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이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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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이살라는 11세기부터 14세기까지 존재했던 남인도의 왕조로, 칸나다 민화에 따르면 살라라는 청년이 호랑이를 물리친 "호이"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초기에는 서강가 왕조와 후기 찰루키아 왕조의 봉신으로 시작하여, 비슈누바르다나 시대에 사실상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호이살라는 12세기 말 비라 발라라 2세 때 전성기를 맞이하여 촐라 제국과 판디아 왕국을 공격하며 남인도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13세기에는 타밀나두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했지만, 14세기 초 델리 술탄국의 침략으로 쇠퇴, 비자야나가라 제국에 병합되며 멸망했다. 호이살라는 뛰어난 건축 양식으로 유명하며, 벨루르의 체나케사바 사원, 할레비두의 호이살레스와라 사원, 소마나타푸라의 케샤바 사원 등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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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이살라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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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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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일반 명칭 | 호이살라 |
존속 기간 | 1000년 - 1346년 |
정치 체제 | 군주제 |
수도 | 소사부르 (1026년–1048년) 베루르 (1048년–1062년) 할레비두 (1062년–1300년) 티루반나말라이 (1300년–1343년) |
공용어 | 칸나다어 산스크리트어 |
종교 | 힌두교 자이나교 |
역사 | |
이전 | 서찰루키아 제국 |
이후 | 비자야나가라 제국 |
건국 | 1000년 |
멸망 | 1346년 |
지도자 | |
초대 군주 | 누리파 카마 2세 |
초대 군주 재임 기간 | 1026년–1047년 |
마지막 군주 | 비라 발랄라 4세 |
마지막 군주 재임 기간 | 1342/43년-1346년 |
주요 군주 | 비나야디트야 에레양가 비라 발랄라 1세 비슈누바르다나 나라심하 1세 비라 발랄라 2세 비라 나라심하 2세 비라 소메슈와라 나라심하 3세 비라 발랄라 3세 |
기타 |
2. 기원
칸나다 민화에 따르면, 자이나교 구루인 수다타를 구한 청년 살라가 앙가디 바산티카 여신(현재 소세부루라 불림)의 신전 근처에서 마주친 호랑이를 쳐서 죽였고, "호이"라는 별명이 붙어 호이살라의 어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전설은 1117년 비슈누바르다나의 벨루어 비문에 처음 등장했으나 몇 가지 모순으로 인해 야사로 남아있다.[27][28]
역사학자들은 호이살라의 지배자들이 '말레파롤간다' 또는 '말레파족의 우두머리'라고 불리는 많은 비문을 바탕으로 말레나두의 토착민으로 간주한다.[32][33][34][35][36][37][38][39] 이 칸나다어 호칭은 호이살라 국왕들이 비문에서 왕족의 서명으로 자랑스럽게 사용하였다. 칸나다어(자타카틸라카)와 산스크리트어(가디카르나미타) 문학 작품들도 호이살라인들이 오늘날 카르나타카로 알려진 지역의 원주민임을 확인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40][41]
2. 1. 전설
칸나다 민화에 따르면, 자이나교 구루인 수다타를 구한 청년 살라가 앙가디 바산티카 여신(현재 소세부루라 불림)의 신전 근처에서 마주친 호랑이를 쳐서 죽였고, "호이"라는 별명이 붙어 호이살라의 어원이 되었다고 한다. 이 전설은 1117년 비슈누바르다나의 벨루어 비문에 처음 등장했으나 몇 가지 모순으로 인해 야사로 남아있다.[27][28] 이 전설은 비슈누바르다나 왕이 탈라카두에서 촐라 제국을 이겼을 때 인기를 얻은 것으로 짐작된다. 촐라 제국의 상징이 호랑이였으며, 전설은 칸나다 전사 살라와 호랑이의 싸움을 묘사하였기 때문이다.[29]1078년과 1090년에 쓰여진 초기 비문들은 호이살라가 야두의 후손임을 암시하며, 야다바 ''반사''(가문 또는 씨족)를 "호이살라 ''반사''"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호이살라와 북인도 야다바를 직접 연결하는 초기 기록은 없다.
2. 2. 역사적 기원
칸나다 민화에 따르면, 자이나교 구루인 수다타를 구한 청년 살라가 호랑이를 쳐서 죽였는데, 이때 "호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이것이 호이살라의 어원이 되었다고 한다. 이 전설은 1117년 비슈누바르다나의 벨루어 비문에 처음 등장했지만, 몇 가지 모순점이 있어 야사(野史)로 남아있다.[27][28] 이 전설은 비슈누바르다나 왕이 탈라카두에서 촐라 제국을 이겼을 때 인기를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촐라 제국의 상징이 호랑이였기 때문이다.[29]1078년과 1090년에 쓰여진 초기 비문들은 호이살라가 야다바의 후손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호이살라 민족과 북인도의 야다바 민족을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초기 기록은 없다.[30][31]
역사학자들은 호이살라의 지배자들이 '말레파롤간다' 또는 '말레파족의 우두머리'라고 불리는 많은 비문을 바탕으로, 말레나두의 토착민으로 간주한다.[32][33][34][35][36][37][38][39] 이 칸나다어 호칭은 호이살라 국왕들이 비문에서 왕족의 서명으로 자랑스럽게 사용하였다. 칸나다어(자타카틸라카)와 산스크리트어(가디카르나미타) 문학 작품들도 호이살라인들이 오늘날 카르나타카로 알려진 지역의 원주민임을 확인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40][41]
호이살라의 시조로 여겨지는 Nripa Kama II|누리파 카마 2세영어는 마이소르 지방・서가츠 산맥에 거주하는 산간 부족의 수장이었다.[19] 11세기에 평야부로 진출하여 마이소르 지방으로 침입해 온 촐라 왕조와의 전투에서 서강가 왕조와 후기 찰루키아 왕조를 도왔으며, 후자의 봉신(제후)이 되었다.[19]
누리파 카마의 아들인 비나야디티야도 후기 찰루키아 왕조를 섬겼으며, 카베리 강 상류의 마이소르 북서쪽 100km 지점인 도라사무드라를 본거지로 세력을 확장했다.
