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6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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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6인조는 1920년대 프랑스 음악계에 등장한 6명의 작곡가 그룹으로, 에릭 사티의 영향을 받아 결성되었다. 앙리 콜레가 《코메디아》지에 '러시아 5인조, 프랑스 6인조, 그리고 에릭 사티'라는 글을 기고하며 이들을 6인조로 묶어 세상에 알려졌다. 구성원은 루이 뒤레, 아르튀르 오네게르, 다리우스 미요, 제르멘 타유페르, 프란시스 풀랑크, 조르주 오릭이며, 6인조는 공동 작곡보다는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며 활동했다. 대표적인 공동 작품으로는 《6인조의 앨범》, 《에펠탑의 신랑신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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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자 회담은 북한 핵무기 개발 문제 해결을 위해 대한민국, 북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6개국이 참여하는 다자 회담으로, 2003년부터 베이징에서 개최되었으나 2009년 북한의 탈퇴 선언 이후 재개되지 못하고 있다. - 명수 6 - 육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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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포레는 프랑스의 작곡가, 오르가니스트, 피아니스트, 음악 교육자로서, 프랑스 가곡의 거장으로 불리며 파반느, 레퀴엠,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야상곡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프랑스 6인조 | |
---|---|
기본 정보 | |
결성 | 1920년대 |
해체 | 1930년대 |
국적 | 프랑스 |
장르 | 클래식 음악 |
구성원 | 조르주 오리크 루이 뒤레 아르튀르 오네게르 다리우스 미요 프랑시스 풀랑크 제르멘 타유페르 |
관련 인물 | 장 콕토, 에릭 사티, 장 비에네르 |
2. 결성 배경
오네게르, 미요, 타유페르는 파리 음악원 동기였으며, 뒤레, 오네게르, 오리크는 에릭 사티 등과 함께 '새로운 젊은이를 위한 그룹(누보 쥰느)'을 결성했다. 1917년경에는 사티의 『퍼레이드』에 감명받은 풀랑크가 합류한다.
풀랑크에 따르면, 당시 뷔유 콜롬비에 극장의 운영을 맡고 있던 성악가 잔 바트리가 기획한, 위 6명의 작곡가의 콘서트가 '6인조' 성립의 발단이 되었다.[13] 이들은 몽파르나스의 화가들의 아틀리에에서 파블로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등과 공동으로 음악과 미술의 협업 '수금과 팔레트'를 기획하기도 했다.[13]
장 콕토는 『수탉과 아를르캥』(1918년 3월), 『파리 미디』지(1919년)에서 인상파를 대체하는 새로운 프랑스 음악의 필요성을 설파했고, 콕토의 영향을 받은 평론가 앙리 콜레는 1920년 1월 16일자 『코메디아』지에 ''''러시아 5인조, 프랑스 6인조, 그리고 에릭 사티''''를 게재하여 이 명칭을 알렸다.[14]
6인조의 공동 창작 활동은 많지 않았는데, 피아노 소품집 『6인조의 앨범』(1920년), 뒤레를 제외한 5명의 합작 『에펠탑의 신랑신부』(1921년, 발레 스웨드와 위촉) 등이 있다.
2. 1. 누보 쥰느 (Les Nouveaux Jeunes)
1917년,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많은 극장과 콘서트홀이 문을 닫았을 때, 블레즈 상드라르와 화가 모이즈 키슬링은 화가 에밀 르줴느의 작업실에서 콘서트를 열기로 결정했다. 이 행사 첫 번째 콘서트에는 피카소, 마티스, 레제, 모딜리아니 등의 캔버스로 작업실 벽을 장식했고, 에릭 사티, 오네거, 오릭, 뒤레의 음악이 연주되었다. 이 콘서트는 사티에게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작곡가 그룹을 구성하여, Les Six프랑스어의 선구자로 알려진 ''Les nouveaux jeunes프랑스어''를 결성하겠다는 아이디어를 주었다.오네게르, 미요, 타이유페르는 파리 음악원 동기였으며, 뒤레, 오네게르, 오리크는 에릭 사티 등과 함께 '새로운 젊은이를 위한 그룹(누보 쥰느)'을 결성했다. 1917년경에는 사티의 『퍼레이드』에 감명받은 풀랑크가 합류했다.
