 메리는 어머니에 이어 런던 바느질 길드의 후원자가 되었다.[21]

공식 드레스, 진주 목걸이, 티아라를 착용한 마른 메리
1901년 오타와에서 콘월과 요크 공작 부인


1901년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하고, 에드워드 7세가 왕위에 오르자 메리는 남편과 함께 웨일즈 공과 공비(Prince and Princess of Wales)의 자리에 올랐다.[88] 그 해 8개월 동안 영국 제국을 순회하며 지브롤터, 몰타, 이집트, 실론, 싱가포르, 호주, 뉴질랜드, 모리셔스, 남아프리카 공화국 및 캐나다를 방문했다.[85]

캐나다 방문 공식 일정표 표지


1910년 에드워드 7세가 사망하자 왕비가 되었다.

1911년 촬영, 대관식 때

2. 3. 왕비 시절

조지 5세와 메리


1911년 6월 22일, 조지 5세 부부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29] 메리는 왕관을 썼다.[29]

게다가 조지 5세의 제안에 따라 새롭게 ""을 제작한 후, 다음 1911년 12월 12일에 델리에서 대관식(대알현식: 다르바르)을 거행했다.[91] . 메리 왕비는 이나 등이 동행하여 대규모 방문이 되었다.[92]

다음 1912년에는 아일랜드 독립 문제가 표면화되어 외유는 없었고, 다음 1913년 5월 14일에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 (조지 5세의 사촌)의 장녀 빅토리아 루이제 황녀의 결혼식 때문에 베를린을 방문했지만, 공식 방문은 아니었다.[93]

1914년 4월에 조지 5세는 첫 공식 방문지로 영불 협상 10주년 기념으로 프랑스 파리를 선택했다.[94] 외국어와 외교에 약한 국왕을 프랑스어에 능통한 메리 왕비가 지원했다.[94]

1917년 촬영, 서부 전선 근처 에서 벨기에 국왕 알베르 1세, 엘리자베스 왕비와 함께


조지 5세의 외교 데뷔 직후인 1914년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세르비아 청년에게 암살당했다(사라예보 사건).[95]

사건 후 조지 5세는 사촌 빌헬름 2세와 조카 니콜라이 2세의 대립을 해결할 수 없었고, 같은 해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각국의 동맹 관계를 바탕으로 영국도 삼국 협상 측으로 참전이 불가피해졌다. 8월 2일, 독일 제국은 벨기에를 통과하겠다는 뜻을 통고했다. 다음날 8월 3일 저녁, 영국은 참전파인 에드워드 그레이 외무장관의 연설이 갈채를 받았고, 같은 날 밤에는 국왕 부부 및 에드워드 왕태자가 버킹엄 궁전 발코니에 서서 국민들에게 호응했다.[96] 8월 4일 밤, 영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두 부부가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된 1차 세계 대전은 그들에게 하나의 악몽이었다. 특히 전 유럽에서 왕실의 존재 이유와 능력이 의문시되고 전쟁 책임 등이 지워지는 가운데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왕가, 로마노프 왕가,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왕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 등 많은 왕실들이 몰락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총력전으로 그 양상을 일변시키며, 유럽 전역에서 왕실의 존재 의의나 능력이 문제시되면서 독일의 호엔촐레른 가문,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가문,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합스부르크 가문 등 많은 왕가가 몰락의 길을 걸었다. 영국 왕실도 국민들이 혐오하는 독일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한때 다른 왕가와 마찬가지로 몰락의 길을 걸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조지 5세는 국민의 모범이 되기 위해 검소한 생활을 하며 국민들의 지지를 받은 반면, 반독 감정이 고조되었다.[97] 제1해군경 루이스 배텐버그는 독일계 출신이라는 이유로 해임되었다.[98] 이듬해 1915년에는 여론이 높아짐에 따라 독일 황제 등의 가터 기사단원 자격을 박탈[99]하고, 왕가의 성을 독일 유래의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에서 왕궁의 윈저 성에서 따온 윈저 가문으로 개명했다.[100]

마찬가지로, 루이스 배텐버그는 성을 영어(의역)로 "마운트배튼"으로 바꾸었고, 메리 왕비의 친정인 텍 가문도 작위를 포기하고 새롭게 케임브리지 후작으로 서임되었다.[101]

시대의 흐름을 적절하게 파악하고 있던 조지 5세의 결단에 의해 부계로인해 가지게 된 성이었던 작센-코부르크-고타(Saxe-Coburg-Gotha) 대신 영국적인 상징이라고 생각되었던 윈저(Windsor)가 새 왕조의 이름으로 채택되었고, 라디오 연설을 통해 전쟁의 고통을 겪고 있는 국민들을 독려하며 국민의 뜻에 반하는 외국 왕조와의 결혼 등은 지양하겠다는 등 국민을 의식한 왕실의 의지가 대대적으로 선전되어 왕실과 국민들의 결속이 공고해지자 영국 왕실은 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 속에 탄탄한 반석 위에 올라서게 되었다.

