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의 아들이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일원으로, 기원전 281년 셀레우코스 1세를 암살하고 마케도니아 왕위를 차지했다. 그는 이집트 왕위 계승에서 밀려나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등을 다스리던 리시마코스의 궁정으로 갔으며, 리시마코스의 몰락 이후 왕위에 올랐다. 이후 안티고노스 2세 등과 싸워 세력을 확장했으나, 기원전 279년 켈트족의 침략을 막는 과정에서 전사했다. 그는 리시마코스의 미망인 아르시노에 2세와 결혼했으나, 아르시노에 2세는 곧 마케도니아를 떠났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기원전 279년 사망 - 맹상군
맹상군은 전국시대 제나라의 공족이자 정치가로, 설 땅을 다스리며 많은 식객을 거느려 명성을 떨쳤고, 제나라 재상을 지냈으나 민왕과의 불화로 위나라로 망명하기도 했다. - 기원전 279년 사망 - 연 소왕
연 소왕은 연나라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즉위하여 부국강병을 이루고 제나라에 복수한 군주이며, 곽외와 악의를 등용하여 제나라를 공격했으나 말년에 불로장생술을 연구하다 사망했다. - 헬레니즘 시대의 마케도니아 - 피로스
피로스는 기원전 319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272년에 사망한 에페이로스의 왕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촌이자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당대 최고의 장군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특히 이탈리아 원정 중 로마군과의 전투에서 '피로스의 승리'라는 고사를 남긴 인물이다. - 헬레니즘 시대의 마케도니아 - 고대 마케도니아인
고대 마케도니아인은 고대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 지역에 거주하며 아르게아드 왕조를 중심으로 왕국을 건설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기에 대제국을 건설했으나 로마에 정복되었으며, 그들의 기원과 민족적 정체성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 헬레니즘 군주 - 알렉산드로스 대왕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원전 356년경 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교육받고 20세에 왕위를 계승하여 그리스 통일, 페르시아 제국 정복, 인도 원정 등을 통해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헬레니즘 문화 확산에 기여했으나 32세에 요절하여 제국은 분열되었다. - 헬레니즘 군주 - 피로스
피로스는 기원전 319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272년에 사망한 에페이로스의 왕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촌이자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당대 최고의 장군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특히 이탈리아 원정 중 로마군과의 전투에서 '피로스의 승리'라는 고사를 남긴 인물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 | |
---|---|
기본 정보 | |
![]() | |
로마자 표기 | Ptolemaios Keraunos |
칭호 | 마케도니아 왕 |
통치 | |
재위 기간 | 기원전 281년 – 279년 |
이전 통치자 | 리시마코스 |
다음 통치자 | 멜레아그로스 |
배우자 | |
배우자 | 알려지지 않은 여성 (아마도 리시마코스의 딸) 아르시노에 2세 |
가문 | |
왕가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아버지 |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 |
어머니 | 에우리디케, 안티파트로스의 딸 |
출생과 사망 | |
출생일 | 기원전 319년경 |
출생지 | 알렉산드리아 |
사망일 | 기원전 279년 1월/2월 |
2. 생애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는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안티파트로스의 딸 에우뤼디케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285년, 아버지와의 대립으로 이집트에서 추방당했고, 이복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왕위를 이었다. 케라우노스는 이복 누이 아르시노에 2세의 남편이자 마케도니아 왕 뤼시마코스에게 의탁했다.
기원전 282년, 뤼시마코스 궁정 내 갈등으로 아가토클레스가 처형되자, 케라우노스는 셀레우코스 1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셀레우코스는 뤼시마코스를 격파하고 그의 왕국을 병합했으나, 기원전 281년 케라우노스에게 암살당했다. 이후 케라우노스는 리시마키아에서 군대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고, 이집트 왕위에 대한 주장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가 마케도니아를 장악하려 했지만, 케라우노스는 해상 전투에서 그를 격파했다. 또한 에피루스의 피로스와 동맹을 맺어 피로스 전쟁을 지원했다. 케라우노스는 아르시노에 2세와 결혼했지만, 그녀의 아들들을 살해하고 그녀를 추방했다.
