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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앙께비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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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앙께비엠은 1820년 응우옌 왕조에서 태어난 베트남의 군인이자 관료이다. 그는 민망 황제의 딸과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으나, 아내가 일찍 사망했다. 호앙께비엠은 청나라의 산적과 싸우고 프랑스의 통킹 침략에 맞서 싸우는 등 군 경력을 쌓았다. 그는 흑기군을 이끌었던 유영복과 함께 활동했으며,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패배했다. 껀브엉 운동 시기에는 함응히제를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으며, 이후 관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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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앙께비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황계염
한자 표기黃繼炎
본명황좌염 (黃佐炎)
별칭일장 (Nhật Trường)
출생1820년
출생지꽝빈성 꽝닌현
사망1909년 (89세)
사망지꽝빈성 꽝닌현
묻힌 곳레투이현, 꽝빈성
황계염 묘
레투이현, 꽝빈성에 있는 황계염의 묘
경력
소속응우옌 왕조
복무 기간1870년–1889년
계급General Lieutenant (중장)
참전통킹 원정
청-프랑스 전쟁
직책내각대학사

2. 어린 시절

호앙께비엠은 1820년 응우옌 왕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카인호아 성의 포정사(布政使)였던 호앙낌썬(Hoàng Kim Xán|황금찬vi)이다.

1843년, 호앙께비엠은 민망 황제의 다섯째 딸인 응우옌 푹꽝띤(Nguyễn Phúc Quang Tĩnhvi)과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다. 그러나 결혼 다음 해인 1844년, 아내 응우옌 푹꽝띤은 임신 중 2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당시 황제였던 티에우찌는 그녀에게 향라 공주(Hương La Công Chúavi)라는 칭호를 내렸다.

3. 군 경력

호앙께비엠은 응우옌 왕조 후기의 주요 군사 지도자 중 한 명으로, 19세기 후반 베트남 북부의 혼란 수습과 외세 침략에 맞서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군 경력은 크게 청나라 반란 세력 토벌과 프랑스의 침략에 대한 저항으로 나눌 수 있다.

1870년대, 그는 랑선, 타이빈, 닌빈 및 선흥뚜옌(Sơn-Hưng-Tuyên) 지역 총독을 역임하며 태평천국 운동 이후 베트남 북부로 유입된 황기군 등 청나라 반란 세력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과정에서 톤텃투옛, 류융푸가 이끄는 흑기군과 협력하여 황기군 토벌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후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화 시도가 본격화되자, 호앙께비엠은 프랑스 세력에 맞서 싸우는 데 주력했다. 1873년 프란시스 가르니에의 하노이 침공 당시 흑기군을 동원하여 저항했고, 1882년 앙리 리비에르의 침공 때에도 청나라 군대 및 흑기군과의 연합을 통해 프랑스에 대항했다. 비록 청불 전쟁 패배와 1884년 후에 조약 체결로 프랑스의 보호령 편입을 막지는 못했지만, 그는 프랑스 식민 세력에 맞서 싸운 주요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후 껀브엉 운동 시기에는 잠시 은퇴했으나, 프랑스가 세운 동카인제의 요청으로 복귀하여 함응히제 지지 세력을 설득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3. 1. 청나라의 토벌

19세기 중반 청나라에서 일어난 태평천국 운동과 오능운의 연릉국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들 반란 세력의 일부는 국경을 넘어 베트남 북부로 유입되었다. 이들은 백기군, 황기군과 같은 무장 집단을 형성하여 응우옌 왕조의 통치에 큰 위협이 되었다.

청나라 반란군 출신인 유영복은 베트남으로 건너와 흑기군을 조직했다. 흑기군은 1868년, 이미 베트남 북부에서 활동하던 백기군을 격파하면서 후에 조정으로부터 공식적인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6] 그러나 오능운의 아들 오아종과 그의 부관 판룬시가 이끄는 황기군 등 다른 반란 세력들은 계속해서 베트남 북부 지역에서 활동하며 혼란을 야기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870년, 호앙께비엠은 랑선, 타이빈, 닌빈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톤텃투옛과 함께 북부 지역의 반란 세력 진압 임무를 맡게 되었다.[9] 당시 판룬시의 황기군은 하즈엉을 거점으로 삼아 뚜옌꽝까지 점령하며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호앙께비엠은 흑기군의 감독관으로서 황기군의 항복 제안을 거부하며[14] 이들과의 대결을 준비했다.