비나야디티야의 손자인 비슈누바르다나 때, 후기 찰루키아 왕조의 비크라마디티야 6세가 사망하자 왕위 계승 분쟁이 격화되었고, 호이살라의 세력은 더욱 강대해져 사실상 독립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18] 그 힘은 촐라 왕조로부터 마이소르 동쪽의 타라카드를 빼앗았고, 찰루키아 왕조의 영토도 병합하려 시도할 정도였다.[19]
또한, 비슈누바르다나는 라마누자에게 가르침을 받아 비슈누파로 개종했으며, 수도에 호이살레슈바라 사원 등을 건설했다.[18]
3. 역사
니리파 카마 2세 때 호이살라 왕국이 형성되었으며, 그의 후계자 문다(1006–1026) 때 서강가 왕국과 동맹을 맺었다.[42] 이후 비슈누바르다나 때부터 호이살라는 서찰루키아를 대신하는 카르나타카 지역의 차기 강대국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는데,[43][44] 촐라 제국을 침공하여 영토 확장을 시도하였으며, 1116년 촐라 제국으로부터 강가바디를 빼앗으면서 수도를 벨루르에서 할레비두로 옮겼다.[45][46][47][48]
비슈누바르다나의 독립 제국 건설 야망은 그의 손자 비라 발랄라 2세(1187-1193)에 의해 실현되었다.[49][50][51] 호이살라 제국은 서찰루키아 제국 내 하나의 세력으로 시작되어 비슈누바르다나, 비라 발랄라 2세, 이후 비라 발랄라 3세 등의 강력한 군주들과 함께 카르나타카 지역에서 점차 세력을 넓혀나갔다.[52] 비라 발랄라 2세는 판디아 왕국이 촐라 제국을 침공한 틈을 타 판디아 왕국을 기습 공격하였다.[53][54][55][56] 그는 "촐라 왕국의 건국자", "남쪽의 황제", "호이살라 황제"라고 불렸으며,[57] 칸나다 민화에 따르면 그에 의해 도시 방갈로르가 건설되었다.[58]
1225년경 호이살라는 타밀나두 지역으로 세력을 넓혀 스리랑감 근처의 칸나누르 쿠팜을 지방 수도로 삼고 남부 데칸 지역을 장악했다.[59] 13세기 중반, 나라심하 2세의 아들 소메슈바라는 차남 라마나타와 함께 촐라 왕국의 중심지인 스리랑감에 가까운 카베리 강 하류 북안의 칸나누르를 거점으로 하여, 침입해 오는 판디야 왕조, 카카티야 왕조와 싸웠다.[19] 이 때문에 수도 도라사무드라는 장남 나라심하 3세에게 맡겨져 호이살라 왕조는 남북으로 분할되었다.[19] 13세기 말, 비라 발랄라 3세는 판디아 왕국의 봉기로 잃어버린 타밀나두의 영토를 탈환하여 호이살라의 북부와 남부를 통일시켰다.[60][61][62][63]
14세기 초, 인도 북부 데칸 지역에서는 델리 술탄국의 술탄 알라웃딘 할지가 남인도를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키려는 움직임으로 중요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1311년 야다바 왕조의 수도 데바기리를 약탈하기 위해 남부 원정에 사령관 말리크 카푸르를 보냈다.[64] 1336년까지 델리 술탄국은 마두라이의 판디아 왕국, 와랑갈의 카카티야 왕국, 그리고 캄필리에 있는 약소국을 정복했다. 호이살라 제국은 침략군에 저항한 유일한 힌두 제국이었으며,[65] 비라 발랄라 3세는 티루반나말라이에 주둔하여 북부의 델리 술탄국과 남부의 마바르 술탄국에 대해 격렬하게 저항하였다.[66] 30년에 가까운 저항 끝에 비라 발랄라 3세는 1343년 마두라이 전투에서 전사했고,[67] 호이살라 제국의 주권과 영토는 퉁가바드라강 지역에서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하리하라 1세에게 병합되었다.[68][69]
3. 1. 왕조의 성립 (11세기 ~ 12세기)
Nripa Kama II|누리파 카마 2세영어 때 호이살라 왕국이 형성되었으며, 그의 후계자 문다(1006–1026) 때 서강가 왕국과 동맹을 맺었다.[42] 이후 비슈누바르다나 때부터 호이살라는 서찰루키아를 대신하는 카르나타카 지역의 차기 강대국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는데,[43][44] 촐라 제국을 침공하여 영토 확장을 시도하였으며, 1116년 촐라 제국으로부터 강가바디를 빼앗으면서 수도를 벨루르에서 할레비두로 옮겼다.[45][46][47][48]비슈누바르다나의 독립 제국 건설 야망은 그의 손자 비라 발라라 2세에 의해 실현되었다.[49][50][51] 비라 발랄라 2세는 판디아 왕국이 촐라 제국을 침공한 틈을 타 판디아 왕국을 기습 공격하였다.[53][54][55][56] 그는 "촐라 왕국의 건국자"(Cholarajyapratistacharya), "남쪽의 황제"(Dakshina Chakravarthi), "호이살라 황제"(Hoysala Chakravarthi)라고 불리었으며,[57] 칸나다 민화에 따르면 그에 의해 도시 방갈로르가 건설되었다.[58]
호이살라의 시조로 여겨지는 는 마이소르 지방・서가츠 산맥에 거주하는 산간 부족의 수장이었다고 여겨진다.[19] 11세기에 평야부로 진출하여, 마이소르 지방으로 침입해 온 촐라 왕조와의 전투에서 서강가 왕조와 후기 찰루키아 왕조를 도왔으며, 후자의 봉신(제후)이 되었다.[19]
누리파 카마의 아들인 비나야디티야도 후기 찰루키아 왕조를 섬겼으며, 카베리 강 상류의 마이소르 북서쪽 100km 지점인 도라사무드라를 본거지로 세력을 확장했다.
