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마라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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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라마라 왕조는 9세기부터 14세기 초까지 현재의 인도 중부에 해당하는 말와 지역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라지푸트 왕조이다. 그들의 기원은 여러 설이 존재하며, 라슈트라쿠타 왕조의 후손, 아그니쿨라 전설에 따른 불에서 태어난 씨족, 브라만 계통 등 다양한 주장이 제기된다. 시야카 2세는 파라마라 왕조의 첫 번째 독립 군주로, 라슈트라쿠타의 봉신에서 벗어나 세력을 확장했다. 11세기에는 보자 왕이 통치하며 영토를 확장하고 예술, 문학, 과학을 후원하여 왕조의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후 잦은 외침과 내분으로 쇠퇴하여 1305년 델리 술탄국에 의해 멸망했다. 파라마라 왕조는 여러 분파를 두었으며, 일부 번왕국 통치자들도 파라마라 왕조의 후손임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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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마라 왕조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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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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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명칭 | 파라마라 |
통칭 | 파라마라 왕조 |
시대 | 인도 고전 시대 |
정치 체제 | 군주제 |
통치자 칭호 | 마하라자디라자(황제) |
초대 통치자 | 시야카 |
초대 통치자 재위 기간 | 948년–972년 CE |
마지막 통치자 | 마할라카데바 |
마지막 통치자 재위 기간 | 13세기 후반 – 1305년 11월 24일 |
재상 칭호 | 프라단 (총리) |
초대 재상 | 비슈누 |
초대 재상 재위 기간 | 948년–?? CE |
마지막 재상 | 고가 데바 |
마지막 재상 재위 기간 | 1275년–1305년 CE |
시작 | 기원후 9세기 또는 10세기 |
종료 | 1305년 CE |
위치 | 인도 |
수도 | 다르 만두 |
일반 언어 | 산스크리트어 |
종교 | 시바파 |
역사 | |
이전 | 라슈트라쿠타 왕조 |
이후 | 구르 왕조 |
이전 | 구르자라-프라티하라 왕조 |
이전 | 트리푸리의 칼라추리스 |
이후 | 델리 술탄국 |
건국 시기 | 9세기 초 |
멸망 시기 | 14세기 초 |
변천사 | 영토 획득 (9세기 초) |
멸망 | 1305년 |
민족 및 분파 | |
민족 | 말와인 |
분가 | 우자이니야 소다 가문 간다바리야 님발카르 가문 우마트 가문 |
같이 보기 | |
국가 | 말와 왕국 아마르코트 왕국 팔탄국 찬드라바티 왕국 티리 가르왈국 바갈국 단타국 물리국 라즈가르국 나라싱가가르국 차타푸르국 다르국 바가드 번국 키라타쿠파 번국 잘로르 번국 두라온 라즈 솜바르사 라즈 |
작위 | 말와 마하라자디라자 말와 마하라자 가르왈 마하라자 데와스 마하라자 다르 마하라자 바갈 라나 단타 라자 라즈가르 라자 나라싱가가르 라자 물리 타코르 사헤브 |
2. 기원
파라마라 왕조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존재한다.
- 라슈트라쿠타 기원설: 949년에 제작된 하르솔라 동판은 파라마라 왕 시야카 2세가 발행한 것으로, "아칼라바르샤"라는 왕을 언급하고 "tasmin kule"("그 가문에서")라는 표현과 함께 "바파이라자"(파라마라 왕 박파티 1세와 동일시됨)라는 이름을 언급한다.[4] 역사학자 D.C. 갱굴리는 "아칼라바르샤"(라슈트라쿠타 칭호)를 라슈트라쿠타 왕 크리슈나 3세와 동일시하여 파라마라 왕조가 라슈트라쿠타 왕조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4] 갱굴리는 아이니 아크바리에서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내용을 찾으려 했는데, 이 책은 아그니쿨라 신화를 변형하여 파라마라의 선조가 데칸 고원에서 말와로 왔다고 주장한다. 또한 갱굴리는 시야카의 후계자인 문자(바크파티 2세)가 아모가바르샤, 스리-발라바, 프리티비-발라바와 같은 라슈트라쿠타의 칭호를 사용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러나 하르솔라 동판 비문에는 "tasmin kule"이라는 단어 앞에 간격이 있어, 갱굴리의 주장은 구체적인 증거가 없는 추측일 뿐이다. 게다가 '아이니 아크바리'의 내용이 역사적으로 정확하다고 해도, 아디티아 폰와르는 단지의 후손이 아니었으며 데칸 출신이라기보다는 지역 유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갱굴리의 이론에 비판적인 학자들은 비문에 나오는 라스트라쿠타 칭호가 말와 지역에서 라슈트라쿠타의 정당한 계승자임을 자처하기 위해 이러한 칭호를 사용했던 파라마라 통치자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라슈트라쿠타는 이전에 바타피의 찰루키아 통치자가 사용했던 ''프리티비-발라바''와 같은 칭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역사학자 다샤라타 샤르마는 파라마라가 10세기까지 신화적인 아그니쿨라 기원을 주장했으며, 만약 그들이 정말 라스트라쿠타의 후손이었다면 한 세대 안에 왕족 기원을 잊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 아그니쿨라 기원설: 후기 파라마라 왕들은 스스로를 아그니쿨라 또는 아그니반샤("불 씨족")의 일원이라고 주장했다. 여러 비문과 문학 작품에 나타나는 아그니쿨라 기원 신화는 다음과 같다. 현자 비슈바미트라는 아르부다 산(마운트 아부)에서 다른 현자 바시슈타로부터 강제로 소원을 이루어주는 소를 빼앗았다. 바시슈타는 희생적인 불 구덩이(''아그니-쿤다'')에서 영웅을 불러냈고, 그는 비슈바미트라의 적들을 물리치고 소를 되찾아왔다. 바시슈타는 그 영웅에게 파라마라("적을 죽이는 자")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이 이야기를 언급한 가장 초기의 자료는 파라마라 왕 신두라자(–1010)의 궁정 시인이었던 파드마굽타 파리말라의 ''나바-사하산카-차리타''이다. 이 전설은 초기의 파라마라 시대 비문이나 문학 작품에는 언급되지 않는다. 이 무렵, 모든 이웃 왕조는 신성하거나 영웅적인 기원을 주장했고, 이는 파라마라가 자신만의 전설을 만들어내도록 했을 수 있다. ''프리트비라지 라소''의 한 판본에 언급된 전설은 아그니쿨라 전설을 확장하여 다른 왕조를 불에서 태어난 라지푸트라고 묘사했다. ''프리트비라지 라소''의 가장 오래된 사본에는 이 전설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버전은 무굴 황제 악바르에 대항하여 라지푸트의 단결을 장려하려는 16세기 시인들에 의해 만들어졌을 수 있다. 일부 식민 시대 역사가들은 이 신화적 설명을 파라마라의 외래 기원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이 전설이 가장 초기의 파라마라 기록에 언급되지 않고, 심지어 가장 초기의 파라마라 시대 기록조차 다른 왕조를 아그니반시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해 약화된다.
