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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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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란시스코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는 1510년 스페인에서 태어난 탐험가로, 1535년 누에바에스파냐(현재의 멕시코)로 건너가 부왕 안토니오 데 멘도사의 후원을 받았다. 그는 시볼라의 일곱 황금 도시를 찾기 위해 탐험대를 이끌었으며, 1540년부터 1542년까지 현재의 미국 남서부 지역을 탐사했다. 탐험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랜드 캐니언을 발견하고 캔자스 지역까지 도달하는 등 북아메리카 탐험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탐험 실패 후 누에바 갈리시아 총독직을 사임하고 1554년 멕시코시티에서 사망했다. 그의 이름을 딴 지명과 기념물이 있으며, 대중문화에서도 그의 탐험이 소재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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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프란시스코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 서명 (1510–1554).png
프란시스코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 서명 (1510–1554)
이름프란시스코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
원어 이름Francisco Vázquez de Coronado
출생1510년
출생지카스티야 왕국 살라망카
사망1554년 9월 22일
사망지누에바에스파냐 멕시코시티
서명Signature of Francisco Vázquez de Coronado (1510–1554).png
경력
복무 기간1535–1554
전투스페인의 멕시코 정복
북아메리카 탐험
관직
관직명누에바갈리시아 총독
군주카를로스 1세

2. 초기 생애

1510년 스페인 살라망카의 귀족 가문에서 후안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와 이사벨 데 루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후안 바스케스는 그라나다 토후국 점령 후 초대 기독교 총독인 이리고 로페스 데 멘도사 이 키뇨네스 밑에서 여러 행정직을 맡았다.[1]

1535년 코로나도는 누에바에스파냐(현재의 멕시코)로 건너가 초대 부왕 안토니오 데 멘도사의 일행에 합류했다. 멘도사는 그의 아버지의 후원자이자 코로나도의 개인적인 친구였다.[1] 누에바에스파냐에서 코로나도는 재무관이자 총독인 알론소 데 에스트라다의 딸인 12살의 베아트리스 데 에스트라다와 결혼하여 멕시코의 상당한 엔코미엔다 재산을 상속받았으며, 여덟 명의 자녀를 두었다.[2]

3. 코로나도 원정

코로나도는 1540년부터 1542년까지 현재의 멕시코와 미국 남서부 지역을 탐험하는 대규모 원정을 이끌었다. 이 원정은 전설적인 시볼라의 일곱 황금 도시를 찾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황금이 아닌 푸에블로 마을들만 발견하게 되었다.

코로나도는 누에바에스파냐(현재의 멕시코)에서 원정대를 조직하여 북쪽으로 출발했다. 원정대는 콜로라도 강과 그랜드 캐니언을 발견하고, 리오그란데강 유역의 푸에블로들을 방문하는 등 여러 탐험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원주민들과의 충돌로 티게스 전쟁이 발발하기도 했다.

이후 코로나도는 키비라(현재의 캔자스)라는 부유한 도시를 찾아 나섰지만, 그곳 역시 기대와는 달리 초가집으로 된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결국 원정은 실패로 끝났고, 코로나도는 멕시코로 돌아와 누에바 갈리시아의 총독직을 사임하고 멕시코시티에서 생을 마감했다.

코로나도 원정은 비록 황금을 찾지는 못했지만, 북미 대륙의 광대한 지역을 탐험하고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3. 1. 원정의 동기

나르바에스 원정대는 플로리다주에서 시작하여 리오그란데강까지 탐험하려 했으나 텍사스주를 거쳐오는 동안 피해를 입어 멕시코시티까지 오는 동안 알바르 누녜스 카베사 데 바카를 포함한 4명만이 살아남았다.[1] 이들은 지금의 뉴멕시코주에 해당되는 지역에 황금으로 장식된 부유한 여러 도시가 있다는 소문을 인디언으로부터 들었다고 전했다. 누에바에스파냐의 총독 안토니오 데 멘도사는 누에바 갈리시아 지방을 다스리는 코로나도에게 원정대를 구성해서 소문으로 들은 시볼라의 일곱 황금 도시를 찾아 통치 구역에 넣도록 명령했다. 당시 스페인 본국의 황제 카를 5세는 새로운 인디언 땅을 원정하되 무차별적인 공격이나 약탈은 금하는 새 법령을 내려 인디언과의 마찰을 최소화하려고 했다.[1]

3. 2. 원정 준비

1539년, 코로나도는 마르코스 데 니사 신부와 에스테바니코를 파견하여 시볼라를 탐험하게 했다. 데 니사는 시볼라가 멕시코 시티만큼 크고 부유하다고 보고했다.[4] 멘도사는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를 탐험대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탐험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다. 그는 아내의 재산을 저당 잡히고 70000PES를 빌렸다.