1874년, 선흥뚜옌(Sơn-Hưng-Tuyên) 총독으로 자리를 옮긴 호앙께비엠은 선떠이 총독이 된 톤텃투옛, 그리고 흑기군유영복과 협력하여 황기군 토벌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초기에는 베트남 자체 병력과 흑기군만으로 대응했으나, 전황이 쉽게 정리되지 않자 1875년 3월, 후에 조정은 청나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톤텃투옛의 총지휘 아래 청나라 군대, 베트남 군대, 흑기군으로 구성된 연합군은 타이응우옌하즈엉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황기군을 최종적으로 격파하고 지도자 판룬시를 처형했다.[15]

황기군 토벌 이후에도 흑기군은 베트남 북부에서 여전히 강력한 세력으로 남았으며, 호앙께비엠은 이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15]

3. 1. 1. 연릉국

1857년, 이후 흑기군을 이끌게 되는 유영복은 광서성에서 청나라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오능운(吳凌雲, 오원청)에 합류했다.[3][4] 이는 1849년 홍수전양수청, 소조귀, 이수성 등과 함께 일으킨 태평천국 운동과는 별개의 움직임이었다. 오능운은 1861년 광서성 남부에 연릉국(延陵國)을 세웠다. 태평천국이 기독교적 성격을 강하게 띤 것과 달리, 연릉국은 추종자들에게 특정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다.[4]

연릉국과 태평천국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베트남 역사가 쩐쫑낌은 오능운의 아들 오아종(吳亞終, 오곤)을 태평천국의 신봉자로 보았으나,[4] 헨리 매칼리비는 오능운을 태평천국이 남경을 점령한 후 광서성에서 권력 공백을 이용한 '약탈자'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브래들리 데이비스(Bradley C. Davis)는 연릉국과 태평천국은 서로 다른 별개의 운동이었다고 설명한다.[4]

1863년, 오능운은 풍자재가 이끄는 청나라 광서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연릉국은 위기를 맞았다. 그의 아들 오아종이 지도자 자리를 이어받아 남은 세력을 이끌고 광서성 서쪽의 도시인 귀순(歸順)을 점령했다. 이 시기에 오아종은 세력을 규합하려 노력했지만, 유영복은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청나라를 떠나 베트남으로 이동하여 흑기군을 창설하기로 결정했다.

3. 1. 2. 백기군과 흑기군

유영복이 도착하기 전, 청나라 남부 출신 산적 집단인 백기군은 여러 해 동안 베트남 북부에서 활동하며 세력을 떨쳤다. 일설에 따르면 백기군은 오능운(吳凌雲)의 옛 부하들이었다고도 한다. 1866년, 후에 조정은 응우옌 바응이(Nguyễn Bá Nghi)에게 백기군과의 항복 협상을 맡겼으나, 응우옌 바응이는 산적 두목에게 벼슬을 주는 것에 부정적이어서 협상은 실패했다.[5]

유영복은 백기군에 맞서기 위해 청나라 남부 출신의 덩완(Deng Wan)과 동맹을 맺었다. 1868년 2월, 백기군이 룩옌(Lục Yên)을 점령하자, 베트남에 막 도착한 유영복의 흑기군은 룩옌을 포위 공격했다. 같은 해 3월, 흑기군은 룩옌을 함락시키고 백기군 지도자 반반니(潘半二)를 사살했다. 이 승리로 유영복과 흑기군은 베트남 당국으로부터 공식적인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6]

이후 흑기군은 황기군과 충돌하여 라오까이에서 그들을 몰아내는 등 베트남 북부에서 계속 활동했다. 조정과 흑기군 사이의 연락책 역할을 맡았던 호앙께비엠은 유영복과 그의 부하들이 라오까이 주변 땅을 경작하도록 장려하여 흑기군에 대한 비판을 잠재우고 그들을 통제하려 했으나, 유영복은 이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흑기군은 1878년부터 후에 조정으로부터 정기적인 급여와 물품을 지원받았지만, 일부 관리들은 여전히 그들을 불신했으며, 흑기군은 1878년 3월 흥화(Hưng Hóa) 지역을 습격하기도 했다.

