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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캠벨배너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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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헨리 캠벨배너먼은 1836년에 태어나 1908년에 사망한 영국의 정치인이다. 그는 자유당 소속으로, 1868년 하원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육군 재무 차관, 아일랜드 담당 장관 등을 역임했다. 1899년 자유당 당수가 되었으며, 제2차 보어 전쟁 중 '야만성'을 비판했다. 1905년 총리가 되어 1906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었으나, 상원과의 갈등으로 개혁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하원의 우위를 확립하려 했지만, 건강 악화로 사임했고, 이후 그의 정책들은 후임 내각에서 실현되었다. 캠벨배너먼은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고, 제국주의에 반대했으며, 노동조합 보호와 사회 개량 정책을 지지했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헨리 캠벨배너먼은 1836년 9월 7일,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의 켈빈사이드 하우스에서 제임스 캠벨(1790–1876)과 그의 아내 자넷 배너먼(1799–1873) 사이에서 헨리 캠벨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4] 여섯 자녀 중 둘째 아들이었다. 아버지 제임스 캠벨은 글래스고에서 성공한 의류 사업가로, 형 윌리엄 캠벨과 함께 J.& W. Campbell & Co.를 설립했다.[5] 또한 제임스 캠벨은 글래스고 시의회 의원을 지냈고, 1837년 영국 총선1841년 영국 총선에서 보수당 후보로 글래스고 선거구에 출마했으며, 1840년부터 1843년까지 글래스고 시장을 역임했다.[6]

캠벨배너먼은 글래스고 고등학교 (1845–1847)를 거쳐 글래스고 대학교 (1851–1853)에서 공부했으며, 이후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 (1854–1858)에 진학했다.[7]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는 고전 트리포스에서 3등급 학위를 취득했다.[8]

그의 형인 제임스 알렉산더 캠벨은 1876년 아버지의 스트라캐스로 재산을 상속받았으며, 1880년 영국 총선부터 1906년 영국 총선까지 글래스고와 애버딘 대학교 선거구에서 보수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2]

1860년 사라 샬럿 브루스와 결혼하여 글래스고 파크 지구의 클레어몬트 가든에 신혼집을 마련했다. 부부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8][2]

1871년, 헨리 캠벨은 삼촌 헨리 배너먼의 유언 조건에 따라 자신의 성에 '배너먼'을 추가하여 헨리 캠벨배너먼이 되었다.[9] 이와 함께 그는 헌턴, 켄트에 있는 헌턴 로지(현재 헌턴 코트)의 재산을 상속받았다.[10] 그는 자신의 긴 이름을 좋아하지 않아 친구들에게는 자신을 "C.B."라고 불러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11]

3. 정치 경력

1868년 4월, 31세의 나이로 자유당 후보로서 스터링 버러스 선거구 보궐 선거에 출마했으나, 같은 당 소속 존 램지에게 아쉽게 패배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에 치러진 총선에서는 램지를 누르고 당선되어 하원에 입성했으며, 이후 약 40년간 이 선거구를 대표하게 되었다.[2]

하원 입성 후 빠르게 경력을 쌓아, 1871년 11월 글래드스턴의 첫 번째 내각에서 육군 재무 차관으로 임명되어 1874년까지 에드워드 카드웰 육군 장관 밑에서 일했다. 카드웰이 귀족 작위를 받아 상원으로 옮겨가자, 캠벨배너먼은 하원에서 자유당 정부의 국방 관련 주요 대변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18]

1880년부터 1882년까지 이어진 글래드스턴의 두 번째 내각에서도 같은 직책인 육군 재무 차관을 다시 맡았으며, 이후 1882년부터 1884년까지는 해군 의회 및 재무 차관을 역임했다. 1884년에는 마침내 내각에 합류하여 아일랜드 담당 장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당시 뜨거운 쟁점이었던 아일랜드 자치 문제와 관련된 중요한 자리였다.[2]

이후 1886년 글래드스턴의 세 번째 내각, 1892년부터 1894년까지의 네 번째 내각, 그리고 1894년부터 1895년까지 이어진 로즈베리 백작의 내각에서 연이어 육군 장관을 역임했다.[2] (자세한 내용은 #육군 장관 시절 참고)

