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크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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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헨리크 2세는 폴란드 대공 헨리크 1세의 아들로, 1238년 아버지의 사망 이후 실롱스크, 크라쿠프, 비엘코폴스카의 공작이 되었다. 그는 1222년부터 아버지와 공동 통치를 시작했으며, 1234년에는 공동 통치자로 임명되었다. 1241년 몽골의 침입으로 레그니차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영토는 아들들에게 분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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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크 2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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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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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폴란드 고공 |
통치 기간 | 1238년 – 1241년 |
선임자 | 헨리 1세 |
후임자 | 볼레스와프 2세 로가트카 |
칭호 1 | 실레시아 공국 |
통치 기간 1 | 1238년 – 1241년 |
선임자 1 | 헨리 1세 |
후임자 1 | 볼레스와프 2세 로가트카 |
배우자 | 보헤미아의 안나 (1204년-1265년) |
자녀 | 브로츠와프의 콘스탄치아 볼레스와프 2세 로가트카 미에슈코, 루부시 공작 헨리 3세 비아위 콘라트 1세, 실레시아-글로가우 공작 브로츠와프의 엘리자베트 잘츠부르크의 브와디스와프 |
가문 | 실롱스크 피아스트 가문 |
아버지 | 헨리 1세 |
어머니 | 안데흐스의 야드비가 |
출생일 | 1196년경 |
사망일 | 1241년 4월 9일 (44-45세) |
사망 장소 | 레그니츠키에 폴레 |
매장 장소 | 브로츠와프 성 빈첸시오 교회 |
이름 | |
폴란드어 | Henryk II Pobożny (헨리크 2세 포보주니) |
2. 생애
헨리크 2세는 폴란드 대공 수염공 헨리크 1세와 안데크스의 헤드비지스의 둘째 아들로, 1218년경 보헤미아 왕 오토카르 1세의 딸 안나와 결혼하여 국제 정치에 참여했다.
헨리크 1세는 아들 헨리크 2세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1222년부터 문서에 서명하게 했으며, 1224년에는 자신만의 인장을 갖게 했다. 1227년 건소바 회의와 1229년 헨리크 1세가 각각 부상과 포로로 잡혔을때 헨리크 2세는 임시 공작으로 활동했다.
1229년부터 1230년까지 헨리크 2세는 루부슈 지방을 되찾기 위한 원정을 이끌었고, 1233년부터 1234년까지는 아버지의 군사 활동을 지원했다. 1234년 헨리크 1세는 헨리크 2세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하고, 1238년 헨리크 1세가 사망하자 헨리크 2세는 실롱스크, 크라쿠프, 대폴란드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헨리크 2세는 돌나 실롱스크를 상속받았고, 브와디스와프 3세에게서 남부 대폴란드와 크라쿠프를 유증받았으나, 마조비아의 공작 콘라드와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가 이를 무시했다.[5] 헨리 2세는 오폴레-라치부시 공국과 산도미에시 공국에 대한 권위를 유지했으나, 1239년 후견인 지위를 사임해야 했다.[5]
북서부에서는 브란덴부르크의 변경백 오토 3세가 산토크를 점령하고 루부슈를 포위했다. 헨리 2세는 콘라드,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 그니에즈노 대주교와의 분쟁을 상속받았으나, 1239년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가 사망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헨리 2세는 오도니치의 재산 대부분을 차지하고, 나크워 나트 노테치옹과 우이시치에를 오도니치의 아들들에게 남겼다.[5]
헨리 2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를 지지하며 교회와의 분쟁을 해결하고,[6] 콘라드와의 갈등을 종식시켰다. 1239년 헨리 2세는 오토 3세로부터 산토크 요새를 되찾았다.[5]
1241년, 몽골이 바투 칸의 지휘 아래 침입했다. 헨리크 2세는 레그니차에 군대를 집결시켰으나, 유럽 통치자들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템플 기사단과 보헤미아 군대만 합류했다. 레그니차 전투에서 헨리크 2세는 패배하고 전사했다.[7] 그의 시신은 다지증 때문에 아내만이 알아볼 수 있었고, 브로츠와프의 성 빈센트와 야곱 프란체스코회 교회 지하 묘지에 묻혔다.[8]
2. 1. 초기 생애와 공동 통치
경건왕 헨리크는 폴란드 대공 수염공 헨리크 1세와 안데크스의 헤드비지스의 둘째 아들이었다.[2] 1206년 그의 형 볼레스와프가 사망하고, 1213년에는 남동생 콘라트 곱슬라위마저 사냥 중 사망하면서, 젊은 헨리크는 돌니실롱스크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었다. 1218년경, 헨리크 1세는 헨리크 2세를 보헤미아 왕 오토카르 1세의 딸인 안나와 결혼시켰다. 이 프르제미슬 왕조와의 결혼을 통해 헨리크 2세는 국제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헨리크 1세는 유일하게 생존한 아들 헨리크 2세를 일찍부터 후계자로 지명했다. 1222년부터 헨리크 2세는 아버지와 함께 문서에 서명하기 시작했고, 1224년에는 자신만의 인장과 공증인을 갖게 되었다. 1227년 건소바에서 열린 피아스트 공작들의 회의에서 헨리크 1세와 대공 레셰크 1세 백공이 습격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레셰크 1세는 사망하고 헨리크 1세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며, 헨리크 2세는 임시 공작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1229년 헨리크 1세가 마조비아의 콘라트 1세에게 사로잡히면서 헨리크 2세는 다시 한번 임시 공작직을 수행했다.
