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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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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도 제국은 1858년 세포이 항쟁 이후 영국 동인도 회사의 통치를 대신하여 영국 왕실이 인도 전역을 직접 통치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아프가니스탄 일부와 미얀마를 합병하여 세력을 확장했으나, 1947년 인도 자치령과 파키스탄의 독립으로 해체되었다. 영국은 철도, 도로, 관개 시설 등 인프라를 구축하고, 서구식 교육을 도입하는 등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식민지 경제 정책으로 인해 인도의 경제는 영국에 종속되었고, 대규모 기근과 빈곤을 겪기도 했다. 독립 이후 인도는 영국 제도의 핵심 요소를 유지하면서, 영국 통치의 유산을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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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제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개요
명칭영국령 인도 제국
영어 명칭British Raj
힌디어 명칭ब्रिटिश राज (Britis Raj)
우르두어 명칭برطانوی راج (Brtanwy Raj)
설명1858년부터 1947년까지 인도 아대륙에 대한 영국의 통치
지도
1909년 영국령 인도 제국의 정치적 구분
1909년 영국령 인도 제국의 정치적 구분. 영국령 인도는 두 가지 색조의 분홍색으로 표시됨; 시킴 왕국, 네팔 왕국, 부탄, 및 번왕국은 노란색으로 표시됨.
1909년 대영 제국 내의 영국령 인도
1909년 대영 제국 내의 영국령 인도
기본 정보
지위제국 정치 구조 (영국령 인도와 번왕국으로 구성)
수도콜카타 (1858년–1911년), 뉴델리 (1911/1931–1947년)
공용어영어
힌두스타니어 (우르두어)
기타 인도 언어
정부 형태식민지
통치자 칭호여왕/여왕-황제/왕-황제
대표 칭호총독
부대표 칭호국무장관
입법부제국 입법 회의
상원참사원
하원중앙 입법 의회
통화인도 루피
면적 (1897년)4,993,650 km²
데모님인도인, 영국령 인도인
역사
이전 국가무굴 제국
사건인도 반란 (1857년 5월 10일)
시작인도 통치법 (1858년 8월 2일)
종료인도 독립법 (1947년 7월 18일)
이후 사건인도 분할 (1947년 8월 14-15일 자정)
계승 국가인도 자치령
파키스탄 자치령
페르시아 만 보호령
영국령 버마 (1937년)
아덴 식민지
영국령 소말릴란드 (1898년)
스트레이츠 정착지 (1867년)
통치자
여왕/여왕-황제빅토리아 (1858–1876년 여왕; 1876–1901년 여왕-황제)
에드워드 7세 (1901–1910년)
조지 5세 (1910–1936년)
에드워드 8세 (1936년)
조지 6세 (1936–1947년)
총독찰스 카닝 (1858–1862년)
루이 마운트배튼 (1947년)
국무장관에드워드 스탠리 (1858–1859년)
윌리엄 헤어 (1947년)

2. 역사

무굴 제국 말기인 1857년 세포이 항쟁이 일어났으나, 영국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회사령 인도의 행정부를 넘겨받았다. 1858년 영국 동인도 회사의 통치는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으로 영국 왕실에 이양되어 영국령 인도 제국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후 영국은 인도를 발판 삼아 아프가니스탄 왕국 일부와 미얀마를 인도 제국에 합병했다.

그러나 영국식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출세 길이 막힌 식민지 엘리트들 사이에서 반영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고,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를 중심으로 한 인도 국민 회의파가 등장하면서 반영 투쟁이 시작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1917년 인도 장관 에드윈 몬태규는 행정에서 인도인의 참여를 늘리고 자치 기관을 점진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영국의 목표라고 밝혔다.

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영국은 인도 내 테러나 스파이 활동 발생 시 체포영장 없이 즉시 체포할 수 있는 롤랫법을 제정하여 펀자브 지방 운동가들을 억압했다. 이에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는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주도하며 반영 운동을 다시 전개했고, 롤랫법 폐지와 완전 자치를 요구했다. 결국 억압법 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롤랫법은 폐지되었다.[310]

1935년에는 '신인도통치법'을 제정하여 인도 제국에 직접선거권과 자치권을 부여했지만, 군사권과 외교권은 인도 총독에게 남아있어 독립운동가들의 완전 독립을 위한 반영 운동은 계속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영국은 독립을 명목으로 인도에 지원을 요구했으나 간디는 이를 거절했다.

19세기 후반, 인도의 영국 왕실에 의한 직접 통치와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술 변화는 인도와 영국 경제를 밀접하게 연결시켰다.[37] 철도, 도로, 운하, 다리, 전신망 등이 빠르게 구축되어 인도 내륙의 면화 등 원자재를 봄베이 같은 항구로 효율적으로 수송하여 영국으로 수출하고, 영국의 완제품을 다시 인도로 수송하여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38][39]

기술 발전은 인도의 농업 경제도 변화시켰다. 19세기 말 면화, 식량 작물 등이 먼 시장으로 수출되면서, 시장 변동에 의존하는 많은 소규모 농민들이 사채업자에게 토지, 가축, 장비를 빼앗겼다.[42] 19세기 후반 인도의 대규모 기근이 증가했는데, 이는 느린 식민 행정 때문이라는 비판을 받았다.[42] 1876~1878년 대기근 이후, 1880년 인도 기근 위원회 보고서가 발표되고, 최초의 기근 척도 및 기근 예방 프로그램인 인도 기근 대책이 제정되었다.[43]

인도 총독 커존 경(1899년–1905년)은 효율성과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53] 그는 벵골 주를 무슬림이 다수인 동벵골 및 아삼 주와 힌두교도가 다수인 서벵골 주로 분할했는데, 이는 종교적 긴장을 높이고 민족주의 정치를 변화시켰다. 벵골의 힌두교 엘리트들은 이에 강력히 항의했다.[55]

벵골 분할 이후, 틸락은 스와데시 운동과 불매 운동을 장려했다.[56] 이 운동은 외국 상품 불매, 국산품 사용 등으로 구성되었다. 수렌드라나트 바네르지가 이끄는 ''스와데시'' 운동은 영국 상품 불매 운동을 포함했다.[57] ''반데 마타람'' 구호는 벵골, 인도, 힌두 여신 칼리를 상징했다.[58]

암리차르의 잘리안왈라바그 공원에서 잘리안왈라바그 학살이 발생했다. 1919년 4월 13일, 영국 인도군 병사들이 무장하지 않은 군중에게 발포하여 수백 명이 사망했다. 인도 정부는 379명 사망, 1,100명 부상이라고 보고했지만, 인도국민회의는 사망자 수가 세 배에 달한다고 추산했다.[82] 이 사건은 영국 통치 종식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84]

1920년, 간디는 비협조 운동을 시작하여 많은 인도인들이 영국의 훈장과 명예를 반환하고, 공무원직에서 사퇴하고, 영국 상품을 불매하도록 했다. 1928년 사이먼 위원회 방문으로 전국적인 항의가 일어났고,[85] 라호르에서 열린 인도국민회의에서 자와할랄 네루 의장 하에 ''푸르나 스와라지''(완전 독립)를 요구했다. 간디는 시민 불복종 운동을 확대하여 1930년 소금 사티아그라하를 이끌었다.

1946년 초, 인도에서 새로운 선거가 치러졌으나 인도 국민 회의와 무슬림 연맹 간의 협상은 분할 문제로 난항을 겪었다. 진나1946년 8월 16일을 직접 행동의 날로 선포했고, 콜카타에서 힌두교도와 무슬림 간의 폭동이 발생하여 영국령 인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9월에는 네루를 총리로 하는 인도 국민회의 주도의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108]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영국 경제가 어려워지고 영국령 인도의 통치 기반이 약화되자, 노동당 정부는 영국령 인도 통치를 종식시키기로 결정하고, 1947년1948년 6월 이전 권력 이양 의사를 밝혔다.[111] 마운트배튼은 독립 시기를 앞당겼고,[112] 인도의 분할과 함께 1947년 8월 인도에 대한 영국의 지배가 종식되면서 인도와 파키스탄이라는 두 개의 독립국가가 탄생했다.[113]

1947년 8월 15일, 파키스탄 자치령인도 자치령이 탄생했고, 마운트배튼은 인도의 초대 총독을 맡았다.[114] 국경 지역에서는 수백만 명이 새 국경을 넘어 이주했고, 25만~50만 명이 폭력으로 사망했다.[115]

다음은 인도 제국 시대 주요 사건들을 정리한 표이다.

연도사건
1858년인도 제국 성립
1877년빅토리아 여왕 인도 황제 겸임
1885년인도 국민회의 창립
1886년버마 편입
1905년벵골 분할령 발표
1906년전인도 무슬림 연맹 발족
1914~18년제1차 세계 대전
1919년롤랫법 제정, 인도 통치법 제정
1920년국제 연맹 가입[283]
1925년인도 공산당 결성
1929년인도 국민회의 라호르 대회, 푸르나 스와라지(완전 독립) 결정
1930년마하트마 간디 소금 행진 시작
1935년신인도 통치법 제정
1939~45년제2차 세계 대전
1937년버마 주 분리
1945년국제 연합 가입[284]
1947년 8월 15일인도 연방과 파키스탄 분리 독립
1950년인도 공화제 시행


2. 1. 세포이 항쟁과 영국 왕실의 직접 통치

무굴 제국 말기인 1857년에 세포이 항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영국은 세포이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뒤, 회사령 인도에서 행정부를 인계받았다. 1858년 영국 동인도 회사의 통치가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으로 영국 왕실에 이양되면서 영국령 인도 제국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310] 이후 인도를 발판으로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일부 지방과 미얀마를 인도 제국에 합병했다.

사이예드 아흐메드 칸, 무함마단 앵글로-오리엔탈 칼리지 설립자, 초기 비판 논문 중 하나인 ''인도 반란의 원인''을 저술했다.


세포이 항쟁은 인도에서 영국의 사업에 큰 충격을 주었지만, 좌절시키지는 못했다. 1857년까지, 특히 달호지 경 하에서 영국은 경제 및 사회 제도의 질과 강도 면에서 영국 자체와 동등한 수준의 인도를 서둘러 건설하고 있었다. 반란 이후, 그들은 더 신중해졌다. 반란의 원인에 대한 많은 고찰이 이루어졌고, 세 가지 주요 교훈이 도출되었다.

첫째, 실질적인 차원에서 영국인과 인도인 사이의 더 많은 소통과 친목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영국군 장교와 인도인 직원 사이뿐 아니라 민간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27] 인도군은 완전히 재편되었다. 반란의 핵심을 형성했던 아그라와 아우드 연합주의 무슬림과 브라만으로 구성된 부대가 해산되었다. 영국의 판단으로 충실함을 보여준 인도인들로 구성된 시크교도와 발루치족과 같은 새로운 연대가 편성되었다. 그 이후로 인도군은 1947년까지 조직적으로 변하지 않았다.[28] 186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인도의 영국인 인구는 125,945명이었다. 이 중 약 41,862명만이 민간인이었고, 군인인 유럽인 장교와 병력은 약 84,083명이었다.[29] 1880년, 상비 인도군은 영국 군인 66,000명, 인도인 130,000명, 그리고 왕족 군대의 군인 350,000명으로 구성되었다.[30]

둘째, 반란에 참여하지 않은 왕족과 대지주들도 캐닝 경의 말처럼 "폭풍 속의 방파제"임을 증명했다고 여겨졌다.[27] 그들은 또한 새로운 영국 라지에서 영국-인도 정치 체제에 통합되고 영토가 보장받음으로써 보상받았다.[31] 동시에, 아그라 연합주의 대토지 개혁의 혜택을 받은 농민들은 많은 경우 영국에 대항하여 이전 지주를 위해 싸움으로써 불충성을 보였다고 여겨졌다. 결과적으로, 향후 90년 동안 더 이상의 토지 개혁은 시행되지 않았다. 벵골과 비하르는 (펀자브와 우타르 프라데시와 달리) 대토지 소유의 영역으로 남게 되었다.[32]

셋째, 영국은 사회 변화에 대한 인도의 반응에 환멸을 느꼈다. 반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들은 벤틱 경의 사티 금지와 같은 사회 개혁을 열정적으로 추진했다.[33] 이제 인도의 전통과 관습은 너무 강하고 융통성이 없어 쉽게 바꿀 수 없다고 느꼈다. 결과적으로, 특히 종교 문제와 관련된 사항에 대해서는 더 이상 영국의 사회적 개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34] 영국이 그 문제에 대해 매우 강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을 때조차 마찬가지였다(힌두교 미망인의 재혼 문제에서와 같이).[35] 이것은 반란 직후 발표된 빅토리아 여왕의 선언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났다. 선언문에는 "우리는 우리의 신념을 우리 신민 중 누구에게도 부과할 권리와 욕망을 모두 부인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36] 이는 인도에 대한 사회적 개입을 삼가겠다는 영국의 공식적인 약속을 보여준다.