3. 1. 3. 오아종과 황기군

유영복을 따라 오아종(오아중)은 흑기군이 백기군의 반란을 진압한 후 베트남으로 들어갔다. 오아종의 조카[7]이자 부관인 판룬시(황충잉 또는 황숭아라고도 불림)[7]는 황기군을 창설하여 이전 백기군의 거점이었던 하즈엉으로 이끌었다. 황기군은 베트남 당국을 목표로 삼았다. 1868년 3월, 오아종과 황기군은 까오방을 공격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뚜옌꽝에서 습격을 감행했다. 이에 베트남 조정은 팜찌흐엉에게 옹익겸의 지원을 받아 오아종 토벌 작전을 조직하도록 임명했다.[8] 그러나 1868년 7월, 베트남군은 랑선에서 황기군에게 패배했다.[9]

청나라풍자재를 파견하여 베트남 내 오아종 세력을 진압하도록 했다.[9][10] 동시에 후에 조정은 보쫑빈을 국경 순찰 위원으로 임명하여 조정과 풍자재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게 했다. 풍자재는 지역 민병대에 자금을 지원하여 북부 국경 지대에 오아종을 잡기 위한 함정을 설치하는 전략을 사용했고, 이는 성공을 거두었다. 1869년 말, 오아종은 타이응우옌으로 도주했으나 심각한 부상으로 사망했다.[11] 다른 기록에 따르면, 오아종은 1870년 박닌 포위 공격 중 옹익겸에게 살해되었다고도 한다.[12]

오아종 사후, 황기군과 흑기군은 베트남 북부에 남아 활동했다.[12] 이들은 아편 거래에 세금을 부과하고 약탈을 통해 세력을 유지하며 베트남 북부를 사실상 통제했다. 이후 황기군과 흑기군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여, 황기군이 라오까이에서 흑기군에게 패배하고 쫓겨났다.[13]

1870년, 호앙께비엠은 랑선, 타이빈, 닌빈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톤텃투옛과 함께 북베트남의 도적 세력 진압 임무를 맡았다. 같은 해, 판룬시는 뚜옌꽝하즈엉에 있는 자신의 옛 근거지를 점령하고 베트남 군대를 공격했다. 지방 정부를 격파한 황기군은 뚜옌꽝을 점령하고 라오까이 동쪽에서 흑기군을 위협했다. 판룬시의 이러한 활동은 후에 조정 내에서 논쟁을 일으켰다. 일부 관료들은 흑기군을 고용하는 것에 회의적이었으나, 조정은 유영복의 공식적인 지위를 인정했다. 1871년과 1872년, 판룬시가 두 차례 후에 조정에 항복 의사를 밝혔을 때, 당시 흑기군의 감독관이었던 호앙께비엠은 조정이 황기군과의 협상을 거부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1874년, 호앙께비엠은 썬-흥-뚜옌(Sơn-Hưng-Tuyên)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톤텃투옛은 선떠이 총독 겸 군사 문제 위로 담당관이 되었다. 이들은 유영복과 협력하여 판룬시와 황기군을 진압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1874년 초, 베트남 군대는 뚜옌꽝에서 황기군을 추격했다. 그해 9월, 판룬시는 다시 호앙께비엠에게 항복서를 제출했지만 조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흥화 총독에게 흑기군을 동원해 판룬시를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1875년 3월, 이전까지 중국의 도움을 거절했던 후에 조정은 결국 청나라의 지원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톤텃투옛은 청나라 군대와 협력하여 황기군 토벌 작전을 지휘하게 되었다. 리 양차이와 류 위청이 이끄는 청나라 군대는 타이응우옌에서 황기군 주력을 몰아냈고, 흑기군과 베트남 군대는 황기군의 옛 근거지인 하즈엉에서 이들을 기다렸다. 이 전투에서 황기군은 격파되었고, 판룬시는 붙잡혀 처형되었다.

