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보마르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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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에르 오귀스탱 카롱 드 보마르셰(Pierre-Augustin Caron de Beaumarchais, 1732-1799)는 프랑스의 극작가, 시계 제작자, 출판업자, 외교관, 사업가이다. 그는 복잡한 생애를 거치며 《세비야의 이발사》, 《피가로의 결혼》과 같은 희극으로 명성을 얻었다. 초기에는 시계 제작 기술을 선보여 명성을 얻었고, 루이 15세의 후원을 받아 귀족 작위를 얻었으며, 미국 독립 전쟁을 지원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여성 편력, 법정 투쟁, 프랑스 혁명과의 연관성 등으로 논란을 겪었으며, 혁명 후 망명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후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특히 피가로라는 인물은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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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보마르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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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피에르 오귀스탱 카롱 드 보마르셰 |
원어 이름 | Pierre-Augustin Caron de Beaumarchais |
출생 | 1732년 1월 24일 |
출생지 | 프랑스, 파리, 생드니 거리 인근 |
사망 | 1799년 5월 18일 (67세) |
사망지 | 프랑스, 파리 |
묘소 | 페르 라셰즈 묘지 |
직업 | 실업가, 극작가 |
국적 | 프랑스 |
작품 정보 | |
대표작 | 세비야의 이발사 피가로의 결혼 죄 있는 어머니 (피가로 3부작) |
장르 | 희극 |
영향 | |
영향 받은 인물 | 드니 디드로 |
2. 생애
파리에서 출생하여, 궁정 감독관·궁정악사·작가·출판업자 등 여러 직업을 거치는 동안 복잡한 생애를 보냈다. 이론면에서 디드로의 계승자인 그는 오늘날에 와서는, 스페인 시민 계급을 주제로 당시의 특권 계급을 풍자한 2대 희곡 《세비야의 이발사》, 《피가로의 결혼》으로서 유명하다.
=== 탄생과 가계 ===
피에르 오귀스탱 카롱(Pierre-Augustin Caron)은 1732년 1월 24일 파리 생 드니 거리에서 시계 제작자 앙드레 샤를 카롱(André-Charles Caron)의 아들로 태어났다.[3] 카롱 가문은 모(Meaux) 출신으로, 이전에는 위그노였으나 낭트 칙령 폐지 이후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했다.[3] 중산층으로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한 보마르셰는 음악에 관심을 가져 여러 악기를 연주했다.[3] 가톨릭 신자였지만,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동정심을 유지하며 시민권을 위해 활동했다.[3] 그의 누이 마리-조제프 카론(Marie-Josèphe Caron)은 화가가 되었고, 사촌은 화가 수잔 카론이었다.[4]
보마르셰는 10세부터 "지방 학교"에서 라틴어를 배웠으나,[5] 2년 후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 밑에서 시계 제작 견습생으로 일했다.[5] 이 시기 경험은 훗날 《피가로의 결혼》의 체르빈 캐릭터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5] 그는 한때 아버지에게 쫓겨났지만, 뉘우치고 용서를 받아 다시 돌아왔다.
1753년, 21세의 보마르셰는 시계를 더 정확하고 작게 만들 수 있는 이탈장치를 발명했다.[6] 이 발명은 당시 시계 업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장-앙드레 르포트(Jean-André Lepaute)가 이 발명을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며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발표하면서 논란이 일었다.[7] 보마르셰는 이에 항의하며 자신의 발명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고,[9] 결국 1754년 아카데미는 보마르셰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사건으로 보마르셰는 명성을 얻고, 루이 15세의 "국왕의 조달자"로 임명되어 카롱 가문의 사업은 번창했다.[7] 특히 퐁파두르 부인을 위해 제작한 반지 시계는 궁중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7]
=== 초기 생애: 시계공 시절 ===
피에르 오귀스탱 카롱(Pierre-Augustin Caron)은 1732년 1월 24일 파리 생 드니 거리에서 시계 제작자 앙드레-샤를 카롱(André-Charles Caron)의 아들로 태어났다.[3] 카롱 가문은 위그노였으나 낭트 칙령 폐지 이후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했다.[3] 그는 음악에 관심을 갖고 여러 악기를 연주했으며, 누이 마리-조제프 카론(Marie-Josèphe Caron)은 화가가 되었다.[4]
열 살 때부터 "지방 학교"에서 라틴어를 배웠으나,[5] 2년 후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 밑에서 시계 제작 기술을 배웠다.[5] 그는 희곡 《피가로의 결혼》의 체르빈 캐릭터를 창조할 때 이 시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을 수 있다.[5]
21세 때인 1753년 7월, 보마르셰는 시계를 더 정확하고 작게 만들 수 있는 이탈장치를 발명했다.[6] 그러나 프랑스 왕실 시계 제작자였던 장-앙드레 르포트(Jean-André Lepaute)가 이 발명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발표했다.[7] 보마르셰는 《르 메르퀴르 드 프랑스》에 자신의 발명임을 주장하는 항의 편지를 썼고,[9] "진실과 나의 명성을 위해" "나는 그러한 불성실함을 침묵 속에 넘길 수 없으며, 이 장치의 발명을 내 것으로 주장해야 한다"고 말했다.[9]
1754년 2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보마르셰의 주장을 인정했고, 이 사건은 파리에서 화제가 되었다. 보마르셰는 루이 15세의 정부 퐁파두르 부인을 위한 반지에 부착된 시계를 제작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7] 루이 15세는 그를 "국왕의 조달자"로 임명했다.[7]
=== 궁정 생활과 결혼 ===
파리에서 태어난 보마르셰는 1755년 과부 마들렌-카트린 오베르탱과 결혼하여 왕실 관직을 얻었으나, 결혼 직후 아내 소유의 토지인 "르 부아 마르셰"에서 따온 "피에르-오귀스탱 카롱 드 보마르셰"라는 귀족적인 이름으로 개명했다. 그러나 1년도 채 되지 않아 아내가 사망하고, 재정 문제와 빚에 시달렸다.
보마르셰는 루이 15세의 네 딸에게 하프를 가르치면서 왕실 음악 고문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왕녀들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얻었던 것은, 당시 보마르셰가 일으킨 결투 사건의 전말에서도 분명하다. 어떤 귀족에게 모욕을 당하고 도발당한 보마르셰는, 당시 금지되었던 결투에 응하여, 상대에게 중상을 입혔다. 결투를 하는 것만으로도 중죄였지만, 만약 상대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왔을 경우, 복수나 처벌의 대상이 되므로, 그것을 두려워하여 왕녀들에게 비호를 요청했다. 왕녀들은 사정을 아버지인 국왕에게 이야기했고, 결투 사건에 관한 입막음 공작을 승낙했다.
1759년, 보마르셰는 부유한 사업가 조제프 파리 뒤베르네를 만나 에콜 밀리테르 건립에 대한 국왕의 승인을 얻도록 도왔고, 뒤베르네는 그 대가로 보마르셰를 부유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뒤베르네의 도움으로 1760-61년에 국왕 비서-고문관 칭호를 얻어 귀족이 되었고, 1763년에는 왕립 공원을 감독하는 사냥 부국장 직책을 얻었다.
1761년 12월, 보마르셰는 뒤베르네에게 빌린 55000리브르에, 소지하고 있던 30000리브르를 더하여, "국왕 비서관"이라는 직함을 구입했다. 이 직함은 "평민의 화장 비누"라고 불리며 멸시받았지만, 틀림없이 돈이 되는 직함이었고, 게다가 구입자의 신분이 어떠하든 정식으로 귀족으로 인정받는 직업이었다. 게다가 1762년에 들어서자, 당시 프랑스를 18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관할하고 있던 "산림 수자원 보호 장관" 중 하나에 공석이 생겼다. 거액의 수입을 가져다주는 자리였고, 그만큼 가격도 높았지만(현재 일본 엔화로 5000만 엔 전후), 뒤베르네는 아낌없이 이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했다. 이때는 다른 장관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혀, 왕녀들의 지원도 헛되이 얻을 수 없었지만, 그 대신 이듬해에 "루브르 사냥터 왕실 영지 관리 및 국왕 대관구의 사냥 총대관"이라는 직함을 얻었다. 왕실의 영지를 관리하고, 밀렵꾼이 있으면 체포하여 재판하는 것이 임무이다.
