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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시마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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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시마코스는 기원전 362년 또는 361년에 테살리아의 크란논에서 태어난 인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기에 소마토필라케스이자 경호병으로 활약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바빌론 회의에서 트라키아와 케르소네소스의 사트라프로 임명되었으며, 디아도코이 전쟁에 참여하여 왕위를 칭하고 세력을 확장했다. 그는 여러 도시를 건설하고 이름을 남겼으며, 용맹한 전사로 평가받았으나, 말년에 아들 처형과 관련된 사건으로 인해 몰락하여 기원전 281년 코루페디온 전투에서 셀레우코스에게 패배하여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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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시마코스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리시마코스
로마자 표기Lysimachos
그리스어 표기Λυσίμαχος
설명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료이자 디아도코이 중 한 명
생애
출생기원전 360년경
출생지크라논 또는 펠라
사망기원전 281년 2월 (약 79세)
사망지사르디스 근처 코루페디움 (현재의 튀르키예 마니사 주 살리힐리)
매장지트라키아 리시마키아 (현재의 튀르키예 차나칼레 주 카바쾨이)
경력
직업군인, 왕
역할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경호원
통치 지역트라키아, 소아시아, 마케도니아
통치
트라키아 왕기원전 306년 – 기원전 281년
소아시아 왕기원전 301년 – 기원전 281년
마케도니아 왕기원전 288년 – 기원전 281년 (에페이로스의 피로스와 공동 통치)
이전 통치자 (트라키아)알렉산드로스 4세
다음 통치자 (트라키아)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
이전 통치자 (소아시아)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
다음 통치자 (소아시아)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
이전 통치자 (마케도니아)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
다음 통치자 (마케도니아)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
가족 관계
아버지펠라의 아가토클레스
배우자마케도니아의 니카이아
아마스트리스
아르시노에 2세
자녀아가토클레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에피고노이
알렉산드로스
아르시노에 1세
기타 정보
대략적인 출생 연도기원전 360년

2. 생애

리시마코스는 기원전 360년경 테살리아 출신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마케도니아의 펠라 시민이었다.[3][4] 그는 펠라의 아가토클레스의 둘째 아들이었다.[5] 그의 아버지는 필리포스 2세의 가까운 친구였던 고위 귀족으로, 필리포스 2세의 측근으로 활동했으며 아르기아드 왕조 궁정에서 총애를 받았다.[6] 리시마코스와 그의 형제들은 마케도니아인 신분으로 성장했으며, 이들 모두는 리시마코스와 함께 알렉산드로스의 측근으로서 중요한 지위를 누렸고,[6] 펠라에 있는 마케도니아 궁정에서 교육을 받았다.[7][8]

리시마코스의 대리석 흉상.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로마 미술 시대의 사본으로, 기원전 2세기의 헬레니즘 미술 원본을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파우사니아스 (지리학자)와 역사가 유스티누스 (역사가)는 알렉산드로스가 리시마코스를 벌로 사자에게 던졌으나 리시마코스가 맨손으로 사자를 물리쳐 알렉산드로스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고 기록했다.[9][10]

그는 필리포스 2세 치세 동안 소마토필라케스로 임명되었을 것이다.[7]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 원정 중, 기원전 328년에 그는 알렉산드로스의 직속 경호원 중 한 명이었다.[11] 기원전 324년 수사에서 인도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의례용 왕관을 수여받았다.[12]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사후, 스트라테고스로서 트라키아의 통치자로 임명되었지만,[13] 트라키아 왕 세우테스 3세로부터 어려움을 겪었다.[11]

리시마코스 동전 앞면: 뿔이 달린 알렉산드로스가 왕의 수호신으로 나타나 있다.


기원전 315년, 리시마코스는 카산드로스,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와 연합하여 안티고노스에 대항했다. 그러나 안티고노스는 트라키아와 스키타이 부족들을 선동하여 리시마코스의 주의를 돌렸다.[14]

기원전 309년, 케르소네소스 반도와 본토를 연결하는 목에 전략적으로 위치한 리시마키아를 건설하여[14] 오드리시아인에 대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기원전 306/305년, 안티고노스의 선례를 따라 왕의 칭호를 사용했다.[15]

