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상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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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맹상군은 제나라 선왕의 이복동생 전영의 아들로, 본명은 전문이다. 그는 수천 명의 식객을 거느리며 명성을 얻었고, 진나라 재상으로 초빙되기도 했다. 하지만 제나라의 이익을 우선시할 것을 우려한 신하들의 반대로 가택 연금되었고, 식객들의 도움으로 탈출하는 과정에서 '계명구도' 고사가 유래되었다. 맹상군은 제나라 재상이 되어 외교 활동을 펼쳤으나, 군주와의 갈등으로 은거했으며, 말년에는 위나라 재상이 되었다. 그는 '계명구도'와 '교토삼굴'과 같은 고사성어의 주인공으로, 포용적 리더십과 위기관리 능력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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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상군 | |
|---|---|
| 기본 정보 | |
![]() | |
| 아버지 | 전영, 정곽군 |
| 본명 | 전 문 |
2. 약력
맹상군(본명: 전문)은 제 위왕의 손자이자, 선왕의 이복동생인 전영의 아들로 태어났다.[2] 음력 5월 5일에 태어나 불길하다는 이유로 죽을 위기에 처했으나, 어머니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3] 아버지 전영은 40명이 넘는 자녀를 두고 있었다.[2]
성장한 전문은 아버지에게 “현손(玄孫)의 손자는 무엇이라고 합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제나라의 영토는 그대로인데 가문만 부를 쌓는 것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전문의 조언에 따라 전영은 식객을 집으로 불러들였고, 전문에게 그들을 대접하게 했다. 식객들 사이에서 전문의 평판이 높아지자, 전영은 그를 후계자로 삼았다.[5]
아버지의 뒤를 이은 맹상군은 재능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식객으로 받아들여 그 수가 수천 명에 달했다. 신분, 출신, 능력을 가리지 않고 동등하게 대우하여 명성을 얻었다.[6] 한번은 식객이 자신과 맹상군의 음식에 차이가 있다고 오해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는 맹상군이 식객들을 진심으로 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7]
기원전 299년, 소양왕의 초청으로 진나라에 간 맹상군은 재상으로 임명될 뻔했으나, 모함을 받아 가택 연금되었다.[9] 맹상군은 소양왕의 총희에게 도움을 청했고, '구도(狗盜, 개처럼 재빠른 도둑)'[24]의 도움으로 함곡관을 탈출하여 제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10], [11] 이 과정에서 '계명구도(鷄鳴狗盜)' 고사가 생겨났다.[18]
기원전 298년, 맹상군은 광장을 사령관으로 삼아 한, 위와 연합군을 결성하여 진나라를 공격했다.(함곡관 전투)[12] 제나라 민왕을 섬기며 재상으로서 내정과 외교를 맡아 제나라의 국력을 크게 향상시켰으나, 민왕과의 불화로 재상직에서 파면되었다.[19] 하지만, 식객 풍환의 도움으로 재상에 복직하고, 떠났던 식객들을 다시 불러들였다.[20]
제 민왕은 맹상군의 명성이 높아지자 그를 경계하고 불신하여 재상직에서 파면했다. 맹상군은 풍환의 도움으로 제나라 재상으로 복직했지만, 민왕과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다. 민왕은 맹상군을 계속 의심하고 심지어 살해 위협까지 가했다. 결국 맹상군은 기원전 284년 위나라로 망명하여 재상이 되었다.[1]
기원전 279년, 맹상군은 사망했고, 그의 사후 아들들이 후계 다툼을 벌이는 틈을 타서 제나라와 위나라 연합군이 설을 공격하여 맹상군의 자손들은 소식이 끊겼다.[21] 이후 전한 유방이 맹상군의 후손을 찾아내 영지를 주려 했으나, 두 사람은 서로 양보하여 야인으로 물러났다.
2. 1. 어린 시절과 첫 등장
제 위왕의 손자이자, 선왕의 이복동생인 전영의 아들로 태어났다.[2] 맹상군의 본명은 전문(田文)이다. 아버지는 이미 40명 이상의 자녀를 두고 있었는데, 음력 5월 5일에 태어난 맹상군은 불길한 징조라고 여겨져 죽을 위기에 처했다.[3] 하지만 어머니가 몰래 그를 키웠다.성장한 전문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불려갔을 때, 전영은 “어째서 죽이지 않았더란 말인가!”라며 화를 냈다. 전문은 “왜 죽여야 합니까?”라고 물었고, 전영은 “5월 5일에 태어난 아이는 문의 높이만큼 자라면, 부모를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전문은 “그럼 그 문을 높이면 되는 것 아닙니까?”라고 대답하여, 아버지를 설득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4] 이 일화는 사실 여부에 대해 의견이 엇갈린다.