=== 스페인 체류 ===
1764년 4월, 보마르셰는 여동생 리제트가 약혼자였던 클라비호에게 버려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드리드에 10개월 동안 머물렀다. 클라비호는 전쟁부 관리였다.[10] 보마르셰는 쇼아젤 공작의 소개장을 가지고 마드리드로 갔으며, 클라비호가 리제트와 결혼하도록 압박했지만, 클라비호의 행동에 대한 추가적인 세부 사항이 드러나면서 결혼은 취소되었다.[10]
보마르셰의 누나 마리 루이즈는 1748년 석공 루이 길베르와 결혼하여 마드리드로 이주한 맏누나 마리 조제프를 따라 스페인으로 갔다. 마리 루이즈는 그곳에서 군수성에 근무하던 클라비호와 결혼을 약속했지만, 언니의 충고로 결혼을 미루고 있었다. 클라비호는 문예지를 창간하고 스페인 왕실 고문서 관리관으로 임명되는 등 순조롭게 출세했다. 결혼 약속 후 6년이 지나 마리 조제프는 클라비호에게 결혼 약속 이행을 종용했지만, 클라비호는 쉽게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클라비호는 결혼식 당일과 3일 전에 두 번이나 실종되었다.
보마르셰는 『1764년, 스페인 여행기 단장』에서 누나의 명예 회복을 위해 즉시 스페인으로 달려갔다고 묘사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보마르셰는 4월 7일에 국왕에게 스페인 방문 허가를 받았고, 5월 18일에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이는 보마르셰가 누나의 문제뿐만 아니라 프랑스-스페인 간의 통상 문제 해결이라는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마드리드에 도착한 보마르셰는 클라비호를 만나 사과문을 받아냈지만, 클라비호는 "총으로 협박당해 결혼을 강요당했다"고 스페인 재상에게 호소했다. 보마르셰는 결백을 주장하여 클라비호의 공직 추방이라는 역전 승리를 거두었다.
스페인에 있는 동안 보마르셰는 뒤베르네를 위한 사업 거래에도 관여했다. 그들은 새로 획득한 스페인 식민지인 루이지애나에 대한 독점 계약을 모색했고, 아메리카 대륙의 스페인 식민지에 노예를 수입할 권리를 얻으려고 시도했다. 보마르셰는 스페인 사교계의 유력자였던 푸엔 클라라 후작 부인, 라크루아 부인 등을 만나 스페인 주재 영국 대사 및 스페인 재상의 지우를 얻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라크루아 부인이 국왕 카를로스 3세의 정부가 되면서 보마르셰의 사업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보마르셰는 스페인의 분위기를 만끽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이는 그의 후기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외무 장관인 그리말디 공작과 같은 중요한 인물들과 친분을 맺었지만, 뒤베르네를 위한 계약을 확보하려는 그의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1765년 3월에 귀국했다. 보마르셰는 이 사건을 연극으로 만들려고 생각했지만, 1774년에 ''클라비고''를 쓴 괴테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기로 결정했다.
=== 극작가로서의 성공 ===
보마르셰는 이미 사적인 관객을 위한 짧은 익살극을 쓰는 실험을 해 본 적이 있었지만, 코미디 프랑세즈에서 1767년 초연된 ''외제니''[10]를 통해 극작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770년에는 또 다른 드라마 ''두 친구 또는 리옹의 상인/Les Deux Amis ou le Négociant de Lyon프랑스어''[10]을 발표했다. 그러나, 『두 친구』는 상황 설정에 무리가 있는 줄거리로 인해 대실패로 끝났고, "궁정에서 직책을 사거나 허세를 부리거나 서투른 연극을 쓰는 것보다, 좋은 시계를 제작하는 것이 훨씬 낫다"라는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이후 보마르셰는 순수한 시민극을 쓰는 일은 없어졌지만, 그 미학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이론면에서 디드로의 계승자인 보마르셰는 스페인 시민 계급을 주제로 당시의 특권 계급을 풍자한 2대 희곡 《세비야의 이발사》, 《피가로의 결혼》으로 유명하다. 특히, 《피가로의 결혼》은 보마르셰의 최대 후원자였던 콩데 대공의 요청에 따라 제작된 작품으로, 1778년에 완성되었다. 1781년, 오페라 코미크에 관객을 빼앗겨 흥행 부진에 시달리던 코미디 프랑세즈는 《피가로의 결혼》을 상연 작품으로 수락했고, 보마르셰는 경찰청의 검열을 통과하여 정식 상연 허가를 얻었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작품을 낭독하게 하고, "이건 혐오스러운 것이다. 절대로 상연을 허락할 수 없다."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국왕은 《피가로의 결혼》이 정부의 모든 존경받는 것들을 조롱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바스티유 감옥을 파괴하기 전에는 상연을 허락할 수 없다고 말했다. 많은 귀족들이 《피가로의 결혼》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고 상연을 지지했던 것과 달리, 루이 16세는 작품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상연 금지를 명령한 것이다.
《피가로의 결혼》 상연 및 출판 금지는 오히려 파리 사람들의 관심을 자극했고, 보마르셰는 낭독회를 통해 국왕에 대한 저항을 이어갔다. 1783년, 아르투아 백작의 압력으로 므뉘 플레지르 극장에서의 상연이 결정되었으나, 막이 오르기 직전 국왕의 상연 금지 결정이 내려졌다. 하지만 귀족들의 반발로 인해 결국 보드뢰유 백작의 별장에서 300명의 귀족 앞에서 상연이 허가되었다.
보마르셰는 작품의 건전성을 증명하기 위해 네 번이나 검열을 신청하고, "문학 법정"을 개최하는 등 노력했다. 결국 루이 16세도 굴복하여 1784년 4월 27일, 《피가로의 결혼》은 초연되었고, 파리 시민들이 모두 몰려온 듯한 대성공을 거두었다.
1785년 3월, 보마르셰는 프랑스 일간지 《주르날 드 파리》에 게재된 익명의 기사에 대한 답변을 보내면서 필화 사건을 일으켰다. 그는 "극 공연을 실현하기 위해 사자나 호랑이를 물리쳐야 했던 내가…"라는 구절에서 '사자나 호랑이'를 루이 16세와 왕비에 대한 비유로 해석한 국왕에 의해 생-라자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5일 후 석방되었지만, 보마르셰는 국왕에게 명예 회복을 위한 조건을 제시했고, 국왕은 《세비야의 이발사》 연기, 80만 리브르의 배상 등 요구를 뛰어넘는 배상을 했다.
=== 법정 투쟁 ===
피에르 보마르셰는 1770년 사망한 파리-뒤베르네의 유산 상속 문제로 뒤베르네의 유일한 상속자인 라 블라슈 백작과 법정 투쟁을 벌였다.[11] 라 블라슈 백작은 보마르셰와 뒤베르네 사이에 체결된 계약서가 위조되었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11] 1772년 1심에서는 보마르셰가 승소했지만,[11] 이듬해 항소심에서 뇌물을 주려다 실패한 고에즈만 판사에 의해 판결이 뒤집혔다.[11]
보마르셰는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고에즈만 반박 메모》(Mémoires contre Goezman)라는 4부작 소책자를 출판했다.[14] 이 사건으로 보마르셰는 사회 정의와 자유의 옹호자로 여겨지며 유명 인사가 되었다.[14] 고에즈만은 보마르셰의 고발에 맞서 소송을 제기했고, 1774년 2월 26일, 보마르셰와 고에즈만 부인 모두 "비난"(blâme)을 선고받아 민권을 박탈당했다.[11] 고에즈만 판사는 직위에서 해임되었고, 라 블라슈 사건에서 고에즈만의 판결은 뒤집혔다.[11]
1778년 7월, 엑상프로방스 재심 법정은 보마르셰의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10년 가까이 이어진 라 브라슈 백작과의 법정 투쟁은 막을 내렸다.
