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외 태피스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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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1066년 잉글랜드 정복을 묘사한 길이 70미터의 자수 작품이다. 에드워드 참회왕 사후, 윌리엄 공작이 잉글랜드를 침략하여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하는 과정을 담고 있으며, 1066년부터 1077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요 등장인물과 사건들을 라틴어 문구와 함께 58개의 장면으로 구성하여, 노르만인의 시각에서 잉글랜드 정복의 역사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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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외 태피스트리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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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 | 바이외 자수 정복의 태피스트리 |
프랑스어 명칭 | Tapisserie de Bayeux (타피스리 드 바이외) |
라틴어 명칭 | Tapete Baiocense (타페테 바이오켄세) |
종류 | 자수 |
주제 | 1066년 노르만 정복 |
보관 장소 | 바이외 태피스트리 박물관 (Bayeux, France) |
좌표 | 49.2744° N 0.7003° W |
세부 정보 | |
제작 시기 | 11세기 (1066년 이후) |
재료 | 린넨에 양모 자수 |
크기 | 약 0.5 x 68.38 m (1 ft 8 in x 224 ft 4 in) |
장면 수 | 58개 ~ 70개 (해석에 따라 다름) |
역사적 맥락 | |
관련 사건 | 노르만 정복 헤이스팅스 전투 |
등장 인물 | 윌리엄 1세 해럴드 2세 오도 (바유의 주교) |
예술적 특징 | |
양식 | 로마네스크 |
특징 | 서사적 묘사 역사적 기록 중세 시대 생활상 묘사 |
추가 정보 | |
중요성 | 역사적 가치 예술적 가치 문화적 중요성 |
보존 상태 | 양호 (약 9세기 동안 거의 손상되지 않음) |
온라인 감상 | 바이외 태피스트리 박물관 온라인 전시 |
2. 역사적 배경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노르망디 가문의 관점을 보여주지만, 해럴드는 용감하게 묘사되었고 그의 병사들도 폄하되지 않았다. 윌리엄은 "dux"("공작")로 묘사되는 반면, 해럴드는 즉위 전까지 "dux"로 불리다가 이후 "rex"("왕")로 불린다.[34] 이 이야기는 해럴드의 노르망디에서의 활동(1064년)을 상세히 다루는데, 이는 2년 후의 노르만 정복과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따라서 이 태피스트리는 노르만 정복에 대한 일종의 옹호론으로 여겨진다.
태피스트리는 윌리엄에 대한 해럴드의 맹세를 강조하지만,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20] 노르만 측 자료는 잉글랜드 왕위가 윌리엄에게 약속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잉글랜드 측은 다른 설명을 제공한다.[20] 오늘날에는 노르만 측 자료가 더 신뢰성 있다고 여겨진다.[45] 태피스트리와 노르만 측 자료[46]는 캔터베리에서 파문된 대주교 스티건드를 해럴드의 대관식을 거행한 인물로 지목하여 해럴드의 왕위를 깎아내리려 했을 수 있다. 잉글랜드 측 자료[47]는 해럴드가 요크 대주교 올드레드에 의해 대관되어 교황청의 지지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현대 학계는 이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했지만, 일반적으로 올드레드가 대관식을 거행했을 것으로 본다.[48][49]
정치적 선전이나 개인적인 강조가 역사의 정확성을 왜곡했을 수 있지만,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중세 무기, 의복 등에 대한 시각적 기록을 제공한다. 그러나 개인의 외모나 의복에 대한 일관성은 없다. 기사들은 방패를 휴대하지만, 현대 문장의 시작 단계였던 당시의 세습 문장 시스템은 보이지 않는다.[20] 전사들이 맨손으로 싸우는 모습이 묘사되지만, 다른 자료에서는 전투와 사냥에서 장갑을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미국 역사가 스티븐 D. 화이트는 태피스트리 연구[50]에서 "잉글랜드나 노르만 이야기로 읽는 것을 경계하며, 테두리의 동물 우화가 갈등의 위험과 권력 추구의 덧없음에 대한 해설을 제공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51]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엄밀히 말하면 직물인 태피스트리가 아니라, 천에 자수를 놓아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82] 원래 길이는 약 70 m로 추정되지만, 현재 남아있는 부분은 63.6m, 너비는 약 0.5m이다. 헤이스팅스 전투 부분이 현존한다. 11세기 프랑스와 잉글랜드 관련 역사적 유물이며, 당시 의상, 무기, 군선, 전투 방법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핼리 혜성의 출현 기록 중 하나로도 알려져 있다.
오랫동안 바이외 대성당에 보관되었지만, 전란으로 인해 여러 번 소재가 바뀌었다. 현재는 바이외 태피스트리 박물관에서 보관 및 전시 중이다.[83]
1476년 목록에는 태피스트리가 성 요한 축일 주간 동안 바이외 대성당에 매년 걸렸다는 기록이 있다. 1728년에도 여전히 그랬지만, 당시에는 단지 걸어두었던 태피스트리를 통풍하는 목적이었고, 그렇지 않을 때는 상자에 보관했다.[34] 18세기에는 예술성이 조잡하다고 여겨졌고, 린넨이 자수로 덮여 있지 않아 미완성이라고 생각되었다.[34] 그러나 1797년 루브르 박물관 전시는 큰 반향을 일으켰고, 르 모니퇴르는 첫 두 페이지에서 이 전시를 보도했다.[34]
태피스트리는 관광 명소가 되었고, 로버트 사우디는 줄을 서야 하는 것에 불만을 표시했다. 1843년 존 머레이 3세의 ''프랑스 여행자를 위한 핸드북''에는 방문이 포함되었고, 이 가이드북은 존 러스킨을 그곳으로 이끌었다. 러스킨은 태피스트리를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것"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찰스 디킨스는 "아마추어의 작품"이라고 평가했다.[34]
제2차 세계 대전 중 하인리히 힘러는 이 작품을 "게르만 역사에 중요한 작품"으로 여기며 탐냈다.[34]
2018년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은 바이외 태피스트리를 영국에 대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26] 2022년 런던 대영 박물관에서 전시될 예정이었지만, 보존상의 이유로 반대가 제기되었다. 태피스트리가 프랑스를 떠나는 것은 950년 만에 처음이지만, 증거에 따르면 태피스트리는 캔터베리에서 제작되었다.[27] 그러나 2024년 4월 현재, 대여 날짜는 확정되지 않았다.