세포이 항쟁을 진압한 영국 정부는 1858년 8월 2일, 인도 통치 개선법을 가결했다. 인도 통치 개선법에 따라 영국 동인도 회사가 보유하고 있던 모든 권한은 영국 국왕에게 위임되었다. 또한, 영국 본국에서는 인도 담당 국무장관직이 신설되었고, 그 보조 기관으로 인도 참사회가 설치되었다. 이전의 벵골 총독은 인도 총독이 되었고, 직책에 "부왕"이라는 칭호가 부여되었다. 11월 1일, 찰스 캐닝(재임 기간: 1858년 11월 1일-1862년 3월 21일)이 초대 "부왕"에 취임했다.[253]

같은 날 빅토리아 여왕이 발표한 선언에 따라 인도 통치의 기본 방침이 내외에 천명되었다. 선언에는 동인도 회사가 체결한 조약과 협정을 존속시키는 노력, 인도의 토후의 권리, 위신, 명예를 존중하는 것, 여왕이 다른 신민에 대해 지고 있는 의무를 인도 주민에게도 지는 것, 기독교를 강요하지 않는 것, 신민은 인종과 신앙 여부를 묻지 않고 관직에 취임할 수 있는 것, 조상 대대로 내려온 땅에 대한 권리의 보장을 바라는 것, 인도의 평온이 회복되면 평화 산업을 촉진하고 공공의 복지와 개선 사업을 추진하기를 바라는 것 등이 적혀 있었다.[254]

캐닝 경의 인도 통치 방식은 예상되는 반란의 요인을 제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세포이 항쟁의 요인이 된 "입양의 부정"을 부정했다. 그 결과, 인도는 번왕의 지위가 보장되었고, 인도 인구의 약 3분의 1이 약 500명의 번왕에 의한 간접 통치에 놓이게 되었다.[253] 이것은 과거의 봉건 체제의 유력자를 영국 통치의 방파제로 중시하면서, 의회주의의 이상과 자유주의적 정치 이념을 가지고 인도를 통치한다는 모순을 품은 것이었다.[253] 그러나 이로 인해 캐닝은 인도 통치의 확립에 성공했다.

2. 2. 민족주의 운동의 성장과 발전

무굴 제국 말기인 1857년에 세포이 항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영국은 세포이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뒤, 회사령 인도에서 행정부를 인계받았다. 1858년 영국 동인도 회사의 통치가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으로 영국 왕실에 이양되면서 영국령 인도 제국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그 이후 인도를 발판으로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일부 지방과 미얀마를 인도 제국에 합병했다.

그러나 영국식 고등교육을 받았으나 출세의 길이 막힌 식민지 엘리트 가운데서 반영 감정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를 위시한 인도 국민 회의파가 등장하면서 반영 투쟁이 시작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1917년 인도장관 에드윈 몬태규는 행정에서 인도인의 참여를 늘리고 자치 기관의 점진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영국의 목표라고 천명했다.

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영국은 인도 내에 테러나 스파이 활동이 발생할 경우 체포영장 발부 등의 적법한 절차없이 곧바로 체포할 수 있는 롤랫법을 제정하여 인도펀자브 지방에서 운동가들을 억압하였다. 이에 인도 민족지도자인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는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주도하여 반영운동을 또다시 전개했고, 롤랫법 폐지와 완전 자치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억압법 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롤랫법은 폐지되었다.[310]

1935년에는 '신인도통치법'을 제정하여 인도 제국에 직접선거권과 자치권을 주었으나 군사권과 외교권은 인도 총독에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인도 내에 독립운동가들의 완전독립을 목표로 하는 반영운동은 계속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영국은 독립을 명목으로 지원을 인도에 요구했으나 간디는 이를 거절하였다. 1947년, 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인도 자치령, 파키스탄 (현 방글라데시인 옛 동파키스탄 지방도 포함)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인도 제국은 해체되었다.

19세기 후반, 인도의 영국 왕실에 의한 직접 통치와 산업혁명이 가져온 기술적 변화는 인도와 영국의 경제를 밀접하게 얽어매는 결과를 가져왔다.[37] 인도에서는 철도, 도로, 운하, 다리가 급속히 건설되었고, 전신망도 마찬가지로 빠르게 구축되어 인도 내륙의 면화와 같은 원자재를 봄베이와 같은 항구로 더 효율적으로 수송하여 영국으로 수출할 수 있게 되었다.[38] 마찬가지로, 영국의 완제품도 인도의 급성장하는 시장에서 판매하기 위해 다시 인도로 수송되었다.[39]

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인도의 농업 경제도 변화시켰다. 19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면화뿐만 아니라 일부 식량 작물까지 상당 부분이 먼 시장으로 수출되었다.[42] 그러한 시장의 변덕에 의존하는 많은 소규모 농민들은 사채업자에게 토지, 가축, 장비를 빼앗겼다.[42] 19세기 후반에는 인도의 대규모 기근이 증가했다. 기근이 인도 아대륙에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이 기근들은 특히 심각하여 수천만 명이 사망했으며, 영국과 인도의 많은 비평가들은 느린 식민 행정에 책임을 돌렸다.[42]

1876~1878년 대기근 이후, 1880년에 인도 기근 위원회 보고서가 발표되었고, 최초의 기근 척도 및 기근 예방 프로그램인 인도 기근 대책이 제정되었다.[43]

인도 총독 커존 경(1899년–1905년)은 효율성과 개혁을 추진하는 데 있어 유난히 활동적이었다.[53] 커존은 영국령 인도에서 가장 큰 행정 구역인 벵골 주를 무슬림이 다수인 동벵골 및 아삼 주와 힌두교도가 다수인 서벵골 주(오늘날 인도의 서벵골 주, 비하르 주, 오디샤 주)로 분할하면서 문제에 직면했다. 커존의 행위, 즉 벵골 분할은 윌리엄 벤팅크 경 시대부터 여러 식민 정부에서 고려해왔지만,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행정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종교적으로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이는 벵골의 인도인들 사이에 분열의 씨앗을 뿌렸고, 그 이전에는 없었던 방식으로 민족주의 정치를 변화시켰다. 동벵골에 토지를 소유하고 무슬림 농민에게 임대해 준 많은 사람들을 포함한 벵골의 힌두교 엘리트들은 열렬히 항의했다.[55]

벵골 분할(민족주의 운동을 약화시키기 위한 커존 경의 전략) 이후, 틸락은 스와데시 운동과 불매 운동을 장려했다.[56] 이 운동은 외국 상품 불매 운동과 외국 상품을 사용하는 인도인에 대한 사회적 불매 운동으로 구성되었다. 스와데시 운동은 국산품 사용으로 구성되었다. 외국 상품이 불매되자 인도 자체에서 그 상품을 생산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발간가다르 틸락은 스와데시 운동과 불매 운동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벵골 주에서 비하르인과 오리아인보다 벵골인의 수가 적어질 가능성에 화가 난 벵골 힌두교 중산층(''바드랄로크'')은 커존의 행위가 그들의 정치적 단호함에 대한 처벌이라고 생각했다. 커존의 결정에 대한 광범위한 항의는 두 번의 인도국민회의 의장을 역임한 수렌드라나트 바네르지가 이끄는 ''스와데시''("인도산을 사자") 운동의 형태를 띠었고, 영국 상품 불매 운동을 포함했다.[57]

두 가지 유형의 항의 모두에 대한 구호는 ''반데 마타람''("어머니에게 경배하라")이었는데, 이는 벵골, 인도, 힌두 여신 칼리를 다양하게 상징하는 어머니 여신을 불러일으켰다. 슈리 아우로빈도는 ''반데 마타람'' 잡지를 편집할 때 법을 넘어선 적이 없었으며, 가능한 한 평화의 범위 내에서 독립을 설파했다. 그 목표는 비폭력 저항이었다.[58]

주로 시크교도가 거주하는 북부 도시인 암리차르의 잘리안왈라바그 공원에서 잘리안왈라바그 학살 또는 "암리차르 학살"이 발생했다. 며칠 동안의 소요 사태 후, 레지널드 다이어(Reginald E.H. Dyer) 준장은 공개 집회를 금지했고, 1919년 4월 13일 일요일 다이어의 지휘 아래 50명의 영국 인도군 병사들이 경고 없이 수천 명의 무장하지 않은 남녀노소에게 발포하기 시작했다. 사상자 수에 대한 추산은 크게 달라, 인도 정부는 379명 사망, 1,100명 부상이라고 보고했다.[82] 인도국민회의는 사망자 수가 세 배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다이어는 직무에서 해임되었지만, 영국에서는 라지(Raj)와 관련된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한 영웅이 되었다.[83] 역사가들은 이 사건이 영국 통치 종식을 위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84]

1920년, 영국 정부가 물러서기를 거부하자 간디는 비협조 운동을 시작하여 많은 인도인들이 영국의 훈장과 명예를 반환하고, 공무원직에서 사퇴하고, 다시 영국 상품을 불매하도록 촉구했다. 또한 간디는 의회를 재조직하여 대중 운동으로 전환하고 가장 가난한 인도인에게도 회원 자격을 개방했다. 비록 간디는 1922년 폭력적인 차우리 차우라 사건 이후 비협조 운동을 중단했지만, 이 운동은 1920년대 중반에 다시 부활했다.

인도에서 헌법 개혁을 시행하도록 임명된 영국의 사이먼 위원회가 1928년 방문하면서 전국적으로 광범위한 항의가 일어났다.[85] 그 이전인 1925년, 의회의 비폭력 시위가 다시 시작되었는데, 이번에는 구자라트에서 파텔이 주도하여 농민들이 증가된 토지세 납부를 거부하도록 조직했고, 이 시위의 성공(즉, 바르돌리 사티아그라하)은 간디를 다시 적극적인 정치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85]

라호르에서 열린 연례 회의에서 자와할랄 네루 의장 하에 인도국민회의는 ''푸르나 스와라지'' (힌두스탄어: "완전 독립") 또는 푸르나 스와라지야를 요구했다. 이 선언은 간디, 네루, 파텔, 차크라바르티 라자고팔라차리를 포함한 의회 운영 위원회가 작성했다. 간디는 그 후 시민 불복종 운동을 확대하여 1930년 소금 사티아그라하로 이어졌는데, 수천 명의 인도인들이 바다로 행진하여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만들면서 소금세에 저항했다.

2. 3. 분할 독립과 인도 제국의 해체

무굴 제국 말기인 1857년에 세포이 항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영국은 세포이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뒤, 회사령 인도에서 행정부를 인계받았다. 1858년 영국 동인도 회사의 통치가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으로 영국 왕실에 이양되면서 영국령 인도 제국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영국식 고등교육을 받았으나 출세의 길이 막힌 식민지 엘리트 사이에서 반영 감정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를 위시한 인도 국민 회의파가 등장하면서 반영 투쟁이 시작되었다. 1935년에는 '신인도통치법'을 제정하여 인도 제국에 직접선거권과 자치권을 주었으나 군사권과 외교권은 인도 총독에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의 완전독립을 목표로 하는 반영운동은 계속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영국은 독립을 명목으로 인도에 지원을 요구했으나 간디는 이를 거절하였다.

