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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난 코르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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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르난 코르테스는 1485년 에스파냐에서 태어나, 아즈텍 제국을 정복하고 누에바에스파냐를 건설한 스페인의 군인이다. 1519년 멕시코에 도착하여 원주민과의 동맹을 통해 세력을 확장했으며, 1521년 아즈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을 함락시키고 멕시코시티를 건설했다. 그는 누에바에스파냐의 총독을 역임하며 엔코미엔다 제도를 시행했지만, 스페인 왕실과의 갈등을 겪었다. 1528년 스페인으로 돌아가 오아하카 계곡 후작 작위를 받았으나, 이후 권력을 잃고 탐험과 소송에 시달리다 1547년 사망했다. 코르테스는 잔혹한 정복자이자 아즈텍 문명을 파괴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스페인 제국을 확장하는 데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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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난 코르테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8세기 초상화, 정복자가 파올로 지오비오에게 보낸 초상화를 기반으로 함. 16세기부터 많은 그의 표현의 모델이 됨.
본명에르난도 코르테스 데 몬로이 이 피사로 알타미라노
출생일1485년 12월
출생지메데인, 카스티야 왕국
사망일1547년 12월 2일
사망지카스티예하데라쿠에스타, 카스티야
국적카스티야
알려진 업적아스테카 제국 정복
스페인온두라스 정복
직업콩키스타도르
서명
가족
배우자카탈리나 수아레스 (1516년 결혼, 1522년 사망)
후아나 데 수니가 (1529년 결혼)
동반자라 말린체
이사벨 모크테수마
자녀돈 마르틴 코르테스
도냐 마리아 코르테스
도냐 카탈리나 코르테스
도냐 후아나 코르테스
마르틴 코르테스
레오노르 코르테스 모크테수마
정치 경력
직위누에바에스파냐 총독
군주카를로스 1세
재임 시작 11521년 8월 13일
재임 종료 11521년 12월 24일
전임자 1직위 신설
후임자 1크리스토발 데 타피아
재임 시작 21521년 12월 30일
재임 종료 21524년 10월 12일
전임자 2크리스토발 데 타피아
후임자 2알론소 데 에스트라다, 로드리고 데 알보르노스, 알론소 데 수아소로 구성된 3인 위원회
재임 시작 31526년 6월 25일
재임 종료 31526년 7월 3일
전임자 3알론소 데 에스트라다, 로드리고 데 알보르노스
후임자 3루이스 폰세 데 레온
기타
로마자 표기

2. 초기 생애

에르난 코르테스는 1485년 스페인 에스트레마두라의 메데인에서 태어났다.[78][5] 그는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가세는 평범한 보병 대위였던 아버지 마르틴 코르테스 데 몬로이와 카탈리나 피사로 알타미라노 사이에서 태어났다.[78][5] 그는 훗날 잉카 제국을 정복한 프란시스코 피사로히스파니올라의 총독 니콜라스 데 오반도와 같은 인물들과 친척 관계였다.[78][5]

어린 시절 병약했던 코르테스는[81][8] 14세에 살라망카로 보내져 삼촌 밑에서 라틴어를 공부했다.[79][6] 비록 대학 교육은 아니었지만, 이때의 경험과 이후 공증인으로 일한 경력은 그에게 카스티야 법률 지식을 쌓게 해주었고, 이는 훗날 그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80][7]

프란시스코 로페스 데 고마라는 젊은 시절 코르테스를 "무자비하고 거만하며 장난기 많은" 인물로 묘사했다.[81][8] 16세 무렵, 그는 작은 고향 마을에 답답함을 느꼈고, 마침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세계 발견 소식이 전해지면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처음에는 친척인 니콜라스 데 오반도 총독과 함께 히스파니올라로 가려 했으나 부상으로 무산되었다.[9] 이후 스페인 남부 항구 도시들을 전전하다가 1504년 마침내 히스파니올라로 건너가 식민지 개척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9]

2. 1. 출생 및 가문

1529년 바이디츠(Weiditz)가 묘사한 코르테스


에르난 코르테스는 1485년 당시 카스티야 왕국에 속했던 메데인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오늘날 스페인 에스트레마두라 지방의 바다호스 주에 해당한다. 그의 아버지 마르틴 코르테스 데 몬로이(Martín Cortés de Monroyes, 1449년생)는 비록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가세는 넉넉지 않은 보병 대위였고, 어머니는 카탈리나 피사로 알타미라노(Catalína Pizarro Altamiranoes)였다.[78][5]

어머니 쪽을 통해 코르테스는 훗날 잉카 제국을 정복하게 되는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6촌 관계였다. 코르테스의 외할머니 레오노르 산체스 피사로 알타미라노(Leonor Sánchez Pizarro Altamiranoes)는 피사로의 아버지 곤살로 피사로 이 로드리게스(Gonzalo Pizarro y Rodriguezes)의 사촌이었다.[78][5] (코르테스의 아스텍 정복에 동행했던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잉카를 정복한 피사로와는 다른 인물이다.) 아버지 쪽을 통해서는 제3대 히스파니올라 도독이었던 니콜라스 데 오반도와 친척 관계였으며, 그의 친증조부는 제5대 몬로이 영주 로드리고 데 몬로이 이 알마라스였다.[78][5]

코르테스의 전기 작가이자 친구였던 사제 프란시스코 로페스 데 고마라에 따르면, 코르테스는 어릴 적 창백하고 병약했다고 한다.[81][8] 14세 때 그는 살라망카에 있는 삼촌에게 보내져 라틴어를 공부했다. 일부 후대 역사가들은 이를 코르테스가 살라망카 대학교에 다닌 것으로 잘못 해석하기도 했으나, 이는 개인 교습이었다.[79][6]

2년 뒤 코르테스는 메데인으로 돌아왔는데, 그가 법률가가 되기를 바랐던 부모는 실망했다. 하지만 살라망카에서의 2년간의 공부와 이후 바야돌리드 및 히스파니올라에서의 공증인 경험은 그에게 카스티야 법률 지식을 쌓게 해주었고, 이는 훗날 그의 무단적인 멕시코 정복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80][7]

고마라는 이 시기의 코르테스를 "무자비하고 거만하며 장난기 많은" 소년으로 묘사했다.[81][8] 16세가 된 코르테스는 작은 고향 마을에서의 삶이 답답하게 느껴졌으며, 마침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세계 발견 소식이 스페인 전역에 퍼지던 시기였다.

코르테스 자신은 당대의 기록, 서명, 초기 초상화 등에서 이름을 '에르난도(Hernandoes)' 또는 '페르난도(Fernandoes)'로 사용했다.[2] 윌리엄 H. 프레스콧의 저서 『멕시코 정복』(1843)에서도 '에르난도 코르테스'로 표기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축약형인 '에르난(Hernánes)'이 더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2. 2. 교육 및 초기 경력

14세 때 살라망카로 보내져 삼촌 밑에서 라틴어를 공부했다.[79][6] 이는 후대의 역사가들이 그가 살라망카 대학교에 다녔다고 잘못 해석하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개인 교습 형태였다.[79][6] 코르테스의 부모는 그가 라틴어 공부를 열심히 하여 법률가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2년 뒤 코르테스는 공부를 그만두고 고향 메데인으로 돌아와 부모를 실망시켰다.[80][7]

그러나 살라망카에서의 2년 간의 공부와 이후 바야돌리드히스파니올라에서의 공증인(서기관)으로서의 경험은 그에게 카스티야 법률 지식을 쌓는 기반이 되었다. 이 법률 지식은 훗날 상관의 명령에 불복하고 독단적으로 감행한 멕시코 정복을 정당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80][7]

코르테스의 전기 작가이자 친구였던 프란시스코 로페스 데 고마라는 이 시기의 코르테스를 무자비하고 거만하며 장난기 많은 성격으로 묘사했다.[81][8] 16세 무렵, 코르테스는 작은 고향 마을의 삶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마침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세계를 발견했다는 소식이 스페인 전역에 퍼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새로 임명된 히스파니올라 총독이자 친척이었던 니콜라스 데 오반도와 함께 신대륙으로 가려 했으나, 부상을 당해 항해에 참여하지 못했다.[9] 이후 약 1년간 스페인 남부의 항구 도시인 카디스, 팔로스, 산루카르, 세비야 등지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이 시기에 신대륙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서 현지의 경험담을 들으며 견문을 넓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침내 1504년 히스파니올라로 건너가 식민지 개척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9]