3. 1. 4. 호앙께비엠과 청나라 산적

변방의 도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임명된 통킹 군사부 사령관 도안 토가 랑선에서 도적에게 살해당하자, 1870년 베트남 조정은 즉시 호앙께비엠을 랑선, 타이빈, 닌빈의 총독으로 임명하여 똔텃투옛과 함께 북베트남의 도적 진압을 지휘하게 했다.[9]

같은 해(1870년), 황기군의 지도자 판룬시는 뚜옌꽝의 하이즈엉에 있는 이전 근거지를 장악하고 베트남 군대를 공격했다. 지방 정부군을 물리친 황기군은 뚜옌꽝을 점령하여 라오까이 동쪽에서 흑기군을 위협했다. 판룬시의 이러한 행동은 후에 조정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일부 관료들은 흑기군을 고용하는 것에 회의적이었지만, 조정은 결국 흑기군의 지도자 유영복의 공식 지위를 인정했다. 1871년과 1872년에 판룬시가 후에 조정에 두 차례 항복을 제안했을 때, 흑기군의 감독관이었던 호앙께비엠은 조정의 거부 의사를 황기군에게 전달했다.[14]

1873년 하노이를 공격한 프란시스 가르니에를 물리친 유영복은 베트남 관군 부사령관으로 승진했다. 1874년 후반, 호앙께비엠은 선흥뚜옌(Sơn-Hưng-Tuyên)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똔텃투옛은 선떠이 총독 겸 군사고문관으로 활동했다. 이 두 관료는 유영복과 함께 조정의 주요 관심사였던 판룬시 및 황기군과의 싸움을 계속했다. 1874년 초부터 그들은 뚜옌꽝에서 황기군을 추격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같은 해 9월, 판룬시는 호앙께비엠에게 항복서를 제출했지만, 조정은 여전히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흥화 총독에게 흑기군을 동원해 판룬시를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이전까지 청나라의 지원을 거부했던 후에 조정은 1875년 3월, 황기군 토벌을 위해 청나라의 도움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조정은 똔텃투옛에게 청나라 군대와 협력하여 황기군을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리양카이(Li Yangcai)와 류유청(Liu Yuch'eng)이 이끄는 청나라 군대는 타이응우옌에서 황기군 주력을 격파했고, 흑기군과 베트남 군대는 황기군의 오랜 근거지였던 하이즈엉에서 그들을 기다렸다. 이 전쟁은 황기군 지도자 판룬시의 사살로 끝났다.[15]

1878년, 황기군 격파에 대한 보상으로 유영복은 후에 조정으로부터 매달 급여와 보급품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조정 대신들이 흑기군의 존재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조정과 흑기군 사이의 연락관 역할을 하던 호앙께비엠은 유영복과 그의 부하들에게 라오까이 주변 땅을 경작하도록 장려했다. 이는 흑기군에 대한 조정 대신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그들을 한 곳에 묶어 통제하려는 의도였으나, 유영복이 경작이나 라오까이를 떠나는 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계획은 실패했다. 결국 1878년 3월, 흑기군은 흥화 지방에서 약탈을 감행했다. 동시에 하노이의 관료들은 조정을 통해 유영복의 행동에 대한 완전한 보고서를 요구했다. 호앙께비엠은 유영복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약속하고, 베트남 당국에 대한 그의 혐의에 대해 설명하겠다고 밝혔다.[15]

3. 2. 대 프랑스 투쟁

호앙께비엠은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식민 야욕이 본격화되던 시기에 활동하며 프랑스 세력에 맞서 싸운 주요 인물 중 한 명이다. 1870년대 초, 프랑스 상인 장 뒤피가 홍강 수로를 이용해 청나라에 무기를 밀매하려 하자, 호앙께비엠은 당시 황기군과 접촉한 뒤피를 억류하도록 지시하며 프랑스의 침투에 경계심을 보였다.[16]

이후 프란시스 가르니에가 장 뒤피 구출을 명분으로 1873년 하노이를 무단 점령하고 홍강 삼각주 일대를 장악하자, 호앙께비엠은 톤텃 투엣과 함께 흑기군의 지도자 류융푸를 동원하여 프랑스군에 대한 반격을 조직했다. 이 과정에서 1873년 12월 21일 벌어진 전투에서 가르니에가 흑기군에게 사살되었으나,[1] 프랑스군의 공세를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2] 베트남 공식 역사 기록인 《대남실록》은 당시 뜨득 황제가 협상을 원했음에도 호앙께비엠과 톤텃 투엣이 프랑스를 불신하여 독단적으로 흑기군을 동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882년, 앙리 리비에르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다시 하노이를 점령하고 통킹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자, 호앙께비엠은 또다시 저항의 중심에 섰다. 그는 후에 조정의 지시에 따라 흑기군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동시에 청나라 관리 탕징송과 접촉하여 흑기군 및 중국군과의 연합을 통해 프랑스에 대항할 계획을 세웠다. 특히 리비에르가 남딘을 점령하자, 호앙께비엠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사이공 공격을 제안하기도 했다. 1883년 5월, 리비에르 역시 흑기군과의 전투 중 매복에 걸려 전사했지만, 프랑스는 오히려 통킹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강화했다.