2. 1. 제작 배경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참회왕이 후사 없이 윌리엄 공작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하고 해럴드를 노르망디로 보낸 1064년부터 헤이스팅스 전투가 벌어진 1066년 10월 14일까지의 사건들을 묘사하고 있다. 1066년 1월 에드워드는 해럴드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고, 해럴드는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었다. 이후 윌리엄 공작은 군사를 일으켜 잉글랜드를 침략,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와 그의 군대를 격파했다.[86]바이외 태피스트리 자체는 윌리엄의 이복형제였던 바이외의 주교 오도의 주문으로 바이외 수녀들이 1066년부터 1077년 사이에 잉글랜드 남부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86]

태피스트리에 대한 가장 초기의 기록은 1476년 바이외 대성당의 목록이다.[6] 하지만 그 기원은 많은 추측과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프랑스 전설에 따르면 태피스트리는 마틸다 여왕, 즉 정복왕 윌리엄의 아내와 그녀의 시녀들에 의해 의뢰되고 제작되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La Tapisserie de la Reine Mathilde프랑스어 ("마틸다 여왕의 태피스트리")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학술적 분석 결과, 윌리엄의 이복형제인 바이외의 오도 주교[7]에 의해 의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는 정복 이후 켄트 백작이 되었고, 윌리엄이 노르망디에 부재중일 때는 잉글랜드의 섭정이 되었다.
오도가 의뢰했을 것이라는 이론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번호 | 내용 |
---|---|
1 | 도메스데이 북에 언급된 주교의 추종자 세 명이 태피스트리에 등장한다. |
2 | 오도가 지은 바이외 대성당에서 발견되었다. |
3 | 1070년대에 대성당 건설과 동시에 의뢰되었을 수 있으며, 1077년 대성당 봉헌식에 맞춰 전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
오도가 태피스트리를 의뢰했다면, 앵글로색슨 미술가(당시 오도의 주요 권력 기반은 켄트에 있었다)에 의해 잉글랜드에서 디자인되고 제작되었을 것이다. 라틴어 텍스트에는 앵글로색슨의 힌트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 시기에 잉글랜드에서 제작된 다른 자수 작품들이 존재하며, 식물성 염료는 전통적으로 그곳에서 제직된 천에서 발견될 수 있다.[8][9][10] 하워드 B. 클라크는 태피스트리의 디자이너가 생 오거스틴 수도원의 수도원장인 스코랜드일 것이라고 제안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몽생미셸의 필사본 제작소의 책임자였고, 트라야누스 황제 기념주로 여행했으며, 태피스트리에서 확인된 두 사람인 와다드와 비탈과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11][12] 크리스틴 그레인지는 디자이너가 1070–1089년의 캔터베리 대주교인 랭프랑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13] 실제 바느질 작업은 대부분 여성 바늘공예가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다. 오푸스 앵글리카눔으로 알려진 더 정교한 형태의 앵글로색슨 바늘공예는 유럽 전역에서 유명했다.
다른 이론들도 존재한다. 캐롤라 힉스는 태피스트리가 웨섹스의 에디스, 즉 참회왕 에드워드의 미망인이자 해롤드의 여동생에 의해 의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제안했다.[15] 볼프강 그레이프는 자수가 앵글로색슨이라는 일반적인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며 앵글로색슨 기법과 다른 북유럽 기법을 구별했다.[16] 중세 자료 권위자인 엘리자베스 코츠워스는[17] 이를 반박했다.[10] 조지 비치는 태피스트리가 생플로랑 드 소뮈르 수도원에서 제작되었다고 제안한다.[18] 앤드루 브리지포드는 태피스트리가 실제로는 잉글랜드 디자인이며 노르만 통치를 약화시키기 위한 비밀 메시지로 인코딩되었다고 제안했다.[19]
2. 2. 제작 장소 및 제작자
태피스트리에 대한 가장 초기의 기록은 1476년 바이외 대성당의 목록이다.[6] 하지만 그 기원은 많은 추측과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프랑스 전설에 따르면 태피스트리는 마틸다 여왕, 즉 정복왕 윌리엄의 아내와 그녀의 시녀들에 의해 의뢰되고 제작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때때로 La Tapisserie de la Reine Mathilde프랑스어 ("마틸다 여왕의 태피스트리")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20세기의 학술적 분석 결과, 윌리엄의 이복형제인 바이외의 오도 주교[7]에 의해 의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는 정복 이후 켄트 백작이 되었고, 윌리엄이 노르망디에 부재중일 때는 잉글랜드의 섭정이 되었다.
오도가 의뢰했을 것이라는 이론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번호 | 내용 |
---|---|
1 | 도메스데이 북에 언급된 주교의 추종자 세 명이 태피스트리에 등장한다. |
2 | 오도가 지은 바이외 대성당에서 발견되었다. |
3 | 1070년대에 대성당 건설과 동시에 의뢰되었을 수 있으며, 1077년 대성당 봉헌식에 맞춰 전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
오도가 태피스트리를 의뢰했다고 가정할 때, 아마도 앵글로색슨 미술가(당시 오도의 주요 권력 기반은 켄트에 있었다)에 의해 잉글랜드에서 디자인되고 제작되었을 것이다. 라틴어 텍스트에는 앵글로색슨의 힌트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 시기에 잉글랜드에서 제작된 다른 자수 작품들이 존재하며, 식물성 염료는 전통적으로 그곳에서 제직된 천에서 발견될 수 있다.[8][9][10] 하워드 B. 클라크는 태피스트리의 디자이너(즉, 전반적인 이야기와 정치적 주장을 책임지는 개인)가 생 오거스틴 수도원의 수도원장인 스코랜드일 것이라고 제안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몽생미셸의 필사본 제작소의 책임자였고(그의 채색으로 유명), 트라야누스 황제 기념주로 여행했으며, 태피스트리에서 확인된 두 사람인 와다드와 비탈과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11][12] 또는 크리스틴 그레인지는 디자이너가 1070–1089년의 캔터베리 대주교인 랭프랑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13] 실제 바느질 작업은 대부분 여성 바늘공예가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다. 오푸스 앵글리카눔으로 알려진 더 정교한 형태의 앵글로색슨 바늘공예는 유럽 전역에서 유명했다. 아마도 바이외에 있는 오도의 궁전 홀에 전시하기 위해 의뢰되었고, 그 후 그가 지은 대성당에 유증되었을 것이다. 이는 문서화되었지만 사라진 앵글로색슨 전사 브리흐트노스의 걸개가 그의 미망인에 의해 엘리 수도원에 유증된 선례를 따른 것이다.[14]
다른 이론들도 존재한다. 캐롤라 힉스는 태피스트리가 웨섹스의 에디스, 즉 참회왕 에드워드의 미망인이자 해롤드의 여동생에 의해 의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제안했다.[15] 볼프강 그레이프는 자수가 앵글로색슨이라는 일반적인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며 앵글로색슨 기법과 다른 북유럽 기법을 구별했다.[16] 중세 자료 권위자인 엘리자베스 코츠워스는[17] 이를 반박했다. "1100년 이전에 기술적 근거로 앵글로색슨 자수와 다른 북유럽 자수를 구별하려는 시도는 현재 지식으로는 유지될 수 없다."[10] 조지 비치는 태피스트리가 생플로랑 드 소뮈르 수도원에서 제작되었으며 브르타뉴 전역의 자세한 묘사는 프랑스의 추가 자료를 주장한다고 제안한다.[18] 앤드루 브리지포드는 태피스트리가 실제로는 잉글랜드 디자인이며 노르만 통치를 약화시키기 위한 비밀 메시지로 인코딩되었다고 제안했다.[19]
2. 3. 논란
태피스트리에 대한 가장 초기의 기록은 1476년 바이외 대성당의 목록이다.[6] 하지만 그 기원은 많은 추측과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프랑스 전설에 따르면 태피스트리는 마틸다 여왕(정복왕 윌리엄의 아내)와 그녀의 시녀들에 의해 의뢰되고 제작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때때로 La Tapisserie de la Reine Mathilde프랑스어 ("마틸다 여왕의 태피스트리")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20세기의 학술적 분석 결과, 윌리엄의 이복형제인 바이외의 오도 주교[7]에 의해 의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는 정복 이후 켄트 백작이 되었고, 윌리엄이 노르망디에 부재중일 때는 잉글랜드의 섭정이 되었다.