1539년 가을, 멘도사는 멜초르 디아스에게 데 니사 신부의 발견을 조사하도록 명령했다. 1539년 11월 17일, 디아스는 기병 15명을 이끌고 시볼라로 출발했으나,[4] 치칠티칼리의 유적에서 "황무지에서 불어오는 눈과 거센 바람" 때문에 되돌아갔다.[4] 디아스는 데 니사 신부의 보고가 과장되었음을 확인하고, 1540년 3월 20일 부왕 멘도사에게 보고서를 전달했다.[4]

3. 3. 원정 경로 및 주요 사건

코로나도 탐험대 (1540–1542)는 멕시코에서 현재의 미국 애리조나, 뉴멕시코, 텍사스, 오클라호마, 캔자스를 거쳐 북쪽으로 이동했다.


''코로나도가 북쪽으로 출발하다'' (프레데릭 레밍턴, c. 1900)


1540년, 코로나도는 400명 가량의 유럽 무장 병사, 1,300명에서 2,000명의 멕시코 원주민 동맹군, 4명의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 여러 노예로 구성된 탐험대를 이끌고 콤포스텔라를 출발했다.[5][6] 그는 시날로아 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산 미겔 데 쿨리아칸에 도착한 후, 내륙으로 이동하여 야키 강, 리오 소노라를 거쳐 ''넥스파'' 강(산타 크루즈 강 또는 산 페드로 강)을 따라 이동했다.[9] 탐험대는 치칠티칼리(황 스프링스 계곡의 남부 애리조나)를 거쳐[9] 주니족의 하위쿠에 도착했으나, 시볼라는 황금 도시가 아닌 보잘것없는 푸에블로 마을이었다.

''코로나도 탐험, 1540–1542''


주니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주니 푸에블로를 점령한 후, 코로나도는 여러 탐색대를 파견했다.

3. 3. 1. 콜로라도 강 탐색

페드로 데 토바르가 이끄는 정찰대는 북서쪽으로 이동하여 호피족 공동체로 향했다. 호피족 영토는 귀금속은 부족했지만, 스페인군은 서쪽에 큰 강(콜로라도 강)이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에르난도 데 알라르콘과 멜초르 디아스는 콜로라도 강 하구를 탐험했다. 알라르콘은 코르테스 해를 거쳐 콜로라도 강까지 항해하며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를 위한 물품을 운반했지만, 본대와 연결되지는 못했다. 디아스는 콜로라도 강과 길라 강의 합류 지점에 도착하여 현지 정보를 통해 알라르콘이 물품을 묻고 쪽지를 남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쪽지에는 알라르콘의 부하들이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 탐험대를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디아스는 그 강을 "파이어브랜드(티존) 강"이라고 명명했다.

Augusto Ferrer-Dalmau의 ''La conquista del Colorado''. 그랜드 캐니언을 내려다보는 가르시아 로페스 데 카르데나스를 묘사했다.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는 가르시아 로페스 데 카르데나스가 이끄는 또 다른 정찰대를 보내 콜로라도 강을 찾게 했다. 카르데나스 일행은 그랜드 캐니언의 사우스 림에 도달하여 콜로라도 강을 볼 수 있었는데, 이는 비 원주민으로는 처음이었다. 그들은 강에 도달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콜로라도 강을 통해 알라르콘의 함대와 연결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3. 3. 2. 리오그란데 강 및 페코스 탐색

코로나도가 하위크에 머물러 있는 동안, 그를 보좌하던 헬난도 데 알바라도(Hernando de Alvarado)는 동부 지역 탐색 임무를 받았다. 알바라도의 탐색대는 주니 푸에블로를 방문했던 페코스(Pecos) 푸에블로 인디언의 안내를 받아, 지금의 앨버커키와 버나리요(Bernalillo) 지역에 도착하여 리오그란데강 주변에서 티와(Tiwa)어를 사용하는 10여 개의 푸에블로 인디언 마을을 발견했다. 강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여 타오스 푸에블로를 방문하고, 안내자의 마을인 페코스(Pecos) 푸에블로를 방문한 후, 텍사스 경계 지역 평원으로 가서 아메리카들소(버펄로)를 보았다. 이후, 탐색대는 지금의 뉴멕시코 리오그란데 강가 버나리요 지역으로 돌아와 머물렀고, 주니에 있던 코로나도 원정대도 이곳에 합류했다. 코로나도 원정대는 지금의 버나리오 서쪽에 있던 티웨쉬(Tiguex) 푸에블로 지역을 본거지로 삼고 1540-1541년 겨울을 보냈다. (지금의 코로나도 사적지 남쪽)