보마르셰는 시농의 삼림 개발 사업에도 참여했는데, 이 과정에서 하인 르슈르와의 법적 분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르슈르는 보마르셰를 협박하고 삼림 개발 이권을 가로채려 했으나, 보마르셰는 결국 르슈르를 굴복시키고 삼림 개발권을 되찾았다.
=== 미국 독립 전쟁 지원 ===
보마르셰는 프랑스가 1778년에 공식적으로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하기 전부터 프랑스 무기, 자금, 물품을 미국 육군에 전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15][2] 그는 반군에게 비밀리에 원조를 제공하기 위해 로드리그 오르탈레즈 앤 컴퍼니라는 가상의 사업체를 설립했다.[2]
보마르셰는 시민권을 회복하기 위해 루이 15세에게 헌신할 것을 약속하고, 여러 비밀 임무를 수행하며 런던, 암스테르담, 빈을 여행했다. 1775년에는 영국군과 미국 반군 사이에 렉싱턴 콩코드 전투가 벌어졌고, 보마르셰는 프랑스 정부에 반란에 대한 주요 정보원이 되었다.[11]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공개적으로 관계를 끊고 싶어하지 않았던 루이 16세는 보마르셰가 프랑스와 스페인 왕실의 지원을 받아 미국 반군에게 무기, 탄약, 의류, 식량을 공급하는 상업 기업 로드리그 오르탈레즈 앤 컴퍼니를 설립하도록 허용했다.[11] 1776년 8월 18일, 보마르셰는 비밀 서신 위원회에 편지를 보내 무기 지원을 약속했다.[2] 이 정책은 1777년 사라토가 전투에서 존 버고인의 군대가 보마르셰가 보낸 물품으로 무장한 반군에게 항복하면서 결실을 맺었다.[2]
보마르셰는 제2차 대륙 회의에서 비밀 서신 위원회의 일원이었던 사일러스 딘과 거래했다.[11] 1778년, 프랑스 정부가 우호 통상 조약과 동맹 조약에 동의하면서 프랑스는 미국 독립 전쟁에 공식적으로 참전했다.
보마르셰는 미국 독립 전쟁 발발 당시 영국에 머무르며, 프레데릭 노스등과 교류하며 미국 독립 전쟁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그는 "프랑스는 미국을 극비리에 지원해야 한다"는 생각에 도달하여 루이 16세와 외무 대신 베르젠에게 미국 지원을 설득하는 편지를 보냈다.
프랑스 정부는 미국 반란군을 지원하고 싶었지만, 영국을 자극하는 것은 위험했기에 정부 차원의 지원이 아닌, 개인적 투기로 보이도록 했다. 보마르셰는 1775년 10월, "로드리게스 오르탈레스 상회"를 설립하여 배와 무기, 탄약, 의용군 모집에 힘썼다.
보마르셰는 사일러스 딘, 벤자민 프랭클린과의 거래에서 실수를 저질렀지만, 프랑스 정부의 추가 융자로 파멸을 면했다. 1778년 2월 6일, 프랑스는 프랑스-미국 동맹 조약을 체결하고 영국과 전쟁 상태에 돌입, 보마르셰의 상사는 순수한 민간 업자가 되었다. 그는 미국 신정부와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하고, 1779년 1월에는 미국 의회의 감사장을 받았다.
=== 볼테르 전집 출판 ===
볼테르가 1778년 사망한 직후, 보마르셰는 프랑스에서 금지된 볼테르의 완전 작품을 출판하기 시작했다.[17] 1779년 2월, 샤를-조제프 팡쿠크(Charles-Joseph Panckoucke)로부터 볼테르의 많은 원고에 대한 권리를 구매했다.[17] 프랑스 검열을 피하기 위해 인근 독일의 켈 문학 인쇄 협회(Société littéraire typographique de Kehl)를 설립했다.[17] 존 바스커빌(John Baskerville)의 미망인으로부터 활자 주조소를 구매했고 세 개의 제지 공장도 매입하여, 70권의 전집을 1783년에서 1790년 사이에 출판했다.[17]
=== 프랑스 혁명과 망명 ===
보마르셰는 프랑스 혁명 발발 초기에는 혁명을 지지했지만, 혁명의 과격함이 자유를 위협한다고 판단하여 거리를 두었다.[18] 그는 파리에 식수 공급 사업을 통해 재정적으로 성공했고, 1791년에는 바스티유 감옥 맞은편에 호화로운 저택을 지었다.[18] 그러나 이 저택은 구체제의 상징으로 여겨져 민중들의 반감을 샀고, 1792년 8월에는 민중들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18]
보마르셰는 프랑스 혁명군을 위해 네덜란드에서 소총 6만 정을 구매하려 했으나, 계약을 완료하지 못했다.[18] 이 거래는 벨기에 브라반트 혁명 당시 몰수된 소총을 처분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는데, 보마르셰는 프랑스 정부와 협상을 통해 구매를 추진했다.[18] 그러나 각국의 이해관계와 정보 누출, 프랑스 정부 내부의 방해 등으로 인해 거래는 난항을 겪었다.
1792년, 보마르셰는 소총을 숨겨두고 있다는 모함을 받아 체포되었으나, 애인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18] 이후 영국과 네덜란드를 오가며 소총 구매를 위해 노력했지만, 프랑스 정부의 비협조와 방해로 인해 실패했다. 결국 보마르셰는 1794년 망명자 명단에 올라 재산을 몰수당하고 프랑스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18]
1796년 망명자 명단에서 삭제된 후 파리로 돌아와 여생을 비교적 평화롭게 보냈으며, 페르 라셰즈 묘지에 묻혔다. 파리의 보마르셰 대로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죽음 ===
보마르셰는 1796년 파리로 돌아와 여생을 비교적 평화롭게 보냈다. 1799년 5월 18일, 뇌졸중으로 추정되는 사인으로 편안히 잠들듯이 사망했다. 유해는 자택 정원에 묻혔다가 1822년에 페르 라셰즈 묘지로 이장되었다. 한때 그의 호화로운 저택이 있던 거리는 현재 보마르셰 대로로 알려져 있다.
2. 1. 탄생과 가계
피에르 오귀스탱 카롱(Pierre-Augustin Caron)은 1732년 1월 24일 파리 생 드니 거리에서 시계 제작자 앙드레 샤를 카롱(André-Charles Caron)의 아들로 태어났다.[3] 카롱 가문은 모(Meaux) 출신으로, 이전에는 위그노였으나 낭트 칙령 폐지 이후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했다.[3] 중산층으로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한 보마르셰는 음악에 관심을 가져 여러 악기를 연주했다.[3] 가톨릭 신자였지만,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동정심을 유지하며 시민권을 위해 활동했다.[3] 그의 누이 마리-조제프 카론(Marie-Josèphe Caron)은 화가가 되었고, 사촌은 화가 수잔 카론이었다.[4]보마르셰는 10세부터 "지방 학교"에서 라틴어를 배웠으나,[5] 2년 후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 밑에서 시계 제작 견습생으로 일했다.[5] 이 시기 경험은 훗날 《피가로의 결혼》의 체르빈 캐릭터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5] 그는 한때 아버지에게 쫓겨났지만, 뉘우치고 용서를 받아 다시 돌아왔다.