오도가 의뢰했을 것이라는 이론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번호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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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도메스데이 북에 언급된 주교의 추종자 세 명이 태피스트리에 등장한다. |
2 | 오도가 지은 바이외 대성당에서 발견되었다. |
3 | 1070년대에 대성당 건설과 동시에 의뢰되었을 수 있으며, 1077년 대성당 봉헌식에 맞춰 전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스템 스티치로 인물 윤곽선을 표현하고, 카우칭 스티치로 속을 채웠으며, 색실을 체인과 스플릿 스티치로 바느질하여 빛과 그림자를 표현했다.[87] 또한, 문자와 창, 화살 등이 돌출되어 보이도록 했다.[87]
오도가 태피스트리를 의뢰했다고 가정할 때, 아마도 앵글로색슨 미술가(당시 오도의 주요 권력 기반은 켄트에 있었다)에 의해 잉글랜드에서 디자인되고 제작되었을 것이다. 라틴어 텍스트에는 앵글로색슨의 힌트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 시기에 잉글랜드에서 제작된 다른 자수 작품들이 존재하며, 식물성 염료는 전통적으로 그곳에서 제직된 천에서 발견될 수 있다.[8][9][10] 하워드 B. 클라크는 태피스트리의 디자이너가 생 오거스틴 수도원의 수도원장인 스코랜드일 것이라고 제안했다.[11][12] 크리스틴 그레인지는 디자이너가 1070–1089년의 캔터베리 대주교인 랭프랑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13] 실제 바느질 작업은 대부분 여성 바늘공예가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다. 오푸스 앵글리카눔으로 알려진 더 정교한 형태의 앵글로색슨 바늘공예는 유럽 전역에서 유명했다. 아마도 바이외에 있는 오도의 궁전 홀에 전시하기 위해 의뢰되었고, 그 후 그가 지은 대성당에 유증되었을 것이다. 이는 문서화되었지만 사라진 앵글로색슨 전사 브리흐트노스의 걸개가 그의 미망인에 의해 엘리 수도원에 유증된 선례를 따른 것이다.[14]
다른 이론들도 존재한다. 캐롤라 힉스는 태피스트리가 웨섹스의 에디스(참회왕 에드워드의 미망인이자 해롤드의 여동생)에 의해 의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제안했다.[15] 볼프강 그레이프는 자수가 앵글로색슨이라는 일반적인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며 앵글로색슨 기법과 다른 북유럽 기법을 구별했다.[16] 중세 자료 권위자인 엘리자베스 코츠워스는[17] 이를 반박했다.[10] 조지 비치는 태피스트리가 생플로랑 드 소뮈르 수도원에서 제작되었으며 브르타뉴 전역의 자세한 묘사는 프랑스의 추가 자료를 주장한다고 제안한다.[18] 앤드루 브리지포드는 태피스트리가 실제로는 잉글랜드 디자인이며 노르만 통치를 약화시키기 위한 비밀 메시지로 인코딩되었다고 제안했다.[19]
태피스트리에 묘사된 사건들은 몇 가지 풀리지 않은 의문을 제기한다.
해럴드의 죽음을 묘사한 삽화에서 해럴드 2세의 신원을 둘러싸고 논쟁이 있다. 일부 최근의 역사가들은 해럴드가 눈에 화살을 맞은 인물이라는 전통적인 견해에 동의하지 않으며, 화살은 수리 기간 이후 18세기/19세기에 수정된 것이라고 주장한다.[20] 1729년 베누아의 판화와 1730년 베르나르 드 몽포콘의 태피스트리 판화에는 화살 대신 창이나 투창이 묘사되어 있으며 화살 깃털은 없다. 게다가, 린넨에 있는 바늘 구멍은 무언가가 제거되거나 짧아졌으며, 화살을 형성하기 위해 깃털이 추가되었음을 시사한다.[20] 다음 판에는 칼에 찔려 죽는 인물이 있으며, 그 인물 위의 문구는 해럴드의 죽음을 언급한다("interfectus est", "그가 죽었다").
