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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키 히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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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핑키 히긴스는 1930년대와 1940년대에 활약한 미국의 야구 선수이자 감독, 단장이다. 선수 시절에는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보스턴 레드삭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등에서 3루수로 뛰며 세 번의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1938년에는 메이저 리그 신기록인 12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기도 했다. 감독으로는 보스턴 레드삭스를 1955년부터 1959년까지, 1960년부터 1962년까지 두 차례 이끌었고, 단장으로도 활동했다. 1968년 음주 운전으로 체포되었고, 가석방된 다음 날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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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키 히긴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마이클 프랭클린 "핑키" 히긴스
원어 이름Michael Franklin "Pinky" Higgins
1934년 야구 카드에 담긴 핑크 히긴스
1934년 야구 카드에 담긴 핑크 히긴스
출생일1909년 5월 27일
출생지미국 텍사스주 레드오크
사망일1969년 3월 21일
사망지미국 텍사스주 댈러스
신장185 cm
체중83 kg
타석우타
투구우투
포지션3루수 / 감독
선수 경력
첫 출장 (MLB)1930년 6월 25일
마지막 경기 (MLB)1946년 9월 29일
선수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1930, 1933~1936)
보스턴 레드삭스 (1937~1938, 1946)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1939~1944, 1946)
감독보스턴 레드삭스 (1955~1959, 1960~1962)
통계 (MLB)
타율0.292
홈런140
타점1,075
감독 기록560승 556패
승률0.502
수상
올스타3회 (1934, 1936, 1944)

2. 선수 경력

핑키 히긴스는 텍사스주 레드 오크 출신으로, 댈러스의 W. H. 애덤슨 고등학교와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을 거쳐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30년 6월 25일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으나, 본격적으로 주전 선수로 활약한 것은 1933년부터였다. 애슬레틱스 시절부터 리그 정상급 3루수로 평가받았으며, 특히 1933년과 1934년에는 뛰어난 타율을 기록했다.

1938년, 동료 3루수 빌리 워버와 트레이드되어 보스턴 레드삭스로 이적했고, 이적 후 첫 두 시즌(1937년 애슬레틱스, 1938년 레드삭스) 동안 .300 이상의 타율과 개인 통산 한 시즌 최다인 106타점을 기록하는 등 꾸준한 활약을 이어갔다. 이후 잠수함 투수 엘든 오커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로 팀을 옮겼다. 타이거스에서는 이전보다 타격 성적이 다소 하락했지만, 여전히 준수한 파워를 보여주었다.

선수 생활 말년인 1946년 시즌 중반, 히긴스는 다시 보스턴 레드삭스로 돌아왔다. 그해 레드삭스는 12경기 차이로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1946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카디널스에게 7차전 접전 끝에 패배했다. 시즌 종료 후 레드삭스에서 방출된 히긴스는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레드삭스 팜 시스템에서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선수 시절 총 세 차례(1934년, 1936년, 194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전에 선정되었다.

2. 1. 초기 경력

히긴스는 텍사스주 레드 오크에서 태어났다. 아기 때 얻은 '핑키'라는 별명을 싫어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본명인 프랭크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몇몇 사인에 ''프랭크 히긴스''라고 서명했지만, 선수 경력 후반에는 주로 ''마이크''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졌다. 댈러스의 W. H. 애덤슨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1926년에는 팀이 주 챔피언십 준우승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을 다니다가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와 계약하며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고, 1930년 6월 25일에 메이저 리그 데뷔 경기를 치렀다.

데뷔 해에는 24타수만을 기록했고, 이후 1933년이 되어서야 다시 메이저 리그 무대에 올라 애슬레틱스의 주전 선수로 자리 잡았다. 1933년 루키 시즌에 그는 .314의 타율, 13개의 홈런, 99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특히 그해 8월 3일에는 워싱턴 세너터스와의 경기에서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하며 팀의 12-8 승리를 이끌었다. 애슬레틱스는 그해 아메리칸 리그 3위를 차지했다.

1933년과 1934년에 리그 타율 선두를 차지하는 등 뛰어난 타격 능력을 선보인 히긴스는 리그 최고의 3루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1938년, 그는 동료 3루수 빌리 워버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보스턴 레드삭스로 이적했다. 레드삭스로 이적하기 직전 해인 1937년(애슬레틱스 소속)과 이적 첫해인 1938년(레드삭스 소속)에는 모두 .300 이상의 타율과 함께 개인 통산 한 시즌 최다인 106타점을 기록했다. 1938년 6월에는 12번의 연속 타수에서 안타를 쳐내는 메이저 리그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14번의 타석 동안 달성되었는데, 중간에 볼넷 두 개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 기록은 1952년 월트 드롭포가 12타석에서 12연속 안타(볼넷 없음)를 기록하며 타이를 이루었다.