3. 신대륙 이주와 초기 활동

에르난 코르테스는 먼 친척인 니콜라스 데 오반도가 신임 히스파니올라 도독으로 임명된 것을 계기로 신세계로 건너갈 기회를 엿보았다. 처음에는 부상으로 계획이 무산되었으나,[82] 스페인 남부 지방을 떠돌던 중 1504년 마침내 히스파니올라에 도착하여 식민지 개척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82][10]

히스파니올라에 정착한 코르테스는 이후 쿠바 정복 원정에도 참여하는 등 초기 식민지 활동을 통해 경험과 기반을 쌓아나갔다.[10] 1511년부터는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 쿠엘라르를 따라 쿠바로 활동 무대를 옮겨, 그의 밑에서 일하며 부와 정치적 영향력을 키웠다.[11] 코르테스는 산티아고의 알칼데(시장)를 두 번 역임하는 등 쿠바 식민지 내에서 입지를 다졌지만,[11] 점차 쿠바 총독이 된 벨라스케스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11][12]

쿠바에서의 성공에 만족하지 못한 코르테스는 멕시코 본토에 대한 소식을 접한 뒤 새로운 야심을 품게 되었다. 1518년, 벨라스케스는 코르테스를 멕시코 탐험 원정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으나, 둘 사이의 깊어진 불신으로 인해 곧 명령을 철회하려 했다.[11] 그러나 코르테스는 벨라스케스의 명령을 무시하고, 1519년 2월 독자적으로 원정대를 이끌고 쿠바를 떠나 멕시코로 향하는 반란에 가까운 행동을 감행했다.[14] 그는 자신의 배를 침몰시켜 병사들의 후퇴 가능성을 차단하며 카를 5세 국왕에게 직접 충성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14][18] 이는 스페인의 아즈텍 정복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첫걸음이었다.

3. 1. 히스파니올라 시절 (1504년-1511년)

먼 친척인 니콜라스 데 오반도가 신임 히스파니올라 도독으로 임명되자 그 연줄을 통해 신세계로 건너가려 했으나, 부상으로 인해 계획은 무산되었다.[82] 이후 카디스, 팔로스, 산루카르, 세비야스페인 남부 지방을 떠돌아다니다 1504년, 알론소 퀸테로(Alonso Quintero)가 지휘하는 배를 타고 마침내 히스파니올라로 건너가 식민개척가가 되었다.[82][9] 퀸테로는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상관을 속이고 먼저 신세계에 도착하려 했는데, 이러한 반항적인 행동은 훗날 코르테스의 경력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83]

1504년, 18세의 코르테스는 히스파니올라의 수도 산토도밍고에 도착하여 시민으로 등록하고, 농장을 지을 땅을 불하받았다.[10] 얼마 지나지 않아 총독 니콜라스 데 오반도는 코르테스에게 엔코미엔다(원주민 노동력 착취 권리)를 부여하고, 그를 아수아데콤포스텔라읍의 공증인으로 임명했다.[10] 이후 약 5년간 코르테스는 히스파니올라 식민지의 정착을 도우며 지위를 확립해 나갔다.[10] 1506년, 코르테스는 쿠바 정복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고, 원정대장으로부터 큰 땅과 많은 타이노족 노예를 상으로 받았다.[10]

1511년, 코르테스는 히스파니올라 총독의 보좌관이었던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 쿠엘라르가 쿠바 정복 원정을 이끌 때 동행했다. 이는 코르테스의 활동 무대가 쿠바로 옮겨지는 계기가 되었다.

3. 2. 쿠바 시절 (1511년-1519년)

1511년, 코르테스는 당시 히스파니올라 총독의 보좌관이었던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 쿠엘라르(Diego Velázquez de Cuéllar)의 쿠바 정복 원정에 동행했다.[10] 벨라스케스는 이후 쿠바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26세였던 코르테스는 회계관(재무관 서기)으로 임명되어, 원정에서 얻는 이익의 5분의 1(퀸토, quinto)이 스페인 왕실에 제대로 전달되도록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11]

코르테스는 벨라스케스가 쿠바에서의 지배력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고, 벨라스케스는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자신의 비서관으로 삼았다.[11] 코르테스는 산티아고의 알칼데(시장)로 두 차례 임명되기도 했다.[11] 쿠바에서 코르테스는 엔코미엔다를 통해 원주민 노동력을 확보하여 광산과 농장을 운영하며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10] 이를 통해 그는 식민지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로 성장했으며, 때로는 식민지 행정에 반대하는 세력의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514년에는 정착민들에게 더 많은 원주민 노동력을 할당해달라고 요구하는 움직임을 이끌었다.[11]

시간이 흐르면서 코르테스와 벨라스케스 총독 사이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11][84] 코르테스는 벨라스케스 총독의 처제인 카탈리나 수아레스(Catalina Xuárez)와 연인 관계였는데, 벨라스케스는 코르테스가 그녀를 가볍게 대한다고 여겨 불만을 품었다. 코르테스는 카탈리나의 다른 자매에게 관심을 보이기도 했으나, 결국 벨라스케스 총독의 압력에 못 이겨 카탈리나와 마지못해 결혼했다. 코르테스는 이 결혼을 통해 카탈리나의 가족, 나아가 벨라스케스와의 관계 개선을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12][85]

서인도 제도에 온 지 거의 15년이 된 코르테스는 쿠바에서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큰 야망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와 후안 데 그리할바가 이끈 1518년의 멕시코 본토 탐험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리할바가 본토에서 금과 은이 풍부한 땅을 발견하고 식민지를 세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벨라스케스는 그를 지원하기 위한 새로운 원정대를 꾸리기로 했다. 1518년 10월, 벨라스케스는 코르테스를 이 세 번째 본토 원정대의 총대장(captain-general)으로 임명했다.[11][84]

코르테스는 행정 경험과 이전 원정들의 실패 사례에 대한 지식, 그리고 뛰어난 언변을 활용하여 불과 한 달 만에 6척의 배와 300명의 병력을 모았다. 그러나 그의 빠른 성공은 벨라스케스의 질투심을 자극했고, 벨라스케스는 원정대 지휘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려 했다. 이를 눈치챈 코르테스는 벨라스케스가 명령을 바꾸기 전에 서둘러 쿠바의 다른 항구들을 돌며 더 많은 병력과 배를 확보하여 원정 준비를 강행했다.[11][84]

4. 멕시코 정복 (1519년-1521년)

1518년, 쿠바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로부터 멕시코 탐사 및 식민화 명령을 받은 코르테스는 출항 직전 지휘권 박탈 시도에도 불구하고 1519년 2월, 항명 상태로 원정을 강행했다. 약 500명의 병력과 소수의 말, 대포를 이끌고 유카탄반도에 상륙한 그는 통역사 게로니모 데 아길라르와 라 말린체를 확보하며 아스텍 제국과의 소통 기반을 마련했다.[87][88][89]

1519년 7월, 해안가에 베라크루스를 건설하여 쿠바 총독의 권위를 부정하고 카를 5세 국왕 직속임을 선언했으며, 병사들의 후퇴를 막기 위해 타고 온 배를 모두 자침시켰다.[14][18] 이후 내륙으로 진군하며 아스텍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틀라스칼라 등 여러 원주민 부족과 동맹을 맺었다.[17][72] 1519년 10월에는 촐룰라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기도 했다.[17]

1519년 11월 8일, 코르테스는 아스텍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에 입성하여 황제 모테크소마 2세의 환영을 받았으나,[19] 곧 그를 인질로 삼았다.[22] 1520년, 코르테스가 자신을 체포하러 온 판필로 데 나르바에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돌아온 사이, 부관 페드로 데 알바라도가 대신전 학살을 일으켜 아스텍인들의 봉기를 촉발했다.[94][23] 혼란 속에서 몬테수마 2세가 사망하고, 스페인군은 1520년 6월 30일 밤, 큰 피해를 입으며 테노치티틀란에서 탈출했다 ('슬픈 밤').[14]

오툼바 전투에서 아스텍 추격군을 물리친 코르테스는 동맹 부족인 틀라스칼라로 후퇴하여 전열을 재정비했다.[87] 때마침 천연두가 아스텍 전역에 퍼져 원주민 인구가 급감하면서 스페인군에게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1521년 초, 코르테스는 수만 명의 원주민 동맹군과 함께 테노치티틀란을 포위하고 3개월이 넘는 공성전을 벌였다.[1][24] 1521년 8월 13일, 마지막 황제 쿠아우테목이 사로잡히면서 테노치티틀란은 함락되었고, 아스텍 제국은 멸망했다.[96] 코르테스는 폐허가 된 테노치티틀란을 멕시코시티로 개칭하고, 1521년부터 1524년까지 누에바에스파냐의 통치자로 군림했다.[87][14]