이것은 작품의 다른 부분에서 사용된 레이블링과 더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세 시대의 흔한 도상학에서는 위증자가 눈에 무기를 맞고 죽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따라서, 태피스트리는 해럴드를 맹세 위반자로 묘사함으로써 윌리엄의 왕위 계승에 대한 정당성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죽었는지 여부는 여전히 미스터리이며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된다.[42]
한 패널에는 성직자로 보이는 인물이 여성의 얼굴을 만지거나 치는 듯한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 장면의 의미나 그 위의 문구인 ''ubi unus clericus et Ælfgyva'' ("어떤 성직자와 Ælfgyva가 있는 곳[또는 '그 안에서'']"), 여기서 Ælfgyva는 인기 있는 앵글로색슨 여성 이름인 Ælfgifu의 라틴어 표기(문자 그대로 "엘프의 선물")이다.[34] 문자소 Æ의 사용은 영어 철자에 대한 친숙함을 보여준다.[34] 이 인물 아래의 경계선에는 두 명의 알몸 남성 형상이 있다. 이 인물 바로 아래에 있는 인물은 성직자의 자세를 따라 쭈그리고 앉아 자신의 성기를 드러낸다(이 장면은 역사적 복제본에서 자주 검열되었다). 그러나 유사한 알몸 형상이 주요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는 다른 하단 경계선에도 나타난다.[20]
해럴드에게는 앨프기푸(1086년 둠즈데이 북에는 알베바(Alveva)로 표기)라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녀는 해럴드에 의해 윌리엄에게 약속되었거나 심지어 약혼했지만, 침략 전인 1066년경에 사망했다.[43] 앨프기푸는 또한 크누트 대왕을 통해 덴마크와 잉글랜드의 전직 왕인 스베인 크누트손과 해럴드 해어풋의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이 장면은 해럴드와 윌리엄의 만남 이후에 발생하며, 동시대 시청자들에게 노샘프턴의 앨프기푸와 노르망디의 엠마(크누트의 아내들) 사이에서 발생하여 엠마와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인 에설레드 2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참회왕이 왕위에 오르게 된 스캔들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19]
태피스트리의 최소 두 패널이 누락되었으며, 총 길이가 6.4m나 더 될 수 있다. 이 누락된 부분은 잉글랜드의 왕으로 윌리엄의 대관식을 묘사했을 수 있다.[34] 돌의 발드리크의 시는 노르망디의 아델라의 개인 아파트 벽에 있는 태피스트리를 묘사하는데, 이는 바이에 태피스트리 묘사와 매우 유사하다. 그는 마지막 장면을 런던에서 윌리엄의 대관식으로 묘사한다.[44]
이전에는 윌리엄 1세의 왕비 마틸다가 정복을 기념하여 기증한 것으로 여겨져 "왕비 마틸다의 태피스트리"라고 불렸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윌리엄 1세의 이복 동생이었던 바이외 주교 오도(켄트 백작)가 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유로는 오도를 포함한 3명의 주교가 태피스트리에 묘사되어 있다는 점과, 오도 주교가 건립한 바이외 대성당에 처음부터 태피스트리가 장식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이후, 18세기까지 본 작품의 존재는 잊혀졌으며,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무기 상자 덮개로 사용되었다. 이를 지역 변호사가 알아차려, 위태롭게 소실을 면한 경위를 지닌다. 1803년에 나폴레옹이 파리로 가져갔는데, 이는 영국 침공을 참고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 후, 바이외로 돌아왔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군이 접수했다. 종전 후, 프랑스로 돌아와, 루브르 박물관의 지하에 보관되었다. 현재는 바이외 태피스트리 미술관에 보관 및 전시되어 있다.[85]
3. 내용
길이는 다르지만 폭은 동일한 아홉 개의 얇은 린넨 천을 이어붙여 만들었으며, 갈색, 베이지색, 녹색, 남색, 노란색 등 당시 사용 가능했던 염료 색을 사용했다.[86]
헤이스팅스 전투를 중심으로 1064년부터 1066년까지의 사건을 묘사하며, 해럴드 2세, 윌리엄 공작, 에드워드 참회왕 등이 주요 등장인물이다.
만화나 스토리보드를 연상시키는 삽화 배치와 앵글로색슨 성경 필사본 그림과 닮은 이야기 구조는 침략을 정당화하고 윌리엄을 찬양하는 역할을 했다.[87]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형적인 사례이기도 하다.[86]
엄밀히 말하면, 천에 자수를 놓아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82] 원래 길이는 약 70m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63.6m 정도만 남아있다. 11세기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역사적 유물로, 당시의 의상, 무기, 군선, 전투 방법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며, 핼리 혜성 출현 기록으로도 알려져 있다.[83]
바이외의 바이외 대성당에 보관되어 오다가, 현재는 에서 보관 및 전시 중이다.[83]
총 623명의 인물, 202마리의 말, 55마리의 개, 49그루의 나무, 1대의 짐마차, 41척의 배 등 다양한 요소들이 묘사되어 있으며, 각 장면에 라틴어 문장이 덧붙여져 있다.
이야기는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윌리엄 정복왕)의 주장에 근거, 에드워드 참회왕이 기욤 2세를 후계자로 삼고자 해럴드 고드윈슨을 보내는 장면부터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헤럴드 고드윈슨의 전사와 패잔병 추격 장면으로 끝맺고 있다. 마지막 2장면(약 6.4m)은 유실되었으나, 윌리엄 정복왕의 대관식 모습이 그려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84]
3. 1. 주요 사건
에드워드 참회왕이 윌리엄 공작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해럴드를 노르망디로 보낸 1064년부터 헤이스팅스 전투가 벌어진 1066년 10월 14일까지의 사건들을 묘사하고 있다.[86] 태피스트리는 해설이 곁들여진 일련의 그림들을 통해 헤이스팅스 전투로 절정에 이르는 사건들을 이야기한다.[20]
총 58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물 623명, 말 202마리, 개 55마리, 나무 49그루, 짐마차 1대, 배 41척, 조수 등 500마리 이상의 생물이 묘사되어 있다. 각 장면에는 라틴어 문장이 덧붙여져 있다.
이야기는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윌리엄 정복왕)의 주장에 근거하여, 에드워드 증성왕이 기욤 2세를 후계자로 삼고자 헤럴드 고드윈슨을 보내는 장면부터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헤럴드 고드윈슨의 전사와 패잔병 추격 장면으로 끝난다.
마지막 2장면(약 6.4m)은 유실되었으나, 윌리엄 정복왕의 대관식 모습이 그려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84]
3. 2. 주요 등장인물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헤이스팅스 전투를 중심으로 1064년부터 1066년까지의 주요 사건들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을 묘사하고 있다. 주요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다.
이 외에도 앨프기푸, 볼로뉴 백작 유스타스, 모르탱의 로버트 등 여러 인물들이 태피스트리에 등장한다.