메리 또한 이에 적극 동조하여 부계의 독일 혈통을 부정하는 대신 모계의 영국 혈통을 강조하고, 장남으로 태어나지 않은 탓에 방만한 교육 과정을 거친 데다가 타고난 성격 또한 국무를 수행하는 것보다는 사냥하는 것을 훨씬 좋아했던 남편의 국정 운영을 성실히 내조하였으며 군인들과 사상자들을 직접 만나 위로하는 등 왕비로서의 책무를 철저히 수행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딸 메리와 함께 있는 여왕


성미가 급하고 거친 성격이었던 남편이 국민의 왕으로 친근하게 여겨지고 존경받게 된 것도 메리의 이러한 내조의 공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왕의 만년이 병약해지자 대신 일기를 깨끗하게 정리하기도 했다.

또한 총력전의 결과,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광범위한 대상을 위한 훈장으로 1917년에 창설된 대영 제국 훈장은, 나중에 메달 디자인이 변경되어 "국부" 조지 5세와 함께 "국모" 메리 왕비가 새겨졌다.[102]

장녀 메어리 공주는 1922년에 헤어우드 백작과 결혼하여 원만한 가정을 이루었다. 메어리 공주의 결혼식에서 를 맡았던 엘리자베스는 차남 앨버트 왕자와 1923년 4월에 결혼했다. 앨버트와 엘리자베스 부부에게는 1926년에 장녀 엘리자베스 여왕이 태어났다. 삼남 헨리 왕자는 스코틀랜드 귀족의 영애 앨리스와 결혼했다. 유일하게 사남 조지 왕자만이 그리스 왕가의 마리나 공주와 결혼하여 왕족을 부인으로 맞이했다.

국왕 부부가 이룬 원만한 가정(의 이미지)은 1921년에 영국을 포함한 유럽 각국을 방문한 일본의 황태자 히로히토 친왕(후의 쇼와 천황)에게도 강한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장남 에드워드는 여러 여성과 염문을 뿌리며 왕위 계승자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계속했다. 조지 5세는 40세가 되도록 독신인 에드워드보다 차남 앨버트와 그의 딸 엘리자베스에게 계승에 기대를 걸게 되었다.[103]

조지 5세의 육체적인 쇠약은 현저해 1936년 1월 20일에 샌드링엄 하우스에서 붕어했다. 메리 왕비는 일기에 "에디와 조지 형제의 죽음을 같은 장소에서 함께 했다"는 내용을 기록했다.[104] 또한 후년에 조지 5세의 붕어가 메리 왕비 등의 동의를 얻은 "안락사"였다는 것도 공표되었다.[104]

2. 4. 왕대비 시절과 말년

조지 5세가 사망하고 장남 에드워드 8세가 왕위에 오르자 메리는 왕대비(Queen Mother)가 되었으나 왕실에 끼치는 영향력은 여전히 강력했다.[39] 어머니보다는 왕비로서의 책무를 더 중요시여겼던 그녀는 까다로운 성격에 힘입어 왕족답지 않은 것, 왕실의 평판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서는 자녀들에게도 몹시 엄격했다. 특히 에드워드 8세가 미국인이자 이혼녀인 월리스 심프슨과의 결혼을 감행하려 하면서 전국적으로 반발이 들끓자 그의 퇴위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 것은 유명하다.[40][15][44] 성공회의 가르침에 반하는 이혼을 반대했고, 심프슨이 왕비가 되기에는 전혀 부적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42] 심슨은 조지 5세와 메리 왕비 앞에서 공식적으로 소개되었지만, 메리는 이후 그녀를 만나는 것을 거부했다.[41][42]

그 외에도 차남인 요크 공작은 말더듬이었고, 삼남인 글로스터 공작은 동성애자란 소문이 자주 들렸으며 막내인 존 왕자는 뇌전증병으로 고통받는 등 자녀들과 관련된 스캔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으나 강경하게 대처하였다. 메리는 소심한 둘째 아들 요크 공작 앨버트를 도덕적으로 지원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여겼다. 앨버트는 에드워드의 퇴위에 따라 왕위에 올라 조지 6세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메리는 조지 6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는데, 이는 "미망인이 된 왕비는 신왕의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왕가의 관습을 깬 것이었다.[43]