어느 날, 전문은 아버지에게 “현손(玄孫)의 손자는 무엇이라고 합니까?”라고 물었다. 전영이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전문은 제나라의 영토는 늘지 않았는데도 가문은 부를 얻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촌수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는 친척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 때문에 재산을 남긴다는 건 이상하지 않냐고 말했다. 전문의 조언에 따라 전영은 식객을 집으로 불러 전문에게 그 대접을 맡겼다. 식객들 사이에서 전문의 평판은 매우 높아졌고, 그것이 제후들에게까지 알려져 전영은 전문을 후계자로 결정했다.[5]
2. 2. 식객 경영과 명성
아버지 전영의 뒤를 이은 맹상군은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식객으로 받아들였다. 그 수가 수천 명에 달했으며, 신분, 출신, 능력을 가리지 않고 동등하게 대우하여 명성을 얻었다. 한번은 맹상군이 식객들과 식사하는 도중, 한 식객이 자신과 맹상군의 음식에 차이가 있다고 오해했다. 맹상군은 자신의 음식을 보여주며 오해를 풀었지만, 그 식객은 부끄러움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7] 맹상군은 식객들을 진심으로 대우했으며, 그의 명성은 널리 퍼져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들 중에는 특별한 기술이 없거나 범죄 경력이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맹상군은 차별 없이 모두 환영했다.[6] 이러한 맹상군의 태도는 '계명구도(鷄鳴狗盜)' 고사로 이어졌다.2. 3. 진나라로의 여정과 위기
기원전 299년, 소양왕의 초청을 받은 맹상군은 진나라로 갔다. 소양왕은 맹상군을 재상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제나라 출신인 맹상군이 진나라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을 우려한 신하들의 모함으로 가택 연금을 당했다.[9]맹상군은 소양왕의 총희에게 도움을 청했고, 총희는 맹상군이 소양왕에게 바쳤던 귀한 보물인 호백구(狐白裘)[16]를 요구했다. 맹상군의 식객 중 '구도(狗盜, 개처럼 재빠른 도둑)'[24]가 나서서 호백구를 훔쳐왔고, 맹상군은 이를 총희에게 바쳐 풀려날 수 있었다.[10]
그러나 소양왕이 마음을 바꿔 추격해 올 것을 염려한 맹상군은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 한밤중에 함곡관에 도착했으나, 관문은 닭이 울어야 열리는 규칙이 있었다. 소양왕은 이미 추격대를 보낸 상황이었다. 이때, 맹상군의 식객 중 흉내를 잘 내는 사람이 닭 울음소리를 냈고, 이에 다른 닭들도 따라 울면서 관문이 열렸다. 맹상군은 무사히 함곡관을 탈출하여 제나라로 귀환할 수 있었다.[11]鷄鳴狗盜|계명구도중국어라는 고사[18]는 여기서 유래했다.
진나라에서 제나라로 돌아오는 길에 맹상군은 조나라의 한 마을에 들렀는데, 마을 사람들이 맹상군의 작은 키를 놀리자 분노하여 식객들과 함께 마을 사람들을 몰살했다고 전해진다.
2. 4. 제나라 재상 시절과 외교 활동
기원전 298년, 맹상군은 광장을 사령관으로 삼아 한, 위와 연합군을 결성하여 진나라를 공격했다.(함곡관 전투)[12] 맹상군은 제나라 민왕을 섬기며 재상으로서 내정과 외교를 맡아 제나라의 국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제나라가 강성해지자 민왕은 다른 나라에 강압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고, 이를 간언하는 맹상군과 “맹상군 덕분에 제나라가 있다”는 소문을 불쾌하게 여겼다. 결국 민왕은 맹상군을 재상직에서 파면했고, 3천 명에 달하던 그의 식객들도 대부분 떠나갔다.[19]하지만 풍환이라는 식객만은 맹상군의 곁에 남았다. 풍환은 진나라 소양왕에게 맹상군이 진나라에서 벼슬하고 싶어한다고 알렸고, 맹상군의 능력을 알고 있던 소양왕은 사신을 보냈다. 풍환은 서둘러 제나라 민왕에게 돌아가 “진나라가 맹상군을 데려가려 하지만, 이는 막아야 할 일입니다. 맹상군을 재상으로 복직시키고 영지를 늘려주어 사과해야 합니다”라고 설득했다. 민왕은 맹상군을 재상으로 복직시키고 영지를 늘려주며 사과했다.[20]
맹상군이 재상으로 복직하자, 풍환은 떠났던 식객들을 다시 불러들이라고 권했다. 맹상군은 자신이 어려울 때 떠나간 식객들을 질책했지만, 풍환은 그들이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떠난 것이라고 설득했다. 맹상군은 풍환의 말에 납득하고 식객들을 다시 받아들였다.