프랑스군은 알렉상드르-외젠 부에, 쿠르베 제독 등을 투입하여 공세를 이어갔고, 1883년 아르망 조약을 통해 통킹과 안남을 프랑스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이후 벌어진 청불 전쟁에서 프랑스는 선떠이와 박닌 등 주요 거점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호앙께비엠은 1884년 봄, 후에 조정의 소환 명령에 따라 복귀했다. 그러나 프랑스에 저항했던 그의 이력 때문에 과거의 고위직에도 불구하고 통킹 보호령 하의 공공 사업부 감독관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는 식민 통치 하에서 조정에 충성하며 저항했던 인물들이 겪어야 했던 현실을 보여준다.

이후 껀브엉 운동 시기에는 잠시 은퇴하여 고향인 꽝빈에 머물렀으나, 1886년 프랑스가 세운 동카인제의 요청으로 복귀하여 함응히제와 그 추종자들을 설득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하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887년 다시 조정으로 돌아왔다. 함응히제가 1888년 프랑스군에 체포되면서 껀브엉 운동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자, 호앙께비엠의 대 프랑스 투쟁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3. 2. 1. 프랑스의 통킹 공격

1860년대, 프랑스인 무기상 장 뒤피(Jean Dupuis)는 청나라 내부의 태평천국의 난과 같은 혼란을 틈타 무기를 판매하려 했다. 특히 운남 지방군 사령관 마여룡은 뒤피로부터 소총과 탄약을 구매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뒤피는 홍콩에서 베트남으로 선박을 띄워 홍강 수로를 통해 운남까지 무기를 운송할 계획을 세웠다. 코친차이나 총독 마르셀 뒤프레(Marcel Dupré)의 도움과 프랑스 해군성의 승인을 받아, 뒤피는 1872년 10월 홍콩을 출발했다. 그는 운남성 정부와의 계약과 잘 무장된 상선을 믿고 베트남 당국의 정선 명령을 무시하며 항해했다. 그는 무기와 식량 및 기타 물자를 교환했으며, 황기군(黃旗軍)의 지도자 판룬시(潘隆氏)와 만나 관계를 맺기도 했다. 당시 황기군과 전투 중이던 호앙께비엠은 뒤피가 황기군과 접촉한 사실을 알고 그를 흥화(興化)에 억류하도록 지시했다. 뒤피가 운남에 도착했을 때 그의 황기군 접촉 사실이 후에(順化) 조정에 알려졌고, 이후 그가 하노이로 돌아오자 구금되었다.[16]

프랑스는 코친차이나를 식민지로 삼은 이후, 중국으로 통하는 길을 확보하기 위해 통킹과 안남 지역을 꾸준히 정찰하고 있었다. 1866년 프란시스 가르니에는 어니스트 두다르 드 라그레(Ernest Doudart de Lagrée)가 이끄는 메콩강 탐사대에 참여하여 중국으로 가는 경로를 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가르니에는 이때 홍강이 코친차이나와 운남을 잇는 중요한 상업로가 될 수 있음을 파악했다.

장 뒤피가 하노이에 구금되자, 코친차이나로 돌아와 있던 가르니에는 뒤프레 제독으로부터 뒤피의 석방을 협상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1873년, 가르니에는 후에 조정에 여러 요구 사항을 전달했으나, 그의 진짜 의도를 의심한 조정은 응답을 미뤘다. 이에 가르니에는 상관의 허가 없이 독단적으로 1873년 11월 20일 하노이를 무력으로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하노이 점령 후, 가르니에와 그의 부대는 공세를 이어가 12월까지 홍강 삼각주 지역의 주요 도시 대부분을 장악했다.[1]

이 상황에 대해 후에 조정과 현지 군사 관리들 사이에는 의견 차이가 있었다. 조정은 프랑스 대표와 협상을 통해 가르니에를 하노이에서 철수시키려 했지만, 호앙께비엠과 톤텃 투엣은 흑기군(黑旗軍)의 지도자 류융푸(劉永福)에게 연락하여 하노이 서쪽으로 이동해 프랑스군을 공격할 준비를 하도록 지시했다. 1873년 12월 21일, 흑기군은 프랑스군을 공격했고 이 전투에서 프란시스 가르니에는 흑기군 병사에게 사살되었다. 가르니에의 사망 소식을 들은 후에 조정은 즉시 황께비엠과 톤텃 투엣에게 류융푸를 흥화로 복귀시키라고 명령했다.