1753년, 21세의 보마르셰는 시계를 더 정확하고 작게 만들 수 있는 이탈장치를 발명했다.[6] 이 발명은 당시 시계 업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장-앙드레 르포트(Jean-André Lepaute)가 이 발명을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며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발표하면서 논란이 일었다.[7] 보마르셰는 이에 항의하며 자신의 발명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고,[9] 결국 1754년 아카데미는 보마르셰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사건으로 보마르셰는 명성을 얻고, 루이 15세의 "국왕의 조달자"로 임명되어 카롱 가문의 사업은 번창했다.[7] 특히 퐁파두르 부인을 위해 제작한 반지 시계는 궁중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7]
2. 2. 초기 생애: 시계공 시절
피에르 오귀스탱 카롱(Pierre-Augustin Caron)은 1732년 1월 24일 파리 생 드니 거리에서 시계 제작자 앙드레-샤를 카롱(André-Charles Caron)의 아들로 태어났다.[3] 카롱 가문은 위그노였으나 낭트 칙령 폐지 이후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했다.[3] 그는 음악에 관심을 갖고 여러 악기를 연주했으며, 누이 마리-조제프 카론(Marie-Josèphe Caron)은 화가가 되었다.[4]열 살 때부터 "지방 학교"에서 라틴어를 배웠으나,[5] 2년 후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 밑에서 시계 제작 기술을 배웠다.[5] 그는 희곡 《피가로의 결혼》의 체르빈 캐릭터를 창조할 때 이 시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을 수 있다.[5]
21세 때인 1753년 7월, 보마르셰는 시계를 더 정확하고 작게 만들 수 있는 이탈장치를 발명했다.[6] 그러나 프랑스 왕실 시계 제작자였던 장-앙드레 르포트(Jean-André Lepaute)가 이 발명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발표했다.[7] 보마르셰는 《르 메르퀴르 드 프랑스》에 자신의 발명임을 주장하는 항의 편지를 썼고,[9] "진실과 나의 명성을 위해" "나는 그러한 불성실함을 침묵 속에 넘길 수 없으며, 이 장치의 발명을 내 것으로 주장해야 한다"고 말했다.[9]
1754년 2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보마르셰의 주장을 인정했고, 이 사건은 파리에서 화제가 되었다. 보마르셰는 루이 15세의 정부 퐁파두르 부인을 위한 반지에 부착된 시계를 제작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7] 루이 15세는 그를 "국왕의 조달자"로 임명했다.[7]
2. 3. 궁정 생활과 결혼
파리에서 태어난 보마르셰는 1755년 과부 마들렌-카트린 오베르탱과 결혼하여 왕실 관직을 얻었으나, 결혼 직후 아내 소유의 토지인 "르 부아 마르셰"에서 따온 "피에르-오귀스탱 카롱 드 보마르셰"라는 귀족적인 이름으로 개명했다. 그러나 1년도 채 되지 않아 아내가 사망하고, 재정 문제와 빚에 시달렸다.보마르셰는 루이 15세의 네 딸에게 하프를 가르치면서 왕실 음악 고문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왕녀들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얻었던 것은, 당시 보마르셰가 일으킨 결투 사건의 전말에서도 분명하다. 어떤 귀족에게 모욕을 당하고 도발당한 보마르셰는, 당시 금지되었던 결투에 응하여, 상대에게 중상을 입혔다. 결투를 하는 것만으로도 중죄였지만, 만약 상대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왔을 경우, 복수나 처벌의 대상이 되므로, 그것을 두려워하여 왕녀들에게 비호를 요청했다. 왕녀들은 사정을 아버지인 국왕에게 이야기했고, 결투 사건에 관한 입막음 공작을 승낙했다.
1759년, 보마르셰는 부유한 사업가 조제프 파리 뒤베르네를 만나 에콜 밀리테르 건립에 대한 국왕의 승인을 얻도록 도왔고, 뒤베르네는 그 대가로 보마르셰를 부유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뒤베르네의 도움으로 1760-61년에 국왕 비서-고문관 칭호를 얻어 귀족이 되었고, 1763년에는 왕립 공원을 감독하는 사냥 부국장 직책을 얻었다.
1761년 12월, 보마르셰는 뒤베르네에게 빌린 55000리브르에, 소지하고 있던 30000리브르를 더하여, "국왕 비서관"이라는 직함을 구입했다. 이 직함은 "평민의 화장 비누"라고 불리며 멸시받았지만, 틀림없이 돈이 되는 직함이었고, 게다가 구입자의 신분이 어떠하든 정식으로 귀족으로 인정받는 직업이었다. 게다가 1762년에 들어서자, 당시 프랑스를 18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관할하고 있던 "산림 수자원 보호 장관" 중 하나에 공석이 생겼다. 거액의 수입을 가져다주는 자리였고, 그만큼 가격도 높았지만(현재 일본 엔화로 5000만 엔 전후), 뒤베르네는 아낌없이 이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했다. 이때는 다른 장관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혀, 왕녀들의 지원도 헛되이 얻을 수 없었지만, 그 대신 이듬해에 "루브르 사냥터 왕실 영지 관리 및 국왕 대관구의 사냥 총대관"이라는 직함을 얻었다. 왕실의 영지를 관리하고, 밀렵꾼이 있으면 체포하여 재판하는 것이 임무이다.
2. 4. 스페인 체류
1764년 4월, 보마르셰는 여동생 리제트가 약혼자였던 클라비호에게 버려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드리드에 10개월 동안 머물렀다. 클라비호는 전쟁부 관리였다.[10] 보마르셰는 쇼아젤 공작의 소개장을 가지고 마드리드로 갔으며, 클라비호가 리제트와 결혼하도록 압박했지만, 클라비호의 행동에 대한 추가적인 세부 사항이 드러나면서 결혼은 취소되었다.[10]보마르셰의 누나 마리 루이즈는 1748년 석공 루이 길베르와 결혼하여 마드리드로 이주한 맏누나 마리 조제프를 따라 스페인으로 갔다. 마리 루이즈는 그곳에서 군수성에 근무하던 클라비호와 결혼을 약속했지만, 언니의 충고로 결혼을 미루고 있었다. 클라비호는 문예지를 창간하고 스페인 왕실 고문서 관리관으로 임명되는 등 순조롭게 출세했다. 결혼 약속 후 6년이 지나 마리 조제프는 클라비호에게 결혼 약속 이행을 종용했지만, 클라비호는 쉽게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클라비호는 결혼식 당일과 3일 전에 두 번이나 실종되었다.
보마르셰는 『1764년, 스페인 여행기 단장』에서 누나의 명예 회복을 위해 즉시 스페인으로 달려갔다고 묘사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보마르셰는 4월 7일에 국왕에게 스페인 방문 허가를 받았고, 5월 18일에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이는 보마르셰가 누나의 문제뿐만 아니라 프랑스-스페인 간의 통상 문제 해결이라는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마드리드에 도착한 보마르셰는 클라비호를 만나 사과문을 받아냈지만, 클라비호는 "총으로 협박당해 결혼을 강요당했다"고 스페인 재상에게 호소했다. 보마르셰는 결백을 주장하여 클라비호의 공직 추방이라는 역전 승리를 거두었다.
스페인에 있는 동안 보마르셰는 뒤베르네를 위한 사업 거래에도 관여했다. 그들은 새로 획득한 스페인 식민지인 루이지애나에 대한 독점 계약을 모색했고, 아메리카 대륙의 스페인 식민지에 노예를 수입할 권리를 얻으려고 시도했다. 보마르셰는 스페인 사교계의 유력자였던 푸엔 클라라 후작 부인, 라크루아 부인 등을 만나 스페인 주재 영국 대사 및 스페인 재상의 지우를 얻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라크루아 부인이 국왕 카를로스 3세의 정부가 되면서 보마르셰의 사업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보마르셰는 스페인의 분위기를 만끽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이는 그의 후기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외무 장관인 그리말디 공작과 같은 중요한 인물들과 친분을 맺었지만, 뒤베르네를 위한 계약을 확보하려는 그의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1765년 3월에 귀국했다. 보마르셰는 이 사건을 연극으로 만들려고 생각했지만, 1774년에 ''클라비고''를 쓴 괴테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기로 결정했다.