1229년부터 1230년까지 헨리크 2세는 루부슈 지방을 되찾고 확보하기 위한 군사 원정을 이끌었고, 1233년부터 1234년까지는 프로이센과 대폴란드에서 아버지의 군사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234년, 헨리크 1세는 공식적으로 헨리크 2세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다. 이후 헨리크 1세는 크라쿠프와 실롱스크 공국을, 헨리크 2세는 실롱스크와 대폴란드 공국을 다스렸다. 1238년 3월 19일 헨리크 1세가 사망하면서 헨리크 2세는 실롱스크, 크라쿠프, 대폴란드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2. 2. 단독 통치
헨리 2세는 아버지에게서 돌나 실롱스크를 상속받았다. 남부 대폴란드와 크라쿠프는 피아스트 공작들이 통치했지만, 브와디스와프 3세는 자신의 모든 영지를 헨리 1세에게 유증했다. 그러나 이 유언은 마조비아의 공작 콘라드와 브와디스와프 3세의 조카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에 의해 무시되었다.[5]헨리 2세는 미성년 통치자인 메슈코 2세 뚱뚱이와 볼레스와프 5세 순결왕의 후견인으로서 오폴레-라치부시 공국과 산도미에시 공국에 대한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39년 헨리는 후견인 지위를 사임해야 했지만, 오폴레와 산도미에시 공작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대폴란드의 칼리시와 비엘룬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5]
북서부의 상황은 더욱 복잡했다. 브란덴부르크의 변경백 오토 3세는 중요한 대폴란드 요새인 산토크를 점령하고 루부슈를 포위했다. 헨리 2세는 또한 콘라드,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 그리고 그니에즈노 대주교 펠카가 이끄는 교회와의 분쟁을 상속받았다. 1239년 6월 5일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의 죽음 이후 상황은 예상치 못하게 바뀌었고, 그는 두 아들 프셰미슬 1세와 볼레스와프 경건왕을 남겼다. 헨리 2세는 오도니치의 재산 대부분(그니에즈노 포함)을 차지하고 나크워 나트 노테치옹과 우이시치에를 오도니치의 아들들에게 남겼다.[5]
그 후 헨리는 그의 가문과 신성 로마 제국 호엔슈타우펜 왕가와의 전통적인 동맹을 포기하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를 지지하며 즉시 교회와의 분쟁을 해결했다.[6] 그는 두 딸을 콘라드의 두 아들과 결혼시키는 것으로 콘라드와의 갈등을 종식시켰다. 게르트루데는 마조비아의 볼레스와프 1세와 결혼했고, 브로츠와프의 콘스탄스는 쿠야비아의 카지미르 1세와 결혼했다. 1239년 헨리 2세는 루부슈 전투에서 승리한 후 오토 3세로부터 산토크 요새를 되찾았다.[5]
2. 3. 몽골의 침입과 레그니차 전투
동쪽에서 몽골이 바투 칸의 지휘 아래 나타나 새로운 위협이 되었다. 몽골은 루스 침공 이후 헝가리 왕국을 다음 목표로 삼았다. 바투 칸은 헝가리를 점령하기 전에 폴란드를 장악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1241년 1월, 바투는 정찰 부대를 루블린과 자비호스트로 보냈고, 한 달 뒤 오르다 칸의 지휘 아래 1만 명의 군대가 침략을 시작했다.[7] 소폴란드에서 몽골군은 약한 저항에 직면하여, 투르스코 전투 (2월 13일)와 타르체크 및 흐미엘니크 전투 (3월 18일)에서 크라쿠프와 산도미에르츠 귀족 거의 전부를 격파하고 살해했는데, 여기에는 크라쿠프 보이보드 브와디미에시와 성주 브제즈니차의 클레멘트가 포함되었다. 크라쿠프와 산도미에르츠를 포함한 모든 소폴란드는 몽골군의 손에 넘어갔다.[7]헨리크 2세는 서방 통치자들의 지원을 기다리지 않고, 소폴란드의 생존 병력과 자신의 실레시아 및 대폴란드 군대를 레그니차에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유럽의 통치자들은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청 사이의 투쟁에 더 집중했고, 헨리크 2세의 도움 요청을 무시했다. 그와 합류한 유일한 외국군은 보헤미아의 바츨라프 1세 왕과 일부 템플 기사단의 연합군이었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유럽군은 레그니차 근처에서 병력을 멈췄는데, 아마도 기독교 군대가 몽골의 쉬운 먹잇감이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레그니차 전투는 1241년 4월 9일에 벌어졌다. 헨리크 2세는 패배하여 전사했다.