2. 2. 프랑스 6인조의 탄생
1917년,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많은 극장과 콘서트홀이 문을 닫히자, 블레즈 상드라르와 화가 모이즈 키슬링은 화가 에밀 르줴느의 작업실에서 콘서트를 열기로 결정했다. 이 행사에는 피카소, 마티스 등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었고, 에릭 사티, 오네거, 오릭, 뒤레의 음악이 연주되었다. 이 콘서트는 사티에게 영감을 주어 ''Les nouveaux jeunes|새로운 젊은이들프랑스어''라는 작곡가 그룹을 결성하게 했으며, 이는 훗날 Les Six|프랑스 6인조프랑스어의 선구자가 되었다.밀로는 앙리 콜레가 여섯 명의 작곡가(오릭, 듀레이, 오네게르, 풀랑, 타이유페르, 밀로)가 서로 알고 지내고 친구였으며, 음악적 성향은 달랐지만 같은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했기 때문에 이들을 "6인조"로 묶었다고 설명한다. 오릭과 풀랑은 장 콕토의 영향을 받았고, 오네게르는 독일 낭만주의, 밀로는 지중해적 서정성을 추구했다.[4]
풀랑은 오네게르와 오릭의 음악이 매우 달랐으며, 밀로는 마냐르를 존경했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았고, 오네게르는 플로랑 슈미트를 존경했지만 다른 멤버들은 좋아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반면 오네게르는 오릭, 밀로, 자신이 숭배했던 사티를 멸시했다고 한다.
오르넬라 볼타와 같은 다른 저자들은 장 콕토가 전위 예술 그룹의 리더가 되기 위해 6인조를 이용했다고 주장한다. 입체파와 초현실주의 그룹이 시각 예술과 문학에서 피카소, 아폴리네르, 브르통을 중심으로 등장한 것처럼, 콕토도 음악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사티가 "누보 젊은이"를 떠난 것은 콕토에게는 "하늘의 선물"과 같았으며, 콕토는 1918년 출판물인 ''Le Coq et l'Arlequin|수탉과 아를르캥프랑스어''을 통해 6인조 결성을 주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장 콕토와 "6인조"는 "르 뵈프 쉬르 르 투아"(지붕 위의 황소)라는 카바레에 자주 모였다. 이 카바레는 밀로의 발레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개업 밤에는 피아니스트 장 비에너가 조지 거슈윈과 빈센트 유먼스의 곡을 연주하고 콕토와 밀로가 타악기를 연주했다. 디아길레프, 피카소, 클레르, 바토리, 슈발리에 등 유명 인사들이 참석했으며, 젊은 미국 작곡가 버질 톰슨도 단골 손님이었다.[6][7][8][9]
오네게르, 미요, 타이유페르는 파리 음악원 동기였으며, 뒤레, 오네게르, 오리크는 에릭 사티 등과 함께 '새로운 젊은이를 위한 그룹(누보 쥰느)'을 결성했다. 1917년경에는 사티의 『퍼레이드』에 감명받은 풀랑크가 합류한다.
풀랑크에 따르면, 당시 뷔유 콜롬비에 극장의 운영을 맡고 있던 성악가 잔 바트리가 기획한, 위 6명의 작곡가의 콘서트가 '6인조' 성립의 발단이 되었다.[13] 또한, 그들은 몽파르나스의 화가들의 아틀리에에서 파블로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등과 공동으로 음악과 미술의 협업 '수금과 팔레트'를 기획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13]
장 콕토는 『수탉과 아를르캥』(1918년 3월), 『파리 미디』지(1919년)에서 인상파를 대체하는 새로운 프랑스 음악의 필요성을 설파했고, 콕토의 영향을 받은 평론가 앙리 콜레는 1920년 1월 16일자 『코메디아』지에 ''''러시아 5인조, 프랑스 6인조, 그리고 에릭 사티''''를 게재하여 이 명칭을 세상에 알렸다.[14]
멤버로서의 창작 활동은 적었고, 공동 제작에 의한 피아노 소품집 『6인조의 앨범』(1920년), 뒤레를 제외한 5명의 합작에 의한 『에펠탑의 신랑신부』(1921년) 등이 있다.
