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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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국 전쟁은 1915년 위안스카이가 중화제국 황제 즉위를 시도하자, 이에 반발한 세력들이 일으킨 일련의 반(反) 위안스카이 운동을 말한다. 채악, 탕지야오 등이 운남성에서 봉기하며 시작되었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위안스카이는 황제 즉위를 취소하고 대총통으로 복귀했으나, 결국 사망했다. 호국 전쟁은 중국의 군벌 시대를 심화시켰으며, 쑨원은 광저우에서 호법 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한 위기 의식을 고조시켜 한국의 독립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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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제국은 위안스카이가 황제 즉위를 선포하며 1915년에 성립되었으나, 호국전쟁과 열강의 압박으로 83일 만에 멸망하고 중화민국은 군벌 시대로 접어들었다. - 1916년 중국 - 독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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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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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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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915년 12월 25일 - 1916년 7월 14일 |
장소 | 중국 남서부, 화남, 화동 |
결과 | 위안스카이는 제제를 취소하고 이후 사망. 호국군이 승리하여 다시 공화제로 복귀.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중화제국 |
교전국 2 | 중화민국 윈난 군벌 구이저우 군벌 구 광시 군벌 |
지휘관 | |
교전국 1 지휘관 | 위안스카이 장징야오 마지청 차오쿤 펑위샹 루젠장 |
교전국 2 지휘관 | 차이어 탕지야오 량치차오 리례쥔 루룽팅 펑궈장 |
병력 규모 | |
교전국 1 병력 | 700,000+ |
교전국 2 병력 | 200,000+ |
관련 전투 | |
명칭 | |
중국어 (간체) | 护国战争 |
중국어 (번체) | 護國戰爭 |
로마자 표기 | Hù guó zhànzhēng |
원인 | |
원인 | 위안스카이 정부가 일본의 21개조 요구 수락. 위안스카이 '황제' 즉위. |
2. 역사적 배경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되었으나, 혁명 이후에도 정국은 안정되지 못했다. 위안스카이는 혁명 세력과 타협하여 중화민국의 초대 대총통이 되었지만, 점차 독재 권력을 강화하며 황제 즉위를 꾀했다.
1913년 중국 국민당의 쑹자오런이 암살되면서 제2차 혁명이 발생했다. 쑨원 등은 무력으로 위안스카이 타도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국민당은 해산되었다.[1] 량치차오는 “이른바 국체 문제라는 것에 대하여”라는 글을 발표하여 입헌군주제에 반대했다.
2. 1. 21개조 요구와 위안스카이의 황제 즉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일본 제국은 산둥반도의 독일 조차지를 점령하고, 1915년 5월 중국에 이른바 '중국판 을사늑약'이라 불리는 21개조 요구를 제시하며 이권 확대를 시도했다. 위안스카이는 일본의 지원을 얻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21개조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였고, 이는 중국 국민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켜 1919년 5.4 운동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1]1915년 8월부터 12월 사이에 위안스카이의 지지자들은 중국 군주제의 부활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행정학자 프랭크 존슨 구드노는 「공화와 정제론」을 발표하여 중국에 적합한 정치 체제가 입헌군주제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10월에는 “국민대표대회”에서 국체 투표가 실시되어 위안스카이를 황제로 추대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1915년 12월, 위안스카이는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중화제국(1915년-1916년)으로 변경하고 연호를 홍헌(洪憲)이라 정했다. 그러나 이는 21개조 조약 체결로 분개하던 중국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결과가 되었고, 1915년 12월 윈난 성에서의 봉기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위안스카이에 대한 격렬한 반발 폭동이 일어났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1916년 3월, 황제 즉위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퇴위하고, 같은 해 6월에 병사했다.
3. 호국전쟁의 전개
1915년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중국 국민당(國民黨) 창립자 쑹자오런(宋敎仁)과 천치메이(陳其美) 암살을 기획한 후, 쑨원(孫文)은 그에게 맞서 제2차 혁명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해야 했다. 국민당은 해체되었다.
1915년 8월부터 12월 사이, 위안스카이의 지지자들은 중국 군주제의 부활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위안스카이는 홍헌제(洪憲帝)라는 이름으로 중국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다고 선포했다. 새로운 제국은 1916년 1월 1일에 공식 출범할 예정이었다.