기원전 279년, 갈리아인들이 마케도니아를 침공했다. 케라우노스는 갈리아 군대에 맞서 싸웠으나, 전투 중 부상을 입고 사로잡혀 살해되었다. 케라우노스의 죽음 이후 마케도니아는 혼란에 빠졌다가, 기원전 277년 안티고노스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안정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이집트 탈출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와 그의 첫 번째 부인 에우리디케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는 기원전 319년경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2][3][4] 그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장군 출신으로, 알렉산드로스 사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창건하였다.[2] 기원전 317년에서 314년 사이,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에우리디케의 시녀였던 베레니케 1세와 결혼하여 훗날의 프톨레마이오스 2세를 포함한 자녀들을 더 낳았다. 처음에는 케라우노스가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으나, 베레니케의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성장하면서 이복형제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5][6]기원전 287년경, 케라우노스는 이집트를 떠나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서부 소아시아를 다스리던 리시마코스의 궁정으로 갔다.[7] 리시마코스는 그의 장인이었을 수도 있다.[7] 당시 리시마코스의 궁정은 케라우노스를 지원하는 문제로 분열되어 있었다. 리시마코스는 기원전 300년부터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친누이인 아르시노에 2세와 결혼한 상태였다. 한편, 리시마코스의 후계자인 아가토클레스는 케라우노스의 친누이인 리산드라와 결혼했다. 이 두 자매는 이미 계승권을 놓고 갈등을 겪고 있었고, 케라우노스의 등장은 이러한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리시마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를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기원전 284년에서 281년 사이에 자신의 딸 아르시노에 1세를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결혼시켜 자신의 결정을 확고히 했다.[8]
2. 2. 리시마코스와 셀레우코스의 몰락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는 이집트를 떠난 후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서부 소아시아를 다스리던 리시마코스의 궁정으로 갔다.[7] 리시마코스의 궁정은 케라우노스를 지원하는 문제로 분열되었다. 리시마코스는 아르시노에 2세와 결혼했고, 리시마코스의 후계자인 아가토클레스는 케라우노스의 친누이인 리산드라와 결혼했다. 두 자매는 이미 계승권을 놓고 갈등을 겪고 있었고, 케라우노스의 도착은 이러한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리시마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를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기원전 284년에서 281년 사이에 자신의 딸 아르시노에 1세를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결혼시켰다.[8]기원전 282년, 리시마코스 궁정 내부의 갈등으로 아가토클레스가 처형되었다. 멤논에 따르면, 아가토클레스를 살해한 것은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였다고 한다.[9] 그러나 다른 자료들은 케라우노스가 아가토클레스 편에 섰으며, 리산드라와 함께 셀레우코스 1세의 궁정으로 도망갔다고 전한다.[10] 셀레우코스 1세는 기원전 281년 초 리시마코스의 왕국을 침략했고, 코루페디움 전투에서 리시마코스를 죽이고 그의 왕국을 병합했다. 이후 케라우노스는 셀레우코스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셀레우코스는 그를 협상 카드로 사용하려 했을 것이다.[11][12]
기원전 281년 9월, 셀레우코스가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마케도니아 침공을 준비하던 중, 케라우노스는 셀레우코스를 암살했다.[4][13][12] 이로써 케라우노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지막 생존 계승자를 죽인 것이다.
