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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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80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공화당의 제임스 가필드와 민주당의 윈필드 스콧 핸콕 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치러졌다. 주요 쟁점은 금본위제, 관세 정책, 1876년 대선 논란 등이었으며, 양당은 전국 유권자들 사이에서 팽팽하게 나뉘어 있었다. 공화당은 제임스 가필드를, 민주당은 윈필드 스콧 핸콕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고, 지폐당, 금지당, 미국당 등 다른 정당에서도 후보를 내세웠다. 선거 결과, 가필드는 214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하여 155명의 핸콕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득표 차는 2,000표 미만으로 미국 대통령 선거 역사상 가장 근소한 차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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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 |
---|---|
선거 정보 | |
선거 명칭 | 18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
국가 | 미국 |
국기 연도 | 1877년 |
선거 유형 | 대통령 선거 |
진행 여부 | 아니오 |
이전 선거 | 1876년 미국 대통령 선거 |
이전 선거 연도 | 1876년 |
다음 선거 | 1884년 미국 대통령 선거 |
다음 선거 연도 | 1884년 |
투표율 | 79.4% 3.2 %p |
선거일 | 1880년 11월 2일 |
후보 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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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제임스 A. 가필드 |
소속 정당 | 공화당 |
출신 주 | 오하이오 주 |
러닝메이트 | 체스터 A. 아서 |
획득 선거인단 수 | 214 |
승리 주 | 19 |
득표수 | 4,446,158 |
득표율 | 48.27% |
후보 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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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윈필드 스콧 핸콕 |
소속 정당 | 민주당 |
출신 주 | 펜실베이니아 주 |
러닝메이트 | 윌리엄 H. 잉글리쉬 |
획득 선거인단 수 | 155 |
승리 주 | 19 |
득표수 | 4,444,260 |
득표율 | 48.25% |
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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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직 | |
선거 이전 대통령 | 러더퍼드 B. 헤이스 |
선거 이전 대통령 소속 정당 | 공화당 |
선거 이후 대통령 | 제임스 A. 가필드 |
선거 이후 대통령 소속 정당 | 공화당 |
2. 배경
1877년 재건 시대가 끝난 후,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은 전국 유권자들 사이에서 팽팽하게 나뉘었다.[1] 정당 가입은 이념뿐만 아니라 민족적, 종교적 배경, 그리고 많은 유권자들이 여전히 강하게 느끼는 남북 전쟁 당시의 충성심에 따라 결정되기도 했다.[2] 대부분의 북부 개신교 신자들과 흑인 남부인들은 공화당에 투표했고, 백인 남부인들과 북부 가톨릭교회 신자들은 일반적으로 민주당에 투표했다.[3]
2. 1. 주요 쟁점
1877년 재건 시대가 끝난 후,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은 전국 유권자들 사이에서 팽팽하게 나뉘었다.[1] 정당 가입은 이념뿐만 아니라 민족적, 종교적 배경, 그리고 많은 유권자들이 여전히 강하게 느끼는 남북 전쟁 당시의 충성심에 따라 결정되기도 했다.[2] 대부분의 북부 개신교 신자들과 흑인 남부인들은 공화당에 투표했고, 백인 남부인들과 북부 가톨릭교회 신자들은 일반적으로 민주당에 투표했다.[3]금본위제와 수입품에 대한 관세는 양대 정당을 분열시키는 주요 쟁점이었다.[4] 통화 논쟁은 미국 달러의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였다. 남북 전쟁 이전에는 금화와 은화만이 법정 통화였지만, 전쟁 비용 증가로 미국 의회는 "그린백"(정부 채권으로 뒷받침되는 달러 지폐)을 발행해야 했다.[5] 그린백은 전쟁 비용 지불에 도움이 되었지만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5] 전쟁 후, (북부에 기반을 둔) 채권자 등은 금본위제로 복귀하기를 원했다. 반면, (특히 남부와 서부에 기반을 둔) 채무자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부채의 실질 가치 감소를 선호했고, 노동자와 일부 사업가들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신용 완화를 선호했다.[6]
이 문제는 정당을 넘어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에게 불화를 일으켰고, 1876년에는 그린백당이라는 제3당이 창당되기도 했다. 의회가 1873년에 은을 사실상 비유통화하고 1879년까지 그린백을 금으로 상환하면서 그 유통을 제한함에 따라 통화 논쟁은 더욱 심화되었다. 1880년 선거 시즌이 시작되면서 미국의 통화는 금으로만 뒷받침되었지만,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관세 정책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당내 갈등의 주요 원인이었다. 남북 전쟁 동안 의회는 보호관세를 최고 수준으로 인상했다. 이는 전쟁 비용 지불과 북부에서의 높은 관세 인기를 반영한 결과였다. 높은 관세는 수입품 가격을 높여 미국 기업의 국내 판매를 용이하게 했다. 공화당은 보호주의를 미국 일자리를 보호하고 번영을 증가시키는 방법으로 지지했다. 민주당은 이를 상품 가격 상승의 원인으로 비난했고, 연방 정부가 남북 전쟁 종전 이후 필요하지 않은 높은 세입을 창출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펜실베이니아를 비롯한 제조업 지역 출신의 북부 민주당원들도 높은 관세를 지지했다. 정당의 단결을 위해 각 정당의 지도자들은 가능한 한 이 문제를 피하려고 노력했다.