비나야디티야의 손자에 해당하는 비슈누바르다나 때, 후기 찰루키아 왕조의 비크라마디티야 6세가 사망하자 왕위 계승 분쟁이 격화되었고, 호이살라의 세력은 더욱 강대해져서 사실상 독립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18] 그 힘은 촐라 왕조로부터 마이소르 동쪽의 타라카드를 빼앗았고, 찰루키아 왕조의 영토도 병합하려 시도할 정도였다.[19]
또한, 비슈누바르다나는 종교 철학자였던 라마누자에게 사사받아 비슈누파로 개종했으며, 수도에 호이살레슈바라 사원 등을 건설했다.[18]
3. 2. 독립과 전성기 (12세기 ~ 13세기)
니리파 카마 2세 때 호이살라 왕국이 형성되었으며, 그의 후계자 문다(1006–1026)는 서강가 왕국과 동맹을 맺었다.[42] 비슈누바르다나 때부터 호이살라는 서찰루키아를 대신하는 카르나타카 지역의 차기 강대국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으며,[43][44] 촐라 제국을 침공하여 영토 확장을 시도하였다. 1116년 촐라 제국으로부터 강가바디를 빼앗으면서 수도를 벨루르에서 할레비두로 옮겼다.[45][46][47][48]비슈누바르다나의 독립 제국 건설 야망은 그의 손자 발라라 2세(1187-1193)에 의해 실현되었다.[49][50][51] 발라라 2세 때, 찰루키아 왕조는 봉신인 칼라추리 가문에 수도 칼리야니를 20여 년간 점령당하는 상황이었다. 후기 찰루키아 왕조의 소메슈바라 4세는 1183년, 야다바 왕조의 공격으로 약해진 칼라추리 가문으로부터 칼리야니를 탈환하여 즉위했다. 그러나 곧 자신도 야다바 왕조의 공격을 받아 남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발라라 2세는 이를 기회로 1189년 후기 찰루키아 왕조의 소메슈바라 4세를 멸망시켰다.[18][19] 또한, 발라라 2세는 야다바 왕조의 빌라마 5세를 격파하여 격퇴하고, 야다바 왕조의 카베리 강 상류 유역으로의 남진을 저지했으며, 야다바 왕조가 빼앗은 찰루키아 영토의 남쪽 절반을 획득했다.[18][19]
호이살라 제국은 비슈누바르다나, 발라라 2세, 이후 발라라 3세 등의 강력한 군주들과 함께 카르나타카 지역에서 점차 세력을 넓혀나갔다.[52] 발라라 2세는 판디아 왕국이 촐라 제국을 침공한 틈을 타 판디아 왕국을 기습 공격하였다.[53][54][55][56] 그는 "촐라 왕국의 건국자", "남쪽의 황제", "호이살라 황제"라고 불리었으며,[57] 칸나다 민화에 따르면 그에 의해 도시 방갈로르가 건설되었다.[58]
13세기, 초라 왕조와 판디야 왕조의 항쟁이 격화됨에 따라, 발라라 2세의 아들 나라심하 2세는 초라 왕조와 동맹하여 카베리 강 하류 유역의 타밀 지방으로 진출하게 되었다.[19] 호이살라는 1225년경 타밀나두 지역으로 세력을 넓혀 스리랑감 근처의 칸나누르 쿠팜을 주도로 삼고 남부 데칸 지역을 장악했다.[59] 비라 나라심하 2세의 아들 비라 소메슈와라는 판디야스와 촐라족으로부터 "삼촌"이라는 경칭을 얻었다. 1220년부터 1245년까지 왕조의 패권은 남쪽으로 확장되어 촐라 왕국과 판디야 왕국을 모두 아우르게 되었다.
