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임 바이츠만
1. 개요
하임 바이츠만은 벨라루스 출신의 시온주의 운동가이자 과학자이며,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이었다. 그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 후 임시 국가 위원회 의장을 역임했으며, 1949년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1952년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다. 과학자로서 그는 아세톤 생산에 기여하여 '산업 발효의 아버지'로 불렸으며, 와이즈만 과학 연구소 설립에도 기여했다.
| 원어 이름 | חיים עזריאל ויצמן히브리어 |
|---|---|
| 로마자 표기 | Chayyim Azri'el Vaytsman |
| 러시아어 이름 | Хаим Евзорович Вейцман러시아어 |
| 러시아어 이름 (로마자 표기) | Khaim Evzorovich Veytsman |
| 출생 이름 | 하임 아즈리엘 바이츠만 |
| 출생 | 1874년 11월 27일 |
| 출생지 | 러시아 제국 그로드노 현 모탈 |
| 사망 | 1952년 11월 9일 |
| 사망지 | 이스라엘 레호보트 |
| 국적 | 러시아 제국 영국 이스라엘 |
| 배우자 | 베라 바이츠만 |
| 자녀 | 2명 |
| 친척 | 마리아 바이츠만 (자매) 안나 바이츠만 (자매) 민나 바이츠만 (자매) 에제르 바이츠만 (조카) |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직업 | 생화학자 |
|---|---|
| 모교 | 다름슈타트 공과대학교 베를린 공과대학교 프리부르 대학교 |
| 알려진 업적 | 정치: 이스라엘 건국에 기여. 과학: 산업 발효, 아세톤-부탄올-에탄올 발효 공정 개발 (제1차 세계 대전 연합군 전쟁 노력에 중요). 시에프 연구소 (현재 바이츠만 연구소) 설립,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 설립 지원. |
| 소속 정당 | 총 시온주의자 |
|---|---|
| 초대 이스라엘 대통령 | 임기 시작: 1949년 2월 17일 임기 종료: 1952년 11월 9일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 전임: 자신 (임시 국가 평의회 의장) 후임: 이츠하크 벤츠비 |
| 제2대 이스라엘 임시 국가 평의회 의장 | 임기 시작: 1948년 5월 16일 임기 종료: 1949년 2월 17일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 전임: 다비드 벤구리온 후임: 자신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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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화학자 -
에른스트 데이비드 버그만
에른스트 데이비드 버그만은 독일 태생의 이스라엘 화학자이자 과학 행정가로, 유기화학, 특히 플루오린 화학 분야에 기여했으며 이스라엘의 핵 개발 프로그램을 주도하여 바이츠만상과 이스라엘상을 수상했다. -
이스라엘의 화학자 -
아리에 와르셸
아리에 와르셸은 이스라엘 출신 화학자로서 생체 분자의 구조와 기능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계산 방법을 개발하고 컴퓨터 효소학 분야를 개척한 공로로 2013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
벨라루스계 영국인 -
샘슨 에이브럼스키
샘슨 에이브럼스키는 게임 시맨틱스, 논리적 형식의 영역 이론, 범주론적 양자 역학 분야에서 선구적인 연구를 수행한 컴퓨터 과학자로, 영국 왕립 학회 회원, 유럽 이론 컴퓨터 과학 협회(EATCS) 상 수상자, ACM 펠로우, 영국 컴퓨터 학회 러브레이스 메달 수상자이며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교수이다. -
벨라루스계 영국인 -
피터 세러피너위치
피터 세러피너위치는 잉글랜드의 배우, 코미디언으로, BBC 라디오와 TV 쇼를 통해 경력을 시작하여 《피터 세러피너위치 쇼》로 로즈 도르 상을 수상하고 BAFTA 코미디 프로그램상 후보에 오르는 등 다양한 매체에서 코미디 연기와 목소리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
브레스트주 출신 -
리샤르트 카푸시친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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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스트주 출신 -
표트라 크라체우스키
표트라 크라체우스키는 벨라루스의 역사, 문화, 민족 정체성에 대한 깊은 관심을 바탕으로 '과거와 현재의 벨라루스', '벨라루스 책의 역사', '벨라루스 인민 공화국의 위임', '스카리나와 독립' 등의 저작물을 남긴 벨라루스 작가이며 역사 드라마 '라그네다'를 집필했다.
2. 생애
하임 바이츠만은 1874년 러시아 제국의 모탈(현재 벨라루스)에서 태어났다. 1949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전까지, 화학자이자 시온주의 운동 지도자로 활동했다.