가르니에의 죽음을 둘러싼 해석은 분분하다. 프랑스 측 기록에서는 후에 조정의 이중적인 정책이 흑기군의 공격을 부추겼다고 주장하는 반면, 베트남의 공식 역사 기록인 《대남실록》(大南實錄)에는 뜨득 황제가 협상을 원했으나, 황께비엠과 톤텃 투엣이 프랑스에 대한 불신으로 독단적으로 류융푸를 설득하여 공격을 감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르니에는 사망했지만 하노이 탈환 시도는 실패했고, 프랑스군은 홍강 삼각주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했다.[2]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가르니에의 무단 점령을 승인하지 않았고, 별도의 원정대를 파견하여 점령지에서 프랑스군을 철수시키고 사이공으로 귀환시켰다. 결국 1874년 3월, 프랑스와 베트남 사이에 제2차 사이공 조약(일명 필라스트르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하노이하이퐁에 영사관을 설치하는 등 베트남 내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했고, 그 대가로 후에 조정에 무기와 선박 등을 제공했다.

3. 2. 2. 통킹 원정 (1882-1886)

1881년, 앙리 리비에르가 코친차이나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1882년 4월 10일 하노이에 도착했다. 당시 코친차이나 총독 르 미르 드 빌레르와 리비에르는 류융푸가 이끄는 흑기군을 프랑스의 상업 활동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이 시기 류융푸는 프랑스 영사 데 케르가라데가 파견한 광산 기술자 두 명을 억류하고 있었다. 드 빌레르는 후에 조정이 1874년 조약을 이행하여 흑기군 문제를 해결하고 프랑스 기술자들을 석방하지 않으면 군대를 북부로 파견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류융푸는 1883년 3월 26일, 하노이 요새에 리비에르를 살해하겠다는 협박문을 게시했다.

리비에르와의 충돌 가능성을 우려한 후에 조정은 황께비엠과 응우옌 흐우 도에게 류융푸와 흑기군 문제를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조정은 황께비엠에게 흑기군을 하노이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라고 명령했으나, 리비에르는 이를 신뢰하지 않았다. 리비에르는 하노이 사령관 황 디에우에게 흑기군의 항복 또는 제거를 요구하며, 응하지 않을 경우 하노이를 점령하겠다고 통보했다. 황 디에우로서는 이를 이행하기 불가능했고, 결국 1883년 4월 26일 리비에르는 하노이를 점령했다. 후에 조정은 응우옌 흐우 도를 프랑스와의 협상 대표로 파견하는 한편, 황께비엠에게는 북부 지방에서 전쟁 준비를 지시했다. 황께비엠은 응우옌 흐우 도가 흑기군의 라오까이 이동 자금 지급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등, 조정 내부에서도 흑기군에 대한 의견 충돌이 심화되었다.

리비에르는 황께비엠과 흑기군의 관계가 다른 관리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프랑스의 요구를 거부하게 만든다고 판단했다. 1882년 8월부터 프랑스 당국은 리비에르의 역할을 방어적으로 제한했지만, 그는 프랑스가 통제하는 베트남 영토에서 발견되는 모든 중국 군인을 구금했다. 한편, 중국은 프랑스의 하노이 및 홍강 삼각주 침략을 남중국 침략의 전조로 여기고, 국경 방어를 위해 흑기군과의 동맹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1882년 4월 리비에르가 하노이를 점령하자, 윈난과 광시 군대가 북부 베트남으로 파견되었다. 청나라 관리 탕징송은 1883년 1월 베트남으로 이동하여 류융푸와 접촉하며 프랑스에 대항할 전쟁에 흑기군을 동원할 계획을 추진했다.

1883년 2월 28일, 리비에르는 남딘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이후 탕징송은 선떠이로 가서 황께비엠을 만났고, 그의 중재로 류융푸와 회담했다. 황께비엠은 리비에르의 남딘 침공에 대한 보복으로 사이공 공격을 제안했으며, 탕징송은 류융푸에게 청나라의 지원을 약속했다. 황께비엠과 류융푸는 남딘 탈환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병력을 하노이 서쪽으로 이동시켰다.