- 브라만 기원설: 다샤라타 샤르마와 프라티팔 바티아와 같은 일부 역사가들은 파라마라가 원래 바시슈타 고트라 출신의 브라만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이론은 문자의 후원을 받은 할라유다가 '핑갈라-수트라-브리티'에서 그 왕을 "브라흐마-크슈트라"라고 묘사한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바티아에 따르면 이 표현은 문자가 크샤트리아가 된 브라만 가문 출신임을 의미한다. 또한 파타나라야나 사원 비문은 파라마라가 현자 바시슈타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브라만들의 고트라인 바시슈타 고트라 출신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가 아르빈드 K. 싱은 다른 여러 자료가 왕조의 크샤트리아 조상을 가리킨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1211년 피플리아나가르 비문은 파라마라의 조상이 "크샤트리아의 왕관 보석"이었다고 명시하고, ''프라바-바카라-차리타''는 바크파티가 크샤트리아 왕조에서 태어났다고 언급한다. 싱에 따르면 "브라흐마-크샤트리아"라는 표현은 학식을 갖춘 크샤트리아를 의미한다.
- 기타 기원설: D. C. 시르카르는 이 왕조가 말라바에서 기원했다고 이론화했다. 그러나 초기 파라마라 통치자가 말라바라고 불렸다는 증거는 없으며, 파라마라는 말와 지역을 통치하기 시작한 후에야 말라바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C. V. 바이디야와 V. A. 스미스 같은 학자들은 아그니쿨라 전설에 따라 아부 산이 파라마라의 원래 고향이라고 추측했다. D. C. 갱굴리는 하르솔 구리판과 『아인-이-아크바리』를 바탕으로 그들이 데칸 지역에서 왔다고 믿었다. 파라마라의 가장 초창기 비문(시야카 2세의 비문)은 모두 구자라트에서 발견되었으며, 그 지역의 토지 기증에 관한 내용이다. 이를 바탕으로 D. B. 디스칼카르와 H. V. 트리베디는 파라마라가 초창기에 구자라트와 연관되어 있었다고 이론화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초기 파라마라 통치자들이 구자라트의 구르자라-프라티하라 침략으로 인해 말와의 수도인 다라를 잠시 떠났다는 것이다.
2. 1. 라슈트라쿠타 기원설
하르솔라 동판(949년)은 파라마라 왕 시야카 2세가 발행했으며, "아칼라바르샤"라는 왕과 "tasmin kule"("그 가문에서")라는 표현, 그리고 "바파이라자"(파라마라 왕 박파티 1세와 동일시됨)라는 이름이 이어진다.[4] "아칼라바르샤"(라슈트라쿠타 칭호)를 라슈트라쿠타 왕 크리슈나 3세와 동일시한 것을 바탕으로, 역사학자 D.C. 갱굴리는 파라마라가 라슈트라쿠타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4]
갱굴리는 아이니 아크바리에서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내용을 찾으려 했다. 이 책은 파라마라의 선조가 데칸 고원에서 말와로 왔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한 시야카의 후계자 문자(바크파티 2세)가 아모가바르샤, 스리-발라바, 프리티비-발라바와 같은 라슈트라쿠타의 칭호를 사용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러나 하르솔라 비문에는 "tasmin kule"이라는 단어 앞에 간격이 있어, 갱굴리의 주장은 구체적인 증거가 없는 추측일 뿐이다. 게다가 '아이니 아크바리'의 내용이 역사적으로 정확하다고 해도, 아디티아 폰와르는 단지의 후손이 아니었으며 데칸 출신이라기보다는 지역 유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갱굴리의 이론에 비판적인 학자들은 비문에 나오는 라슈트라쿠타 칭호가 말와 지역에서 라슈트라쿠타의 정당한 계승자임을 자처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라슈트라쿠타는 이전에 바타피의 찰루키아 통치자가 사용했던 ''프리티비-발라바''와 같은 칭호를 채택하기도 했다.