메리 여왕과 손녀 엘리자베스 공주(오른쪽), 마가렛 공주 (앞), 1939년 5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조지 6세는 어머니가 런던에서 대피하기를 바랐다. 비록 그녀는 꺼려했지만, 글로스터셔주 배드민턴 하우스에서 조카 보퍼트 공작 부인 메리와 함께 살기로 결정했다.[47] 그녀의 개인 소지품은 70개의 수하물에 담겨 런던에서 운송되었다. 55명의 하인으로 구성된 그녀의 가구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공작과 공작 부인의 개인 스위트를 제외한 집의 대부분을 차지했다.[48] 배드민턴에서, 전쟁 노력을 지원하기 위해 메리 여왕은 군대와 공장을 방문하고 고철 재료 수집을 지시했다. 그녀는 길에서 발견한 군인들에게 차를 태워주는 것으로 알려졌다.[49] 1942년, 그녀의 아들 켄트 공작 조지는 현역 복무 중 항공기 사고로 사망했다. 메리는 1945년 6월, 나치 독일이 패배한 유럽 전쟁이 끝난 후 마침내 말보로 하우스로 돌아왔다.

메리는 왕실과 관련된 물건과 그림을 열렬히 수집했다.[50] 그녀는 러시아의 마리 황후의 유산에서 보석을 구매할 때 시세보다 높은 가격을 지불했고,[51] 그녀의 돌아가신 형제 테크 공작 프랜시스의 정부인 레이디 킬모리로부터 가족의 케임브리지 에메랄드를 구매할 때 예상 가격의 거의 3배를 지불했다.[52][53] 프랜시스가 사망한 후, 메리는 킬모리와의 관계를 덮기 위해 그의 유언장이 법원에 의해 봉인되도록 개입했다. 이것은 왕실 유언장의 봉인에 대한 선례를 세웠다.[54] 왕실 컬렉션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과 연구는 수년 동안 분실된 유물과 예술 작품을 식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57] 왕가는 이전 세대에 걸쳐 많은 작품을 대여했고, 메리는 오래된 재고 목록을 통해 반환되지 않은 품목을 식별한 후, 소지자에게 반환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58]

{{다중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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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캡션1 = 메리 여왕의 장례 마차. 그녀의 관은 개인 문장으로 덮여 있었다.[60]

| 이미지2 = Royal Standard of Mary of Teck, Queen Consort.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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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조지 6세가 사망했는데, 이는 메리의 자녀 중 그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세 번째 자녀였다. 그녀의 맏손녀인 엘리자베스 공주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 즉위했다. 셋째 아들의 죽음은 그녀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61] 메리는 1953년 3월 24일, 그녀의 손녀의 대관식 10주 전에 잠결에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63] 그녀는 자신이 사망할 경우 대관식을 연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두었다.[64] 그녀의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홀에 안치되었고, 많은 조문객들이 그녀의 관 옆을 지나갔다. 그녀는 남편 곁,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의 낭실에 묻혔다.[65]

3. 자녀

테크의 메리는 슬하에 5남 1녀를 두었다.[106]

사진이름출생사망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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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8세1894년 6월 23일1972년 5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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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6세1895년 12월 14일1952년 2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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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세스 로열 메리1897년 4월 25일1965년 3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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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스터 공작 헨리1900년 3월 31일1974년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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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트 공작 조지1902년 12월 20일1942년 8월 25일
존 왕자1905년 7월 12일1919년 1월 18일



뒷줄 왼쪽부터 앨버트, 헨리, 에드워드
앞줄 왼쪽부터 존, 메리, 조지

4. 유산 및 평가

데임 플로라 롭슨 (1965년 ''어 킹스 스토리''), 데임 웬디 힐러 (1972년 런던 무대 ''Crown Matrimonial''),[67] 그리어 가슨 (1974년 텔레비전 프로덕션 ''Crown Matrimonial''), 주디 로 (1975년 ''Edward the Seventh''), 데임 페기 애쉬크로프트 (1978년 ''Edward & Mrs. Simpson''), 필리스 캘버트 (1988년 ''The Woman He Loved''), 게이 브라운 (1999년 ''All the King's Men''), 미란다 리처드슨 (2003년 ''The Lost Prince''), 마가렛 타이잭 (2005년 ''Wallis & Edward''), 클레어 블룸 (2010년 ''The King's Speech''), 주디 파핏 (2011년 ''W.E.''), 밸러리 데인 (2013년 텔레비전 버전 ''Downton Abbey''), 데임 아일린 앳킨스 (2002년 ''Bertie and Elizabeth'' 및 2016년 ''The Crown''), 제럴딘 제임스 (2019년 영화 버전 ''Downton Abbey''), 칸디다 벤슨 (2022년 ''The Crown'' ) 등이 여왕 메리를 연기했다.

