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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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로 2세는 1196년부터 1213년까지 아라곤의 왕이었다. 그는 카스티야, 나바라와 동맹하여 레콩키스타에 참여했으며, 1212년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승리했다. 프랑스 남부의 영토 분쟁으로 인해 알비 십자군과 대립했으며, 1213년 뮈레 전투에서 사망했다. 그의 아들 하이메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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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로 2세 | |
|---|---|
| 기본 정보 | |
![]() | |
| 칭호 | 아라곤 왕 |
| 통치 기간 | 1196년 4월 25일 – 1213년 9월 12일 |
| 대관식 | 1205년 로마 |
| 이전 통치자 | 알폰소 2세 |
| 다음 통치자 | 하이메 1세 |
| 배우자 | 마리 드 몽펠리에 (1204년 결혼, 1213년 사망) |
| 자녀 | 하이메 1세 |
| 왕가 | 바르셀로나 |
| 아버지 | 알폰소 2세 |
| 어머니 | 산차 데 카스티야 |
| 출생일 | 1178년 7월 |
| 출생지 | 우에스카 |
| 사망일 | 1213년 9월 12일 (35세) |
| 사망지 | 뮈레 |
| 매장지 | 산 후안 데 시헤나 수도원 |
| 이름 | |
| 카탈루냐어 | Pere el Catòlic |
| 아라곤어 | Pero II o Catolico |
| 스페인어 | Pedro II |
| 일본어 | ペドロ2世 / ペラ2世 |
| 통치 | |
| 아라곤 왕국의 통치 | 1196년 - 1213년 |
| 기타 정보 | |
| 별칭 | 가톨릭 신자 페로 2세 |
2. 생애
페로 2세는 아라곤의 알폰소 2세와 카스티야의 산차의 아들로 우에스카에서 태어났다.[2] 1196년 즉위 후, 카스티야 왕 알폰소 8세를 도와 나바라를 침공하여 산초 7세를 굴복시켰다. 1209년에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중재로 산초 7세와 화해했다.[13]
1205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해 로마에서 대관식을 올리고 가톨릭 신앙 수호를 맹세하여 "가톨릭"이라는 별칭을 얻었다.[3] 그는 교황에 의해 대관식을 치른 최초의 아라곤 왕이었다.[4] 13세기 초에는 세르다냐, 콩플랑, 루시용 백작령을 위한 삽화가 있는 코덱스 문서집인 Liber feudorum Ceritaniae를 의뢰했다.
1210년부터 레콩키스타에 힘을 쏟아 발렌시아의 국경 요새를 몇 개 빼앗았고, 1212년에는 알폰소 8세, 산초 7세와 함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 참전하여 무와히드 왕조 아미르 무함마드 알 나시르를 격파했다.[14]
프랑스 남부 영토 문제로 알비 십자군과 대립, 뮈레 전투에서 전사했다.[16] 그의 죽음은 훗날 "광기의 짓"이라고 평가받았다.[17] 어머니가 매장된 시헤나 수도원에 묻혔으나 이단으로 묘역 밖으로 지정되었다가,[15] 1217년 교황 호노리우스 3세에 의해 수도원 내로 이장되었다.[18]
2. 1. 초기 생애와 즉위
페테르는 우에스카에서 태어났으며,[2] 아라곤의 알폰소 2세와 카스티야의 산차의 아들이었다. 1205년에 그는 교황령의 봉건적 지배권을 인정하고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해 로마에서 대관식을 올렸으며, 가톨릭 신앙을 수호할 것을 맹세했다(그의 별칭인 "가톨릭"의 유래).[3] 그는 교황에 의해 대관식을 치른 최초의 아라곤 왕이었다.[4]13세기 초 페테르는 Liber feudorum Ceritaniae를 의뢰했는데, 이는 세르다냐, 콩플랑, 루시용 백작령을 위한 삽화가 있는 코덱스 문서집이었다.