기원전 302년, 카산드로스,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 간의 두 번째 동맹이 맺어졌을 때, 리시마코스는 카산드로스의 군대를 지원받아 소아시아로 진격하여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다. 안티고노스가 접근하자, 헤라클레아 근처의 겨울 숙영지로 물러났고, 그곳의 과부 여왕이자 페르시아 공주인 아마스트리스와 결혼했다. 기원전 301년, 셀레우코스가 합류하여 입소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가 패배하고 사망했다. 안티고노스의 영토는 승자들에게 분할되었으며, 리시마코스의 몫은 리디아, 이오니아, 프리게, 그리고 소아시아 북부 해안이었다.[16]

셀레우코스가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 리시마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와 동맹을 맺고 그의 딸인 아르시노에 2세와 결혼했다. 아마스트리스는 헤라클레아로 돌아갔다. 데메트리오스 1세가 그리스에 부재중이던 기원전 297년에 적대 행위를 재개하자, 리시마코스는 소아시아에서 그의 도시들을 점령했지만, 기원전 294년에 데메트리오스를 마케도니아의 통치자로 인정하는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다뉴브강 너머로 세력을 뻗치려 했지만, 게타이 왕 드로미카이테스 (또는 드로미헤테)에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으나, 우호적인 조건으로 기원전 292년에 풀려났다.[11] 데메트리오스는 이후 트라키아를 위협했지만, 보이오티아에서의 봉기와 에피루스의 왕 피로스의 공격으로 철수해야 했다.[14]

기원전 287년, 리시마코스와 피로스는 마케도니아를 침공하여 데메트리오스를 몰아냈다. 리시마코스는 피로스에게 왕의 칭호를 부여하고 약 7개월 동안 마케도니아를 통치하게 한 뒤, 다시 침공했다.[14] 잠시 동안 공동 통치했지만, 기원전 285년, 리시마코스는 피로스를 몰아내고 자신이 완전히 통제했다.[17]

리시마코스의 말년은 순탄치 않았다. 아마스트리스는 두 아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리시마코스는 그들을 처형했다. 아르시노에 2세는 헤라클레아를 요구했고, 리시마코스는 도시를 해방시키겠다고 약속했음에도 요구를 들어주었다. 기원전 284년, 아르시노에는 자신의 아들들이 왕위를 계승하기를 원하여,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의 도움을 받아 아가토클레스를 모함했고, 아가토클레스는 살해되었다.[14]

이 잔혹한 행위는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소아시아의 여러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신뢰받던 친구들마저 그를 버렸다. 아가토클레스의 미망인과 자녀들은 셀레우코스에게 도망갔고, 셀레우코스는 즉시 소아시아의 리시마코스 영토를 침략했다. 기원전 281년, 리시마코스는 헬레스폰트를 건너 리디아로 진격했고, 코루페디움 전투에서 전사했다. 며칠 후 그의 시신은 전장에서 발견되었고, 충실한 개가 시체를 맹금류로부터 보호하고 있었다.[18] 리시마코스의 시신은 알렉산드로스에게 인계되어 리시마키아에 안장했다.[14]

2. 1. 초기

리시마코스는 기원전 362년(또는 361년) 크란논 출신의 테살리아인 아가토클레스의 아들로 태어났다.[3][4] 그는 펠라의 궁정에서 성장하며 필리포스 2세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섬겼다. 파우사니아스 (지리학자)와 유스티누스 (역사가)는 알렉산드로스가 리시마코스를 벌로 사자에게 던졌으나, 리시마코스가 맨손으로 사자를 물리쳐 알렉산드로스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고 기록했다.[9][10]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페르시아 원정 중 기원전 328년에 그는 알렉산드로스의 직속 경호원 중 한 명이었다.[11] 기원전 326년 산갈라에서 인도인과의 전투 중 부상을 입기도 했다.[25] 기원전 324년 수사에서는 인도 원정 중 공로를 인정받아 의례용 왕관을 수여받았다.[12] 또한 인도의 철학자(브라만) 칼라노스에게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26]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사후, 바빌론 회의에서 리시마코스는 트라키아와 케르소네소스사트라프로 임명되었다.[27][28]

기원전 321년 경, 리시마코스는 제국 섭정 안티파트로스의 딸 Nicaea of Macedon|니케아영어와 결혼하여, 아들 Agathocles (son of Lysimachus)|아가토클레스영어와 두 딸 Eurydice (wife of Antipater II of Macedon)|에우리디케영어와 아르시노에 1세를 두었다. 에우리디케는 안티파트로스 왕조의 마케도니아 왕 안티파트로스 2세의 왕비가 되었고, 아르시노에 1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첫 번째 왕비가 되었다.