4. 1. 원정 시작과 항명

1518년, 쿠바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코르테스에게 멕시코 내륙 탐사와 식민화를 위한 원정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출항 직전, 벨라스케스는 코르테스와의 오랜 갈등 때문에 마음을 바꿔 그의 지휘권을 박탈하려 했다.[11] 코르테스는 이 명령을 무시하고 1519년 2월, 공개적인 항명 상태로 원정을 강행했다.[14] 그는 쿠바의 트리니다드에 들러 병사와 군마를 추가로 모집했다. 최종적으로 원정대는 배 11척, 병사 약 500명(원주민 노예 포함[13]), 말 13필, 그리고 소수의 캐넌포로 구성되었다.[14]

코르테스 함대는 마야 영토였던 유카탄반도에 상륙했다.[14] 그곳에서 코르테스는 난파 사고로 마야인들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한 스페인 프란치스코회 사제 게로니모 데 아길라르를 만났다.[14] 아길라르는 마야인들과 지내며 촌탈 마야어를 익혔기 때문에 코르테스와 마야 원주민 사이의 통역을 맡을 수 있었다.[15]

1519년 3월, 코르테스는 그 땅을 스페인 왕령으로 공식 선포했다. 이후 타바스코 지역으로 이동하던 중 포톤찬에서 원주민의 저항에 부딪혔으나, 첸틀라 전투에서 승리했다. 패배한 원주민들은 코르테스에게 젊은 여성 20명을 바쳤고, 코르테스는 이들을 모두 기독교로 개종시켰다.[15]

1519년 11월 8일 테노치티틀란에서 모테크소마를 만나는 코르테스와 라 말린체.


이 여성들 중에는 후에 코르테스의 현지처가 되어 아들 마르틴을 낳은 라 말린체도 있었다.[1] 말린체는 촌탈 마야어와 아스텍 제국의 언어인 나우아틀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었다. 덕분에 코르테스는 아길라르(스페인어↔마야어)와 말린체(마야어↔나우아틀어)를 거쳐 아스텍인들과 의사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17] 1519년 부활절, 코르테스는 산후안데울루아에서 아스텍 제국의 황제 모테크소마 2세가 보낸 지방관 텐딜레와 피탈피토케를 만났다.[17]

후퇴할 마음을 먹지 않기 위해 함대를 자침시키는 코르테스.


1519년 7월, 코르테스의 부하들은 해안가에 베라크루스를 건설하고 점령했다. 이는 쿠바 총독 벨라스케스의 권위를 완전히 부인하고, 자신이 스페인 국왕 카를 5세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는다는 것을 선언하는 행위였다.[14] 또한 코르테스는 병사들의 후퇴나 탈영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자신이 타고 온 배 11척을 모두 자침시키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18]

4. 2. 원주민과의 관계 및 동맹

유카탄 반도에 상륙한 코르테스는 먼저 난파마야인들에게 포로로 잡혀있던 스페인 프란체스코회 사제 제로니모 데 아길라르를 만나 통역사로 삼았다.[14][15] 1519년 3월, 타바스코에서 원주민과의 첸틀라 전투에서 승리한 후, 패배한 원주민들로부터 젊은 여성 20명을 받았는데, 이들을 모두 기독교로 개종시켰다.[15]

이 여성들 중에는 후에 코르테스의 현지처가 되어 아들 마르틴을 낳은 라 말린체가 있었다.[1] 말린체는 나우아틀어와 촌탈 마야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었기에, 아길라르와 함께 코르테스가 아즈텍 제국과 소통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17]

베라크루스를 건설하고 내륙으로 진군하면서 코르테스는 아즈텍 제국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던 여러 원주민 부족들과 동맹을 맺었다. 쎔포알라의 토토낙족과 틀락스칼란의 나우아족(틀락스칼텍) 등이 대표적이다.[17][89] 당시 아즈텍의 가혹한 세제 등으로 인한 원주민 사회의 불만은 이들이 스페인 군대와 동맹을 맺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72]

특히 아즈텍의 오랜 숙적이었던 틀락스칼텍과는 1519년 9월 초 몇 차례 큰 전투를 치렀다.[17] 코르테스는 전투 중 잡은 포로들을 풀어주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했고, 틀락스칼텍의 지도자 시코텐카틀 장로와 마시스카틀은 코르테스와의 동맹이 아즈텍에 대항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했고, 전쟁 지도자 시코텐카틀 2세를 설득하여 스페인과 동맹을 맺었다.[17][89]

1519년 10월, 코르테스는 약 1,000명의 틀락스칼텍 동맹군과 함께[17] 멕시코 중부의 주요 도시인 촐룰라로 진군했다.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의 아즈텍인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거나 동맹한 원주민들의 이탈을 막기 위한 본보기로[17][89] 비무장 상태의 촐룰라 귀족 수천 명을 도시 중앙 광장에서 학살하고 도시 일부를 불태웠다. 이 촐룰라 학살은 아즈텍 제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

코르테스가 테노치티틀란에 도착했을 때, 그의 군대는 스페인 병사들과 수많은 원주민 동맹군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병력이었다.[19] 슬픈 밤 사건으로 큰 피해를 입고 테노치티틀란에서 후퇴했을 때, 코르테스는 동맹 관계였던 틀락스칼란으로 이동하여 원주민들의 도움과 쿠바 증원군에 힘입어 군대를 재정비할 수 있었다.[14]

크리스토발 데 올리드(Cristóbal de Olid)가 틀라스칼라 동맹군과 함께 1522년 할리스코 정복에서 스페인 병사들을 이끌고 있다.


1521년 테노치티틀란 재정복 과정에서는 틀락스칼텍, 테스코코 등 5만 명이 넘는 원주민 연합군이 코르테스와 함께 싸웠다.[74] 이들 원주민 동맹군은 아즈텍의 동맹 도시들을 차례로 정복하고 테노치티틀란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등 도시 함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24]

4. 3. 테노치티틀란으로의 진군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는 쿠바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명령을 어기고 독자적으로 멕시코 본토 정복에 나섰다. 그는 약 500명의 병사, 16마리의 말, 11척의 배를 이끌고 멕시코만 연안을 따라 항해하여 3월 12일 타바스코 강 유역에 도착했고, 다음 날 원주민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 과정에서 코르테스는 유카탄 반도에 표류했던 스페인인 헤로니모 데 아길라르와 원주민 여성 라 말린체를 만나 통역과 길잡이로 삼았다.

디에고 무뇨스 카마르고의 『틀락스칼라 역사』(1585년경) 삽화. 라 말린체와 에르난 코르테스가 그려져 있다.


같은 해 8월, 코르테스는 멕시코만 연안에 베라크루스라는 도시를 건설하고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에게 직접 충성을 맹세하며 벨라스케스 총독의 권위를 부정했다.[70] 그는 병사들의 탈영이나 후퇴를 막기 위해 가져온 배들을 스스로 침몰시킨 뒤 내륙으로 진군을 시작했다.[14]

테노치티틀란으로 향하는 길에 코르테스는 아즈텍 제국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던 여러 원주민 부족들과 접촉했다. 특히 쎔포알라의 토토나크족, 틀라스칼라의 나우아족과 동맹을 맺는 데 성공했다. 틀라스칼라족은 처음에는 스페인군과 격렬하게 싸웠으나(1519년 9월 2일~5일), 코르테스가 몬테수마의 적임을 알게 되자 전략적으로 동맹을 선택했다.[17] 아즈텍의 가혹한 통치에 시달리던 이들 부족의 합류로 코르테스의 군대는 규모가 크게 늘어났다.[72]

1519년 10월, 코르테스는 약 1,000명의 틀라스칼라 동맹군과 함께 멕시코 중부의 주요 도시인 촐룰라(Cholula)로 진군했다.[17] 코르테스는 이곳에서 아즈텍인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거나 원주민의 배신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중앙 광장에 모인 무장하지 않은 귀족 수천 명을 학살하고 도시 일부를 불태웠다. 이 참혹한 학살은 코르테스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17]

촐룰라 학살 이후 코르테스는 마침내 아즈텍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으로 향했다. 1519년 11월 8일, 코르테스와 그의 군대는 아즈텍 황제 몬테수마 2세로부터 평화적인 환영을 받았다.[19] 몬테수마 2세는 코르테스를 전설 속 신인 케찰코아틀의 사자 혹은 그 자신으로 여겼다고 전해지지만,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20][21] 몬테수마는 코르테스에게 많은 금을 선물했지만, 이는 오히려 스페인 군대의 탐욕과 약탈 야욕을 더욱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다.