이 패배는 유럽 군주들, 특히 도움을 거부한 프리드리히 2세 황제와 헝가리의 벨라 4세 왕, 그리고 몽골의 계략에 의해 헨리크 2세의 상부 실레시아 사촌 비만 미에슈코 2세가 예상치 못하게 전투에서 후퇴한 탓으로 널리 여겨졌다. 헨리크 2세의 죽음에 대한 두 가지 설명이 있는데, 하나는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제출한 것(현재는 의심스럽게 여겨짐)이고, 다른 하나는 C. 드 브리지아가 그의 ''타르타리족의 역사''에서 직접적인 증인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현재는 더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짐). 그러나 몽골은 그 나라를 점령할 의사가 없었고, 곧 모라비아를 거쳐 헝가리로 이동하여 바투 칸의 주력 부대와 합류하려 했다. 헨리크 2세의 벌거벗겨지고 머리가 잘린 시신은 그의 다지증 때문에 그의 아내만이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왼쪽 발에 여섯 개의 발가락을 가지고 있었으며,[8] 이는 1832년 그의 무덤이 열렸을 때 확인되었다. 헨리크 2세는 브로츠와프의 성 빈센트와 야곱 프란체스코회 교회 지하 묘지에 묻혔다.
3. 가족 관계
헨리크 2세는 1214년에서 1218년 사이에 보헤미아 왕 오토카르 1세의 딸인 안나와 결혼하여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게르트루데 | 1218/20년경 | 1244/47년 4월 23/30일 | 1232년 마조비아의 볼레스와프 1세와 결혼 |
콘스탄체 | 1221/27년경 | 1253/1257년 5월 3일 | 1239년 쿠야비아의 카시미르 1세와 결혼 |
뿔 달린 볼레스와프 2세 | 1220/25년경 | 1278년 12월 26/31일 | |
미에슈코 | 1223/27년경 | 1241/1242년 | |
백색 헨리 3세 | 1222/30년경 | 1266년 12월 3일 | |
엘리자베스 | 1224/1232년경 | 1265년 1월 16일 | 1244년 대폴란드의 프셰미스우 1세와 결혼 |
콘라트 | 1228/31년경 | 1273/1274년 8월 6일 | |
브와디스와프 | 1237년경 | 1270년 4월 27일 | 보헤미아 재상 (1256년), 파사우 주교 (1265년), 잘츠부르크 대주교 (1265–70년), 잘츠부르크 대성당에 묻힘 |
아그네스 | 123/1236년경 | 1277년 이후 5월 14일 | 트레브니츠의 성 클라라 수도원 원장 |
헤드비히 | 1238/41년경 | 1318년 4월 3일 | 브로츠와프의 성 클라라 수도원 원장 |
참조
[1]
서적
Reading the Middle Ages, Volume II: Sources from Europe, Byzantium, and the Islamic World, c.900 to c.1500, Second Edition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Toronto Press
2013-11-1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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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ABC-CLIO
[3]
웹사이트
Duszpasterstwo Ludzi Pracy '90 w Legnicy - Aktualności
http://dlp90.pl/
[4]
웹사이트
Thirteenth Century
http://newsaints.fai[...]
[5]
웹사이트
The multi-ethnic character of medieval Silesian society and its influence on theregion's cohesion (12th–15th centu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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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ity of Wrocław
2020-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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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ncyklopedia Powszechna PWN Warsaw 1975 vol. III p. 505
[7]
웹사이트
The invasion of the Christian West by the Tatars (Mongols). A clash of civilizations between Frederick II, Gregory IX and the Tat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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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berleninka
2020-10-19
[8]
서적
Mowia, wieki: magazyn historyczny
https://books.google[...]
Państwowe Zakłady Wydawn. Szkolny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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