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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모토노 다메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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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나모토노 다메토모는 헤이안 시대 말기 무사로, 《호겐 이야기》를 통해 묘사된 뛰어난 활 솜씨로 유명하다. 다메토모는 규슈에서 세력을 떨치다 호겐의 난에 참전하여 활약했으나, 패배 후 유배되었다. 이후 이즈 제도에서 반란을 일으키다 자결했으며, 그의 용맹함은 다양한 전설과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류큐 왕국의 시조 슌텐이 그의 아들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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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모토노 다메토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쇼조쿠를 입고 활을 겨누는 미나모토노 다메토모
이름미나모토노 다메토모
일본어 표기源 為朝
다른 이름친제이 하치로 다메토모 (鎮西 八郎 為朝)
출생1139년
사망1170년 4월 23일 (추정)
사망 장소히고 국
소속미나모토 씨
아버지미나모토노 다메요시
어머니에구치의 유녀
배우자다이라노 다다쿠니의 딸, 아타노 다다카게의 딸?
자녀미나모토노 요시자네, 미나모토노 사네노부, 미나모토노 다메요리 (헤이 요리모토), 미나모토노 아사치카 (미나모토노 요시카네), 미나모토노 다메이에, 아시카가 시게나가의 아내, 슌텐 (손톤), 사네히사 산지로?
무덤오카야마현 이하라시 몬덴초 외
신분무관 (칭: 친제이 소추포사)
군사 경력
소속미나모토 씨
주요 전투호겐의 난, 시라카와덴 전투

2. 생애

미나모토노 다메토모의 생애는 주로 헤이안 시대의 군담소설인 《호겐 이야기》(保元物語)에 크게 의존하여 알려져 있다. 이 작품에서 다메토모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초인적인 활약을 펼치지만, 그 내용은 과장된 부분이 많아 역사적 사실로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러나 다른 기록들을 통해 그의 존재와 뛰어난 무용은 확인된다. 가마쿠라 시대 중기에 성립된 역사서 《구칸쇼》(愚管抄)에는 다메토모가 형 요리카타와 함께 호겐의 난에서 분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가마쿠라 막부의 공식 역사서인 《아즈마카가미》(吾妻鏡) 겐큐 2년(1191년) 8월 1일 조에는, 호겐의 난 당시 다메토모에게 화살을 맞았던 오바 카게요시가 그를 "천하에 비길 데 없는 활쏘기의 달인(無雙の弓矢の達者|무소노 유미야노탓샤일본어)"이라고 증언하는 내용이 실려 있어, 다메토모가 당대에 뛰어난 무사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동시대 인물인 다이라노 노부노리의 일기 《병범기》(兵範記)와 후지와라노 요리나가의 일기 《대기》(台記)에는 규주 원년(1154년) 11월 26일, 다메토모가 규슈에서 일으킨 소란 때문에 아버지 다메요시가 관직에서 해임되었다는 기록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병범기》에는 호겐 원년(1156년) 8월 26일, 다메토모가 미나모토노 시게사다에게 체포되었다는 단편적인 기록도 남아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호겐 이야기》의 내용을 일부 뒷받침하며, 다메토모의 생애를 재구성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하 본 항목에서는, 주로 《호겐 이야기》에 기록된 내용을 따라 타메토모의 생애를 짚어본다.

2. 1. 진세이 총추포사 (鎮西総追捕使)

거만한 성격 탓에 형들 앞에서도 겸손하지 않았던 다메토모는 13세 때 아버지 미나모토노 다메요시에게 의절당하고 규슈로 추방되었다. 그는 오와리 곤노카미(權守) 이에토(家遠)의 후견을 받아 분고국에 살게 되었으며, 이후 사쓰마국 아타군을 거점으로 삼던 아타노 타다카게의 사위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일설에는 히고국 아소군의 타이라노 타다쿠니의 사위라는 설도 있다).

규슈에 정착한 다메토모는 스스로 '''진세이 총추포사'''(鎭西總追捕使)를 자칭하며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그는 기쿠치 씨, 하라다 씨 등 규슈의 여러 호족들과 수십 차례에 걸쳐 전투와 공성전을 벌였고, 불과 3년 만에 규슈 일대를 평정하였다.

