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다 요시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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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와다 요시모리는 미우라 씨의 후손으로, 가마쿠라 시대 초기의 무장이었다. 그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도와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이치노타니 전투와 단노우라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13인의 합의제에 참여하는 등 가마쿠라 막부의 주요 인물로 활동했지만, 호조 씨와의 갈등으로 인해 와다 전투를 일으켰다. 결국 패배하여 사망했으며, 그의 가족들 또한 권력 투쟁의 희생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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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다 요시모리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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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와다 요시모리 |
출생 | 구안 3년 (1147년) |
사망 | 겐랴쿠 3년 5월 3일 (1213년5월 24일) |
통칭 | 고타로 |
계명 | (정보 없음) |
묘소 | 가나가와현가마쿠라시유이가하마의 와다즈카 가나가와현 미우라시하츠세마치 와다의 시라하타 신사 |
관위 | 사에몬노조 |
막부 | 가마쿠라 막부 사무라이도코로벳토, 13인의 합의제 |
섬긴 주군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 요리에 → 사네토모 |
씨족 | 와다 씨 |
아버지 | 스기모토 요시무네 |
어머니 | 오바 가게츠구의 딸 |
형제자매 | 요시모리, 요시모치, 무네자네, 요시타네, 요시나가, 오가사와라 도미미츠의 실 |
배우자 | 정실: 와타라이 야스타카의 딸 측실: 요코야마 도키시게의 딸 |
자녀 | 쓰네모리, 요시우지, 아사히나 요시히데, 요시나오, 요시시게, 요시노부, 히데모리, 스기우라 요시쿠니 |
가계 | |
아버지 | 스기모토 요시무네 |
어머니 | 오바 가게쓰구의 딸 |
생애 | |
활동 시기 | 헤이안 시대 말기 - 가마쿠라 시대 전기 |
주요 직책 | 가마쿠라 막부 사무라이도코로 별당 |
주요 전투 | 와다 전투 |
2. 생애
미나모토노 노리요리에게 '사무라이 다이쇼'(사령관)로 종속되었다.[2] 1184년 이치노타니 전투에 참전했고, 단노우라 전투에서는 니이 친키요와 궁술 대결을 벌였다.[3] 이후 키소 요시나카, 후지와라노 야스히라를 상대로 한 전투에 참여했다.
겐랴쿠 원년(1184년) 8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동생 미나모토노 노리요리가 헤이시 추토를 위해 1,000여 기를 이끌고 가마쿠라를 출발했다. 사무라이도코로 벳토(장관)였던 요시모리는 군사 봉행으로 이 군세에 종군했다.[2] 노리요리의 군대는 산요도를 진군하여 규슈로 건너가 헤이케를 포위하고 퇴로를 차단하는 전략이었고, 신중한 노리요리는 전투의 크고 작음에 대해 요시모리와 자주 상담했다.
원정군은 요와 기근의 악영향으로 병량 조달에 고전했고, 세토 내해를 헤이케에게 막혀 규슈로 건너지 못해 전투가 장기화되었다. 『아즈마카가미』 겐랴쿠 2년 1월 12일 조에는 고전을 호소하는 노리요리의 기사가 있으며, "동국의 자들은 (장기적인 전투에) 매우 지루해하며, 본국을 그리워하며, 와다 고타로 요시모리까지 비밀리에 가마쿠라로 돌아가려는 형편입니다. 그 외의 자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1월 26일, 원정군은 병선을 조달하여 분고국으로 건너갔다. 아시야우라 전투에서 헤이케 측을 격파하고 헤이케의 배후 차단에 성공한다. 그 사이에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는 야시마 전투에서 승리하고, 헤이케는 나가토국히코시마에 고립되었다. 3월 25일, 단노우라 전투에서 노리요리의 군대는 육지에 포진하여 해전을 벌이는 요시쓰네의 군을 지원했다. 『헤이케 이야기』에 따르면 요시모리는 말 위에서 물가에서 멀리 화살을 쏘아 헤이케 측을 놀라게 하고, 화살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이 화살을 돌려보여라"라고 도발했다. 타이라노 토모모리는 헤이케 측의 강궁 사용자인 니이 친키요를 시켜 화살을 되돌려 쏘아 요시모리의 자랑을 비웃었다.[3] 화가 난 요시모리는 배를 타고 맹렬하게 싸웠다. 전투는 겐지의 승리로 끝나고 헤이케는 멸망했다.