태피스트리에는 인물 623명, 말 202마리, 개 55마리, 나무 49그루 등 다양한 요소들이 묘사되어 있으며, 각 장면에 라틴어 설명이 곁들여져 있다.[86]
3. 3. 해럴드 2세의 죽음에 대한 논란
태피스트리에 묘사된 사건들은 몇 가지 풀리지 않은 의문을 제기한다.
해럴드의 죽음을 묘사한 삽화에서 해럴드 2세의 신원을 둘러싸고 논쟁이 있다. 일부 최근의 역사가들은 해럴드가 눈에 화살을 맞은 인물이라는 전통적인 견해에 동의하지 않으며, 화살은 수리 기간 이후 18세기/19세기에 수정된 것이라고 주장한다.[20] 1729년 베누아의 판화와 1730년 베르나르 드 몽포콘의 태피스트리 판화에는 화살 대신 창이나 투창이 묘사되어 있으며 화살 깃털은 없다. 게다가, 린넨에 있는 바늘 구멍은 무언가가 제거되거나 짧아졌으며, 화살을 형성하기 위해 깃털이 추가되었음을 시사한다.[20] 다음 판에는 칼에 찔려 죽는 인물이 있으며, 그 인물 위의 문구는 해럴드의 죽음을 언급한다("interfectus est", "그가 죽었다").
이것은 작품의 다른 부분에서 사용된 레이블링과 더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세 시대의 흔한 도상학에서는 위증자가 눈에 무기를 맞고 죽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따라서, 태피스트리는 해럴드를 맹세 위반자로 묘사함으로써 윌리엄의 왕위 계승에 대한 정당성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죽었는지 여부는 여전히 미스터리이며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된다.[42]
한 패널에는 성직자로 보이는 인물이 여성의 얼굴을 만지거나 치는 듯한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 장면의 의미나 그 위의 문구인 ''ubi unus clericus et Ælfgyva'' ("어떤 성직자와 Ælfgyva가 있는 곳[또는 '그 안에서'']"), 여기서 Ælfgyva는 인기 있는 앵글로색슨 여성 이름인 Ælfgifu의 라틴어 표기(문자 그대로 "엘프의 선물")이다.[34] 문자소 Æ의 사용은 영어 철자에 대한 친숙함을 보여준다.[34] 이 인물 아래의 경계선에는 두 명의 알몸 남성 형상이 있다. 이 인물 바로 아래에 있는 인물은 성직자의 자세를 따라 쭈그리고 앉아 자신의 성기를 드러낸다(이 장면은 역사적 복제본에서 자주 검열되었다). 그러나 유사한 알몸 형상이 주요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는 다른 하단 경계선에도 나타난다.[20]
해럴드에게는 앨프기푸(1086년 둠즈데이 북에는 알베바(Alveva)로 표기)라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녀는 해럴드에 의해 윌리엄에게 약속되었거나 심지어 약혼했지만, 침략 전인 1066년경에 사망했다.[43] 앨프기푸는 또한 크누트 대왕을 통해 덴마크와 잉글랜드의 전직 왕인 스베인 크누트손과 해럴드 해어풋의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이 장면은 해럴드와 윌리엄의 만남 이후에 발생하며, 동시대 시청자들에게 노샘프턴의 앨프기푸와 노르망디의 엠마, 크누트의 아내들 사이에서 발생하여 엠마와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인 에설레드 2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참회왕이 왕위에 오르게 된 스캔들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19]
3. 4. Ælfgyva (앨프기푸)의 정체
태피스트리의 한 패널에는 성직자로 보이는 인물이 여성의 얼굴을 만지거나 치는 듯한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 장면의 의미나 그 위에 있는 ''ubi unus clericus et Ælfgyva'' ("어떤 성직자와 Ælfgyva가 있는 곳[또는 '그 안에서'']")라는 문구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여기서 Ælfgyva는 앵글로색슨족 여성 이름인 Ælfgifu의 라틴어 표기(문자 그대로 "엘프의 선물")이다.[34] 문자소 Æ의 사용은 영어 철자에 대한 친숙함을 보여준다.[34]
이 인물 아래 경계선에는 두 명의 알몸 남성이 묘사되어 있다. 이 인물 바로 아래에 있는 남성은 성직자의 자세를 따라 쭈그리고 앉아 자신의 성기를 드러내는데, 이 장면은 역사적 복제본에서 자주 검열되었다. 그러나 주요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는 다른 하단 경계선에도 유사한 알몸 형상이 나타난다.[20]
해럴드에게는 앨프기푸(1086년 둠즈데이 북에는 알베바(Alveva)로 표기)라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녀는 해럴드에 의해 윌리엄에게 약속되었거나 심지어 약혼했지만 침략 전인 1066년경에 사망했다.[43] 앨프기푸는 또한 크누트 대왕을 통해 덴마크와 잉글랜드의 전직 왕이었던 스베인 크누트손과 해럴드 해어풋의 어머니 이름이기도 하다. 이 장면은 해럴드와 윌리엄의 만남 이후에 발생하며, 동시대 시청자들에게 노샘프턴의 앨프기푸와 노르망디의 엠마(크누트의 아내) 사이에서 발생하여 엠마와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인 에설레드 2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참회왕이 왕위에 오르게 된 스캔들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19]
4. 예술적 특징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이야기를 전달하고, 정복왕 윌리엄의 침략을 정당화하며, 정복왕 윌리엄을 찬양하려는 목적을 가진 예술작품이다.[87]
9세기부터 스칸디나비아에서 태피스트리 조각들이 발견되었으며, 노르만과 앵글로색슨 자수가 이러한 종류의 작품에서 발전된 것으로 여겨진다. 예로는 오세베르그 선박의 부장품과 외베르호갈 태피스트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20]
엘리의 수도원 문서인 ''엘리 해방기''에는 991년에 사망한 브리흐트노스의 업적을 기리는 직조된 서사 벽걸이에 대한 언급이 있다. 10세기에는 벽걸이가 흔했으며, 특히 잉글랜드와 노르만 텍스트에서는 앵글로색슨 재봉사의 솜씨를 칭찬했다. 돌의 발드릭의 시는 심지어 바이외 태피스트리 자체를 묘사할 수도 있다.[20] 따라서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제작 당시 독특하지 않았다. 오히려 중세 서사 자수의 유일한 현존하는 예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32]
11세기 벽걸이는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창조의 태피스트리 또는 지로나 태피스트리는 스페인 지로나 대성당 박물관에 있는 대형 로마네스크 자수 패널이다. 이 벽걸이는 창세기의 일련의 인물과 달의 의인화를 묘사한다. 독일의 생 제레옹의 천은 장식적인 비잔틴 실크를 기반으로 한 벽걸이 조각 그룹 중 가장 큰 것으로, 동물 등을 포함하며, 이는 아마도 유럽에서 가장 초기의 생존물일 것이다.[33]
태피스트리의 중앙 구역에는 대부분의 사건들이 양식화된 나무로 구분된 긴 일련의 장면에서 발생한다. 사건은 때때로 극적인 효과를 위해 또는 묘사가 그렇지 않으면 매우 비좁아지기 때문에 테두리로 넘쳐 흐른다. ''티툴리''는 일반적으로 중앙 구역에 있지만, 가끔 상단 테두리를 사용한다. 테두리는 대부분 순전히 장식적이며, 장식이 중앙 구역의 사건을 보완하는 경우는 드물다. 장식은 새, 짐승, 물고기, 우화, 농업 및 사냥 장면으로 구성된다. 누드 인물, 전투에서 나온 시체, 그리고 노골적인 성격의 인물이 있다.[20] 새로 발명된 도구인 써레(Harrow (tool))가 묘사되어 있으며(장면 10), 이는 가장 초기에 알려진 묘사이다. 핼리 혜성(Halley's Comet)의 그림은 상단 테두리에 나타나며(장면 32), 이 혜성의 최초의 알려진 그림이다.[20]
주요 실 색상은 테라코타 또는 적갈색, 청록색, 칙칙한 금색, 올리브 그린, 파란색이며, 소량의 짙은 파란색 또는 검은색과 세이지 그린이 사용된다. 나중에 수리된 부분은 밝은 노란색, 주황색, 밝은 녹색으로 작업되었다.[9] 레이드 실은 동일하거나 대비되는 색상의 실로 제자리에 고정된다.