4. 4. 테노치티틀란 점령과 몰락

1519년, 코르테스는 쿠바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명령을 어기고 독자적으로 멕시코 본토 탐험에 나섰다. 그는 500여 명의 병사, 16마리의 말, 11척의 배를 이끌고 멕시코만 연안을 따라 항해하여 3월 12일 타바스코 강 유역에 도착했다. 다음 날 원주민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코르테스 일행은 유카탄 반도에서 헤로니모 데 아길라르와 라 말린체를 만나 통역과 길잡이로 삼았다. 병사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7월 26일에는 타고 온 배를 스스로 침몰시켰다. 같은 해 8월, 멕시코만 연안에 베라크루스를 건설하고[70] 내륙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멕시코 고원에 도착한 코르테스는 아즈텍 제국의 오랜 숙적이던 틀라스칼라인과 격렬한 전투 끝에 동맹을 맺었다.[17] 당시 아즈텍의 가혹한 통치와 과도한 공물 요구에 불만을 품은 여러 부족들(쎔포알라의 토토나크족 등)이 코르테스에게 합류하면서 그의 군대는 스페인인과 원주민의 연합군으로 규모가 크게 불어났다.[72] 1519년 10월, 코르테스는 약 1,000명의 틀라스칼라 동맹군과 함께 멕시코 중부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초룰라로 향했다.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의 아즈텍인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려 했거나, 혹은 원주민의 배신을 우려하여 본보기를 보이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중앙 광장에 모인 무장하지 않은 귀족 수천 명을 학살하고 도시 일부를 불태웠다.[17] 이 사건은 '초룰라 학살'로 알려져 있으며, 아즈텍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519년 11월 8일, 코르테스 일행은 마침내 아즈텍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에 도착했다. 아즈텍의 황제 몬테수마 2세는 코르테스를 전설 속 신인 케찰코아틀의 사자 혹은 그 자신으로 여기고 평화적으로 맞이하며 많은 황금과 선물을 주었다.[19] 그러나 이는 오히려 스페인인들의 탐욕을 더욱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다. 코르테스는 해안가에서 스페인 병사들이 아즈텍인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빌미로 몬테수마 2세를 그의 궁전에 연금시키고 인질로 삼아 간접적으로 테노치티틀란을 통치하려 시도했다.[22]

한편, 코르테스의 독단적인 행동에 분노한 쿠바 총독 벨라스케스는 판필로 데 나르바에스가 이끄는 토벌군을 멕시코로 파견했다. 1520년 4월, 나르바에스는 1,1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멕시코에 상륙했다.[14]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에 페드로 데 알바라도와 200명의 병사만 남겨둔 채, 주력군을 이끌고 나르바에스와 맞서 싸우러 나섰다. 수적으로 불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코르테스는 기습 공격을 통해 나르바에스를 격파하고 그의 부하들을 자신의 군대로 흡수하는 데 성공했다.[14]

그러나 코르테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테노치티틀란에서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페드로 데 알바라도는 아즈텍인들의 종교 축제 기간 중 대신전에서 수많은 귀족과 사제들을 학살했다(대신전 학살).[23] 이 학살은 아즈텍인들의 분노를 폭발시켰고, 그들은 즉시 봉기하여 스페인군을 공격했다. 코르테스는 급히 테노치티틀란으로 돌아왔지만 상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었다. 1520년 6월 29일(혹은 7월 1일), 코르테스는 인질로 잡고 있던 몬테수마 2세를 내세워 아즈텍인들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분노한 군중이 던진 돌에 맞아 몬테수마 2세가 사망했다(스페인 측 기록과 달리 아즈텍 측 기록이나 일부 학자들은 스페인인들이 몬테수마 2세를 살해했다고 주장한다).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을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1520년 6월 30일 밤부터 7월 1일 새벽까지 이어진 탈출 과정에서 스페인군은 아즈텍 전사들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고, 약탈했던 막대한 양의 보물과 대포 등도 호수에 수장되었다.[14] 이 참담한 패배는 스페인인들에게 '슬픈 밤(La Noche Triste)'으로 기억된다.

테노치티틀란을 간신히 빠져나온 코르테스 군대는 7월 7일 오툼바 계곡에서 추격해 온 아즈텍 군대와 다시 마주쳤다. 절체절명의 위기였지만, 스페인군은 기병대를 활용한 전술로 아즈텍 대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7월 12일, 코르테스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동맹 관계인 틀라스칼라에 도착하여 군대를 재정비하고 쿠바에서 온 증원군과 합류했다.[14]

한편, 테노치티틀란에서는 몬테수마 2세의 뒤를 이어 쿠이트라우악이 새로운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스페인인들이 가져온 천연두가 아즈텍 전역에 급속도로 퍼지면서 수많은 원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쿠이트라우악 황제 역시 천연두에 걸려 즉위 80여 일 만인 1520년 10월에 사망했다. 아즈텍인들은 그의 뒤를 이어 젊고 용맹한 전사 쿠아우테목을 마지막 황제로 추대했다.

1521년 초, 코르테스는 재정비된 스페인 군대와 5만 명이 넘는 틀라스칼라, 테스코코 등 원주민 동맹군을 이끌고 테노치티틀란을 향해 다시 진격했다. 그는 주변 도시들을 먼저 점령하여 테노치티틀란을 고립시키는 전략을 사용했다. 4월 28일,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을 완전히 포위하고 본격적인 공성전을 시작했다. 그는 호수에 브리간틴 함대를 띄워 보급로를 차단하고, 육지에서는 제방길을 따라 도시로 진격했다.[1][24]

아즈텍인들은 쿠아우테목의 지휘 아래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계속되는 전투와 천연두, 굶주림으로 인해 점차 힘을 잃어갔다. 3개월이 넘는 치열한 공방전 끝에 1521년 8월 13일, 테노치티틀란의 마지막 저항 거점이었던 틀라텔롤코가 함락되고 황제 쿠아우테목이 스페인군에게 사로잡혔다. 이로써 강력했던 아즈텍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1][24] 코르테스는 폐허가 된 테노치티틀란의 이름을 멕시코시티로 바꾸고, 이곳을 누에바에스파냐의 수도로 삼아 1524년까지 직접 통치했다.[14] 코르테스가 도시에 진입했을 때, 거리에는 천연두와 전투로 죽은 시체들이 즐비했고 끔찍한 악취가 진동했다고 전해진다.[74]

5. 누에바에스파냐 도독 시절 (1521년-1525년)

1521년 아즈텍 제국 정복 이후, 에르난 코르테스는 누에바에스파냐(새로운 스페인)의 통치 기반을 다졌다. 1523년,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로부터 누에바에스파냐의 총독, 총사령관, 최고 사법관으로 공식 임명받았다.[75] 코르테스는 정복지에 엔코미엔다 제도를 도입하여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토지와 원주민 노동력을 분배했으며,[75] 이는 식민 통치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영토 확장에도 힘써 1524년 온두라스 병합을 선언했고,[75] 원주민 통치를 위해 마지막 아즈텍 황제 쿠아우테목1525년 반란 혐의로 처형하기도 했다.[75] 또한, 원주민의 가톨릭 개종을 위해 1524년 프란체스코회 수사들을 초청하여 선교 활동의 기틀을 마련했다.[39] 한편, 1522년에는 첫 부인 카탈리나 수아레스가 의문 속에 사망하는 개인적인 일을 겪었다.[29][1] 이 시기 코르테스의 정책과 활동은 누에바에스파냐 초기 역사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5. 1. 도독 임명과 통치

아즈텍 제국 정복 이후, 1523년 카를로스 1세는 코르테스를 누에바에스파냐(Nueva España, 새로운 스페인)의 총독, 총사령관, 최고 사법관으로 임명했다.[75] 코르테스는 정복한 땅을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도 광대한 토지를 확보했으며, 이를 통해 옛 아즈텍 제국 영토에 엔코미엔다 제도를 대대적으로 확립했다.[75] 이 제도를 통해 스페인 이주민들은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원주민들을 금광과 은광 등에서 강제로 노역시키며 혹독하게 다루었다.[75] 코르테스 자신도 멕시코로 돌아온 1530년 이후 대규모 엔코미엔다 소유주(엔코멘데로)로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코르테스는 영토 확장에도 힘썼다. 1524년에는 온두라스를 스페인 영토로 병합한다고 선언했으며,[75] 캘리포니아 반도 남쪽 지역 탐험을 지시하고 니카라과에도 원정대를 파견했다.[75] 1533년에는 직접 탐험을 통해 캘리포니아 반도의 끝부분을 확인하기도 했다.[76]