13세기 중반, 소메슈바라는 차남 라마나타와 함께, 초라 왕조의 중심지인 스리랑감에 가까운 카베리 강 하류 북안의 칸나누르를 본거지로 하여, 침입해 오는 판디야 왕조, 카카티야 왕조와 싸웠다.[19] 그 때문에, 수도 도라사무드라는 장남 나라심하 3세에게 맡겨지게 되어, 호이살라 왕조는 두 개의 중심을 갖게 되었고, 남북으로 분할되었다.[19] 13세기 말, 비라 발랄라 3세는 판디아 왕국의 봉기로 잃어버린 타밀나두의 영토를 탈환하여 호이살라의 북부와 남부를 통일시켰다.[60][61][62][63]
3. 3. 남인도 진출과 분열 (13세기)
비슈누바르다나의 손자 비라 발랄라 2세는 판디아 왕국이 촐라 제국을 침공한 틈을 타 판디아 왕국을 기습 공격하였다.[53][54][55][56] 비라 발랄라 2세는 "촐라 왕국의 건국자"(Cholarajyapratistacharya), "남쪽의 황제"(Dakshina Chakravarthi), "호이살라 황제"(Hoysala Chakravarthi)라고 불렸으며,[57] 칸나다 민화에 따르면 그에 의해 도시 방갈로르가 건설되었다.[58]1225년경 호이살라는 타밀나두 지역으로 세력을 넓혀 스리랑감 근처의 칸나누르 쿠팜(Kannanur Kuppam)을 지방 수도로 삼고 남부 데칸 지역을 장악했다.[59] 13세기 중반, 나라심하 2세의 아들 소메슈바라는 차남 라마나타와 함께 촐라 왕국의 중심지인 스리랑감에 가까운 카베리 강 하류 북안의 칸나누르를 거점으로 하여, 침입해 오는 판디야 왕조, 카카티야 왕조와 싸웠다.[19] 이 때문에 수도 도라사무드라는 장남 나라심하 3세에게 맡겨져 호이살라 왕조는 남북으로 분할되었다.[19] 이는 훗날 왕위 계승 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13세기 말, 비라 발랄라 3세는 판디아 왕국의 봉기로 잃었던 타밀나두의 영토를 탈환하여 호이살라의 북부와 남부를 통일시켰다.[60][61][62][63]
3. 4. 재통일과 멸망 (13세기 말 ~ 14세기)
1264년 소메슈바라가 사망한 후, 나라심하 3세와 라마나타는 도라사무드라와 칸나누르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분열되어 서로 반목하며 다투었다. 그 사이 야다바 왕조, 카카티야 왕조, 판디아 왕조의 공격도 있었다.[19] 1300년 전후, 나라심하 3세의 아들 발랄라 3세가 칸나누르의 비슈바나타를 멸망시키고 남북으로 분열된 왕국을 재통일했다.13세기 말, 비라 발랄라 3세는 판디아 왕국의 봉기로 잃어버린 타밀나두 영토를 탈환하여 호이살라의 북부와 남부를 통일시켰다.[60][61][62][63]
그러나 당시 북인도에서는 할지 왕조가 강력하게 흥기했고, 술탄 알라웃딘 할지는 명장 말리크 카푸르에게 남방 원정을 명령했다. 1307년 야다바 왕조의 수도 데바기리를 함락시켰고, 1309년에는 카푸르가 카카티야 왕조의 수도 와랑갈을 함락시켰다. 1310년 (1311년영어 2월이라는 설도 있음)에는 호이살라 왕조의 수도 도라사무드라까지 함락시켰다.[20][21] 발랄라 3세는 강화를 맺고 막대한 재보를 바쳤을 뿐만 아니라, 매년 공납에도 응했다.[22][23][18]
14세기 초, 이슬람교 지배하에 있던 인도 북부 데칸 지역에서는 중요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델리 술탄국의 술탄 알라웃딘 할지는 남인도를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키고자 1311년 야다바 왕조의 수도 데바기리를 약탈하기 위해 남부 원정에 사령관 말리크 카푸르를 보냈다.[64]
1320년 할지 왕조가 멸망하자 호이살라 왕조는 잠시 독립했지만, 1323년 투글루크 왕조의 울루그 칸이 원정군을 파견하자 와랑갈과 마두라이를 함락당하고 다시 복종하게 되었다.[24]
그럼에도 호이살라 왕조는 굴종을 강요당하면서도 간신히 독립을 유지하며 일정한 세력을 유지했다.[24] 1334년 이후, 투글루크 왕조에 대항하여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에 호응했지만, 그 과정에서 생겨난 비자야나가라 왕국과는 적대했다.[24]
1334년 발랄라 3세는 투글루크 왕조로부터 독립한 남쪽의 마두라이 술탄 왕조와 격렬하게 항쟁했고, 1342년 칸나누르에서 마두라이 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하며 50년에 걸친 긴 치세를 마쳤다.[24]
1336년까지 델리 술탄국은 마두라이의 판디아 왕국, 와랑갈의 카카티야 왕국, 그리고 캄필리에 있는 약소국을 정복했다. 호이살라 제국은 침략군에 저항한 유일한 힌두 제국이었으며,[65] 비라 발랄라 3세는 티루반나말라이에 주둔하여 북부의 델리 술탄국과 남부의 마바르 술탄국에 대해 격렬하게 저항하였다.[66] 30년에 가까운 저항 끝에 비라 발랄라 3세는 1343년 마두라이 전투에서 전사했고,[67] 호이살라 제국의 주권과 영토는 퉁가바드라강 지역에서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하리하라 1세에게 병합되었다.[68][69]
이후 아들 발랄라 4세도 수년간 저항을 계속했지만, 1346년 비자야나가라 왕국과의 전투에서 전사하며 호이살라 왕조는 멸망했다.
4. 행정
호이살라 제국은 행정 기능을 다룰 때 내각 조직 및 명령, 지방 통치 기관의 구조 및 영토 분할과 같은 이전의 잘 확립되고 입증된 방법 중 일부를 따랐다.[70]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많은 고위직의 이름이 기록에 나타나는데, 수석 장관은 "판차 프라다나"라고 불렸고, 외무장관은 "산디비그라히", 최고 재무관은 "마하반다리" 또는 "히란야반다리"였다. 군대를 담당하는 "단다나야카"와 호이살라 법정의 수석 판사직인 "다르마디카리"도 있었다.