4. 1. 자수 기법
중세 초기(Early Middle Ages)의 다른 자수 걸개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태피스트리"라고 불리지만, 디자인이 태피스트리 직조로 천에 직조(weaving)된 "진정한" 태피스트리는 아니다. 기술적으로는 자수(embroidery)이지만, "벽걸이, 커튼, 의자 덮개 등에 사용되는 장식이나 그림 주제의 디자인으로 장식된 직물, 채색, 자수, 또는 직조"와 같은 전통적인 "태피스트리"의 더 넓은 정의를 충족한다.[28]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크루웰(crewel) (양모(wool) 실(yarn))로 길이 68.38미터, 너비 0.5미터의 평직(plain weave) 린넨(linen) 바탕에 자수되어 있으며, 두 가지 바느질 방법을 사용한다. 면 자수(backstitch)로 문자 및 인물의 윤곽을, 누비기(couching (embroidery)) 또는 레이드 워크(laid work)로 인물을 채운다.[9][10] 길이 14~3미터 사이의 린넨 패널 9개가 각각 자수된 후 함께 꿰매어졌고, 이음새는 후속 자수로 가려졌다.[34]
자수 바느질 방법은 다양하게 사용했다. 인물의 윤곽선은 스템 스티치를 썼고 그 속은 카우칭 스티치로 메워놓았다. 빛과 그림자는 색실을 체인과 스플릿 스티치로 바느질하여 표현하였으며, 동시에 문자와 창, 화살 등의 물건이 돌출되어 보이도록 하는 효과를 내었다.[87]
아마로 만든 실로 짠 얇은 천에, 모사로 자수를 놓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 따라서, 태피스트리라고 불리지만, 실제로는 직물이 아닌 자수 작품이다. 아마 천에, 청색, 꼭두서니, 황색 등으로 염색된 모사가 사용되고 있다. 자수 기법으로는, 선을 그리는 아웃라인 스티치를 기본으로, 바이외 스티치(point de Bayeux)라고 불리는, 윤곽 안쪽을 실로 촘촘히 채워나가는 기법이 사용되고 있다.
4. 2. 구성 및 양식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특유의 삽화 배치로 이야기를 진행하는데, 이는 현대의 만화나 스토리보드를 연상시킨다. 이야기 구조는 앵글로색슨의 성경 필사본 그림과 닮았다. 작품의 목적은 이야기 전달에 있지만, 침략을 정당화하고 윌리엄을 찬양하려는 의도도 담고 있다.[87]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폭은 같지만 길이가 다른 아홉 개의 얇은 린넨 천을 이어붙여 만들었다. 그림과 문자 배치, 이야기 전달 방식, 동물 삽화 등은 당대 북유럽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형을 보여준다. 갈색, 베이지색, 녹색, 남색, 노란색 등 다양한 색채가 사용되었지만, 이는 실제와 관계없이 당시 사용 가능했던 염료 색이었다.[86]
자수에는 여러 바느질 방법이 사용되었다. 인물 윤곽선은 스템 스티치로, 그 속은 카우칭 스티치로 메웠다. 빛과 그림자는 색실을 체인과 스플릿 스티치로 바느질하여 표현했고, 문자와 창, 화살 등은 돌출되어 보이도록 하는 효과를 냈다.[87]
5. 역사적 가치와 의의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11세기 노르만 정복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어 그 자체로 귀중한 사료이다. 1476년 목록에 따르면, 이 태피스트리는 성 요한 축일 주간 동안 바이외 대성당에 매년 걸렸다고 한다.[34] 18세기에는 예술성이 조잡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34] 1797년 루브르 박물관 전시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34]
태피스트리는 관광 명소가 되었고, 로버트 사우디는 줄을 서서 봐야 하는 것에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34] 찰스 디킨스는 아마추어의 작품이라며 혹평했지만,[34] 존 러스킨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것"이라고 묘사했다.[34]
제2차 세계 대전 중 하인리히 힘러는 이 작품을 "영광스럽고 문화적인 게르만 역사에 중요한 작품"으로 여겨 탐냈다.[34] 2018년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은 영국에 대여할 것이라고 발표했지만,[26] 2024년 4월 현재, 대여 날짜는 확정되지 않았다.
태피스트리는 노르망디 가문의 의뢰로 제작되었으며, 노르만인의 관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해럴드는 용감하게 묘사되었고, 그의 병사들도 폄하되지 않았다. 윌리엄은 "dux"("공작")로, 해럴드는 즉위 전까지 "dux"로 불리다가 이후 "rex"("왕")로 불린다.[34] 이 이야기는 해럴드의 노르망디에서의 활동(1064년)을 상세히 다루는데, 이는 2년 후의 노르만 정복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따라서 현대 학자들은 태피스트리를 노르만 정복에 대한 일종의 옹호론으로 여긴다.