1895년 총선 이후 야당이 된 자유당 내에서, 캠벨배너먼은 하원 의장직을 맡으려 했으나 윌리엄 하코트 경과 로즈베리 백작의 반대로 무산되었다.[23] 1899년 2월 6일, 윌리엄 버넌 하코트의 뒤를 이어 하원에서 자유당 대표이자 야당 대표로 선출되었다.[2] (자세한 내용은 #자유당 당수 시절 참고)

3. 1. 육군 장관 시절

글래드스턴의 세 번째 내각이 들어선 1886년에 처음으로 육군 장관에 임명되었다.[2] 이후 1892년부터 1894년까지 이어진 글래드스턴의 네 번째 내각과, 1894년부터 1895년까지의 로즈베리 백작 내각에서도 연이어 육군 장관직을 수행했다.[2] 그의 군사 경험은 30여 년 전 의용군에서 복무했던 것이 전부였다.[2]

육군 장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캠벨배너먼은 울위치 조병창의 탄약 공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8시간 노동제를 시범적으로 도입하는 주목할 만한 정책을 시행했다.[19][20] 이 제도는 생산량 감소 없이 성공적으로 정착했으며, 캠벨배너먼은 이를 육군 의류 부서까지 확대 적용했다.[21] 이는 당시 노동 환경 개선에 기여한 진보적인 조치였다.

또한, 그는 오랫동안 군 개혁의 걸림돌로 여겨졌던 여왕의 사촌, 캠브리지 공작 조지를 설득하여 영국군 총사령관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데 성공했다.[2] 이는 영국군 현대화를 위한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1895년 로즈베리 백작 총리로부터 바스 훈장 1등급(GCB)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1895년 6월, 캠벨배너먼의 소관이었던 육군의 코다이트 비축물 관리가 부실하다는 문제가 하원에서 제기되었고, 이와 관련된 정부안이 의회 표결에서 패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예기치 못한 패배는 자유당 로즈베리 내각의 총사퇴를 불러왔고, 결국 보수당의 솔즈베리 경이 집권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22]

3. 2. 자유당 당수 시절

1899년 8월 10일 '배니티 페어'지에 실린 캠벨배너먼


1895년 총선 패배 이후 자유당은 1905년까지 긴 야당 생활을 시작했다. 1898년 말, 당시 자유당 당수였던 윌리엄 버논 하코트가 사임하자, 캠벨배너먼은 당내 경쟁자였던 애스퀴스를 제치고 1899년 2월 6일 새로운 자유당 당수로 선출되었다.[2]

당수 취임 직후인 1899년 5월 연설에서, 그는 보수당의 외곽 조직인 프림로즈 리그가 "우리나라의 선거 제도에 새로운 요소를 도입했다"고 지적하며, 그 요소가 사실상 뇌물이라고 비판했다.

같은 해, 솔즈베리 후작이 이끄는 보수당 정부가 제2차 보어 전쟁을 시작하면서 자유당은 심각한 내분에 휩싸였다. 당내에서는 전쟁을 지지하는 "자유 제국주의파"(로즈베리 백작, 애스퀴스 등), 전쟁을 비판하는 "친 보어파"(로이드 조지 등), 그리고 전쟁 자체는 지지하지만 조기에 온건한 조건으로 강화를 주장하는 중간파(캠벨배너먼 등)로 나뉘었다. 캠벨배너먼은 당수로서 자유 제국주의파와 친 보어파 사이의 화합을 위해 노력했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점차 친 보어파에 가까운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특히 영국군의 게릴라 소탕전을 "야만적인 방법"(methods of barbarismeng)이라고 비판했다.[2] 이 발언은 큰 파장을 일으켰고, 자유 제국주의파와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켜 당은 분열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자유 제국주의파의 주요 인물이었던 애스퀴스가 캠벨배너먼과 로즈베리 백작 사이에서 중재적인 역할을 하면서 당의 완전한 분열은 막을 수 있었다.

1905년 11월 23일 스털링에서 열린 연설에서 캠벨배너먼은 아일랜드 자치 문제에 대해 아일랜드가 점진적으로 자치권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제국주의 성향이 강했던 로즈베리 백작이 다시 한번 반발하며 캠벨배너먼의 리더십에 도전했지만, 당시 로즈베리 백작의 당내 영향력은 상당히 약화된 상태였다. 결국 애스퀴스가 캠벨배너먼을 지지하면서 로즈베리 백작이 당을 떠나는 선에서 당내 분쟁은 마무리되었다. 이는 캠벨배너먼의 당내 지도력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4. 총리 시절 (1905-1908)

헨리 캠벨배너먼의 스케치


1905년 12월, 아서 밸푸어 보수당 총리가 관세 개혁 논쟁으로 사임하자, 국왕 에드워드 7세는 헨리 캠벨배너먼에게 총리직을 제안하여 20세기 첫 자유당 정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그는 당내 파벌 갈등을 봉합하고 H. H. 아스퀴스, 에드워드 그레이, 리처드 할데인 등을 포함한 내각을 구성했다.