역사학자 다샤라타 샤르마는 파라마라가 10세기까지 신화적인 아그니쿨라 기원을 주장했으며, 만약 그들이 정말 라스트라쿠타의 후손이었다면 한 세대 안에 왕족 기원을 잊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2. 2. 아그니쿨라 기원설
하르솔라 동판(949년)은 파라마라 왕 시야카 2세가 발행했으며, "아칼라바르샤"라는 왕을 언급하고, 이어서 "tasmin kule"("그 가문에서")라는 표현이 나오며, 그 뒤에 "바파이라자"(파라마라 왕 박파티 1세와 동일시됨)라는 이름이 이어진다.[4] "아칼라바르샤"(라스트라쿠타 칭호)를 라스트라쿠타 왕 크리슈나 3세와 동일시한 것을 바탕으로, 역사가 D.C. 갱굴리는 파라마라가 라스트라쿠타의 후손이라고 이론화했다. 갱굴리는 그의 이론에 대한 지지를 아이니 아크바리에서 찾으려고 했으며, 이 책은 아그니쿨라 신화(아래 참조)의 변형을 통해 파라마라의 선조가 데칸 고원에서 말와로 왔다고 주장한다. '아이니 아크바리'에 따르면, 화재 희생에서 태어난 단지는 데칸에서 말와에 왕국을 세우기 위해 왔고, 그의 후손 푸트라지가 후계자 없이 죽자 귀족들은 파라마라의 조상인 아디티아 폰와르를 새로운 왕으로 세웠다. 갱굴리는 또한 시야카의 후계자 문자(바크파티 2세)가 아모가바르샤, 스리-발라바, 프리티비-발라바와 같은 칭호를 사용했다는 점에 주목했는데, 이는 라스트라쿠타의 독특한 칭호이다.
그러나 하르솔라 비문에는 "tasmin kule"("그 가문에서")라는 단어 앞에 간격이 있으며, 따라서 갱굴리의 제안은 어떤 구체적인 증거도 없다는 점에서 순전히 추측에 불과하다. 게다가, '아이니 아크바리'의 전설이 역사적으로 정확하다 하더라도, 아디티아 폰와르는 단지의 후손이 아니었으며, 그는 데칸 출신이라기보다는 아마도 지역 유지였을 것이다. 갱굴리의 이론에 대한 비판론자들은 또한 이러한 비문에 나오는 라스트라쿠타 칭호가 말와 지역에서 라스트라쿠타의 정당한 계승자임을 자처하기 위해 이러한 칭호를 사용했던 파라마라 통치자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 라스트라쿠타는 이전에 바타피의 찰루키아 통치자가 사용했던 ''프리티비-발라바''와 같은 칭호를 유사하게 채택했다. 역사가 다샤라타 샤르마는 파라마라가 10세기까지 신화적인 아그니쿨라 기원을 주장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만약 그들이 정말 라스트라쿠타의 후손이었다면, 한 세대 안에 그들의 권위 있는 왕족 기원을 잊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후기 파라마라 왕들은 자신이 아그니쿨라 또는 아그니반샤("불 씨족")의 일원이라고 주장했다. 여러 비문과 문학 작품에 나타나는 아그니쿨라 기원 신화는 다음과 같다. 현자 비슈바미트라는 아르부다 산(마운트 아부)에서 다른 현자 바시슈타로부터 강제로 소원을 이루어주는 소를 빼앗았다. 바시슈타는 그런 다음 희생적인 불 구덩이(''아그니-쿤다'')에서 영웅을 불러냈고, 그는 비슈바미트라의 적들을 물리치고 소를 되찾아왔다. 바시슈타는 그 영웅에게 파라마라("적을 죽이는 자")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이 이야기를 언급한 가장 초기의 알려진 자료는 파라마라 왕 신두라자(–1010)의 궁정 시인이었던 파드마굽타 파리말라의 ''나바-사하산카-차리타''이다. 이 전설은 초기의 파라마라 시대 비문이나 문학 작품에는 언급되지 않는다. 이 무렵, 모든 이웃 왕조는 신성하거나 영웅적인 기원을 주장했고, 이는 파라마라가 자신만의 전설을 만들어내도록 자극했을 수 있다.
''프리트비라지 라소''의 한 판본에 언급된 전설은 아그니쿨라 전설을 확장하여 다른 왕조를 불에서 태어난 라지푸트라고 묘사했다. ''프리트비라지 라소''의 가장 오래된 현존하는 사본에는 이 전설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버전은 무굴 황제 악바르에 대항하여 라지푸트의 단결을 장려하려는 16세기 시인들에 의해 만들어졌을 수 있다. 일부 식민 시대 역사가들은 이 신화적 설명을 파라마라의 외래 기원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파라마라와 다른 아그니반시 라지푸트의 조상은 기원후 5세기경 굽타 제국의 쇠퇴 이후 인도에 왔다고 한다. 그들은 불 의식을 치른 후 힌두교 카스트 제도에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 이론은 이 전설이 가장 초기의 파라마라 기록에 언급되지 않고, 심지어 가장 초기의 파라마라 시대 기록조차 다른 왕조를 아그니반시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해 약화된다.
다샤라타 샤르마와 프라티팔 바티아와 같은 일부 역사가들은 파라마라가 원래 바시슈타 고트라 출신의 브라만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이론은 문자의 후원을 받은 할라유다가 '핑갈라-수트라-브리티'에서 그 왕을 "브라흐마-크슈트라"라고 묘사한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바티아에 따르면 이 표현은 문자가 크샤트리아가 된 브라만 가문 출신임을 의미한다. 또한 파타나라야나 사원 비문은 파라마라가 현자 바시슈타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브라만들의 고트라인 바시슈타 고트라 출신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가 아르빈드 K. 싱은 다른 여러 자료가 왕조의 크샤트리아 조상을 가리킨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1211년 피플리아나가르 비문은 파라마라의 조상이 "크샤트리아의 왕관 보석"이었다고 명시하고, ''프라바-바카라-차리타''는 바크파티가 크샤트리아 왕조에서 태어났다고 언급한다. 싱에 따르면 "브라흐마-크샤트리아"라는 표현은 배운 크샤트리아를 의미한다.