한편, 쑨원이 망명 생활 중 일본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중국혁명당(中國革命黨) 내부에서는 쑨원의 지도에 반대하는 내분이 발생했고, 혁명당에서 이탈한 일부 인사들이 1914년 8월 이근원(李根源)·이렬균(李烈鈞)·장사조(章士釗) 등을 중심으로 "구사연구회(歐事研究會)"를 결성했다. 이들은 황싱(黃興)을 미래의 지도자로 예상하고, 도쿄와 상하이 등에서 위안스카이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위안스카이에게 실망하여 대립하던 차이어(蔡鍔)와 량치차오(梁啓超)와 황싱 사이를 중재하여 위안스카이 타도를 위한 협력 체제를 구축하려 했고, 거병 장소로 윈난성(雲南省)이 선택되었다.
1915년 여름 이후, 이렬균 등에 의해 거병 계획이 진행되었다. 차이어가 베이징(北京)에 초청된 후 윈난도독(雲南都督)직에 취임한 탕지야오(唐繼堯)도 차이어가 윈난도독 자리에 복귀하려는 야심이 없다는 것을 알고 거병에 협력할 뜻을 표명했다. 12월에 차이어는 베이징을 탈출해 일본과 홍콩을 거쳐 윈난에 들어왔고, 톈진(天津)에서 위안스카이 측의 감시를 받던 량치차오도 상하이로 탈출하여 구사연구회원의 보호 아래 들어왔다. 페낭(檳榔嶼)(페낭)에서 망명 중이던 첨춘훤(岑春煊)도 상하이에 들어왔고, 윈난에서의 거병 직후인 1916년 1월에는 장사조와 함께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 정부와 군부에 협력을 요청했다. 탕지야오와 차이어·이렬균은 쿤밍(昆明) 오화산(五華山)에 있던 윈남도독부에서 회담을 열고 최종 합의에 도달했고, 탕지야오는 자신의 군대를 "호국군(護國軍)"이라고 명명했다.
이 계획 기간 동안 쑨원은 배제되어 있었다. 원세개 타도 계획에서 중국혁명당이 배제된 것은 아니었고, 실제로 동당 당원들도 계획에 참여했다. 그러나 쑨원의 방법과 언행에 반발하여 갈라져 나와 결성된 "구사연구회"가 깊이 관여한 이 거병에 쑨원이 관여할 여지는 없었다. 장사조가 도쿄 령남사(靈南坂) 쑨원의 저택을 방문했을 때 참여를 간절히 원하는 쑨원에게, 과거 청나라 고관이었던 첨춘훤이 마음을 바꿔 혁명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쑨원이 그를 관료라고 욕했던 사건을 지적하며 그러한 태도를 고치지 않는 한 참여를 인정할 수 없다고 암시적으로 지적했다.
3. 1. 운남에서의 봉기
1915년 12월 25일, 전임 운남도독(都督) 채악(蔡鍔)과 운남장군 탕지야오(唐繼堯)는 쿤밍(昆明市)에서 운남성(雲南省)의 독립을 선포하고, 위안스카이(袁世凱) 타도를 위해 약 2만 명 규모의 호국군(雲南護国軍)을 조직하였다.[1] 채악, 이렬균(李烈鈞), 탕지야오를 각각 제1, 제2, 제3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였고, 탕지야오는 운남 도독을 겸임하였다.호국군은 위안스카이의 북양군과 전투를 벌였다. 위안스카이는 운남성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정전임시군무처(征滇臨時軍務處)"를 설치하고 직접 호국군 토벌을 지휘했다. 마계증(馬繼曽), 장경요(張敬堯), 용제광(龍濟光)이 이끄는 10만 명 이상의 북양군은 아래와 같이 세 방향에서 운남성을 공격했지만, 사천성(四川省)에서 채악에게 대패하였다.
공격 방향 | 사령관 | 병력 | 진입 경로 |
---|---|---|---|
제1로 (중로) | 마계증(馬繼曽) | 3만 명 이상 | 호남성(湖南省) → 귀주성(貴州省) |
제2로 (북익) | 장경요(張敬堯) | 5만 명 이상 | 사천성(四川省) → 운남성(雲南省) |
제3로 (남익) | 용제광(龍濟光) | - | 광동성(廣東省) → 광서성(廣西省) → 운남성(雲南省) |
1916년 1월 27일, 귀주성(貴州省)의 류현세(劉顯世)가 귀주성의 독립을 선포하였고, 3월 15일에는 광서성(廣西省)의 육영정(陸榮廷)이 독립을 선포하였다.