헤이케 멸망 후, 요시쓰네와 요리토모가 대립했다. 요시모리는 사무라이도코로 벳토, 가지와라 가게토키는 차관인 쇼시로, 각자가 헤이케 추토군을 이끄는 노리요리, 요시쓰네를 보좌하고 있었다. 요시쓰네는 요리토모에게 사죄했지만 용서받지 못하고 오슈 후지와라 씨에게 도망갔다. 분지 5년(1189년), 후지와라 히데히라의 뒤를 이은 야스히라가 요시쓰네를 살해하고, 6월에 그 머리가 가마쿠라로 보내져 요시모리와 가게토키가 머리 검시를 했다.
같은 해 7월, 요리토모는 오슈 후지와라 씨 토벌군을 일으켰다(오슈 합전). 요시모리는 이에 종군하여 아쓰카시 산 전투에서 야스히라·구니히라 형제를 격파하고 추격하여 구니히라와 화살전을 벌였다. 전투 후, 구니히라를 쳐 죽인 전공을 두고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와 논쟁이 벌어졌다. 9월, 야스히라가 가신에게 배신당해 그 머리가 막부군의 진중에 보내져 요시모리·시게타다가 머리 검시를 했다.
1213년(겐랴쿠 3년) 2월, 이즈미 친히라가 요리이에의 유아(에이실)를 옹립하여 호조 씨를 타도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었다(이즈미 친히라의 난). 요시모리의 아들 요시나오, 요시시게, 조카 타네나가의 관여가 밝혀졌다.[1] 요시모리는 가마쿠라로 돌아와 실조에게 아들과 조카의 사면을 간청하여 아들은 용서받았지만 조카 타네나가만은 장본인이라 하여 용서받지 못했다. 구명 탄원을 하러 온 와다가 90명이 대기하고 있는 쇼군 어소의 남쪽 뜰에서 타네나가는 밧줄로 묶여 끌려가 와다 일족에게 큰 치욕을 안겼다.
타네나가는 무쓰국으로 유배되었고, 그의 저택 몰수 후 요시모리에게 하사되었으나, 곧 요시토키는 자신의 가신들에게 타네나가의 구 저택을 내려주었다. 거듭되는 요시토키의 도발에 요시모리는 거병을 결심한다.
『메이게츠기』 겐랴쿠 3년 5월 9일 조에는 요시모리가 주모자가 되어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이 있었고, 요시모리는 변명하여 실조의 허가를 받았으나, 어소에서는 요시모리 숙청에 대한 밀의가 행해지고 있었다고 한다. 『호랴쿠칸키』에는 요시모리의 아들들이 요리이에의 유아 옹립을 모의했고, 요시모리도 이에 동의하여 전투가 벌어졌다고 한다.
요시모리는 요시무라에게 동의를 얻었으나, 요시무라는 변심하여 요시모리 모반을 요시토키에게 통보했다. 5월 2일, 요시모리는 일족과 함께 거병하여 가마쿠라에서 격렬한 시가전이 전개되었다. 와다 일족은 분전했지만, 요시토키 측에는 새로운 병력이 잇따라 도착하고, 밤까지 와다 일족도 지쳐 유이가하마로 후퇴하여 원군을 기다렸다. 다음 날 3일, 막부군은 대군이 되어 밀어붙였다. 저녁 무렵까지 와다 일족은 잇따라 토벌되었고, 요시모리는 사랑하는 아들 요시나오의 전사에 비탄하며 울부짖다 오에노 요시노리의 낭당에게 토벌되었다. 향년 67세.