2. 3. 르 뵈프 쉬르 르 투아 (Le Boeuf sur le Toit)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장 콕토와 "6인조"는 "라 가야"라는 바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이 시설이 더 큰 구역으로 옮겨지면서 ''르 뵈프 쉬르 르 투아''(지붕 위의 황소)가 되었다. 밀로의 유명한 발레가 옛 건물에서 구상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바는 밀로의 발레의 이름을 따왔다.[5] 바의 이름을 바꾼 개업 밤에 피아니스트 장 비에너는 조지 거슈윈과 빈센트 유먼스의 곡을 연주했고, 콕토와 밀로는 타악기를 연주했다. 참석자 중에는 임프레사리오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예술가 파블로 피카소, 영화 제작자 르네 클레르, 가수 잔 바토리, 배우이자 가수 모리스 슈발리에가 있었다. 또 다른 단골 손님은 젊은 미국 작곡가 버질 톰슨이었고, 그의 이후 작품들은 "6인조"의 멤버들에게 영향을 받았다.[6][7][8][9]3. 구성원
- 루이 뒤레(1888년 - 1979년)
- 아르튀르 오네게르(1892년 - 1955년)
- 다리우스 미요(1892년 - 1974년)
- 제르멘 타유페르(1892년 - 1983년) ※ 유일한 여성
- 프란시스 풀랑크(1899년 - 1963년)
- 조르주 오릭(1899년 - 1983년)
앙리 콜레는 우리가 서로를 알고 있었고, 친구였으며, 우리의 기질과 성격이 전혀 같지 않더라도 같은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했기 때문에 여섯 명의 이름을 임의로 선택했다고 밀로는 설명했다.[4] 오릭과 풀랑은 장 콕토의 아이디어를 따랐고, 오네게르는 독일 낭만주의를 따랐으며, 미요는 지중해적 서정성을 따랐다고 한다.[4]
풀랑에 따르면, 우리 음악, 취향, 혐오의 다양성은 어떤 공통된 미학도 배제했으며, 오네게르와 오릭의 음악보다 더 다른 것은 없었다고 한다. 또한 밀로는 마냐르를 존경했지만, 풀랑은 그렇지 않았고, 우리 중 누구도 오네게르가 존경했던 플로랑 슈미트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르튀르 오네게르는 오릭, 밀로, 자신이 숭배했던 사티를 깊이 멸시했다고 한다.[4]
4. 주요 작품 및 협업
프랑스 6인조는 공동 작곡을 목적으로 결성된 그룹은 아니었지만, 36년 동안 구성원 중 일부가 같은 프로젝트에서 함께 작업한 경우가 여섯 번 있었다. 이 중 6인조의 앨범만이 6인조 전원이 참여한 유일한 작품이다.[14] 그 외에는 그룹 외부 작곡가들도 참여했다. 조르주 오리크와 프랑시스 풀랑크는 이 여섯 번의 협업에 모두 참여했고, 다리우스 미요는 다섯 번, 아르튀르 오네게르와 제르맹 타이유페르는 세 번, 루이 뒤레는 단 한 번 참여했다.