2. 5. 극작가로서의 성공
보마르셰는 이미 사적인 관객을 위한 짧은 익살극을 쓰는 실험을 해 본 적이 있었지만, 코미디 프랑세즈에서 1767년 초연된 ''외제니''[10]를 통해 극작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770년에는 또 다른 드라마 ''두 친구 또는 리옹의 상인/Les Deux Amis ou le Négociant de Lyon프랑스어''[10]을 발표했다. 그러나, 『두 친구』는 상황 설정에 무리가 있는 줄거리로 인해 대실패로 끝났고, "궁정에서 직책을 사거나 허세를 부리거나 서투른 연극을 쓰는 것보다, 좋은 시계를 제작하는 것이 훨씬 낫다"라는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이후 보마르셰는 순수한 시민극을 쓰는 일은 없어졌지만, 그 미학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이론면에서 디드로의 계승자인 보마르셰는 스페인 시민 계급을 주제로 당시의 특권 계급을 풍자한 2대 희곡 《세비야의 이발사》, 《피가로의 결혼》으로 유명하다. 특히, 《피가로의 결혼》은 보마르셰의 최대 후원자였던 콩데 대공의 요청에 따라 제작된 작품으로, 1778년에 완성되었다. 1781년, 오페라 코미크에 관객을 빼앗겨 흥행 부진에 시달리던 코미디 프랑세즈는 《피가로의 결혼》을 상연 작품으로 수락했고, 보마르셰는 경찰청의 검열을 통과하여 정식 상연 허가를 얻었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작품을 낭독하게 하고, "이건 혐오스러운 것이다. 절대로 상연을 허락할 수 없다."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국왕은 《피가로의 결혼》이 정부의 모든 존경받는 것들을 조롱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바스티유 감옥을 파괴하기 전에는 상연을 허락할 수 없다고 말했다. 많은 귀족들이 《피가로의 결혼》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고 상연을 지지했던 것과 달리, 루이 16세는 작품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상연 금지를 명령한 것이다.
《피가로의 결혼》 상연 및 출판 금지는 오히려 파리 사람들의 관심을 자극했고, 보마르셰는 낭독회를 통해 국왕에 대한 저항을 이어갔다. 1783년, 아르투아 백작의 압력으로 므뉘 플레지르 극장에서의 상연이 결정되었으나, 막이 오르기 직전 국왕의 상연 금지 결정이 내려졌다. 하지만 귀족들의 반발로 인해 결국 보드뢰유 백작의 별장에서 300명의 귀족 앞에서 상연이 허가되었다.
보마르셰는 작품의 건전성을 증명하기 위해 네 번이나 검열을 신청하고, "문학 법정"을 개최하는 등 노력했다. 결국 루이 16세도 굴복하여 1784년 4월 27일, 《피가로의 결혼》은 초연되었고, 파리 시민들이 모두 몰려온 듯한 대성공을 거두었다.
1785년 3월, 보마르셰는 프랑스 일간지 《주르날 드 파리》에 게재된 익명의 기사에 대한 답변을 보내면서 필화 사건을 일으켰다. 그는 "극 공연을 실현하기 위해 사자나 호랑이를 물리쳐야 했던 내가…"라는 구절에서 '사자나 호랑이'를 루이 16세와 왕비에 대한 비유로 해석한 국왕에 의해 생-라자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5일 후 석방되었지만, 보마르셰는 국왕에게 명예 회복을 위한 조건을 제시했고, 국왕은 《세비야의 이발사》 연기, 80만 리브르의 배상 등 요구를 뛰어넘는 배상을 했다.
2. 6. 법정 투쟁
피에르 보마르셰는 1770년 사망한 파리-뒤베르네의 유산 상속 문제로 뒤베르네의 유일한 상속자인 라 블라슈 백작과 법정 투쟁을 벌였다.[11] 라 블라슈 백작은 보마르셰와 뒤베르네 사이에 체결된 계약서가 위조되었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11] 1772년 1심에서는 보마르셰가 승소했지만,[11] 이듬해 항소심에서 뇌물을 주려다 실패한 고에즈만 판사에 의해 판결이 뒤집혔다.[11]보마르셰는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고에즈만 반박 메모》(Mémoires contre Goezman)라는 4부작 소책자를 출판했다.[14] 이 사건으로 보마르셰는 사회 정의와 자유의 옹호자로 여겨지며 유명 인사가 되었다.[14] 고에즈만은 보마르셰의 고발에 맞서 소송을 제기했고, 1774년 2월 26일, 보마르셰와 고에즈만 부인 모두 "비난"(blâme)을 선고받아 민권을 박탈당했다.[11] 고에즈만 판사는 직위에서 해임되었고, 라 블라슈 사건에서 고에즈만의 판결은 뒤집혔다.[11]
1778년 7월, 엑상프로방스 재심 법정은 보마르셰의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10년 가까이 이어진 라 브라슈 백작과의 법정 투쟁은 막을 내렸다.
보마르셰는 시농의 삼림 개발 사업에도 참여했는데, 이 과정에서 하인 르슈르와의 법적 분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르슈르는 보마르셰를 협박하고 삼림 개발 이권을 가로채려 했으나, 보마르셰는 결국 르슈르를 굴복시키고 삼림 개발권을 되찾았다.
2. 7. 미국 독립 전쟁 지원
보마르셰는 프랑스가 1778년에 공식적으로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하기 전부터 프랑스 무기, 자금, 물품을 미국 육군에 전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15][2] 그는 반군에게 비밀리에 원조를 제공하기 위해 로드리그 오르탈레즈 앤 컴퍼니라는 가상의 사업체를 설립했다.[2]보마르셰는 시민권을 회복하기 위해 루이 15세에게 헌신할 것을 약속하고, 여러 비밀 임무를 수행하며 런던, 암스테르담, 빈을 여행했다. 1775년에는 영국군과 미국 반군 사이에 렉싱턴 콩코드 전투가 벌어졌고, 보마르셰는 프랑스 정부에 반란에 대한 주요 정보원이 되었다.[11]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공개적으로 관계를 끊고 싶어하지 않았던 루이 16세는 보마르셰가 프랑스와 스페인 왕실의 지원을 받아 미국 반군에게 무기, 탄약, 의류, 식량을 공급하는 상업 기업 로드리그 오르탈레즈 앤 컴퍼니를 설립하도록 허용했다.[11] 1776년 8월 18일, 보마르셰는 비밀 서신 위원회에 편지를 보내 무기 지원을 약속했다.[2] 이 정책은 1777년 사라토가 전투에서 존 버고인의 군대가 보마르셰가 보낸 물품으로 무장한 반군에게 항복하면서 결실을 맺었다.[2]
보마르셰는 제2차 대륙 회의에서 비밀 서신 위원회의 일원이었던 사일러스 딘과 거래했다.[11] 1778년, 프랑스 정부가 우호 통상 조약과 동맹 조약에 동의하면서 프랑스는 미국 독립 전쟁에 공식적으로 참전했다.
보마르셰는 미국 독립 전쟁 발발 당시 영국에 머무르며, 프레데릭 노스등과 교류하며 미국 독립 전쟁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그는 "프랑스는 미국을 극비리에 지원해야 한다"는 생각에 도달하여 루이 16세와 외무 대신 베르젠에게 미국 지원을 설득하는 편지를 보냈다.
프랑스 정부는 미국 반란군을 지원하고 싶었지만, 영국을 자극하는 것은 위험했기에 정부 차원의 지원이 아닌, 개인적 투기로 보이도록 했다. 보마르셰는 1775년 10월, "로드리게스 오르탈레스 상회"를 설립하여 배와 무기, 탄약, 의용군 모집에 힘썼다.
보마르셰는 사일러스 딘, 벤자민 프랭클린과의 거래에서 실수를 저질렀지만, 프랑스 정부의 추가 융자로 파멸을 면했다. 1778년 2월 6일, 프랑스는 프랑스-미국 동맹 조약을 체결하고 영국과 전쟁 상태에 돌입, 보마르셰의 상사는 순수한 민간 업자가 되었다. 그는 미국 신정부와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하고, 1779년 1월에는 미국 의회의 감사장을 받았다.