2. 2. 전성기

히긴스는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에서 메이저 리그 경력을 시작했으며, 1930년 6월 25일에 데뷔했다. 그 해 잠시 출전한 후, 1933년에야 풀타임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의 루키 시즌인 1933년, 그는 .314의 타율, 13개의 홈런, 99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특히 8월 3일에는 워싱턴 세너터스와의 경기에서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하기도 했다. 그 해 애슬레틱스는 아메리칸 리그 3위를 기록했다.

1938년, 그는 동료 3루수 빌리 워버와 맞트레이드되어 보스턴 레드삭스로 이적했다. 당시 그는 리그 최고의 타격 능력을 갖춘 3루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으며, 1933년과 1934년에는 리그 타율 부문에서 상위권을 기록했다. 보스턴에서의 첫 두 시즌(1937년, 1938년) 동안 그는 모두 .300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고, 두 시즌 연속으로 개인 통산 최고인 106 타점을 달성했다. 특히 1938년 6월에는 12연속 타수 안타라는 메이저 리그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14번의 타석 동안 달성되었는데, 중간에 두 번의 볼넷이 포함되었다. 이 기록은 1952년 월트 드롭포가 타이를 이룰 때까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이후 잠수함 투수 엘든 오커와의 트레이드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로 이적했다. 디트로이트에서는 타격 성적이 다소 하락했지만, 파워는 여전히 강세를 유지했다. 다만, 1935년 필라델피아 시절 기록했던 개인 통산 최고인 23홈런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는 통산 세 차례(1934년, 1936년, 194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전에 선정되었다.

2. 3. 월드 시리즈

히긴스는 월드 시리즈에 총 2번 출전했다. 첫 번째는 디트로이트 소속으로 1940년에, 두 번째는 보스턴 소속으로 1946년에 출전했다. 두 번 모두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배했다. 월드 시리즈 통산 기록은 48타수 13안타, 타율 0.271, 홈런 1개(디트로이트 소속), 8타점(디트로이트 6타점, 보스턴 2타점)이다.

2. 4. 통산 기록

핑키 히긴스는 메이저 리그에서 통산 1,802경기에 출전하여 .292의 타율, 140홈런, 1,075타점을 기록했다. 그의 통산 성적은 다음과 같다.

경기타수득점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도루볼넷타율
1,8026,6369311,941374511401,07561800.292



그는 세 차례(1934년, 1936년, 194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전에 선정되었다. 또한 1933년 8월 3일에는 워싱턴 세너터스를 상대로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으며, 1938년 6월에는 12타수 연속 안타를 기록하며 메이저 리그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1952년 월트 드롭포와 타이를 이루었다.

3. 감독 및 경영진 경력

핑키 히긴스는 선수 은퇴 후 마이너 리그에서 감독 경력을 시작하여 보스턴 레드삭스의 감독을 두 차례(1955-1959, 1960-1962) 역임했다. 첫 번째 감독 임기 후 잠시 구단주 톰 야키의 특별 보좌관을 지냈으며, 두 번째 감독 임기 후반에는 사실상 단장 역할을 겸임했다.[3]

1962년 시즌 이후 감독직에서 물러나 레드삭스 프런트 오피스에 전무 이사 겸 단장으로 정식 합류하여 1965년 9월까지 활동했다.[3] 그의 감독 및 단장으로서의 기록은 전반적으로 평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레드삭스 단장에서 해임된 후에는 옛 친구 폴 리차즈가 있던 휴스턴에서 스카우트로 잠시 활동했으며, 이것이 그의 마지막 야구 관련 직업이었다.

3. 1. 감독 경력

핑키 히긴스는 1947년 레드삭스 팜 시스템의 피에몬트 리그 소속 B 클래스 로아노크 레드삭스에서 감독 경력을 시작했다. 마이너 리그에서 8시즌 동안 감독을 맡았으며, 그중 4시즌(1951-1954)은 레드삭스의 트리플 A 제휴팀인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의 루이빌 대령을 지휘했다. 이후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차기 감독으로 고려되기도 했으나, 같은 텍사스 출신이자 전 타이거스 팀 동료였던 폴 리차즈가 1954년 9월 오리올스의 단장 겸 현장 감독으로 임명되었다.[1]