3. 2. 전국적인 반(反) 위안스카이 운동 확산
1915년 12월 25일, 쿤밍(昆明市)에서 운남성(雲南省)의 독립이 선포된 이후, 1916년 1월 27일 귀주성의 류현세(劉顯世)가, 3월 15일에는 광서성의 육영정(陸榮廷)이 각각 독립을 선포하였다.[1] 북양정부 상층부에서도 위안스카이에게서 이탈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4월 6일에는 광둥성(廣東省)의 용제광(龍濟光)이, 4월 12일에는 저장성(浙江省)이 독립하였다. 5월 8일에는 독립한 운남성, 귀주성, 광서성, 광동성이 광둥 성에서 북양정부에 대항하는 군무원(軍務院)을 설립하였다.곧이어 섬서성의 진수번(陳樹藩), 사천성의 진이(陳宧)(사천장군), 후난성(湖南省)의 탕향명(湯薌銘)이 잇달아 독립을 선포하면서, 점차 전세는 호국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3. 3. 위안스카이의 몰락과 죽음
1915년 12월, 운남성에서 시작된 봉기는 1916년 2월에 이르러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어 위안스카이에 대한 격렬한 반발 폭동이 일어났다.[1] 전국적인 반발에 직면한 위안스카이는 결국 1916년 3월, 황제 즉위를 취소하고 중화민국 대총통으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이미 민심은 그에게서 등을 돌린 뒤였다.1916년 1월부터 3월 사이, 귀주와 광서 성이 독립을 선포했다.[1] 이후 광동, 산동, 호남, 산서, 강서, 강소도 잇따라 독립을 선포했다. 수도 베이징의 황제 정부 내부에서도 불화가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1916년 6월 6일, 위안스카이는 병으로 사망하였고, 호국전쟁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그의 사망 8일 후인 1916년 7월 14일, 국민보호전쟁이 종식되었고, 각 성은 독립 선언을 철회했다.
4. 호국전쟁의 결과 및 영향
위안스카이의 황제 즉위 시도는 호국전쟁으로 좌절되었으나, 이로 인해 중앙 정부의 권위는 크게 약화되었다. 1915년 12월 윈난성에서 봉기가 시작되었고, 1916년 2월에는 전 중국적으로 위안스카이에 대한 격렬한 반발 폭동이 일어났다.[1] 위안스카이가 1916년 3월 퇴위하고 같은 해 6월에 사망하면서, 중국은 본격적인 군벌 간 내전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호국전쟁은 중화민국 건국 이후 남북 분열의 시작을 상징하며, 위안스카이 사후 북양정부는 남부 군벌들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4. 1. 군벌 시대의 개막
위안스카이 사후, 북양군벌은 분열되어 각 지방에서 군벌들이 할거하는 군벌 시대가 시작되었다. 1915년 12월, 채어와 당계요가 지배하던 윈난성에서 호국전쟁이 발발하여, 1916년 6월 위안스카이가 사망하고, 같은 해 7월 14일, 국민보호전쟁(國民保護戰爭)이 종식되면서 각 성은 독립 선언을 철회했지만, 여전히 군벌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1] 각 군벌들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서로 대립하며, 중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장제스가 북벌, 중원대전 및 다른 많은 내전을 통해 국가를 통일할 때까지 수년간 지속되었고, 중일전쟁과 중국 내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이어졌다.
4. 2. 쑨원의 호법운동
국민당의 쑨원은 위안스카이 사후에도 베이징의 북양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남쪽 광저우에 군정을 세우고 헌법 보호를 이끌었다.[1]
5. 주요 인물
- 위안스카이: 중화민국 초대 대총통이었으나, 황제 즉위를 시도하다 호국전쟁으로 인해 몰락하였다.
- 쑨원: 위안스카이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으며, 제2차 혁명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하여 중화혁명당을 조직하였다. 쑹자오런 암살 사건 이후 국민당은 해체되었다.
- 차이어: 운남 봉기를 주도한 군벌 중 한 명으로, 호국군을 이끌고 북양군과 싸웠다. 1915년 12월 25일 쿤밍에서 운남성의 독립을 선포하고 호국군을 조직하여 위안스카이 토벌에 나섰다.
- 탕지야오: 차이어와 함께 호국군을 조직하였으며, 1915년 12월 25일 쿤밍에서 운남의 독립을 선포했다. 도독(都督)을 겸임했다.