2. 8. 볼테르 전집 출판
볼테르가 1778년 사망한 직후, 보마르셰는 프랑스에서 금지된 볼테르의 완전 작품을 출판하기 시작했다.[17] 1779년 2월, 샤를-조제프 팡쿠크(Charles-Joseph Panckoucke)로부터 볼테르의 많은 원고에 대한 권리를 구매했다.[17] 프랑스 검열을 피하기 위해 인근 독일의 켈 문학 인쇄 협회(Société littéraire typographique de Kehl)를 설립했다.[17] 존 바스커빌(John Baskerville)의 미망인으로부터 활자 주조소를 구매했고 세 개의 제지 공장도 매입하여, 70권의 전집을 1783년에서 1790년 사이에 출판했다.[17]2. 9. 프랑스 혁명과 망명
보마르셰는 프랑스 혁명 발발 초기에는 혁명을 지지했지만, 혁명의 과격함이 자유를 위협한다고 판단하여 거리를 두었다.[18] 그는 파리에 식수 공급 사업을 통해 재정적으로 성공했고, 1791년에는 바스티유 감옥 맞은편에 호화로운 저택을 지었다.[18] 그러나 이 저택은 구체제의 상징으로 여겨져 민중들의 반감을 샀고, 1792년 8월에는 민중들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18]보마르셰는 프랑스 혁명군을 위해 네덜란드에서 소총 6만 정을 구매하려 했으나, 계약을 완료하지 못했다.[18] 이 거래는 벨기에 브라반트 혁명 당시 몰수된 소총을 처분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는데, 보마르셰는 프랑스 정부와 협상을 통해 구매를 추진했다.[18] 그러나 각국의 이해관계와 정보 누출, 프랑스 정부 내부의 방해 등으로 인해 거래는 난항을 겪었다.
1792년, 보마르셰는 소총을 숨겨두고 있다는 모함을 받아 체포되었으나, 애인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18] 이후 영국과 네덜란드를 오가며 소총 구매를 위해 노력했지만, 프랑스 정부의 비협조와 방해로 인해 실패했다. 결국 보마르셰는 1794년 망명자 명단에 올라 재산을 몰수당하고 프랑스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18]
1796년 망명자 명단에서 삭제된 후 파리로 돌아와 여생을 비교적 평화롭게 보냈으며, 페르 라셰즈 묘지에 묻혔다.[18] 파리의 보마르셰 대로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2. 10. 죽음
보마르셰는 1796년 파리로 돌아와 여생을 비교적 평화롭게 보냈다. 1799년 5월 18일, 뇌졸중으로 추정되는 사인으로 편안히 잠들듯이 사망했다. 유해는 자택 정원에 묻혔다가 1822년에 페르 라셰즈 묘지로 이장되었다. 한때 그의 호화로운 저택이 있던 거리는 현재 보마르셰 대로로 알려져 있다.3. 작품 세계
그는 극작가로서의 첫걸음을 정극 <외제니>(''Eugenie'') (1767년)로 출발했다.[10] 이 작품의 서론 '성실한 극에 관해서의 시론' 가운데에서 그는 디드로의 계승자로서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으나, 이론의 표현에 생생한 빛깔을 더했다는 정도로 내용적으로는 별다른 발전이 없고 작품도 성공하지 못했다.
다음의 <두 벗>(Les Deux amis)은 상업극(商業劇)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지불기일이라든가 어음 할인이라든가 하는 극장 안에서는 별로 들어보지 못한 말이 뒤섞인 복잡한 삽화가 특히 여성관객의 흥미를 상실케 하고 말았다. 19세기 후반에 오지에와 베크가 무대에서 다루었던 이러한 금전문제는 가장 부르주아적인 주제의 하나이면서 당시로는 아직 시기가 빨랐던 것이다.
이 두 작품의 실패는 그로 하여금 당분간 극작에서 떠나게 했으며, 1775년에 이르러 4막의 희극 세비야의 이발사, 1784년에 5막희극 <피가로의 결혼>이라는 18세기 희극작품을 낳았다. 여기에서도 역시 시대풍조라고 할 수 있는 센티멘털리즘을 볼 수 있다. 사생아 피가로가 우연히 친어머니와 만나 그것이 계기가 되어 부모가 정식으로 결혼한다는 줄거리는 관객의 눈물을 노린 것이며, 도덕적 설교는 없다 해도 모자간을 시민적 질서라는 관념에서 다룬 것이었다. 또한 이 작품에서는 한 하인인 피가로와 그의 애인 스잔이 극히 주역이며 주인인 알마비바 백작을 농락하면서 귀족계급의 부패나 현 정체(政體)의 부정을 폭로하는 작가의 자세는 혁명 직전의 시민극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그는 이 두 작품의 속편으로서 산문 5막의 <죄를 진 어머니>를 써서 3부작을 이루었으나 이는 희극이 아니라 정극(正劇)의 장르에 들어간다. 발표 당시는 성공을 했으나 앞의 두 작품보다는 훨씬 생기가 빈약하고 연설투의 결함이 두드러져 오늘날에 와서는 상연되지 않고 있다.
1760년대 – 개인 공연을 위한 다양한 1막 희극(파라데).[10]
- ''레 데퓌테 드 라 알르 에 뒤 그로-카유''
- ''콜랭 에 콜레트''
- ''레 보트 드 세 프 리유''
- ''장 베트 아 라 푸아르''
- ''외유 푸르 외유''
- ''로레트''
- 1765(?) – 세비야의 이발사(''Le Barbier de Séville'')의 전조, 간주곡 ''르 사크리스탱''
- 1767 – 외제니(Eugénie), 드라마, 코미디 프랑세즈에서 초연.[10]
- 1767 – ''드라마적 진지함에 대한 에세이''(L'Essai sur le genre dramatique sérieux).[10]
- 1770 – ''Les Deux amis ou le Négociant de Lyon/Les deux amisde'', 드라마, 코미디 프랑세즈에서 초연
- 1773 – 세비야의 이발사 (Le Barbier de Séville ou la Précaution inutile), 희극, 1775년 1월 3일 코미디 프랑세즈에서 초연
- 1774 – ''고즈만 반박 회고록''(Mémoires contre Goezman)
- 1775 – ''세비야의 이발사 비평과 실패에 대한 절제된 서한''(La Lettre modérée sur la chute et la critique du "Barbier de Sérville")
- 1778 – 미친 하루(La Folle journée) 또는 피가로의 결혼, 희극, 1784년 4월 27일 코미디 프랑세즈에서 초연
- 1784 – ''피가로의 결혼 서문''(Préface du mariage de Figaro)
- 1787 – 타라르(Tarare),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음악, 파리 오페라에서 초연
- 1792 – 죄 지은 어머니(La Mère coupable) 또는 또 다른 타르튀프, 드라마, 마레 극장에서 6월 26일 초연
- 1799 – ''볼테르와 예수 그리스도''(Voltaire et Jésus-Christ), 두 편의 기사.[10]
- 우제니 - ''Eugénie'' - 1767년
- 두 친구, 또는 리옹의 상인 - ''Les Deux Amis ou le Négociant de Lyon'' - 1770년
- 세비야의 이발사 - ''Le Barbier de Séville ou la précaution inutile프랑스어'' - 1775년
- 피가로의 결혼 - ''La Folle journée ou Le Mariage de Figaro프랑스어'' - 1784년
- 타라르 - ''Tarare'' - 1787년
- 죄 많은 어머니 - ''L'Autre Tartuffe ou la Mère coupable프랑스어'' - 1792년
3. 1. 초기 작품: 《외제니》, 《두 친구》
보마르셰는 극작가로서 정극 《외제니(Eugénie)》(1767)로 출발했다.[10] 이 작품의 서론 '성실한 극에 관해서의 시론'에서 그는 디드로의 계승자임을 자처했으나, 이론을 생생하게 표현했을 뿐 내용상으로는 큰 발전이 없었고 작품도 성공하지 못했다.다음 작품인 《두 친구/Les Deux Amis ou le Négociant de Lyon}}프랑스어》(1770)는 상업극으로, 지불 기일이나 어음 할인 등 생소한 용어가 섞인 복잡한 삽화가 여성 관객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19세기 후반 오지에와 베크가 다루었던 금전 문제는 부르주아적인 주제였으나 당시로서는 시기상조였다.