원주민 통치 과정에서 코르테스는 강압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1525년 2월 26일, 마지막 아즈텍 황제 쿠아우테목을 반란을 꾀했다는 혐의로 교수형에 처했다. 이 사건은 아즈텍 제국의 완전한 종말과 멕시코의 스페인 식민지 편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코르테스는 원주민의 기독교 개종을 스페인 지배 확립에 필수적인 요소로 여겼다. 그는 군사 정복이 완료된 후, 원주민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코회 수사들을 보내줄 것을 카를로스 1세에게 요청했다. 코르테스는 세속적인 성직자들이 원주민 개종에 해가 될 수 있다고 보아, 청빈과 복음 전파에 헌신하는 탁발 수도회 수사들을 선호했다.[37] 그는 교황에게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코회 수도회 대표에게 광범위한 사목 권한을 부여해 줄 것을 청원하기도 했다.[38]

1524년 5월, 프레이 마르틴 데 발렌시아가 이끄는 12명의 프란체스코회 수사들(멕시코의 열두 사도)이 멕시코에 도착했다. 프란체스코회 역사가 헤로니모 데 멘디에타는 코르테스가 직접 해안까지 마중 나가 맨발로 걸어온 수사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기록하며, 이를 코르테스의 경건함과 세속 권력보다 영적 권위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일화로 전했다. (다만, 초기 12사도 중 한 명인 토리비오 데 베나벤테 모톨리니아는 이 일화를 언급하지 않았다.)[39] 코르테스와 프란체스코회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프란체스코회는 코르테스를 멕시코 정복을 통해 복음 전파의 길을 연 "새로운 모세"로 여기기도 했다.[40]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 역시 플로렌티노 사본 개정판에서 코르테스가 프란체스코회 수사 파견을 요청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41]

1529년, 코르테스는 바예 데 오아하카 후작 작위를 받았다.

5. 2. 부인 카탈리나 수아레스의 죽음

코르테스의 아내 카탈리나 수아레스는 1522년 여름경 여동생, 남동생과 함께 뉴 스페인에 도착했다.[29] 그러나 이 시점에서 코르테스와 카탈리나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카탈리나는 코르테스의 정적인 쿠바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친척이었고, 코르테스는 벨라스케스의 권위를 거부한 상태였다. 또한 카탈리나는 귀족 작위인 ''도냐''가 없어 코르테스의 지위 상승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도 없었다. 반면 코르테스는 통역가였던 원주민 여성 도냐 마리나와의 사이에서 1522년경 아들 마르틴 코르테스("엘 메스티소")를 낳아 자녀를 가질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30][31]

카탈리나 수아레스는 1522년 11월 1일에서 2일 사이의 밤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는데, 그 경위가 불분명했다. 당시 코르테스가 아내를 살해했다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었다.[1] 그녀의 죽음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여러 증언이 확보되었다.[32] 관련 조사 기록 문서는 19세기 멕시코에서 출판되었고, 20세기에 다시 발견되었다.[33][34] 카탈리나의 죽음은 큰 스캔들이 되었지만, 코르테스는 이를 통해 자신의 부와 권력에 걸맞은 새로운 결혼 상대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1526년 그는 쿠에르나바카에 코르테스 궁전이라는 호화로운 저택을 지었으며, 1529년에는 스페인 귀족 여성인 도냐 후아나 데 수니가와 재혼했다. 이 결혼으로 코르테스는 세 명의 자녀를 더 두었고, 이 중 아들인 돈 마르틴 코르테스 이 수니가가 코르테스의 공식적인 상속자가 되어 오악사카 계곡 후작령 작위와 재산을 물려받았다.[35] 코르테스의 적출 딸은 도냐 마리아, 도냐 카탈리나, 도냐 후아나였다.[36]

5. 3. 스페인 왕실과의 갈등



쿠바 총독 벨라스케스는 1518년 코르테스에게 멕시코 내륙 탐험 및 식민지화 원정을 맡겼으나, 오랜 갈등 끝에 출발 직전 그의 권한을 취소했다. 그러나 코르테스는 이 명령에 불복하고 1519년 2월, 사실상의 반란을 일으켜 원정을 강행했다.[14]

1519년 7월, 코르테스와 그의 부하들은 베라크루스를 점령했다. 이 행동은 쿠바 총독 벨라스케스의 권위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스페인 국왕 카를 5세에게 직접 보고하고 명령을 받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14] 코르테스는 부하들의 후퇴 가능성을 차단하고 자신의 결의를 보이기 위해 타고 온 배들을 침몰시키기도 했다.[18]

아즈텍 제국 정복 이후, 코르테스는 1523년 카를 5세로부터 누에바에스파냐총독으로 임명되었다.[75] 그러나 그의 독단적인 행동과 권력은 스페인 왕실의 견제를 받기도 했다. 1540년 스페인으로 귀국한 코르테스는 총독 재임명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6. 본국의 인정과 문장 수여 (1525년)

프라도 미술관의 코르테스 초상. 우측에 왕에게 받은 문장이 보인다.


비록 코르테스는 벨라스케스 도독에게 항명하여 독자적인 군사 행동을 감행했지만, 그 결과로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에스파냐 본국에서는 코르테스의 이러한 업적을 인정하여 문장을 하사함으로써, 사실상 벨라스케스가 아닌 코르테스의 편을 들어주었다. 국왕 명의로 코르테스에게 내려진 문장 하사 증서에는 먼저 코르테스의 멕시코 정복 위업을 요약하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이어 다음과 같은 왕의 말이 기록되어 있다.

:"짐은 상술한 바와 같이 그대가 겪은 노고와 위험과 모험에 경의를 표하며, 그대와 그대의 무훈이 영구히 기념되며 그대와 그대의 후손이 완전히 영예롭게 할 것이라 ... 그대의 혈통의 문장 외에 그대 개인의 문장을 가지고 사용함이 짐의 뜻이라 ..."[105]

이어서 증서에는 코르테스에게 하사하는 문장의 문장학적 의미가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방패는 상하좌우 네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 마주보아 좌상단 칸은 “백색 배경에 쌍두 흑수리이며, 이것은 신성로마제국의 문장이다.”[105]
  • 마주보아 좌하단 칸은 “적색 배경에 금사자가 그려져 있다. 이것은 그대, 에르난도 코르테스가 식산과 노력으로써 상술한 것과 같은 업적을 국가에 끼쳤음을 기념”하는 의미로, 곧 멕시코 정복을 상징한다.[105]
  • 마주보아 우측의 두 칸은 멕시코 현지와 관련된 의미를 담고 있다. 우상단 칸은 흑색 배경에 금관 세 개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코르테스가 패배시킨 세 명의 원주민 황제 모테크소마 2세, 쿠이틀라우악, 쿠아우테목을 의미한다.[105]
  • 마주보아 우하단 칸에는 물 위에 떠 있는 도시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아스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이다.[105]


방패 둘레에는 일곱 개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코르테스가 정복한 원주민 도시국가들과 그 군주들을 상징한다. 이들 원주민 군주는 “죄수처럼 쇠사슬에 묶여 있으며 그 쇠사슬은 방패 하부의 자물쇠로 닫히는 것이다.”[105]

7. 온두라스 원정과 이후 (1524년-1526년)

1524년부터 1526년까지 코르테스는 온두라스로 원정을 이끌었다. 이는 쿠바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부하였으나 온두라스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던 크리스토발 데 올리드를 제압하기 위함이었다. 코르테스는 멕시코에 남겨둘 경우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아스텍의 마지막 황제 쿠아우테목을 이 원정에 동행시켰다.[42]

원정 도중 코르테스는 올리드를 격파하였으나, 1525년 2월 26일, 쿠아우테목이 반란을 모의했다는 혐의를 씌워 교수형에 처했다. 이는 아스텍 최후의 황제를 처형한 사건으로, 당시에도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또한 코르테스는 올리드의 반역 배후에 벨라스케스가 있다고 주장하며 벨라스케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이러한 코르테스의 독단적인 행동들은 그의 막강해지는 권력을 경계하던 카스티야 왕국 본국 및 인디에스 평의회와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42][106]

코르테스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변호하기 위해 카를 5세에게 다섯 번째 장문의 편지(보고서)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 그는 "폐하의 눈을 가리고 있는 다양하고 강력한 경쟁자들과 적들"이 있다며 자신을 방해하는 세력에 대한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43][107] 그러나 당시 신성 로마 황제이기도 했던 카를 5세는 이탈리아 전쟁, 독일 프로테스탄트와의 슈말칼덴 전쟁, 동쪽에서 압박해오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등 유럽 내 문제에 집중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아메리카의 식민지가 제국의 재정에 기여하는 한, 현지 사정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44][108]