태피스트리는 윌리엄에 대한 해럴드의 맹세를 강조하지만,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20] 노르만 출처는 잉글랜드 왕위 계승이 윌리엄에게 약속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잉글랜드 출처는 다양한 설명을 제공한다.[20] 오늘날에는 노르만 출처가 더 신뢰할 만하다고 여겨진다.[45] 태피스트리와 노르만 출처는[46] 캔터베리에서 파문된 대주교 스티건드를 해럴드의 대관식을 거행한 인물로 지목하여, 해럴드의 왕위를 폄하하려는 의도일 수 있다.
정치적 선전이나 개인적인 강조가 역사적 정확성을 왜곡했을 수 있지만,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중세 무기, 의복 및 기타 물품에 대한 시각적 기록을 제공한다. 기사들은 방패를 휴대하지만, 현대 문장의 시작 단계에 있었지만 세습 문장 시스템은 보여주지 않는다.[20]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직물인 태피스트리가 아니라, 천에 자수를 놓아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82] 길이 약 70m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63.6m만 남아있다. 헤이스팅스 전투 부분이 현존한다. 11세기의 프랑스와 잉글랜드와 관련된 역사적 유물이며, 당시의 의상, 무기, 군선, 전투 방법 등을 전하는 귀중한 사료이다. 핼리 혜성의 출현 기록 중 하나로도 알려져 있다.
바이외의 바이외 대성당에 오랫동안 보관되어 왔지만, 현재는 바이외 태피스트리 박물관에서 보관 및 전시되고 있다.[83]
윌리엄 1세의 왕비 마틸다가 기증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윌리엄 1세의 이부 동생이었던 바이외 주교 오도가 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무기 상자 덮개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지역 변호사가 알아차려 소실을 면했다. 1803년에 나폴레옹이 파리로 가져갔는데, 영국 침공을 참고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 후, 바이외로 돌아왔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군이 접수했다. 종전 후, 프랑스로 돌아와 루브르 박물관의 지하에 보관되었다가 현재는 바이외 태피스트리 미술관에 보관 및 전시되어 있다.[85]
5. 1.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가치
1476년, 바이외 대성당 보물 목록에 태피스트리가 처음 언급되었다. 1562년 위그노의 약탈에도 살아남았으며, 1724년에 다시 언급된다.[20] 앙투안 랑슬로는 윌리엄 정복자에 관한 스케치를 받았다는 보고서를 ''아카데미 로얄 데 랭스크립시옹 에 벨레 레트르''에 보냈는데, 원본 위치는 몰랐지만 태피스트리일 것이라고 추측했다.[21]
베네딕토회 학자 베르나르 드 몽포콩은 바이외 대성당에 보존된 태피스트리의 작은 부분을 스케치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1729년과 1730년에 그는 ''프랑스 왕국의 기념물''의 첫 두 권에 완전한 작품의 그림과 상세한 설명을 게재했다. 그림은 앙투안 베누아가 그린 것이다.[21]
1746년 윌리엄 스터클리가 ''고대 영국 고고학''에서 처음 간략하게 언급했다.[22] 영어로 된 최초의 상세한 설명은 스마트 레티엘리에가 썼는데, 1732~3년에 파리에서 랑슬로와 몽포콩을 알고 지냈다. 이 설명은 1767년 앤드루 듀카렐의 ''앵글로-노르만 고대 유물''의 부록으로 출판되었다.[21][23][24]
프랑스 혁명 동안 1792년에 태피스트리는 군용 마차를 덮는 데 사용하기 위해 몰수되었다.[20] 지역 변호사가 마차에서 태피스트리를 구출하여 자신의 집에 보관했고, 문제가 해결된 후에는 안전을 위해 시 행정관에게 보냈다.[21] 1803년, 미술 위원회는 태피스트리를 나폴레옹 박물관에서 전시하기 위해 파리로 옮기도록 요구했다.[21] 나폴레옹이 영국 침공 계획을 포기하자 태피스트리의 선전 가치는 사라졌고, 바이외로 반환되었다.[21] 학자들은 태피스트리가 손상되고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지만, 시의회는 대성당으로 반환하는 것을 거부했다.[21]

1816년, 런던 골동품 협회는 찰스 스토다드에게 바이외를 방문하여 태피스트리의 정확한 수채 복제본을 제작하도록 의뢰했다. 그의 그림은 이후 제임스 베이시어 주니어에 의해 판화로 제작되어 1819~23년에 협회에서 출판되었다.[25] 스토다드의 이미지는 19세기 복원 이전의 태피스트리의 기록으로 가치가 있다.
1842년까지 태피스트리는 공공 도서관의 특별실에 전시되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노르망디 침공 위협이 있었던 1870년과 독일 점령기와 노르망디 상륙 작전 동안 아넨에르베에 의해 1939~1944년에도 특별 보관이 필요했다. 1944년 6월 27일, 게슈타포는 태피스트리를 루브르 박물관으로 가져갔고, 8월 18일, 베르마흐트가 파리에서 철수한 3일 전에 하인리히 힘러는 이를 "안전한 장소"로 가져가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그곳은 베를린으로 추정되었다.[34] 8월 22일에야 SS가 태피스트리를 소유하려 했지만, 이미 루브르는 다시 프랑스 손에 있었다.[34] 파리 해방 후, 8월 25일에 태피스트리는 다시 루브르 박물관에서 공개 전시되었고, 1945년에 바이외로 반환되었다.[21] 현재 바이외 태피스트리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또한, 해럴드 2세가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불길한 "불의 별", 즉 거대한 혜성이 나타난 것도 그려져 있다. 이 혜성은 당시의 왕과 그의 부하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이 장면은 그려진 이야기를 해석함으로써 1066년 3월로 특정되었다. 이에 따라 이 천체가 핼리 혜성이었음이 18세기에 밝혀졌다.
5. 2. 정치적 선전물로서의 성격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현대의 만화나 스토리보드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며, 앵글로색슨의 성경 필사본 그림과도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동시에, 침략을 정당화하고 윌리엄을 찬양하는 정치적 선전의 역할도 수행했다.[87]바이외 태피스트리는 노르만인의 관점을 중심으로 제작되었지만, 헤럴드는 용감하게 묘사되었고 그의 병사들 역시 폄하되지 않았다. 윌리엄은 "dux"("공작")로, 헤럴드는 즉위 전까지 "dux", 즉위 후에는 "rex"("왕")로 묘사된다.[34] 태피스트리는 헤럴드의 노르망디 원정(1064년)을 상세히 다루는데, 이는 2년 후 노르만 정복과의 연관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로, 현대 학자들은 이 태피스트리를 노르만 정복에 대한 일종의 옹호론으로 간주한다.