아들 요시시게, 요시노부, 히데모리는 전사했지만, 츠네모리, 아사히나 요시히데, 손자 아사모리 등은 전장을 탈출하여 도망쳤다. 가마쿠라에는 하치만구 3의 토리이 근처에 저택이 있었다. 요시모리가 전사한 유이가하마에는 현재에도 "와다즈카"라는 공양총(유이가하마 3초메 4-7)과 지명이 남아 있다.[1]
2. 1. 가마쿠라 막부 성립 이전
미우라 요시아키의 아들이자 스기모토 요시무네의 손자인 와다 요시모리는 타이라씨의 후손으로, 구안 3년(1147년)에 태어났다.[1] 와다 씨는 반토 팔평 씨 중 하나인 미우라 씨의 분가로, 사가미국 미우라군 와다노사토[7], 혹은 아와국 와다 미쿠리야에 소령이 있었던 것에서 '''와다'''를 성으로 삼았다.지쇼 4년(1180년) 8월 22일, 미우라 씨는 이즈국에서 평씨 타도를 위해 거병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돕기로 결정하고 요리토모와 합류하기 위해 요시아키의 아들인 미우라 요시즈미 이하 500여 기를 이끌고 본거지인 미우라 반도를 출발했다. 요시모리와 동생 고지로 요시시게도 이 군세에 참가했다. 그러나 미우라 세력이 마루코 강(사쿠라가와)에 이르렀을 때, 폭우로 인해 강물이 불어나 도하할 수 없었다. 23일 밤, 오바케 친은 미우라 세력이 이 틈을 타 평씨측인 오바케 친의 가옥을 불태웠다는 것을 알게 되자, 다음 날에는 미우라 세력이 가세하여 싸움이 격렬해질 것을 우려하여 밤중에 이시바야마 전투에서 오바케 친이 요리토모 군을 격파했다.
요리토모는 행방불명되었고, 미우라 세력은 미우라 반도로 군사를 돌렸지만, 24일 귀로의 가마쿠라유이가하마에서 평씨측인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군세와 조우하여 전투가 벌어졌다. 『겐페이 성쇠기』에 따르면, 요시모리가 하타케야마 진 앞에서 이름을 외치며 도발하여 싸움이 벌어질 뻔했지만, 쌍방에 연고자가 많아 일단 화해했다. 그러나 요시시게가 하타케야마 진에 돌입하여 전투가 벌어져 쌍방에서 전사자가 발생하고 군사를 물렸다 (고쓰보 합전).
26일, 하타케야마 시게타다는 다른 평씨측과 합쳐 수천 기로 미우라 씨의 본거지인 기누가사 성을 습격했다. 미우라 세력은 동쪽의 기도구, 서쪽의 기도, 중앙 진에 진을 치고, 요시모리는 서쪽의 기도구를 지켰지만, 미우라 일족은 전날의 전투로 피로해져 성을 버리고 해상으로 도망쳤다. 그 때, 89세였던 조부 미우라 요시아키는 "지금, 이 늙은 목숨을 무위(요리토모)에게 바쳐, 자손의 번영을 도모하겠다"라고 말하며, 혼자 성에 남아 분전하다가 전사했다 (기누가사 성 합전).
요시모리 등 미우라 일족은 해상에서 요리토모의 장인 호조 도키마사 등과 합류, 29일 아와 히라키타군 료토에서 요리토모를 맞이했다. 『헤이케 이야기』에 따르면, 이 때 요시모리는 "아버지가 죽고, 자손이 죽어도, 요리토모 공의 모습을 보면 이보다 더한 기쁨은 없습니다. 부디 소원을 이루어 천하를 손에 넣어 주십시오. 그 후에는 저를 시토코로벳토에 임명해 주십시오. 가즈사노스케였던 이토 다다키요가 평씨에게서 8개 국의 시토코로벳토에 임명되어 그 위세를 부러워하며, 언젠가 자신도 그렇게 되기를 하치만 대보살에게 기원했습니다"라고 말했다.