한편, 코르테스와 적대 관계였던 벨라스케스 총독과 후안 로드리게스 데 폰세카 주교는 코르테스의 권력 남용을 문제 삼아 당시 스페인 섭정을 맡고 있던 유트레히트의 아드리아누스 주교에게 코르테스를 조사하고 처벌할 판무관(주지사 재판관) 파견을 건의했다. 코르테스 역시 이러한 본국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었으며, "아스텍인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내 조국의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이 더 힘들다"고 토로하기도 했다.[45][109]

결국 루이스 폰체 데 레온이 판무관으로 임명되어 뉴 스페인에 도착했다. 코르테스가 온두라스 원정에서 돌아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 폰세 데 레온은 코르테스를 총독직에서 해임시켰다. 그러나 폰세 데 레온은 부임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갑자기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마르코스 데 아길라르가 총독 대행(''알칼데 마요르'')이 되었으나, 고령이었던 아길라르 역시 곧 병사하며 알론소 데 에스트라다를 후임으로 지명했다. 1년 사이에 총독이 세 번이나 바뀌고 두 명이 연달아 사망하자, 코르테스가 이들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1527년 8월, 에스트라다는 왕명으로 정식 총독에 임명되었고, 코르테스는 정무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에스트라다는 디에고 데 피구에로아를 남쪽 지역으로 파견했으나, 피구에로아는 원주민 묘지를 도굴하고 약탈을 일삼다가 결국 보물을 실은 배가 침몰하면서 사망했다. 이후 코르테스의 지지자 중 한 명이 손목 절단형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코르테스는 에스트라다에게 강력히 항의했다. 이에 에스트라다는 코르테스에게 추방령을 내렸고, 코르테스는 1528년 카를 5세에게 직접 탄원하기 위해 스페인 본국으로 향했다.

8. 제1차 본국 소환 (1528년)

16세기 화가 야코프 자이제네거의 그림, ''사냥개와 함께 있는 카를 5세 황제'' (1532년)


1528년, 코르테스는 자신을 둘러싼 여러 고발에 대해 해명하고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스페인 본국으로 돌아와 주군인 카를로스 1세에게 직접 탄원했다. 코르테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멕시코 현지에서는 후안 알타미라노(Juan Altamirano)와 알론소 발리엔테 등이 코르테스를 지지하는 세력을 대표하고 있었다.

코르테스는 화려한 차림으로 카를로스 1세의 궁정에 나아가, 자신을 향한 정적들의 고발 내용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특히 왕에게 바쳐야 할 황금을 횡령했다는 혐의에 대해서는, 오히려 규정된 양(퀸토, 즉 5분의 1)보다 더 많은 황금을 왕실에 바쳤음을 증명하려 했다. 또한 아스텍 제국 정복 과정에서 폐허가 된 수도 테노치티틀란멕시코시티로 재건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강조했다.

카를로스 1세는 코르테스에게 호의적이었다.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산티아고 기사단 훈장을 수여했으며, 1529년에는 귀족을 나타내는 돈 칭호와 함께 오아하카계곡 후작 작위를 내렸다. 오아하카 계곡은 당시 누에바에스파냐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 중 하나로 평가받았으며, 이 작위와 함께 코르테스는 23개의 영구 엔코미엔다와 그에 속한 23,000명의 봉신을 거느리게 되었다.[87][110][14][46]

그러나 이러한 토지 소유권과 봉신에 대한 권리 인정에도 불구하고, 코르테스는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누에바에스파냐 도독 자리에는 다시 임명되지 못했다. 이후로도 그는 식민지 행정에서 중요한 직책을 다시는 맡지 못했다.

한편, 코르테스가 스페인에 머무는 동안 멕시코에서는 식민지 관리자들이 그의 재산을 부당하게 관리하고 원주민들을 학대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코르테스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원주민 편에 서서 고소장 작성을 도왔는데, 이때 원주민들이 자신들이 겪은 학대 상황을 그림 문자로 기록하여 증거로 제출한 문서가 바로 『우에소친코의 서』이다.

코르테스의 두 번째 부인 후아나 데 수니가의 묘비.


스페인에 머무는 동안 코르테스는 첫 부인 카탈리나 수아레스가 1522년 사망한 후, 스페인 귀족 여성인 도냐 후아나 데 수니가와 재혼했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돈 마르틴 코르테스를 포함한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이 아들이 1547년 코르테스 사후 그의 작위와 영지를 상속받아 제2대 오아하카 계곡 후작이 되었다.[111][112] 이 후작 작위는 엔코멘데로스의 음모사건과 같은 위기도 있었지만,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계승되어 1811년까지 코르테스 가문이 소유했다.

9. 멕시코 귀환과 말년 (1530년-1547년)

1530년, 오악사카 계곡 후작이라는 새로운 작위와 명예를 얻었지만 이전보다 줄어든 권력을 가지고 코르테스는 멕시코로 돌아왔다. 군사적 권한은 여전히 유지되었으나, 1535년 안토니오 데 멘도사가 초대 부왕으로 임명되어 민정을 총괄하게 되면서 권력은 분산되었다. 이러한 민정과 군정의 분립은 코르테스와 식민 정부 사이에 지속적인 알력을 발생시켰고, 그가 추진하던 여러 사업의 실패로 이어졌다.[14][46]

코르테스가 돌아온 멕시코는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그가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의심이 팽배했으며, 첫 번째 부인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고발되어 비밀리에 수사가 진행되는 등 그의 명성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소송들이 제기되었다. 식민 정부는 이 살해 혐의에 대해 코르테스의 유무죄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영향력이 여전히 강력하여 섣불리 판단하기 어려웠음을 보여준다.

자신의 지위를 다시 공고히 하고 식민지의 질서를 어느 정도 회복한 후, 코르테스는 멕시코시티 남쪽의 쿠에르나바카로 은퇴하여 궁전을 짓고 태평양 탐험 등에 몰두했다. 그러나 은퇴 후에도 누뇨 벨트란 데 구스만, 안토니오 데 멘도사 부왕 등과 영토 및 탐사 권리를 두고 분쟁을 겪었다. 또한 은광 개발에도 힘써 여러 지역에서 은광을 확보했다.[113][47]

탐험 활동을 지속하여 1536년에는 바하칼리포르니아반도를 발견했고, 그의 지시로 프란시스코 데 울로아가 1539년 캘리포니아만을 탐사하기도 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주요 탐험이었다.

1541년, 코르테스는 자신에게 제기된 여러 소송과 채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에스파냐 본국으로 돌아갔다.[87] 하지만 고국에서 그는 거의 무시당했으며, 카를로스 1세 황제에게 자신을 알리려 했던 일화는 그의 달라진 위상을 보여준다.[114][115][48][49] 그는 1541년 알제리 원정에 참여했으나 별다른 공을 세우지 못했고, 오히려 막대한 빚만 지게 되었다.[116][50] 왕실에 자신의 기여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실망하여 멕시코로 돌아가려 했으나, 1547년 12월 2일 세비야 근처 카스티예하 데 라 쿠에스타에서 이질과 흉막염으로 사망했다.

9. 1. 멕시코 귀환과 권력 약화

1530년, 코르테스는 오악사카 계곡 후작이라는 새로운 작위와 영예를 가지고 멕시코로 돌아왔다.[14][46] 그는 여전히 군사적 권한을 유지하며 정복 활동을 계속할 허가를 받았으나, 1535년 안토니오 데 멘도사가 초대 부왕으로 임명되어 누에바에스파냐의 민정을 총괄하게 되면서 그의 권력은 이전보다 약화되었다. 이러한 민정과 군정의 분리는 지속적인 알력을 낳았고, 코르테스가 추진하던 여러 사업의 실패로 이어졌다.

코르테스가 멕시코로 돌아왔을 때, 식민지는 무정부 상태에 가까운 혼란에 빠져 있었다. 코르테스가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의심이 팽배했고, 심지어 첫 번째 부인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고발되어 비밀리에 수사가 진행 중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식민 정부는 코르테스의 유무죄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영향력이 여전히 강력하여 섣불리 판단하기 어려웠음을 시사한다.

자신의 지위를 다시 공고히 하고 식민지의 질서를 어느 정도 회복한 후, 코르테스는 멕시코시티에서 남쪽으로 약 약 48.28km 떨어진 쿠에르나바카에 있는 자신의 영지로 은퇴했다. 그는 그곳에서 궁전 건설과 태평양 탐험에 집중했다. 그러나 은퇴 후에도 누뇨 벨트란 데 구스만과 다투었고, 오늘날의 캘리포니아 지역 탐사 권리를 두고는 안토니오 데 멘도사 부왕과도 분쟁을 벌였다.