1955년 보스턴 레드삭스 감독으로 승진했다. 히긴스의 첫 시즌 팀은 7월과 8월에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나 9월에 부진하며 4위로 시즌을 마쳤다. 1958년까지 그는 승리하는 퍼스트 디비전 팀을 이끌었고, 테드 윌리엄스는 그의 지휘 아래 두 번의 타격왕(1957-58)을 차지했다. 하지만 레드삭스는 한 번도 진지하게 우승 경쟁을 벌이지 못했으며, 항상 1위 뉴욕 양키스에 12경기 이상 뒤처졌다. 1959년에는 40세의 윌리엄스가 부상(그리고 그의 경력 유일의 3할 미만 타율 시즌)을 겪으면서 레드삭스는 첫 73경기에서 42패를 기록했고,[2] 7월 3일 히긴스는 워싱턴 세너터스의 코치였던 빌리 저지스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히긴스는 구단주 톰 야키의 특별 보좌관으로서 팀에 남았으며, 야키와는 개인적인 친구 관계였다.

1959년 시즌의 희망적인 마무리에도 불구하고 저지스가 이끈 레드삭스는 1960년 시즌 초반 최하위로 떨어졌고, 저지스는 1960년 6월 10일 해고되었다. 이후 코치 델 베이커가 7경기 동안 팀을 임시로 지휘한 뒤, 히긴스가 다시 감독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투수진이 약했던 레드삭스는 계속해서 부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0년 9월 30일 그는 현장 감독으로서 3년 연장 계약을 체결했고, 보스턴 구단의 모든 선수 인사권을 부여받아 사실상 단장의 책임을 겸하게 되었다(공식 직함은 없었음).[3]

히긴스는 1962년 시즌 이후 감독직에서 물러나 보스턴 프런트 오피스에 전무 이사 겸 단장으로 정식 합류했다. 그의 감독 통산 기록은 1,119경기에서 560승 556패(승률 .502)이다. 그는 테리 프랑코나가 2009년에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레드삭스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승리를 거둔 감독이었다. 그의 재임 기간 중 최고 성적은 1957년과 1958년의 3위였지만, 최고 승률은 1955년과 1956년에 기록한 .545(84승 70패, 4위)였다.

그는 감독에서 물러날 당시 53세였다. 감독으로서 히긴스는 선수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매우 편안한 성격으로 알려졌다. 그는 투수가 어려움을 겪을 때 마운드 방문을 자주 하지 않았으며, "투수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마운드로 걸어가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에게 새로운 것을 말해줄 수는 없다"고 말한 바 있다.

3. 2. 단장 경력

히긴스의 단장으로서의 기록은 감독 기록과 마찬가지로 평범했다. 1960년 오프시즌 동안 그는 키가 약 1.98m (1.99m)인 선발 투수 프랭크 설리번을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보내고, 키 약 1.83m 8인치의 또 다른 장신 우완 투수인 진 콘리를 데려왔다. 콘리는 NBA 보스턴 셀틱스에서 빌 러셀의 백업 센터로도 뛰었던 선수였다. 콘리는 히긴스에게 두 시즌 동안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1962년에는 15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휴스턴 콜트 .45s의 유격수였던 폴 리차드와 에디 브레소를 돈 버딘과 맞바꾸는 트레이드 외에는, 히긴스가 감독과 단장을 겸임했던 2년(1961–1962) 동안 주목할 만한 다른 트레이드는 없었다.

1962년 가을, 풀타임 단장으로 임명된 후 그는 몇 가지 주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그중 하나는 강타자 딕 스튜어트를 피츠버그 파이리츠로부터 영입한 것이었지만, 이러한 움직임들은 구단의 전력을 실질적으로 향상시키지는 못했다. 그는 1964 시즌이 끝날 때까지 더 이상의 주요 거래를 하지 않다가, 스튜어트를 필리스로 보내고 좌완 선발 투수 데니스 베넷을 영입했다. 하지만 베넷은 팔 부상에 시달렸고, 보스턴 유니폼을 입고 2년 반 시즌 동안 286과 1/3 이닝을 던지며 단 12승(13패)을 거두는 데 그쳤다. 히긴스는 또한 구단주 요키가 직접 선택한 후임 감독 조니 페스키와 충돌했다. 결국 1964 시즌 막바지에 히긴스는 페스키를 경질하고 자신이 선호하는 인물인 빌리 허먼을 감독으로 앉혔다.