1947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인도 자치령, 파키스탄 (현 방글라데시인 옛 동파키스탄 지방도 포함)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인도 제국은 해체되었다.[310]

1946년 1월, 영국으로의 귀환이 지연되어 좌절한 영국 공군 병사들의 반란을 시작으로 군대 내에서 여러 차례의 반란이 발생했다.[105] 이러한 반란은 1946년 2월 봄베이에서 발생한 왕립 인도 해군 반란을 정점으로, 이후 콜카타, 마드라스, 카라치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은 신속하게 진압되었지만, 영국 노동당 정부가 조치를 취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인도 담당 국무장관인 페식 로렌스 경이 이끄는 인도 내각 사절단이 파견되었다. 사절단에는 4년 전 인도를 방문했던 스태퍼드 크립스 경도 포함되어 있었다.[105]

1946년 초, 인도에서 새로운 선거가 치러졌다. 인도 국민 회의와 무슬림 연맹 간의 협상은 분할 문제로 난항을 겪었다. 진나1946년 8월 16일을 직접 행동의 날로 선포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영국령 인도 내 무슬림 국가 건설을 위한 요구를 강조한다고 밝혔다. 그 다음 날 콜카타에서 힌두교도와 무슬림 간의 폭동이 발생하여 영국령 인도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인도 정부와 인도 국민회의 모두 사태의 진행에 충격을 받았지만, 9월에는 네루를 총리로 하는 인도 국민회의 주도의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108]

그해 말, 제2차 세계 대전으로 고갈된 영국 재무부와 점점 불안정해지는 영국령 인도를 계속 통치할 국내 지지 기반, 국제적 지지, 토착군의 신뢰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인식한 노동당 정부는[109][110] 영국령 인도에 대한 통치를 종식시키기로 결정했고, 1947년 초 영국은 1948년 6월 이전에 권력 이양을 할 의사를 밝혔다.[111]

독립이 다가오면서 펀자브벵골 지방에서 힌두교도와 무슬림 간의 폭력 사태는 계속되었다. 마운트배튼은 권력 이양 시기를 앞당겨 독립을 위한 상호 합의된 계획에 6개월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을 할애하도록 했다.[112][111] 인도의 분할과 함께 1947년 8월 인도에 대한 영국의 지배가 종식되면서 인도와 파키스탄이라는 두 개의 독립국가가 탄생했다.[113]

1947년 8월 15일, 무함마드 알리 진나를 총독으로 하는 새로운 파키스탄 자치령(이후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과 네루를 총리로 하는 인도 자치령(이후 인도 공화국)이 탄생했다. 마운트배튼은 인도의 초대 총독을 맡았다.[114]

대다수의 인도인들은 독립 후에도 제자리에 남았지만, 국경 지역에서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무슬림, 시크교도, 힌두교도)이 새롭게 그려진 국경을 넘어 이주했다. 총 25만 명에서 5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새 국경 양측에서 세 종교의 난민과 거주민 모두 폭력으로 사망했다.[115]

3. 정치와 행정

커존 경은 1899년부터 1905년까지 인도 총독으로 재임하면서 효율성과 개혁을 추구했다.[53] 그는 북서부 국경 주 신설, 공무원 제도 개선, 금본위제 도입, 철도 및 관개 시설 확충, 농업 지원, 고고학 연구, 대학 및 경찰 개혁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54]

그러나 1905년 벵골 분할을 단행하여 큰 반발을 샀다.[55] 이는 행정적 효율성을 위한 조치였지만, 종교적 긴장을 고조시키고 벵골인들의 민족주의 운동을 촉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벵골의 힌두교 엘리트들은 이에 격렬하게 항의했다.[55] 스와데시 운동과 불매 운동이 틸락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56] 수렌드라나트 바네르지는 ''스와데시'' 운동을 이끌며 영국 상품 불매 운동을 펼쳤다.[57] 이러한 항의 운동의 구호는 ''반데 마타람''이었으며, 슈리 아우로빈도는 ''반데 마타람'' 잡지를 통해 비폭력 저항을 통한 독립을 설파했다.[58]

1906년, 무슬림 엘리트들은 민토 경에게 별도의 선거구를 요구했고,[39] 이는 전인도 무슬림 연맹(All-India Muslim League) 창설로 이어졌다. 19세기 후반부터 영국은 자치 정부를 위한 조치를 시작했고, 1892년 인도 의회법(Indian Councils Act 1892)으로 입법 의회 참여가 확대되었다. 1909년 인도 의회법(Indian Councils Act 1909), 즉 몰리-민토 개혁은 인도인에게 제한적인 역할을 부여했고, 무슬림에게는 별도 선거구를 통해 대표성을 부여했다.[127]

1911년, 조지 5세는 델리에서 인도 황제(Emperor of India)로 즉위하며 수도 이전을 발표했다. 이 시기 인도 독립을 위한 혁명 운동(Revolutionary movement for Indian independence)이 활발해졌으나, 영국은 신속하게 진압했다.[64] 제1차 세계 대전은 영국과 인도 관계에 변화를 가져왔고, 약 140만 명의 인도 군인이 참전하여[65] 인도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다. 인도는 1920년 국제 연맹 창립 회원국이 되었고, 1920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했다.[67] 전쟁은 인도인들의 자치권 확대를 요구를 불러 일으켰다.[66]

1915년 인도 방위법은 영국 정부의 권한을 강화했고,[68] 1916년 루크나우 협정을 통해 인도 국민회의와 무슬림 연맹은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같은 해, 틸락과 애니 베산트는 자치 리그를 설립하여 자치를 증진하려 했다.[70]

1858년 인도 통치법은 인도 통치에 변화를 가져왔다. 런던에는 인도 국무장관과 인도 평의회가 설립되었고,[138] 1907년 처음으로 두 명의 인도인이 평의회에 임명되었다.[140] 캘커타에서는 총독이 인도 정부 수장으로, 1861년 인도 평의회법에 따라 입법평의회가 설치되었다.[141]

1935년 인도 통치법으로 인도 평의회는 폐지되었고, 총독은 행정평의회를 이끌었다. 양원제 인도 의회가 구성되었고, 1936년에는 새로운 주들이 만들어졌다. 1937년부터 영국령 인도는 14개 주로 나뉘었고,[104] 각 주 또는 총독부는 여러 행정구로 구성되었다.[108]

3. 1.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

1858년 8월 2일, 인도 통치 개선법이 가결됨에 따라 영국 동인도 회사가 보유하고 있던 모든 권한은 영국 국왕에게 위임되었다. 영국 본국에는 인도 담당 국무장관직이 신설되었고, 보조 기관으로 인도 참사회가 설치되었다. 벵골 총독은 인도 총독이 되었고, "부왕"이라는 칭호가 부여되었다. 11월 1일, 찰스 캐닝이 초대 "부왕"에 취임했다.[253]

20세기 무렵 인도 제국의 직할령은 주지사 또는 주부지사가 통치하는 8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05년 벵골 분할령에 따라 벵골 주는 동벵골 및 아삼과 서벵골의 두 개로 분할되었으나, 1911년에 동서 벵골은 재통합되었고, 비하르 주, 오리샤 주가 신설되었다.[248][249]

영국령 인도 제국의 주[248]면적 (km²)인구 (1901년) (백만 명)주의 최고 책임자
버마 주440,0009부지사
방글라데시, 서벵골 주, 비하르 주, 자르칸드 주, 오디샤 주|벵골 주390,00075부지사
마드라스 주370,00038지사
봄베이 주320,00019지사
우타르프라데시 주, 우타라칸드 주|연합 주280,00048부지사
중앙 주와 베라르270,00013정무장관
펀자브 주250,00020부지사
아삼 주, 아루나찰프라데시 주, 메갈라야 주, 미조람 주, 나갈랜드 주|아삼 주130,0006정무장관



주요 8개 주 외에도, 행정장관이 통치하는 여러 주가 존재했다.[250]

작은 주[250]면적 (천 평방 마일)인구 (천 명)주 최고 책임자
북서변경주162,125행정장관
발루치스탄주46308발루치스탄 담당 행정장관
쿨르1.6181마이소르 담당 행정장관
아제메르-메르와라2.7477라지푸타나 담당 행정장관
안다만·니코바르 제도325행정장관



찰스 캐닝의 개혁으로, 달호지 후작이 남용했던 「권리 상실의 원칙」이 폐지되고, 후계자가 없는 것을 이유로 한 토후국의 단절은 피하게 되었다. 영국 정부는 토후로서의 「권리, 권위, 명예」를 존중함으로써 토후국의 영역을 간접적으로 지배하는 데 성공했다. 대표적인 토후국으로는 니잠 토후국(데칸 고원), 마이소르 토후국(남인도), 트라반코르 토후국(현재의 케랄라 주), 잠무 카슈미르 토후국(북인도) 등이 있었다.

토후국의 내정에 관한 영국 측 주재관의 권한은 장관의 파면, 임명권까지 미쳤다. 영국의 간섭 이유로는 첫째, 영국이 토후국과 제국의 일체화를 원했던 것, 둘째, 많은 토후국 내에서 민주적, 민족주의적 운동이 고조되었던 것을 들 수 있다.[251] 영국은 토후국 내의 통합성이 유지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분할 지배를 시도했다.

비슷한 정책이 1886년부터 제국의 한 주로 편입된 미얀마에도 적용되어, 꼰바웅 왕조보다 독립적이었던 샨족, 카야족, 카친족의 유력자들에게는 영국의 주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토후국 내의 행정권이 인정되었다.[252]

3. 2. 사법 제도

싱하는 1857년 이후 식민 정부가 법원 시스템, 법적 절차 및 법규를 통해 기반 시설을 강화하고 확장했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법률은 왕실과 구 영국 동인도 회사 법원을 통합하고, 영국 법을 기반으로 새로운 형법과 새로운 민사 및 형사 소송법을 도입했다. 1860년대~1880년대 라지(Raj)는 출생, 사망, 결혼뿐만 아니라 입양, 재산 증서, 유언의 강제 등록을 설정했다. 목표는 안정적이고 유용한 공적 기록과 검증 가능한 신원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구 조사 및 등록을 위한 새로운 절차가 여성의 사생활을 침해한다고 불평하는 무슬림과 힌두교도 모두의 반대가 있었다. 푸르다 규칙은 여성이 남편의 이름을 말하거나 사진을 찍히는 것을 금지했다. 1868년부터 1871년 사이에 전 인도 인구 조사가 실시되었는데, 종종 개별 이름 대신 가구 내 여성의 총 수를 사용했다.[145]

무르시드는 여성들이 법률의 현대화로 인해 어떤 면에서는 더 제한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종교, 카스트, 관습의 엄격함에 묶여 있었지만, 이제 빅토리아 시대 태도가 덧씌워졌다. 그들의 재산 소유 및 관리에 대한 상속권은 축소되었고, 새로운 영국 법은 다소 가혹했다. 법원 판결은 두 번째 부인과 그들의 자녀의 상속권을 제한했다. 여성은 어떤 권리를 갖기 위해서는 아버지 또는 남편 중 한 사람에게 속해야 했다.[146]

3. 3. 인도 통치법

무굴 제국 말기인 1857년에 세포이 항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영국은 세포이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뒤, 회사령 인도에서 행정부를 인계받았다. 1858년 영국 동인도 회사의 통치가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으로 영국 왕실에 이양되면서 영국령 인도 제국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1935년에는 '신인도통치법'을 제정하여 인도 제국에 직접선거권과 자치권을 주었으나, 군사권과 외교권은 인도 총독에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인도 내 독립운동가들의 완전독립을 목표로 하는 반영운동은 계속되었다.

세포이 항쟁을 진압한 영국 정부는 1858년 8월 2일, 인도 통치 개선법을 가결했다. 인도 통치 개선법에 따라 영국 동인도 회사가 보유하고 있던 모든 권한은 영국 국왕에게 위임되었다. 영국 본국에서는 인도 담당 국무장관직이 신설되었고, 그 보조 기관으로 인도 참사회가 설치되었다. 이전의 벵골 총독은 인도 총독이 되었고, 직책에 "부왕"이라는 칭호가 부여되었다. 11월 1일, 찰스 캐닝(재임 기간: 1858년 11월 1일-1862년 3월 21일)이 초대 "부왕"에 취임했다.[253]

같은 날 빅토리아 여왕이 발표한 선언에 따라 인도 통치의 기본 방침이 내외에 천명되었다. 선언에는 동인도 회사가 체결한 조약과 협정 존속, 인도의 토후의 권리, 위신, 명예 존중, 여왕이 다른 신민에 대해 지고 있는 의무를 인도 주민에게도 지는 것, 기독교 강요 금지, 신민은 인종과 신앙 여부를 묻지 않고 관직에 취임 가능, 조상 대대로 내려온 땅에 대한 권리 보장, 인도의 평온 회복 후 평화 산업 촉진 및 공공 복지와 개선 사업 추진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254]

캐닝 경의 인도 통치 방식은 예상되는 반란의 요인을 제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세포이 항쟁의 요인이 된 "입양의 부정"을 부정했다. 그 결과, 인도는 藩王(번왕)의 지위가 보장되었고, 인도 인구의 약 3분의 1이 약 500명의 藩王에 의한 간접 통치에 놓이게 되었다.[253] 이는 과거의 봉건 체제의 유력자를 영국 통치의 방파제로 중시하면서, 의회주의의 이상과 자유주의적 정치 이념을 가지고 인도를 통치한다는 모순을 품은 것이었다.[253] 그러나 이로 인해 캐닝은 인도 통치의 확립에 성공했다.