9월, 아와에 집결한 요리토모 측 잔당은 재기를 도모하여, 각지의 무사들에게 참전을 명령했다. 지바 쓰네타네에게는 아다치 모리나가가, 가즈사노 히로쓰네에게는 요시모리가 사자로 갔다. 쓰네타네는 즉시 거병하여 요리토모를 맞이했지만, 히로쓰네는 쉽게 응하지 않았다. 6일 밤, 요시모리는 히로쓰네로부터 쓰네타네와 상의하여 참진하겠다는 말을 받아 돌아왔다. 요리토모가 아와를 출발하여 보소 반도를 북상하여 지바 씨 등을 더하여 스미다 강에 이르렀을 때, 히로쓰네는 2만 기의 대군을 이끌고 참전했다. 히로쓰네는 요리토모의 그릇에 따라 그를 칠 생각이었지만, 요리토모의 위엄에 압도되어 복종했다.
10월, 유이가하마에서 싸운 하타케야마 시게타다·가와고에 시게요리·에도 시게나가를 포함한 도고쿠 무사들이 속속 참전하여, 요리토모 군은 수만 기의 대군이 되어 가와치 겐지의 본거지인 가마쿠라에 들어갔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미우라 요시즈미 이하 미우라 씨에게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등은 겐지에 화살을 쏘았지만, 세력 있는 자를 우대해야 일이 이루어진다"라고 하며, 과거의 일로 분노를 품어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다. 10월 20일, 스루가국후지카와 전투에서 다이라노 고레모리가 이끄는 평씨군을 격파했다.
요리토모는 간토를 굳건히 하고, 11월에는 히타치국의 사타케 씨를 토벌, 요시모리와 히로쓰네는 사타케 히데요시를 생포했다. 11월 17일에 가마쿠라로 개선하여, 간토 통치를 위한 여러 기관을 설치했다. 요시모리는 아와에서의 소원대로 시토코로벳토에 임명되었다. 12월, 가마쿠라 오쿠라의 땅에 요리토모의 어소가 완성되었고, 그 입어 의식에 요시모리는 뭇 어가인의 맨 앞에 섰다.
1184년, 요시모리는 이치노타니 전투와 단노우라 전투에 참전하여 이요의 치카키요와 궁술 대결을 벌였다.[3] 이후 1184년 키소 요시나카, 1189년 후지와라노 야스히라를 상대로 한 전투에 참여했다.
요시모리는 미나모토노 노리요리에게 ''사무라이 다이쇼''(사령관)로 종속되었다.[2]
2. 2. 가마쿠라 막부 성립과 활동
와다 요시모리는 미우라 요시아키의 아들이자 스기모토 요시무네의 손자로, 타이라 씨의 후손으로 태어났다.[1]겐랴쿠 원년(1184년) 8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동생인 미나모토노 노리요리가 헤이시 추토를 위해 1,000여 기를 이끌고 가마쿠라를 출발했다. 사무라이도코로 벳토(장관)였던 요시모리는 군사 봉행으로 이 군세에 종군했다.[2] 노리요리의 군대는 산요도를 진군하여 규슈로 건너가, 헤이케를 포위하고 퇴로를 차단하는 전략이었다. 신중한 노리요리는 전투의 크고 작음에 대해 요시모리와 자주 상담했다. 그런데, 원정군은 요와 기근의 악영향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병량 조달에 고전하고, 세토 내해를 헤이케에게 막혀 배가 없어 규슈에도 건너지 못해 전투가 장기화되었다. 『아즈마카가미』 겐랴쿠 2년 1월 12일 조에는 고전을 호소하는 노리요리의 기사가 있으며, 그 속에서 "동국의 자들은 (장기적인 전투에) 매우 지루해하며, 본국을 그리워하며, 와다 고타로 요시모리까지 비밀리에 가마쿠라로 돌아가려는 형편입니다. 그 외의 자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라고 보고되고 있다.