1883년 5월 19일, 리비에르는 흑기군 진영을 공격하기 위해 하노이를 출발했으나 매복 공격을 받아 전사했다. 그의 머리는 하노이 서문 밖에 전시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용감한 아들들의 복수"를 다짐하며 알렉상드르-외젠 부에를 통킹 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883년 8월 16일, 부에는 하이즈엉을 점령했고 흑기군은 까우저이로 후퇴했다. 동시에 쥘 아르망은 쿠르베 제독과 함께 후에로 이동하여 조정을 압박했다. 황제 협화는 결국 협상에 임했고, 1883년 9월 25일 아르망 조약이 체결되어 통킹과 안남이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편입되었다. 이에 반발한 똔텃 투엣과 응우옌 반 투옹은 황제 협화를 처형했다. 한편, 황께비엠은 선떠이에서 중국군과 비밀리에 연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1883년 12월, 쿠르베 제독은 선떠이를 공격했다. 일부 중국군이 흑기군과 함께 방어에 나섰으나 프랑스군에 패배했고, 탕징송은 도주했다. 선떠이 함락 후 흑기군은 북쪽으로 후퇴했다. 1884년 3월, 프랑스군 총사령관 샤를 테오도르 밀로는 박닌을 공격했다. 흑기군과 중국 동맹군은 흥화(Hưng Hóa)로 철수했으며, 탕징송도 류융푸를 따라 도주했다. 박닌 함락의 책임을 물어 중국 조정은 쉬옌슈와 탕징송을 소환했다. 쉬옌슈는 구금 중 사망했고, 탕징송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프랑스군은 계속해서 흑기군을 추격하여 라오까이까지 진격했으며, 1884년 5월 밀로 장군은 뚜옌꽝에서의 승리를 선언했다. 1884년 5월 11일, 이홍장과 에르네스트 푸르니에는 리-푸르니에 협정을 체결하여 중국군의 베트남 철수 등을 합의했다. 이어서 후에 조약이 체결되어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권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후에 조정은 관리들에게 소환령을 내렸고, 황께비엠은 1884년 봄, 명령에 따라 후에로 복귀했다. 그는 과거 고위직을 역임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보호령 하의 공공 사업부 감독관으로 강등되었다. 이는 그가 조정에 충성하며 프랑스에 저항했던 것에 대한 결과로 해석된다.

3. 2. 3. 청불 전쟁 (1884-1885)

1883년 12월, 프랑스군은 손떠이에 대한 두 번째 공격을 감행했다. 이번 공격에는 중국군 5개 대대가 흑기군과 합류했지만, 실제로는 소수의 중국군만이 흑기군을 지원했다. 프랑스군 사령관 쿠르베 제독은 약 25,000명의 병력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예상했으나 이는 과장된 정보였다. 결국 중국군 지휘관 탕징쏭(Tang Jingsong)은 베트남 관리들의 도움을 받아 탈출했고, 손떠이는 프랑스군에게 함락되었다.

손떠이가 함락된 후, 흑기군은 하노이 북쪽으로 후퇴했다. 프랑스군은 곧바로 다음 공격을 개시했다. 프랑스군 장군 샤를 테오도르 밀로(Charles-Théodore Millot)는 다른 두 명의 프랑스 장군과 함께 박닌을 공격했다. 흑기군과 그들의 중국 동맹군 사령관 쉬옌슈(Xu Yanxiu)는 흥화로 철수했으며, 탕징쏭 역시 류융푸(Liu Yongfu)를 따라 흥화로 도망쳤다. 박닌 함락은 쉬옌슈와 탕징쏭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들은 중국으로부터 박닌 함락의 책임을 추궁당했고, 조사를 받기 위해 수도로 소환되었다. 1884년 4월, 쉬옌슈는 구금 중 사망했으며, 탕징쏭은 1884년 1월 종신형으로 감형받은 후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프랑스군은 흑기군을 계속 추격하여 라오까이까지 몰아붙였다. 1884년 5월, 밀로 장군은 뚜옌꽝에서 프랑스의 승리를 선언했다. 한편, 외교적으로는 1884년 5월 11일, 청나라의 이홍장과 프랑스 대표 에르네스트 푸르니에(Ernest Fournier) 사이에 리-푸르니에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에서 청나라는 베트남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국경 지대의 안전을 보장하며 프랑스와 새로운 상업 조약을 체결할 의향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 대가로 프랑스는 남중국해와 베트남 북부 해안의 해상 보호를 보장하기로 했다. 이어서 1884년 후에 조약이 체결되어, 프랑스 제3공화국 대표가 베트남 궁정과 직접 교류할 것임을 명확히 했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 궁정은 관리들에게 일반 소환령을 내렸다. 응우옌 꽝 빅(Nguyễn Quang Bích)을 비롯한 많은 관리들은 흑기군과 함께 싸웠기 때문에 소환에 응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1884년 봄, 호앙께비엠은 명령에 따라 후에 궁정으로 돌아갔다. 그는 과거 고위 관료였음에도 불구하고 통킹 하의 공공 사업부 감독관으로 강등되었다. 이는 그가 궁정에 대한 충성심을 지켰기 때문에 식민 정권으로부터 받은 불이익이었다.

