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게르하르트 크로이츠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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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스 게르하르트 크로이츠펠트는 1885년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독일의 신경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이다. 그는 로스토크 대학교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선박 외과 의사로 일하며 태평양을 항해했다.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브로츠와프, 킬, 베를린, 뮌헨 등에서 근무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1920년 킬에서 하빌리타치온 과정을 마치고 1925년 특별연구원이 되었으며, 1938년 킬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알폰스 마리아 야콥과 함께 크로이츠펠트-야콥병을 발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킬 대학교 학장을 역임했으나 해임되었고, 뮌헨에서 명예교수로 지내다 1964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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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게르하르트 크로이츠펠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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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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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한스 게르하르트 크로이츠펠트 |
원어이름 | Hans Gerhard Creutzfeldt |
로마자 표기 | Hanseu Gereuhareuteu Keuroicheupelteu |
출생일 | 1885년 6월 2일 |
출생지 | 독일 제국 함부르크 |
사망일 | 1964년 12월 30일 |
사망지 | 서독 뮌헨 |
직업 | 의사 |
분야 | 신경과, 신경병리과 |
출신 대학 | 예나 프리드리히 실러 대학교, 로스토크 대학교 |
2. 생애 초기
크로이츠펠트는 1885년 독일 제국의 하르부르크(1937년 함부르크에 편입)에서 의사 가문에서 태어났다. 1903년, 18세의 나이에 독일군에 징집되어 킬에서 복무했다.
1903년 독일군에 징집되어 킬에서 복무했다. 이후 예나 대학교와 로스토크 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수학하여 1909년 로스토크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함부르크의 ''성 게오르그'' 병원에서 실무 훈련을 받았고, 의사 자격을 얻은 뒤에는 선박 외과의사로 일하며 태평양을 항해하기도 했다.
이후 크로이츠펠트는 예나 대학교와 로스토크 대학교의 의과대학에 다녔고, 1909년에 로스토크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실무 훈련 중 일부는 함부르크의 ''성 게오르그'' 병원에서 이루어졌다. 의사 자격을 취득한 후에는 선박 외과 의사로 일하면서 태평양을 항해하였고, 이 기간 동안 지역 공예, 언어학 및 열대 식물을 연구할 기회를 가졌다.
1912년 독일로 돌아온 크로이츠펠트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신경학 연구소, 브레슬라우, 킬, 베를린의 정신신경병원, 뮌헨의 ''독일 정신의학 연구소'' 등 여러 곳에서 근무했다.
3. 경력
1912년 독일로 돌아와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신경학 연구소, 브레슬라우, 킬, 베를린의 정신신경병원, 뮌헨의 ''독일 정신의학 연구소'' 등 여러 기관에서 정신의학 및 신경학 분야 경력을 쌓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예비 군의관으로 참전했으며, 전쟁 중 탑승했던 보조 순양함 SMS Greif의 침몰 사고에서 생존했다. 1916년 2월 포로가 되었으나 군의관 신분 덕분에 같은 해 5월 송환되었고, 1918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일 황립해군에서 복무했다.
전후 1920년에는 킬 대학교에서 하빌리타치온 과정을 마쳤고, 1925년에는 해당 대학의 정신건강의학과 신경학 분야 특별연구원이 되었다. 1938년에는 킬 대학교 정신과 및 신경학부의 교수 겸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3. 1. 크로이츠펠트-야콥병 연구
크로이츠펠트는 알폰스 마리아 야콥과 함께 뇌 조직에 스펀지처럼 구멍이 생기는 신경퇴행성 질환인 크로이츠펠트-야콥병을 발견하는 데 기여했다. 이 병은 현재 프리온이라고 불리는 감염성을 가진 단백질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2. 나치 시대와의 관계
나치 독일 시절, 크로이츠펠트는 1932년부터 1933년까지 하인리히 힘러가 이끌었던 슈츠슈타펠(SS)의 후원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크로이츠펠트는 슈츠슈타펠과 나치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그는 54세였으며, 전쟁 기간 동안 강제 수용소에서 일부 사람들을 죽음으로부터 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또한, 나치의 비자발적 안락사 계획인 T4 작전으로부터 자신의 병원에 있던 거의 모든 환자가 살해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전쟁 중에는 폭격으로 인해 그의 집과 진료소가 파괴되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1]
전쟁이 끝난 후, 크로이츠펠트는 킬 대학교의 학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영국 점령군과의 갈등으로 인해 6개월 만에 해임되었다. 이는 그가 더 많은 전직 독일 육군 장교들의 대학 입학을 허용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크로이츠펠트는 결국 1953년 킬 대학교 교수직에서 사임하고 뮌헨으로 이주하여 명예교수로서 여생을 보냈다.[2]
4. 말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크로이츠펠트는 킬 대학교 학장을 6개월 동안 맡았으나 영국 점령군에 의해 해임되었다. 대학 재건 과정에서 더 많은 전직 육군 장교들의 입학을 허용하려 했던 그의 방침이 영국 측과의 갈등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크로이츠펠트는 1953년 킬 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뮌헨으로 가서 명예교수로 활동했다.[2]
5. 개인 생활
크로이츠펠트는 경제학자 베르너 좀바르트의 딸인 클라라 좀바르트와 결혼하여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1964년 12월 뮌헨에서 사망했다.
참조
[1]
웹인용
Hans Gerhard Creutzfeldt
http://www.whonamedi[...]
2023-11-16
[2]
저널
Hans Gerhard Creutzfeldt (1885-1964): A Life in Neuropathology
Springer-Verlag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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