다메토모의 이러한 행위는 규슈 지역에 큰 혼란을 야기했으며, 가시이구의 신관들이 그의 난행을 조정에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규주 원년(1154년) 도바 상황은 다메토모에게 교토로 상경하라는 선지를 내렸다. 동시대 기록인 『병범기』와 『대기』에도 다메토모의 규슈에서의 난행으로 인해 아버지 다메요시가 관직을 박탈당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메토모는 처음에는 조정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으나, 이듬해인 규주 2년(1155년) 아버지 다메요시가 게비이시에서 해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경을 결심했다. 그는 규슈에서 규합한 강자 28기를 이끌고 교토로 상락했다.

2. 2. 호겐의 난 (保元の乱)

호겐 원년(1156년) 도바 법황이 붕어하자, 스토쿠 상황고시라카와 천황 사이의 황위 계승 갈등이 무력 충돌로 이어질 상황이 되었다. 양측은 유력 무사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고, 다메토모의 아버지 미나모토노 다메요시는 스토쿠 상황 측의 대장으로 초빙되었다. 다메요시는 고령을 이유로 사양했으나 결국 수락했고, 다메토모는 다섯 형제와 함께 아버지를 따라 스토쿠 상황의 거처인 시라카와 호쿠덴으로 갔다. 반면, 다메요시의 장남이자 다메토모의 형인 미나모토노 요시토모간토의 무사들을 이끌고 다이라노 기요모리와 함께 고시라카와 천황 편에 섰다.

다메토모는 3척 5촌(약 105cm) 길이의 칼을 차고, 다섯 사람이 달라붙어야 겨우 당길 수 있는 8척 5촌(약 255cm) 길이의 강궁을 들고 시라카와 호쿠덴 서쪽 문을 지켰다. 7월 11일 군사 회의에서 다메토모는 야습을 제안했다. "밤중에 다카마쓰도노를 기습하여 불을 지르면 쉽게 이길 수 있습니다. 형 요시토모가 나오면 제가 쏘아 죽이고, 기요모리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습니다. 천황이 탄 수레를 공격해 천황을 사로잡읍시다." 그러나 사대신 후지와라노 요리나가는 "야습은 무사들끼리의 사적인 싸움에서나 하는 짓이다. 이것은 천황과 상황의 싸움이니, 나라고후쿠지 승병들이 도착하면 정식으로 결전을 치르겠다"며 거절했다. 다메토모는 형 요시토모가 반드시 야습을 해올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날 밤, 다메토모의 예상대로 고시라카와 천황 측이 시라카와 호쿠덴을 야습했다. 상황 측은 급히 다메토모를 구란도(蔵人)에 임명하려 했으나, 그는 "진제이하치로(鎭西八郞)면 충분하다"며 사양했다.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군대가 서문으로 공격해오자, 기요모리의 부하 이토 가게쓰나와 그의 아들 다다키요, 다다나오 형제가 나와 싸움을 걸었다. 다메토모가 "기요모리가 직접 와도 모자랄 판에 너희 따위는 상대가 안 된다"고 소리치자, 다다나오가 화살을 쏘겠다고 맞섰다. 다메토모는 "네 마지막 소원이라면 들어주마"하며 7촌 5푼(약 22cm) 길이의 화살촉이 달린 화살을 쏘아 다다나오를 꿰뚫었고, 화살은 뒤에 있던 다다키요의 갑옷 소매까지 박혔다. 기요모리 군대는 공포에 질려 북문으로 방향을 돌렸다. 힘이 세기로 유명한 이가국 출신 야마다 고자부로 고레유키가 분하다며 나섰지만, 그가 쏜 화살은 빗나갔고, 다메토모가 쏜 화살에 맞아 말과 함께 꿰뚫렸다.

기요모리 군대 대신 형 요시토모의 군대가 쳐들어왔다. 요시토모의 부하 가마타 마사키요가 이름을 외치며 나서자, 다메토모는 "네 주인 앞에서 물러가라"고 외쳤다. 마사키요는 "지금은 당신은 칙명을 어긴 역적일 뿐"이라며 화살을 쏘아 다메토모의 투구에 맞혔다. 격분한 다메토모는 "네놈 따위는 화살도 아깝다"며 자신의 부하 진제이 무사 28기를 이끌고 돌격했고, 마사키요는 겨우 도망쳤다. 요시토모는 "말 위에서의 싸움은 반도 무사가 진제이 무사보다 낫다"며 반도 무사 200기를 이끌고 공격하여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요시토모가 "칙명이다, 물러서라!"고 외치자 다메토모는 "우리가 받드는 것은 상황의 명이다(인센)!"라고 맞받아쳤다. 요시토모가 "형에게 활을 겨누면 신불의 가호를 잃을 것"이라고 하자, 다메토모는 "그럼 아들이 아버지에게 활을 겨누는 것은 어떠냐?"고 반박했고, 요시토모는 할 말을 잃었다.