레드삭스는 메이저 리그 수준에서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었고, 1965 시즌에는 투수력 부족으로 인해 요키 구단주 시대에 유일하게 100패를 기록하는 부진을 겪었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닐 마호니가 이끄는 팜 시스템에서는 외야수 레지 스미스, 1루수 조지 스콧, 3루수 조 포이와 같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수들을 포함한 재능 있는 젊은 선수들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이 선수들은 1967년에 22승을 거둔 짐 론보그와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칼 야스트렘스키와 함께 팀의 예상치 못한 아메리카 리그 우승을 이끄는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히긴스는 이러한 결실을 보지 못하고 1965년 9월 16일, 아이러니하게도 21세의 보스턴 우완 투수 데이브 모어헤드가 노히터를 달성한 바로 그날 요키 구단주에 의해 해임되었다. 그는 이후 휴스턴에서 옛 친구이자 팀 동료였던 리차드에 의해 스카우트로 고용되었고, 이것이 그의 야구계에서의 마지막 직업이 되었다.

3. 3. 인종 차별 논란

보스턴 레드삭스 역사학자들은 종종 히긴스를 톰 예이키와 함께 언급하며, 팀이 인종 통합에 저항했던 역사의 배경을 설명하는 데 거론한다. 레드삭스는 당시 16개 메이저리그 팀 중 흑인 선수를 기용하는 데 가장 늦은 팀(1959년)이었으며, 재키 로빈슨이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데뷔한 1947년부터 히긴스의 첫 번째 감독 임기 동안 백인 선수만으로 팀을 구성했다. 보스턴의 야구 기자 알 허쉬버그에 따르면, 히긴스는 "내가 어떻게든 할 수 있는 한, 이 야구단에는 흑인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4] 또한, 시카고 화이트삭스 외야수 미니 미뇨소(아프리카계 쿠바인)를 칭찬하는 스포츠 기자 클리프 킨에게 "빌어먹을 흑인 옹호자"라고 불렀다는 주장도 있다.[5]

레드삭스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수인 유틸리티 내야수 펌프시 그린은 1959년 7월, 빌리 유르게스가 잠시 감독을 맡았을 때 마이너 리그에서 소환되었다. 하지만 히긴스는 1955년 레드삭스 감독이 되기 전까지 메이저리그 선수단 구성에 대한 통제권이 없었고, 야구 인종 차별을 고수하는 구단의 정책은 톰 예이키 구단주와 그의 프런트 오피스 책임자였던 에디 콜린스, 조 크로닌 아래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6]

히긴스가 1960년 중반부터 1965년 말까지 감독으로 복귀하여 선수단 운영 책임을 맡았을 때, 그는 인종적으로 통합된 선수단을 관리했으며, 여러 비백인 선수들(외야수 로만 메히아스, 레니 그린, 알 스미스, 윌리 태스비 및 내야수 그린, 빌리 하렐, 펠릭스 만티야)을 영입했다. 1960년 말 보스턴 지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태스비는 히긴스 밑에서 뛰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는 1960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확장 드래프트에서 지명되기 전까지 레드삭스에서 반 시즌만 뛰었다.)

4. 감독 통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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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정규 시즌포스트시즌
경기승리패배승률최종 순위승리패배승률결과
BOS1955년1548470.545아메리카 리그 4위
BOS1956년1548470.545아메리카 리그 4위
BOS1957년1548272.532아메리카 리그 3위
BOS1958년1547975.513아메리카 리그 3위
BOS1959년733142.425재지정
colspan="11"|
BOS1960년1054857.457아메리카 리그 7위
BOS1961년1627686.469아메리카 리그 6위
BOS1962년1607684.475아메리카 리그 8위
총합1116560556.50200


5. 사망

1968년 2월, 히긴스는 자신의 차로 교통사고를 일으켜 1명을 사망시키고 3명에게 부상을 입힌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유죄 판결과 선고를 기다리는 동안 두 차례 심장 마비를 겪었다. 음주 운전을 인정하여 4년 형을 선고받았으나,[7] 2개월만 복역하고 가석방되었다. 가석방된 다음 날, 그는 댈러스에서 59세의 나이로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8]

참조

[1] 간행물 A Few Pilots Make Deals; Others Just Get Told. https://books.google[...] Baseball Digest 1955-04
[2] 웹사이트 http://www.retroshee[...]
[3] 뉴스 The New York Times 1960-10-01
[4] 서적 What's the Matter with the Red Sox? Dodd, Mead 1973
[5] 서적 Summer of '49 William Morrow and Company 1989
[6] 서적 Shut Out: Race and Baseball in Boston Routledge 2002
[7] 뉴스 Killed One In Accident While Drunk http://news.google.c[...] 2013-06-12
[8] 뉴스 Pinky Higgins Dies, All-Time Baseball Star http://news.google.c[...] 2013-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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