2. 2. 결혼과 자녀
1204년 6월 15일, 페레 2세는 몽펠리에의 기욤 8세와 에우도키아 콤네네의 딸이자 상속녀인 몽펠리에의 마리와 결혼했다.[5] 마리는 페레 2세에게 아들 하이메를 낳아주었지만, 페레 2세는 곧 마리를 버렸다. 마리는 경건함과 결혼 생활의 고통으로 인해 대중적으로 성녀로 존경받았지만, 시성되지는 않았고, 1213년 로마에서 사망했다.크리스티앙 니크에 따르면, 마리는 1205년 10월 콜리우르에서 페레 2세의 딸 "산차"를 낳았을 수도 있다.[6] 다른 기록에 따르면 "산차"는 1206년에 태어났으며, 마크 그레고리 페그에 따르면 1208년에 태어났지만,[7] 1208년 2월이 부부의 아들 하이메가 태어난 해일 가능성이 더 높다. 니크는 1850년에 발견된 문서를 인용하며, 결혼 계약에는 마리의 상속 재산인 몽펠리에가 포함되었으며, 페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아이에게 넘겨질 예정이었다고 말한다.[8] 마리는 처음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몇 달 후 압력에 의해 동의했다.[6] 그러나 하이메는 산차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며, 니크의 정보에 따르면 산차는 새해 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6]
페레 2세는 1204년 몽펠리에 영주 기욤 8세의 딸이자 상속녀인 마리아 데 몽펠리에와 결혼했다.[19] 마리아의 어머니는 비잔틴 황녀 에우도키아 (마누엘 1세의 조카)였으며, 마리아는 이 결혼 전에 두 번의 이혼 경력이 있었다.[20] 페레 2세와 마리아 사이에서는 1남이 태어났다.
- 하이메 1세 (1208년 - 1276년) - 아라곤 왕 (1213년 - 1276년)
2. 3. 레콩키스타와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활동
페로 2세는 1212년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 지배의 전환점을 맞이한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 참여했다.[9] 아라곤 왕관은 현재 프랑스 남서부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으나, 당시에는 툴루즈 백작과 같은 봉신인 지역 영주들의 통제를 받았다. 카타르파 또는 알비겐스는 가톨릭 교회의 권위와 가르침을 거부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에게 알비겐스를 진압하도록 요청했다. 레스터 백작 5대 시몬 드 몽포르의 지도하에 원정이 시작되었다. 1209년에 시작된 알비 십자군은 약 20,000명의 남녀노소, 카타르파와 가톨릭 신자를 가리지 않고 학살했다. 20년 동안의 군사 작전은 이전의 번영했던 옥시타니아 문명을 파괴했고, 1229년까지 이 지역을 프랑스 국왕과 프랑스 북부의 카페 왕조의 통제하에 두었다.페로 2세는 1212년 가을 라스 나바스에서 돌아와 레스터 백작 5대 시몬 드 몽포르가 툴루즈를 정복하고, 페로 2세의 매제이자 봉신인 툴루즈 백작 레몽 6세를 추방한 것을 발견했다.[11] 페로 2세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1213년 9월 뮈레에 도착하여 몽포르의 군대와 대치했다.[9] 그는 툴루즈의 레몽과 동행했는데, 레몽은 페로 2세에게 전투를 피하고 대신 몽포르의 군대를 굶어 죽이라고 설득하려 했다. 이 제안은 거부되었다.
뮈레 전투는 1213년 9월 12일에 시작되었다.[9] 아라곤군은 혼란에 빠졌고, 몽포르의 부대의 공격에 붕괴되었다.[9] 페로 2세 자신도 치열한 전투에 휘말렸고, 용감한 최후의 저항으로 인해 사망했다. 그는 땅에 쓰러져 죽었다.[9] 아라곤군은 국왕이 살해되자 공황 상태에 빠졌고, 몽포르의 십자군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9]
아라곤 왕관의 봉신인 툴루즈 귀족들은 패배했다. 이 분쟁은 1229년 메오-파리 조약으로 절정에 달했으며, 옥시탄 영토가 프랑스 왕관에 통합되는 데 동의했다.
1196년에 즉위했을 때, 외사촌이자 아버지의 맹우였던 카스티야 왕국 왕 알폰소 8세가 레온 왕국 왕 알폰소 9세와 나바라 왕국 왕 산초 7세에게 동서에서 협공을 받아 곤경에 처해 있었다. 전년(1195년)에 무와히드 왕조 아미르 야쿠브 알 만수르에게 알라르코스 전투에서 대패한 것이 배경이었지만, 나바라와 국경 분쟁을 겪던 페로 2세는 알폰소 8세를 지원하여 1198년에 알폰소 8세와 함께 나바라를 침공하여 산초 7세를 카스티야에 굴복시켰다. 1209년, 대 무와히드 왕조에 대한 십자군 결성을 생각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의향을 받은 로리고 히메네스 데 라다의 중재로 산초 7세와 화해했다.[13]
1210년부터 레콩키스타에 힘을 쏟아 발렌시아의 국경 요새를 몇 개 빼앗았고, 다음 해인 1211년에 알폰소 8세와 회견하여 무와히드 왕조에 대한 카스티야로의 협력을 약속했으며, 1212년에는 알폰소 8세, 산초 7세와 함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 참전하여 무와히드 왕조 아미르 무함마드 알 나시르를 격파했다.[14]
그러나, 프랑스 남부의 영토를 두고 프랑스의 제후들과 대립하여 시몽 드 몽포르에게 아들 하이메(왕비 마리아 데 몽펠리에와의 사이에서 낳은 외아들, 훗날의 하이메 1세)를 넘겨줌으로써 전쟁을 회피하려 했으나, 결국 알비 십자군과 정면 대결하게 된다(카타리파에 가담한 것으로 여겨져 교황으로부터 파문도 당했다[15]). 1213년, 툴루즈 교외의 뮈레 전투에서 전사했다.[16] 무모하게도 자신이 직접 선두에 서서 적군에게 돌격했다고 전해지며, 훗날 증손자 하이메 2세는 "광기의 짓이다"라고 기록했다.[17]
2. 4. 알비 십자군과의 대립과 뮈레 전투