많은 장소와 건물들이 메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는데, 여기에는 런던 퀸 메리 대학교,[68] 서리 퀸 메리 저수지,[69] 그리고 라호르의 퀸 메리 칼리지가 포함된다.[70]

헨리 "칩스" 채넌 경은 메리 여왕에 대해 "정치 이상 ... 훌륭하고, 유머 감각이 있으며, 세련되고, 사실상 거의 숭고하지만 차갑고 냉정하다. 하지만 얼마나 훌륭한 여왕인가."라고 썼다.[71]

메리 왕비의 인형의 집은 그녀에게 헌정할 목적으로 제작되었으며, 1924년에 완성되었다. 사촌 이모인 메리 루이즈 오브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이 발안하여 만들어졌다.

1935년에 발행된 2캐나다 달러 지폐에 초상이 사용되었다.

; 영화



; 드라마

  • 더 크라운 (넷플릭스) - 2016년에 전 세계에 공개된 미국과 영국의 합작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시리즈. 시즌 1에서는 아이린 앳킨스가 그녀의 역을 연기했다.


==== 논란 ====

테크의 메리는 왕가의 보석 목록을 만들게 하거나 귀족의 집에 가서 가보를 헌상하게 한 일로 악명이 높았으며, "잘 말해봐야 강도 직전과 같은 분"이라고까지 불렸다. 로마노프 왕가가 영국으로 망명했을 때, 왕비에게 들키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물건을 숨겼으나 결국 압수당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배드민턴 하우스로 피난했을 때, 메리는 담쟁이덩굴을 싫어하여 자신이 데려온 하인에게 명령하여 함부로 베어내게 했다. 왕대비의 시종 55명은 저택의 오른쪽에 진을 치고, 보퍼트 공작가의 시종들에게 으스대어 양쪽 시종들의 사이가 험악해졌다. 보퍼트 공작 부부는 그 중간에서 우왕좌왕했으며, 피난했던 7년 동안 묵묵히 참았다고 한다.

1930년대 초 큐나드 라인이 건조하던 대형 여객선은, 세계 대공황의 영향으로 자금 부족에 직면하여 공사가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최종적으로 정부의 자금 지원이 인정되었고, 준공 시에는 "빅토리아"로 명명될 예정이었다. 사장 대리가 조지 5세를 알현했을 때, "이 신규 여객선에는 '영국의 위대한 여왕(퀸)'의 이름을 붙입니다"라고 완곡하게 아뢰자, 왕비(퀸) 메리의 일이라고 오해하여 "그래, 고맙소"라고 말한 것에서 급히 퀸 메리로 개칭되었다.

4. 1. 논란

테크의 메리는 왕가의 보석 목록을 만들게 하거나 귀족의 집에 가서 가보를 헌상하게 한 일로 악명이 높았으며, "잘 말해봐야 강도 직전과 같은 분"이라고까지 불렸다. 로마노프 왕가가 영국으로 망명했을 때, 왕비에게 들키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물건을 숨겼으나 결국 압수당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배드민턴 하우스로 피난했을 때, 메리는 담쟁이덩굴을 싫어하여 자신이 데려온 하인에게 명령하여 함부로 베어내게 했다. 왕대비의 시종 55명은 저택의 오른쪽에 진을 치고, 보퍼트 공작가의 시종들에게 으스대어 양쪽 시종들의 사이가 험악해졌다. 보퍼트 공작 부부는 그 중간에서 우왕좌왕했으며, 피난했던 7년 동안 묵묵히 참았다고 한다.

1930년대 초 큐나드 라인이 건조하던 대형 여객선은, 세계 대공황의 영향으로 자금 부족에 직면하여 공사가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최종적으로 정부의 자금 지원이 인정되었고, 준공 시에는 "빅토리아"로 명명될 예정이었다. 사장 대리가 조지 5세를 알현했을 때, "이 신규 여객선에는 '영국의 위대한 여왕(퀸)'의 이름을 붙입니다"라고 완곡하게 아뢰자, 왕비(퀸) 메리의 일이라고 오해하여 "그래, 고맙소"라고 말한 것에서 급히 퀸 메리로 개칭되었다.