3. 2. 4. 껀브엉 운동 (1885-1889)

1885년 협화제가 사망한 후, 톤 텃 투엣과 응우옌 반 뜨엉은 함응히제를 황제로 옹립하고 그를 중심으로 프랑스 보호령에 대한 저항 운동인 껀브엉 운동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응우옌 반 뜨엉을 포함한 일부 엘리트들은 이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다. 프랑스 측은 응우옌 반 뜨엉에게 옛 동맹인 톤 텃 투엣을 체포하라고 요구했으나 그가 이를 거부하자, 꼰다오 섬 감옥으로 추방했다. 호앙께비엠 역시 이 시기에 강등되어 고향인 꽝빈으로 물러나 은거했다.

응우옌 반 뜨엉이 추방된 후 프랑스는 동카인제를 새로운 황제로 세웠지만, 여전히 함응히제를 따르는 세력이 많았다. 1886년, 동카인제는 함응히제와 그의 추종자들을 설득하여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하려고 꽝빈으로 북부 순행을 떠났으나 실패했다. 이후 동카인제는 은퇴해 있던 호앙께비엠을 동게 대서기관(Đồng các Đại học sĩ)으로 복귀시키고, 다시 함응히제와 그의 추종자들을 설득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호앙께비엠 역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1887년에 조정으로 돌아왔다.

1888년, 프랑스군은 함응히제를 체포하기 위해 꽝빈에 도착했다. 함응히제의 추종자 중 한 명의 배신으로 그의 위치가 발각되었고, 결국 함응히제는 프랑스군에게 체포되었다. 함응히제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톤 텃 투엣의 아들 톤 텃 땀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함응히제의 체포로 껀브엉 운동은 큰 타격을 입고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다.

참조

[1] 서적 Les colonies françaises. 1, Un siècle d'expansion coloniale
[2] 서적 Les Français au Tonkin, 1787-1883
[3] 서적 Việt Nam Sử Lược The Commercial Press
[4] 서적 Imperial Bandits: Outlaws and Rebels in the China-Vietnam Borderlands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5] 서적 Imperial Bandits: Outlaws and Rebels in the China-Vietnam Borderlands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6] 서적 Imperial Bandits: Outlaws and Rebels in the China-Vietnam Borderlands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7] 서적 Black Flags in Vietnam: The Story of A Chinese Intervention https://archive.org/[...] George Allen & Unwin LTD
[8] 서적 Imperial Bandits: Outlaws and Rebels in the China-Vietnam Borderlands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9] 서적 Việt Nam Sử Lược The Commercial Press
[10] 서적 Imperial Bandits: Outlaws and Rebels in the China-Vietnam Borderlands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1] 서적 Imperial Bandits: Outlaws and Rebels in the China-Vietnam Borderlands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2] 서적 Imperial Bandits: Outlaws and Rebels in the China-Vietnam Borderlands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3] 서적 Imperial Bandits: Outlaws and Rebels in the China-Vietnam Borderlands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4] 서적 Imperial Bandits: Outlaws and Rebels in the China-Vietnam Borderlands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5] 서적 Imperial Bandits: Outlaws and Rebels in the China-Vietnam Borderlands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6] 서적 Imperial Bandits: Outlaws and Rebels in the China-Vietnam Borderlands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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