왕국은 지리적 크기의 내림차순으로 나두, 비샤야, 캄파나와 데샤로 나열된 지방으로 분할되었다.[71] 각 지방에는 그 속주의 통치자(단다나야카)에게 보고하는 장관(마하프라다나)과 재무(반다리)로 구성된 지방 통치 기구가 있었다. 이 지역 통치자 아래에는 헤가데스와 가분다스라고 불리는 관리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땅을 경작하기 위해 모집된 지역 농부와 노동자를 고용하고 감독하였다. 알루파스와 같은 종속 지배를 받던 씨족은 제국이 정한 정책에 따라 각자의 영토를 계속 통치하였다.[72]
가루다스로 알려진 잘 훈련된 정예 근위대는 항상 왕실의 구성원을 호위하였다. 이 가신들은 그들의 주인 옆에서 밀접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움직였는데, 이들은 너무나 완벽한 충성심을 지녔던 나머지 주인이 죽으면 자살하였으며,[73] 이 근위대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영웅석(virgal)을 가루다 기둥이라고 하였다. 할레비두의 호이살레스와라 사원에 있는 가루다 기둥은 비라 발랄라 2세 왕의 장관이자 경호원인 쿠바라 락슈마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비슈누바르다나 왕의 동전에는 칸나다 문자로 쓰여진 놀람바다비의 승리자(놀람바다비곤다), 탈라카드의 승리자(탈라카두곤다), 말레파스의 수석(말레파롤간다), "말레파의 용기(말라파비라)"라는 전설이 들어가 있다.[74][75] 혼누 또는 가드야나라고 불리던 이들 금화의 무게는 62그레인으로, 파나 또는 하나는 혼누의 10분의 1이고 하가는 파나의 4분의 1이며 비샤는 하가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다른 주화로 벨리와 카니가 있었다.[76]
5. 수도
최초의 호이살라 수도는 오늘날 치크마갈루르 구의 앙가디에 있는 소사부르(사사카푸라, 소세부루 또는 소사부르파타나라고도 함)였다. 소사부르는 1026년부터 1048년까지 호이살라의 수도였다. 그러나 수도가 옮겨진 후에도 소사부르는 자이나교의 종교 중심지뿐만 아니라 중요한 상업 및 행정 중심지로 남아있었다.[77]
1048년, 호이살라의 수도는 벨루르로 옮겨졌다. 벨루르가 수도로서 매력적인 장소였던 이유는 야가치 강에 위치해 일년 내내 물이 잘 공급되었고, 언덕이 많은 지형에 위치해 있어 쉽게 방어할 수 있었으며, 중요한 무역로에 놓여져 있어 상업과 통신 모두를 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벨루르는 다시 옮겨지기 전까지 10년 동안 거의 수도 역할을 하지 못했다.
세 번째이자 가장 오래 지속된 호이살라의 수도는 오늘날 할레비두에 위치한 드와라사무드라(도라사무드라 또는 드바라바티푸르라고도 불림)였다. 드와라사무드라는 1062년에 수도가 되었고 왕조가 끝날 때까지 수도로 남아 있었다. 이동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행정적인 편의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드와라사무드라와 벨루르를 연결하고 야가치 강에서 드와라사무드라로 물을 가져오는 운하가 건설되었다. 두 개의 무역로가 도시를 통과했고, 수십 개의 사원이 그 안에 지어졌다. 도시는 14세기에 쇠퇴했다.
6. 사회
호이살라 시대는 종교, 정치, 문화적인 발전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기였다. 사회는 점차 정교해졌으며, 여성의 지위는 다양했다. 일부 왕족 여성들은 행정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비라 발랄라 2세가 북부 영토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여왕 우마데비가 할레비두를 다스린 것이 그 예이다. 그녀는 또한 적대적인 봉건 반란군과 싸워 물리쳤다.[78] 샨탈라 데비 여왕의 춤과 음악 실력, 12세기 바차나 사히티아 시인이자 린가야티 신비주의자인 아카 마하데비의 바크티 운동에 대한 헌신 등 여성들의 예술 참여도 기록되어 있다.[79]
사원 무용수(데바다시)는 흔한 직업이었고, 일부는 교육을 잘 받고 예술에 능숙했다. 이러한 자격은 그들에게 매일의 일상적인 업무에 갇힌 다른 도시 및 농촌 여성들보다 더 많은 자유를 주었다.[80] 사티 관행이 만연했고 매춘은 사회적으로 용인되었다.[81] 카스트 제도는 인도 대부분의 지역과 마찬가지로 뚜렷하게 존재했다.[81]
서해안 무역은 아랍인, 유대인, 페르시아인, 한족, 말레이 반도 출신 등 많은 외국인들을 인도에 데려왔다.[82] 제국의 확장에 따른 남인도 내 인구 이동은 새로운 문화와 기술의 유입을 만들어냈다.[83] 남인도에서 마을은 "파타나" 또는 "파타남"이라고 불렸고 시장은 "나가라" 또는 "나가람"이라고 불렸으며, 시장은 도시의 핵으로 작용했다. 슈라바나벨라골라와 같은 일부 마을은 7세기 종교적 정착지에서 12세기 부유한 상인들의 도착과 함께 중요한 무역 중심지로 발전했으며, 벨루르와 같은 마을은 비슈누바르다나 왕이 체나케사바 사원을 지었을 때 왕실 도시의 분위기를 얻었다. 왕실의 후원을 받은 대형 사원은 종교적, 사회적, 사법적 목적을 수행하여 왕을 "지상의 신"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사원 건축은 종교적 기능뿐만 아니라 상업적 기능도 수행했으며, 힌두교의 특정 종파에 국한되지 않았다. 할레비두의 샤이바 상인들은 벨루르에 지어진 체나케사바 사원과 경쟁하기 위해 호이살레스와라 사원의 건설 자금을 지원하여 할레비두를 중요한 도시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호이살라 사원은 세속적이었으며 모든 힌두교 종파의 순례자를 장려했으며, 소마나타푸라의 케사바 사원은 엄격한 바이슈나바 조각 묘사가 있는 예외였다.[15] 농촌 지역의 부유한 지주들이 지은 사원은 농업 공동체의 재정적,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요구를 충족시켰다. 대형 사원은 다양한 길드와 직업의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고용을 제공하고 현지 공동체를 유지하는 기관 역할을 했으며, 힌두교 사원은 부유한 불교 수도원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7. 경제
호이살라 왕조는 농업 경제를 기반으로 수입을 얻어 유지되었다.[84] 왕은 농산물과 임산물을 생산하는 소작농에게 봉사에 대한 보상으로 토지를 주었고, 이들은 지주(가분다)가 되었다. 가분다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었는데, 백성의 가분다(프라자 가분다)는 부유한 영주의 가분다보다 지위가 낮았다.[85] 온대 기후의 고지대(말나드)는 소를 기르고 과수원과 향신료를 재배하기에 적합했다. 벼를 포함한 곡류는 열대 평야(발리나드)의 주요 작물이었다. 호이살라는 지역 주민에게 세금을 징수하여 물탱크, 수문이 있는 저수지, 운하, 우물 등 관개 시설을 건설하고 유지했다. 비슈누사가라, 샨티사가라, 발라바라야사가라와 같은 관개 시설은 국가의 비용으로 만들어졌다.
