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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원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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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좌원 전투는 172년 고구려와 한나라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165년 명림답부가 쿠데타로 차대왕을 시해하고 신대왕을 옹립한 후, 한나라 현도태수 경림이 169년 고구려를 침입하여 수백 명을 죽이고 고구려가 요동군에 복종하게 되었다. 172년 경림이 다시 고구려를 침입하자 고구려는 청야 전술, 해자 구축, 방어선 설치 등으로 방어했다. 한나라 군이 지쳐 퇴각할 때 명림답부가 매복하여 한나라 군을 전멸시켰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나, 후한서나 삼국지에는 기록이 없고 삼국사기에만 등장한다. 전투 이후 명림답부는 좌원과 질산을 식읍으로 하사받았으며, 좌원 전투는 고구려가 한나라의 침략에 맞서 승리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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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원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정보
분쟁좌원 대첩
날짜172년
장소만주 좌원
결과고구려의 승리 (삼국사기 기록 기준)
교전 세력
교전국 1고구려
교전국 2
지휘관
지휘관 1명림답부
지휘관 2경림(耿臨) (전사)
병력 규모
병력 18,000 ~ 10,000명
병력 2약 10,000명
사상자 규모
사상자 1기록 없음
사상자 2전멸

2. 배경

165년 고구려의 연나부(椽那部) 조의(皂衣)였던 명림답부쿠데타를 일으켜 차대왕을 시해하고, 왕의 동생 백고(佰固)를 고구려 제8대 왕(신대왕)으로 옹립했다. 명림답부에게는 고구려 최초의 국상(國相)의 지위가 주어졌으나, 그는 지위를 남용하지 않았고, 고구려의 국력을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으로 증강시켰다.

2. 1. 명림답부의 쿠데타 (165년)

165년 고구려의 연나부(椽那部) 조의(皂衣)였던 명림답부쿠데타를 일으켜 차대왕을 시해하고, 왕의 동생 백고(佰固)를 고구려 제8대 왕(신대왕)으로 옹립했다. 명림답부에게는 고구려 최초의 국상(國相)의 지위가 주어졌으나, 그는 지위를 남용하지 않았고, 고구려의 국력을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으로 증강시켰다.

2. 2. 한나라의 침입 준비

3. 좌원 전투 (172년)

169년, (漢)의 현도태수(玄菟太守) 경림(耿臨)이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하여 수백 명을 죽였다. 고구려는 요동군의 지배에 복종했다.[1][2][3]

삼국사기에 따르면, 172년 경림은 다시 고구려를 상대로 군사 작전을 벌였다. 고구려 군은 청야 전술을 펴고, 해자를 파고, 고구려 도성 국내성 밖 좌원(坐原)이라 불리는 곳에 여러 방어선을 구축했다.[6] 고구려군은 요새 안으로 물러나 방어했다. 며칠간의 포위 공격 후, 한나라 군대는 지쳐 퇴각하기 시작했고, 명림답부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한나라 군을 매복 습격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살아 돌아간 자가 없었다고 한다.

172년의 좌원 전투는 ''후한서''나 ''삼국지''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며, 169년의 작전만 기록되었다. 좌원 전투는 삼국사기에만 등장한다. ''삼국지''는 단지 서기 175년경 신대왕이 현도군의 통치를 받기를 요청했다고만 기록하고 있다.[4]

3. 1. 고구려의 방어 전략

169년, (漢)의 현도태수(玄菟太守) 경림(耿臨)이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하였다.[6] 고구려는 청야 전술을 펴고, 해자를 파고, 국내성 밖 좌원(坐原)에 여러 방어선을 구축했다.[6][1][2][3] 고구려 군은 요새로 퇴각하여, 적군이 도달할 때까지 그곳을 지켰다.

3. 2. 한나라 군대의 퇴각과 명림답부의 매복

169년, (漢)의 현도태수(玄菟太守) 경림(耿臨)이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하여 수백 명을 죽였다. 고구려는 요동군의 지배에 복종했다.[1][2][3]

삼국사기에 따르면, 172년 경림은 다시 고구려를 상대로 군사 작전을 벌였다. 고구려 군은 청야 전술을 펴고, 해자를 파고, 고구려 도성 국내성 밖 좌원(坐原)이라 불리는 곳에 여러 방어선을 구축했다.[6] 고구려군은 요새 안으로 물러나 방어했다. 며칠간의 포위 공격 후, 한나라 군대는 지쳐 퇴각하기 시작했고, 명림답부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한나라 군을 매복 습격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살아 돌아간 자가 없었다고 한다.

172년의 좌원 전투는 ''후한서''나 ''삼국지''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며, 169년의 작전만 기록되었다. 좌원 전투는 삼국사기에만 등장한다. ''삼국지''는 단지 서기 175년경 신대왕이 현도군의 통치를 받기를 요청했다고만 기록하고 있다.[4]

3. 3. 전투 기록의 불일치

169년,의 현도태수 경림(耿臨)이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했을 때, 고구려 군은 우물을 메우고 청야 전술을 펴며 해자를 파고, 국내성 밖 좌원(坐原)에 여러 방어선을 구축했다.[6] 고구려 군은 요새로 퇴각하여 한나라 군대가 지쳐 퇴각할 때 명림답부가 매복 습격하여 크게 이겼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6] 그러나 이 전투의 생존자나 전투 결과는 중국 사료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4. 전투 이후

179년, 좌원 전투의 영웅 명림답부는 전공으로 좌원과 질산을 식읍으로 하사받았으며, 113세를 일기로 삶을 마쳤다.

5. 역사적 의의

참조

[1] 서적 後漢書/卷85
[2] 서적 三国志/卷30
[3] 서적 三国史记
[4] 서적 三国志/卷30
[5] 서적 삼국사기(三國史記)
[6] 서적 조선상고사 비봉출판사 2019-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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