제2대 부왕인 엘긴 백작제임스 브루스(재임 기간: 1862년 3월 21일-1863년 11월 20일)가 인도에서 객사했기 때문에, 시크 전쟁 등 인도에서의 경험이 풍부했던 존 로렌스 준남작(재임 기간: 1864년 1월 12일-1869년 1월 12일. 퇴임 후 초대 로렌스 남작)이 급히 영국 본국에서 인도로 부임하게 되어 제3대 부왕이 되었다. 로렌스는 내정 면에서는 인도인에 대한 교육 기회의 확대를 도모했다. 그렇지만 로렌스는 인도인을 고등 공무원에 취임하는 것에 관해서는 제한을 계속했다. 외교 면에서는 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 만 연안 지역에 대한 개입을 피하면서도 부탄 전쟁을 실시하여 승리했다. 경제 면에서는 오리사와 라자스탄에서 기근이 발생했다(1866년 오리사 기근, 1869년 라자스탄 기근 참조).

1877년, 제5대 부왕 로버트 불워-리턴(초대 리턴 백작)(재임 기간 1876년 4월 12일-1880년 6월 8일)는 무굴 제국의 옛 수도 델리에서 "제국 회의"를 주최하고, 빅토리아의 인도 여황제 즉위를 발표했다. 이 회의의 목적은 藩王, 지방 호족, 도시의 유력자를 체제 내에 포섭하는 것이었다.[255] 리턴 경 시대에는 아프가니스탄과의 최종적인 충돌이 전개되었고, 인도 국내에서는 525만 명이 굶어 죽는 대기근이 발생하는 등[256] 인도 국내 경제는 혼란한 시대이기도 했다.

리턴 경에 의한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영국 본국에서 정변으로 발전했다. 당시 영국 본국에서 수반을 역임하고 있던 디즈레일리가 총선에서 패배하고 제2차 글래드스톤 내각이 발족하자 조지 로빈슨(초대 리폰 후작)이 제6대 부왕에 취임했다.[257]

리폰 경은 인도에서 서양식 교육을 받은 계층으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다. 리턴 경이 1878년에 제정한 출판물 규제를 위한 법률인 "토착 언어 출판법"을 폐지하고, 1882년에는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선거로 선출된 의원으로 구성되는 자치 제도의 틀을 만들었다.[257] 그러나 리폰 경은 자신의 통치 후반기에 "일버트 법안"을 폐기한 것으로 인도인의 반감을 샀다. 이 법안은 영국 관구의 수도에서는 인도인 판사가 유럽인을 재판할 수 있지만 다른 지방에서는 그렇지 못한 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법안이었지만, 인도 거주 유럽인의 반대 여론에 굴복하여 폐기되었다.[257]

하딩 경(재임 기간: 1910년 11월 23일 - 1916년 4월 4일)이 제13대 인도 총독으로 취임한 다음 해, 조지 5세와 메리 왕비가 인도를 방문하여 델리에서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영국 국왕이 인도 제국 시대에 인도를 방문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며, 그 의식에서 캘커타(Calcutta)에서 델리(Delhi)로의 수도 이전이 선포되었다.

하딩 총독 시대의 인도 정치를 좌우한 것은 당시의 국제 정세였다. 1911년부터 시작된 이탈리아-튀르키예 전쟁과 그 뒤를 이은 두 차례의 발칸 전쟁으로 인해 오스만 제국의 종교적 권위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무슬림 대중 사이에는 친튀르키예 감정이 생겨나게 되었고, 후에 오스만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자 힐라파트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6월에 석방되었던 티락을 비롯한 많은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영국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티락을 비롯한 그들의 기대는 인도의 영국에 대한 지지가 종전 후 인도에 대한 상당한 자치가 인정될 것이라는 기대에 근거하고 있었다.[265] 100만 명 이상의 인도인들이 징병에 응했고, 프랑스, 중동에서 전사했다.[266]

대전 기간, 인도 경제는 극도의 인플레이션과 중과세에 직면하게 되었고, 민족주의적인 정치 운동이 전개될 환경이 조성되었다. 그 결과, 「자치 동맹(Home Rule Leagues)[265][266]」에 의한 인도 정계의 활성화, 혁명적인 운동의 전개[265]가 나타나게 되었다. 전자의 활동을 지도한 것은 티락을 중심으로 한 세력과 영국 여성 애니 베잔트였다. 후자의 혁명적 활동은 벵갈, 마하라슈트라에서 전 북인도로 확산되었다.[265]

인도에서의 민족 의식 고양과 과거 분열의 무의미함을 자각한 티락은 국민회의의 재통합을 촉구했다. 그 결과, 1916년 루크나우 대회에서는 국민회의의 재통합 달성과 전인도 무슬림 연맹과의 대립 관계가 해소되었다. 국민회의와 연맹 사이에는 루크나우 협정이 체결되어 양자의 협력 관계가 확인되었다. 그러나 루크나우 협정의 의미는 분리 선거 제도에 기반한 정치 개혁이었기 때문에 인도 정치에 종파주의가 부활할 가능성을 남겼다.[265]

암리차르 학살


영국은 힌두교와 이슬람교 두 세력의 대동단결된 상황을 중시하여, 1917년 8월 20일, 에드윈 몬테규 인도 담당 국무장관에 의해 몬테규 선언이 발표되었다. 영국은 식민지 인도의 즉각적인 독립을 용인하지 않고, 전면적으로 자치권을 확대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몬테규와 체임스퍼드 제14대 인도 총독(재임 기간: 1916년 4월 4일 - 1921년 4월 2일)은 몬테규-체임스퍼드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인도의 민족주의자들을 회유하는 동시에, 1919년에는 롤랫법을 통과시켜 반영주의자들을 탄압했다. 롤랫법이 적용되어 전개된 비극이 암리차르 학살이다.

이 시대, 인도 독립 운동은 큰 전환점, 세대 교체를 맞이했다. 지금까지 독립 운동을 지도해 온 티락의 사망, 남아프리카에서 돌아온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의 귀국이었다.

제18대 부왕 린리스고 후작(재임 기간: 1936년 4월 18일 - 1943년 10월 1일) 시대는 전 세계를 파시즘이 휩쓴 시대였다. 또한 독립 이전 인도에서는 인도 통치법에 따라 총선거가 실시되어 국민회의 주도의 정치가 전개된 시기이다. 한편, 사회주의 사상의 대두, 농민·노동자 조직의 성장, 봉건 국가인민의 투쟁 전개, 종파주의의 신장 등 이전과는 다른 움직임이 활발해진 시대이기도 했다. 1939년부터 시작된 제2차 세계 대전이 인도의 미래를 결정지은 시대이기도 했다.

1935년 인도 통치법의 특징은 중앙에 전인도 연방을 설치하고, 레벨에서는 주 자치의 기본에 기초한 주정부의 설립을 규정한 것이다. 이 인도 연방 구상은 영국령 각 주와 봉건 국가의 연합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연방제 구상은 봉건 왕이 이 구상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림으로써 좌절되었다.

4. 사회와 문화

영국 동인도 회사는 19세기 초 인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지세 제도를 바탕으로 징세 기구를 만들었으며, 교육 제도를 정비하였다. 세포이 항쟁 이후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폐지하고 직접 인도를 통치하면서 인도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강해졌고, 서구식 교육을 받은 인도 지식인들은 사회 개혁과 영국 지배에 대한 저항 운동을 펼쳤다. 특히 19세기 후반 콜카타를 중심으로 종교, 문예, 정치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인도의 영국 식민 정부는 사티와 같은 악습을 폐지하거나 억제하는 사회 개혁을 추진했다. 1917년, 에드윈 몬태규 인도 담당 국무장관은 "행정부의 모든 부문에서 인도인의 협력을 증진시키고, 자치 기관의 점진적 발전을 통해 영국 제국의 불가분의 일부로서 인도에서 책임 있는 정부의 점진적 실현을 목표로 한다"는 영국의 목표를 발표했다.[77] 1919년에는 1919년 인도 정부법(몬태규-첼름스퍼드 개혁)이 통과되어 주 의회와 제국 입법 평의회가 확대되었고, 인도 정부는 "관료 다수"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75] 국방, 외교, 형법, 통신, 소득세 등은 총독과 뉴델리 중앙 정부가 유지했지만, 공중 보건, 교육, 지방세, 지방 자치 등은 주로 이관되었다.[75] 주 정부는 이원 통치 시스템에 따라 운영되었는데, 일부 분야는 인도 장관과 입법부의 권한이 되었고, 다른 분야는 영국 총독과 행정 위원회의 관할권에 속했다.[75]

시드니 롤랫이 의장을 맡은 롤랫 위원회는 1918년 7월 보고서를 제출하여 벵골, 봄베이 주, 펀자브 지역의 파괴 행위에 대처하기 위해 정부가 비상 권한을 사용할 것을 권고했다.[77] 이에 따라 롤랫법이 제정되었으나, 인도 전역에서 광범위한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마하트마 간디가 민족주의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81]

1920년, 간디는 비협조 운동을 시작하여 많은 인도인들이 영국의 훈장과 명예를 반환하고, 공무원직에서 사퇴하고, 영국 상품을 불매하도록 촉구했다. 1928년에는 사이먼 위원회 방문에 대한 전국적인 항의가 일어났고,[85] 1930년에는 자와할랄 네루 의장 하에 인도국민회의가 ''푸르나 스와라지''(완전 독립)를 요구했다. 간디는 시민 불복종 운동을 확대하여 소금 사티아그라하를 이끌었고, 수천 명의 인도인들이 소금세에 저항하며 체포되었다.

1935년, 1935년 인도 통치법(Government of India Act 1935)이 통과되어 영국령 인도 모든 주에 독립적인 입법 의회가 설립되고, 중앙 정부가 창설되었으며, 무슬림 소수 민족이 보호받게 되었다.[88] 1937년 선거에서 인도국민회의는 11개 주 중 7개 주에서 승리하여 광범위한 권한을 가진 정부를 구성했다.[89]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린리스고 경 인도 총독은 인도 지도자들과 상의 없이 인도를 대신하여 전쟁을 선포했고, 이에 항의하여 인도국민회의 주 정부 장관들이 사임했다. 무슬림연맹(Muslim League)은 영국의 전쟁 노력을 지지했고, 라호르 결의안을 통과시켜 무슬림 다수 지역의 독립 국가 구성을 요구했다.[93]

영국 정부는 1942년 크립스 사절단을 파견하여 전쟁 후 독립을 약속하는 대가로 인도 민족주의자들의 협력을 확보하려 했으나, 협상은 결렬되었다.[101] 인도국민회의는 인도 독립운동을 시작했고, 영국은 대규모 시위를 진압했다.[102] 수바스 찬드라 보스는 추축국의 도움을 받아 인도국민군을 조직했으나, 그의 노력은 단명했다.[104]

영국령 인도 제국의 인구는 1881년 2억 5500만 명에서 꾸준히 증가하여 1941년에는 3억 8600만 명을 넘어섰다.[179][180][181][182] 1920년대부터 1945년대까지 사망률은 감소했고, 소득 증가, 생활 수준 향상, 영양 개선, 안전하고 깨끗한 환경, 개선된 보건 정책과 의료 서비스 등이 인구 증가에 기여했다.[184]