인도 왕국에서 운송 수단과 군대의 기병대로 사용하기 위해 말을 수입하는 것은 서부 해안에서 번성하는 사업이었다.[86] 오늘날 케랄라주에 있는 항구를 통해 수출된 티크나무와 같은 풍부한 목재를 얻기 위해 숲을 벌채했다. 송나라 기록에서 남중국해 항구에 인도 상인이 있었다는 언급은 해외 왕국과 활발한 교역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87] 남인도는 직물, 향신료, 약초, 보석, 도자기, 소금, 금, 상아, 코뿔소 뿔, 흑단, 침향나무, 향수, 백단향, 장뇌 등을 중국, 도파르, 아덴, 시라프((이집트, 아라비아, 페르시아로 가는 관문)에 수출하였다.[88] 건축가(비슈와카르마스), 조각가, 채석장 노동자, 금 세공인 및 기타 사원 건축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무역은 활발한 사원 건축 활동으로 인해 번성하였다.[89][90]
촌의회는 토지세를 징수하는 일을 맡았다. 시다야라고 불리던 토지 수입은 원래 불입 추징과 각종 세금이 포함되었으며,[91] 주로 직업, 결혼, 병거나 마차로 운송되는 물품, 가축 등에 세금이 부과되었다. 상품(금, 보석, 향수, 백단향, 밧줄, 실, 주택, 난로, 상점, 소금 냄비, 사탕수수 압착기) 및 농산물(후추, 빈랑 잎, 버터 기름, 벼, 향신료, 야자 잎, 코코넛, 설탕)에 대한 세금은 마을 기록부에 기록되었다.[92] 촌의회는 물탱크 건설과 같은 특정 목적을 위해 세금을 부과할 수 있었다.
8. 종교
11세기 초 촐라족에게 자이나교를 믿던 서강가족이 패배하고, 12세기에 비슈누교와 시바교 신자들이 증가하면서 자이나교에 대한 사람들의 흥미가 감소하였다.[93] 호이살라 영토에서 주목할 만한 자이나교 신앙지 두 곳은 슈라바나벨라곤다와 캄바다할리 판차쿠타 바사디였다. 8세기에 샹카라의 아드바이타 베단타가 남인도로 전파되면서 남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기 시작되었다.[94] 호이살라 시대의 유일한 불교 예배 장소는 담발과 발리가비였다. 비슈누바르다나의 왕비 샨탈라 데비는 자이나교도였지만, 벨루르에 카페 첸니가바라야 힌두교 사원을 의뢰하였는데, 이는 왕가가 모든 종교에 관대했다는 증거이다.
호이살라의 지배기 동안 바사바, 마드바차르야, 라마누자의 세 철학자에게 영감을 받으면서 오늘날의 카르나타카주에서 세 가지 중요한 종교적 발전이 이루어졌다.
링가야트교의 기원은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이 운동은 12세기에 바사바와의 연관성을 통해 성장하였다.[95] 아디 샹카라의 가르침에 비판적이었던 마드바차르야는 세상은 환상이 아니라 실재하는 곳이라고 주장하였다.[96] 그의 드바이타 베단타는 우두피에서 인기를 얻으며 8개의 마타를 세울 수 있었다. 스리랑감에 있는 비슈누파 수도원의 수장인 라마누자는 헌신의 길(바크티 마르가)를 설파하고 아디 샹카라의 아드바이타에 대한 비평서인 스리바슈야를 저술하였다.[97]
이러한 종교적 발전은 남인도의 문화, 문학, 시 및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다음 세기까지 이들 철학자들의 가르침을 기초로 중요한 시와 문학 작품들이 쓰여졌다.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살루바, 툴루바, 아라비두 왕조는 비슈누파 힌두교도였으며, 비자야나가라의 비탈라푸라 지역에는 라마누자의 이미지가 있는 비슈누파 사원이 있다.[98] 후기 마이소르 왕국의 학자들은 라마누자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비슈누파 작품을 저술하였다.[99] 비슈누바르다나 왕은 자이나교에서 비슈누파 힌두교로 개종한 후 많은 사원을 지었다.[100][101] 마드바차르야 교단의 후기 성자인 자야티르타, 비야사티르타, 스리파다라자, 바디라자 티르타와 비자야 다사, 고팔라다사 및 카르나타카에서 온 다른 사람들과 같은 추종자들은 그의 가르침을 널리 퍼뜨렸다.[102] 그의 가르침은 구자라트의 발라바, 벵골의 차이타냐 마하프라부와 같은 후기 철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103] 17세기와 18세기에 도래한 또 다른 바크티의 물결은 그의 가르침에서 영감을 얻었다.[104]
9. 언어 및 문학
