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다이아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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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렌체 다이아몬드는 인도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되는 역사적인 다이아몬드이다. 부르고뉴 공작 샤를이 소유했다가 1477년 낭시 전투에서 분실되었다는 설, 16세기 인도 비자야나가라 제국에서 포르투갈로 넘어갔다는 설 등 다양한 기원 설이 존재한다. 메디치 가문을 거쳐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소유권이 이전되었으며, 1918년 오스트리아 제국 멸망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현재는 큐빅 지르코니아 복제품이 제작되어 전시되고 있으며, 소설 등의 문학 작품에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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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아몬드 - 컬리넌 다이아몬드
1905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발견된 3106캐럿의 세계 최대 다이아몬드 원석인 컬리넌 다이아몬드는 영국 국왕에게 헌정되어 여러 보석으로 커팅되었으며, 그중 가장 큰 컬리넌 1세와 2세는 영국 왕실 왕관 보석의 일부로 런던탑에 전시되어 남아공에서 반환 요구가 있다. - 다이아몬드 - 호프 다이아몬드
호프 다이아몬드는 45.52캐럿의 짙은 파란색 다이아몬드로, 붕소 성분으로 인해 어두운 회청색을 띠며 자외선에 노출되면 붉은색 인광을 내고, 인도에서 발견되어 여러 나라를 거치며 저주에 얽힌 전설이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이아몬드로서 현재 미국 국립 자연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피렌체 다이아몬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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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 정보 | |
![]() | |
이름 | 플로렌틴 |
중량 | 137.27 캐럿 (27.454 g) |
색상 | 옅은 노란색, 아주 약한 녹색 기운 |
컷 | 9면 126 패싯 더블 로즈 컷 |
원산지 | 인도 |
소유자 | 알 수 없음 |
2. 역사
피렌체 다이아몬드는 2000년 전 인도에서 처음 발견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16세기에는 인도 바자야 나가르에서 포르투갈 군대에 의해 약탈당했다. 19세기에는 이탈리아 북부 토스카나 대공에게 넘어갔다가, 15년 후 오스트리아로 돌아와 황제의 왕관을 장식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가 소유하게 되면서 '피렌체 다이아몬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로 시집갈 때 혼수품으로 가져갔으나, 마리 앙투아네트는 1792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17년 후인 1809년에는 나폴레옹의 부인 마리 루이즈의 소유가 되었지만,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섬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후 '토스카나 대공의 다이아몬드'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황후 엘리자베스는 이 다이아몬드를 목걸이에 장식했으나, 1898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암살당했다. 1922년 오스트리아 제국이 멸망하면서 피렌체 다이아몬드는 행방이 묘연해졌다.
2. 1. 인도 기원설 및 초기 역사 (1477년 이전)
피렌체 다이아몬드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용담공 샤를이 로데베이크 반 베르켄에게 연마를 맡겼다는 설이 있다.[3] 샤를은 1477년 1월 5일 낭시 전투에서 이 돌을 착용하고 있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한 농부나 보병이 공작의 시신에서 다이아몬드를 발견하고는 유리인 줄 알고 2프랑에 팔았다.[4] 이 돌을 구매한 베른 시민 바솔로뮤 메이는 제노바인에게 팔았고, 제노바인은 다시 루도비코 스포르차에게 팔았다. 이후 푸거 가문을 거쳐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금고로 들어갔다. 교황 율리우스 2세도 이 돌을 소유했던 사람 중 하나로 언급된다.또 다른 설에 따르면, 16세기 후반 인도 남부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왕이 가공되지 않은 다이아몬드 원석을 가지고 있었는데, 고아의 포르투갈 총독이자 몬테산토 백작이었던 루도비코 카스트로가 이를 획득했다고 한다. 이 원석은 로마의 예수회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오랜 협상 끝에 페르디난도 1세가 카스트로-노로냐 가문으로부터 35000포르투갈 스쿠디 크로카티에 매입하는 데 성공했다.
페르디난도 1세의 아들 코시모 2세는 피렌체에서 일하는 베네치아인 연마사 폼페오 스투덴톨리에게 다이아몬드 가공을 맡겼다. 완성된 보석은 1615년 10월 10일에 인도되었다. 코시모 2세 사후 작성된 재고 목록에는 페르디난도 1세가 거친 다이아몬드를 획득했으며, 이 보석이 '양쪽에 면을 깎고 다이아몬드 장식 띠로 둘러싸여 있다'고 묘사되어 있다. 이 돌은 두프너 다이아몬드로도 알려져 있다.

2. 2. 부르고뉴 공작 샤를과 낭시 전투 (1477년)
이 돌의 기원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로데베이크 반 베르켄이 용담공 샤를을 위해 연마했다고 알려져 있다.[3] 샤를은 1477년 1월 5일 낭시 전투에서 이 돌을 착용한 채 전사했다. 한 농부나 보병이 공작의 시신에서 다이아몬드를 발견하고는 유리로 착각하여 2프랑에 팔았다.[4] 이 돌의 새로운 소유주가 된 베른 시민 바솔로뮤 메이는 제노바인에게 팔았고, 제노바인은 다시 루도비코 스포르차에게 팔았다. 푸거 가문을 거쳐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금고로 들어갔으며, 교황 율리우스 2세도 이 돌을 소유했던 것으로 언급된다.2. 3. 메디치 가문과 교황 율리우스 2세
이 돌의 기원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보고에 따르면 용담공 샤를을 위해 로데베이크 반 베르켄이 연마했다.[3] 샤를은 1477년 1월 5일 낭시 전투에서 그 돌을 착용하고 있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한 농부나 보병이 공작의 몸에서 다이아몬드를 발견하고는 유리인 줄 알고 2프랑에 팔았다.[4] 새로운 소유주인 베른의 시민 바솔로뮤 메이는 이 돌을 제노바인에게 팔았고, 제노바인은 다시 루도비코 스포르차에게 팔았다. 푸거 가문을 거쳐 이 돌은 피렌체의 메디치 금고로 들어갔다. 교황 율리우스 2세도 이 돌의 소유주 중 한 명으로 언급된다.이 돌의 초기 역사에 대한 또 다른 버전은 거친 돌이 16세기 후반에 인도 남부의 비자야나가라 제국 왕으로부터 고아의 포르투갈 총독인 몬테산토 백작 루도비코 카스트로에 의해 획득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수정은 로마의 예수회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오랜 협상 끝에 페르디난도 1세가 카스트로-노로냐 가문으로부터 35,000 포르투갈 스쿠디 크로카티(35000USD)에 매입하는 데 성공했다.