태피스트리는 윌리엄에 대한 헤럴드의 맹세를 강조하지만,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20] 노르만 측 자료는 잉글랜드 왕위가 윌리엄에게 약속되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잉글랜드 측 자료는 다른 설명을 제시한다.[20] 오늘날에는 노르만 측 자료가 더 신뢰성이 있다고 평가된다.[45] 태피스트리와 노르만 측 자료는[46] 캔터베리에서 파문된 대주교 스티건드를 헤럴드의 대관식을 집전한 인물로 지목하여 헤럴드의 왕위를 폄하하려 했다. 잉글랜드 측 자료는[47] 헤럴드가 요크 대주교 올드레드에 의해 대관되었다고 주장하며, 교황의 지지를 통해 정통성을 강화했다고 주장한다. 현대 학계는 이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했지만, 일반적으로 올드레드가 대관식을 집전했을 것으로 추정한다.[48][49]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중세 시대의 무기, 의복 등에 대한 시각적 기록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료이지만, 정치적 선전이나 개인적 강조로 인해 역사적 정확성이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작품에 묘사된 이야기는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윌리엄 정복왕)의 주장에 기반한다. 에드워드 증성왕이 기욤 2세를 후계자로 삼기 위해 헤럴드 고드윈슨을 보내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헤럴드 고드윈슨이 전사하고 패잔병을 추격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작품의 마지막 부분은 유실되어 결말을 알 수 없다. 이 유실된 부분은 약 6.4m로 추정되며, 바이외 태피스트리의 수수께끼 중 하나이다. 역사적 정황상, 윌리엄 정복왕의 대관식 장면이 그려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84]
6. 현대의 재해석 및 영향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여러 형태로 복제되었다. 주요 복제품은 다음과 같다.
- 1885년, 윌리엄 모리스는 섬유 제조업체 토마스 워들과 협력했다.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워들은 리크 자수 협회의 여성들과 함께 실물 크기의 수채화 도면을 바탕으로 복제품을 만들었다. 이 복제품은 현재 레딩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34] [52] [53]
- 1996년, 캐나다 워털루 대학교의 레이 듀건이 자수 복제품을 완성하여 여러 박물관과 갤러리에 전시했다.[55] [56]
- 2000년부터 2014년까지 덴마크의 린홀름 호예 바이킹 그룹이 원래 재봉 기술을 사용하여 복제품을 만들었다.[57] 이 복제품은 뵈르글룸 수도원에 영구 전시되었다.[58]
- E. D. 휠러 박사는 마가렛 레빌이 만든 복제품을 웨스트 조지아 대학교에 기증했고, 이후 노스 조지아 대학교로 옮겨졌다.[59]

- 과거 뉴질랜드 제럴딘에는 바이외 태피스트리의 절반 크기 모자이크 버전이 전시되었다.[60] 마이클 린턴이 150만 개의 스프링강 조각으로 20년에 걸쳐 제작했으며, 윌리엄 정복왕의 대관식 장면을 포함한 32개 섹션으로 구성되었다.[61]
- 노퍽의 제이슨 웰치는 2011년부터 2014년까지 나무 부조 복제품을 만들었다.[62]
- 캠브리지셔의 미아 한슨은 2016년부터 복제품을 제작 중이며, 2023년 5월까지 40미터를 완성했다.[63]
- 2024년 1월, 바이외 박물관은 찰리 와츠의 유산 경매에서 빅토리아 시대 복제품을 구매했다. 이 복제품은 원래 파노라마 사진으로 제작되었다.[66]
thumb에 대한 바유의 거리 예술]]
현대 예술가들은 윌리엄의 대관식까지의 후속 사건들을 묘사하는 패널을 제작하여 작품을 완성하려 했다. 얀 메센트는 1997년에 윌리엄이 영국 귀족들의 항복을 받는 장면을 재구성했고,[67] [68] [69] 2013년 초 알더니 주민들은 윌리엄의 대관식과 런던 타워 건설을 포함하는 후속 내용을 완성했다.[70]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시퀀스-내러티브 예술의 초기 예시로 평가받으며,[72] 영국 만화의 기원으로도 여겨진다.[73]
현대 정치 만화와 만화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 ''예 베를린 태피스트리'' (1915): 존 하설의 풍자 파스티슈로, 독일의 벨기에 침공을 다룬다.[74]
- 레아 어빈의 ''뉴요커'' 표지 (1944): D-Day를 기념한다.[75]
- 조지 게일의 파스티슈 (1973): 영국의 유럽 경제 공동체 가입 과정을 담았다.[76]
현대 자수에도 영향을 주었다.
- 오버로드 자수 (1974): 오버로드 작전과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기념한다.
- 프레스턴팬스 태피스트리 (2010): 1745년 프레스턴팬스 전투를 기록한다.
이 외에도 헤이스팅스 자수, 뉴 월드 태피스트리, 퀘이커 태피스트리, 스코틀랜드 대태피스트리, 스코틀랜드 디아스포라 태피스트리, ''마그나 카르타 (자수)'', 왕좌의 게임 태피스트리 등이 있다.
다음과 같은 영화에서도 바이외 태피스트리의 일부가 사용되었다.
- 디즈니의 ''고인돌 가족 플린스톤''
- 앤서니 만의 ''엘 시드''
- 프랑코 제피렐리의 ''햄릿''
- 프랭크 카센티의 ''롤랑의 노래''
- 케빈 레이놀즈의 ''로빈 후드: 도둑의 왕자''
- 리처드 플라이셔의 ''바이킹''[77]
마르타 모라초니의 소설 ''진실의 발명''과 토니 쿠슈너의 연극 ''천사, 미국에 오다''에서도 언급된다.[78]
2022년 다큐멘터리 ''바이외 태피스트리의 미스터리''는 프랑스 국립 과학 연구 센터의 조사를 다루었다.[79]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하이퍼스펙트럼 카메라를 사용하여 원래 색상을 분석했다.[79]
''하우스 오브 드래곤'' (2024) 시즌 2 오프닝 크레딧은 바이외 태피스트리에서 영감을 얻은 자수 애니메이션 시퀀스로 재설계되었다.[81]
7. 한국적 관점에서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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