2. 2. 후계자 전쟁

기원전 315년, 리시마코스는 카산드로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셀레우코스 1세와 함께 안티고노스 1세에 대항하였다.[41] 그러나 안티고노스 1세는 트라키아인과 스키타이인들을 선동하여 리시마코스를 공격하게 하여 그의 관심을 돌렸다.[41]

기원전 309년, 리시마코스는 트라케 케르소네소스 반도와 본토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에 리시마케이아를 건설하였다.[41] 그는 안티고노스 1세의 선례를 따라 왕을 칭하였다.[41]

기원전 302년 카산드로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셀레우코스 1세가 두 번째로 협약을 맺었을 때, 리시마코스는 카산드로스에게서 병력 지원을 받아 소아시아에 진입하였다.[41] 안티고노스 1세가 접근하자, 그는 헤라클레이아 근처의 겨울 숙영지로 물러나서 그곳 미망인 여왕인 페르시아 공주 아마스트리스와 혼인하였다.[41]

기원전 301년, 셀레우코스 1세는 리시마코스와 합세하였으며, 이프소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 1세를 격파하고 살해했다.[41] 안티고노스 1세의 옛 영토는 승자들이 나누어 가졌는데, 리시마코스는 리디아, 이오니아, 프리기아, 소아시아의 북쪽 해안을 챙겼다.[41]



셀레우코스 1세의 세력이 커지자, 리시마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동맹을 맺고 그의 딸 아르시노에 2세와 결혼했다.[16] 리시마코스와 이혼한 아마스트리스는 헤라클레이아로 돌아갔다.[16]

기원전 297년 안티고노스 1세의 아들인 데메트리오스 1세가 리시마코스에 대한 적의를 새롭게 다질 때, 리시마코스는 그가 그리스에 없는 틈을 타 소아시아의 그의 도시들을 장악하였으나,[16] 기원전 294년에 화의를 맺어 데메트리오스 1세를 마케도니아의 군주로 인정하였다.[16]

리시마코스는 자신의 세력권을 도나우강 이북까지 넓히고자 하였으나, 게타이 왕 드로미차에테스(드로미헤테)에게 패배하여 사로잡혔는데, 게타이 왕은 우호적인 조건을 내걸고 그를 풀어주었다.[42]

그 다음에 데메트리오스 1세가 트라키아를 위협하였으나, 보이오티아에서 갑자기 반란이 일어난데다 에페이로스의 피로스에게서 공격을 받아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42]

기원전 288년 리시마코스와 피로스는 차례로 마케도니아를 침공하였으며, 결국 데메트리오스 1세를 나라 밖으로 쫓아내었다.[42] 리시마코스는 피로스에게 약 여섯 달 동안 마케도니아 왕위와 소유권을 넘겨주었다가 다시 침공하였다.[42] 잠시 두 사람은 공동 통치를 하였으나, 기원전 285년에 리시마코스는 피로스를 추방하였다.[42]

2. 3. 말년

리시마코스는 국내 문제로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 아마스트리스는 두 아들에게 살해당했는데, 리시마코스는 이들을 배반하고 처형했다. 리시마코스가 돌아올 때 아르시노에가 헤라클레이아를 선물로 요구하자, 이 도시를 해방시키겠다고 약속하고 청을 들어주었다. 기원전 284년, 아르시노에는 리시마코스의 장남 아가토클레스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원치 않아, 남매 지간인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의 도움을 받아 리시마코스를 상대로 음모를 꾸몄는데, 이들은 아가토클레스가 왕위를 장악하기 위해 셀레우코스 1세와 공모하였다고 고발하여 처형시켰다.[43][14][36]

리시마코스의 잔학한 행위는 큰 공분을 샀다. 소아시아의 여러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그가 가장 신뢰하던 친구들도 그를 버렸다.[36][37] 아가토클레스의 미망인 리산드라는 셀레우코스 1세에게 달아났으며, 셀레우코스 1세는 즉시 리시마코스의 소아시아 영토를 침공하였다. 기원전 281년, 리시마코스는 헬레스폰토스를 건너 리디아로 갔으나 코루페디온 전투에서 전사했고, 며칠 뒤 리시마코스의 시신이 전장에서 발견되었는데, 새가 시신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그의 충견이 지키고 있었다.[43][18][38]

시신은 아들 알렉산드로스에게 인계되어 리시마케이아에 매장되었다.[14]

3. 리시마코스의 유산

리시마코스가 죽은 뒤, 그의 왕국은 셀레우코스 1세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1세는 곧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게 암살당했고, 왕국은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의 손에 들어갔다.[17]

리시마코스는 리시마키아와 같이 여러 도시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비티니아의 니케아는 원래 안티고노스가 세운 도시였으나, 기원전 300년경 리시마코스가 자신의 첫 번째 부인인 니케아를 기리기 위해 도시 이름을 바꾸었다.

