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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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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석두는 1813년 충청도 연풍에서 태어난 인물로, 부유한 양반 집안의 외아들이었다. 과거 시험을 준비하다 천주교를 접하고 개종하여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가족들의 반대와 위협에도 신앙을 지키며, 아내와 가족들을 천주교로 개종시켰다. 헌신적인 신앙생활과 봉사로 존경을 받았으며, 사제 서품을 희망했지만 무산되었다. 이후 한문학 교사, 교리 교사, 복사 등으로 활동하며 서적 번역 및 저술에 참여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순교했으며,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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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황석두 루카
출생일1813년
사망일1866년 3월 30일
축일9월 20일
교파로마 가톨릭교회
연풍성지에 있는 황석두 성인상
연풍성지에 있는 황석두 성인상
출생지충청도 연풍
사망지충청도 갈매못
직업순교자
시복일1968년 10월 6일
시복인교황 바오로 6세
시성일1984년 5월 6일
시성인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매장지절두산 순교성지

2. 생애

황석두는 1813년 충청도 연풍에서 태어나 20세에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갔다. 한양의 주막에서 천주교인을 만나 천주교 서적을 받고 감명을 받아 천주교 신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1]

아내를 천주교로 개종시킨 후, 가족들의 반대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을 굳건히 이어갔다. 페레올 주교조선에 입국하자 교회를 위해 봉사하기로 결심하고, 아내와 별거를 허락받고 독신으로 살았다. 페레올 주교는 황석두를 사제로 만들려 했으나, 교황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1]

이후 황석두는 한문학 교사, 교리 교사, 회장, 복사 등으로 활동하며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를 도와 서적 번역 및 저술에 힘썼다.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충청도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자, 황석두는 자진하여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1866년 3월 30일 보령 갈매못(충청도에 있던 해군 기지)에서 다블뤼 주교 등과 함께 참수되어 54세의 나이로 순교했다.[1]

2. 1. 초기 생애와 천주교 입교

황석두는 1813년 충청도 연풍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가문의 영광을 위해 그가 과거 시험에 합격하도록 공부를 시켰다.[1]

20세에 과거 시험을 보러 한양으로 가던 중, 주막에서 한 천주교인을 만나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감명을 받았다. 그는 그 천주교인에게서 천주교 서적 몇 권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버지에게 과거 시험에 급제하였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하늘의 시험에 합격했다는 뜻이었다. 황석두는 아버지에게 심하게 매를 맞았지만, 천주교 신앙을 공부하는 것을 계속하였다.[1]

2. 2. 헌신적인 신앙생활

황석두는 아내를 천주교로 개종시켰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죽이려 했으나, 황석두는 3년 동안 침묵했다. 가족들은 그의 침묵을 고치려 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황석두의 권유로 온 가족이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1]

비신자들까지도 황석두의 헌신과 성품에 감복하였다. 페레올 주교가 조선에 왔을 때, 황석두는 교회를 위해 봉사하기로 결심하고, 절제와 금욕을 위해 페레올 주교에게 아내와 별거를 허락받고 독신으로 살았다.[1]

2. 3. 사제 지망과 좌절

페레올 주교조선에 입국했을 때, 황석두는 여생을 교회를 위해 봉사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절제와 금욕을 위해 페레올 주교에게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받고 독신으로 살았다. 페레올 주교는 황석두를 사제로 만들기로 결심했지만, 교황청에서는 조선에 황석두의 아내가 입회할 수녀회가 없다는 이유로 그 제안을 거절하였다.[1]

2. 4. 사목 활동

페롱 신부는 황석두를 한문학 교사이자 교리 교사 및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그는 사제들의 복사직도 수행했다. 황석두는 그 의무들을 훌륭히 수행하였으며,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의 복사가 되었다. 그는 주교들과 함께 여러 권의 서적을 번역 및 저술하였다.

2. 5. 체포와 순교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가 충청도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자, 다블뤼 주교는 황석두의 지식과 능변을 아까워하여 포졸들에게 황석두만은 체포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했다.[1] 하지만, 황석두는 한양으로 압송되는 주교를 수십 리 동안 뒤따라가 체포되어 주교와 함께 압송되었다.[1] 1866년 3월 30일 황석두는 사형을 선고받고 보령 갈매못(충청도에 있던 해군 기지)에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장주기 등과 함께 참수, 군문효수되었다.[1] 이때 그의 나이는 54세였다.[1]

3. 시복 및 시성

황석두 루카는 1968년 10월 6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집전한 24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가 되었고,[3][4] 1984년 5월 6일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이 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http://newsaints.fai[...]
[2] 웹인용 한국 천주교 절두산 순교성지 성인유해실 https://web.archive.[...] 2015-02-15
[3] 백과사전 103위 성인 (百三位聖人) http://preview.brita[...] 2015-02-15
[4] 뉴스 "[교황 방한] 1925년·1968년·2014년…로마에서 서울까지 3번의 시복식" http://news1.kr/arti[...] 뉴스1 2014-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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