5. 칭호

메리 여왕의 문장은 영국 왕실 문장을 그녀의 가문 문장과 분할한 것으로, 제1사분면과 제4사분면에는 그녀의 할아버지인 캠브리지 공작 아돌푸스 왕자의 문장이, 제2사분면과 제3사분면에는 그녀의 아버지인 테크 공작 프랜시스 왕자의 문장이 들어갔다.[72][73] 방패는 제국 왕관으로 장식되었으며, 잉글랜드의 왕관을 쓴 사자와 뷔르템베르크의 문장과 같이 "실물 사슴"이 지지했다.[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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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크 공작부인 메리의 문장웨일스 공주 메리의 문장메리 여왕의 문장메리 여왕의 왕실 암호


  • 1867년 5월 26일 – 1893년 7월 6일: 테크 공작 영애 빅토리아 메리 전하(Her Serene Highness Princess Victoria Mary of Teck영어)
  • 1893년 7월 6일 – 1901년 1월 22일: 요크 공작 부인/왕세자빈 전하(Her Royal Highness The Duchess of York영어)
  • 1901년 1월 22일 – 1901년 11월 9일: 콘월 및 요크 공작 부인/왕세자빈 전하(Her Royal Highness The Duchess of Cornwall and York영어)
  • 1901년 11월 9일 – 1910년 5월 6일: 웨일스 공주 전하(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of Wales영어)
  • 1910년 5월 6일 – 1936년 1월 20일: 여왕 폐하(Her Majesty The Queen영어)
  • 1936년 1월 20일 – 1953년 3월 24일: 메리 왕대비 폐하(Her Majesty Queen Mary영어)

참조

[1] 뉴스 The Times (London) 1867-07-29
[2] 서적
[3] 서적
[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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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서적
[7] 서적
[8]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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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간행물 Mary (1867–1953) http://www.oxforddnb[...] 20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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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웹사이트 Queen Mother's Clothing Guild official website http://www.qmcg.org.[...] 2010-05-01
[22] 웹사이트 Chair seat http://www.metmuseum[...] Metropolitan Museum of Art 1943
[22] 웹사이트 Tea cosy http://www.nationalt[...] National Trust 1909
[2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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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서적
[27] 서적
[28] 뉴스 Queen Mary: A Lifetime of Gracious Service 1953-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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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뉴스 The Times (London) 1953-03-25
[39] 간행물 The Death of George V
[40] 문서 Airlie, p. 200
[41] 문서 Windsor, p. 255
[42] 문서 Windsor, p. 334
[43] 문서 Pope-Hennessy, p. 584
[44] 문서 Edwards, p. 401 and Pope-Hennessy, p. 575
[45] 문서 Edwards, p. 349
[46] 웹사이트 Find Queen Mary Has No Broken Bones; But Physicians Reveal Painful Injury to Her Eye https://www.nytimes.[...] 1939-05-25
[47] 문서 Pope-Hennessy, p. 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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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문서 Pope-Hennessy, p. 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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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뉴스 Secret wills of the royals - a tale of mistresses, jewels and cover-ups https://www.theguard[...] 2007-03-26
[53] 간행물 Document – A Right Royal Affair BBC Radio 4 2005-08-29
[54] 웹사이트 Secret wills of the royals - a tale of mistresses, jewels and cover-ups https://www.theguard[...] 2007-03-26
[55] 문서 Pope-Hennessy, pp. 531–534
[56] 문서 Rose, p. 284
[57] 문서 Pope-Hennessy, p. 414
[58] 문서 Windsor, p. 238
[59] 웹사이트 S. J. Rood – a brief history http://www.sjrood.we[...] 2018-12-04
[60] 뉴스 Queen Mary laid to rest in Windsor http://news.bbc.co.u[...] BBC On This Day 1953-03-31
[61] 문서 Marie Louise, p. 238
[62] 서적 Fifty Years the Queen Dundurn Press
[63] 웹사이트 1953: Queen Mary dies peacefully after illness http://news.bbc.co.u[...] 1953-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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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웹사이트 £187m of Windsor family wealth hidden in secret royal wills https://www.theguard[...] 2022-07-18
[67] 웹사이트 Dame Wendy Hiller https://www.theguard[...] 2003-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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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서적 The Royal Heraldry of England Hollen Street Press
[74] 간행물 The Ancestry of the Princess May 1893-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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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문서 竹田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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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문서 君塚 2011
[93] 문서 君塚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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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문서 君塚 2011
[96] 문서 君塚 2011
[97] 문서 君塚 2011
[98] 문서 君塚 2011
[99] 문서 君塚 2011
[100] 문서 君塚 2011
[101] 문서 君塚 2011
[102] 문서 君塚 2011
[103] 문서 君塚 2011
[104] 문서 君塚 2011
[105] 문서 君塚 2014
[106] 문서 제임스 1세의 장녀와 동명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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