3. 3. 3. 티웨쉬 전쟁 (1540-1541)

티웨쉬(Tiguex) 전쟁은 1540년 겨울, 미 대륙에서 인디언과 유럽인 사이에 일어난 전쟁으로, 이름이 붙여지고 역사 기록에 오른 최초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코로나도 원정대 소속인 알바라도 원정대와 지금의 버날릴로(앨버커키 북쪽) 근처에 거주한 티웨쉬 푸에블로 인디언 사이에 마찰로 인해 발생했다. 스페인 군인들이 티웨쉬 인디언에게 겨울을 나는 데 필요하다며 담요 300장을 요구하면서 불화가 시작되었고, 스페인 군인이 인디언 여자를 강간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갈등이 커졌다.[13] 인디언은 그 보복으로 스페인 원정대가 소유한 말 40-60마리를 죽였고, 이에 스페인군은 인디언을 화형에 처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하여 전쟁이 시작되었다.

열세에 몰린 푸에블로 인디언은 마을을 버리고 주민을 이끌고 메사 언덕 위로 대피하여 방어전을 펼쳤다. 모호(Moho)라고 불린 메사 언덕 위 요새에서 스페인 군대의 공격을 80일간 막아냈으나, 물과 식량이 부족하여 결국 항복해야 했다. 전쟁에 참여한 인디언 남자는 전원 사살되었고, 여자들은 노예가 되었다.[13]

에르난도 데 알바라도는 동쪽으로 파견되어 리오그란데강 주변의 여러 마을을 발견했다.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는 현재의 뉴멕시코주 앨버커키 근처 버날릴로 맞은편에 있는 코포(Coofor)를 겨울 숙소로 징발했다. 1540-41년 겨울 동안 그의 군대는 리오그란데 원주민들과 갈등을 겪었고, 이로 인해 잔혹한 티게스 전쟁이 발발했다.[13] 이 전쟁으로 티게스 푸에블로가 파괴되고 수백 명의 아메리카 원주민이 사망했다.[14]

3. 3. 4. 캔자스(퀴비라) 원정 (1541)

1541년 봄, 코로나도는 퀴비라(Quivira)라는 곳에 문명이 발달한 부유한 도시가 있다는 인디언 안내자(터크)의 말을 믿고 원정을 나섰다. 대평원에서 아메리카들소를 발견하고 퀴비라 인디언을 만났지만, 부유한 도시는 없다는 것을 알고 안내자를 처형했다.[16] 터크는 아마도 위치타족 또는 파니족이었을 것이며, 코로나도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여 대평원에서 길을 잃게 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터크의 안내를 받아 코로나도와 그의 군대는 텍사스 팬핸들과 뉴멕시코 동부에 있는 야노 에스타카도를 건넜을 것이며, 오늘날의 허리퍼드와 캐나디안 지역을 지나갔을 것이다. 야노에서 코로나도는 광대한 들소 떼와 마주쳤다.[17]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는 그가 케레초스라고 부른 사람들의 공동체를 발견했는데, 이들은 평원에서 버팔로 무리를 따라다니는 유목민이었다. 전문가들은 케레초스(베케렐)가 아파치 인디언이었다는 데 동의한다.[19]

코로나도는 케레초스를 뒤로 하고 동남쪽으로 계속 나아가 테야스를 만났다. 테야스는 케레초스와 마찬가지로 버팔로 사냥꾼이었지만, 추가적인 자원을 가지고 있었다. 콩을 재배하거나 채집했지만 옥수수는 재배하지 않았다. 뽕나무, 장미, 포도, 호두, 자두의 존재를 주목했다.[20] 학자들은 테야스가 카도안어를 사용하는 위치타족과 관련이 있다고 믿는다.[22]

1993년, 블랑코 협곡의 크로스비 카운티, 텍사스, 플로이드다 마을 근처의 플로이드 카운티에서 석궁촉이 발견되었다. 고고학자들은 해당 유적지를 수색하여 도자기 파편, 40개 이상의 석궁촉, 스페인에서 제작된 수십 개의 말굽 편자, 그리고 멕시코 스타일의 돌칼날을 발견했다. 이 발견은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가 블랑코 협곡에서 테야스를 만났다는 증거를 강화한다.[24]