2. 2. 1876년 대선 논란
1876년 대통령 선거에서 오하이오주 공화당의 러더퍼드 B. 헤이스는 뉴욕주 민주당의 새뮤얼 J. 틸던을 꺾고 미국의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대통령 선거 중 하나에서 승리했다.[1] 초반 결과는 민주당의 승리를 나타냈지만, 여러 남부 주의 선거인단 투표가 격렬하게 논쟁되었다. 의회의 양당은 초당파 선거 위원회를 소집하는 데 동의했고, 위원회는 최종적으로 헤이스의 승리를 결정했다.[1]민주당에게 "도난된 선거"는 단결을 위한 구호가 되었고, 하원의 민주당 다수는 1878년의 대부분을 선거를 조사하는 데 사용했지만, 공화당에 불리한 새로운 증거를 발견하는 데 실패했다.[2] 처음에는 틸던이 1880년 대통령 후보 지명에서 선두 주자로 여겨졌다.[2] 주요 공화당 인사들에게 1877년 헤이스의 취임은 1880년 후보 지명을 위한 뒷거래의 시작을 알렸다.[3] 헤이스는 선거 전에 두 번째 임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여 1880년에 백악관으로 가는 길을 열어두었다.[4] 그의 내각 인선 또한 많은 당 지도자들을 소외시키면서, 공화당 내에서 뉴욕주 상원 의원 로스코 콩클링에게 충성하는 세력과 메인주 상원 의원 제임스 G. 블레인에게 충성하는 세력 사이의 분열을 심화시켰다.[3]
3. 후보 선출
1876년 대통령 선거에서 오하이오주 공화당의 러더퍼드 B. 헤이스는 뉴욕주 민주당의 새뮤얼 J. 틸던을 꺾고 미국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대통령 선거 중 하나에서 승리했다. 초기 결과는 민주당의 승리를 나타냈지만, 여러 남부 주의 선거인단 투표가 격렬하게 논쟁되었다. 의회의 양당은 초당파 선거 위원회를 소집하는 데 동의했고, 위원회는 최종적으로 헤이스의 승리를 결정했다.[1]
민주당에게 "도난된 선거"는 단결을 위한 구호가 되었고, 하원의 민주당 다수는 1878년의 대부분을 선거를 조사하는 데 사용했지만, 공화당에 불리한 새로운 증거를 발견하는 데 실패했다. 처음에는 틸던이 1880년 대통령 후보 지명에서 선두 주자로 여겨졌다.[2] 주요 공화당 인사들에게 1877년 헤이스의 취임은 1880년 후보 지명을 위한 뒷거래의 시작을 알렸다. 헤이스는 선거 전에 두 번째 임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여 1880년에 백악관으로 가는 길을 열어두었다. 그의 내각 인선 또한 많은 당 지도자들을 소외시키면서, 공화당 내에서 뉴욕주 상원 의원 로스코 콩클링에게 충성하는 세력과 메인주 상원 의원 제임스 G. 블레인에게 충성하는 세력 사이의 분열을 심화시켰다.
각 정당은 선거 전 여름에 열린 전당대회에서 각자의 강령과 후보에 합의했다. 주요 전당대회로는 공화당 전당대회, 민주당 전당대회, 녹백당 전당대회, 금주당 전당대회 등이 있었다.
3. 1. 공화당
러더퍼드 B. 헤이스 대통령이 지난 대선의 공약에 따라 재선에 출마하지 않은 가운데, 1880년 6월 공화당 전당대회에선 36차에 걸친 투표 끝에 율리시스 그랜트 전 대통령을 누르고 제임스 가필드 상원의원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가필드 | 아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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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후보' | '부통령 후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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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하원 오하이오 제19선거구 하원의원 (1863–1880) | 뉴욕주 공화당 제10대 위원장 (1879–188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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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전당대회는 6월 2일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처음 열렸다. 공화당 후보 지명을 놓고 경쟁한 주요 인물은 전 대통령 율리시스 S. 그랜트, 상원의원 제임스 G. 블레인, 재무부 장관 존 셔먼이었다. 그랜트는 남북 전쟁 당시 북부군 최고 사령관이었으며, 1869년부터 1877년까지 두 차례 대통령을 역임했고, 전례 없는 세 번째 임기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강경파로 알려진 공화당 콘클링파의 지원을 받았는데, 이들은 주로 헤이스 대통령이 추구한 문민 행정 개혁에 반대했다. 메인주 출신 상원 의원이자 전 하원 의원인 블레인은 온건파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들은 문민 행정 개혁을 지지했다. 셔먼은 남북 전쟁 영웅 윌리엄 테쿰세 셔먼 장군의 형제로, 헤이스 내각에서 활동한 오하이오주 출신 전 상원 의원이었다. 그는 두 주요 파벌 모두를 지지하지 않는 소규모 대표단의 지원을 받았다.
첫 투표에서 그랜트는 304표, 블레인은 285표, 셔먼은 93표를 얻었다. 어느 후보도 과반수를 얻지 못해 투표가 계속되었으나, 35차 투표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후 블레인과 셔먼 대표들은 오하이오 출신 하원 의원인 제임스 A. 가필드를 "다크호스" 후보로 지지하기 시작했다. 36차 투표에서 가필드는 399표를 얻어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으며, 이는 대부분 이전 블레인 및 셔먼 지지표였다. 가필드는 그랜트 파벌을 달래기 위해 레비 P. 모턴을 부통령 후보로 제안했으나, 모턴은 콘클링의 조언에 따라 거절했다. 대신 또 다른 뉴욕 강경파인 체스터 A. 아서가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고, 1880년 6월 8일, 역사상 가장 긴 공화당 전당대회가 폐회되었다.