6인조가 함께 작업한 주요 작품 및 협업은 다음과 같다:
- 미요의 ''샐러드'' (1924년)
- 타이유페르의 ''라 누벨 시테르'' (1929년, 미완성)
- 오릭의 ''5개의 바가텔''
- 풀랑크의 발레 ''암사슴''(1922/23)
- 풀랑크의 ''르 발 마스케'' (1932년)
- 미요의 ''스카라무슈''
- 미요의 ''지붕 위의 소''
- 오네게르의 바이올린 독주 소나타
- 오네게르의 플루트 독주를 위한 ''염소의 춤''
- 타이유페르의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 피아노를 위한 전원 소나타
이들은 몽파르나스의 화가들과 함께 음악과 미술의 협업을 기획하기도 했다.[13] 장 콕토는 새로운 프랑스 음악의 필요성을 설파했고, 그의 영향을 받은 앙리 콜레는 1920년 ''코메디아''지에 '프랑스 6인조'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했다.[14]
4. 1. 6인조의 앨범 (L'Album des Six, 1920)
1920년, 프랑스 6인조는 피아노 곡 모음집 ''L'Album des Six''을 함께 출판했는데, 이는 여섯 작곡가 모두가 협력한 유일한 작품이었다.순서 | 곡명 | 작곡가 |
---|---|---|
1 | 전주곡 (1919) | 오리크 |
2 | 가사 없는 로망스, 작품 21 (1919) | 뒤레이 |
3 | 사라방드, H 26 (1920) | 오네게르 |
4 | 마주르카 (1914) | 미요 |
5 | C장조 왈츠, FP 17 (1919) | 풀랑크 |
6 | 목가, 쾌활하게 (1919) | 타이유페르 |
4. 2. 에펠탑의 신랑신부 (Les mariés de la tour Eiffel, 1921)
1921년, 프랑스 6인조 중 5명은 장 콕토의 발레 에펠탑의 신랑신부(Les mariés de la tour Eiffel)의 음악을 공동 작곡했는데, 이 작품은 발레 쇠도아에서 제작되었다.[1] 발레 쇠도아는 러시아 발레단(Ballets Russes)의 경쟁 단체였다.[1] 오리크가 리허설 일정에 맞춰 빠르게 완성하지 못해 6인조의 다른 멤버들에게 작업을 분담했다.[1] 당시 파리에 없었던 루이 뒤레는 참여하지 않았다.[1] 초연은 1913년의 봄의 제전(Le sacre du printemps)에 버금가는 공개적인 스캔들을 불러일으켰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펠탑의 신랑신부는 1920년대 내내 발레 쇠도아의 레퍼토리에 포함되었다.[1]- ''서곡'' (7월 14일) – '''오리크'''[1]
- ''결혼 행진곡'' – '''미요'''[1]
- ''장군의 연설'' (폴카) – '''풀랑크'''[1]
- ''트루빌의 목욕하는 여인'' – '''풀랑크'''[1]
- ''학살의 푸가'' – '''미요'''[1]
- ''전보의 왈츠'' – '''타이유페르'''[1]
- ''장례 행진곡'' – '''오네게르'''[1]
- ''사각 춤'' – '''타이유페르'''[1]
- ''리투르넬'' – '''오리크'''[1]
- ''결혼식의 퇴장'' – '''미요'''[1]
4. 3. 잔느의 부채 (L'éventail de Jeanne, 1927)
1927년, 오리크, 미요, 풀랑과 프랑스 6인조에 속하지 않은 다른 7명의 작곡가들이 함께 어린이 발레 잔느의 부채를 작곡했다.순서 | 곡명 | 작곡가 |
---|---|---|
1 | 팡파르 (Fanfare) | 모리스 라벨 |
2 | 행진곡 (Marche) | 피에르 옥타브 페루 |
3 | 왈츠 (Valse) | 자크 이베르 |
4 | 카나리 (Canarie) | 알렉시스 롤랑 마뉘엘 |
5 | 부레 (Bourrée) | 마르셀 들라노이 |
6 | 사라반드 (Sarabande) | 알베르 루셀 |
7 | 폴카 (Polka) | 미요 |
8 | 파스투렐 (Pastourelle) | 풀랑 |
9 | 론도 (Rondeau) | 오리크 |
10 | 피날레: 케르메스 왈츠 (Finale: Kermesse-Valse) | 플로랑 슈미트 |
4. 4. Mouvements du coeur (1949)
1949년, 오릭, 미요, 풀랑크는 다른 세 명의 작곡가와 함께 프레데리크 쇼팽의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루이즈 레베크 드 빌모랭의 가사에 곡을 붙인 바리톤 또는 베이스와 피아노를 위한 연가곡 모음곡 ''Mouvements du coeur: Un hommage à la mémoire de Frédéric Chopin, 1810–1849''를 공동으로 작곡했다.- ''전주곡'' – 앙리 소게
- ''마주르카'' – '''풀랑크'''
- ''왈츠'' – '''오릭'''
- ''즉흥 스케르초'' – 장 프랑세
- ''에튀드'' – 레오 프레거
- ''야상곡 발라드'' – '''미요'''
- ''후주곡: 폴로네이즈'' – 앙리 소게
4. 5. La Guirlande de Campra (1952)
1952년, 조르주 오릭, 아르튀르 오네게르, 프랑시스 풀랑크, 제르맹 타이유페르와 다른 세 명의 작곡가들은 오케스트라 작품인 라 기를랑드 드 캉프라를 공동으로 작업했다.[10]
4. 6. 마르그리트 롱의 이름에 의한 변주곡 (Variations sur le nom de Marguerite Long, 1956)
1956년, 조르주 오리크, 다리우스 미요, 프랑시스 풀랑크 등 5명의 작곡가들은 피아니스트 마르그리트 롱을 기리기 위해 관현악 모음곡 ''마르그리트 롱의 이름에 의한 변주곡''을 만들었다.[11]순서 | 곡명 | 작곡가 |
---|---|---|
1 | 장엄한 찬가 | 장 프랑세 |
2 | 마르그리트 롱을 위한 자장가 형식의 변주곡 | 앙리 소게 |
3 | 데이지의 왕관("The Crown of Daisies"), 론도 형식의 왈츠 | 다리우스 미요 |