다른 안내인 이소페테는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에게 키비라가 북쪽에 있다고 말했다.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는 정찰에 전념하여 30일 이상 여행한 후, 아칸소강을 발견했다. 며칠 더 여행한 후 키비라에 도착했다.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는 키비라에 25개의 정착촌이 있다고 믿었다. 키비라족 남녀 모두 거의 나체였다.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는 키비라족과 그가 만난 다른 모든 인디언들의 체격에 감명받았다. 그들은 "매우 좋은 체격을 가진 큰 사람들"이었다.[25]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는 지평선 너머에 더 부유한 왕국에 대해 배우기 위해 키비라족과 25일을 보냈다. 그는 200채까지의 초가집 마을과 옥수수, 콩, 호박이 있는 밭 외에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구리 펜던트가 그가 발견한 유일한 부의 증거였다. 키비라족은 거의 확실히 위치타족의 조상이었다.[26]

얀 모스타르트의 ''아메리카 정복의 에피소드'' (c. 1545), 아마도 뉴멕시코의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는 하라헤이의 인접한 땅이 시작되는 타바스라고 불리는 키비라의 가장자리로 안내되었다. 그는 실망했다. 하라헤이 인디언들은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가 찾던 부유한 사람들이 아니었다.[27] 실망한 그는 뉴멕시코로 돌아갔다. 키비라를 떠나기 전에,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는 투르크족에게 가로테형(처형)을 명령했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키비라는 캔자스 중부에 위치했으며, 가장 서쪽 마을은 라이온스 근처에 있었고, 동쪽으로 리틀 아칸소 강까지, 북쪽으로 린즈보그 마을, 즉 스모키 힐 강의 지류까지 뻗어 있었다. 타바스는 스모키 힐 강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고학자들은 이 지역에서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가 방문했을 가능성이 있는 16세기 유적들을 다수 발견했다.

하라헤이에는 "다른 곳보다 물이 많고 거주민도 많은 강"이 있었다. 이는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가 샐리나 또는 애빌린 근처의 스모키 힐 강에 도달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하라헤이 사람들은 카도안족으로 보이며, 아마 파우니 족의 조상이었을 것이다.[28]

3. 4. 원정의 종료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는 1542년 겨울이 지난 후, 아마도 1542년 3월에 퀘비라에서 뉴멕시코의 티게스 주로 돌아오던 중 말에서 떨어져 심하게 부상을 입었다.[29] 그는 오랜 요양 기간 동안 탐험대와 함께 누에바에스파냐(멕시코)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와 그의 탐험대는 1542년 4월 초 뉴멕시코를 떠났고, 두 명의 수도사들을 남겨두었다.[29] 그의 탐험은 실패로 끝났다. 그는 1544년까지 누에바 갈리시아의 총독으로 남아 있었지만, 이 탐험으로 인해 파산했으며, 그와 그의 야전 지휘관 카르데나스에 대한 전쟁 범죄 혐의가 제기되었다.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는 아우디엔시아의 친구들에 의해 무죄로 풀려났지만, 카르데나스는 스페인에서 인도 평의회에 의해 기본적으로 동일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는 멕시코시티에 머물렀으며, 1554년 9월 22일 전염병으로 사망했다.[30] 그는 멕시코시티의 산토 도밍고 교회 제단 아래에 묻혔다.[31]

4. 유산 및 기념

1952년, 미국은 그의 탐험을 기념하기 위해 애리조나주 시에라 비스타 근처에 코로나도 국립 기념관을 설립했다. 인근의 코로나도 국유림 또한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908년, 그를 기념하기 위해 그랜드 캐니언의 정상인 코로나도 뷰트가 공식적으로 명명되었다.[1]

캔자스주 린즈버그 북서쪽에 있는 큰 언덕은 코로나도 하이츠라고 불린다.[2]

텍사스주 러벅, 텍사스주 엘 파소, 콜로라도 스프링스, 콜로라도,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의 코로나도 고등학교는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3]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코로나도 로드는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마찬가지로, 뉴멕시코주 앨버커키를 통과하는 주간 고속도로 제40호선은 코로나도 고속도로로 명명되었다.[4]

캘리포니아주 코로나도는 프란시스코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것이 아니라, 1602년 세바스티안 비스카이노가 네 명의 순교자를 기리기 위해 "로스 콰트로 코로나도스"(4명의 왕관을 쓴 사람들)라고 부른 코로나도 제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5]