2. 3. 브라만 기원설
후기 파라마라 왕들은 스스로를 아그니쿨라 또는 아그니반샤("불 씨족")의 일원이라고 주장했다. 여러 비문과 문학 작품에 나타나는 아그니쿨라 기원 신화는 다음과 같다. 현자 비슈바미트라는 아르부다 산(마운트 아부)에서 다른 현자 바시슈타로부터 강제로 소원을 이루어주는 소를 빼앗았다. 바시슈타는 그런 다음 희생적인 불 구덩이(''아그니-쿤다'')에서 영웅을 불러냈고, 그는 비슈바미트라의 적들을 물리치고 소를 되찾아왔다. 바시슈타는 그 영웅에게 파라마라("적을 죽이는 자")라는 칭호를 부여했다.[1] 이 이야기를 언급한 가장 초기의 알려진 자료는 파라마라 왕 신두라자(재위: 997년경-1010년)의 궁정 시인이었던 파드마굽타 파리말라의 ''나바-사하산카-차리타''이다.[2] 이 전설은 초기의 파라마라 시대 비문이나 문학 작품에는 언급되지 않는다. 이 무렵, 모든 이웃 왕조는 신성하거나 영웅적인 기원을 주장했고, 이는 파라마라가 자신만의 전설을 만들어내도록 자극했을 수 있다.[3]
''프리트비라지 라소''의 한 판본에는 아그니쿨라 전설을 확장하여 다른 왕조를 불에서 태어난 라지푸트라고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프리트비라지 라소''의 가장 오래된 현존하는 사본에는 이 전설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버전은 무굴 제국 황제 악바르에 대항하여 라지푸트의 단결을 장려하려는 16세기 시인들에 의해 만들어졌을 수 있다.[4] 일부 식민 시대 역사가들은 이 신화적 설명을 파라마라의 외래 기원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파라마라와 다른 아그니반시 라지푸트의 조상은 기원후 5세기경 굽타 제국의 쇠퇴 이후 인도에 왔으며, 불 의식을 치른 후 힌두교 카스트 제도에 받아들여졌다고 한다.[5] 그러나 이 전설은 가장 초기의 파라마라 기록에 언급되지 않고, 심지어 가장 초기의 파라마라 시대 기록조차 다른 왕조를 아그니반시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해 약화된다.[6]
다샤라타 샤르마와 프라티팔 바티아와 같은 일부 역사가들은 파라마라가 원래 바시슈타 고트라 출신의 브라만이었다고 주장했다.[7] 이 이론은 문자의 후원을 받은 할라유다가 '핑갈라-수트라-브리티'에서 그 왕을 "브라흐마-크슈트라"라고 묘사한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바티아에 따르면 이 표현은 문자가 크샤트리아가 된 브라만 가문 출신임을 의미한다.[8] 또한 파타나라야나 사원 비문은 파라마라가 현자 바시슈타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브라만들의 고트라인 바시슈타 고트라 출신이라고 명시하고 있다.[9] 그러나 역사가 아르빈드 K. 싱은 다른 여러 자료가 왕조의 크샤트리아 조상을 가리킨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1211년 피플리아나가르 비문은 파라마라의 조상이 "크샤트리아의 왕관 보석"이었다고 명시하고, ''프라바-바카라-차리타''는 바크파티가 크샤트리아 왕조에서 태어났다고 언급한다. 싱에 따르면 "브라흐마-크샤트리아"라는 표현은 학식을 갖춘 크샤트리아를 의미한다.[10]
2. 4. 기타 기원설
하르솔라 동판(949년)은 파라마라 왕 시야카 2세가 발행했는데, 여기에는 "아칼라바르샤"라는 왕과 "tasmin kule"("그 가문에서")라는 표현이 나온 후 "바파이라자"(파라마라 왕 박파티 1세)라는 이름이 이어진다.[4] "아칼라바르샤"(라스트라쿠타 칭호)를 라스트라쿠타 왕 크리슈나 3세와 동일시하여, 역사가 D.C. 갱굴리는 파라마라가 라스트라쿠타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4]갱굴리는 아이니 아크바리에서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내용을 찾으려 했다. 아이니 아크바리는 아그니쿨라 신화(아래 참조)를 변형하여 파라마라의 선조가 데칸 고원에서 말와로 왔다고 주장한다. '아이니 아크바리'에 따르면, 화재 희생에서 태어난 단지는 데칸에서 말와에 왕국을 세웠고, 그의 후손 푸트라지가 후계자 없이 죽자 귀족들이 파라마라의 조상인 아디티아 폰와르를 새로운 왕으로 세웠다. 갱굴리는 또한 시야카의 후계자 문자(바크파티 2세)가 아모가바르샤, 스리-발라바, 프리티비-발라바와 같은 칭호를 사용했는데, 이는 라스트라쿠타의 칭호였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하르솔라 비문에는 "tasmin kule"("그 가문에서")라는 단어 앞에 간격이 있어, 갱굴리의 주장은 구체적인 증거가 없는 추측일 뿐이다. 게다가, '아이니 아크바리'의 전설이 역사적으로 정확하다고 해도, 아디티아 폰와르는 단지의 후손이 아니었으며, 데칸 출신이라기보다는 지역 유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갱굴리의 이론에 대한 비판론자들은 비문에 나오는 라스트라쿠타 칭호가 말와 지역에서 라스트라쿠타의 정당한 계승자임을 자처하기 위해 이러한 칭호를 사용했던 파라마라 통치자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라스트라쿠타는 이전에 바타피의 찰루키아 통치자가 사용했던 ''프리티비-발라바''와 같은 칭호를 채택했다. 역사가 다샤라타 샤르마는 파라마라가 10세기까지 신화적인 아그니쿨라 기원을 주장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만약 그들이 정말 라스트라쿠타의 후손이었다면, 한 세대 안에 왕족 기원을 잊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후기 파라마라 왕들은 자신이 아그니쿨라 또는 아그니반샤("불 씨족")의 일원이라고 주장했다. 여러 비문과 문학 작품에 나타나는 아그니쿨라 기원 신화는 다음과 같다. 현자 비슈바미트라는 아르부다 산(마운트 아부)에서 다른 현자 바시슈타로부터 강제로 소원을 이루어주는 소를 빼앗았다. 바시슈타는 희생적인 불 구덩이(''아그니-쿤다'')에서 영웅을 불러냈고, 그는 비슈바미트라의 적들을 물리치고 소를 되찾아왔다. 바시슈타는 그 영웅에게 파라마라("적을 죽이는 자")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이 이야기를 언급한 가장 초기의 자료는 파라마라 왕 신두라자(–1010)의 궁정 시인이었던 파드마굽타 파리말라의 ''나바-사하산카-차리타''이다. 이 전설은 초기의 파라마라 시대 비문이나 문학 작품에는 언급되지 않는다. 이 무렵, 모든 이웃 왕조는 신성하거나 영웅적인 기원을 주장했고, 이는 파라마라가 자신만의 전설을 만들어내도록 했을 수 있다.
