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요시다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이어진 가문으로, 교토 무로마치코지의 자택 부지를 아시카가 요시미쓰에게 양도한 요시다 카네히로를 시조로 한다. 5대 요시다 카네토모는 유일신도를 창시하고, 9대 요시다 카네미는 오다 노부나가의 추천으로 가격을 획득했다. 에도 시대에는 신직에서의 우위를 확립했으며, 메이지 시대에는 화족으로 편입되어 자작 작위를 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요시다가 - 요시다 겐코
요시다 겐코는 1283년경에 태어나 황궁 경비대 장교를 거쳐 승려가 된 일본의 작가로, 수필집 《쓰레즈레구사》를 통해 삶의 덧없음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 요시다가 - 기요하라노 노부카타
기요하라노 노부카타는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초반에 걸쳐 활동한 일본의 학자로, 기요하라 가문의 경학을 집대성하고 유교 경전 연구 및 천황에게 경서 강의, 요시다 신토 완성 등에 기여했다. - 사쿄구의 역사 - 헤이안 신궁
헤이안 신궁은 헤이안쿄 천도 1100주년 기념으로 헤이안 시대의 대내리 일부를 재현하여 건립되었으며, 간무 천황과 고메이 천황을 모시고, 헤이안 시대 후기 교토 고쇼의 조당원을 재현한 건축물과 일본식 정원을 갖춘 신사로서 지다이 마쓰리 축제가 열리는 일본 중요문화재이다. - 사쿄구의 역사 - 오에씨
오에 씨는 간무 천황이 하지노 모로카미에게 내린 성에서 유래하여, 오에노 오토히토 때 '큰 강처럼 번성하라'는 의미로 한자를 변경한 일본 씨족으로, 헤이안 시대에는 가인과 학자를 배출하며 중용되었으나 가마쿠라 시대에 오에노 히로모토가 막부 창립에 기여하며 무가 기반을 다졌고, 이후 그의 후손들은 여러 무가의 기원이 되었으며 일부는 궁정 관료로 남았다. - 우라베씨 - 니시고리가
니시키오리 가문은 하기와라 가즈무네의 차남인 니시키오리 모토히사를 시조로 하는 한가로, 에도 시대에 30석의 가록을 받았고 메이지 유신 이후 자작위를 받았으며, 6대 당주 때 정신 팔십팔경 열참 사건이 있었다. - 우라베씨 - 후지이가
후지이 가문은 우라베 씨에서 갈라져 나온 일본의 공가로, 히라노 신사 관리를 대대로 맡았으며 종2위 비참의를 극위극관으로 하는 한가였고 메이지 유신 이후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요시다가 | |
---|---|
개요 | |
![]() | |
본성 | 우라베 씨(숙녜 → 아손) 적류 |
가조 | 요시다 가네히로 |
종별 | 공가 (반가) 화족 (자작) |
출신지 | 야마시로국오타기군요시다무라 가미교구 요시다초 (히다리교구요시다) |
근거지 | 야마시로국요시다 신사 도쿄시우시고메구 |
주요 인물 | 요시다 가네토모 요시다 가네미 가네요시 법사 (?) |
지류 | 하기와라 가 (반가) 니시키고리 가 (반가) 후지이 가 (반가) |
2. 역사
교토 무로마치 고지에 있던 자택 부지를 아시카가 요시미쓰에게 양도한 것으로 알려진 요시다 카네히로는 요시다 신사의 사임을 맡은 것에서 유래하여 가명을 "요시다"라고 했다. 카네히로는 신기대부와 시종을 역임했으며, 우라베씨로서는 처음으로 공경에 올랐다.
5대 카네토모는 유일신도를 창시하여 기존의 이세 신궁계 신직과 격렬하게 대립하면서 고쓰치미카도 천황을 신자로 얻고 세력을 확대해 신기관령 장상이라는 새로운 칭호를 자칭했다. 이후 신기백의 시라카와 가문을 몰아내고 전국의 신사에 대한 지배를 넓혀갔다.
9대 카네미는 오다 노부나가의 천거로 당상가로 올랐다. 고노에 사키히사를 가례로 섬겼으며, 아케치 미쓰히데와 깊이 교류했던 카네미의 일기 『겸견일기(兼見卿記)』는 아즈치모모야마 정권기 연구에 필수적인 1급 사료이다. 신직에서 요시다가의 우위는 에도 시대 간분 5년(1665년) 제사네기 신주 법도 확정으로 이어졌다.