광물 코로나다이트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6]

1940년 미국 우체국에서 코르도나도 탐험 400주년을 기념하여 발행한 기념 우표

5. 대중 문화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에서는 "코로나도 십자가"가 언급된다. 영화에서는 이 금십자가가 1521년에 에르난 코르테스가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에게 준 것이라고 하지만,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는 당시 11세 또는 12세로 스페인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사실이 아니다.[1] 게다가 인디가 포르투갈 해안에서 강도들에게서 십자가를 빼앗을 때, 그 배의 이름이 ''코로나도''라고 붙여진 것을 볼 수 있다.

스콧 오델의 청소년 소설 ''왕의 다섯 번째''에서는 주인공 에스테반 데 산도발과 블라스 데 멘도사가 코로나도의 탐험대를 찾아 일시적으로 합류한다.

독립 싱어송라이터 타일러 제이크스의 2016년 앨범 ''Mojo Suicide''에 수록된 "Hitchin' to Quivira"[38]라는 곡과 싱어송라이터 스티브 틸스톤의 1992년 앨범 ''Of Moor And Mesa''에 수록된 "Coronado And The Turk"라는 곡은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의 탐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1995년 영화 ''찰리의 유령: 코로나도의 비밀''[39](찰리의 유령 이야기)은 치치 마린이 주연을 맡았으며, 코로나도의 유령을 만나 그의 유해를 제대로 매장하도록 돕는 어린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다.

1992년, 언더그라운드 파운드 푸티지 영화 제작자인 크레이그 볼드윈은 서부 영화, 정복 영화, 그리고 ''론 레인저'' 텔레비전 시리즈에서 재활용된 이미지를 사용하여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의 탐험을 자세히 묘사한 영화 ''O No Coronado!''[40]를 제작했다.

참조

[1] 웹사이트 Francisco Vázquez de Coronado http://newmexicohist[...] New Mexico Office of the State Historian 2014-10-01
[2] 웹아카이브 estrada1 http://pages.prodigy[...] 2008-05-13
[3] 서적 Winship
[4] 서적 Winship
[5] 서적 Winship
[6] 논문 What They Never Told You about the Coronado Expedition 2005-12-01
[7] 서적 Winship
[8] 서적 Winship
[9] 서적 Winship
[10] 서적 Winship
[11] 서적 The Latest Word from 1540 U New Mexico Press
[12] 서적 Documents of the Coronado Expedition U New Mexico Press
[13] 서적 Winter of the Metal People: The Untold Story of America's First Indian War Sunbury Press
[14] 웹사이트 Coofor and Juan Aleman https://archive.toda[...] New Mexico Office of the State Historian 2012-06-27
[15] 서적 Chronology of Native North American History: From Pre-Columbian Times to the Present Gale Research
[16] 서적 The Journey of Coronado, 1540–1542 A.S. Barnes & Co
[17] 서적 Winship
[18] 서적 Winship
[19] 서적 Rio del Norte U of Utah Press
[20] 서적 Winship
[21] 서적 Winship
[22] 서적 No Settlement, No Conquest U of NM Press
[23] 서적 Winship
[24] 서적 The Coronado Expedition to Tierra Nueva U Press of CO
[25] 서적 Winship
[26] 서적 Bolton
[27] 서적 Winship
[28] 서적 Archeological Remains in Central Kansas and their Possible Bearing on the Location of Quivira
[29] 서적 Coronado: Knight of Pueblo and Plains U of NM Press
[30] 서적 Bolton
[31] 서적 Exploring the Southwestern United States Capstone Publishers
[32] 서적 Sumaria relación de las cosas de la Nueva España Editorial Porrúa
[33] 서적 No Mere Shadows: Faces of Widowhood in Early Colonial Mexico University of New Mexico Press
[34] 서적 Antonio de Mendoza, First Viceroy of New Spain Duke University Press
[35] 서적 Antonio de Mendoza, First Viceroy of New Spain Duke University Press
[36] 서적 History of Coronado http://sunnycv.com/s[...]
[37] 웹사이트 Coronadite: Mineral information, data and localities. https://www.mindat.o[...]
[38] 웹사이트 Hitchin' To Quivira by Tyler Jakes https://tylerjakes.c[...] 2017-05-23
[39] 웹사이트 Charlie's Ghost: The Secret of Coronado https://www.imdb.com[...]
[40] 웹사이트 ¡O No Coronado! https://www.imd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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