취임 직후 캠벨배너먼은 의회를 해산하고 1906년 영국 총선거를 소집했으며, "평화, 긴축 및 개혁"이라는 전통적인 자유당 강령을 내세웠다. 자유-노동 연대와 보수당의 분열 등에 힘입어 자유당은 총선에서 216석 차의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이로써 캠벨배너먼은 하원에서 절대 다수를 확보한 마지막 자유당 대표가 되었다.[34]

총리 재임 중 캠벨배너먼은 공식적으로 "총리(Prime Minister)"라는 칭호를 사용하도록 허가받은 최초의 재무부 제1경이었으며,[35] 1907년에는 최장수 의원 자격으로 하원의 아버지가 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이는 재임 중인 영국 총리로서는 유일한 사례이다.

캠벨배너먼 정부는 사회 개혁 입법 추진, 보어 전쟁 이후 남아프리카 식민지에 대한 자치 정부 수립 등 제국 정책 변화, 그리고 보수당이 다수를 점한 귀족원과의 갈등 등 주요 과제에 직면했다. 이러한 내용들은 하위 섹션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진다.

1908년 2월 심장 발작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캠벨배너먼은 같은 해 4월 1일 총리직을 사임했고, H. H. 아스퀴스가 후임 총리가 되었다. 캠벨배너먼은 퇴임 직후인 1908년 4월 22일 다우닝가 10번지 관저에서 사망했다.

4. 1. 주요 정책 및 업적

1904년 캠벨배너먼


1905년 12월 아서 밸푸어 총리가 사임하자 에드워드 7세는 캠벨배너먼에게 20세기 첫 자유당 총리로서 정부 구성을 요청했다. 당시 69세였던 그는 20세기에 총리가 된 인물 중 최고령이었다. 캠벨배너먼은 H. H. 아스퀴스, 에드워드 그레이, 리처드 할데인 등이 그를 귀족원으로 보내 실권을 약화시키려던 "렐루가스 협약" 시도를 무력화시키고, 이들에게 각각 재무부 장관, 외무부 장관, 육군 장관직을 제안하여 수락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의회를 해산하고 1906년 영국 총선거를 소집했다.[34]

1905년 12월 22일, 총리로서의 첫 연설에서 캠벨배너먼은 "평화, 긴축 및 개혁"이라는 전통적인 자유당 강령을 내세우며 선거 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자유 무역을 강력히 옹호했으며, 조셉 체임벌린의 관세 개혁 제안이 보호주의적 성격을 띤다고 비판했다.[28][29] 그는 연설에서 군국주의, 사치, 보호주의를 비판하며 자유 무역과 민주주의 원칙 수호 의지를 밝혔다.[33] 또한 노동 대표 위원회와의 글래드스톤-맥도날드 협약을 통해 보수당에 대항하는 자유-노동 연대를 구축한 것도 선거에 영향을 미쳤다.[31]

선거 결과, 자유당은 216석을 추가하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보수당은 의석수가 절반 이상 줄었다. 아서 밸푸어 자신도 지역구에서 낙선했다. 이 승리로 캠벨배너먼은 하원에서 절대 다수를 확보한 마지막 자유당 대표가 되었다.[34]

총리 재임 중 캠벨배너먼은 공식적으로 "총리(Prime Minister)"라는 칭호를 사용하도록 허가받은 최초의 재무부 제1경이 되었다.[35] 또한 1907년에는 최장기간 의원 자격으로 하원의 아버지가 되었는데, 이는 재임 중인 영국 총리로서는 유일한 사례이다.

캠벨배너먼 정부는 사회 개혁 입법을 추진했다. 선거 연설에서 그는 빈곤법 개혁, 실업률 감소, 열악한 공장 근로 조건 개선을 지지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지지했지만, 지나친 국가 간섭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37] 그는 "만약 사회 구조 전체를 지탱하는 노동자들이 계속 어둠과 비참 속에서 살고 죽는다면, 우리의 부와 학문, 문명, 헌법과 정치 이론은 단지 먼지와 재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2]

주요 입법 성과는 다음과 같다.