영국령 인도의 종교 집단 (1872년~1941년)
종교
집단
1872[186]1881[187]1891[188][189]1901[190]1911[191]1921[192][193]1931[194]1941[195]
인구%인구%인구%인구%인구%인구%인구%인구%
힌두교
1억 3,924만 8,568명73.07%1억 8,868만 5,913명74.32%2억 731만 7,727명72.18%2억 714만 7,026명70.37%2억 1,758만 6,892명69.38%2억 1,673만 4,586명68.56%2억 3,961만 3,929명68.36%2억 5,528만 369명66.03%
이슬람교
4,088만 2,537명21.45%5,012만 1,585명19.74%5,732만 1,164명19.96%6,245만 8,077명21.22%6,664만 7,299명21.25%6,873만 5,233명21.74%7,767만 7,545명22.16%9,205만 8,096명23.80%
불교
283만 2,851명1.49%341만 8,884명1.35%713만 1,361명2.48%947만 6,759명3.22%1,072만 1,453명3.42%1,157만 1,268명3.66%1,278만 6,806명3.65%23만 2,003명0.06%
시크교
117만 4,436명0.62%185만 3,426명0.73%190만 7,833명0.66%219만 5,339명0.75%301만 4,466명0.96%323만 8,803명1.02%433만 5,771명1.24%569만 1,447명1.47%
기독교
89만 6,658명0.47%186만 2,634명0.73%228만 4,380명0.79%292만 3,241명0.99%387만 6,203명1.24%475만 4,064명1.50%629만 6,763명1.80%631만 6,549명1.63%
조로아스터교
6만 9,476명0.04%8만 5,397명0.03%8만 9,904명0.03%9만 4,190명0.03%10만 96명0.03%10만 1,778명0.03%10만 9,752명0.03%11만 4,890명0.03%
유대교
7,626명0.004%1만 2,009명0.005%1만 7,194명0.01%1만 8,228명0.01%2만 980명0.01%2만 1,778명0.01%2만 4,141명0.01%2만 2,480명0.01%
부족 종교657만 92명2.59%928만 467명3.23%858만 4,148명2.92%1,029만 5,168명3.28%977만 4,611명3.09%828만 347명2.36%2,544만 1,489명6.58%
자이나교
122만 1,896명0.48%141만 6,638명0.50%133만 4,148명0.45%124만 8,182명0.40%117만 8,596명0.37%125만 2,105명0.36%144만 9,286명0.37%
기타545만 896명2.86%5만 9,985명0.02%4만 2,763명0.01%12만 9,900명0.04%3만 7,101명0.01%1만 8,004명0.01%15만 2,398명0.04%6만 14명0.002%
총 인구1억 9,056만 3,048명100.00%2억 5,389만 1,821명100.00%2억 8,722만 3,431명100.00%2억 9,436만 1,056명100.00%3억 1,354만 7,840명100.00%3억 1,612만 8,721명100.00%3억 5,052만 9,557명100.00%3억 8,666만 6,623명100.00%


4. 1. 사회 개혁 운동

인도 제국 시대에는 다양한 사회 개혁과 종교 개혁이 전개되었다. 이 시대 인도에서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시장, 정보 시스템, 네트워크가 형성되었고,[289] 민족주의적 감정이 성장했으며, 기존의 카스트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자본가 계층이 등장했다. 또한, 근대 교육의 보급과 서구 사상 및 문화의 소개로 인해 인도의 후진성과 쇠퇴를 의식하게 되었다.[290]

인도 최초의 사회개혁 운동은 브라마 사마지이다. 람 모한 로이(1774년-1833년)의 전통은 데벤드라나트 타고르(1817년-1905년), 케슈브 찬드라 센(1838년-1884년)에게 계승되었다. 브라마 사마지는 힌두교의 악폐를 제거하고 유일신 신앙과 베다, 우파니샤드 철학의 가르침을 뿌리내림으로써 힌두교 개혁에 노력했다.[290]

벵골 지방에서의 힌두교 종교 개혁이 브라마 사마지였다면, 마하라슈트라에서는 1840년에 설립된 신성 협회(바라마한사 만달리)였다. 고팔 하리 데슈무크(1823년-1892년)는 마라티어로 저술하며 합리주의적 입장에서 힌두교 정통주의를 비판했다.[290] 그 후 데슈무크는 기도 협회(프랄르트나 사마지)를 설립하고, 전통적인 카스트 제도와 사제들의 지배로부터 종교를 해방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마하라슈트라에서는 인도 근대사에서 가장 위대한 합리주의 운동가 중 한 명인 고팔 가네시 아가르카르(1856년-1895년)도 활동했으며, 그는 인간 이성의 힘을 신봉하면서 동시에 전통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을 비판했다.[290]

남인도에도 힌두교 종교 개혁이 확산되었다. 그 중심에는 텔루구어 지역의 개혁가 비레사링감의 노력이 있었다.[290]

라마크리슈나(1834년-1886년)와 그의 제자 비베카난다(1863년-1902년)의 등장 또한 기존 힌두교에 의해 폐쇄적이었던 인도 사회에 대한 비판을 전개했다. 비베카난다는 라마크리슈나 미션을 설립하여 학교, 병원, 진료소, 고아원, 도서관 등의 사회 봉사 활동을 전개했다.[290]

이슬람 측의 종교 개혁은 힌두교에 비해 늦었다. 그 시초는 1857년 인도 대반란 이후 시대라고 여겨진다. 1863년 캘커타에 설립된 무하마단 문예협회가 그 첫걸음이다.

인도에서 전개된 이슬람 측 종교 개혁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알리가르파(Aligarh Movement|알리가르 운동영어)의 운동이다. 지도자 사이이드 아흐마드 칸(1817년-1898년)은 "무슬림의 종교와 사회생활은 근대 서구의 과학 지식과 문화를 흡수함으로써만 향상될 수 있다.[291]"고 생각했기 때문에 근대 교육의 증진에 힘썼다. 1875년에는 알리가르 무슬림 대학교(Aligarh Muslim University)가 설립되었다. 이 대학교에서는 후에 북서 변경 주에서 민족 운동을 지도한 칸 압둘 가파르 칸, 제3대 인도 부통령인 자키르 후세인, 파키스탄 건국에서 지도적인 입장이 된 리아카트 알리 칸 등의 지도자가 졸업하였다. 알리가르 대학교는 모든 인도인에게 문호가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에, 힌두교도, 조로아스터교도, 기독교도도 자금 지원을 하였다.[252]

서구적인 근대 운동을 전개한 것이 알리가르파의 운동이라면, 전통으로의 회귀를 진행한 것이 데오반드파(Deobandi Movement)의 운동이다. 1868년 데오반드에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우르두어를 산문의 공식어로 가르치고, 기부를 호소하고, 출판, 연례 행사를 통해 넓은 지역에서 지지자를 획득해 나갔다.[292]

힌두교와 이슬람교뿐만 아니라 파르시교, 시크교, 불교에서도 종교 개혁이 실시되었다. 인도 최대의 파르시교 공동체가 있는 봄베이에서는 다다바이 나오로지(1825년-1917년) 등에 의해 조로아스터교 개혁자 협회(라후나마이 마즈다야스난 사바)가 창설되어, 보수화된 조로아스터교 정통주의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293]

시크교의 종교 개혁은 19세기 말 칼사 칼리지 설립을 시초로 한다. 설립의 중심에는 펀자브 지방의 마하라자였던 자갓짓 싱의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시크교의 종교 개혁이 본격화된 것은 1920년대 아칼리 운동을 기다려야 했다. 아칼리 운동에서 시크교는 부패한 승려들을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293]

불교도가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실론에서는 고대 찬미의 복고주의적 경향과 불교의 위기를 구해야 한다는 종교적 열정이 고조되었다. 그 결과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1864년-1933년)를 중심으로 풀뿌리적인 금주 운동이 전개되었다.[294]

식민지화 이전 인도에서 여성의 지위는 종속적인 것이었다. 이는 힌두교도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힌두교에서는 사티 관습, 아동 결혼, 여성은 남성과 달리 평생 한 번만 결혼할 수 있다는 점, 상속권이 없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슬람교에서도 일부다처제, 여성의 상속권은 남성의 절반에 불과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295] 게다가 여성은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다.[295]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인도에서도 사회 개혁가들이 등장하여 수많은 개혁 협회, 종교 단체들이 여성 교육의 보급, 과부의 재혼 허용을 위한 활동 및 여성들의 생활 조건 개선, 아동 결혼 억제, 일부일처제 실시, 여성의 사회 진출을 추진하게 되었다.[295] 판디타 라마바이처럼 봄베이, 푸나에 과부들을 위한 학습 센터를 설립한 여성도 등장했다.[296]

여성 해방 운동은 20세기가 되면서 독립 운동과 합쳐져 큰 운동이 된다. 독립 운동에 참여한 저명한 여성으로는 사로지니 나이두가 있으며, 그녀는 1925년에 인도국민회의 의장을 역임했다.

영국의 인도 지배는 기존 인도에 남아 있던 카스트 제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그 배경에는 근대 산업과 철도, 버스가 인도 국내에 도입된 것, 그리고 도시화의 진전으로 인해 서로 다른 카스트 간의 접촉을 피하기 어려워진 것이 있다.[297] 또한 전통 산업 이외의 산업이 급성장한 것, 그리고 의사나 군인과 같은 기회를 빼앗기는 것을 상위 카스트가 꺼렸다는 점도 있다.[297]

더 나아가 영국은 "법 앞의 평등"을 식민지 정책으로 추진했고, 교육 제도의 개방이 카스트 제도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배경에서 브라마 사마지, 라마크리슈나 미션과 같은 당시 인도의 개혁가들은 카스트 제도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19세기 후반에 활동한 활동가로는 마하라슈트라의 조티라오 푸레가 있다. 그는 하위 카스트의 해방에는 근대 교육을 보급하는 것이 최고의 무기라고 믿고 운동을 지도했다.[297]

여성 해방 운동과 마찬가지로 카스트에 대한 투쟁은 민족 운동에 합류함으로써 강력한 세력을 갖게 되었다. 빔라오 암베드카르는 인도 독립기에 활동한 정치가로, 그는 전 인도 억압받는 계급 협회 설립에 헌신했다.[297]

4. 2. 종교 개혁 운동

람 모한 로이가 시작한 인도 최초의 사회개혁 운동은 브라마 사마지였다. 이 운동은 힌두교의 악습을 없애고 유일신 신앙과 베다, 우파니샤드 철학을 통해 힌두교 개혁을 추구했다.[290] 데벤드라나트 타고르와 케슈브 찬드라 센이 이 전통을 이어받았다.

마하라슈트라주에서는 1840년 신성 협회(바라마한사 만달리)가 설립되었다. 고팔 하리 데슈무크는 마라티어로 저술하며 힌두교 정통주의를 비판했고,[290] 이후 기도 협회(프랄르트나 사마지)를 설립하여 카스트 제도와 사제 지배로부터 종교를 해방시키려 했다. 마하라슈트라에서는 합리주의 운동가 고팔 가네시 아가르카르도 활동하며 전통에 대한 맹목적 복종을 비판했다.[290] 남인도에서는 텔루구어 지역 개혁가 비레사링감이 힌두교 종교 개혁을 이끌었다.[290]

라마크리슈나와 그의 제자 비베카난다는 기존 힌두교의 폐쇄성을 비판했다. 비베카난다는 라마크리슈나 미션을 설립하여 사회 봉사 활동을 펼쳤다.[290]

이슬람교의 종교 개혁은 1857년 세포이 항쟁 이후 시작되었다. 1863년 캘커타에 설립된 무하마단 문예협회가 그 첫걸음이었다. 알리가르 운동은 사이이드 아흐마드 칸의 주도로 근대 교육 증진에 힘썼고, 1875년 알리가르 무슬림 대학교를 설립했다.[291] 이 대학교는 후에 여러 지도자를 배출했으며, 모든 인도인에게 개방되어 힌두교도, 조로아스터교도, 기독교도도 지원했다.[252]

데오반드파(Deobandi Movement)는 1868년 데오반드에 신학교를 설립하여 전통 회귀를 추구했다. 우르두어를 가르치고 기부를 통해 넓은 지지자를 확보했다.[292]

파르시교, 시크교, 불교에서도 종교 개혁이 일어났다. 봄베이에서는 다다바이 나오로지 등이 조로아스터교 개혁자 협회를 창설하여 조로아스터교 정통주의에 대한 논쟁을 일으켰다.[293]

시크교 종교 개혁은 19세기 말 칼사 칼리지 설립으로 시작되었고, 1920년대 아칼리 운동으로 본격화되어 부패한 승려들을 축출했다.[293]

실론(스리랑카)에서는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를 중심으로 금주 운동 등 풀뿌리 불교 운동이 전개되었다.[294]

4. 3. 교육 제도

1867년 영국인에 의해 설립된 루크나우 대학교


토머스 밥빙턴 맥컬레이(1800~1859)는 휘그 역사관의 관점에서 영국 역사를 자유와 진보로 이어지는 상승적인 발전 과정으로 제시했다. 맥컬레이는 동시에 인도 교육 제도 개혁을 이끈 선도적인 개혁가이기도 했다. 그는 인도가 영국과 함께 꾸준한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영어를 기반으로 한 교육 제도를 구축하고자 했다. 맥컬레이는 버크의 도덕적 통치 강조를 실제 학교 개혁에 적용하여, 영국 제국에 "원주민을 문명화한다"는 심오한 도덕적 사명을 부여했다.

