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무트 크노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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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헬무트 크노헨은 1910년 마그데부르크에서 태어나 괴팅겐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나치당이 정권을 잡기 전인 1932년에 입당했다. 1940년 파리의 보안 경찰 및 보안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2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강제 수용소로 보냈고, 프랑스 유대인 이송과 프랑스인 처형에 관여했다. 1946년 영국 군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1962년 샤를 드 골 대통령의 사면으로 석방되었으며, 2003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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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무트 크노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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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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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 복무 정보 | |
복무 기간 | 1936년–1945년 |
별칭 | 해당 없음 |
충성 | 나치 독일 |
계급 | SS-슈탄다르텐퓌러 |
병과 | 슈츠슈타펠 |
지휘 | 보안 경찰 (파리) 지허하이트폴리차이 지허하이츠딘스트 |
범죄 정보 | |
이름 | 헬무트 크노헨 |
출생일 | 1910년 3월 14일 |
출생지 | 마그데부르크, 작센주, 독일 제국 |
사망일 | 2003년 4월 4일 |
사망지 | 바덴바덴, 바덴뷔르템베르크, 독일 |
사망 원인 | 해당 없음 |
유죄 판결 | 영국 군사 법원 전쟁 범죄 프랑스 군사 법원 전쟁 범죄 |
형벌 | 영국 군사 법원 사형; 종신형으로 감형; 21년형으로 추가 감형 프랑스 군사 법원 사형; 종신형으로 감형 |
범죄 상태 | 사망 |
2. 생애
1910년 독일 마그데부르크 출생으로, 대학에서 역사학과 영어를 공부하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 나치당에는 1932년 입당했으며, 1936년부터 친위대(SS) 소속으로 보안대(SD)에서 활동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0년 프랑스 파리의 보안 경찰 및 SD 사령관( Befehlshaber der Sicherheitspolizei und des SD|BdSde )으로 임명되어 나치 독일의 점령 정책을 수행하는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전후 영국과 프랑스에서 전범으로 재판받아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되었고, 1962년 사면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독일에서 보험 대리인 등으로 생활하다 2003년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1910년 독일 마그데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라이프치히 대학교와 괴팅겐 대학교에서 역사학과 영어를 공부하고, 괴팅겐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나치당에 입당하기 전에는 교사와 편집자로 활동했다.나치당이 정권을 잡기 전인 1932년에 입당했으며, 1936년에는 친위대(SS)에 입대하였다. 이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이끄는 보안대(SD)에 배속되어 II국 1부 2과(정치적 적 부서)의 과장을 맡았다. 그의 부서는 좌익 활동 감시를 담당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2. 2. 나치 경력
헬무트 크노헨은 1910년 독일 마그데부르크에서 태어나 라이프치히 대학교와 괴팅겐 대학교에서 역사학과 영어를 공부하고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나치당(NSDAP)이 정권을 장악하기 전인 1932년에 이미 당에 가입했다.1936년에는 친위대(SS)에 입대하여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이끄는 보안대(SD)에 배속되었다. SD 내에서는 II국 1부 2과(정치적 적 부서)의 과장을 맡아 좌익 활동 감시 등을 담당했다.
1940년 5월,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파리의 보안 경찰 및 SD 사령관( Befehlshaber der Sicherheitspolizei und des SD|BdSde )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파리에서 부관 쿠르트 리슈카, 파리 친위대 및 경찰 고급 지도자 카를 오베르크와 함께 활동하며 점령 정책을 집행하는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그의 지휘 아래 수많은 프랑스 유대인들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으며, 다수의 프랑스인들이 처형되었다. 1942년에는 친위대 대령(Standartenführerde)으로 진급했으며, 그의 관할 구역은 북부 프랑스와 벨기에까지 확장되었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 파리에서 카를-하인리히 폰 튈프나겔 장군이 주도한 쿠데타 시도 중에 잠시 체포되었으나, 쿠데타가 실패하면서 석방되었다. 파리 해방 이후에는 제1SS 기갑사단 SS 아돌프 히틀러로 전출되었고, SS-척탄병( Grenadierde ) 계급으로 강등되었다.
2. 2. 1. 파리 점령 시기 활동
1940년 5월,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크노헨은 파리의 보안 경찰(Sicherheitspolizei) 및 보안대(SD) 사령관(Befehlshaber der Sicherheitspolizei und des SD|BdSde)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부관 쿠르트 리슈카(Kurt Lischka)와 파리의 친위대 및 경찰 고급 지도자(Höhere SS und Polizeiführer, HSSPF) 카를 오베르크(Karl Oberg)와 협력하여 점령 하의 파리에서 활동했다. 이들은 20만 명이 넘는 프랑스 유대인들을 각지의 강제 수용소로 이송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또한 크노헨은 수천 명의 프랑스인을 처형하고 영국의 특수 작전 집행부(Special Operations Executive, SOE) 요원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는 데에도 책임이 있었다. 1942년에는 그의 관할 구역이 북부 프랑스에서 벨기에까지 확장되었고, 그는 친위대 슈탄다르텐퓌러(Standartenführer, 대령급) 계급으로 진급했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 파리 군정 총독 카를-하인리히 폰 튈프나겔 장군이 쿠데타를 시도했을 때, 크노헨은 파리의 최고 보안 책임자인 SS-그루펜퓌러(Gruppenführer) 카를 오베르크와 함께 육군 병력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러나 쿠데타가 실패하면서 곧 석방되었다. 연합군에 의한 파리 해방 이후, 크노헨은 제1SS 기갑사단 SS 아돌프 히틀러로 전출되었고, SS-척탄병(Grenadier, 그레나디어) 계급으로 강등되었다.