수적으로 불리해진 다메토모는 일단 문 안으로 후퇴했다. 추격해오는 요시토모를 발견한 다메토모는 쏘려 했으나, 아버지와 형 사이에 혹시 모를 밀약이 있을까 망설였다. 대신 요시토모를 위협하여 물러나게 하려고 쏜 화살은 요시토모의 투구 장식을 부러뜨렸다. 요시토모가 "과연 난폭한 놈이로구나"라고 소리치자, 다메토모는 "원한다면 한 발 더 쏘아주겠다"며 활을 당겼다. 그 순간 후카스 기요쿠니가 둘 사이에 뛰어들었고, 다메토모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오바 가게요시와 가게치카 형제가 덤벼들었으나, 다메토모가 시험 삼아 쏜 가부라야(명적)에 가게요시가 왼쪽 무릎을 맞아 말에서 떨어졌고, 가게치카는 형을 데리고 도망쳤다. 훗날 가게요시는 다메토모를 "천하에 비할 데 없는 활의 명수였으나, 자기 키보다 큰 활을 사용했기에 말 위에서는 조준이 익숙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격전 끝에 다메토모의 부하 28기 중 23기가 전사했고, 요시토모 측 반도 무사도 53기가 죽었다. 다른 문에서도 전투가 치열해 승패가 쉽게 나지 않자, 요시토모는 고시라카와 천황에게 시라카와 호쿠덴에 불을 지를 것을 허락받았다. 불화살이 날아들자 궁궐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고, 스토쿠 상황 측은 혼란에 빠져 흩어졌다. 다메토모는 50여 발의 화살을 쏘며 끝까지 항전하다가, 마지막 남은 명적을 시라카와 호쿠덴 정문에 쏘아 맞히고 퇴각했다.

패배 후 다메요시는 아들들과 동쪽으로 가 재기를 노리려 했으나, 결국 출가하여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다메토모는 끝까지 반대했지만, 다메요시는 아들 요시토모가 자신들을 도우리라 믿고 항복했다. 그러나 다메요시와 아들들은 용서받지 못했고, 결국 고시라카와 천황의 명으로 아들 요시토모의 손에 처형당했다. 다메토모는 오미국 사카타(시가현 사카타군)까지 도망쳐 숨었으나, 온천에서 병을 치료하던 중 밀고로 인해 사도 시게사다에게 발각되어 저항도 못 하고 체포되었다.

교토로 압송될 때 그의 명성을 듣고 많은 구경꾼이 몰렸으며, 천황까지 직접 보러 나올 정도였다. 다메토모는 뛰어난 무용 덕분에 사형은 면했지만, 8월 26일 팔꿈치 힘줄이 끊겨 다시는 활을 쏠 수 없는 몸이 된 채 이즈 오시마로 유배되었다. 그의 감형에 대해, 단순히 무용을 아까워해서라기보다는 전투 직후의 혼란이 가라앉고 사형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진 당시 조정의 분위기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2. 3. 이즈 유배와 최후

이즈 오시마(大島)로 유배된 다메토모는 팔꿈치 부상이 치유되면서 강궁 실력이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 그는 섬의 대관(代官) 사부로다이후 다다시게(三郞大夫忠重)의 사위가 되어 이즈 제도를 장악하고 조정에 바치던 세금 납부를 거부했다. 당시 이즈 제도를 영지로 다스리던 이즈노스케(伊豆介) 구도 시게미츠(工藤茂光)를 두려워한 다다시게가 몰래 조정에 연공을 바치자, 격분한 다메토모는 다다시게의 양손 손가락 세 개씩을 잘라버렸다. 또한 섬 안에서 무용이 뛰어난 자들을 자신의 적으로 간주하여 팔을 부러뜨리고, 자신이 가진 것 이외의 화살은 모두 태워 버리도록 했다.

에이만(永万) 원년(1165년), 하치조지마에 머물던 다메토모는 동쪽으로 날아가는 왜가리백로를 보고 그 너머에 섬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배를 타고 새떼를 쫓아 미지의 섬 오니가시마(鬼が島)에 도착하여 섬 이름을 노지마(蘆島) 또는 아시 섬(葦島)이라 짓고, 주민(혹은 거인) 한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를 통해 다메토모는 이 섬을 포함한 이즈 칠 섬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다메토모에게 영지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한 구도 시게미츠는 가오(嘉應) 2년(1170년) 다메토모의 난폭함을 조정에 고발했고, 고시라카와 상황은 다메토모 토벌 명령을 내렸다. 같은 해 4월, 시게미츠는 이토(伊東)ㆍ호조(北條)ㆍ우사미(宇佐美) 등 500여 기와 군선 20척을 이끌고 공격해왔다.