''프리트비라지 라소''의 한 판본에 언급된 전설은 아그니쿨라 전설을 확장하여 다른 왕조를 불에서 태어난 라지푸트라고 묘사했다. ''프리트비라지 라소''의 가장 오래된 사본에는 이 전설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버전은 무굴 황제 악바르에 대항하여 라지푸트의 단결을 장려하려는 16세기 시인들에 의해 만들어졌을 수 있다. 일부 식민 시대 역사가들은 이 신화적 설명을 파라마라의 외래 기원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파라마라와 다른 아그니반시 라지푸트의 조상은 기원후 5세기경 굽타 제국의 쇠퇴 이후 인도에 왔다고 한다. 그들은 불 의식을 치른 후 힌두교 카스트 제도에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 이론은 이 전설이 가장 초기의 파라마라 기록에 언급되지 않고, 심지어 가장 초기의 파라마라 시대 기록조차 다른 왕조를 아그니반시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해 약화된다.
다샤라타 샤르마와 프라티팔 바티아와 같은 일부 역사가들은 파라마라가 원래 바시슈타 고트라 출신의 브라만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이론은 문자의 후원을 받은 할라유다가 '핑갈라-수트라-브리티'에서 그 왕을 "브라흐마-크슈트라"라고 묘사한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바티아에 따르면 이 표현은 문자가 크샤트리아가 된 브라만 가문 출신임을 의미한다. 또한 파타나라야나 사원 비문은 파라마라가 현자 바시슈타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브라만들의 고트라인 바시슈타 고트라 출신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가 아르빈드 K. 싱은 다른 여러 자료가 왕조의 크샤트리아 조상을 가리킨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1211년 피플리아나가르 비문은 파라마라의 조상이 "크샤트리아의 왕관 보석"이었다고 명시하고, ''프라바-바카라-차리타''는 바크파티가 크샤트리아 왕조에서 태어났다고 언급한다. 싱에 따르면 "브라흐마-크샤트리아"라는 표현은 배운 크샤트리아를 의미한다.
D. C. 시르카르는 이 왕조가 말라바에서 기원했다고 이론화했다. 그러나 초기 파라마라 통치자가 말라바라고 불렸다는 증거는 없으며, 파라마라는 말와 지역을 통치하기 시작한 후에야 말라바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3. 초기 통치자
उपेंद्र|우펜드라sa는 자신의 비문을 통해 알려진 가장 초기의 파라마라 왕이다. 그의 하르솔라 동판 비문 (949 CE)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파라마라 비문이다.[4] 이 비문은 그가 라슈트라쿠타의 신하였다는 것을 시사한다.[4] 그의 선조 목록은 기록마다 다르다:[4][5]
하르솔라 동판 (949 CE) | 나바-사하산카-차리타 (11세기 초) | 우다이푸르 프라사스티 비문 (11세기) | 나그푸르 프라사스티 비문 (1104 CE) | 기타 토지 양여 |
---|---|---|---|---|
파라마라 | 파라마라 | 파라마라 | 파라마라 | |
उपेंद्र|우펜드라sa | उपेंद्र|우펜드라sa | 크리슈나 | ||
"기타 왕들" | 바이리심하 (1세) | |||
시야카 (1세) | ||||
바파이라자 | 바크파티 (1세) | 바크파티 (1세) | ||
바이리심하 | 바이리심하 | 바이리심하 (2세) | 바이리심하 | 바이리심하 |
시야카 | 시야카, 일명 하르샤 | 하르샤 | 시야카 | 시야카 |
파라마라는 아그니쿨라 전설에 따르면 왕조의 신화적 시조이다. ''우다이푸르 프라사스티''에 언급된 다른 초창기 왕들이 역사적 인물인지 허구의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6]
C. V. 바이디야와 K. A. 닐라칸타 사스트리에 따르면, 파라마라 왕조는 10세기에 건국되었다. 바이디야는 바이리심하 1세와 시야카 1세와 같은 왕들이 왕조의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후대 역사적 왕들의 이름을 복제한 가상의 인물이라고 믿고 있다.[6] 자야바르만 2세의 1274년 만다타 동판 비문 또한 파라마라의 8명의 후계자를 카만달루다라, 둠라자, 데바심하팔라, 카나카심하, 슈리하르샤, 자가데바, 스티라카야, 보샤리로 명명했는데, 이들은 역사적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7] H. V. 트리베디는 ''우다이푸르 프라사스티''의 바이리심하 1세와 시야카 1세가 바이리심하 2세와 시야카 2세와 동일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름이 실수로 반복되었을 수 있다고 말한다. 또는, 그는 이 통치자들이 독립적인 군주가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비문에서 이들의 이름이 생략되었을 것이라고 이론화한다.[4]