경제적으로 코르테스는 은광 개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534년 숨팡고델리오에서 여러 은광을 발견했으며, 1540년대 초에는 다음과 같은 은광들을 소유하게 되었다.[113][47]

코르테스 소유 은광 (1540년대 초)
지역은광 수
술테펙20개
탁스코12개
사쿠알판3개



그는 이전에도 타마술라 지역의 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한 바 있다.[113][47]

탐험 활동으로는 1536년 멕시코 북서부를 탐사하여 바하칼리포르니아반도를 발견했으며, 멕시코의 태평양 연안을 답사하는 데에도 시간을 투자했다. 1539년에는 코르테스의 명령을 받은 프란시스코 데 우요아가 캘리포니아만을 발견했고, 한동안 이 만은 Mar de Cortés|코르테스 해es로 불리기도 했다. 이것이 코르테스가 주도한 마지막 대규모 탐험 원정이었다.

9. 2. 탐험과 죽음

1536년, 코르테스는 멕시코 북서부를 탐사하여 바하칼리포르니아반도를 발견했다. 또한 멕시코의 태평양 연안을 답사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캘리포니아만은 1539년 코르테스의 명령으로 프란시스코 데 울로아가 탐사하였으며, 한동안 '코르테스만'(Mar de Cortéses)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것이 코르테스의 마지막 대규모 탐험 원정이었다.[113][47]

캘리포니아반도 탐사가 끝난 후, 코르테스는 채무와 권력 남용 등으로 자신에게 제기될 소송을 우려하여 1541년 에스파냐 본국으로 돌아갔다.[87] 그러나 귀환한 코르테스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그를 알아보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한번은 카를로스 1세의 마차를 발견하고 군중을 헤치고 나가 발판에 올라섰는데, 놀란 황제가 누구냐고 묻자 코르테스는 "소인은 한낱 사람입니다. 폐하께서 열성조들께 물려받으신 모든 도시들보다 더 큰 영토를 폐하께 바친 사람이지요."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114][115]

19세기 화가 윌리엄 홀이 그린 중년의 코르테스 판화


결국 카를로스 1세는 코르테스가 안드레아 도리아가 지휘하는 함대에 합류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 함대는 1541년 당시 오스만 제국 영토이자 해적왕 하이레딘 레이스의 본거지였던 바르바리 해안의 알제리를 향한 원정에 나서고 있었다. 이 원정 도중 코르테스는 폭풍으로 인해 하마터면 익사할 뻔했으며, 이것이 그의 마지막 군 경력이 되었다.[116][50]

스스로 많은 돈을 원정 자금으로 사용했던 코르테스는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다. 1544년 2월, 그는 왕실 재무부에 자신의 기여에 대한 보상을 청구했으나 3년 동안 무시당했다. 이에 실망한 코르테스는 1547년 멕시코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세비야에 도착했을 때 이질에 걸렸고, 결국 1547년 12월 2일 세비야 근처 카스티예하 데 라 쿠에스타에서 이질과 흉막염으로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유언을 통해 자신의 수많은 혼혈 자녀들과 백인 자녀들,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들을 잘 돌봐줄 것을 당부했다. 또한 자신의 유해가 결국 멕시코에 매장되기를 희망했으며, 교황에게 말린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마르틴을 포함한 네 자녀의 사생아 신분을 없애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멕시코로 옮겨져 여러 차례 이장된 끝에 현재 멕시코시티의 예수 나사레노 병원 내 예배당에 안치되어 있다.[51][52]

10. 유산과 평가

1992년 발행된 1000 에스파냐 페세타 지폐의 코르테스. 코르테스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달라져 왔다.


2005년 오페라 ''라 콘키스타''의 한 장면


에르난 코르테스의 초기 생애에 대한 기록은 드물며, 그의 이름은 주로 멕시코 정복 이후 알려지게 되었다. 코르테스에 대한 이해는 그가 남긴 기록과 동시대 및 후대의 다양한 자료를 통해 이루어지지만, 각 자료는 특정한 관점을 반영하고 있어 해석에 주의가 필요하다. (자세한 내용은 #역사적 평가 참조)

현대 멕시코에는 코르테스를 직접적으로 기리는 기념물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쿠에르나바카 시의 코르테스 궁전Palacio de Cortéses이나 이스타시우아틀과 포포카테페틀 화산 사이의 코르테스 고개Paso de Cortéses처럼 그의 이름을 딴 지명이나 건물은 여전히 남아 있다.

멕시코의 유명 벽화디에고 리베라는 국립궁전 벽화 등 여러 작품에서 코르테스를 강력하고 불길한 인물로 묘사하기도 했다.

1981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호세 로페스 포르티요는 코르테스를 대중적으로 알리려는 시도를 했다. 마누엘 톨사가 제작한 코르테스 흉상의 복제품을 예수 나사렛 병원에 공개했지만, 민족주의 단체의 반발과 파괴 시도로 인해 곧 대중 앞에서 철거되었다.[56] 현재 이 흉상 복제품은 병원 내부에 보관되어 있으며,[57] 원본은 이탈리아 나폴리의 피냐텔리 빌라Villa Pignatelliit에 있다. 이후 코르테스와 말린체, 그리고 그들의 아들 마르틴을 묘사한 "혼혈 기념비"Monumento al Mestizajees가 코요아칸에 세워졌으나, 이 역시 항의에 부딪혀 눈에 띄지 않는 공원으로 이전되었다.[58] 쿠에르나바카의 한 호텔에 있던 코르테스 조각상도 호텔이 철거되고 상업 시설이 들어서면서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56]

한편, 코르테스의 멕시코 정복은 현대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이탈리아 작곡가 로렌초 페레로는 1521년의 주요 사건들을 다룬 오페라 ''라 콘키스타''La Conquistait(2005)에서 코르테스를 주요 인물로 등장시켰다.

10. 1. 유골의 수난사

콜럼버스처럼 코르테스 역시 물질적으로는 부유했지만 심적인 고통 속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유언에서 자신의 유해가 멕시코에 매장되기를 원했으며, 본부인과 현지처 사이에서 낳은 백인 아이들과 메스티소 아이들, 그리고 그 어머니들까지 잘 보살펴 달라고 당부했다. 교황의 허락을 받아 사생아 네 명을 적자로 인정받았는데, 여기에는 말린체의 아들 마르틴 코르테스 엘 메스티소도 포함되었다.

코르테스가 1547년 12월 2일 사망한 후, 그의 유해는 여러 차례 옮겨 다녀야 했다.

  • 1547년 12월 4일: 세비야 산 이시도로 델 캄포 교회의 메디나 공작 영묘에 처음 매장되었다.
  • 1550년: 공작의 매장 공간이 필요해지자 같은 교회의 산타카타리나 제단으로 이장되었다.
  • 1566년: 코르테스는 유언으로 멕시코 코요아칸에 수도원을 지어 묻히기를 원했지만, 수도원이 지어지지 않아 그의 유해는 누에바에스파냐(현재의 멕시코)로 보내져 어머니와 누이가 묻힌 텍스코코의 산프란시스코 데 텍스코코 교회에 안치되었다.
  • 1629년: 마지막 남자 후계자인 제4대 발레 후작 돈 페드로 코르테스가 사망하자,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은 코르테스의 유골을 파내 후손과 함께 프란체스코회 교회에 합장하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9년간 지연되었고, 그동안 유골은 부왕궁 큰방에 방치되었다.
  • 1638년경: 마침내 멕시코시티의 사그라리오 프란체스코회 교회로 옮겨져 87년간 안치되었다.
  • 1716년: 같은 교회 내 다른 장소로 이장되었다.
  • 1794년: 코르테스가 직접 세운 헤수스 나사레노 병원으로 유골이 옮겨졌다. 이곳에 마누엘 톨사가 제작한 코르테스의 흉상과 영묘가 세워졌고, 공개적인 기념행사와 함께 도시의 모든 교회가 종을 울렸다.


코르테스가 멕시코시티에 세운 헤수스 나사레노 병원의 코르테스 묘


1823년 멕시코가 독립하면서 코르테스의 유골은 훼손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영묘는 해체되었고, 흉상과 문장은 시칠리아 팔레르모로 보내져 테라노바 공작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유골 자체는 병원 건물 안에 숨겨졌는데, 당시 사람들은 유골이 멕시코 밖으로 반출되었다고 생각했다. 1836년, 유골은 같은 건물 내 다른 장소로 다시 옮겨져 은닉되었다.