페르디난도 공작의 아들 코시모 2세는 마침내 아버지의 구매품을 피렌체에서 일하는 베네치아인 연마사 폼페오 스투덴톨리에게 맡겼다. 완성된 보석은 1615년 10월 10일에 인도되었다. 코시모의 죽음에 작성된 재고 목록은 페르디난도가 거친 다이아몬드를 획득했음을 확인하고 이 보석을 '양쪽에 면을 깎고 다이아몬드 장식 띠로 둘러싸여 있다'고 묘사한다. 이 돌은 두프너 다이아몬드로도 알려져 있다.
2. 4.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 (17세기~1918년)
장바티스트 타베르니에가 1657년에 페르디난도 2세의 소유물에서 이 돌을 보면서 문서화된 역사가 시작된다.[3] 이후 로렌 공작 프란치스코 3세 슈테판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결혼으로 메디치 가문이 사망하면서, 이 돌은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가 빈 호프부르크 궁전의 합스부르크 왕관 보석으로 보관되었다. 당시 이 돌의 가치는 750000USD로 평가되었다.이 다이아몬드는 모자 에그레트에 세팅되어 제13 전시관의 황실 보물과 함께 전시되었다. 1865년, 황실 궁정 광물 캐비닛 책임자인 모리츠 호르네스 박사가 다이아몬드의 무게와 특징을 정확하게 기록했다. 석고 주형도 제작되었다. 모조 다이아몬드 모델은 파리의 L. 자만에서 제작되었으며, 유리 복제품의 색조가 원석과 최대한 일치하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피렌체 다이아몬드의 색상은 "물에 열 배 희석된 와인"으로 묘사되었다. 이 역사적인 복제품은 빈 자연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5]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이 멸망한 후, 카를 1세의 명령에 따라 이 돌은 황실 보물에서 제거되어 망명길에 올랐다.[6]
2. 5. 오스트리아 제국 멸망 이후 (1918년~현재)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이 멸망하면서, 카를 1세는 황실 보물에서 피렌체 다이아몬드를 제거하고 망명길에 함께 가져갔다.[6] 1918년 이후 황실 가문과 가까운 사람이 이 다이아몬드를 훔쳐 다른 왕관 보석들과 함께 남아메리카로 가져갔다는 설이 있다. 그 후, 1920년대에는 이 다이아몬드가 미국으로 반입되어 다시 연마된 후 판매되었다는 소문이 퍼졌다.피렌체의 보석상 파올로 펜코는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막달레나 여대공 (1589–1631)이 착용했을 당시의 역사적 기록과 묘사를 바탕으로 큐빅 지르코니아를 사용하여 이 다이아몬드를 세트로 재현했다.[7] 이 재현품은 피렌체의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에 전시되어 있다.
3. 복제품
1865년, 황실 궁정 광물 캐비닛 책임자인 모리츠 호르네스 박사는 다이아몬드의 무게와 특징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석고 주형을 제작했다. 파리의 L. 자만에서 제작된 모조 다이아몬드 모델은 유리 복제품의 색조를 원석과 최대한 일치시키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피렌체 다이아몬드의 색상은 "물에 열 배 희석된 와인"으로 묘사되었다. 이 역사적인 복제품은 빈 자연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5]
피렌체 보석상 파올로 펜코는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막달레나 여대공 (1589–1631)이 착용했을 때의 역사적 기록과 묘사를 바탕으로 큐빅 지르코니아를 사용하여 이 다이아몬드를 세트로 재현했다.[7] 이 작품은 피렌체의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에 전시되어 있다.
4. 문학 작품에서의 등장
토마스 휠리만의 2022년 소설 《붉은 다이아몬드》(Der rote Diamant)를 비롯하여, 댄 하넬의 2015년 소설 《디아블로의 그림자: 치유의 물에서의 죽음》, 에이미 메이어슨의 2020년 소설 《미완성》, 저스틴 B. 호더의 2021년 소설 《모른의 안개》 등에 등장한다.
참조
[1]
웹사이트
The 137-Carat Diamond Lost Forever
https://www.thedaily[...]
2016-06-05
[2]
서적
Dictionary of Gems and Gemology
https://books.google[...]
Springer Science & Business Media
2018-03-16
[3]
웹사이트
The Diamond Invention. Chapter 11
http://www.edwardjay[...]
[4]
간행물
The Diamond and its Bloody Story
https://books.google[...]
2018-03-16
[5]
웹사이트
Florentiner - Glasreplik eines verschollenen Diamanten Objekt - NHM Wien
http://objekte.nhm-w[...]
[6]
서적
Uncrowned Emperor: The Life and Times of Otto Von Habsburg
https://books.google[...]
A&C Black
2018-03-16
[7]
웹사이트
Il Fiorentino. Il Gran Diamante di Toscana - Paolo Penko
https://www.paolopen[...]
2021-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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