다른 여러 역사가들은 ''우다이푸르 프라사스티''에 언급된 초창기 파라마라 통치자들이 허구의 인물이 아니며, 파라마라 왕조가 9세기 (라슈트라쿠타의 봉신으로서)에 말와를 통치하기 시작했다고 믿는다. K. N. 세스는 심지어 후기 파라마라 비문 중 일부에서도 비문을 발행한 왕의 선조를 3~4명만 언급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초기 비문에 제공된 계보에 특정 이름이 없는 것이 그들이 가상의 통치자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에 따르면, 후기 왕 신두라자의 궁정 시인이 지은 ''나바-사하산카-차리트라''에 우펜드라가 언급된 것은 우펜드라가 가상의 왕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6] 게오르그 뷸러와 제임스 버지스와 같은 역사가들은 우펜드라와 크리슈나라자를 동일 인물로 식별하는데, 이는 그들이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우펜드라는 크리슈나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시야카의 후계자인 문자의 비문에는 그의 이전 왕들을 크리슈나라자, 바이리심하, 시야카로 명명했다. 이를 근거로 세스는 크리슈나라자를 하르솔라 판에 언급된 바파이라자 또는 바크파티 1세와 동일 인물로 식별한다 (바파이라자는 바크파티-라자의 프라크리트어 형태인 것으로 보인다). 그를 지지하며, 세스는 바이리심하가 문자의 비문에서 ''크리슈나-파다누디야타'' 즉 바크파티 2세라고 불렸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바크파티 2세가 자신의 이름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조상을 식별하기 위해 바크파티 1세 대신 "크리슈나라자"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고 이론화한다.[6]
4. 독립과 발전
말와 지방은 데칸 고원을 지배했던 라스트라쿠타 왕조의 왕 고빈다 3세에 의해 9세기 초에 획득된 영토였다.[19] 이때 고빈다 3세는 말와의 통치를 파라마라족의 족장 우펜드라에게 맡겼는데, 이것이 파라마라 왕조의 시작이었다.[19]
하지만 북인도에는 프라티하라 왕조가 존재했고, 데칸과 북인도 사이에 있는 이 지역을 둘러싸고 라스트라쿠타 왕조와 프라티하라 왕조는 여러 차례 다투었다.[19] 파라마라 왕조도 라스트라쿠타 왕조의 봉신(사만타)으로서 불안정한 지배를 유지하면서 싸웠다.[19]
말와의 파라마라 군주 외에도, 여러 지파가 다양한 지역을 통치했다.
지파 | 통치 지역 | 기타 |
---|---|---|
찬드라바티의 파라마라 | 아르부다-만달라 (아부 산 지역) | 12세기까지 구자라트의 차울루키아의 봉신[13] |
빈말-키라두의 파라마라 | 찬드라바티의 파라마라에서 갈라짐. 12세기에 차하마나에게 제압됨[13] | |
잘로르의 파라마라 | 찬드라바티 파라마라의 또 다른 지파.[13] 잘로르의 차하마나에 의해 대체됨 | |
바가다의 파라마라 | 아르투나 | 말와의 파라마라의 봉신 |
보지푸르의 우자이니야 | 보지푸르 지역 | 보지푸르 왕국의 멸망 이후, 여러 방계 가문들이 둠라온을 포함한 많은 공국을 세움 |
아마르코트의 소다 | 아마르코트 | 18세기에 조드푸르에 합병 |
미틸라의 간다바리야 | 미틸라 | 말와의 비크라마디티야 왕과 파라마라 왕조의 후손이라고 주장 |
팔탄의 님발카르 | 팔탄 | 델리 술탄국, 데칸 술탄국, 마라타 제국의 봉신 |
몇몇 번왕국의 통치자들은 파라마라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 테리 가르왈 주: 말와의 왕자 카나크팔이 건국.
- 바갈 주: 아잡 데브 파르마르가 14세기에 건국.
- 단타 주: 통치자들이 파르마르 씨족이며 비크라마디티야의 후손이라고 주장.
- 물리 주: 통치자들이 파라마라의 후손이며 바게라의 봉신으로 시작.
- 라지갈 주와 나르싱가르 주: 통치자들이 파라마라의 우마스 지파.
- 차타푸르 주: 통치자들이 파라마라 왕조의 오래된 지파.
- 데와스 주와 다르 주: 마라타 푸아르 통치자들이 파라마라 왕조의 후손이라고 주장.
4. 1. 시야카 2세의 독립
10세기 후반 시야카 2세 시대에 프라티하라 왕조는 점차 쇠퇴하고, 라스트라쿠타 왕조는 남인도의 촐라 왕조와의 싸움에 몰두하고 있었다.[19] 시야카 2세는 프라티하라 왕조의 말와 영토를 빼앗고, 서쪽으로는 마히 강 서쪽까지를 획득하여 말와의 전 영역을 판도로 삼았다.[19]한편, 주군인 라스트라쿠타 왕조는 촐라 왕조와의 싸움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크리슈나 3세가 죽고 코티가 아모가바르샤가 즉위하자 시야카 2세는 반기를 들었다.[19] 파라마라 왕조는 라스트라쿠타 왕조와 교전 상태에 들어갔지만, 972년에는 그 수도 마니야케타에 육박할 정도의 기세를 보였다.[19][20] 이 일은 칼야니의 찰루키아 왕조의 창시자인 타일라 2세가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시야카 2세는 이로 인해 타프티 강 이북의 영토를 획득하고, 라스트라쿠타 왕조로부터 독립을 달성했다.[21]
4. 2. 문자와 신두라자
주어진 원문 소스에는 "문자와 신두라자"에 대한 내용이 없으므로, 이 섹션에 해당하는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4. 3. 보자의 통치와 최전성기
11세기 초에 즉위한 왕 보자는 파라마라 왕조의 가장 위대한 왕이었다.[22]보자는 왕조의 영토를 확대하여 데칸의 콘칸 지방, 구자라트 남부의 라타 지방을 차지했고, 라자스탄의 메와르 지방의 도시 치토르가르를 점령했다.[22] 또한 콘칸 지방의 실라라 왕조를 제압하여 봉신으로 삼았으며, 치토르가르를 차지한 것으로 구자라트의 차울루키아 왕조, 라자스탄의 차하마나 왕조에 대해 우위를 점했다.[22]
11세기 초에는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왕조인 가즈니 왕조가 쳐들어오자, 다른 라지푸트 왕조와 연합하여 이에 대항했다.