  • 1906년 교육 (급식 제공)법: 지방 당국이 아동들에게 무상 급식을 제공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의무는 아니었다).
  • 1906년 노동 쟁의법: 노동조합의 파업권 등 권한을 강화했다.
  • 1906년 근로자 보상법: 일부 노동자들이 직장에서 사고를 당했을 경우 고용주에게 보상을 청구할 권리를 부여했다.
  • 1907년 범죄자 보호법: 젊은 범죄자들에게 징역형 대신 지역 사회 내 보호관찰 제도를 도입했다.[38]


이러한 개혁들은 이후 H. H. 아스퀴스 정부에서 이루어진 광범위한 자유주의 복지 개혁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캠벨배너먼 자신은 1906년 여성 참정권 운동가 대표단의 면담 요청에 대해 내각이 여성 참정권 부여에 반대할 것이라고 답하기도 했다.[38] 일부에서는 그의 정부가 다소 보수적이었다는 평가도 있지만[36], 다른 한편에서는 그가 공공 지출 삭감을 선호하는 글래드스턴식 자유주의자였기에 야심 찬 사회 개혁 계획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1]

4. 2. 외교 정책

캠벨배너먼은 총리로서 1907년 만국 평화 회의를 앞두고 군비 제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43] 그는 1907년 3월 발표한 기사 "''헤이그 회의와 군비 제한''"에서 평화 운동의 도덕적 권위를 근거로 영국과 독일 간의 해군 군비 경쟁을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러한 노력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44] 1907년 헤이그 협약에서는 잠수함 기뢰나 열기구를 이용한 공격 등 새로운 형태의 무기 사용을 일부 제한했을 뿐, 해군 군비 지출에 대한 제한은 합의되지 않았다.[45]

1906년,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가 국가 두마를 해산하자 캠벨배너먼은 "두마는 죽었다. 두마 만세!"라고 발언하여 러시아 정부와 외교적 마찰을 빚기도 했다.[4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임 기간 중 외무장관 에드워드 그레이 주도로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영-러 협상이 1907년에 체결되었다.[46]

프랑스와의 관계에서는, 1906년 1월 그레이 외무장관이 영국과 프랑스 간 군사 참모 회담을 승인했다. 이 회담에서는 프랑스와 독일 간 전쟁 발발 시 2주 안에 10만 명의 영국군을 프랑스에 파견하는 계획 등이 논의되었다. 캠벨배너먼은 뒤늦게 이 사실을 보고받고 승인했는데, 이는 훗날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시 영국 해외원정군 파병의 기초가 되었다.[47] 하지만 캠벨배너먼은 이것이 구속력 있는 군사적 약속은 아니라고 여겼으며, 내각 내 급진파(로어번 경, 몰리 경, 브라이스 경 등)의 반발을 우려해 이를 다른 각료들에게 알리지 않았다.[48]

1907년 4월 프랑스를 방문하여 급진당 (프랑스) 소속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를 만났을 때, 캠벨배너먼은 영국이 독일에 맞서 프랑스를 지원할 의무는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 클레망소는 영국의 군비 축소와 대륙 파병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에 실망감을 표하며, 이것이 앙탕트 코르디알의 실질적인 의미를 훼손한다고 비판했다.[49][50] 이 만남은 캠벨배너먼의 평화주의적 이상과 냉혹한 국제 정치 현실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51][52]

한편, 캠벨배너먼 정부는 보어 전쟁 이후 칙령을 통해 옛 보어 공화국이었던 트란스발과 오렌지 강 식민지에 자치 정부를 수립하도록 허용했다. 이는 상원의 반대를 우회한 조치였다.[53] 이러한 결정은 1910년 남아프리카 연방 창설의 기반이 되었다. 남아프리카 연방의 초대 총리가 된 루이스 보타 장군이나 얀 스뮈츠 같은 보어인 지도자들은 캠벨배너먼의 관대한 정책이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남아프리카의 미래를 위한 길을 열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54][55] 그러나 알프레드 밀너와 같은 제국주의 성향의 연합주의 정치인들은 이를 '순수한 광기'라며 강하게 비판했다.[56]