2. 2. 2. 파리 해방 이후
파리 해방 후 크노헨은 제1SS 기갑사단 SS 아돌프 히틀러로 전출되었고, SS-그레나더 계급으로 강등되었다.전후인 1946년 6월, 크노헨은 영국 군사 재판소로부터 영국인 비행기 조종사를 살해한 죄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형은 집행되지 않았고, 1947년 7월 프랑스로 이송되었다. 프랑스에서 크노헨은 1954년 10월 파리의 프랑스 군사 재판소에 의해 또 다시 사형 판결을 받았다. 1958년 판결에서는 종신형으로 감형되었고, 1962년에 샤를 드 골 대통령의 사면에 따라 프랑스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석방 후 크노헨은 처음에는 바덴바덴에 머물렀으나, 그 후 클라우슈탈첼러펠트(Clausthal-Zellerfeld) 근교의 하넨클레(Hahnenklee)로 거처를 옮겼다. 1963년 이후에는 오펜바흐 암 마인(Offenbach am Main)에 거주하며 보험 대리인으로 일하다가 은퇴하였고, 2003년 바덴바덴에서 사망하였다.
2. 3. 전후 재판, 형벌 및 사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46년 6월, 크노헨은 부퍼탈에서 열린 영국 군사 재판소에서 보주 지역에서 포로가 된 영국인 조종사를 살해한 혐의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1] 다른 자료에 따르면 1947년 3월, 1944년 8월 9일경 다수의 영국 공수 부대원을 살해한 혐의로 한스 키퍼와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다고도 한다. 그러나 형은 집행되지 않았고, 1947년 7월 1일 프랑스로 인도되었다.[1]프랑스에서 크노헨은 1954년 10월 10일 파리의 프랑스 군사 재판소로부터 다시 사형 판결을 받았다.[1] 하지만 1958년, 이 판결은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1] 이후 1962년 11월 28일, 샤를 드 골 프랑스 대통령의 사면에 따라 전 상관이었던 카를 오베르크와 동시에 석방되었다.[1]
독일로 돌아온 크노헨은 처음에는 바덴바덴에 정착했으나, 이후 클라우슈탈첼러펠트(Clausthal-Zellerfeld) 근교의 하넨클레(Hahnenklee)로 이주했다.[1] 1963년부터는 오펜바흐 암 마인에 거주하며 보험 대리인으로 일했다.[1] 그는 은퇴 후 1982년에 두 번째 결혼을 했으며, 2003년 4월 4일 바덴바덴에서 향년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2. 4. 석방 후 생애
1946년 6월, 영국 군사 재판소는 크노헨이 보주에서 포로가 된 영국인 조종사를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형은 집행되지 않았고, 1947년 7월 1일 프랑스로 이송되었다. 1954년 10월 10일, 파리의 프랑스 군사 재판소는 그에게 다시 사형을 선고했다. 1958년, 이 판결은 종신형으로 감형되었으며, 1962년 샤를 드 골 대통령의 사면 조치에 따라 프랑스 감옥에서 석방되었다.독일로 돌아온 크노헨은 처음에는 바덴바덴에 정착했으나, 이후 클라우슈탈첼러펠트 근처의 하넨클레(Hahnenklee)로 이주했다. 그는 첫 번째 결혼에서 장남을 두었다. 1963년부터는 오펜바흐 암 마인에 거주하며 보험 대리인으로 일했다. 1982년에 두 번째 결혼을 했으며, 은퇴 후 2003년 4월 4일 바덴바덴에서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대중문화 속 헬무트 크노헨
- 비시의 눈(The Eye of Vichy): 클로드 샤브롤이 감독한 프랑스 다큐멘터리 영화로 크노헨이 직접 출연했다.[1]
- 관대한 여인들(Les Bienveillantes): 조너선 리텔이 프랑스어로 쓴 2006년 역사 소설로, 헬무트 크노헨이 주인공 막시밀리안 아우에를 만나는 장면이 등장한다.
- 《Field Gray》: 필립 커의 2010년 소설로, 크노헨이 등장한다.
- 《93 Rue Lauriston》: 프랑스 게슈타포에 관한 2003년 TV 영화다.
- 《The Great Arrangement》: 협력자 르네 부케에 관한 2007년 TV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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