호이살라 통치자들은 칸나다어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는 그들의 비문에서 잘 나타나는데, 종종 산문보다는 세련되고 시적인 언어로 작성되었으며 여백에는 꽃무늬 디자인의 삽화가 그려져 있다.[105] 역사학자 셸던 폴로크에 따르면, 호이살라 시대에 칸나다어는 산스크리트어를 완전히 대체하는 궁정 언어로 자리잡게 되었다.[106] 사원은 브라만 학자들이 산스크리트어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지역 학교 역할을 했으며, 자이나교와 불교 수도원은 수습 승려들을 교육했다. 고등 교육 기관은 가티카스라고 불렸다. 현지 칸나다어는 신과 가까워지는 황홀한 체험(바차나 및 데바라나마)을 표현하는 바크티 운동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서로 묶인 종려나무 잎에 문학 작품이 쓰여 있었다. 지난 세기에 자이나교 작품이 칸나다어 문학을 지배했지만 시바파와 초기 브라만 작품은 호이살라 통치 기간 동안 인기를 얻었다.[107] 산스크리트어로 된 글에는 시, 문법, 사전, 매뉴얼, 수사학, 오래된 작품에 대한 주석, 산문 소설 및 드라마가 포함되었다.[108] 비문(Shilashasana) 외에 동판(타마라샤사나)은 칸나다어로 주로 쓰여져 있지만, 일부는 산스크리트어 또는 이중 언어로 쓰여졌다. 칭호, 족보, 왕의 기원 신화 및 축도를 기재한 이중 언어 비문 구절은 일반적으로 산스크리트어로 작성되었다. 칸나다어는 토지, 경계, 지방 당국의 참여, 수혜자의 권리와 의무, 세금 및 회비, 증인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여 보조금 조건을 명시하는데 사용되었다. 이를 통해 현지 사람들이 모호함 없이 내용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109]
호이살라 지배기 동안 산스크리트어 문학은 여전히 인기를 얻었으나, 현지 칸나다어 학자들의 왕실 후원도 증가하였다.[110][111][112] 12세기에 일부 작품은 참푸 스타일로 작성되었지만,[113]독특한 칸나다어 미터법이 더 널리 받아들여졌다. 상가티야 운율은 작곡에 사용되었으며,[114] 샤트파디(6행), 트리파디(3행) 운문 및 라갈레(서정시) 운율이 유행하게 되었다. 자이나교의 작품은 계속해서 티르탕카라의 미덕을 찬양하였다.[115]
호이살라 궁정은 자나, 루드라바타, 하리하라 및 그의 조카인 라가반카 등의 학자들을 후원하였으며, 그들의 작품은 칸나다어에서 오래 지속된 걸작으로 꼽힌다. 1209년에 자이나교 학자 자나는 지역 신인 마리암마에게 두 어린 소년을 제물로 바치려고 한 왕이 이들을 불쌍히 여긴 나머지 소년들을 풀어주고 인신공양을 포기하는 이야기 담긴 《야소다라차리테》라는 작품을 썼으며,[116][117] 이 작품을 기념하기 위해 자나는 비라 발랄라 2세 왕으로부터 "시인의 황제"라는 뜻의 카비차크라바르티라는 칭호를 받았다.[118]
스마르타파 브라만 루드라바타(Rudrabhatta)는 최초의 유명한 브라만 작가로, 그의 후원자는 비라 발랄라 2세 왕의 장관인 찬드라물리였다.[119] 그는 비슈누 푸라나 초기작을 기초로 악마 바나수라와의 싸움으로 이어지는 크리슈나의 삶과 관련된 참푸 양식의 《자간나타 비자야》를 썼다.
링가야티 작가이자 나라심하 1세 왕의 식객인 하리하라(Harisvara)는 시바와 파르바티의 결혼을 10개의 절로 설명하는 오래된 자이나교 참푸 작품인 《기리자칼랴나》를 썼다.[120][121] 그는 바차나 문학 전통의 일부가 아닌 최초의 비라샤이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할레비두(Halebidu)의 회계사 가족(카라니카스) 출신으로 함피(Hampi)에서 수년 동안 비루팍샤(시바의 한 형상)를 찬양하는 100편 이상의 라갈을 썼다.[122] 라가반카는 드물게 칸나다어 문법의 엄격한 규칙을 위반했지만 고전으로 간주되는 하리샤찬드라 카비야에서 샤트파디 운율을 처음으로 칸나다어 문학에 도입하였다.[123]
산스크리트어로는 철학자 마드바차리야가 《브라흐마 수트라》(베다에 대한 논리적 설명이 담긴 힌두교 경전)와 다른 학파의 교리를 반박하는 많은 논쟁이 담긴 《리그브샤야》를 저술하였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베다보다 푸라나에 더 의존하였다.[124] 또 다른 유명한 작품으로는 비다트리타의 《루드라프르슈나바슈야》가 있다.