4. 3. 상원과의 갈등 및 개혁 시도

보수당이 다수를 점한 상원은 자유당 정부의 개혁 입법을 가로막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헨리 캠벨배너먼 총리는 상원의 권한을 제한하는 개혁을 추진했다. 1907년 6월 26일, 그는 상원이 명목상의 특권만 유지하고 실질적인 입법 권한은 가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하원이 상원의 반대를 일정 기간(몇 달) 감수한 뒤, 1년이 지나면 상원의 동의 없이도 청교도 혁명 당시 장기 의회처럼 하원 단독으로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다.[39] 이는 추가적인 총선 없이 하원의 우위를 확립하려는 의도였다.[40]

윌리엄 샤프 맥케치니와 같은 비판가들은 이러한 구상이 "시험되지 않은 단원제 입법부"를 만드는 것이며, "혁명적인 절차를 통해서만 실행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41]


5. 사임 및 사망

1907년 원로가 된 직후부터 캠벨배너먼의 건강은 나빠지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 심장마비를 겪었으며, 특히 1907년 11월에 가장 심각한 발작을 겪은 뒤로는 임기를 마치지 못할 것을 우려했다. 결국 1908년 4월 3일 총리직에서 사임했고,[60] 후임으로는 당시 재무부 장관이었던 H. H. 아스퀴스가 임명되었다.

캠벨배너먼은 사임 후에도 영국 국회의원직과 자유당 대표직을 유지했으며, 10 다우닝가에 계속 머물렀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어, 사임한 지 19일 만인 1908년 4월 22일 10 다우닝가에서 사망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이것이 나의 끝은 아니다"였다.[61] 그는 현재까지 10 다우닝가에서 사망한 유일한 영국 총리이다.[62]

캠벨배너먼은 1887년부터 거주했던 벨몬트 성 근처 메이글에 있는 메이글 교구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교회 바깥 벽에는 비교적 소박한 석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헌턴 성 마리아 교회 본당 벽에는 헨리 캠벨배너먼을 기리는 대리석 기념판이 있다.[63]

6. 유산 및 평가

1908년 4월 3일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같은 해 4월 22일 10 다우닝가에서 사망했다. 그는 현재까지 10 다우닝가에서 사망한 유일한 전직 총리로 기록되어 있다.[62] 그의 유해는 1887년부터 거주했던 벨몬트 성 인근 메이글의 메이글 교구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교회 외벽에 비교적 소박한 석판 기념비가 세워졌다.

6. 1. 당대 및 후대의 평가

캠벨배너먼 동상 in 스털링


폴 라파엘 몬트포드가 그린 헨리 캠벨배너먼


런던 그로스버너 플레이스 6번지에 있는 푸른색 명판


캠벨배너먼이 사망한 날, 내셔널 리버럴 클럽(National Liberal Club)의 깃발은 조기로 게양되었고, 그의 초상화는 애도의 표시로 검은 천으로 덮였다.[64] 아일랜드 민족주의당 지도자 존 레드먼드(John Redmond)는 "우리 모두는 아일랜드가 용감하고 사려 깊은 친구를 잃었다고 느낍니다"라며 애도를 표했다.[64]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는 캠벨배너먼의 죽음에 대해 깊은 슬픔을 나타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저는 지역 사회 전체가 마치 친척을 잃은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치에 입문한 이후 그와 접촉한 사람들의 애착과 애정을 완전히 얻은 훌륭한 공인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는 존경받고 존경받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절대적으로 사랑받았습니다... 이 나라의 대중, 특히 그들 중 불운한 사람들은 그들이 이 땅의 높은 곳에서 가졌던 가장 좋은 친구를 잃었습니다. 고통에 대한 그의 공감은 진실하고 깊고 꾸밈이 없었습니다. 그는 진정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훌륭한 머리와 훌륭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제가 정치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두려움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일랜드는 확실히 그녀의 가장 진정한 친구 중 한 명을 잃었습니다.[64]

캠벨배너먼의 후임 총리 H. H. 아스퀴스(H. H. Asquith)는 그의 장례식 날인 4월 27일 하원에서 감동적인 추도 연설을 통해 그의 인품과 정치적 신념을 기렸다.