보자는 건축 사업을 활발하게 진행하여 하천에 댐을 건설하고, 자신의 이름을 딴 보제스와라 사원 등을 건립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문예를 보호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그 자신도 시를 지었고, 비문에는 "시인 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왕은 크시라스바민이나 사야나와 같은 유명한 학자들에게 "문법가"로도 인용되었다.[22]
5. 쇠퇴와 멸망
보자의 후계자 자야심하 1세는 트리푸리 칼라추리와 차울루키아의 연합 침략에 직면했다.[22] 보자의 형제인 우다야디티아는 동맹을 맺어 차울루키아 통치자 카르나의 침략을 격퇴했다. 우다야디티아의 차남 나르바르만은 제자카부크티의 찬델라와 차울루키아 왕 자야심하 시다라자에게 여러 번 패배했고, 그의 통치 말년에 비자야팔라가 우자이 동북쪽에 독립 왕국을 세웠다.
야쇼바르만은 수도 다라를 자야심하 시다라자에게 잃었다. 그의 후계자 자야바르만 1세는 다라를 되찾았지만 곧 찬탈자 발라라에게 잃었다. 1150년경 차울루키아 왕 쿠마라팔라는 발라라를 격파하고, 아부 파라마라 지도자 야쇼다발라 등의 지원을 받아 말와를 차울루키아의 지방으로 만들었다.
1250년경 파라마라와 인접한 남아시아의 정치체.[7]
20년 후, 자야바르만의 아들 빈디야바르만은 차울루키아 왕 뮬라라자 2세를 격파하고 파라마라의 주권을 되찾았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말와는 호이살라와 데바기리의 야다바의 침략을 받았다. 그는 차울루키아 장군 쿠마라에게 패하기도 했다. 빈디야바르만의 아들 수바타바르만은 구자라트를 침략하여 차울루키아 영토를 약탈했지만, 차울루키아 봉신 라바나-프라사다에게 밀려났다. 그의 아들 아르주나바르만 1세 또한 구자라트를 침략하여 차울루키아 왕위를 잠시 찬탈한 자야타-심하를 격파했다. 그는 라타에서 야다바 장군 콜레슈바라에게 패했다.
아르주나바르만의 뒤를 이은 데바팔라는 차울루키아, 야다바와 계속 싸웠다. 델리 술탄 일투트미쉬는 1233-34년 동안 빌사를 점령했지만, 데바팔라는 술탄국의 총독을 격파하고 빌사를 되찾았다.[22] 데바팔라의 아들 자이투기데바 통치 기간 동안 파라마라의 힘은 야다바 왕 크리슈나, 델리 술탄 발반, 바겔라의 비살라-데바 왕자의 침략으로 크게 약해졌다.[22] 자이투기 또는 자야바르만 2세는 방어에 유리한 만다파-두르가(현재의 만두)로 수도를 옮겼다.
아르주나바르만 2세는 무능한 통치자로 재상의 반란에 직면했다. 1270년대에 야다바 통치자 라마찬드라가, 1280년대에는 란탐보르 차하마나 통치자 함미라가 말와를 침략했다. 보자 2세 또한 함미라의 침략에 직면했다. 보자 2세는 재상의 지배를 받는 명목상의 통치자였거나, 재상이 파라마라 왕국의 일부를 찬탈했을것이다.
마지막으로 알려진 파라마라 왕 마할라카데바는 1305년에 알라 우드 딘 할지의 장군 아인 알-물크 멀타니에게 패배하고 살해되었다.[22]
5. 1. 쇠퇴기
보자의 후계자인 자야심하 1세는 보자 사망 직후 트리푸리 칼라추리와 차울루키아의 연합 공격을 받았다.[22] 그는 칼라니의 차울루키아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자야심하의 후계자이자 보자의 형제인 우다야디티아는 바가다의 봉신 참문다라자에게 패배했지만, 동맹을 맺어 차울루키아 통치자 카르나의 침략을 막아냈다. 우다야디티아의 장남 락슈마데바는 넓은 영토를 정복했다고 알려졌지만, 이는 과장된 표현으로 보인다. 그는 트리푸리의 칼라추리를 격파했을 가능성이 있다. 우다야디티아의 차남 나르바르만은 제자카부크티의 찬델라와 차울루키아 왕 자야심하 시다라자에게 여러 번 패배했다. 그의 통치 말기에 비자야팔라가 우자이 동북쪽에 독립 왕국을 세웠다.야쇼바르만은 파라마라의 수도 다라를 자야심하 시다라자에게 빼앗겼다. 그의 후계자 자야바르만 1세는 다라를 되찾았지만, 곧 찬탈자 발라라에게 빼앗겼다. 차울루키아 왕 쿠마라팔라는 1150년경 발라라를 격파하고, 나둘라 차하마나 통치자 알하나데바와 아부 파라마라 지도자 야쇼다발라의 지원을 받았다. 그 후 말와는 차울루키아의 지방이 되었다. 파라마라의 소규모 분파는 보팔 주변 지역을 통치하며 스스로를 ''마하쿠마라''라고 불렀다.[22] 약 20년 후, 자야바르만의 아들 빈디야바르만은 차울루키아 왕 뮬라라자 2세를 격파하고 말와에서 파라마라의 주권을 되찾았다.[22]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말와는 호이살라와 데바기리의 야다바의 침략을 받았다. 그는 또한 차울루키아 장군 쿠마라에게 패배했지만, 사망 전까지 파라마라의 힘을 회복했다.
빈디야바르만의 아들 수바타바르만은 구자라트를 침략하여 차울루키아 영토를 약탈했지만, 결국 차울루키아 봉신 라바나-프라사다에게 밀려났다. 그의 아들 아르주나바르만 1세 또한 구자라트를 침략하여 차울루키아 왕위를 잠시 찬탈한 자야타-심하(또는 자야-심하)를 격파했다. 그는 라타에서 야다바 장군 콜레슈바라에게 패배했다.