바이츠만은 베라 바이츠만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장남 벤자민 바이츠만(1907–1980)은 아일랜드에서 낙농업에 종사했다. 차남 공군 중위 마이클 오서 바이츠만(1916–1942)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 공군에서 복무하다 비스케이만 상공에서 전사했다. 그의 유해는 발견되지 않아 실종 처리되었으며, 런니미드 공군 기념관에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바이츠만은 바이츠만 연구소 부지에 위치한 바이츠만 하우스 정원에 아내와 함께 묻혔다. 그의 조카 에제르 바이츠만은 이스라엘 공군 사령관을 거쳐 이스라엘 대통령을 역임했다.
2.1. 초기 생애와 교육 (1874-1904)
하임 바이츠만은 1874년 러시아 제국의 모탈(현재 벨라루스령)에서 오이저 바이츠만과 레이첼 (체메린스키) 바이츠만 사이에서 태어난 15명의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목재 상인이었다. 4세부터 11세까지 헤데르(유대교 종교 초등학교)에서 히브리어를 공부했다. 11세에 핀스크의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화학 분야에서 과학적 재능을 보였다. 핀스크에 있는 동안 호베베이 시온 운동에 참여했다. 1892년 우등으로 졸업했다.
1892년, 독일 제국으로 가서 다름슈타트 공과대학교에서 화학을 공부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정통 유대교 기숙 학교에서 히브리어 교사로 일했다. 1894년, 베를린 공과대학교로 옮겨 공부했다.
베를린에 있는 동안 시오니스트 지식인들의 모임에 합류했다. 1897년, 스위스 프리부르 대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1898년, 바젤에서 열린 제2차 시오니스트 회의에 참석했고, 같은 해 소피아 게초바와 약혼했다. 1900년 베라 카츠만과 연애를 시작했으나, 1903년까지 게초바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동료 학생들은 모의 재판을 열어 바이츠만이 게초바와 결혼해야 한다고 판결했지만, 바이츠만은 이를 무시했다. 1899년 유기화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바이츠만의 형제자매 15명 중 10명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그중 두 명은 화학자가 되었다. 안나 바이츠만은 다니엘 시에프 연구소에서 일하며 특허를 등록했고, 모셰 바이츠만은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 화학부장이었다. 마리아 바이츠만과 슈무엘은 러시아 혁명 이후 소련에 남았다. 슈무엘은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당원이자 반시오니스트 분트주의 운동의 일원이었으나, 대숙청 기간 중 간첩 및 시오니스트 활동 혐의로 1939년 처형되었다. 마리아 바이츠만은 1952년 "의사 음모"사건으로 체포되어 시베리아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석방되어 1956년 이스라엘로 이민을 갈 수 있었다. 또 다른 누이 미나 바이츠만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스파이의 연인이었고, 1915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독일을 위해 스파이로 활동했다. 그녀는 결국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와 하다사 여성 시오니스트 기구의 의료 서비스에서 일했다.
2.2. 영국 이주와 과학자로서의 활동 (1904-1914)
1904년, 맨체스터 대학교 화학과에서 수석 강사로 취임하여 영국으로 이주했다. 1905년 클레이턴 아닐린 컴퍼니(Clayton Aniline Company)에 합류했고, 그곳에서 이사 찰스 드레이푸스(Charles Dreyfus)를 통해 당시 총리였던 아서 발푸어(Arthur Balfour)를 소개받았다.
1906년 베라 카츠만과 결혼했다. 1907년 팔레스타인을 방문하여 이민 상황을 시찰하고, 유대인 국가 건설에는 정치적 해결과 식민이 모두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합성 시온주의(synthetic Zionism)로 불렸다.
1910년 내무 장관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의 서명으로 영국 시민이 되었으며, 1948년 이스라엘 대통령직을 맡기 위해 포기할 때까지 영국 국적을 유지했다.
맨체스터 대학교 강사로 재직하면서 박테리아 발효를 사용하여 다량의 원하는 물질을 생산하는 방법을 발견하여 산업 발효의 아버지로 여겨진다. 그는 세균 클로스트리디움 아세토부틸리쿰(바이츠만 미생물)을 사용하여 아세톤을 생산했다.
2.3. 제1차 세계 대전과 시온주의 운동 (1914-1919)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정부는 과학자들에게 군사 연구 논문을 모집했다. 바이츠만의 아세톤 제조법 논문은 초기에는 주목받지 못했지만,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총리의 요청으로 ABE 발효를 이용해 옥수수에서 아세톤을 대량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영국 정부는 대영제국 훈장 수여를 제안했으나, 바이츠만은 이를 거부하고 대신 팔레스타인 이주를 요구했다. 이는 밸푸어 선언(1917)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1915년 쉘 위기 이후, 바이츠만은 1916년부터 1919년까지 영국 해군성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1918년에는 유대 위원회 수장으로서 팔레스타인을 방문하여 사해에서 영국 전쟁 노력을 위한 "희귀 광물"을 탐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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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바이츠만은 파이살 왕자와 파이살-바이츠만 협정을 체결하여 상호 민족 국가 건설 협력을 약속했다.