1857년에 설립된 캘커타 대학교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세 곳의 현대 주립 대학교 중 하나이다.


캘커타, 봄베이, 마드라스에 있는 대학교들은 반란 직전인 1857년에 설립되었다. 1890년까지 약 6만 명의 인도인들이 주로 교양 교육이나 법학 분야에 등록했고, 약 3분의 1이 공공 행정에, 또 다른 3분의 1이 변호사가 되었다. 그 결과 매우 교육 수준이 높은 전문적인 국가 관료 조직이 만들어졌다. 1887년 중간 관리급 공무원 2만 1천 명 중 45%는 힌두교도, 7%는 무슬림, 19%는 유라시아인(유럽인 아버지와 인도인 어머니), 29%는 유럽인이었다. 최고 관리급 공무원 1천 명 중 거의 대부분은 영국인, 특히 옥스브리지 출신이었다.[211] 정부는 종종 지역 자선가들과 협력하여 1911년까지 186개의 고등 교육 기관인 대학교와 대학을 설립했고, 이곳에는 3만 6천 명(90% 이상이 남성)의 학생들이 등록했다. 1939년까지 기관 수는 두 배로 증가했고 등록 학생 수는 14만 5천 명에 달했다. 교육 과정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설정한 유형의 고전적인 영국 표준을 따랐으며 영국 문학과 유럽 역사를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까지 학생들은 인도 민족주의의 온상이 되었다.[212]

4. 4. 언어와 문학

무굴 제국의 궁정에서는 페르시아어가 사용되었지만, 제국의 쇠퇴와 함께 각 지역에서 다양한 문학이 꽃을 피웠다. 우르두어, 벵골어, 신드어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남인도에서는 영국 동인도 회사 시대 이후로 타밀 고어를 찾는 움직임이 계속되어 타밀 문학이 형성되어 갔다.

우르두어는 터키어로 "군영"을 의미하는데, 그 이름대로 무굴 제국 궁정 근처 샤자하나바드에서 발달했으며, 아랍어, 페르시아어, 터키어 어휘를 포함한 북인도의 언어이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우르두 문학의 중심지는 델리에서 라호르로 이동했다.[298] 1860년 이후, 펀자브 지방의 출판량이 증가하여 펀자브의 민담과 시크교 관련 서적, 1만 부가 넘는 교과서가 발행되었다.[298] 라호르에 대학 8개교가 설립된 것 또한 라호르를 우르두 문학의 중심지로 발전시키는 요인이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보물 창고』, 여성을 위한 『여성 문화』, 아동을 위한 『꽃』과 같은 문예지, 잡지가 라호르에서 발행되기 시작했다. 우르두 문학이 꽃피는 가운데 등장한 인물들이 바로 후에 파키스탄 건국의 시인 무함마드 이크발과 사아다트 하산 만토, 추그타이, 그람 아바스, 크리샨 찬달 등이었다.[298]

반킴과 타고르


세포이 항쟁(1858년) 이후 벵골에서는 도시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인도의 고전 문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벵골 르네상스), 특히 1860년대부터 1870년대에 푸라나 신화인도의 역사를 소재로 한 장편 서사시가 제작되었다.[299] 벵골에는 영국령 인도의 수도 콜카타가 있었기 때문에, 문학에 나타난 벵골 민족주의와 전 인도 민족주의의 차이는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당시 대표적인 서사시 작가로는 반킴 찬드라 차터지가 있었다. 1880년대 이후 독립까지 벵골 문학의 주류는 서사시에서 서정시로 옮겨갔다. 이 시대의 시인 중에서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카지 나즈룰 이슬람은 벵골어권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다.[300] 타고르는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여 세계적으로 높은 인지도를 얻게 되었다.[301] 타고르의 노래(로빈드로 샹기트)와 나줄룰의 노래(나즈룰 기티)는 21세기 현재에도 벵골의 양대 가요이다.

1843년에 영국령에 편입된 신드 지방 또한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신디 문학의 황금기를 맞이한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신드어는 정해진 문자 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근대 언어로서의 발달은 영국령에 편입된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302]

영국은 신드 지방에서도 영어 교육을 철저히 하려 했지만, 현지 주민의 큰 저항에 부딪혀 영국인들이 신드어를 공부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 때문에 영국인에 의한 신드어 연구가 진행되어 1853년에는 아랍 문자를 채택한 표기법이 확립되었다.[302]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 지배를 확립하기 위해 현지 언어 연구를 수행했다. 초대 벵골 총독인 워렌 헤이스팅스 이래로 이어진 연구 전통과 선교사들에 의한 기독교 전파는 결과적으로 현지 인도인들에게 고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303] 그 결과, 1842년에는 최초의 타밀어 고전이 출판되었다.[303]

그러한 전통이 계승되면서 타밀어가 인도유럽어족과 다른 어족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오는 동시에, 타밀인 비브라만에 의한 상급 카스트에 대한 투쟁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또한, 타밀어 소설을 쓰는 소설가들도 등장하게 되었다.

힌디어를 중심으로 하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북인도, 또는 드라비다어족에 속하는 남인도와 달리, 현재의 안드라프라데시주는 두 문화의 영향을 모두 받아왔다.[304]

5. 경제

19세기 후반, 인도 경제는 세계 경제에 완전히 통합되었다. 주요 생산품은 면화, 인디고, 황마, 쌀, 유채종자, 차와 같은 1차 산품이었고, 이들 수출 작물의 국제 가격은 크게 변동했다. 인도 경제는 수출용 농산물 생산에 크게 의존했고, 산업화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상품 작물 생산을 위해 식량으로 소비하는 곡물은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285] 곡물 생산 증가는 인더스 강 관개가 성공한 펀자브 지방에서 나타났다. 펀자브 지방에서는 밀, 사탕수수, 옥수수 생산이 증가하여 해외뿐만 아니라 국내에도 공급하게 되었다.[285]

빅토리아 터미너스 역(뭄바이)


영국 동인도 회사 시대부터 계속된 철도 건설은 인도 내에서 꾸준히 진행되었다. 19세기 말 인도의 철도 총 연장은 세계 5위였으며, 상품 작물 생산지와 수출항을 연결했다. 1887년에 건설된 빅토리아 터미너스 역(현 차트라파티 시바지 마하라지 역)은 런던, 멜버른의 빅토리아 역과 유사한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당시 인도가 대영 제국의 중심이었음을 보여준다.[285]

인도의 철도망 정비는 산업화의 매개체 역할도 했다. 조로아스터교도(파르시)였던 잠셰트지 타타는 1877년 나그푸르에 방적 공장을 설립하고, 이후 뭄바이와 아마다바드에도 방적 공장을 세웠다.[285] 1907년에는 비하르에 타타 스틸을 설립하여[285] 현재 타타 그룹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와 유사하게 라자스탄주 마르와르에서 상업 활동을 하던 비르라 가문도 제1차 세계 대전 중 섬유 및 철강 산업에 진출하여 성공을 거두었다.[285]

영국령 인도 제국은 "영국 국왕의 왕관에 박힌 가장 큰 보석"으로 불리기도 했다. 1900년, 커존 제독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인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우리는 인도를 제외한 모든 식민지를 잃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도를 잃는다면 우리의 태양은 질 것이다.[287]"

5. 1. 식민지 경제 정책

1880년까지 인도에는 새로운 중산층이 등장하여 전국에 걸쳐 얇게 퍼져 있었다. 이들은 교육에서의 성공과 인도 행정부 고용과 같은 교육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1885년 12월 28일, 중산층 출신의 전문가와 지식인들이 봄베이에 모여 인도 국민회의를 창립하였다. 70명의 회원들은 웜메시 찬더 보네르지를 초대 의장으로 선출했다.

초창기 20년 동안 의회는 주로 인도에 대한 영국의 정책을 논의했다. 그 논의는 인도의 부를 고갈시킨 책임이 영국에 있다는 새로운 인도의 관점을 만들어냈다. 민족주의자들은 영국이 불공정한 무역, 인도 토착 산업의 억제, 그리고 인도 세금을 사용하여 인도의 영국 공무원들에게 높은 봉급을 지불함으로써 이러한 일을 했다고 주장했다.[48]

토마스 배링은 1872년부터 1876년까지 인도 총독으로 재직하며 대규모 기근 구호를 시작하고 세금을 인하했으며, 기근과 광범위한 사회 불안을 줄이기 위해 관료적 장애물을 극복했다.[49]

19세기 후반, 영국 왕실의 인도 직접 통치와 산업혁명이 가져온 기술적 변화는 인도와 영국의 경제를 밀접하게 얽어놓았다.[170] 인도에는 철도, 도로, 운하, 다리가 급속히 건설되었고, 전신 연결망도 마찬가지로 빠르게 구축되어 인도 내륙의 원자재(예: 면화)를 봄베이(Bombay)와 같은 항구로 더 효율적으로 수송하여 영국으로 수출할 수 있었다.[171] 마찬가지로 영국의 완제품도 마찬가지로 효율적으로 인도의 급성장하는 시장에 판매되었다. 영국산 면직물 수입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인도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173]

인도의 세금은 식민지 시대 대부분의 인구에 대해 감소했는데, 무굴 제국 시대에는 토지세 수입이 인도 국민소득의 15%를 차지했던 것에 비해 식민지 말기에는 1%였다. 인도의 1인당 GDP는 1700년 550달러(1990년 국제달러)에서 1857년 520달러로 감소했지만, 1947년에는 618달러로 증가했다.[175]

역사가들은 영국 통치의 장기적인 목표가 인도의 경제 발전을 가속화하려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왜곡하고 지연시키려는 것이었는지에 대해 계속 논쟁하고 있다. 인도 역사가 라자트 칸타 레이(Rajat Kanta Ray)는 18세기에 영국이 가져온 새로운 경제는 일종의 "약탈"이며 무굴 제국의 전통 경제에 대한 재앙이었다고 말한다.[228] 레이는 영국이 식량과 자금을 고갈시키고 높은 세금을 부과하여 벵골 인구의 3분의 1을 사망에 이르게 한 끔찍한 1770년 벵골 기근을 야기하는 데 기여했다고 비난한다.[176]

P. J. 마셜은 영국이 인도 은행가들과 파트너십을 맺고 지역 세금 관리자들을 통해 세수를 확보하고 이전 무굴 제국의 세율을 유지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인도 농민의 생산량 3분의 1을 가져가는 엄청난 세금 제도를 상속받았다.[228]

영국 동인도회사 시대부터 이어져 온 철도 건설은 인도 국내에서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19세기 말 인도의 철도 총 연장 거리는 세계 5위였으며, 상품 작물 생산지와 수출항을 연결했다. 1887년에 건설된 빅토리아 터미너스 역(현 명칭 차트라파티 시바지 마할 역)이 런던, 멜버른의 빅토리아 역과 유사한 건축 양식으로 건설된 것은 당시 인도가 영국 제국의 중심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285]

당시 인도 경제는 영국 동인도회사 시대부터 계속해서 “부의 유출”에 직면해 있었다. 인도 정부는 매년 영국 본국에 막대한 경비를 지불하고 있었고, 인도에서 생산된 부가 인도에 재투자되는 환경은 아니었다. 영국은 항상 인도에 대해 수출 초과 상태를 만들어 그 무역 흑자로 인도 이외의 무역에서 발생한 적자를 메꾸는 형태를 취했다.[285]

19세기 후반, 인도 경제는 세계 경제의 한 축으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하지만 주요 생산품은 면화, 인디고, 황마, 쌀, 유채종자, 차 등 1차 산품이 많았고, 이들 수출 작물의 국제 가격 변동은 컸다. 인도 경제는 수출품을 생산하는 농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고, 산업화는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또한 상품 작물 생산을 위해 그들이 먹는 곡물은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285]

더불어 인도의 철도망 정비는 서서히나마 산업화의 매개가 되었다. 조로아스터교도(파르시)였던 잠셰트지 타타는 1877년 나그푸르에 방적 공장을 건설하고, 이후 뭄바이와 아마다바드에도 방적 공장을 건설했다.[285] 또한 1907년에는 비하르에 타타 스틸을 창업[285]하여 현재의 타타 그룹의 원형이 이 시대에 형성되었다.