역대 당주는 신기관령 장상을 칭하고, 정2위신기대부가 극위극관이었다. 에도 시대 가록은 760석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나카요시가 자작 작위를 받았다. 분가로 에도 시대 초기에 하기와라가가 나왔다.
메이지 2년(1869년) 화족에 포함되었고, 메이지 17년(1884년) 화족령 시행으로 요시요시에게 자작이 수여되었다.
2. 1. 무로마치 시대
교토 무로마치 고지에 있던 자택 부지를 아시카가 요시미쓰에게 양도한 것으로 알려진 요시다 카네히로는 요시다 신사의 사임을 맡은 것에 연유하여 가문을 "요시다"로 했다. 카네히로는 신기대부와 시종을 역임했으며, 우라베씨로서 처음으로 공경으로 승진했다.5대 카네토모는 유일신도를 창시, 기존의 이세 신궁 계열 신직과 격렬하게 대립하면서 고츠치미카도 천황을 신도로 얻어 세력을 확대하여 "신기관령 장상"이라는 새로운 칭호를 자칭했다. 이후 신기백의 시라카와가를 몰아내고 전국의 신사에 대한 지배를 넓혀갔다.
2. 2.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9대 카네미는 오다 노부나가의 추천으로 도조가의 가격을 얻었다. 고노에 사키히사를 가례로 섬겼으며, 아케치 미쓰히데와 깊은 친분이 있었다. 카네미의 일기인 카네미 경기는 오다-도요토미 정권 시대 연구에 필수적인 1급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신직에서 요시다 가문의 우위는 에도 시대 간분 5년 (1665년)의 제사네기 신주 법도로 확정되었다.2. 3. 에도 시대
9대 카네미는 오다 노부나가의 추천으로 당상가에 올랐다. 고노에 사키히사를 가례로 섬겼으며, 아케치 미쓰히데와 깊은 친교가 있던 카네미의 일기 『겸견일기(兼見卿記)』는 아즈치모모야마 정권기 연구에 필수적인 1급 사료이다. 신직에 있어서 요시다가의 우위는 에도 시대에 들어 간분 5년 (1665년) 제사네기 신주 법도 확정으로 이어졌다.역대 당주는 신기관령 장상을 칭하고, 정2위 신기대부까지 오를 수 있었다. 에도 시대 가록은 760석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나카요시가 자작 작위를 받았다. 분가로 에도 시대 초기에 하기와라가가 나왔다.
막부 말기 요시다가의 영지는 다음과 같다.
2. 4. 메이지 시대 이후
메이지 2년(1869년) 요시다 가문은 화족에 포함되었으며, 메이지 17년(1884년) 화족령 시행으로 요시요시에게 자작 작위가 수여되었다.3. 역대 당주
가조 요시다 카네히로는 요시다 신사의 사무를 기념해 가명을 "요시다"라고 했다. 그는 신기대부와 시종을 지냈으며, 우라베씨로써 처음 공경에 올랐다. 교토 무로마치 고지에 있던 자택 부지를 아시카가 요시미쓰에게 양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5대 카네토모는 유일신토를 창시하여 기존의 이세신궁계 신직과 치열하게 대립했다. 고쓰치미카도 천황을 신자로 얻고 세력을 확대해 신기관령 나가카미라는 새로운 칭호를 자칭했다. 이후 신기백의 시라카와 가문을 구축하여 전국의 신사에 대한 지배를 넓혀갔다.
9대 가네미는 오다 노부나가의 천거로 가문이 당상가로 오르게 되었다. 코노에 사키히사에게 가례로써 섬겼으며, 아케치 미츠히데와 깊은 친교가 있었다. 카네미의 일기 『겸견일기(兼見卿記)』는 아즈치모모야마정권기 연구에 필수적인 1급 사료이다. 신직에 있어서 요시다가의 우위는 에도 시대에 이르러, 칸분 5년 (1665년)의 제사이의신주법도를 확정한다.
역대 당주는 신시관 영장상을 칭하고, 정2위 신기대부까지 오를 수 있었다. 에도 시대의 가록은 760석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나카요시가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분가로써, 에도 시대 초기에 하기와라가가 나왔다.
4. 가계도
우라베 겸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