2.4. 시온주의 운동 지도자 (1920-1948)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아랍 민족 운동의 지도자이자 후에 이라크 왕국 국왕이 된 파이살 1세와 파이살-바이츠만 협정을 맺어, 서로의 민족 국가 건설을 위해 협력하기로 약속했다. 이후 세계적인 시오니스트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1920년 이후, 세계 시온주의 기구(WZO)에서 지도력을 맡아 베를린에 지부를 만들었다. 1920년부터 1931년까지, 그리고 1935년부터 1946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WZO 대표를 역임했다. 유대인 존재에 대한 아랍의 적대감으로 인한 불안이 증가하여 폭동으로 이어졌다. 바이츠만은 영국에 충성을 유지하며, 그 책임을 어두운 세력에게 돌리려 했다.
1921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함께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를 설립하고 테크니온 - 이스라엘 공과대학교를 지원하기 위한 모금 행사에 참여했다. 같은 해, 바이츠만은 핀하스 루텐베르크가 팔레스타인에 대한 독점적인 전력 특허를 영국으로부터 획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두 인물 간에는 격렬한 개인적, 원칙적 분쟁이 있었다.
1929년, 대공황에 대응하여 유대 기관(Jewish Agency)을 설립했다.
1934년, 레호보트에 다니엘 시에프 연구소(Daniel Sieff Research Institute, 현 바이츠만 과학 연구소)를 설립했다. 바이츠만은 이 연구소의 소장 자리를 프리츠 하버에게 제안했지만, 하버가 팔레스타인으로 오는 길에 사망하여 바이츠만이 직접 소장직을 맡았다.
관련된 이미지들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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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이스라엘 건국과 초대 대통령 (1948-1952)
제2차 세계 대전 중 바이츠만은 영국 군수성 명예 고문으로 합성 고무와 고급 휘발유를 연구했다(천연 고무 산지인 말라야 식민지가 일본에 점령되었기 때문). 또한 영국군 내 유대인 여단 조직을 촉진했다. 그의 아들 2명도 군 복무를 했으며, 1942년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회견을 위해 출발하려 할 때, 아들 마이클의 비행기가 격추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일을 계속했다.
1947년 UN의 팔레스타인 분할안에 대해, 팔레스타인 국가의 독립은 인정했지만, 네게브를 이스라엘에 포함시킬 것을 주장했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과 회견하여 지원을 얻어내어 주장을 관철시키는 데 성공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후, 임시 국가 위원회 의장을 역임하였다. 1949년 2월 이스라엘의 첫 의회 선거가 치러질 때까지 임시 국가 위원회 의장직을 수행하였다. 이후 1949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바이츠만의 75세 생일을 기념하여, 다니엘 시프 연구소가 바이츠만 과학 연구소로 개명했다.
1952년 대통령 재임 중, 78세로 사망했다. 본인의 희망에 따라, 유해는 레호보트 자택에 매장되었다(1966년에 사망한 부인 베라도 매장되어 있다).
조카 에제르 바이츠만은 제7대 이스라엘 대통령(1993년 - 2000년)을 역임했다.
3. 과학적 업적
1910년대 초, 바이츠만은 인조고무 연구를 진행했다. 설탕을 인조고무 원료로 전환하는 박테리아를 찾던 중, 설탕을 아세톤으로 바꾸는 박테리아를 우연히 발견했다. 이 박테리아는 '클로스트리듐 아세토부틸리쿰(Clostridium acetobutylicum)'으로 명명되었으며, '바이츠만 유기물(Weizmann organism)'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바이츠만은 추가 연구를 통해 녹말을 설탕으로 전환하고, 이 박테리아를 이용하여 아세톤을 대량 생산하는 공정을 개발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영국은 포탄 제조에 필요한 화약 수요가 급증했지만, 공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바이츠만의 아세톤 대량 생산 방법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했다. 감자, 보리 등 녹말 원료가 되는 곡물과 미국에서 수입한 옥수수를 원료로 사용하여 아세톤 생산 효율을 높였다. 영국은 국내외에 아세톤 제조 공장을 건설하여 제1차 세계 대전 승리에 기여했다.
