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인-맥마흔 서한
1. 개요
후세인-맥마흔 서한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과 메카의 태수 후세인 빈 알리 사이에 오간 서한이다. 영국은 이 서한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아랍 반란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아랍인 거주 지역의 독립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 협정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아랍 지역 분할을 결정하고 밸푸어 선언으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정착을 인정한 것과 모순되어 영국의 "삼중 외교" 논란을 야기했다. 서한 내용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지역은 아랍인의 땅에서 제외되었으며, 영국의 비밀 외교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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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오스만 제국 -
갈리폴리 전역
갈리폴리 전역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이 다르다넬스 해협을 장악하고 오스만 제국을 붕괴시키려 했으나 오스만 제국의 방어에 막혀 철수하면서 양측에 막대한 피해를 남기고 호주와 뉴질랜드의 국가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준 군사 작전이다. -
1916년 오스만 제국 -
아랍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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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문서 -
치머만 전보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외무장관 치머만이 멕시코에 미국 공격을 제안하며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 반환을 약속한 전보가 영국에 의해 해독되어 미국 참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
1916년 문서 -
공화국 선포
아일랜드 공화국 선포는 1916년 아일랜드 부활절 봉기 당시 발표된 선언문으로, 아일랜드 국민의 주권과 자유, 평등, 민주주의 가치를 강조하며 독립을 선언하고 모든 시민에게 자유와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공화국 정부의 이상을 제시하여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915년 오스만 제국 -
갈리폴리 전역
갈리폴리 전역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이 다르다넬스 해협을 장악하고 오스만 제국을 붕괴시키려 했으나 오스만 제국의 방어에 막혀 철수하면서 양측에 막대한 피해를 남기고 호주와 뉴질랜드의 국가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준 군사 작전이다. -
1915년 오스만 제국 -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은 1915년부터 1923년까지 오스만 제국에서 통일진보위원회 주도하에 발생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조직적인 학살로, 사회적, 정치적 갈등, 민족주의, 제1차 세계 대전 등의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하여 수십만에서 15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목숨을 잃었으며, 국제 사회에서 집단 학살로 인정받고 튀르키예와의 논쟁의 중심에 있다.
2. 협정의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과 오스만 제국의 참전으로, 영국은 중동 지역에서 새로운 전략을 모색해야 했다. 영국은 아랍 민족주의를 이용하여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방안을 고려했다. 한편, 메카의 태수였던 후세인 빈 알리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아랍 왕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3. 협정의 내용 및 주요 쟁점
메카의 태수 후세인 빈 알리와 영국의 주이집트 고등 판무관 헨리 맥마흔이 주고받은 서한에서 영국은 투르크와의 전쟁에 협력(아랍 반란)하는 대가로 아랍인 거주 지역의 독립을 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이듬해 아랍 지역 분할을 결정한 사이크스-피코 협정, 그 다음 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정착을 인정한 밸푸어 선언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여, 영국의 이러한 일련의 행동을 "영국의 삼중 외교"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팔레스타인은 애초에 아랍 국가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고, 사이크스-피코 협정에서 규정한 프랑스 지배 지역도 프랑스 직접 통치령으로 한정하면(다마스쿠스 근처는 겹치지만) 대략 후세인-맥마흔 협정 영역 안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각 내용은 사실상 크게 모순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이러한 비밀 외교는 시오니스트들의 반발을 사 팔레스타인 문제의 원인이 되었다.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맥마흔의 두 번째 서한(1915년 10월 24일)은 다음과 같다.