케라우노스는 셀레우코스를 암살한 후 리시마키아로 가서 군대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고, 이집트 왕위에 대한 주장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14][13][15] 그는 리시마코스의 이름을 딴 금 스타테르와 은 테트라드라크마를 주조했는데, 앞면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머리에 암몬의 뿔이 있고, 뒷면에는 아테나가 앉아 니케를 들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주화에는 리시마코스의 상징인 사자 머리와 셀레우코스의 상징인 코끼리가 함께 새겨져 있어, 케라우노스가 리시마코스의 정당한 상속자임을 나타내려 했다.[16]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가 마케도니아를 장악하려 했지만, 케라우노스는 해상 전투에서 그를 격파하고 테살리아의 데메트리아스시에 가두었다.[17][12] 암피폴리스에서 주조된 트리톤이 나팔을 부는 모습을 담은 테트라드라크마가 이 승리와 연관되기도 하지만, 케라우노스 사후에 주조된 것으로 추정되어 의문이 제기된다.[18]
케라우노스는 에피루스의 피로스와 동맹을 맺어 공격 위협을 종식시켰다. 이 동맹으로 피로스는 피로스 전쟁에서 로마 공화국에 맞서 싸울 수 있었다. 유스티누스는 케라우노스가 피로스에게 보병 5,000명, 기병 4,000명, 코끼리 50마리를 지원했고, 케라우노스의 딸과 피로스의 결혼으로 동맹이 체결되었다고 전한다.[19]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 기록에 회의적이며, 결혼의 존재 여부도 논란이 되고 있다.[20]

리시마코스의 미망인인 아르시노에 2세는 에페소스로 도망쳤다가 반란으로 인해 카산드레이아를 장악했다.[12] 케라우노스는 아르시노에 2세와 결혼을 제안했지만, 결혼식 날 그녀의 두 어린 아들을 살해했다. 아르시노에는 사모트라케를 거쳐 이집트로 도망쳤고,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결혼했다. 그녀의 장남인 프톨레마이오스 에피고노스는 다르다니아로 도망쳤다.[21][22][15][23]
케라우노스는 리시마코스의 아들과 일리리아 왕 모누니우스의 공격을 받았다.[24] 리시마코스의 아들은 엘리자베스 D. 카니에 의해 프톨레마이오스 에피고노스로 추정된다. 이 전쟁은 280년 대부분 동안 케라우노스를 점령했던 것으로 보인다.[28]
기원전 283년 또는 기원전 282년경[30] 뤼시마코스가 후계자 문제로 대립한 아들 아가토클레스를 처형하자 케라우노스는 동복 여동생이자 아가토클레스의 아내 뤼산드라 편을 들어 시리아 왕 셀레우코스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갔다. 셀레우코스는 뤼시마코스에 대항하는 군사를 일으켜 뤼시마코스가 지배하던 소아시아를 침공하여 기원전 281년 쿠루페디온 전투에서 그를 패사시켰다. 그러나 이로부터 7개월 후 케라우노스는 (셀레우코스에게 자신의 즉위를 지원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셀레우코스를 암살했다. 케라우노스는 이를 뤼시마코스에 대한 복수라고 주장하며 마케도니아 왕위에 오를 것을 선언했다. 그리고 그는 뤼시마코스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각인시키기 위해 뤼시마코스의 미망인이 된 알키오네에게 결혼을 신청했다. 그러나 알키오네와 결혼한 케라우노스는 알키오네의 아이들을 죽이고 그녀를 사모트라케로 추방하여 그녀가 지배하던 카산드레이아 시를 빼앗았다.[31] 또한 케라우노스는 에피루스 왕피로스와 동맹을 맺어 피로스의 이탈리아 원정 당시 보병 5,000명, 기병 4,000기, 전차 50마리를 빌려주었다.[32] 마케도니아 왕위에 오른 케라우노스는 셀레우코스의 아들 안티오코스 1세, 마케도니아 왕위를 노리는 안티고노스 2세와 그리스를 무대로 싸워 안티고노스를 격파하고 안티오코스와 강화했다.[33]
2. 3. 마케도니아의 왕
케라우노스는 셀레우코스 1세를 암살한 후, 리시마키아에서 군대의 추대를 받아 왕으로 선포되었다.[14][13] 이때 그는 이집트 왕위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15] 이 시기 리시마키아에서 주조된 금 스타테르와 은 테트라드라크마 주화는 리시마코스의 이전 주화와 동일하게 앞면에 암몬의 뿔이 있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머리, 뒷면에 아테나가 니케를 들고 있는 모습을 묘사했다. 주화에는 리시마코스 왕을 뜻하는 ΒΑΣΙΛΕΩΣ ΛΥΣΙΜΑΧΟΥ(바실레오스 리시마코우)라는 문구와 함께 리시마코스의 상징인 사자 머리와 셀레우코스의 상징인 코끼리가 새겨져 있었다. 홀스타인은 이 주화가 케라우노스를 리시마코스의 정당한 상속자이자 강력한 코끼리 군대의 소유자로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16]안티고노스 고나타스는 아버지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의 뒤를 이어 마케도니아를 장악하려 했지만, 케라우노스는 해상 전투에서 그를 격파하고 테살리아의 데메트리아스시에 가두었다.[17][12] 암피폴리스에서 주조된 트리톤이 나팔을 부는 모습의 테트라드라크마가 이 승리와 연관되기도 했지만, 케라우노스 사후 1년 뒤에 주조된 것으로 추정되어 의문이 제기되었다.[18]
케라우노스는 기원전 288-284년까지 마케도니아 서부를 통치했던 에피루스의 피로스와 동맹을 맺어 공격 위협을 종식시켰다. 이 동맹으로 피로스는 피로스 전쟁에서 로마 공화국에 맞서 싸우기 위해 이탈리아를 침공할 수 있었다. 유스티누스는 케라우노스가 피로스에게 보병 5,000명, 기병 4,000명, 코끼리 50마리를 지원하고, 케라우노스의 딸과 피로스의 결혼으로 동맹이 체결되었다고 기록했다.[19]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유스티누스가 케라우노스를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혼동한 것이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케라우노스가 이 시점에 그렇게 많은 군대를 내줄 수 있었을지, 결혼이 실제로 존재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20]