5. 2. 기근과 빈곤

영국 라지 시대 동안 인도는 역사상 최악의 기근 중 일부를 경험했다. 여기에는 610만 명에서 1,039만 명이 사망한 1876-1878년 대기근[196]과 125만 명에서 1,000만 명이 사망한 1899년-1900년 인도 기근[197]이 포함된다. 마이크 데이비스와 아마르티아 센의 연구를 포함한 최근 연구[198]는 인도의 기근이 영국의 인도 정책으로 인해 더욱 심각해졌다고 주장한다.

영국령 인도 제국 시대 농업 생산력은 현저히 저하되었다. 그 배경에는 영국의 경제적 착취뿐만 아니라, 기존 산업의 쇠퇴와 이를 대체할 산업의 미발전, 농업 침체를 초래한 농촌 구조, 농민에 대한 다양한 계층의 착취 등이 있다. 이러한 착취 구조로 인해 농민 계층이 농산물을 획득할 수단이 없었던 것이 기근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지역 단위에서 발생한 기근으로는 1866년 오리사 기근, 1869년 라지푸타나 기근, 1873년 비하르 기근이 대표적이며, 전국적인 기근으로는 세 차례의 인도 대기근(1876-1878년 대기근, 1896-1897년 인도 기근, 1899년-1900년 인도 기근)이 있다. 1854년부터 1901년 사이 인도 국내 사망자 수는 2,882만 5,000명에 이른다는 추산[286]이 있으며, 제2차 세계 대전1943년 벵골 기근에서는 3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1943년 벵골 기근 당시 굶어 죽은 아이


마이크 데이비스는 영국령 인도의 경제 활동 상당 부분이 영국 경제에 도움이 되었고, 억압적인 영국 제국주의 정책을 통해 끊임없이 수행되어 인도 인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썼다. 이는 인도의 영국으로의 대량 밀 수출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1870년대 후반에 600만 명에서 1,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기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수출은 억제되지 않았다. 자유방임 경제에 전념한 식민 정부는 이러한 수출에 개입하거나 구호를 제공하기를 거부했다.[151]

5. 3. 철도와 관개 시설

1871년 인도 철도망. 캘커타, 봄베이, 마드라스와 같은 주요 도시들과 델리가 연결되어 있음


1909년 인도 철도망. 당시 세계 4위 규모의 철도망이었음


1888년 완공된 빅토리아 터미너스(봄베이)의 입체 사진. 관광 사진 캡션에 "세계에서 가장 웅장한 기차역"이라고 적혀 있음


19세기 후반 영국령 인도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현대식 철도 시스템을 건설했다.[156] 초기에는 철도가 민간 소유 및 운영되었으며, 영국 관리, 기술자 및 장인들이 운영했다. 처음에는 비숙련 노동자만이 인도인이었다.[156]

영국 동인도 회사(이후 식민 정부)는 초기 운영 기간 동안 최대 5%의 연간 수익을 보장하고 토지를 제공하는 계획에 따라 민간 투자자의 지원을 받는 새로운 철도 회사를 장려했다. 회사들은 99년 임대 조건으로 노선을 건설 및 운영해야 했고, 정부는 이보다 일찍 매입할 수 있는 옵션을 가지고 있었다.[157] 1853~54년에 그레이트 인디언 페닌슐라 철도(GIPR)와 동인도 철도 회사(EIR)가 봄베이캘커타 근처에서 노선 건설 및 운영을 시작했다. 북인도 최초의 여객 철도 노선인 알라하바드와 칸푸르 간 노선은 1859년에 개통되었다. 결국 다섯 개의 영국 회사가 인도의 모든 철도 사업을 소유하게 되었고,[158] 이윤 극대화 계획에 따라 운영되었다. 또한 이들 회사에 대한 정부 규제는 없었다.[158]

1854년, 총독 달후지 경은 인도의 주요 지역을 연결하는 간선망을 건설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정부 보장에 힘입어 투자가 늘어나고 일련의 새로운 철도 회사가 설립되면서 인도의 철도 시스템이 급속도로 확장되었다.[159] 곧 여러 대공국들이 자체 철도 시스템을 건설했고, 그 네트워크는 오늘날의 아삼 주, 라자스탄 주, 안드라프라데시 주가 된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이 네트워크의 노선 길이는 1860년부터 1890년 사이에 1349km에서 25495km로 증가했는데, 대부분 봄베이, 마드라스, 캘커타의 세 주요 항구 도시에서 내륙으로 뻗어나갔다.[160]

1857년 세포이 항쟁과 그 후 인도에 대한 영국 왕실의 통치 이후, 철도는 유럽인 주민의 전략적 방어 수단으로 여겨졌으며, 군대가 토착민의 불안을 진압하고 영국인을 보호하기 위해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했다.[161] 따라서 철도는 제국 프로젝트를 위한 필수적인 전략적, 방어적, 정복적, 행정적 '도구'로서 식민 정부가 인도를 통제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162]

대부분의 철도 건설은 영국 기술자의 감독하에 인도 회사가 수행했다.[163] 광궤, 견고한 선로 및 강철 다리를 사용하여 시스템이 대규모로 건설되었다. 1900년까지 인도는 광궤, 미터궤 및 협궤 네트워크에서 다양한 소유 및 관리 체계를 갖춘 광범위한 철도 서비스를 갖추게 되었다. 1900년 정부는 GIPR 네트워크를 인수했지만 회사는 계속해서 관리했다.[163]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군대와 곡물을 봄베이카라치 항구로 운송하여 영국, 메소포타미아동아프리카로 보냈다. 영국에서 장비와 부품의 선적이 줄어들면서 유지 보수가 훨씬 더 어려워졌다. 중요한 근로자들이 군대에 입대했고, 작업장은 탄약 생산으로 전환되었으며, 일부 노선 전체의 기관차, 차량 및 선로가 중동으로 운송되었다. 철도는 증가하는 수요를 거의 감당할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철도는 유지 보수 부족으로 악화되었고 수익성이 없었다. 1923년 GIPR과 EIR 모두 국유화되었다.[164][165]

1930년대까지 라지 철도와 민간 회사 모두 유럽인 감독, 토목 기술자, 심지어 기관차 기관사와 같은 운영 인력만 고용했다. 힘든 육체 노동은 인도인에게 맡겨졌다. 식민 정부는 주로 유럽 노동자의 복지에 관심이 있었고, 인도인의 사망은 "무시되거나 단순히 냉담한 통계 수치로 언급되었습니다."[166] 정부의 물품 정책에 따라 철도 계약 입찰은 런던의 인도 사무소에 제출해야 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인도 기업은 배제되었다.[165] 철도 회사는 대부분의 하드웨어와 부품을 영국에서 구입했다. 인도에는 철도 정비 공장이 있었지만 기관차를 제조하거나 수리할 수 있는 권한은 거의 없었다.

1947년 독립 후, 이전 인도 공국의 소유였던 32개 노선을 포함한 42개의 별도 철도 시스템이 통합되어 ''인도 철도''라는 단일 국유 단위를 형성했다.

영국 라지 시대에는 운하와 관개 시스템을 포함한 인프라에 많은 투자가 이루어졌다.[168] 갠지스 운하는 하리드와르에서 칸푸르까지 약 563.27km에 달했으며,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배수로를 공급했다. 1900년까지 라지는 세계 최대의 관개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 성공적인 사례 중 하나는 아삼 주로, 1840년에는 정글이었지만 1900년에는 특히 차밭을 중심으로 4000000acre가 경작되었다. 총 관개 면적은 8배 증가했다. 역사가 데이비드 길모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169]

영국 동인도회사 시대부터 이어져 온 철도 건설은 인도 국내에서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19세기 말 인도의 철도 총 연장 거리는 세계 5위였으며, 상품 작물 생산지와 수출항을 연결했다. 1887년에 건설된 빅토리아 터미너스 역(현 명칭 차트라파티 시바지 마하라지 역)이 런던, 멜버른의 빅토리아 역과 유사한 건축 양식으로 건설된 것은 당시 인도가 영국 제국의 중심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285]

6. 국제 관계

인도 제국은 영국의 식민지로서 주변국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었다.

미얀마는 1937년까지 인도 제국의 일부였다가 이후 영국 직할 식민지가 되었다. 스리랑카는 1802년 영국에 할양되었지만, 인도 제국에 포함되지는 않았다. 네팔부탄은 영국과 전쟁을 치른 후 조약을 맺고 독립국으로 인정받았다. 시킴 왕국은 1861년 영국과의 조약으로 공국이 되었으나, 주권 문제는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았다. 몰디브는 1887년부터 1965년까지 영국의 보호령이었지만, 인도 제국의 일부는 아니었다.

국가인도 제국과의 관계
미얀마1937년까지 인도 제국의 일부, 이후 영국 직할 식민지
스리랑카1802년 영국에 할양, 인도 제국의 일부가 아님
네팔, 부탄영국과 조약 후 독립국으로 인정
시킴 왕국1861년 조약으로 공국이 됨 (주권 문제 불분명)
몰디브1887년~1965년 영국의 보호령, 인도 제국의 일부가 아님


6. 1. 영국 제국의 일부로서의 인도

무굴 제국 말기인 1857년에 세포이 항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영국은 세포이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뒤, 회사령 인도에서 행정부를 인계받았다. 1858년 영국 동인도 회사의 통치가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으로 영국 왕실에 이양되면서 영국령 인도 제국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그 이후 인도를 발판으로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일부 지방과 미얀마를 인도 제국에 합병했다.

그러나 영국식 고등교육을 받았으나 출세의 길이 막힌 식민지 엘리트 가운데서 반영 감정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를 위시한 인도 국민 회의파가 등장하면서 반영 투쟁이 시작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1917년 인도장관 에드윈 몬태규는 행정에서 인도인의 참여를 늘리고 자치 기관의 점진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영국의 목표라고 천명했다.

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영국은 인도 내에 테러나 스파이 활동이 발생할 경우 체포영장 발부 등의 적법한 절차없이 곧바로 체포할 수 있는 롤랫법을 제정하여 인도펀자브 지방에서 운동가들을 억압하였다. 이에 인도 민족지도자인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는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주도하여 반영운동을 또다시 전개했고, 롤랫법 폐지와 완전 자치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억압법 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롤랫법은 폐지되었다.[310]

1935년에는 '신인도통치법'을 제정하여 인도 제국에 직접선거권과 자치권을 주었으나 군사권과 외교권은 인도 총독에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인도 내에 독립운동가들의 완전독립을 목표로 하는 반영운동은 계속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영국은 독립을 명목으로 지원을 인도에 요구했으나 간디는 이를 거절하였다. 1947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인도 자치령, 파키스탄 (현 방글라데시인 옛 동파키스탄 지방도 포함)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인도 제국은 해체되었다.