3. 2. 민주당
1880년 6월, 민주당 전당대회는 국민적 지지를 등에 업은 윈필드 핸콕 장군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1876년 대통령 선거에서 오하이오주 공화당의 러더퍼드 B. 헤이스는 뉴욕주 민주당의 새뮤얼 J. 틸던을 꺾고 미국의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대통령 선거 중 하나에서 승리했다. 초반 결과는 민주당의 승리를 나타냈지만, 여러 남부 주의 선거인단 투표가 격렬하게 논쟁되었다. 의회의 양당은 초당파 선거 위원회를 소집하는 데 동의했고, 위원회는 최종적으로 헤이스의 승리를 결정했다.[1]민주당에게 "도난된 선거"는 단결을 위한 구호가 되었고, 하원의 민주당 다수는 1878년의 대부분을 선거를 조사하는 데 사용했지만, 공화당에 불리한 새로운 증거를 발견하는 데 실패했다.[2] 처음에는 틸던이 1880년 대통령 후보 지명에서 선두 주자로 여겨졌다.[2]

윈필드 스콧 핸콕은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태어나 자랐다.[3] 그는 1812년 전쟁의 영웅이자 185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휘그당 대통령 후보였던 윈필드 스콧 장군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그는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40년 동안 육군에서 복무했으며, 미국-멕시코 전쟁과 남북 전쟁에서 북군의 장군으로 복무했다. 육군 동료들에게 "뛰어난 핸콕"으로 알려진 그는 특히 1863년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개인적인 리더십을 발휘하여 피켓의 돌격을 방어하다가 부상을 입었다. 그의 군 복무는 남북 전쟁 이후에도 계속되어, 핸콕은 남부의 군정 재건과 서부 변경에서의 육군 주둔에 참여했다. 재건 기간 동안 그는 당시 대통령 앤드루 존슨과 협력하여 남부의 군사 점령을 조기에 종료하고 전쟁 이전의 체제로의 정부 복귀를 위해 노력했다.[4] 게티즈버그에서의 전쟁 영웅으로서의 핸콕의 명성은 그의 흠 잡을 데 없는 연방주의적 자격과 주권 옹호적 견해를 가진 저명한 민주당원으로서의 지위와 결합되어 4년마다 열리는 대통령 선거에서 그를 유력한 후보로 만들었다.[5]
핸콕은 7월에 공식적으로 지명 통보를 받았고, 전통적인 승낙 서한으로 응답했다.[6] 가필드처럼, 민주당 후보는 그의 성명에서 논란을 일으키지 않으려 했으며, 전기 작가 데이비드 M. 조던에 따르면 "평범하고 일반적"이었다.[6] 핸콕은 이전 수년간의 공화당 통치를 비난한 후, 민주당의 당선이 전쟁과 재건의 결과를 뒤집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잠재우려 했다. 이는 공화당의 흔한 선거 운동 주제였다. 가필드와 달리 핸콕은 선출직 경력이 없었지만, 승낙 서한은 그의 정치적 선호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핸콕은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뉴욕 항구의 거버너스 섬에 있는 그의 임지에서 현역으로 남아 있었다.
'''민주당 지명 후보'''
후보 | 득표수 |
---|---|
윈필드 스콧 핸콕 | 705 |
토머스 F. 베이아드 | 154 |
새뮤얼 G. 랜들 | 129 |
헨리 B. 페인 | 81 |
앨런 G. 서먼 | 69 |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 대회는 혼전 양상으로, 수많은 잠재적 대통령 후보들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최종적으로 남북 전쟁 장군 윈필드 스콧 핸콕이 대의원 705표를 얻어, 토머스 F. 베이아드, 새뮤얼 G. 랜들, 헨리 B. 페인, 앨런 G. 서먼 등 여러 후보들을 제치고 지명되었다. 이어서 윌리엄 헤이든 잉글리시가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3. 3. 기타 정당
지폐당은 제임스 위버 하원의원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금지당은 닐 도우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반프리메이슨 운동은 또 다시 미국당을 창당했고, 남북전쟁의 장군이었고 버몬트주의 반프리메이슨 운동 지도자인 존 펠프스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제임스 베어드 위버는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 가족이 변경에서 홈스테드법을 신청하면서 아이오와주로 이주했다.[1] 그는 젊은 시절 정치 활동을 시작하여 농민과 노동자를 옹호했으며, 자신이 믿는 진보적인 대의를 위해 여러 정당에 가입하고 탈퇴했다. 남북 전쟁에서 북군으로 복무한 후, 위버는 아이오와로 돌아와 공화당 후보의 선거를 위해 일했다.[2] 여러 관직에 대한 공화당 후보 지명에 여러 차례 실패하고 당의 보수적인 세력에 불만을 품게 된 위버는 1877년 통화량 증대와 대기업의 더욱 엄격한 규제를 옹호하는 그린백당으로 당적을 옮겼다.[3] 민주당의 지원을 받은 그린백당 소속으로 위버는 1878년 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3]
주요 정당 후보들과 달리 위버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연설을 하는 등 직접 선거 운동을 펼칠 계획이었다.[4] 그의 러닝메이트인 챔버스는 7월 기차에서 떨어져 선거 기간 동안 활동이 불가능해지기 전까지 같은 활동을 할 예정이었다.[5] 그린백당은 남부 출신 인사를 포함한 유일한 후보였기에, 그는 그 지역에서 입지를 다지기를 희망했다.[6] 위버의 승리 가능성은 이미 낮았지만, 민주당과 그린백당의 힘을 합쳐 공화당을 이길 수 있는 주에서 퓨전 후보를 내는 것을 거부하면서 더욱 어려워졌다. 그의 당의 인종 포용 메시지는 또한 흑인 유권자 박탈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그린백당이 공화당과 동일한 장애물에 직면할 것이기 때문에 남부에서 어려움을 예고했다.