1월 26일에 원정군은 병선의 조달에 성공하여, 요시모리는 호조 요시토키, 아시카가 요시카네 등과 함께 분고국으로 건너갔다. 아시야우라 전투에서 헤이케 측을 격파하고, 헤이케의 배후 차단에 성공한다. 그 사이에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는 야시마 전투에서 승리하고, 헤이케는 나가토국히코시마에 고립되었다. 3월 25일, 단노우라 전투가 벌어졌고, 노리요리의 군대는 육지에 포진하여 해전을 벌이는 요시쓰네의 군을 지원했다. 『헤이케 이야기』에 따르면 요시모리는 말 위에서 물가에서 멀리 화살을 쏘아, 2, 3정이나 날아가게 하여, 헤이케 측을 놀라게 하고, 화살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이 화살을 돌려보여라"라고 도발했다. 타이라노 토모모리는 헤이케 측의 강궁의 사용자를 찾아, 이요국의 주민 니이 친키요가 훌륭하게 화살을 되돌려 쏘아, 요시모리의 자랑을 비웃었다.[3] 화가 난 요시모리는 배를 타고 맹렬하게 싸웠다고 한다. 전투는 겐지(源氏)의 승리로 끝나고, 헤이케는 멸망했다.
헤이케 멸망 후, 큰 공을 세운 요시쓰네와 요리토모가 대립했다. 요시쓰네의 군사 봉행이었던 가지와라 가게토키가 참언[8]을 한 것도 한 원인이다. 요시모리는 사무라이도코로 벳토, 가게토키는 차관인 쇼시로, 각자가 헤이케 추토군을 이끄는 노리요리, 요시쓰네를 보좌하고 있었다.
요시쓰네는 요리토모에게 사죄하지만 용서받지 못하고, 교토에서 거병을 도모하지만 실패하고, 오슈 후지와라 씨의 허락을 받아 도망갔다. 분지 5년(1189년), 후지와라 히데히라의 뒤를 이은 야스히라가 요시쓰네를 살해하고, 6월에 그 머리가 가마쿠라로 보내져, 요시모리와 가게토키가 머리 검시를 했다.
같은 해 7월, 요리토모는 오슈 후지와라 씨 토벌의 군을 일으킨다(오슈 합전). 요시모리는 이에 종군하여, 아쓰카시 산 전투에서 야스히라·구니히라 형제는 대패하여 도망하고, 요시모리는 선봉에 서서 이를 추격하여, 구니히라와 화살전을 벌였다. 전투 후, 구니히라를 쳐 죽인 전공을 두고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와 논쟁이 벌어졌다. 9월, 야스히라가 가신에게 배신당해 그 머리가 막부군의 진중에 보내져, 요시모리·시게타다가 머리 검시를 했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그와 그의 가족은 초대 가마쿠라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죽음 이후 권력 투쟁의 희생자가 되었다. 호조 섭정과 와다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고, 와다 요시나오, 와다 요시시게, 와다 타네나가 등이 음모 혐의로 체포되면서 공개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1] 카즈사국에 있던 요시모리는 가마쿠라로 돌아와 두 아들을 석방했다.[1] 그러나 타네나는 구금되어 무쓰국으로 유배되었다.[1] 1213년, 와다 전투가 벌어졌고, 요시모리는 가족과 함께 패배하여 사망했다.[1]
2. 3. 와다 전투와 최후
1213년(겐랴쿠 3년) 2월, 요시모리가 가즈사 이호쿠 장에 내려가 있는 동안, 이즈미 친히라가 요리이에의 유아(에이실)를 옹립하여 호조 씨를 타도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었다(이즈미 친히라의 난). 관계자들의 자백으로 요시모리의 아들 요시나오, 요시시게, 조카 타네나가의 관여가 밝혀졌다.[1]3월, 요시모리는 가마쿠라로 돌아와 실조에게 아들과 조카의 사면을 간청하여 아들은 용서받았지만 조카 타네나가만은 장본인이라 하여 용서받지 못했다. 구명 탄원을 하러 온 와다가 90명이 대기하고 있는 쇼군 어소의 남쪽 뜰에서 타네나가는 밧줄로 묶여 끌려가 와다 일족에게 큰 치욕을 안겼다.