1899년, 프리부르 대학교에서 유기 화학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해 그는 제네바 대학교 유기 화학과에 합류했다. 1901년, 제네바 대학교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1904년, 영국으로 이주하여 맨체스터 대학교 화학과에서 수석 강사로 가르쳤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영국 공급부의 명예 고문으로 활동하며 합성 고무와 옥탄가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1942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초청으로 합성 고무 연구를 시작했다. 바이츠만은 옥수수에서 부틸 알코올을 생산한 다음, 이를 부틸렌으로 전환하고 다시 고무의 기초가 되는 부타디엔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했으나, 이 제안은 석유 회사에 의해 저지되었다.
4. 유산
하임 바이츠만은 이스라엘과 과학 발전에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바이츠만 과학 연구소
1934년, 바이츠만은 레호보트에 다니엘 시프 연구소(Daniel Sieff Research Institute)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는 후에 그의 이름을 따서 바이츠만 과학 연구소(Weizmann Institute of Science)로 개칭되었다. 이곳은 기초 과학 연구에 중점을 둔 기관으로, 세계적인 연구 기관으로 성장했다. 안나 바이츠만과 모셰 바이츠만을 포함한 그의 형제, 자매 중 두 명은 화학자로 이 연구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정치적 업적
바이츠만은 밸푸어 선언을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시오니즘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세계 시온주의 기구 회장을 두 번 역임하며(1920–31, 1935–46) 이스라엘 건국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노력은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파이살-바이츠만 협정 체결로 이어져 이스라엘 국가의 합법적인 존재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1949–1952)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가족
바이츠만은 베라 바이츠만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그의 조카 에제르 바이츠만은 이스라엘 공군 사령관을 거쳐 이스라엘 대통령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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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임 바이츠만은 바이츠만 연구소 부지에 위치한 바이츠만 하우스 정원에 아내와 함께 묻혔다.
5. 논란
하임 바이츠만은 시오니즘 운동 과정에서 밸푸어 선언을 얻어내는 데 기여했지만, 이 과정에서 아랍 국가들과의 충돌이 발생했다. 1919년 1월 3일, 바이츠만은 하시미 파이살 왕자를 만나 파이살-바이츠만 협정에 서명하여 이스라엘 국가의 합법적인 존재를 확립하려 했다. 그러나 같은 달 말, 1919년 파리 강화 회의는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역을 분리하고 위임통치 제도를 적용하기로 결정했다.
1920년 이후, 세계 시온주의 기구에서 지도력을 맡았던 바이츠만은 유대인 존재에 대한 아랍의 적대감이 증가하여 폭동으로 이어지자 영국에 충성을 유지하며 책임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다.
1936년 11월 25일, 필 위원회에서 증언하면서 바이츠만은 유럽에 600만 명의 유대인이 있으며, "그들에게 세상은 그들이 살 수 없는 곳과 들어갈 수 없는 곳으로 나뉜다"고 말했다. 위원회는 분할을 권고했지만, 아랍 지도자들은 이 계획을 거부했다.
1936년 제에브 자보틴스키는 폴란드, 발트 국가, 나치 독일, 헝가리 및 루마니아에서 150만 명의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으로 피난시키는 "피난 계획"을 준비했지만, 영국 정부의 거부와 바이츠만의 기각으로 무산되었다.
6. 가족 관계
חַיִּים וַיְצְמַן히브리어은 베라 바이츠만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바이츠만의 조카 에제르 바이츠만은 그의 형제 예히엘의 아들로, 저명한 농학자였고, 이스라엘 공군 사령관을 거쳐 이스라엘 대통령을 역임했다.
바이츠만에게는 15명의 형제자매가 있었는데, 그중 알려진 인물은 다음과 같다.
| 이름 | 설명 |
|---|---|
| 안나 바이츠만 | 화학자. 다니엘 시에프 연구소 실험실에서 일하며 여러 특허를 등록했다. |
| 모셰 바이츠만 | 화학자.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의 화학부장이었다. |
| 슈무엘 바이츠만 |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당원이자 반시오니스트 분트주의 운동의 일원이었다. 요시프 스탈린의 "대숙청" 동안 간첩 및 시오니스트 활동 혐의로 체포되어 1939년에 처형되었다. |
| 마리아 바이츠만 | 의사. 1952년 스탈린의 조작된 "의사 음모" 사건으로 체포되어 시베리아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다.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석방되었고, 1956년 남편과 함께 이스라엘로 이민을 갔다. |
| 미나 바이츠만 | 간호사.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스파이의 연인이었고, 1915년 이집트에서 독일을 위해 스파이로 활동했다. 스파이로 발각되어 이집트에서 추방되었으나, 니콜라이 2세의 러시아 영사에게 안전한 탈출 통로를 제공받아 러시아로 갔다. 전쟁에서 살아남아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와 하다사 여성 시오니스트 기구의 의료 서비스에서 일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