[[메르신 주]] 및 [[하타이 주아랍어
여기서 언급된 선 긋기에는 남쪽의 팔레스타인 지역은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적어도 이 협정과 밸푸어 선언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다만 사이크스-피코 협정과의 사이에서는, 이 협정에서 프랑스의 세력권 아래에 있다고 여겨진 시리아 및 북 메소포타미아(A 구역)를 둘러싸고 모순이 발생했다. 후세인이 처음 제시한 지역에는 팔레스타인이 포함되었지만, 후세인은 밸푸어 선언이 발표될 때까지 이 팔레스타인이 포함되지 않는 선 긋기에 관해 팔레스타인의 소속을 확인하지 않았다. 또한 레바논과 인접해 있으며 유대교도와 기독교도가 일정 수 거주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은 영국 측이 제시한 "순수한 아랍인의 땅이라고 할 수 없다"라는 조건에 해당한다. 그리고 1919년 파이살(후세인의 아들)과 와이츠만 회담에서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정착을 촉진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4. '삼중 외교' 논란
영국은 메카의 태수 후세인 빈 알리와 헨리 맥마흔 사이에 오간 서한에서 투르크와의 전쟁에 협력(아랍 반란)을 조건으로 아랍인 거주 지역의 독립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통해 아랍 지역 분할을 결정하고, 밸푸어 선언으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정착을 인정하면서 "영국의 삼중 외교"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져보면, 팔레스타인은 애초에 아랍 국가 영역에 포함되지 않았고, 사이크스-피코 협정에서 규정한 프랑스 지배 지역도 프랑스 직접 통치령으로 한정하면 후세인-맥마흔 서한의 영역과 크게 겹치지 않아 모순되지 않는다는 해석도 있다. 그럼에도 영국의 비밀 외교는 시오니스트들의 반발을 사 팔레스타인 문제의 원인이 되었다.
맥마흔의 두 번째 서한(1915년 10월 24일)에서 언급된 메르신 주 및 이스켄데룬 지역, 그리고 시리아 중 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알레포 각 지구보다 서쪽 부분은 순수 아랍인의 땅이 아니므로 제외되었다. 이 선 긋기에는 팔레스타인 지역이 포함되지 않아, 최소한 이 협정과 밸푸어 선언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다만 사이크스-피코 협정에서 프랑스 세력권으로 여겨진 시리아 및 북 메소포타미아(A 구역)를 둘러싸고는 모순이 발생했다. 후세인은 처음에 팔레스타인을 포함시켰지만, 밸푸어 선언 발표 전까지 팔레스타인 소속을 확인하지 않았다. 또한 레바논과 인접하고 유대교도와 기독교도가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지역은 영국이 제시한 "순수한 아랍인의 땅이라고 할 수 없다"는 조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1919년 파이살(후세인의 아들)과 와이츠만 회담에서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정착을 촉진하기로 합의했다.
5. 협정 이후의 전개
1916년부터 1918년까지 아랍 반란이 일어나 오스만 제국이 패배했다. 1919년 파이살-와이츠만 회담에서는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 정착을 촉진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1920년부터 1948년까지는 영국의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이 수립되었다.
6. 협정의 역사적 영향 및 평가
후세인-맥마흔 협정은 팔레스타인 문제의 기원이 되었으며, 아랍-이스라엘 분쟁의 씨앗을 뿌렸다고 평가받는다. 이 협정은 중동 지역의 정치 지형 변화와 현대 국가 형성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영국의 외교 정책은 '기만 외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영국은 투르크에 대항하는 아랍 반란을 조건으로 아랍인 거주 지역의 독립을 약속했지만, 이는 사이크스-피코 협정과 밸푸어 선언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여 '삼중 외교'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져보면, 팔레스타인은 애초에 아랍 국가 영역에 포함되지 않았고, 사이크스-피코 협정에서 규정된 프랑스 지배 지역도 프랑스 직접 통치령에 한정하면 후세인-맥마흔 협정 영역 안에 포함되지 않아 내용상 모순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비밀 외교는 시오니스트들의 반발을 샀고, 팔레스타인 문제의 원인이 되었다. 맥마흔의 두 번째 서한(1915년 10월 24일)에서 언급된 "메르신 주 및 이스켄데룬 지역, 그리고 시리아 중 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알레포 각 지구보다 서쪽 부분은 순수한 아랍인의 땅이라고 할 수 없다"는 내용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포함하지 않아, 최소한 밸푸어 선언과는 모순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이크스-피코 협정과는 시리아 및 북 메소포타미아(A 구역)를 둘러싸고 모순이 발생했다. 후세인은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지역을 제시했지만, 밸푸어 선언 발표 전까지 팔레스타인 소속을 확인하지 않았다. 또한, 레바논과 인접하고 유대교도와 기독교도가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지역은 영국이 제시한 "순수한 아랍인의 땅이라고 할 수 없다"는 조건에 해당하며, 1919년 파이살과 와이츠만 회담에서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정착을 촉진하기로 합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