영국의 라지(Raj)는 고아(Goa)와 퐁디셰리(Pondicherry)와 같이 다른 유럽 국가들이 소유한 작은 지역을 제외하고는 현재의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미얀마 전역으로 확장되었다.[18] 이 지역은 히말라야 산맥, 비옥한 충적평야, 인도-갠지스 평원(Indo-Gangetic Plain), 긴 해안선, 열대 건조림, 건조한 고지대, 타르 사막(Thar Desert) 등 매우 다양한 지형을 포함하고 있다.[19] 또한, 여러 시기에 아덴(Aden)(1858년부터 1937년까지),[20] 하부 버마(Lower Burma)(1858년부터 1937년까지), 상부 버마(Upper Burma)(1886년부터 1937년까지), 영국 소말릴란드(British Somaliland)(1884년부터 1898년까지 잠시), 해협 식민지(Straits Settlements)(1858년부터 1867년까지 잠시)를 포함하였다. 버마는 1937년부터 1948년 독립할 때까지 인도와 분리되어 영국 왕실의 직할 통치를 받았다. 페르시아 만(Persian Gulf)의 트루셜 주(Trucial States)와 페르시아 만 거주지(Persian Gulf Residency)의 다른 주들은 이론적으로 1947년까지 영국 인도의 주(presidencies and provinces of British India)이자 공국이었으며 루피(rupee)를 통화 단위로 사용하였다.[21]

이 지역의 다른 국가들 중, 당시 해안 지역과 섬의 북부 지역을 가리켰던(현재 스리랑카) 영국령 실론(British Ceylon|Ceylon)은 1802년 아미앵 조약(Treaty of Amiens)에 따라 영국에 할양되었다. 이 해안 지역은 1793년부터 1798년까지 잠시 마드라스 주(Madras Presidency)의 관할하에 있었지만,[22] 이후에는 영국 총독이 런던(London)에 보고했으며, 라지(Raj)의 일부가 아니었다. 영국과 전쟁을 치른 네팔부탄은 이후 영국과 조약을 체결하고 영국으로부터 독립국으로 인정받았다.[23][24] 시킴 왕국은 1861년 영국-시킴 조약(Anglo-Sikkimese Treaty) 이후 공국으로 설립되었지만, 주권 문제는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았다.[25] 몰디브는 1887년부터 1965년까지 영국의 보호령(protectorate)이었지만, 영국 인도의 일부는 아니었다.[26]

6. 2. 주변국과의 관계

무굴 제국이 쇠퇴하던 1857년, 세포이 항쟁이 일어났지만 영국은 이를 진압하고 영국 동인도 회사로부터 행정권을 넘겨받았다. 1858년,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으로 영국 왕실이 통치권을 이양받아 인도 제국이 성립되었다. 이후 영국은 아프가니스탄 왕국 일부와 미얀마를 인도 제국에 병합했다.

영국식 교육을 받은 인도 엘리트들 사이에서 반영 감정이 커지면서,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를 중심으로 인도 국민 회의가 반영 투쟁을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7년, 영국은 인도인의 행정 참여 확대를 약속했지만, 전쟁 후 롤랫법을 제정하여 펀자브 지방의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다. 간디는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통해 롤랫법 폐지와 완전 자치를 요구했고, 결국 롤랫법은 폐지되었다.[310]

1935년 '신인도통치법'으로 인도에 선거권과 자치권이 부여되었지만, 군사권과 외교권은 여전히 인도 총독에게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은 인도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간디는 거절했다. 1947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인도 자치령파키스탄(방글라데시 포함)이 독립하면서 인도 제국은 해체되었다.

영국령 인도 제국은 현재의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미얀마를 포함했고, 여러 시기에 아덴, 하부 버마, 상부 버마, 영국령 소말릴란드, 해협 식민지를 포함했다.[20][21] 버마는 1937년 인도에서 분리되어 1948년 독립할 때까지 영국 왕실 직할 통치를 받았다.[21]

당시 스리랑카를 가리키던 영국령 실론은 1802년 영국에 할양되었으나, 인도 제국의 일부는 아니었다.[22] 네팔부탄은 영국과 전쟁 후 조약을 맺고 독립국으로 인정받았다.[23][24] 시킴 왕국은 1861년 조약으로 공국이 되었으나 주권 문제는 불분명했다.[25] 몰디브는 1887년부터 1965년까지 영국의 보호령이었지만, 인도 제국의 일부는 아니었다.[26]

국가인도 제국과의 관계
미얀마1937년까지 인도 제국의 일부, 이후 영국 직할 식민지
스리랑카1802년 영국에 할양, 인도 제국의 일부가 아님
네팔, 부탄영국과 조약 후 독립국으로 인정
시킴 왕국1861년 조약으로 공국이 됨 (주권 문제 불분명)
몰디브1887년~1965년 영국의 보호령, 인도 제국의 일부가 아님


7. 평가와 유산

영국령 인도 제국, 즉 라지(Raj)는 현재의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미얀마를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며 다양한 평가와 유산을 남겼다.

인도 제국은 19세기 후반,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영국과 경제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철도, 도로, 운하, 전신 등의 인프라가 빠르게 구축되어 면화와 같은 원자재를 영국으로 수출하고, 영국의 완제품을 인도 시장에 판매하는 효율적인 시스템이 마련되었다.[171] 잠셋지 타타와 같은 인도 기업가들은 타타 철강을 설립하는 등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153]

그러나 영국의 통치는 인도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도 미쳤다. 농업 생산력은 저하되었고, 이는 영국의 경제적 착취, 기존 산업 쇠퇴, 농촌 구조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286] 이로 인해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여러 차례의 대기근이 발생하여 수많은 인도인들이 희생되었다.

세포이 항쟁 이후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폐지하고 인도를 직접 통치하면서 무굴 제국은 멸망했다. 영국은 사티와 같은 악습을 폐지하거나 억제하는 등 사회 개혁을 추진하기도 했다.[295] 그러나 영국의 통치는 인도 내 반영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를 중심으로 한 인도 국민 회의는 롤랫법 폐지와 완전 자치를 요구하며 비폭력 저항 운동을 전개했다.

1935년 '신인도통치법'으로 인도에 제한적인 자치권이 주어졌지만, 독립운동가들은 완전 독립을 위한 투쟁을 계속했다.

인도 제국은 독립 이후에도 인도에 많은 유산을 남겼다. 의회 정부, 1인 1표제, 법치주의와 같은 정치 제도와 행정 시스템, 대학교, 증권거래소 등은 영국 통치 시대의 제도적 장치를 유지한 것이다.[228] 또한 영어는 행정 및 공용어로 자리 잡았고, 건축 양식과 크리켓을 포함한 스포츠 등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영국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234]

7. 1. 긍정적 측면

영국 왕실의 인도 직접 통치와 산업혁명이 가져온 기술적 변화는 19세기 후반, 인도와 영국의 경제를 밀접하게 얽어놓았다.[170] 인도에는 철도, 도로, 운하, 다리가 급속히 건설되었고, 전신 연결망도 빠르게 구축되어 면화와 같은 원자재를 봄베이(Bombay)와 같은 항구로 효율적으로 수송하여 영국으로 수출할 수 있게 되었다.[171] 영국의 완제품도 인도의 시장에 효율적으로 판매되었다.[171]

인도에서는 농업, 제조업, 서비스업 등 경제의 세 부문 모두 식민지 이후 가속화되었다. 농업 부문에서는 1870년대에 생산량이 크게 증가했다. 고수확 품종 종자, 화학 비료, 집중적인 물 사용을 통한 생산성 중심 성장을 통해 토지 잉여를 활용했다.[147] 광범위한 관개 시스템이 건설되어 수출용 상품 작물과 인도 산업(황마, 면화, 사탕수수, 커피, 차)의 원자재 생산을 촉진했다.[148]

잠셋지 타타(Jamsetji Tata)는 1877년 봄베이에 중앙 인도 방적, 직조 및 제조 회사(Central India Spinning, Weaving, and Manufacturing Company)를 설립하며 산업계에 진출했다. 그는 이집트에서 고가의 장섬유(longer-stapled cotton)를 수입하고 미국에서 더 복잡한 링 스핀들 기계(ring-spindle machinery)를 구입하여 고급 원사를 생산, 영국 수입품과 경쟁했다.[153] 1890년대에는 중공업에도 진출, 타타 철강(Tata Steel, TISCO)은 그의 아들 도랍지 타타(Dorabji Tata)의 주도로 1908년 비하르(Bihar)주 잠셰드푸르(Jamshedpur)에 미국 기술을 사용하여 공장을 건설했다.[153] TISCO는 인도 최고의 철강 생산 업체가 되었으며, "인도의 기술적 숙련, 경영 능력 및 기업가 정신의 상징"이 되었다.[153]

무굴 제국 시대에는 토지세 수입이 인도 국민소득의 15%를 차지했던 것에 비해 식민지 말기에는 1%로 감소했다.[175] 마을 경제의 국민소득 비율은 무굴 제국 시대 44%에서 식민지 말기 54%로 증가했다. 인도의 1인당 GDP는 1700년 550USD에서 1857년 520USD로 감소했지만, 1947년에는 618USD로 증가했다.[175]

7. 2. 부정적 측면

무굴 제국 말기인 1857년 세포이 항쟁이 일어났으나, 영국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회사령 인도의 행정부를 인계받았다. 1858년 영국 동인도 회사의 통치가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으로 영국 왕실에 이양되면서 영국령 인도 제국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310] 그러나 영국식 고등교육을 받았으나 출세의 길이 막힌 식민지 엘리트 가운데서 반영 감정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를 위시한 인도 국민 회의파가 등장하면서 반영 투쟁이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영국은 인도 내 테러나 스파이 활동 발생 시 체포영장 발부 등의 적법 절차 없이 곧바로 체포할 수 있는 롤랫법을 제정하여 펀자브 지방에서 운동가들을 억압하였다. 이에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는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주도하여 반영운동을 전개했고, 롤랫법 폐지와 완전 자치를 요구하였다. 억압법 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롤랫법은 폐지되었다.[310]

1935년 '신인도통치법'이 제정되어 인도 제국에 직접선거권과 자치권이 주어졌으나, 군사권과 외교권은 인도 총독에게 남아있어 독립운동가들의 완전독립을 위한 반영운동은 계속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영국은 독립을 명목으로 인도에 지원을 요구했으나 간디는 이를 거절하였다.

영국령 인도 제국 시대, 농업 생산력은 현저히 저하되었다. 이는 영국의 경제적 착취, 기존 산업 쇠퇴와 대체 산업 미발전, 농촌 구조 문제, 농민에 대한 다양한 계층의 착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러한 착취 구조는 농민들이 농산물을 획득할 수단을 없애 기근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대표적인 기근으로는 1866년 오리사 기근, 1869년 라지푸타나 기근, 1873년 비하르 기근, 그리고 세 차례의 인도 대기근(1876-78년, 1896-1897년, 1899-1900년)이 있다. 1854년부터 1901년 사이 인도 국내 사망자 수는 2,882만 5,000명에 이른다는 추산[286]이 있으며, 제2차 세계 대전1943년 벵골 기근에서는 3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7. 3. 유산

무굴 제국 말기인 1857년에 세포이 항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영국은 세포이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뒤, 회사령 인도에서 행정부를 인계받았다. 1858년 영국 동인도 회사의 통치가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으로 영국 왕실에 이양되면서 영국령 인도 제국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세포이 항쟁 진압 이후, 1858년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폐지하고 인도 전역(포르투갈령 인도 제외)을 직접 통치하면서 무굴 제국은 멸망했다. 이에 따라 인도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이 강해지자, 인도 내부에서 서구식 교육을 받아들인 지식인들이 나타나 인도 사회를 개혁하고 영국의 지배에 저항하였다. 특히, 19세기 후반 콜카타를 중심으로 전개된 새로운 종교 운동, 문예 부흥 운동, 정치 운동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인도의 영국 식민 정부는 사티 등 악습을 폐지하거나 억제하였다.

독립 이후에도 인도는 의회 정부, 1인 1표, 그리고 당파적이지 않은 법원을 통한 법치주의와 같이 중앙 영국 제도를 유지해왔다.[228] 또한, 행정 서비스, 하위 행정 구역 관리, 대학교, 증권거래소와 같은 영국 통치 시대의 제도적 장치들도 유지했다. 주요 변화 중 하나는 이전의 별개의 토후국들을 거부한 것이었다.

영국의 인도 식민 지배는 남아시아 문화에 눈에 띄는 영향을 미쳤다. 가장 두드러진 영향은 행정 및 공용어로 자리 잡은 영어이며, 파키스탄을 포함한 인도에서 사용되었고(남아시아의 토착 언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234] 토착 건축 양식과 고딕/사르세닉 양식이 혼합된 건축 양식이 그 뒤를 이었다. 마찬가지로 남아시아 언어와 문화의 영향은 영국에서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많은 인도 단어가 영어로 유입되었고,[235] 남아시아 요리도 받아들여졌다.[236]

영국 스포츠(초기에는 특히 하키였지만 최근 수십 년 동안 크리켓으로 대체되었고, 특정 지역에서는 축구도 인기가 있었다)[237][238]는 영국 통치 시대에 남아시아 문화의 일부로 자리 잡았으며, 지역 게임은 인기 면에서 밀렸지만 영국의 영향으로 표준화되었다.[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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