4. 평가

리시마코스는 용맹한 전사였다. 알렉산드로스의 불쾌함을 사서 수족이 묶인 채 귀와 코, 입술이 잘려 구경거리가 된 철학자 칼리스테네스에게 독을 먹여 죽게 했다. 이에 분노한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사자 우리에 던져졌지만, 맨손으로 사자를 쓰러뜨렸고, 감탄한 왕에게 용서받았다.[1]

5. 가계

리시마코스는 세 번 결혼했다.


  • 첫 번째 부인은 마케도니아 귀족이자 섭정이었던 안티파트로스의 딸 니카이아였다. 기원전 321년경에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 아들 아가토클레스
  • 딸 에우리디케
  • 딸 아르시노에 1세


니카이아는 기원전 302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 두 번째 부인은 페르시아 공주 아마스트리스였다. 기원전 302년에 결혼했으나, 기원전 300/299년에 이혼하면서 짧게 끝났다.

  • 세 번째 부인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아르시노에 2세였다. 기원전 300/299년에 결혼하여 리시마코스가 기원전 281년에 사망할 때까지 함께 했다. 아르시노에 2세는 리시마코스에게 세 아들을 낳아 주었다.
  • 프톨레마이오스 에피고노스
  • 리시마코스
  • 필리포스


오드리시아 출신 첩에게서 아들 알렉산드로스를 두었다.[14]

참조

[1] 서적 "The Pimlico Dictionary Of Classical Civilizations"
[2] 서적 "The Oxford Handbook of Greek and Roman Coinage"
[3] 서적 Greek Coins and Their Values, Volume 2 Seaby
[4] 서적 From Polis to Empire, the Ancient World, C. 800 B.C.-A.D. 500: A Biographical Dictionary https://archive.org/[...] Greenwood Publishing Group
[5] 서적 Lysimachus: A Study in Early Hellenistic Kingship
[6] 서적 Lysimachus: A Study in Early Hellenistic Kingship
[7] 서적 Who’s who in the age of Alexander the Great: prosopography of Alexander’s empire
[8] 문서
[9] 웹사이트 Justin, Epitome of Pompey Trogue’s “Philippic histories”, XV, 3, 1–9 http://www.attalus.o[...] 2019-01-18
[10] 웹사이트 Pausanias, Description of Greece, 1.9.5 https://www.perseus.[...]
[11] 서적 Who's Who in the Classical World Oxford University Press
[12] 서적 Who's Who in the Age of Alexander the Great: Prosopography of Alexander's Empire
[13] 서적 Who's Who in the Age of Alexander the Great: Prosopography of Alexander's Empire
[14] 간행물 Lysimachus EB1911
[15] 서적 Who's Who in the Age of Alexander the Great: Prosopography of Alexander's Empire
[16] 서적 Historians History of the World
[17] 서적 Historians History of the World
[18] 서적 Historians History of the World
[19] 서적 Griechische Geschichte von den Anfängen bis in die römische Kaiserzeit
[20] 서적 Who’s who in the age of Alexander the Great: prosopography of Alexander’s empire
[21] 서적 Kings and colonists: aspects of Macedonian imperialism
[22] 웹사이트 Ptolemaic Genealogy: Ptolemy ‘the Son’, Footnotes 9 & 12 http://www.tyndaleho[...]
[23] 문서 Pausanias, 1.10.4
[24] 문서 アッリアノス, VI. 28
[25] 문서 ibid, V. 24
[26] 문서 ibid, VII. 3
[27] 문서 ユスティヌス, XIII. 4
[28] 문서 ディオドロス, XVIII. 3
[29] 문서 ユスティヌス, XV. 1
[30] 문서 ibid, XV. 2
[31] 문서 ibid, XV. 4
[32] 문서 ibid, XVI. 1
[33] 문서 ibid, XVI.1-2
[34] 문서 ibid, XVI. 2
[35] 문서 ibid, XVI. 3
[36] 문서 ibid, XVII. 1
[37] 서적 ヘラクレイア史
[38] 서적 ユスティヌス, XVII. 2
[39] 서적 ユスティヌス, XXIV. 2
[40] 문서 ibid, XV. 3
[41] 서적 Historians History of the World
[42] 서적 Historians History of the World
[43] 서적 Historians History of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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