2대 정당의 재정 정책에 불만을 품은 그린백 노동당은 1876년 선거에서도 소수 정당이었으며, 이번에는 제임스 비어드 위버를 대통령 후보로, 벤자민 챔버스를 부통령 후보로 내세워 돌아왔다.
프리메이슨에 불신을 품은 운동가들이 새로운 이민 배척주의 정당을 창당하면서, 옛 이름인 미국당을 재사용했다. 남북 전쟁 당시의 장군이자 버몬트주의 반 프리메이슨 운동 지도자인 존 W. 펠프스가 대통령 후보로, 전 캔자스주 상원 의원 새뮤얼 C. 포메로이가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4. 선거 과정
1880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여러 면에서 치열한 경쟁이었다. 1876년 대선에서 민주당은 "도난당한 선거"라며 단결했고, 이는 새뮤얼 J. 틸던이 유력한 후보로 떠오르는 배경이 되었다.[1] 공화당 내에서는 러더퍼드 B. 헤이스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로스코 콩클링과 제임스 G. 블레인을 중심으로 파벌 갈등이 심화되었다.[2]
공화당 후보 제임스 A. 가필드는 오하이오 주 농장 출신으로, 홀어머니 슬하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젊은 시절 운하 배에서 일하는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쳤으며,[3] 17세에 윌리엄스 칼리지에 입학하여 1856년에 졸업했다.[4] 이후 공화당에 입당하여 정치 경력을 시작했고, 오하이오 주 상원 의원(1859–1861)을 지냈다.[5] 남북 전쟁 동안 연합군 소장으로 복무하며 미들 크릭 전투, 실로 전투, 치카마우가 전투 등에 참전했다. 1862년 하원 의원에 당선된 후, 금본위제를 지지하고 뛰어난 웅변가로 명성을 얻었다. 초기에는 급진 공화당의 재건 정책에 동의했으나, 이후 해방 노예 시민권 강화를 위한 온건한 접근 방식을 선호하게 되었다. 후보 지명 후, 당내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높은 관세와 건전한 통화를 지지하면서도 중국 이민과 공무원 개혁 문제에 대해서는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당시 관례에 따라 자택에서 현관 캠페인을 벌이며, 실제 선거 운동은 대리인들에게 맡겼다.
민주당 후보 윈필드 스콧 핸콕은 펜실베이니아 출신으로, 1812년 전쟁 영웅 윈필드 스콧 장군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40년간 군에서 복무했으며, 미국-멕시코 전쟁과 남북 전쟁에서 북군 장군으로 활약했다. 특히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피켓의 돌격을 방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남북 전쟁 이후에도 군 복무를 계속하며 남부 군정 재건과 서부 변경 주둔에 참여했다. 재건 기간 동안 앤드루 존슨 대통령과 협력하여 남부 군정 종식과 정부 복귀를 위해 노력했다. 게티즈버그 전쟁 영웅으로서의 명성과 흠잡을 데 없는 연방주의적 자격, 주권 옹호 견해는 그를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만들었다. 논란을 피하려는 온건한 입장을 취했으며, 그의 승낙 서한은 "평범하고 일반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공화당 통치를 비난하면서도, 민주당 집권이 전쟁과 재건의 결과를 뒤집을 것이라는 우려를 불식시키려 했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뉴욕 항구의 거버너스 섬에서 현역으로 복무했다.
그린백당 후보 제임스 베어드 위버는 오하이오 출신으로, 젊은 시절 가족과 함께 아이오와로 이주했다. 그는 농민과 노동자를 옹호하며 여러 정당을 거쳤고, 남북 전쟁에서 북군으로 복무했다. 이후 공화당에서 활동하다가 당의 보수적인 세력에 불만을 품고 그린백당으로 옮겨, 통화량 증대와 대기업 규제 강화를 주장했다. 1878년 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주요 정당 후보들과 달리 전국을 돌며 직접 선거 운동을 펼쳤다. 그의 러닝메이트 챔버스는 7월에 기차 사고를 당해 선거 운동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린백당은 남부 출신 인사를 포함한 유일한 후보였기에 남부에서 지지를 얻고자 했으나, 인종 포용 메시지는 흑인 유권자 박탈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민주당과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고, 이는 그의 당선 가능성을 더욱 낮췄다.
양당은 각각 남부와 북부에서 우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되었고, 뉴욕과 인디애나 등 접전 주에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주요 정당 후보들 간의 실질적인 차이는 거의 없었기에, 공화당은 "피의 셔츠 흔들기" 전략, 즉 남북 전쟁의 책임을 민주당에 돌리는 전략을 사용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지 15년이 지나고 주요 정당 후보들이 모두 연합군 장군 출신이었기에, 이 전략은 점차 효과를 잃어갔다.