리시마코스의 미망인 아르시노에 2세는 코루페디움 전투에서 리시마코스가 패배한 후 에페소스로 도망쳤으나, 에페소스인들의 반란으로 마케도니아로 돌아가 카산드레이아를 장악했다.[12] 케라우노스는 아르시노에 2세와 결혼을 제안했고, 그녀는 아들들의 안전을 조건으로 동의했다. 그러나 결혼식 날, 케라우노스는 그녀의 두 어린 아들을 살해했다. 아르시노에는 사모트라케를 거쳐 이집트로 도망쳤고,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결혼했다. 그녀의 장남 프톨레마이오스 에피고노스는 다르다니아 왕국으로 도망쳤다.[21][22][15][23]
케라우노스는 일리리아 왕 모누니우스와 리시마코스의 아들의 공격을 받았다.[24] 리시마코스의 아들은 엘리자베스 D. 카니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 에피고노스이며, 모누니우스는 그를 받아들인 다르다니아의 왕이었을 것이다. 이 전쟁은 280년 대부분의 기간 동안 케라우노스를 괴롭혔다.[28]
기원전 283년 또는 기원전 282년경,[30] 케라우노스는 셀레우코스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쿠루페디온 전투에서 리시마코스를 패사시켰다. 그러나 7개월 후 케라우노스는 셀레우코스를 암살하고, 리시마코스에 대한 복수이자 마케도니아 왕위 계승을 선언했다. 케라우노스는 리시마코스의 미망인 알키오네와 결혼했지만, 알키오네의 아이들을 죽이고 그녀를 사모트라케로 추방하여 카산드레이아 시를 빼앗았다.[31] 케라우노스는 에피루스 왕피로스와 동맹을 맺고 이탈리아 원정 당시 보병 5,000명, 기병 4,000기, 전차 50마리를 빌려주었다.[32] 또한 안티오코스 1세와 강화하고, 안티고노스 2세를 격파했다.[33]
2. 4. 죽음
기원전 279년, 볼기우스가 이끄는 갈리아인들이 마케도니아를 침공했다. 케라우노스는 다르다니아 왕이 제안한 20,000명의 지원군을 거절하고, 볼기우스의 외교적 제안도 무례하게 거절했다.[25] 그는 자신의 모든 병력이 도착하기 전에 성급하게 갈리아 군대를 공격했다. 전투 중 케라우노스는 부상을 입고 사로잡혀 살해되었으며, 갈리아인들은 그의 머리를 창에 꽂아 전장을 돌아다녔다.[26][15][27]케라우노스의 죽음으로 마케도니아는 혼란에 빠졌다. 그의 동생 멜레아게르가 왕위를 이었으나 몇 달 만에 폐위되었다. 이후 짧은 기간 동안 여러 왕들이 통치하는 불안정한 상황이 이어졌다. 기원전 277년, 안티고노스 2세가 트라키아의 리시마키아 근처에서 갈리아인을 격파하고 마케도니아 왕으로 인정받을 때까지 이러한 상황은 계속되었다.[27][28]
3. 결혼과 자녀
기원전 281년 말 또는 280년에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는 에피루스의 피로스와 딸을 결혼시켜 동맹을 강화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 결혼이 실제로 이루어졌는지는 논란이 있다. 크리스토퍼 베넷은 케라우노스의 딸이 리시마코스의 딸일 수 있다고 주장하며,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그 시기에 여러 결혼 동맹을 맺었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한다.[7]
기원전 281년 말 또는 280년 초, 케라우노스는 카산드레이아를 장악하고 아르시노에 2세의 아이들을 살해하려는 음모의 일환으로 리시마코스의 미망인이자 자신의 이복 누이인 아르시노에 2세와 결혼했다. 그러나 아르시노에 2세는 결혼 직후 마케도니아를 떠났기에, 이 결혼이 실제로 성사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22][15] 이후 케라우노스는 아르시노에 2세의 아이들을 죽이고 그녀를 사모트라케로 추방했다.[31]
참조
[1]
문서
Memnon of Heraclea
[2]
서적
The Ptolemies
Knopf Publisher
2004-05-11
[3]
논문
[4]
웹사이트
Ptolemy Ceraunus
http://instonebrewer[...]
2019-10-28
[5]
논문
[6]
웹사이트
Ptolemy I
http://instonebrewer[...]
2019-10-10
[7]
웹사이트
Unknown wife of Ptolemy Ceraunus
http://instonebrewer[...]
2019-10-28
[8]
논문
[9]
문서
Memnon of Heraclea
[10]
논문
[11]
문서
Memnon of Heraclea
[12]
논문
[13]
논문
[14]
문서
Memnon of Heraclea
[15]
논문
[16]
논문
[17]
문서
Memnon of Heraclea
[18]
논문
[19]
문서
Justin
[20]
웹사이트
Unknown daughter of Ptolemy Ceraunus
http://instonebrewer[...]
2019-10-10
[21]
문서
Justin
[22]
논문
[23]
논문
[24]
문서
Pompeius Trogus
[25]
문서
Justin
[26]
문서
Porphyry
[27]
논문
[28]
논문
[29]
서적
[30]
서적
[31]
문서
ユスティヌス
[32]
문서
ユスティヌス
[33]
문서
ユスティヌス
[34]
문서
ユスティヌス
[35]
문서
ディオドロス
[36]
서적
ディオドロス, XXII. 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