아라곤 왕관은 현재 프랑스 남서부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으나, 당시에는 툴루즈 백작과 같은 봉신인 지역 영주들의 통제를 받았다. 카타르파 또는 알비겐스는 가톨릭 교회의 권위와 가르침을 거부했다. 인노첸시오 3세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에게 알비겐스를 진압하도록 요청했다. 레스터 백작 5대 시몬 드 몽포르의 지도하에 원정이 시작되었다. 1209년에 시작된 알비 십자군은 약 20,000명의 남녀노소, 카타르파와 가톨릭 신자를 가리지 않고 학살했다. 20년 동안의 군사 작전은 이전의 번영했던 옥시타니아 문명을 파괴했고, 1229년까지 이 지역을 프랑스 국왕과 프랑스 북부의 카페 왕조의 통제하에 두었다.페로 2세는 1212년 가을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돌아와 레스터 백작 5대 시몬 드 몽포르가 툴루즈를 정복하고, 페로 2세의 매제이자 봉신인 툴루즈 백작 레몽 6세를 추방한 것을 발견했다.[11] 페로 2세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1213년 9월 뮈레에 도착하여 몽포르의 군대와 대치했다.[9] 그는 툴루즈의 레몽과 동행했는데, 레몽은 페로 2세에게 전투를 피하고 대신 몽포르의 군대를 굶어 죽이라고 설득하려 했다. 이 제안은 거부되었다.
뮈레 전투는 1213년 9월 12일에 시작되었다.[9] 아라곤군은 혼란에 빠졌고, 몽포르의 부대의 공격에 붕괴되었다.[9] 페로 2세 자신도 치열한 전투에 휘말렸고, 용감한 최후의 저항으로 인해 사망했다. 그는 땅에 쓰러져 죽었다.[9] 아라곤군은 국왕이 살해되자 공황 상태에 빠졌고, 몽포르의 십자군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9]
아라곤 왕관의 봉신인 툴루즈 귀족들은 패배했다. 이 분쟁은 1229년 메오-파리 조약으로 절정에 달했으며, 옥시탄 영토가 프랑스 왕관에 통합되는 데 동의했다.
페로 2세는 프랑스 남부의 영토를 두고 프랑스의 제후들과 대립하여 시몽 드 몽포르에게 아들 하이메(왕비 마리아 데 몽펠리에와의 사이에서 낳은 외아들, 훗날의 하이메 1세)를 넘겨줌으로써 전쟁을 회피하려 했으나, 결국 알비 십자군과 정면 대결하게 된다(카타리파에 가담한 것으로 여겨져 교황으로부터 파문도 당했다[15]). 1213년, 툴루즈 교외의 뮈레 전투에서 전사했다.[16] 무모하게도 자신이 직접 선두에 서서 적군에게 돌격했다고 전해지며, 훗날 증손자 하이메 2세는 "광기의 짓이다"라고 기록했다.[17]
참조
[1]
서적
Muret 1213. La batalla decisiva de la cruzada contra los cáta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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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ación y desarrollo de la Corona de Aragó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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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Crown of Ara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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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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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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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ll
[6]
웹사이트
Les deux visages de Marie de Montpellier (1182–1213)
http://www.ac-scienc[...]
Académie des Sciences et Lettres de Montpellier
[7]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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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xford
[8]
웹사이트
Les deux visages de Marie de Montpellier (1182–1213)
[9]
간행물
A Global Chronology of Conflict
ABC-CLIO
[10]
문서
Iconographie des sceaux et bulles
[11]
문서
Raymond VI had married Eleanor, sister of Perer II
[12]
문서
田澤、P62。
[13]
문서
ローマックス、P165、芝、P132 - P134。
[14]
문서
ローマックス、P171 - P174、芝、P137 - P138、田澤、P55、関、P154。
[15]
문서
浅野、P179。
[16]
문서
田澤、P62 - P64、芝、P144、関、P214 - P215、尾崎、P11 - P14。
[17]
문서
田澤、P64。
[18]
문서
La documentación pontificia de Honorio III (1216-1227)
[19]
문서
関、P214。
[20]
문서
田澤、P66、尾崎、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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