민주당은 가필드의 크레디 모빌리에 스캔들 연루 의혹을 제기하며 그의 도덕성을 공격했다. 이 스캔들은 철도 건설 회사가 의원들에게 뇌물을 준 사건으로, 가필드의 정확한 연루 정도는 불분명하지만, 그가 완전히 정직하지 않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민주당은 직업 군인이었던 핸콕과 의회 및 로비스트와의 거리를 대비시키며 이 사건을 활용했다. 공화당은 "게티즈버그의 영웅" 핸콕을 직접 공격하기보다는 그가 문제에 대해 무지하다고 묘사했다.
그린백당은 남부에서 지지를 얻으려 했으나, 남북 전쟁의 영향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위버는 남부 순회 연설을 했지만, 전직 공화당 연합군 장군이 후보로 나선 전국 정당은 더 큰 반대에 직면했다. 흑인 유권자에 대한 정당의 구애는 백인 민주당 기득권층을 위협했고, 위버의 집회에서 폭력 사태와 위협으로 이어졌다. 위버가 북부에서 선거 운동을 벌이자, 공화당은 그가 의도적으로 표를 분산시켜 민주당을 돕는다고 비난했다.
메인 주 선거에서 공화당이 패배한 후, 공화당은 정책상의 차이점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특히 민주당 정책 강령의 "오직 세입을 위한 관세" 조항을 공격하며, 민주당이 보호 관세의 혜택을 받는 산업 노동자들의 어려움에 공감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관세 문제는 산업화된 북부 주에서 민주당의 지지 기반을 약화시켰다. 핸콕은 "관세 문제는 지역 문제"라고 발언하여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는 그의 관세 문제 이해 부족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10월 오하이오 주와 인디애나 주 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하면서, 이러한 전략 변화는 효과를 보였다. 민주당은 인디애나 주에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잉글리시를 핸콕의 러닝 메이트로 선택했지만, 주 선거 패배로 인해 후보 교체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잉글리시는 11월에 민주당 후보가 인디애나 주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선거 직전, 도우가 가필드를 지지하며 사퇴했다는 오보가 났고, 이는 도우의 낮은 득표로 이어졌다. 민주당은 논란이 있었던 1876년 선거를 공격하며 선거 운동을 시작했고, 공화당은 다시 남북 전쟁을 언급했지만, 곧 대상은 인격으로 옮겨갔다. 가필드는 근면하고 자수성가한 인물임을 선전했다. 공화당은 게티즈버그 전투에 참전하여 널리 존경받는 행콕을 직접 공격하는 것을 피했지만, 장군은 부패한 민주당의 명목상의 지도자처럼 행동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은 공화당의 부패를 선전하고, 가필드와 특히 그의 러닝메이트인 아서를 공격했다. 1873년 공황의 영향이 종식되고, 충분한 자금이 있어 선거 운동도 잘 진행된 점이 가필드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4. 1. 모레이 서한 사건
1880년 10월 20일, 민주당 신문은 가필드가 산업계가 노동자 임금을 낮게 유지할 수 있도록 이민을 현재 수준으로 유지하겠다고 약속하는 내용의 편지를 게재했다.[6] 가필드는 이 편지가 속임수라고 비난했지만, 이미 캘리포니아와 오리건에 10만 부의 신문이 발송된 후였다.[6] 이 편지가 위조된 것으로 밝혀진 후, 가필드의 전기 작가 페스킨은 이 사건이 동부에서는 공화당에 대한 표를 얻었을 수도 있지만, 서부에서는 가필드의 입지를 약화시켰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6]5. 선거 결과
1880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공화당의 제임스 가필드와 민주당의 윈필드 스콧 핸콕이 맞붙어, 가필드가 근소한 차이로 승리한 선거이다.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가필드가 214표, 핸콕이 155표를 얻었지만, 일반 투표에서는 두 후보 간의 득표 차이가 9,070표에 불과했다. 이는 미국 대통령 선거 역사상 가장 적은 표 차이 중 하나이다.
제임스 위버는 3.32%, 닐 도우는 0.11%, 존 펠프스는 0.01%를 득표했다.
대통령 후보 (출신 주)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선거인단 득표수 | 부통령 후보 (출신 주) | 선거인단 득표수 |
---|---|---|---|---|---|---|
제임스 가필드 (오하이오주) | 공화당 | 4,446,158 | 48.3% | 214 | 체스터 A. 아서 (뉴욕주) | 214 |
윈필드 스콧 핸콕 (펜실베이니아주) | 민주당 | 4,444,260 | 48.3% | 155(a) | 윌리엄 헤이든 잉글리시 (인디애나주) | 155 |
제임스 비어드 위버 (아이오와주) | 그린백 노동당 | 305,997 | 3.3% | 0 | 벤자민 챔버스 (텍사스주) | 0 |
닐 다우 (메인주) | 금주당 | 10,305 | 0.1% | 0 | 헨리 아담스 톰슨 (오하이오주) | 0 |
존 W. 펠프스 (버몬트주) | 미국 국민당 | 700 | 0.0% | 0 | 새뮤얼 C. 포머로이 (캔자스주) | 0 |
기타 | - | 3,631 | 0.0% | 0 | - | 0 |
합계 | 9,211,051 | 100% | 369 | - | 369 | |
당선에 필요한 선거인단 수 | 185 | - | 185 | |||
(a) ''조지아 주의 투표 참조''
- 지역별 결과: 공화당은 북동부와 중서부에서, 민주당은 남부와 변방 주에서 강세를 보였다. 특히 캘리포니아, 뉴저지, 인디애나, 오리건, 뉴욕, 코네티컷 등은 매우 근소한 차이로 승패가 갈린 접전 지역이었다.