아르주나바르만의 뒤를 이은 데바팔라는 ''마하쿠마라''(파라마라 분파의 수장)인 하리슈찬드라의 아들이었다. 그는 차울루키아, 야다바와 계속 싸웠다. 델리 술탄 일투트미쉬는 1233-34년 동안 빌사를 점령했지만, 데바팔라는 술탄국의 총독을 격파하고 빌사를 되찾았다.[22] ''함미라 마하카비아''에 따르면, 그는 델리 술탄과 공모하여 자신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의심한 란탐보르의 차하마나의 바가바타에게 살해되었다.
데바팔라의 아들 자이투기데바 통치 기간 동안 파라마라의 힘은 야다바 왕 크리슈나, 델리 술탄 발반, 바겔라의 비살라-데바 왕자의 침략으로 크게 약해졌다.[22] 데바팔라의 차남 자야바르만 2세 또한 이 세 세력의 공격을 받았다. 자이투기 또는 자야바르만 2세는 방어에 유리한 언덕이 많은 만다파-두르가(현재의 만두)로 파라마라의 수도를 옮겼다.
자야바르만 2세의 후계자인 아르주나바르만 2세는 무능한 통치자였다. 그는 재상의 반란에 직면했다. 1270년대에 야다바 통치자 라마찬드라가 말와를 침략했고, 1280년대에는 란탐보르 차하마나 통치자 함미라도 말와를 습격했다. 아르주나의 후계자 보자 2세 또한 함미라의 침략을 받았다. 보자 2세는 재상의 지배를 받는 명목상의 통치자였거나, 재상이 파라마라 왕국의 일부를 찬탈했다.
마지막으로 알려진 파라마라 왕 마할라카데바는 1305년 알라 우드 딘 할지의 장군 아인 알-물크 멀타니의 군대에 의해 패배하고 살해되었다.[22]
5. 2. 멸망
보자의 후계자인 자야심하 1세는 트리푸리 칼라추리와 차울루키아의 연합 침략에 직면했다.[22] 그는 칼라니의 차울루키아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자야심하의 후계자이자 보자의 형제인 우다야디티아는 동맹국의 도움을 받아 차울루키아 통치자 카르나의 침략을 격퇴했다. 우다야디티아의 장남 락슈마데바는 트리푸리의 칼라추리를 격파했을 것이다. 우다야디티아의 차남 나르바르만은 제자카부크티의 찬델라와 차울루키아 왕 자야심하 시다라자에게 패배했다. 그의 통치 말에 비자야팔라가 우자이 동북쪽에 독립 왕국을 세웠다.야쇼바르만은 파라마라의 수도 다라에 대한 통제권을 자야심하 시다라자에게 잃었다. 그의 후계자 자야바르만 1세는 다라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았지만 곧 발라라는 찬탈자에게 잃었다. 차울루키아 왕 쿠마라팔라는 1150년경 발라를 격파했으며, 아부 파라마라 지도자 야쇼다발라의 지원을 받았다. 그 후 말와는 차울루키아의 지방이 되었다. 파라마라의 소규모 분파는 이 시기에 보팔 주변 지역을 통치했으며, 스스로를 ''마하쿠마라''라고 불렀다.[22] 거의 20년 후, 자야바르만의 아들 빈디야바르만은 차울루키아 왕 뮬라라자를 격파하고 말와에서 파라마라의 주권을 재확립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말와는 호이살라와 데바기리의 야다바의 반복적인 침략에 직면했다. 그는 또한 차울루키아 장군 쿠마라에게 패했다.
빈디야바르만의 아들 수바타바르만은 구자라트를 침략하여 차울루키아 영토를 약탈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차울루키아 봉신 라바나-프라사다에 의해 후퇴해야 했다. 그의 아들 아르주나바르만 1세 또한 구자라트를 침략하여 차울루키아 왕위를 잠시 찬탈한 자야타-심하(또는 자야-심하)를 격파했다. 그는 라타에서 야다바 장군 콜레슈바라에게 패했다.
1250년경 파라마라와 인접한 남아시아의 정치체.[7]
아르주나바르만의 뒤를 이어 데바팔라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마하쿠마라''(파라마라 분파의 수장)인 하리슈찬드라의 아들이었다. 그는 차울루키아와 야다바와의 투쟁을 계속 겪었다. 델리 술탄 일투트미쉬는 1233년-34년 동안 빌사를 점령했지만,[22] 데바팔라는 술탄국의 총독을 격파하고 빌사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았다. ''함미라 마하카비아''에 따르면, 그는 델리 술탄과 공모하여 그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의심한 란탐보르의 차하마나의 바가바타에게 살해되었다.
데바팔라의 아들 자이투기데바의 통치 기간 동안 파라마라의 힘은 야다바 왕 크리슈나, 델리 술탄 발반,[22] 바겔라의 비살라-데바 왕자의 침략으로 크게 쇠퇴했다. 데바팔라의 차남 자야바르만 2세 또한 이 세 세력의 공격에 직면했다. 자이투기 또는 자야바르만 2세는 방어에 더 유리한 위치를 제공하는 언덕이 많은 만다파-두르가(현재의 만두)로 파라마라의 수도를 옮겼다.
자야바르만 2세의 후계자인 아르주나바르만 2세는 무능한 통치자로 드러났다. 그는 그의 재상으로부터 반란에 직면했다. 1270년대에 야다바 통치자 라마찬드라가 말와를 침략했고, 1280년대에는 란탐보르 차하마나 통치자 함미라도 말와를 습격했다. 아르주나의 후계자 보자 2세 또한 함미라의 침략에 직면했다. 보자 2세는 그의 재상의 지배를 받는 명목상의 통치자였거나, 그의 재상이 파라마라 왕국의 일부를 찬탈했다.
마할라카데바, 마지막으로 알려진 파라마라 왕은 1305년에 알라 우드 딘 할지의 장군 아인 알-물크 멀타니의 군대에 의해 패배하고 살해되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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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谷『世界歴史大系 南アジア史2―中世・近世―』、pp.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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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hem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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