그동안 저질러온 폭정으로 섬사람들에게 원망을 사고 있었던 다메토모는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다. 저항이 무의미함을 깨달은 그는 섬에서 얻은 아홉 살 된 아들 타메요리(爲賴)를 자기 손으로 죽였다. 자결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발이라도 화살을 쏘고자 하여 300명 정도가 타고 있는 군선을 향해 강궁을 당겨 쏘았고, 화살은 배에 명중하여 침몰시켰다.

다메토모는 "호겐의 난에서는 화살 하나로 두 명을 죽였는데, 지금은 화살 하나로 수많은 사람을 죽였구나."라고 중얼거린 뒤, '나무아미타불'을 외치고 저택 기둥에 기대어 할복 자결했다. 이는 역사상 최초의 할복으로 여겨진다. 향년 32세였다.

무로마치 시대의 씨족 조사 기록인 《손피분먀쿠》(尊卑分脈)에는 다메토모가 지쇼(治承) 원년(1177년), 3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6]

다메토모의 무시무시한 활솜씨에 겁을 먹은 토벌군은 좀처럼 상륙할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토벌군 중 가토 가게카도(加藤景廉)가 다메토모가 이미 죽었음을 간파하고 나기나타(薙刀)로 그의 목을 베었다.

아시지마의 타메토모. 쓰키오카 요시토시가 그린 그림


이즈오시마에서는 현재도 타메토모를 기리며 그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섬 여성과 결혼하여 이주해 온 본토 출신 남성을 타메토모의 강인함에 빗대어 "타메토모 씨"라고 부르기도 한다.

3. 다메토모 전설

미나모토노 다메토모는 그의 호방한 성격과 극적인 삶으로 인해 일본 각지에 다양한 전설을 남겼다. 하라다 노부오의 조사에 따르면, 크고 작은 전설이 있는 장소가 36개 도도부현 196곳에 달한다고 한다.[7] 특히 규슈, 이즈 제도, 오키나와 등 그가 활동했거나 유배되었던 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가현의 구로히게 산(黒髪山)에는 다메토모가 뿔 일곱 개 달린 큰 뱀(또는 구렁이)을 퇴치했다는 전설(구로카미산 대사 퇴치 전설)이 유명하다.[12] 다메토모는 퇴치의 증거로 뱀의 비늘 세 개를 뽑아 소에 싣고 왔는데, 비늘이 너무 무거워 소가 깔려 죽자 그 자리에 소를 묻어주었고, 훗날 그곳을 '우시즈(牛津)'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12] 근처의 '야카이시(矢返し)'라는 지명은 다메토모가 뱀을 퇴치할 때 쏜 화살이 돌에 박혔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13] 또한 사가현 가미미네정의 진세이 산(鎮西山)은 다메토모가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라는 전설이 있으며[14], 이곳에서는 그의 자만을 경계하는 텐구 설화도 남아있다.[13][15]

다메토모가 호겐의 난 이후 죽지 않고 류큐(현재의 오키나와)로 건너갔다는 전설 또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전설은 무로마치 시대 후기부터 일본에서 언급되기 시작했으며(겟슈 주케이의 『겐운 문집』), 16세기 말 류큐에 체류했던 승려 타이츄의 『류큐 신도기』에도 기록되었다. 시마즈씨류큐 침공 시기에는 승려 난포 분시가 다메토모의 류큐 도래와 정복을 언급하며 침공을 정당화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이후 류큐 왕국의 하지 아사히데는 정사(正史)인 《주잔세이칸》(中山世鑑)에서 다메토모가 류큐 여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왕가의 시조 슌텐(舜天)이 되었다고 기록하며, 일류동조론(日琉同祖論)을 주장하고 왕조의 권위를 높이는 데 이 전설을 활용했다. 에도 시대에는 아라이 하쿠세키가 『남도지』에서 이 설을 기록했고, 교쿠테이 바킨의 소설 《진세쓰ㆍ유미하리즈키》가 큰 인기를 끌면서 다메토모가 류큐 왕가의 시조라는 설이 대중적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메이지 시대에는 일본 정부가 류큐 처분 과정에서 일본 귀속의 근거 중 하나로 이 전설을 언급하기도 했으며, 1922년에는 해군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가 운텐 항에 다메토모 상륙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미나모토노 타메토모 공 상륙의 자취. 오키나와현 나키진촌 운텐항 근처에 있다.