5. 1. 주별 결과
1880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주별 결과는 다음과 같다.colspan=2 | | 제임스 가필드 공화당 | 윈필드 스콧 핸콕 민주당 | 제임스 위버 지폐당 | 닐 도우 금지당 | 존 펠프스 미국당 | 차이 | 주 총계 | |||||||||||||
---|---|---|---|---|---|---|---|---|---|---|---|---|---|---|---|---|---|---|---|---|
주 | 선거인단 투표 | 득표수 | 득표율 | 선거인단 투표 | 득표수 | 득표율 | 선거인단 투표 | 득표수 | 득표율 | 선거인단 투표 | 득표수 | 득표율 | 선거인단 투표 | 득표수 | 득표율 | 선거인단 투표 | 득표수 | 득표율 | 득표수 | |
앨라배마 | 10 | 56,221 | 36.98 | – | 91,185 | 59.97 | 10 | 4,642 | 3.05 | – | – | – | – | – | – | – | −34,964 | −22.99 | 152,048 | |
아칸소 | 6 | 42,436 | 39.55 | – | 60,775 | 56.65 | 6 | 4,079 | 3.80 | – | – | – | – | – | – | – | −18,339 | −17.10 | 107,290 | |
캘리포니아 | 6 | 80,348 | 48.92 | 1 | 80,442 | 48.98 | 5 | 3,394 | 2.07 | – | 61 | 0.04 | – | 6 | 0.00 | – | −94 | −0.06 | 164,321 | |
콜로라도 | 3 | 27,450 | 51.26 | 3 | 24,647 | 46.03 | – | 1,435 | 2.68 | – | – | – | – | – | – | – | 2,803 | 5.23 | 53,546 | |
코네티컷 | 6 | 67,071 | 50.52 | 6 | 64,415 | 48.52 | – | 868 | 0.65 | – | 409 | 0.31 | – | – | – | – | 2,656 | 2.00 | 132,802 | |
델라웨어 | 3 | 14,133 | 47.86 | – | 15,275 | 51.73 | 3 | 120 | 0.41 | – | – | – | – | – | – | – | −1,142 | −3.87 | 29,528 | |
플로리다 | 4 | 23,654 | 45.83 | – | 27,964 | 54.17 | 4 | – | – | – | – | – | – | – | – | – | −4,310 | −8.35 | 51,618 | |
조지아 | 11 | 54,086 | 34.33 | – | 102,470 | 65.05 | 11 | – | – | – | – | – | – | – | – | – | −48,384 | −30.72 | 156,556 | |
일리노이 | 21 | 318,037 | 51.11 | 21 | 277,321 | 44.56 | – | 26,358 | 4.24 | – | 443 | 0.07 | – | 153 | 0.02 | – | 40,716 | 6.54 | 622,312 | |
인디애나 | 15 | 232,164 | 49.33 | 15 | 225,522 | 47.91 | – | 12,986 | 2.76 | – | – | – | – | – | – | – | 6,642 | 1.41 | 470,672 | |
아이오와 | 11 | 183,927 | 56.85 | 11 | 105,845 | 32.72 | – | 32,701 | 10.11 | – | 592 | 0.18 | – | 433 | 0.13 | – | 78,082 | 24.13 | 323,498 | |
캔자스 | 5 | 121,549 | 60.40 | 5 | 59,801 | 29.72 | – | 19,851 | 9.87 | – | 25 | 0.01 | – | – | – | – | 61,748 | 30.68 | 201,226 | |
켄터키 | 12 | 106,306 | 39.80 | – | 149,068 | 55.80 | 12 | 11,499 | 4.30 | – | 258 | 0.10 | – | – | – | – | −42,762 | −16.00 | 267,104 | |
루이지애나 | 8 | 38,637 | 37.10 | – | 65,067 | 62.48 | 8 | 439 | 0.42 | – | – | – | – | – | – | – | −26,430 | −25.38 | 104,143 | |
메인 | 7 | 74,056 | 51.45 | 7 | 65,171 | 45.28 | – | 4,480 | 3.11 | – | 93 | 0.06 | – | 142 | 0.10 | – | 8,841 | 6.14 | 143,903 | |
메릴랜드 | 8 | 78,515 | 45.37 | – | 93,706 | 54.15 | 8 | 818 | 0.47 | – | – | – | – | – | – | – | −15,191 | −8.78 | 173,039 | |
매사추세츠 | 13 | 165,205 | 58.50 | 13 | 111,690 | 39.65 | – | 4,548 | 1.61 | – | 682 | 0.24 | – | – | – | – | 53,515 | 18.85 | 282,125 | |
미시간 | 11 | 185,341 | 52.54 | 11 | 131,597 | 37.30 | – | 34,895 | 9.89 | – | 942 | 0.27 | – | 2 | 0.00 | – | 53,744 | 15.24 | 352,777 | |
미네소타 | 5 | 93,903 | 62.28 | 5 | 53,315 | 35.36 | – | 3,267 | 2.17 | – | 286 | 0.19 | – | – | – | – | 40,587 | 26.92 | 150,771 | |
미시시피 | 8 | 34,854 | 29.94 | – | 75,750 | 65.08 | 8 | 5,797 | 4.98 | – | – | – | – | – | – | – | −40,896 | −35.14 | 116,401 | |