2. 5. 군주와의 갈등과 은거
제 민왕은 맹상군의 명성이 높아지자 그를 경계하고 불신하여 재상직에서 파면했다. 맹상군의 빈객 풍환은 "교활한 토끼는 세 개의 굴을 판다"는 교토삼굴(狡兎三窟) 고사를 인용하며 맹상군을 위해 계책을 마련했다. 풍환은 맹상군이 위나라와 제나라에서 모두 재상 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1]풍환의 노력으로 맹상군은 제나라 재상으로 복직했지만, 민왕과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다. 민왕은 맹상군을 계속 의심하고 심지어 살해 위협까지 가했다. 결국 맹상군은 기원전 284년 위나라로 망명하여 재상이 되었다.[1]
2. 6. 말년과 죽음
기원전 279년, 전문은 사망했고, 맹상군이라는 시호를 받았다.[21] 그의 사후, 그의 아들들이 후계 다툼을 벌이는 틈을 타서 본가인 제양왕은 위나라와 연합하여 설을 공격했고, 맹상군의 자손들은 소식이 끊겼다.연나라 소왕의 뜻을 받은 악의가 주도하여 조·위·한·진·연의 5국 연합군을 결성해 민왕의 제나라 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악의는 제나라를 공격하여 민왕을 살해했고, 제나라는 멸망 직전까지 몰렸지만, 전단의 지략으로 부흥하여 전문도 다시 제나라로 돌아왔다.[21]
전한 유방이 설을 지나갈 때 맹상군의 자손을 찾아내 맹상군의 손자인 전릉과 전국을 찾아냈다. 유방은 두 사람에게 영지를 주려 했으나, 두 사람은 서로 양보하여 결정되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야인으로 물러나 패군 죽읍현(현재의 안휘성 회북시 퇴계현)에 거주했고, 전국의 계통은 설씨로 개칭해 대대로 주군의 장관을 역임했다. 그 후손이 오에 섬긴 설종이라고 한다.
3. 맹상군 관련 고사성어
맹상군과 관련된 고사성어는 다음과 같다.
- 계명구도(鷄鳴狗盜): 닭 울음소리를 흉내 내는 사람과 좀도둑을 뜻하는 말로, 하찮은 재주도 쓸모가 있다는 의미이다. 진(秦)에서 탈출할 때 식객들의 도움을 받은 일화에서 유래했다.
- 교토삼굴(狡兎三窟): 교활한 토끼는 굴을 세 개 파 놓는다는 뜻으로, 위기에 대비하여 여러 가지 방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맹상군의 식객이었던 풍환이 맹상군을 위해 정치적 기반을 마련해 준 일화에서 유래했다.
3. 1. 계명구도(鷄鳴狗盜)
닭의 울음소리를 흉내 내는 사람과 좀도둑을 뜻하는 말로, 하찮은 재주도 쓸모가 있다는 의미이다. 맹상군이 진(秦)에서 탈출할 때 식객들의 도움을 받은 일화에서 유래했다.[24]기원전 299년, 맹상군은 진 소양왕의 초청으로 진나라에 재상으로 임명되었으나, 맹상군이 제나라의 이익을 우선시 할 것을 우려한 신하들의 모함으로 가택 연금을 당하게 되었다.[9] 맹상군은 소양왕의 총희에게 도움을 청했고, 총희는 맹상군이 소양왕에게 바쳤던 귀한 백여우 털 외투(호백구)를 요구했다.[10] 맹상군의 식객 중 한 명인 '구도'(狗盜, 개처럼 재빠른 도둑)가 밤을 틈타 왕실 금고에 잠입하여 외투를 훔쳐왔고,[10] 맹상군은 이를 총희에게 바쳐 풀려날 수 있었다.