17일, 타네나가는 무쓰국으로 유배되어 가마쿠라의 저택은 몰수되었고, 그의 6살 된 딸은 슬픔으로 병이 나서 21일에 사망했다. 요시모리는 죄인의 저택은 일족에게 내려주는 관례라며 자신에게 하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소원은 받아들여졌지만 그 직후 요시토키는 난을 평정하는데 공이 있던 자신의 가신 카네쿠보 유키치카와 안도 타다이에에게 타네나가의 구 저택을 내려주었다.
거듭되는 요시토키의 도발에 요시모리는 요코야마 당이나 반 호조 파를 유인하여 거병을 결심한다. 가마쿠라에서는 유언비어가 떠돌아다니며 소란스러웠다. 4월 27일, 우려한 실조는 사자를 요시모리의 저택으로 보냈다. 사자에게 요시모리는 "상(실조)에게는 전혀 원한이 없지만, 소슈(요시토키)의 너무나도 방자한 행위에 대해 자세한 것을 묻고자 젊은이들이 준비하고 있으며, 나는 여러 번 간언했지만 듣지 않으려 합니다. 이미 한통속이 되어 버려, 더 이상 제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메이게츠기』 겐랴쿠 3년 5월 9일 조에는 지난 봄에 모반(이즈미 친히라의 난)을 일으킨 자들이 결집하고 있다는 풍문·낙서가 있으며, 주모자는 요시모리라고 한다. 그래서 요시모리는 스스로 변명하여 실조의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어소에서는 요시모리 숙청에 대한 밀의가 행해지고 있었다. 그 움직임을 눈치챈 요시모리는 더욱 병사를 모아 모반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호랴쿠칸키』에는 요시모리의 아들들이 요리이에의 유아 옹립을 모의했고, 요시모리도 이에 동의하여 전투가 벌어졌다고 한다.
거병에 즈음하여 가장 의지한 것은 본가에 해당하는 미우라 씨의 당주 요시무라였다. 요시무라는 거병에 대한 동의를 약속하고 기청문까지 썼다. 하지만 요시무라는 동생 타네요시와 상의하여 변심하여 요시모리 모반을 요시토키에게 통보했다. 『메이게츠기』는 요시모리와 요시무라가 그 이전부터 대립 관계에 있었다고 하고 있으며, 요시무라는 처음부터 요시토키에게 내통했을 가능성이 높다. 『구간초』는 "요시모리 사에몬이라 하는 미우라의 장자, 요시토키를 깊이 질투하여 칠 뜻이 있었도다"라고 적고 있으며, 교토에서는 삼촌 미우라 요시즈미 사후 미우라 일족의 가주는 요시모리로 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월 2일, 요시모리는 일족과 함께 거병. 가마쿠라에서 격렬한 시가전이 전개되었다. 무용으로 알려진 와다 일족은 분전했으며, 그중에서도 삼남 아사히나 요시히데가 가장 맹렬하게 싸웠다. 하지만 요시토키 측에는 새로운 병력이 잇따라 도착하고, 밤까지 와다 일족도 지쳐 유이가하마로 후퇴하여 원군을 기다렸다. 다음 날 3일 아침, 요코야마 당이 도착하고, 그 밖의 아군도 도착하여 다시 기세를 회복했다. 와다 측이 예상 밖의 대군이 되어 가는 것을 두려워한 요시토키와 오에노 히로모토는 쇼군 실조의 이름으로 어교서를 발한다. 이에 많은 고케닌이 응하여 실조의 명령을 받은 막부군은 대군이 되어 밀어붙였다. 저녁 무렵까지 와다 일족은 잇따라 토벌되었고, 그중 사랑하는 아들 요시나오도 전사하여 늙은 요시모리는 소리를 내어 비탄하며 울부짖었다. 그곳에 오에노 요시노리의 낭당이 덮쳐와 마침내 토벌되었다. 향년 67세.