다메토모는 천연두가 유행하던 시기에도 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하여, 천연두를 막아주는 수호신으로 숭배되기도 했다.[8] 우타가와 구니요시나 쓰키오카 요시토시 등의 화가들이 천연두신을 물리치는 다메토모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8]

thumb의 그림 "위세 등귀신을 물리치는 그림"]]

이 외에도 여러 지역에 다메토모와 관련된 전설이 남아 있다.

  •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고난구 가미오카히가시의 '야로가야'(矢筒ヶ谷)는 패전한 다메토모가 숨어 살던 곳이라는 전설과 함께 그의 사당이 남아있다.[9] 가마쿠라시 자이모쿠자 해안과 즈시시 고쓰보 경계의 '롯카쿠노이'(六角ノ井)라는 우물은 이즈오 섬에서 다메토모가 쏜 화살이 떨어진 자리에 생겨났다고 전해진다.[10]
  • 후쿠오카현: 아사쿠라시에는 다메토모와 그의 애마, 심지어 어머니의 묘라고 전해지는 석탑들이 존재한다.[11]
  • 오이타현: 오이타시에는 다메토모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전설과 함께 웅성 신사가 있으며, 그가 산 정상에서 쏜 화살이 박혔다는 돌이 오이타현립 오이타 웅성대 고등학교 부지 내에 남아있다.
  • 이즈 제도 및 아마미 제도: 하치조 섬에는 다메토모를 모시는 신사와 관련 설화가 전해지며, 인근 하치조코 섬에는 다메토모 묘진 신사가 있다. 아마미 제도의 키카이 섬에는 다메토모가 쏜 화살 자리에서 샘이 솟았다는 '카리마타(雁股)의 샘' 전설이 있고[16], 가케로마 섬에는 그가 상륙했다는 전설과 함께 아들이라고 전해지는 인물을 모시는 신사가 있다.[17]


오오츠키 토요의 저서 『계몽삽화 일본외사』 메이지 35년 발행 "미나모토노 타메토모가 강궁으로 관군의 함선을 뒤집다"

3. 1. 후손을 자처한 사례

가마쿠라 시대에 현재의 이와테현 미야코시에 본거지를 둔 헤이씨(閉伊氏)는 미나모토노 다메토모의 아들이라고 전해지는 헤이 타메요리(閉伊爲賴, 오시마 타메이에大島爲家, 헤이 요리모토閉伊賴基, 사사키 주로 유키미츠佐々木十郎行光라고도 함)를 시조로 삼았다. 헤이 씨의 자료에 따르면, 타메요리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로부터 무쓰국헤이군게센군을 하사받아 헤이 씨를 칭했다고 한다.

무사시국 아다치군 미야우치 촌(현재의 사이타마현 기타모토시 미야우치)의 오시마 씨(大島氏) 역시 다메토모의 후손을 자처했다. 《신편무사시국풍토기고》(新編武蔵国風土記稿)에 따르면, 다메토모의 서자였던 타로마루(太郎丸)와 지로마루(次郎丸) 쌍둥이 형제가 가마쿠라 막부의 싯켄 호조 도키마사에게 사정을 호소하여,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로부터 타로마루는 이즈오시마, 지로마루는 하치조지마의 영주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지로마루는 이후 출가하여 쇼겐 2년(1208년) 하치조지마에 미타사(弥陀寺, 현재의 소후쿠지)를 창건했다. 타로마루는 성인식을 치르고 오시마 타로 타메이에(大島太郎爲家)라 칭했으며, 후에 타메마사(爲政)로 개명했다고 전해진다. 이 가문은 센고쿠 시대에 오타씨(太田氏)의 가신단인 고노스 7기(鴻巣七騎) 중 한 명인 오시마 다이젠노스케 히사이에(大島大膳亮久家)를 배출했다. 히사이에는 에이쇼(永正)·다이에이(大永) 연간에 고호조씨에 속해 무공을 세웠고, 에이로쿠 7년(1564년)에 표창을 받았다. 덴쇼 18년(1590년) 오다와라 정벌 이후에는 귀농하여 가계를 이어갔다.