- 량치차오: 청말 민초 사상가이자 정치가로, 위안스카이의 황제 즉위에 반대하며 제자 차이어와 함께 호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5. 1. 위안스카이
위안스카이는 중화민국의 초대 대총통이었으나, 황제 즉위를 시도하다 호국전쟁으로 인해 몰락하였다. 1915년 12월 25일, 채어와 당계요가 지배하던 운남 성의 성도 쿤밍에서 독립을 선포했다. 그들은 국민보호군을 조직하고 위안스카이와 그의 지지자들을 공격하여 새로운 중화제국을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구하기 위한 군사 원정을 시작했다.[1] 위안스카이는 운남을 공격하기 위해 8만 명의 병력을 파견했지만, 그의 군대는 사천 성에서 큰 패배를 당했다.[1] 이 패배 이전에 귀주와 광서 성은 1916년 1월부터 3월 사이에 독립을 선포했다.[1] 광동, 산동, 호남, 산서, 강서, 강소도 그 뒤를 이어 독립을 선포했다.[1]1915년 8월, 양두(zh)가 주안회(zh)를 결성하여 제정 복고를 시도했다. 위안스카이는 미국에서 행정학자 프랭크 존슨 구드노를 초빙하여 "공화와 정제론"을 발표하고, 중국에 적합한 정치 체제를 입헌군주제라고 주장했다. 량치차오는 "이른바 국체 문제라는 것에 대하여"라는 글을 발표하여 입헌군주제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10월, "국민대표대회"에서 국체 투표가 실시되어 위안스카이를 황제로 추대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1915년 12월, 위안스카이는 국호를 중화민국에서 중화제국으로 개칭하는 칙서를 발표하고, 1915년 12월 12일 중화제국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리고 1916년을 중화제국 홍헌 원년으로 삼고, 홍헌황제 또는 홍헌황조라고 칭하였다.
압력이 거세지자 위안스카이는 1916년 3월 22일에 퇴위할 수밖에 없었지만, 중화민국 대총통 직에 복귀했고 전쟁은 계속되었다.[1] 그는 그 후 얼마 안 있어 1916년 6월 6일에 사망했다.[1]
5. 2. 쑨원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인 1914년, 쑨원은 일본에서 위안스카이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위안스카이가 쑹자오런과 천치메이 암살을 기획하자, 쑨원은 제2차 혁명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하여 국민당은 해체되었다.[1] 1915년 8월부터 12월 사이에 위안스카이의 지지자들은 중국 군주제의 부활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위안스카이는 홍헌제라는 이름으로 중국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1]한편, 쑨원은 망명 생활 중 일본을 거점으로 중화혁명당을 조직하였으나, 중화혁명당 내부에서는 쑨원의 지도에 반대하는 내분이 발생했다.[2] 혁명당에서 이탈한 일부 인사들은 1914년 8월 이근원, 이열균, 장사조 등을 중심으로 "구사연구회"를 결성했다.[2] 그들은 황싱을 미래의 지도자로 예상하고 도쿄와 상하이 등에서 위안스카이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2]
1915년 여름 이후, 이열균 등에 의해 거병 계획이 진행되었는데, 이 계획에 쑨원은 배제되었다.[2] 장사조는 쑨원에게 과거 청나라 고관이었던 첨춘훤이 혁명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쑨원이 그를 관료라고 욕했던 사건을 지적하며, 그러한 태도를 고치지 않는 한 참여를 인정할 수 없다고 암시적으로 지적했다.[2]
5. 3. 차이어
차이어는 운남성(雲南省) 봉기를 주도한 군벌 중 한 명으로, 호국군(護國軍)을 이끌고 북양군(北洋軍)과 싸웠다. 1915년 12월 25일, 쿤밍(昆明市)에서 운남성의 독립을 선포하고 약 2만 명의 호국군을 조직하여 위안스카이 토벌에 나섰다.[1] 북양군은 사천성(四川省)에서 차이어에게 대패하였다. 차이어는 1916년 일본에서 치료를 받다가 사망하였다.5. 4. 탕지야오
차이어와 함께 호국군을 조직한 탕지야오는 1915년 12월 25일, 쿤밍(昆明市)에서 윈난성의 독립을 선포했다.[1] 탕지야오는 윈난도독(都督)을 겸임하며, 약 2만 명의 호국군을 조직하여 위안스카이 토벌에 나섰다.5. 5. 량치차오
청말 민초 사상가이자 정치가였던 량치차오는 위안스카이의 황제 즉위에 반대하며, 제자 차이와 함께 호국 운동을 전개하였다.[1]참조
[1]
웹사이트
Jan 27 Guizhou
http://www.chinaknow[...]
Ulrich Theobald
2024-12-17
[2]
서적
History Out of Joint: Essays on the Use and Abuse of History
https://archive.org/[...]
JHU Press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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