미주리 | 15 | 153,567 | 38.65 | – | 208,609 | 52.51 | 15 | 35,135 | 8.84 | – | – | – | – | – | – | – | −55,042 | −13.86 | 400,311 | |
네브래스카 | 3 | 54,979 | 62.87 | 3 | 28,523 | 32.62 | – | 3,950 | 4.52 | – | – | – | – | – | – | – | 26,456 | 30.25 | 87,452 | |
네바다 | 3 | 8,732 | 47.60 | – | 9,613 | 52.40 | 3 | – | – | – | – | – | – | – | – | – | −881 | −4.80 | 18,345 | |
뉴햄프셔 | 5 | 44,852 | 51.94 | 5 | 40,794 | 47.24 | – | 528 | 0.61 | – | 180 | 0.21 | – | – | – | – | 4,058 | 4.70 | 86,354 | |
뉴저지 | 9 | 120,555 | 49.02 | – | 122,565 | 49.84 | 9 | 2,617 | 1.06 | – | 191 | 0.08 | – | – | – | – | −2,010 | −0.82 | 245,928 | |
뉴욕 | 35 | 555,544 | 50.32 | 35 | 534,511 | 48.42 | – | 12,373 | 1.12 | – | 1,517 | 0.14 | – | 75 | .01 | – | 21,033 | 1.91 | 1,103,945 | |
노스캐롤라이나 | 10 | 115,874 | 48.04 | – | 124,208 | 51.49 | 10 | 1,126 | 0.47 | – | – | – | – | – | – | – | −8,334 | −3.45 | 241,208 | |
오하이오 | 22 | 375,048 | 51.73 | 22 | 340,821 | 47.01 | – | 6,456 | 0.89 | – | 2,616 | 0.36 | – | – | – | – | 34,227 | 4.72 | 724,967 | |
오리건 | 3 | 20,619 | 50.51 | 3 | 19,955 | 48.89 | – | 245 | 0.60 | – | – | – | – | – | – | – | 664 | 1.64 | 40,819 | |
펜실베이니아 | 29 | 444,704 | 50.84 | 29 | 407,428 | 46.57 | – | 20,668 | 2.36 | – | 1,939 | 0.22 | – | 44 | 0.01 | – | 37,276 | 4.26 | 874,783 | |
로드아일랜드 | 4 | 18,195 | 62.24 | 4 | 10,779 | 36.87 | – | 236 | 0.81 | – | 20 | 0.07 | – | – | – | – | 7,416 | 25.37 | 29,235 | |
사우스캐롤라이나 | 7 | 58,071 | 33.97 | – | 112,312 | 65.70 | 7 | 566 | 0.33 | – | – | – | – | – | – | – | −54,241 | −31.73 | 170,949 | |
테네시 | 12 | 107,677 | 44.53 | – | 129,191 | 53.01 | 12 | 5,917 | 2.45 | – | 43 | 0.02 | – | – | – | – | −21,514 | −8.48 | 242,828 | |
텍사스 | 8 | 57,893 | 23.95 | – | 156,428 | 64.71 | 8 | 27,405 | 11.34 | – | – | – | – | – | – | – | −98,535 | −40.76 | 241,726 | |
버몬트 | 5 | 45,567 | 69.88 | 5 | 18,316 | 28.09 | – | 1,215 | 1.86 | – | – | – | – | 105 | 0.16 | – | 27,251 | 41.79 | 65,203 | |
버지니아 | 11 | 83,533 | 39.47 | – | 128,083 | 60.53 | 11 | – | – | – | – | – | – | – | – | – | −44,550 | −21.05 | 211,616 | |
웨스트버지니아 | 5 | 46,243 | 41.03 | – | 57,391 | 50.92 | 5 | 9,079 | 8.05 | – | – | – | – | – | – | – | −11,148 | −9.89 | 112,713 | |
위스콘신 | 10 | 144,400 | 54.04 | 10 | 114,649 | 42.91 | – | 7,986 | 2.99 | – | 69 | 0.03 | – | 91 | 0.03 | – | 29,751 | 11.14 | 267,195 | |
총계: | 369 | 4,453,337 | 48.31 | 214 | 4,444,267 | 48.22 | 155 | 306,135 | 3.32 | – | 10,269 | 0.11 | – | 631 | 0.01 | – | 9,070 | 0.10 | 9,217,410 |
공화당의 제임스 가필드 후보는 민주당의 윈필드 스콧 핸콕 후보를 214대 155의 선거인단 투표로 이겼지만, 일반 투표에서는 9,070표 차이로 매우 근소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미국 대통령 선거 역사상 가장 적은 표 차이 중 하나였다.
제임스 위버는 3.32%, 닐 도우는 0.11%, 존 펠프스는 0.01%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주별 결과 요약
- 접전 주: 캘리포니아(0.06%), 뉴저지(0.82%), 인디애나(1.41%), 오리건(1.64%), 뉴욕(1.91%), 코네티컷(2.00%) 등은 매우 근소한 차이로 승패가 갈렸다.
- 공화당 우세 지역: 북동부와 중서부 지역에서 강세를 보였다.
- 민주당 우세 지역: 남부와 변방 주에서 강세를 보였다.