4 | 야상곡 | 장 리비에 |
5 | 세레나데 | 앙리 뒤티외 |
6 | 간주곡 | 다니엘 르쉬르 |
7 | 전원곡, FP. 160 | 프랑시스 풀랑크 |
8 | ML (알레그로: 피날레) | 조르주 오리크 |
5. 영향
프랑스 6인조는 장 콕토를 중심으로 한 전위 예술 그룹으로, 시각 예술과 문학에서 입체파 및 초현실주의 그룹이 파블로 피카소, 기욤 아폴리네르, 앙드레 브르통을 중심으로 등장했던 것과 유사하게 형성되었다.[4] 에릭 사티가 그룹을 시작한 지 1년도 안 되어 "누보 젊은이"를 떠난 것은 콕토에게 "하늘의 선물"과 같았으며, 그의 1918년 출판물인 ''르 코크 에 라르를랭''은 이러한 움직임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장 콕토와 "6인조"는 "라 가야"라는 바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이 시설이 더 큰 구역으로 옮겨지면서 ''르 뵈프 쉬르 르 투아''(지붕 위의 황소)가 되었다. 다리우스 미요의 유명한 발레가 옛 건물에서 구상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바는 미요의 발레 이름을 따왔다.[5] 이름을 바꾼 바의 개업 밤에는 피아니스트 장 비에너는 조지 거슈윈과 빈센트 유먼스의 곡을 연주했고, 콕토와 미요는 타악기를 연주했다. 참석자 중에는 임프레사리오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예술가 파블로 피카소, 영화 제작자 르네 클레르, 가수 잔 바토리, 배우이자 가수 모리스 슈발리에가 있었다. 또 다른 단골 손님은 젊은 미국 작곡가 버질 톰슨이었고, 그의 이후 작품들은 "6인조"의 멤버들에게 영향을 받았다.[6][7][8][9]
참조
[1]
간행물
Jacques-Émile Blanche et le Groupe des Six
https://amis-musees-[...]
2012-12
[2]
간행물
La Musique chez soi (XII): Un livre de Rimsky et un livre de Cocteau – Les Cinq russes, les Six français, et Erik Satie
1920-01-16
[3]
간행물
La Musique chez soi (XIII): "Les 'Six' français – Darius Milhaud, Louis Durey, Georges Auric, Arthur Honegger, Francis Poulenc et Germaine Tailleferre
1920-01-23
[4]
웹사이트
Jean Cocteau et la musique à travers "Le Coq et l'Arlequin"
https://digistore.bi[...]
Université Libre de Bruxelles
2021-07-18
[5]
서적
"Portrait souvenir de Jean Cocteau" (transcript of a French television interview in 1963 by the author and the subject)
Tallandier
1964
[6]
서적
Virgil Thomson
https://books.google[...]
Library of America & Penguin Random House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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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he Rest is Noise. Listening to the Twentieth Century
https://books.google[...]
Picado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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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ncyclopedia of Music in the 20th Century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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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ncyclopedia Britannica
https://www.britan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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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cteau, Satie & Les S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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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he Music of Francis Poulenc (1899-1963): A Catalogue
https://books.google[...]
2016-05-17
[12]
서적
フランス6人組 20年代パリ音楽家群像
晶文社
[13]
서적
プーランクは語る 音楽家と詩人たち
筑摩書房
[14]
서적
フランス音楽史
春秋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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