이 두 작품의 실패로 보마르셰는 당분간 극작에서 떠나게 되었지만, 이후 순수한 시민극을 쓰는 일은 없어졌지만, 그 미학을 포기한 것은 아니라는 점은 피가로 3부작을 통해 나타난다.
3. 2. 피가로 3부작: 《세비야의 이발사》, 《피가로의 결혼》, 《죄 지은 어머니》
보마르셰는 극작가로서 정극 《외제니(Eugénie)》(1767)로 출발하였으나, 디드로의 계승자로서 이론을 표현했을 뿐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10] 이후 상업극 《두 벗(Les Deux amis)》을 발표했으나, 당시로서는 시기상조였던 금전 문제를 다루어 실패했다.이러한 실패를 딛고 1775년 4막 희극 《세비야의 이발사》, 1784년 5막 희극 《피가로의 결혼》을 발표하며 18세기 희극 작품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12] 이 작품들에서는 사생아 피가로가 우연히 친어머니를 만나고, 그의 애인 스잔과 함께 주인인 알마비바 백작을 농락하며 귀족 계급의 부패와 현 정치 체제의 부정을 폭로하는 등 혁명 직전 시민극의 모습을 보여주었다.[11]

보마르셰의 피가로 극은 《세비야의 이발사》, 《피가로의 결혼》, 《죄 지은 어머니》 3부작으로 구성된다. 피가로와 알마비바 백작(이후 백작 부인이 되는 로진 포함)은 세 작품 모두에 등장하며, 프랑스 혁명 전후 사회 변화를 반영한다.[11] 《세비야의 이발사》는 1775년 파리 초연 후 런던에서 영어 번역본으로 공연되었고, 유럽 각국에서 인기를 얻었다.[12] 속편인 《피가로의 결혼》은 1781년 검열을 통과했으나 루이 16세에 의해 공연이 금지되었다가, 1784년에 금지가 해제되어 초연되었다.[12][13]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이 희곡의 공연 금지를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보마르셰의 마지막 극인 《죄 지은 어머니》는 1792년 파리에서 초연되었으며, 몰리에르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또 다른 타르튀프"라고 불렸다.
피가로 3부작은 모두 큰 성공을 거두었고, 오늘날에도 극장과 오페라 하우스에서 자주 공연된다. 특히 《피가로의 결혼》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오페라)》으로 각색하여 1786년 빈에서 초연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12][13] 조아키노 로시니의 1816년 버전 또한 현재까지 자주 공연되는 성공작이다.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오페라 《타라레》의 대본을 맡기도 했다.
3. 3. 기타 작품
보마르셰는 극작가로서 첫걸음을 정극 《외제니(Eugénie)》(1767)로 시작했다.[10] 이 작품의 서론 '성실한 극에 관해서의 시론'에서 디드로의 계승자임을 밝혔으나, 작품은 성공하지 못했다. 다음 작품인 《두 벗(Les Deux amis)》은 상업극으로, 당시에는 생소한 금전 문제를 다루어 여성 관객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이 두 작품의 실패 후, 보마르셰는 1775년 4막 희극 《세비야의 이발사》, 1784년 5막 희극 《피가로의 결혼》을 발표했다. 이 작품들에는 시대적 유행인 센티멘털리즘이 나타난다. 사생아 피가로가 우연히 친어머니를 만나 부모가 정식 결혼하는 줄거리는 관객의 눈물을 자아냈으며, 시민적 질서를 다루었다. 하인 피가로와 그의 연인 스잔이 주인 알마비바 백작을 농락하며 귀족 계급의 부패와 현 정치 체제의 부정을 폭로하는 내용은 혁명 직전 시민극과 유사하다.
이 두 작품의 속편으로 산문 5막극 《죄 지은 어머니》를 써서 3부작을 완성했으나, 희극이 아닌 정극으로, 발표 당시에는 성공했지만 생기가 부족하고 연설투의 결함이 있어 현재는 상연되지 않는다.
그는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오페라 《타라르》(1787)의 대본을 쓰기도 했다.[10]
1760년대에는 개인 공연을 위한 다양한 1막 희극(파라데)을 썼다.[10]
- ''레 데퓌테 드 라 알르 에 뒤 그로-카유''
- ''콜랭 에 콜레트''
- ''레 보트 드 세 프 리유''
- ''장 베트 아 라 푸아르''
- ''외유 푸르 외유''
- ''로레트''
1765년(?)에는 《세비야의 이발사》의 전조가 되는 간주곡 ''르 사크리스탱''을 썼다.
4. 저작권 옹호 활동
18세기 프랑스에서는 저작권 개념이 확립되지 않아 극작가들은 불합리한 대우를 받았다. 보마르셰는 이러한 현실에 맞서 싸운 선구자였다. 17세기 초부터 극작가들은 극단의 요구에 따라 작품을 쓰고, 작품은 극단의 재산으로 귀속되는 불평등한 계약을 맺었다. 몰리에르도 이러한 관습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1653년 필리프 키노가 처음으로 흥행 수입의 일부를 받는 계약을 맺었고, 1685년 다른 작가들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러나 '상연 불가능한 작품이 재상연될 경우 수입은 극단 소유'라는 조항이 있었고, 이후 '하계 300리브르, 동계 500리브르 이하 수입이 2번 계속되면 실패작으로 간주'하는 조항으로 개정되었다.
1757년 코미디 프랑세즈는 이 기준을 '하계 800리브르, 동계 1200리브르'로 무단 변경하고, 작가에게 불리한 관행을 강요했다. '빈자에게 4분의 1세'를 작가에게 전가하거나, 객석 예약 수입을 독점하고, 의도적으로 상연을 중단 후 재상연하여 수입을 가로채는 등의 행태를 보였다. 롱베 드 라 소세라는 극작가는 작품이 성공했음에도 빚을 졌다고 통보받고 항의 문서를 발표했다.
1775년 《세비야의 이발사》 초연이 대실패 후 재상연으로 성공했지만, 코메디 프랑세즈는 보마르셰에게도 부당한 방식으로 대했다. 보마르셰는 정확한 수지 계산을 요구하며 극단과 갈등했다. 극단은 위원회를 구성하는 척하며 시간을 끌었고, 보마르셰는 법적 대응을 경고했다.
1777년, 뒤라스 공작의 중재 제안으로 보마르셰는 극작가들을 모아 극작가 협회를 설립했다. 이는 코미디 프랑세즈와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1780년 루이 16세가 직접 해결에 나섰지만, 실패작 기준이 상향 조정되어 극작가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 1791년 헌법 제정 국민 의회는 코미디 프랑세즈의 특권을 폐지하고 극작가의 권리를 인정했다. 보마르셰의 투쟁은 이러한 변화에 간접적으로 기여했다.
5. 논란과 비판
《피가로의 결혼》 공연과 관련하여, 한때 국왕으로부터 금지 명령을 받았으나 이를 철회시키고 성공적으로 공연을 성사시킨 보마르셰는 그야말로 인생의 절정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수도 사업과, 얼굴조차 모르는 여성 문제에 의협심으로 개입하면서 발목이 잡히게 되어, 그의 영광에도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이러한 문제들을 계기로 흐려지기 시작한 그의 영광은 프랑스 혁명의 발발로 완전히 종지부를 찍게 된다.
보마르셰는 세 번 결혼했다. 1756년 11월 22일, 마들렌-카트린 프랑케(결혼 전 성은 오베르탱)와 첫 번째 결혼을 했으나, 그녀는 10개월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1768년에는 제네비에브-마들렌 레베크(결혼 전 성은 와트블레)와 재혼했지만, 두 번째 부인 역시 2년 후 사망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녀가 결핵을 앓았다고 추정한다. 1770년 레베크가 사망하기 전 아들 오귀스탱을 낳았으나, 아이는 1772년에 사망했다. 1786년, 보마르셰는 12년간 연인 관계였던 마리-테레즈 드 빌레-몰라즈와 세 번째 결혼을 했고, 딸 외제니를 낳았다.