참고 자료
5. 2. 부정 선거 의혹
버지니아주에서는 주 부채 지불 문제로 민주당이 분열되어, 정기적으로 부채를 지불하는 "펀더" 민주당과 부채 지불에 반대하는 당내 "리저스터당"으로 두 개의 민주당 선거 명부가 지명되었다.[2] 두 명부 모두 윈필드 스콧 핸콕 후보를 지지했다. 공화당은 처음에는 이 분열로 제임스 A. 가필드가 주를 차지할 수 있기를 바랐지만 결과는 달랐다. 리저스터 명부는 31,527표를 받았지만, 펀더 민주당은 96,449표를 얻어 84,020표를 얻은 공화당을 꺾기에 충분했다.[2]핸콕이 조지아주에서 일반 투표에서 쉽게 승리했지만, 해당 주의 선거인단 투표에서 한 가지 위법 사항이 있었다. 헌법 제2조 제1절 제3항에 따르면, "의회는 선거인단을 선출할 시기와 선거인들이 투표할 날짜를 결정할 수 있으며, 그 날짜는 미국 전역에서 동일해야 한다." 1792년, 의회는 선거인단이 12월 첫째 주 수요일인 1880년 12월 1일에 투표하도록 정했다. 그러나 조지아주 선거인단은 12월 1일에 투표하지 않고 그 다음 주 수요일인 12월 8일에 투표했다.[3] 의회는 어쨌든 조지아주의 투표를 공식 집계에 포함시키기로 결정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핸콕의 선거인단 투표는 155표가 아닌 144표가 되었을 것이다.[3]
당시 캘리포니아에서는 유권자들이 개별 선거인에게 투표했으며, 상위 6명의 후보가 선출되었다. 민주당 명부에 있던 선거인 중 한 명은 데이비드 S. 테리로, 데이비드 C. 브로데릭을 1859년 결투에서 살해한 것으로 인해 캘리포니아 정치에서 논란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 결과 약 500명의 민주당 유권자가 투표 용지에서 테리의 이름을 지웠다.[4] 선거가 근소한 차이로 치러졌기 때문에, 이 잃어버린 표로 인해 테리는 공화당 전체 명부보다 적은 표를 받았고, 따라서 한 명의 공화당 선거인이 6번째로 많은 표를 얻어 마지막 선거인 자리를 차지했다. 이는 캘리포니아의 선거인단 투표가 단일 후보에게 수여되는 대신 분리된 첫 번째 사례였다. 이는 이후 1892년, 1896년, 1912년에 세 번 더 발생했다.[5]
6. 선거 이후
가필드가 1881년 3월에 취임했을 때, 선거를 위해 봉합되었던 공화당의 분열은 다시 한번 벌어졌다. 가필드는 블레인을 내각에 임명했고, 콘클링의 강경파는 콘클링의 고향인 뉴욕주에서조차 후원에 대한 통제력이 부족한 것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1] 가필드는 윌리엄 H. 로버트슨을 뉴욕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정부 직책에 임명했고, 콘클링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지명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에 콘클링과 그의 동맹들은 간신히 과반수를 넘긴 상원에서 모든 입법 행위를 중단시켰다.[2] 5월에 콘클링과 동료 뉴욕 상원의원인 토머스 C. 플랫은 항의의 표시로 상원에서 사임했다.[2] 두 강경파는 뉴욕 주의회가 그들을 승리적으로 재선출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대신 주의회는 수개월 동안 교착 상태에 빠졌고, 결국 두 사람 모두를 상원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거부했다.[3] 그러나 그 결과가 알려지기 전에, 후원 임명을 받지 못한 것에 분노한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남자 찰스 J. 귀토가 1881년 7월 2일 워싱턴 D.C.에서 가필드에게 총격을 가했다.[4]
가필드는 1881년 9월 19일에 사망하기 전 몇 달 동안 고통을 받았다.[5] 부통령 체스터 A. 아서 (뉴욕의 강경파)는 그날 밤 대통령으로 취임했다.[5] 가필드의 살해는 엽관주의자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국민들에게 공무원 개혁을 촉구했고, 콘클링의 세력의 일원이었던 아서는 그 대의에 동참했다.[6] 1883년, 의회의 초당적 다수는 펜들턴 문민법을 통과시켜 가장 심각한 관직 추구 시스템을 개혁했고, 아서는 그 법안에 서명했다.
의회는 또한 1882년에 중국인 배척법을 통과시켜 중국 이민 문제도 해결했다. 아서는 처음에 유사한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는데, 그는 이 법안이 미국과 중국 간의 조약에 위배된다고 믿었지만, 결국 중국으로부터의 이민을 10년간 금지하는 타협안에 서명했다. 선거의 주요 쟁점이었던 관세는 이후 4년 동안 대체로 변동이 없었지만, 의회는 평균 2% 미만으로 관세를 인하하는 1883년 관세법의 사소한 개정을 통과시켰다. 1884년에 후보 지명에 대한 미온적인 시도 후, 아서는 은퇴했고 2년 후에 사망했다.
참조
[1]
웹사이트
Voter Turnout in Presidential Elections
http://www.presidenc[...]
UC Santa Barbara
[2]
웹사이트
The Napa Daily Register
https://cdnc.ucr.edu[...]
The Napa Daily Register
1880-11-08
[3]
웹사이트
DIVIDED ELECTORAL VOTES
https://www.newspape[...]
The Boston Globe
1912-11-11
[4]
URL
Voter Turnout in Presidential Elections
http://www.presidenc[...]
[5]
Harp Week
Harp Week
http://elections.har[...]
[6]
문서
モリー・レターは1880年10月20日にニューヨークの新聞「The Truth」に掲載された、ガーフィールドが書いたとされる手紙。偽造とされた。[:en:Morey letter]を参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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