> 그는 이 마지막 날들에 모든 정당과 모든 신조를 가진 사람들의 존경과 애정을 의심할 여지 없이 받았습니다... 그는 인간의 고통과 잘못에 매우 민감했고, 그의 공감은 섬세하고 부드러웠으며... 거의 열정적인 평화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시대에 더 큰 용기를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정치에서 저는 그를 목표에 있어서는 이상주의자이고 기질에 있어서는 낙관주의자라고 묘사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위대한 대의가 그에게 호소했습니다... 그는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해 아무런 의구심도 품지 않았습니다. 그는 끊임없는 진보와 인류의 성장하는 단결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끈기 있고 타협하지 않는 투사였고, 강력한 당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떠한 원한도 품지 않았고, 친구든 적이든 다른 사람의 업적에 대한 인정에 관대했습니다... 그는 휴식을 취했고, 오늘 그는 이 하원에서 가장 선임되고 가장 존경받는 회원이었으며, 우리는 당의 갈등을 잠시 중단하고, 우리의 공통된 손실을 함께 기억하며, 은혜롭고 소중한 기억에 대한 우리의 통합된 경의를 표할 수 있습니다.[65][66][67]

노동 조합원이자 노동당 국회의원이었던 로버트 스밀리(Robert Smillie)는 글래드스턴 이후 캠벨배너먼이 자신이 만난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68]

역사가들은 캠벨배너먼의 총리 재임 기간(28개월)이 상대적으로 짧고, 복수 투표 폐지, 토지 개혁, 면허 개혁 등 주요 법안들이 보수적인 상원의 반대로 좌절되어[69] 큰 개혁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에 대체로 동의한다. 1906년과 1907년의 교육 법안 역시 통과되지 못했다. 통과된 법안들은 주로 기술적인 문제거나 초당적 합의의 결과였다. 캠벨배너먼은 상원의 거부권을 극복할 뚜렷한 계획이 부족했고, 내각 운영에 있어 다소 소극적이었다는 비판도 받는다. 특히 외교 정책 감독 소홀과 프랑스와의 국방 논의 시 내각과의 불충분한 협의는 그의 능력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했다.[69]

그러나 역사가들은 그의 재임 기간이 아스퀴스 정부 하에서 더 효과적인 정책 추진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 등 긍정적인 측면도 인정한다. 그는 스코틀랜드 출신 총리로서 스코틀랜드의 정치적 통합을 상징했으며, 토지를 소유한 귀족 배경이 아닌 사업 경험을 가진 최초의 총리였다.[69]

캠벨배너먼의 정치적 이념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역사가 조지 덴저필드는 1935년 그의 죽음이 "진정한 자유주의의 종말과 같았다"고 평가하며, 그를 리처드 코브덴과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으로 대표되는 19세기적 자유주의, 즉 "평화, 절약, 개혁"을 중시하는 글래드스턴 자유주의의 마지막 계승자로 보았다.[70][1] R. B. 맥칼럼 역시 그를 "순수한 글래드스턴 시대의 인물"이자 "급진파의 영웅"으로 묘사했다.[72]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캠벨배너먼 정부를 "구식 자유주의 정부"로 분류하며, 그의 후임자인 아스퀴스 정부에서야 비로소 신자유주의적인 사회 정책 실험이 시작되었다고 보았다.[73]

반면, 다른 연구들은 캠벨배너먼을 진정한 진보적 인물로 평가한다. 한 연구는 그의 견해가 "당의 중도 좌파와 일치했으며, 개인의 자유에 대한 믿음, 불우한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열망, 제국주의에 대한 혐오, 아일랜드 자치에 대한 지지"를 특징으로 한다고 분석했다.[74] 실제로 그는 총리 재임 중 노동조합 보호,[75] 노령 연금 도입,[76] 주택 개선을 위한 도시 계획[77] 등 사회 개혁 조치들을 지지했다. 이미 1903년에 그는 "잉글랜드의 1,200만 명이 기아 직전에 살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며 자유당이 이 문제 해결에 나설 것임을 시사했다.[78] 훗날 노동당 지도자가 된 조지 랜즈버리는 캠벨배너먼을 존경하며 그를 "평화를 믿고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실업이 국가적인 문제이고 실업자는 국가의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던" 인물로 기억했다.[79] 이는 그가 단순한 구시대적 자유주의자를 넘어, 사회 문제 해결에 적극적이었던 진보적 면모를 가졌음을 보여준다.

폴 라파엘 몬트포드가 조각한 그의 청동 흉상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으며,[80] 런던 그로스버너 플레이스 6번지에 있는 그의 옛 집에는 2008년 푸른색 명판이 설치되었다.[81] 캠벨배너먼은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패러디한 캐롤라인 루이스(필명)의 정치 풍자 소설 ''블런더랜드의 클라라''(1902)와 ''블런더랜드에서 길을 잃다''(1903) 등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하기도 했다.[8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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