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와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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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기와라가는 요시다 가네하루의 장남 하기와라 가네유키를 시조로 하는 가문이다. 가문은 한가(閑家)이면서 고노에 가문의 가찰로서 신기직을 가업으로 삼았으며, 호코쿠 신사의 사우를 세습하는 사가(社家)였다. 막부 말기에는 단바국 히카미군 내 2개 마을을 영지로 소유했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 화족 제도가 시행되면서 자작 작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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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키오리 가문은 하기와라 가즈무네의 차남인 니시키오리 모토히사를 시조로 하는 한가로, 에도 시대에 30석의 가록을 받았고 메이지 유신 이후 자작위를 받았으며, 6대 당주 때 정신 팔십팔경 열참 사건이 있었다. - 우라베씨 - 요시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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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와라가 | |
---|---|
가문 정보 | |
가문 이름 | 하기와라 가 (蘒原家) |
![]() | |
본성 | 우라베 씨 요시다 서류 |
가조 | 하기와라 가네요리 |
종별 | 공가 (반가) 화족 (자작) |
출신지 | 야마시로국 |
근거지 | 야마시로국 도쿄부 교토부 |
인물 | 하기와라 가네요리 |
지류 | |
지류 가문 | 니시고리 가 (반가, 자작) |
2. 역사
반가이면서도 가록이 셋케 수준인 것은 하기와라 가문이 원래 도요쿠니 신사의 사무를 세습하는 사가(社家)로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거로 창설된 가문이기 때문이다. 사가로서의 역료는 오사카 전투 후에 도요쿠니 신사가 파괴된 후에도 가령으로써 그대로 에도 막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도 인정되었다.
분가로는 니시고리가가 있다. 메이지 시대 화족에 올랐고, 9대 가즈요리가 자작 작위를 받았다. 10대 가즈타네의 딸 중 한 명은 교토 대학 이치노세 카미노부에게 시집을 갔다.
2. 1. 봉건 시대
요시다 가네하루의 장남이자, 할아버지 가네미의 양자인 하기와라 가네유키를 시조로 한다. 게이초 연간에 창설되었다. 창립 당시 한가·우치우치 가문으로, 신기직을 가업으로 삼고 고노에 가문의 가찰이었으며, 가록은 359석 2두였지만, 후에 분고국 하야미군 아사미 장에 1000석을 받게 되었다.한가이면서도 가록이 셋케와 같은 수준이었던 이유는 하기와라 가즈요리와 그의 친아버지 도미노코지 요리나오가 고미즈노 천황·고사이 천황의 총신이었고, "도조 가문·도미노코지 가문의 분가로서 하기와라 가문을 창설한다"는 형태로 하기와라 가문이 창설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하기와라 가네유키 자신의 신분은 가즈요리 이후의 하기와라 가문 당주보다 낮다고 여겨진다.) 또한, 호코쿠 신사의 사우를 세습하는 사가로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추천에 의해 창설된 가문으로, 사가로서의 역료는 오사카 전투 후에 호코쿠 신사가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파각된 후에도 하기와라 가문의 가령으로 그대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가즈요리가 양자를 맞이한 후에 태어난 그의 친아들 모리히사는 고사이 천황을 가까이에서 모셨으며, 호에이 8년에 분가하여 도조 가문을 일으키는 것을 허가받아 니시키오리 가문을 창설하였다. 같은 해에 가즈요리의 양자로 하기와라 가문을 이은 하기와라 가네타케는 본성을 후지와라 씨에서 우라베 씨로 변경했다.
막부 말기 하기와라 가문의 소령은 단바국 히카미군 내 2개 마을에 걸쳐 총 980석 9말 1되 8홉 9작 9재였다.[1]
마을 | 석고 |
---|---|
가미가키 마을 일부 | 360석 |
나카타케다 마을 일부 | 620석 9말 1되 8홉 9작 9재 |
2. 2. 메이지 시대 이후
9대 하기와라 모토미쓰 대에 메이지 유신을 맞이했다. 1869년, 공가(조정의 귀족)와 다이묘(지방 영주)가가 통합되어 화족 제도가 탄생하면서 하기와라 가문도 화족에 편입되었다.[1] 메이지 3년에 정해진 가록(俸祿, 녹봉)은 현미(玄米)로 483석 6두였다. 메이지 9년, 금록 공채 증서 발행 조례에 따라 가록 대신 21177.265JPY를 받았다 (화족 수급자 중 217위).메이지 전기, 하기와라 모토미쓰는 도쿄부 우시고메구 이치가야 나카노초에 거주했다. 1884년, 화족령 시행으로 화족이 오작(五爵)제가 되면서, 대납언 직임의 예가 없는 구 도조가로서 자작 작위를 받았다.
모토미쓰 사후, 장남 하기와라 가즈타네(10대)가 작위와 가독을 상속했다. 다이쇼 5년 가즈타네 사후, 장남 하기와라 가즈후미(11대)가 작위와 가독을 상속했다. 쇼와 12년 가즈후미 사후, 장남 하기와라 가네타케(12대)가 가독과 작위를 상속했다.
3. 계보
실선은 친자, 점선(세로)은 양자를 나타낸다.
하기와라 겸종 |
카즈미치[2] |
카네즈미[3], 니시키오리 종구 (니시키오리 가문) |
카네타케 |
카즈노리, 니시키오리 종방, 츠치미카도 태신 |
카즈간, 요리코토 |
요리코토, 카즈유이, 호리카와 강친 |
카즈유이, 니시키오리 구웅 |
카즈미츠, 하기와라 세이코 |
카즈타네, 히노시 니시 광선, 카즈신, 카즈쥬 |
카즈후루, 카즈타카 |
카네타케 |
3. 1. 주요 인물
- '''하기와라 가네유키''' : 하기와라 가문의 시조. 요시다 가네하루의 장남으로, 할아버지 가네미의 양자가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거로 가문을 창설했다.
- '''하기와라 가즈요리''' : 고미즈노 천황과 고사이 천황의 총신이었다.
- '''니시키오리 모리히사''' : 하기와라 가즈요리의 친아들로, 니시키오리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 '''하기와라 가네타케''' : 본성을 후지와라 씨에서 우라베 씨로 변경하였다.
- '''하기와라 모토미쓰''' : 메이지 유신을 맞이하여 자작 작위를 받았다.
- '''하기와라 가즈타네''' : 하기와라 모토미쓰의 장남. 교토 대학 이치노세 라이신의 장인이다.
4. 영지
에도 막부 말기, 하기와라 가문은 단바국 히카미군에 있는 2개 마을, 총 980석 9말 1되 8홉 9작 9재의 영지를 소유했다.
마을 | 석 |
---|---|
上垣마을의 일부 | 360석 |
中竹田마을의 일부 | 620석 9말 1되 8홉 9작 9재 |
참조
[1]
서적
明治華族名鑑
https://dl.ndl.go.jp[...]
深沢堅二
1881-01-01
[2]
문서
富小路頼直の子
[3]
문서
油小路隆貞の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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