10. 건축
오늘날 호이살라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군사적인 이유가 아니라 예술과 건축 양식 때문이다. 남쪽의 판디아 왕국과 북쪽의 세부나 왕국의 끊임없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국토 전역에 걸쳐 활발한 사원 건축이 이루어졌다. 호이살라의 건축 양식은 서찰루키아 양식을 따랐으며,[125][126] 뚜렷한 드라비다적인 요소를 보여준다.[127] 호이살라 건축 양식은 전통적인 드라비다 양식과 구별되는 카르나타 드라비다로 묘사되며,[128] 많은 독특한 특징들을 가진 독립적인 건축 전통으로 간주된다.[129][130][131]
호이살라 사원 건축의 특징은 숙련된 장인 정신으로 탄생한 정교한 디테일이다.[132] 사찰 사당 위 탑(비마나)은 복잡한 조각으로 섬세하게 마무리되어 있어 탑의 형태와 높이는 웅장하고 부분적으로는 정교하고 세밀한 모습을 보여준다.[133][134] 율동적인 돌출과 음각으로 이루어진 사당 기지의 기단 디자인은 장식된 층계를 질서정연하게 이어가며 탑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호이살라 사원의 조각은 여성적인 아름다움, 우아함, 체격을 묘사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으며, 장인정신을 통해 갖춘 섬세함을 강조한다.[135] 호이살라 예술가들은 사원건축 시 기본 건물과 조각 재료로 부드러운 돌인 수프스톤(염색체 분화구)을 사용하여 이러한 섬세함을 완성하였다.[136][137]
벨루르의 체나케사바 사원(1117), 할레비두의 호이살레스와라 사원(1121), 소마나타푸라의 체나케사바 사원(1279), 아라시케레에 있는 절, 암루타푸라, 코라방갈라의 부체스와라 사원(1173), 하란할리의 락슈미나라심하 사원(1235), 모살레, 바사랄루(1234)는 호이살라 미술의 대표적인 예다. 벨루르와 할레비두의 사원은 조각상의 아름다움 때문에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다른 모든 사원의 외벽에는 힌두교 서사시를 묘사한 복잡한 석조 조각과 수평 프리즈(장식 몰딩)가 들어 있다. 이러한 묘사는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시계방향으로 진행된다. 할레비두 사원은 힌두교 건축의 뛰어난 예로서 인도 건축에서 중요한 이정표로 묘사되어 왔다.[138] 벨루르와 할레비두 사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139]
호이살라 왕조 시대에는 벽면에 섬세한 부조를 새기고, 평면 계획이 돌출부를 지그재그 형태로 하여 별 모양을 이루는 3개의 성당이 한 조를 이루는 독특한 호이살라 양식의 사원이 건립되었다.[18] 주로 비슈누바르다나가 수도 도라사무드라에 건립한 Hoysaleswara Temple|호이살레스와라 사원영어이나, 호이살레스와라 사원보다 약간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수도의 약간 남서쪽에 위치한 베루르에 건립된 Chennakeshava Temple, Belur|첸나케샤바 사원영어, 더 남서쪽의 카베리강 중류 유역의 소마나타푸라에 건립된 Chennakeshava Temple, Somanathapura|케샤바 사원영어이 있다. 2023년에 이 3곳은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25]
성당의 지붕 평면 계획은 기부에 맞춰 별 모양이지만 옆에서 보면 종 모양이다. 사원의 기부에는 최하부에 코끼리 열, 그 위에 말 열, 신화적인 동물들, 당초문, 신화적인 장면들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다.[18]
11. 유산
오늘날 호이살라가 주목받는 이유는 군사적인 이유가 아니라 예술과 건축 양식 때문이다. 남쪽의 판디아 왕국과 북쪽의 세부나 왕국의 끊임없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호이살라는 국토 전역에 걸쳐 활발하게 사원을 건축했다. 호이살라의 건축 양식은 서찰루키아 양식을 따랐으며,[125][126] 뚜렷한 드라비다적인 요소를 보여준다.[127] 호이살라 건축 양식은 전통적인 드라비다 양식과 구별되는 카르나타 드라비다로 묘사되며,[128] 많은 독특한 특징들을 가진 독립적인 건축 전통으로 간주된다.[129][130][131]
호이살라 사원 건축의 특징은 숙련된 장인 정신으로 탄생한 정교한 디테일이다.[132] 사찰 사당 위 탑(비마나)은 복잡한 조각으로 섬세하게 마무리되어 있어 탑의 형태와 높이는 웅장하고 부분적으로는 정교하고 세밀한 모습을 보여준다.[133][134] 율동적인 돌출과 음각으로 이루어진 사당 기지의 기단 디자인은 장식된 층계를 질서정연하게 이어가며 탑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호이살라 사원의 조각은 여성적인 아름다움, 우아함, 체격을 묘사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으며, 장인정신을 통해 갖춘 섬세함을 강조한다.[135] 호이살라 예술가들은 사원 건축 시 기본 건물과 조각 재료로 부드러운 돌인 수프스톤(염색체 분화구)을 사용하여 이러한 섬세함을 완성하였다.[136][137]
벨루르에 있는 첸나케사바 사원(1117), 할레비두에 있는 호이살레스와라 사원(1121), 소마나타푸라의 케샤바 사원(1279), 아라시케레에 있는 절, 암루타푸라, 코반글라(1173), 하란할리(1235), 모살, 바사랄루(1234)는 호이살라 미술의 대표적인 예다. 벨루르와 할레비두의 사원은 조각상의 아름다움 때문에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다른 모든 사원의 외벽에는 힌두교 서사시를 묘사한 복잡한 석조 조각과 수평 프리즈(장식 몰딩)가 들어 있다. 이러한 묘사는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시계방향으로 진행된다. 할레비두 사원은 힌두교 건축의 뛰어난 예로서 인도 건축에서 중요한 이정표로 묘사되어 왔다.[138] 벨루르와 할레비두 사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139]
호이살라 왕조 시대에는 벽면에 섬세한 부조를 새기고, 평면 계획이 돌출부를 지그재그 형태로 하여 별 모양을 이루는 3개의 성당이 한 조를 이루는 독특한 호이살라 양식의 사원이 건립되었다(호이살라 양식 건축).[18] 도라사무드라에 건립한 호이살레스와라 사원, 첸나케샤바 사원, 카베리강 중류 유역의 소마나타푸라에 건립된 케샤바 사원이 대표적이다. 2023년에 이 3곳은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25]
성당의 지붕 평면 계획은 기부에 맞춰 별 모양이지만 옆에서 보면 종 모양이다. 사원의 기부에는 최하부에 코끼리 열, 그 위에 말 열, 신화적인 동물들, 당초문, 신화적인 장면들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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