아들 요시시게, 요시노부, 히데모리는 전사했지만, 츠네모리, 아사히나 요시히데, 손자 아사모리 등은 전장을 탈출하여 도망쳤다.
가마쿠라에는 하치만구 3의 토리이 근처, 현재의 가마쿠라 조각 츠바키도의 곁에 저택이 있었다. 요시모리가 전사한 유이가하마에는 현재에도 "와다즈카"라는 공양총(유이가하마 3초메 4-7)과 지명이 남아 있다.[1]
3. 인물 및 평가
와다 요시모리는 미우라 요시아키의 아들이자 스기모토 요시무네의 손자로, 타이라씨의 후손이다.[1] 궁술에 능하고 무용이 뛰어나 고케닌들에게 존경받았다.[3] 노리요리에게 ''사무라이 다이쇼''(사령관)로 임명되었다.[2]
13인의 합의제 일원이었던 그는 가지와라 가게토키와 호조 도키마사를 실각시키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사무라이도코로별당 직책을 수행하며 겐큐 2년(1205년)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직무에 대해 사려 깊지 못한 면도 있었다.[9] 서국 원정 시 가장 먼저 동국으로 돌아가려 하거나, 가마쿠라 내 미우라 씨와 아시카가 씨 간 분쟁 때 중재자임에도 미우라 씨 편에 섰다.
결국 와다 전투에서 단순하고 우직한 성품이 호조 요시토키에게 이용되어 도발당해 거병, 1213년 가족과 함께 패배하여 사망했다.[1]
4. 전승 및 유적
5. 관련 작품
- 수선사 이야기(1955년) - 배역: 반도 미츠사부로
- 풀이 타오르다(1979년, NHK 대하드라마) - 배역: 이부키 고로
- 요시츠네(2005년, NHK 대하드라마) - 배역: 다카스기 고
- 가마쿠라 시대의 13인(2022년, NHK 대하드라마) - 배역: 요코타 에이지
6. 같이 보기
참조
[1]
문서
Kusumoto (2002:68)
[2]
서적
Legends of the Samurai
Overlook Duckworth
[3]
서적
The Tales of the Heike
Columbia University Press
[4]
웹사이트
Yuigahama
http://www.kcn-net.o[...]
2008-11-02
[5]
문서
長江義景の妹。
[6]
문서
豊受大神宮七社の禰宜。
[7]
문서
神奈川県[[三浦市]]初声町和田。
[8]
문서
義経の驕慢と独断専行を報告。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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他の6名は、[[北条義時]]、[[小山朝政]]、[[梶原景時]]、[[土肥実平]]、[[比企能員]]、[[畠山重忠]]。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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他に[[千葉常秀]](祖父[[千葉常胤|常胤]]譲り)・[[梶原景茂]](父[[梶原景時|景時]]譲り)・[[八田知重]](父[[八田知家|知家]]譲り)が左兵衛尉、[[三浦義村]](父[[三浦義澄|義澄]]譲り)・[[葛西清重]]が右兵衛尉、[[佐原義連]]・[[足立遠元]]が左衛門尉、[[小山朝政]]・[[比企能員]]が右衛門尉に任じられている。
[11]
서적
鎌倉源氏三代記 一門重臣と源家将軍
吉川弘文館
[12]
서적
日本の歴史 (7) 鎌倉幕府
中公文庫
[13]
서적
相模三浦一族とその周辺史―その発祥から江戸期まで―
新人物往来社
[14]
문서
平井ほか 1980 p.313
[15]
문서
港南の歴史研究会 1986 p.70
[16]
웹사이트
"野庭の「関城」と周辺 上大岡・野庭"
http://www.city.yo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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