보마르셰는 평생 동안 여러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으며, 그의 적들은 그가 첫 두 부인의 유산을 노리고 독살했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는 충분하지 않지만, 독살 여부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그의 절친이 남긴 전기에 따르면, 보마르셰는 베르사유 궁전에 알현했을 때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자유분방하고 젊음이 넘치는 성격으로 수많은 열정을 품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5. 1. 여성 편력과 결혼
보마르셰는 세 번 결혼했다. 1756년 11월 22일, 마들렌-카트린 프랑케(결혼 전 성은 오베르탱)와 첫 번째 결혼을 했으나, 그녀는 10개월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1768년에는 제네비에브-마들렌 레베크(결혼 전 성은 와트블레)와 재혼했지만, 두 번째 부인 역시 2년 후 사망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녀가 결핵을 앓았다고 추정한다. 1770년 레베크가 사망하기 전 아들 오귀스탱을 낳았으나, 아이는 1772년에 사망했다. 1786년, 보마르셰는 12년간 연인 관계였던 마리-테레즈 드 빌레-몰라즈와 세 번째 결혼을 했고, 딸 외제니를 낳았다.보마르셰는 평생 동안 여러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으며, 그의 적들은 그가 첫 두 부인의 유산을 노리고 독살했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는 충분하지 않지만, 독살 여부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그의 절친이 남긴 전기에 따르면, 보마르셰는 베르사유 궁전에 알현했을 때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자유분방하고 젊음이 넘치는 성격으로 수많은 열정을 품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5. 2. 귀족 신분 획득과 재산 축적
5. 3. 정치적 입장과 혁명 참여
루이 클로사드(Louis Clausade프랑스어)의 보마르셰 동상(1895)이 파리 4구에 있다.
보마르셰는 1787년 간통 혐의로 기소된 코른만 부인을 옹호하다가 법정 갈등을 겪었다. 코른만 부인의 남편은 지참금 몰수를 위해 소송을 제기했고, 보마르셰는 코른만 부인 편에 섰다. 코른만 씨는 변호사 니콜라 베르가스의 도움을 받았다.[18] 1790년 4월 2일, 코른만 씨와 베르가스는 중상 모략(명예 훼손)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보마르셰의 명성도 함께 훼손되었다.
프랑스 혁명 발발 이후, 보마르셰는 혁명의 과격함이 자유를 위협한다고 여겼다. 그는 파리 식수 공급 사업으로 재정적 성공을 거두었고, 프랑스 귀족 지위를 얻었다. 1791년에는 바스티유 감옥 건너편에 호화 저택을 마련하기도 했다. 1792년 8월, 정부 비판 혐의로 잠시 투옥되었다가 9월 학살 직전에 풀려났다.
이러한 상황에도 보마르셰는 새로운 공화국에 헌신할 것을 약속했다. 그는 프랑스 혁명군을 위해 네덜란드에서 소총 6만 정을 구매하려 했으나, 계약을 성사시키지는 못했다.
6. 유산과 영향
6. 1. 문학적 유산
보마르셰의 희곡들은 여러 예술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피가로는 전형적인 인물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보마르셰의 스페인 경험을 바탕으로 비극 ''클라비고(Clavigo)''(1774)를 썼다. 조반니 파이지엘로는 주세페 페트로셀리니의 대본을 바탕으로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혹은 쓸데없는 예방책(Il barbiere di Siviglia, ovvero La precauzione inutile)''(1782)을 작곡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로렌초 다 폰테의 대본을 바탕으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1786)을 작곡했다. 안톤 토마즈 린하르트는 ''피가로의 결혼(Le Mariage de Figaro)''을 각색한 연극 ''타 베셀리 단 알리 마티체크 세 제니''(Ta veseli dan ali Matiček se ženi) (1790)를 썼다.
니콜라 이수아르는 1796년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Il barbiere di Siviglia)를 작곡했고, 마르코스 포르투갈은 가에타노 로시의 대본으로 오페라 ''라 파차 조르나타, 오베로 일 마트리모니오 디 피가로''(La pazza giornata, ovvero Il matrimonio di Figaro) (1799)를 작곡했다. 조아키노 로시니는 체사레 스테르비니의 대본으로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Il barbiere di Siviglia)''(1816)를 작곡했다.
오노레-앙투안 리쇼 마르텔리의 연극 ''두 피가로 혹은 코미디의 주제''(Les deux Figaro ou Le sujet de comédie)는 미켈레 카라파와 사베리오 메르카단테에 의해 오페라 ''이 두 피가로, 혹은 코미디의 주제''(I due Figaro o sia Il soggetto di una commedia) (각각 1820년, 1835년)로 만들어졌다. 쥘 마스네는 프란시스 드 크루아세와 앙리 카앵의 대본으로 오페라 ''셰루뱅(Chérubin)''(1905)을 작곡했다.
리온 포이히트방거는 1776년 파리를 배경으로 보마르셰와 벤자민 프랭클린을 다룬 소설 ''포도원 속의 여우들''(Die Füchse im Weinberg) (1947/48)을 썼다. 사샤 기트리는 코미디 ''보마르셰''(Beaumarchais) (1950)를 썼다. 다리우스 미요는 마들렌 밀로의 대본으로 오페라 ''죄 지은 어머니(La mère coupable)''(1966)를 작곡했다. 존 코릴리아노는 윌리엄 M. 호프만의 대본으로 ''죄 지은 어머니''를 기반으로 한 오페라 ''베르사유의 유령(The Ghosts of Versailles)''(1991)을 작곡했으며, 보마르셰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주요 등장인물이다. 잉에르 빅스트룀은 미카엘 힐린sv과 함께 대본을 쓰고 오페라 ''덴 브로틀리가 모던''(Den brottsliga modern) (1991)을 작곡했다.
에두아르 몰리나로 감독은 사샤 기트리의 연극을 바탕으로 영화 ''보마르셰 랑솔렁(Beaumarchais l'insolent)''(1996)을 제작했다. 헨리 굿먼이 출연한 보마르셰의 삶을 바탕으로 한 6부작 라디오 시리즈 ''보마르셰(Beaumarchais)''는 1996년 BBC 라디오 4에서 방송되었다.
6. 2. 사회적, 정치적 영향
6. 3. 한국에서의 수용
보마르셰의 작품은 여러 형태로 한국에 소개되어 수용되었다. 그의 희곡들은 번역되어 출판되거나 연극, 오페라 등으로 각색되어 공연되었다.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보마르셰의 스페인 경험에서 영감을 받아 비극 ''클라비고''(1774)를 썼다. 보마르셰의 희곡 ''세비야의 이발사''와 ''피가로의 결혼''은 여러 작곡가에 의해 오페라로 만들어졌다. 대표적으로 조반니 파이지엘로(1782),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86), 조아키노 로시니(1816)의 오페라가 있다. 특히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은 로렌초 다 폰테의 대본으로 유명하다.
안톤 토마즈 린하르트는 ''피가로의 결혼''을 각색하여 ''타 베셀리 단 알리 마티체크 세 제니''(1790)라는 연극을 만들었다. 리온 포이히트방거는 소설 ''포도원 속의 여우들''(1947/48)에서 보마르셰와 벤자민 프랭클린의 만남을 다루었다.
보마르셰의 마지막 희곡 ''죄 지은 어머니'' 역시 다리우스 미요(1966) 등에 의해 오페라로 만들어졌다. 존 코릴리아노의 오페라 ''베르사유의 유령(1991)''에서는 보마르셰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주요 등장인물로 나타난다. 1996년에는 에두아르 몰리나로 감독이 사샤 기트리의 희곡을 바탕으로 영화 ''보마르셰 랑솔렁''을 제작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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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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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The Parl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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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édition Kehl de Voltaire: une aventure éditoriale et littéraire au tournant des Lumières
Honoré Champion édite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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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volutionary Temper
W. W. Norton & Company, I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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