오랫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코르테스의 유골은 1946년 11월 24일에야 재발견되었다.[117][51] 이는 역사가 루카스 알라만이 남긴 비밀 문서 덕분이었다. 유골은 멕시코 국립인류학역사연구소(INAH)로 옮겨져 진품임이 확인되었고,[117][51] 이후 원래 있던 헤수스 나사레노 병원의 자리에 청동 명문과 문장이 추가되어 다시 안치되었다.[118][52]

유골의 재발견은 멕시코 사회에 큰 논란을 일으켰다. 스페인계 전통(히스패닉)을 중시하는 이들은 환호했지만, 원주민 중심의 역사관을 지지하는 이들은 정복자의 유골이 멕시코 땅에 묻히는 것에 강하게 반발하며 "쿠아우테목 동상 앞에서 불태워 재를 날려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17][51] 이 시기 쿠아우테목의 유골로 추정되는 것이 발견되면서 소위 "유골 전쟁"이라 불리는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51]

10. 2. 역사적 평가



에르난 코르테스의 초기 생애에 대한 기록은 드물며, 그의 명성은 주로 멕시코 정복 이후에 형성되었다. 코르테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가 남긴 기록과 동시대 및 후대의 다양한 기록들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각 자료는 특정한 관점과 한계를 지니고 있다.

코르테스 본인이 카롤루스 1세에게 보낸 보고서는 가장 중요한 사료 중 하나로 꼽히지만,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유리하게 서술했을 가능성이 높아 비판적인 시각으로 읽어야 한다. 코르테스의 사제였던 프란시스코 로페스 데 고마라가 쓴 전기는 코르테스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지만, 고마라는 아메리카 대륙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고 기사도 문학의 영향을 받아 코르테스를 영웅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함께 정복에 참여했던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는 자신의 수기에서 고마라의 기록을 "거짓부렁"이라 비판하며, 코르테스뿐만 아니라 다른 병사들의 역할도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복 직후부터 스페인의 잔혹 행위에 대한 비판적인 기록도 등장했다. 도미니코회 수도사 바르톨로메오 데 라스 카사스는 『서인도 파괴 소사』를 통해 원주민들에게 가해진 폭력과 학살을 강하게 규탄했으며, 이는 코르테스를 포함한 모든 정복자들을 향한 비판이었다.[119][55]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이 원주민 정보원들과 함께 기록한 『플로렌스의 서』 역시 코르테스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담고 있다. 이처럼 상반된 기록과 자료의 부족으로 인해 코르테스에 대한 평가는 잔인하고 무자비한 악당 또는 고귀하고 명예로운 기사라는 극단적인 이미지로 나뉘는 경향을 보여왔다.

현대에 이르러 코르테스는 아즈텍 제국을 무너뜨리고 그 문명을 파괴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아즈텍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으며,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인신공양과 같은 원주민의 종교 관습을 야만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이를 폐지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명분 뒤에는 정복지에서의 금 약탈, 원주민 대량 학살, 여성에 대한 성폭력 등 제국주의적 침략과 착취가 자행되었다는 점이 지적된다. 코르테스 자신도 원주민 여성 말린체를 통역사이자 동반자로 삼았으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마르틴을 낳았다.

과거에는 코르테스의 행위를 원주민을 인신공양과 같은 잔혹한 관습에서 해방시키고 기독교 복음을 전파한 긍정적인 측면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존재했다. 나우아틀어로 쓰인 『플로렌스의 서』에는 코르테스 일행을 "평화의 신"으로 묘사한 기록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는 스페인 중심적인 시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스페인의 지배는 결과적으로 원주민문화, 전통, 종교를 철저히 파괴했으며, 원주민들은 노예와 같은 처지로 전락하여 백인 이주민들에게 착취당했다.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발생한 원주민 반란은 멕시코 독립의 한 원동력이 되었지만[77], 독립 이후에도 멕시코의 실권은 콘키스타도르의 후예인 크리오요 계층이 장악했으며, 원주민의 실질적인 사회적 지위 향상은 20세기에 들어서야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처럼 코르테스의 정복은 멕시코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그의 행적은 오늘날까지도 논쟁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10. 3. 가계

에르난 코르테스는 1485년 스페인 에스트레마두라의 메데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보병 대위였던 마르틴 코르테스 데 몬로이(Martín Cortés de Monroy)이고, 어머니는 카탈리나 피사로 알타미라노(Catalína Pizarro Altamirano)이다.[78][5]

외가를 통해서는 잉카 제국을 정복한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6촌 관계이며, 친가를 통해서는 제3대 히스파니올라 총독 니콜라스 데 오반도와 친척 관계이다.[78][5] 코르테스의 외조부 디에고 알타미라노는 피사로의 아버지와 사촌 지간이었고,[78] 친증조부는 제5대 몬로이 대부 로드리고 데 몬로이 이 알마라스였다.[5]

코르테스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쿠바 도독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 케야르의 처제인 카탈리나 수아레스 마르카이다(Catalina Suárez Marcaida)였으나, 1522년 코요아칸에서 자녀 없이 사망했다.[29] 당시 코르테스가 아내를 살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조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1][32][33][34]

1529년, 코르테스는 아길라르 백작의 딸인 도냐 후아나 라미레스 데 아렐라노 데 수니가(doña Juana Ramírez de Arellano de Zúñiga)와 두 번째로 결혼했다.[35] 이 결혼을 통해 코르테스는 귀족 가문과 연결되었으며, 상속자가 될 적자를 얻었다.

코르테스는 여러 명의 서자와 얼자를 두었으며,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는 6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이 중 2명은 어려서 사망하여 1남 3녀가 성장했다.

'''서자 및 얼자'''

  • 도냐 카탈리나 피사로(doña Catalina Pizarro): 1514년 또는 1515년 출생. 쿠바 여성 레오노르 피사로(Leonor Pizarro) 소생. 정복자 후안 데 살체도(Juan de Salcedo)와 결혼.[120][61]
  • 돈 마르틴 코르테스(don Martín Cortés): 1522년 코요아칸 출생. 코르테스의 통역관이자 현지처였던 라 말린체(La Malinche) 소생. "최초의 메스티소"로 불린다.[30][31] 도냐 베르날디나 데 포라스(doña Bernaldina de Porras)와 결혼하여 후손을 남겼다.[62]
  • 돈 루이스 코르테스(don Luis Cortés): 1525년 출생. 스페인 트루히요 출신 도냐 안토니아(doña Antonia) 또는 도냐 엘비라 에르모실로(doña Elvira Hermosillo) 소생.[121][63]
  • 도냐 레오노르 코르테스 모크테수마(doña Leonor Cortés Moctezuma): 1527년 또는 1528년 멕시코시티 출생. 아스텍 제국 황제 모테크소마 2세의 딸인 테쿠이치포츠 이시카쇼치친(Tecuichpotzin, 세례명 이사벨) 소생. 바스크 상인 후안 데 톨로사와 결혼.[122][64]
  • 도냐 마리아 코르테스 데 모크테수마(doña María Cortés de Moctezuma): 아스텍 공주 소생이나, 상세한 기록은 거의 없다.


'''적자 (도냐 후아나 데 수니가 소생)'''[36]

  • 돈 루이스 코르테스 이 라미레스 데 아렐라노(don Luis Cortés y Ramírez de Arellano): 1530년 텍스코코 출생. 요절.
  • 도냐 카탈리나 코르테스 데 수니가(doña Catalina Cortés de Zúñiga): 1531년 쿠에르나바카 출생. 요절.
  • 돈 마르틴 코르테스 이 라미레스 데 아렐라노(don Martín Cortés y Ramírez de Arellano): 1532년 쿠에르나바카 출생. 코르테스의 적장남이자 제2대 오아하카계곡 후작. 육촌 도냐 아나 라미레스 데 아렐라노와 결혼.[35]
  • 도냐 마리아 코르테스 데 수니가(doña María Cortés de Zúñiga): 1533년-1536년 쿠에르나바카 출생. 제5대 루나 백작 돈 루이스 데 퀴뇨네스 이 피멘텔과 결혼.
  • 도냐 카탈리나 코르테스 데 수니가(doña Catalina Cortés de Zúñiga): 1533년-1536년 쿠에르나바카 출생. 미혼으로 사망.
  • 도냐 후아나 코르테스 데 수니가(doña Juana Cortés de Zúñiga): 1533년-1536년 쿠에르나바카 출생. 제2대 알칼라데로스가술레스 공작 돈 페르난도 엔리케스 데 리베라 이 포르토카레로와 결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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