류큐 왕국의 정사(正史)인 《주잔세이칸》(中山世鑑)이나 왕실 공식 노래집인 《오모로사우시》(おもろさうし)에는 다메토모가 호겐의 난 이후 죽지 않고 류큐(오키나와)로 건너가 그곳에서 낳은 아들이 류큐 왕가의 시조인 슌텐(舜天)이 되었다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에도 시대의 유명 소설가 교쿠테이 바킨(曲亭馬琴)이 쓴 《진세쓰ㆍ유미하리즈키》(椿説弓張月)의 주요 소재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전설은 일본과 류큐가 본래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일류동조론(日琉同祖論)과 연관 지어 해석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류큐 왕국 쇼씨(尚氏) 왕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한편, 이 전설에 근거하여 다이쇼 11년(1922년)에는 일본 해군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가 오키나와에 다메토모 상륙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시나노국 이나군의 영주였으며 에도 시대에 고타이아이(交代寄合)의 지위를 누린 자코지씨(座光寺氏)는 《간세이 중수 제가보》(寛政重修諸家譜)에서 스스로를 다메토모의 후손이라고 칭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스와씨(諏訪氏)의 일족으로 여겨진다.

또한, 무로마치 시대의 무장 이마가와 사다요(今川貞世)는 자신의 저서 《난타이헤이키》(難太平記)에서, 자신과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공통 조상인 아시카가 요시카네(足利義兼)가 실제로는 다메토모의 아들이며, 아시카가 요시야스(足利義康)가 그를 어릴 때부터 적자로 삼아 키웠다고 주장했다. 사다요는 요시카네가 다메토모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키가 8척이 넘고 힘이 뛰어났다고 묘사했지만, 이러한 주장은 아시카가씨 가계 연구나 학술적인 관점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4. 다메토모에서 유래한 명칭

오키나와현 나키진촌 운텐에서 처음 확인된 망둑어에는 미나모토노 다메토모를 기려 '타메토모망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명명자는 구로이와 히사시이다. 이와 유사하게 '타메토모'라는 이름을 붙인 동식물에는 타메토모달팽이, 타메토모지네, 타메토모백합 등이 있다.

5. 등장 작품

미나모토노 다메토모는 후대의 여러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는데, 대표적으로 호쿠사이와 다키자와 바킨 등이 있다. 또한 여러 텔레비전 드라마와 애니메이션 작품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했다.

'''텔레비전 드라마'''


  • 1972년 NHK 대하 드라마 《신·헤이케 이야기》(新・平家物語일본어) - 배우: 이부키 고로
  • 1992년 TBS 드라마 《다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일본어) - 배우: 가네다 겐이치
  • 2012년 NHK 대하 드라마 《다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일본어) - 배우: 하시모토 사토시


'''애니메이션'''

참조

[1] 서적 The Samurai, A Military History MacMillan Publishing Co., Inc.
[2]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3] 웹사이트 鬼頭兵内氏神 Ujigami of Kitō Heinai https://geoalpha4.sa[...] 2022-07-17
[4] 서적 河内源氏 頼朝を生んだ武士本流 中公新書
[5] 서적 新 日本古典文学大系 『保元物語』 岩波書店
[6] 문서 『尊卑分脈』
[7] 간행물
[8] 웹사이트 見えざるウイルスの世界 https://mhm.m.u-toky[...] 東京大学医学部・医学部附属病院 健康と医学の博物館 2021-08-22
[9] 웹사이트 横浜市港南区ホームページふるさと港南 民話 源為朝の隠れ里 http://www.city.yoko[...]
[10] 웹사이트 逗子市・逗子市観光協会「逗子旅 六角の井」 https://www.zushitri[...]
[11] 뉴스 「源為朝の墓!?見~つけた!!」 朝倉高の史学部員 探索の様子を動画配信 https://www.nishinip[...] 2019-01-20
[12] 서적 「黒髪山の大蛇退治」宮地武彦/山中耕作『日本伝説大系』第13巻 みずうみ書房
[13] 서적 「豊前の為朝」宮地武彦/山中耕作『日本伝説大系』第13巻 みずうみ書房
[14] 웹사이트 特集 新展開!鎮西山の山城跡が判明! https://www.town.kam[...] 上峰町広報誌『町民だよりかみみね』 2022-05
[15] PDF 上峰町史跡めぐり https://www.town.kam[...] 上峰町教育委員会
[16] 웹사이트 雁股の泉 https://kikaijimanav[...] 2024-10-20
[17] 웹사이트 文化財の紹介(伝説・歴史・戦跡) http://www.setouchi-[...] 2024-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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