맹상군은 즉시 귀국길에 올랐으나, 소양왕은 곧 맹상군을 놓아준 것을 후회하고 군대를 보내 그를 뒤쫓았다.[11] 한밤중에 한곡관에 도착한 맹상군은 굳게 닫힌 성문을 마주하게 되었다. 당시 관문은 새벽의 닭 울음소리가 들릴 때까지 열리지 않는 것이 규칙이었다.[11] 맹상군의 측근 중 한 명이 닭 울음소리를 흉내 내자, 다른 닭들도 따라 울기 시작했고, 덕분에 맹상군은 관문을 통과하여 제나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11]
평소 맹상군이 도둑질이나 흉내내기 재주밖에 없는 자들까지 식객으로 받아들인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학자와 무예가 등의 식객들은, 이때만큼은 맹상군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며 "하찮은 재능이라도 쓸모가 있다"라고 말했다.[18]
3. 2. 교토삼굴(狡兎三窟)
狡兔三窟|교토삼굴중국어은 교활한 토끼는 굴을 세 개 파 놓는다는 뜻으로, 위기에 대비하여 여러 가지 방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 성어는 맹상군의 식객이었던 풍환이 맹상군을 위해 정치적 기반을 마련해 준 일화에서 유래했다.[14]풍환은 맹상군에게 "교활한 토끼는 도망치기 위한 동굴을 세 개 둡니다. 하지만 전 공(맹상군)께는 도망칠 동굴이 영지(설읍) 한 곳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위나라와 제나라에 달아날 동굴을 두 개 더 만들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맹상군은 풍환에게 공작을 맡겼고, 풍환은 우선 위나라의 양왕에게 맹상군을 등용하면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고 설득했다. 양왕은 맹상군을 위해 상석을 비워두었지만, 풍환은 맹상군에게 제 민왕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조언했다.[14]
위나라 사신이 맹상군에게 자주 드나드는 것을 본 제 민왕은 풍환의 계책대로 맹상군에게 사과하며 종묘를 설읍에 세울 것을 요청했다. 풍환은 이를 보고 "이제 겨우 동굴이 두 개 생겼구나"라고 말했다. 이후 맹상군은 기원전 284년 제 민왕에게 위협을 느껴 위나라로 도망쳐 재상이 되었고, 연나라의 악의가 주도한 5국 연합군이 제나라를 공격하여 민왕이 제거된 후, 전단의 지략으로 멸망 직전의 제나라가 재건되자 맹상군은 다시 제나라로 돌아왔다.[14]
풍환은 가난한 백성을 위해 맹상군의 빚 문서를 태우는 등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데 힘썼다. 맹상군이 제나라에서 쫓겨났을 때 설읍 사람들이 그를 환영한 것은 풍환이 "인과 의"를 샀기 때문이라고 맹상군은 생각했다. 풍환은 맹상군에게 위나라로 가도록 설득하고, 위나라 혜왕과 제 민왕에게 계책을 써서 맹상군의 지위를 높였다. 풍환은 맹상군에게 "이제 안심하셔도 됩니다. 굴이 세 개나 있으니까요."라고 말했다.[14]
4. 맹상군에 대한 평가
맹상군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맹상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부정적인 평가 또한 존재한다.
4. 1. 사마천의 평가
사마천은 사기에서 설의 옛터를 방문했는데, 그곳에는 난폭한 자들이 많았다. 그 이유를 묻자, "맹상군의 초청으로 협객들이 모여, 계명구도(鶏鳴狗盗)의 무리까지 설로 이주해 왔는데, 그 수가 6만 호에 달한다"고 했다. 맹상군은 손님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명성이 과장된 것은 아니라고 평했다.[1]참조
[1]
서적
史记•孟尝君列传
[2]
서적
The Grand Scribe's Records, vol. VII
Indiana University Press
[3]
서적
史记•孟尝君列传
[4]
서적
史记•孟尝君列传
[5]
서적
史记•孟尝君列传
[6]
서적
史记•孟尝君列传
[7]
서적
史记•孟尝君列传
[8]
서적
史记•孟尝君列传
[9]
서적
史记•孟尝君列传
[10]
서적
史记•孟尝君列传
[11]
서적
史记•孟尝君列传
[12]
서적
孟尝君怨秦,将以齐为韩、魏攻楚,因与韩、魏攻秦,而借兵食于西周.(same as the article)
[13]
서적
史记•孟尝君列传
[14]
웹사이트
Mba智库百科,全球专业中文经管百科
http://wiki.mbalib.c[...]
[15]
서적
竹書紀年
[16]
문서
裘は動物の毛を外側にした毛皮の衣。狐白裘は狐のわきの下の毛を集めて作られた裘。一般の狐裘は黄色である、狐白裘は白色。裘の中でも最高級品とされる。
[17]
서적
百人一首
[18]
서적
読孟嘗君伝
[19]
서적
戦国策
[20]
문서
[21]
서적
楽毅
[22]
서적
三国志
[23]
서적
史記 孟嘗君列伝 第十五
[2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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