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독일 국민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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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29년 독일 국민투표는 제1차 세계 대전 배상금 문제와 관련하여, 영 플랜에 반대하는 우익 세력이 '자유법' 제정을 위한 국민투표를 추진했으나, 저조한 투표율로 인해 부결된 사건이다. 이 국민투표는 나치당과 아돌프 히틀러가 대중에게 노출되는 계기가 되었고, 1930년 총선에서 나치당의 약진을 이끌었다. 하지만, 국민투표 운동은 독일 우익 세력의 분열을 초래했으며, 공산당의 민족주의적 입장 선회를 유도하는 등 독일 정치 지형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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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독일 국민투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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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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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제목 | 독일 국민의 예속 반대 (자유법) |
국가 | 독일 |
날짜 | 1929년 12월 22일 |
결과 | 통과되지 않음 |
투표 결과 | |
찬성 | 5,838,890 |
반대 | 338,195 |
무효 | 131,493 |
유권자 수 | 42,323,473 |
2. 영 플랜
제1차 세계 대전 패배 이후 독일 제국이 지불해야 했던 배상금은 바이마르 공화국 국내 정치에 큰 부담이었다. 1921년 런던 배상 계획에서 1,320억 금마르크로 처음 설정된 배상금액을 놓고 독일과 승전국 간에 반복적인 외교 분쟁이 있었다. 1923년 독일이 지불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자 프랑스와 벨기에 군대는 루르 점령을 감행했다. 1924년 도스 계획과 1924년 런던 협정이 체결되어 독일은 처음으로 정기적인 배상금 지불을 시작했다.
배상 문제의 최종 해결을 목표로 1929년 2월부터 6월까지 파리에서 국제 전문가 위원회가 오웬 D. 영의 이름을 딴 영 플랜을 작성했다. 독일 정부는 반대 세력과의 논쟁에서 더 낮은 지불액과 그로 인한 제국의 예산 완화에 중점을 두었다.[4] 영 플랜은 1929년 10월 3일에 최종 채택되기 전에 사망한 독일 국민당 (DVP) 외무부 장관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의 화해 정책의 마지막 성공으로 여겨진다.
2. 1.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의 상황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후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 제231조에 따라 바이마르 공화국 국내 정치에 큰 부담이 된 배상금 문제를 안게 되었다.[2] 1921년 런던 배상 계획에서 배상금은 1,320억 금마르크로 설정되었으나, 독일과 승전국 간의 외교 분쟁이 반복되었다. 1923년 독일이 배상금 지불을 이행하지 못하자 프랑스와 벨기에는 루르 점령을 통해 석탄 등 물품으로 배상금을 받으려 했다. 1924년 국제 전문가 위원회가 독일 경제력을 조사하고 배상금 지불 제안을 작성, 도스 계획과 1924년 런던 협정이 체결되어 독일은 처음으로 정기적인 배상금 지불을 시작했다.2. 2. 영 플랜의 내용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후 베르사유 조약 제231조에 따라 독일 제국이 지불해야 했던 배상금은 바이마르 공화국 국내 정치에 큰 부담이었다.[2] 1921년 런던 배상 계획에서 1,320억 금마르크로 처음 설정된 배상금액은 독일과 승전국 간의 반복적인 외교 분쟁을 야기했다. 1924년 국제 전문가 위원회는 독일 경제력을 조사하고 배상금 지불 제안을 작성, 도스 계획과 1924년 런던 협정을 체결하여 독일의 정기적인 배상금 지불이 시작되었다.배상 문제의 최종 해결을 위해 1929년 2월부터 6월까지 파리에서 새로운 국제 전문가 위원회가 오웬 D. 영의 이름을 딴 영 플랜을 작성했다.[2] 1929년 8월과 1930년 1월 헤이그 배상금 회의에서 독일 배상 부채는 360억 독일 제국 마르크로 감축되었다. 연간 지불액은 도스 계획보다 낮았지만 1988년까지 지불이 지속될 예정이었다. 배상 위원회와 모든 국제 경제 통제가 제거되어 독일이 주권을 상당 부분 되찾았다는 점은 독일에 유리했다. 또한 이 계획의 수용은 1920년부터 연합군에 점령되었던 라인란트 점령이 예정보다 일찍 해제됨을 의미했다.[3]
3. 독일 국내의 논란
1929년 여름, 영 플랜에 대한 국내 정치적 분쟁이 시작되었다. 많은 대중들은 독일이 약속한 지불 기간과 총액에 경악했다. 연간 지불 총액은 에 달했으며, 1929~30 회계 연도의 총 제국 수입은 였음을 고려할 때, 그 수치는 매우 높아 보였다.[5]
우익 세력은 이 협정을 선전 목적으로 활용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빚에 허덕이는 손자들의 모습을 그려냈다. 영 플랜에 반대하는 투쟁은 분열된 우익이 뭉쳐서 1918년 11월 11일 휴전에 서명한 정부 지도자들(일명 "11월의 범죄자들")을 공격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6]
산업계와 농업계는 영 플랜에 대해 엇갈린 입장을 보였다. 농업 및 중공업 대표들은 이 계획에 반대했지만, 전체 기업계에서는 찬성하는 경향이 우세했다.
3. 1. 우익 세력의 반대
알프레트 후겐베르크 남작의 국가인민당, 철모단, 나치당 등 독일 우익 세력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책임을 독일에게만 묻는 베르사유 조약을 부정하며, 이에 서명하기를 거부하는 '자유법'을 발의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인정을 바라던 좌파 정당들과 중도 정당들의 반대로 찬성 82표, 반대 318표로 부결되었다.[5] 이에 우익들은 서명운동을 벌여 국민투표를 실시하였다.1929년 여름, 영 플랜에 대한 국내 정치적 분쟁이 시작되었다. 많은 대중들은 독일이 약속한 지불 기간과 총액에 경악했다. 연간 지불 총액은 에 달했으며, 1929~30 회계 연도의 총 제국 수입이 였음을 고려할 때, 그 수치는 매우 높아 보였다.[5] 우익은 이 협정을 선전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빚에 허덕이는 손자들의 모습을 그려냈다. 영 플랜에 반대하는 투쟁은 분열된 우익이 뭉쳐서 "등 뒤의 칼날 신화"의 증오스러운 체제, 즉 1918년 11월 11일 휴전에 서명한 정부 지도자들(일명 "11월의 범죄자들")을 공격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6]

특히 농업 및 중공업 대표들은 이 계획에 반대했다. 독일 농업 제국 위원회는 이를 경제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의 공동 경제적 이익 보호 협회는 영 플랜이 독일 경제에 "견딜 수 없는 부담"을 가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7] 그러나 산업계의 반대는 결코 만장일치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영 플랜에 반대하는 것은 주로 중공업이었다. 이 계획이 재정적 구제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전체 기업계에서는 찬성하는 경향이 우세했다.
알프레트 후겐베르크는 언론 재벌이자 독일 국가인민당(DNVP)의 대표였으며, 1928년 국회 선거에서 당이 패배한 후 바이마르 공화국에 반대하는 급진적인 노선으로 당을 이끌었다.[8] 1929년 1월, 후겐베르크는 정치적 우익을 결집하려 했고, 영 플랜에 반대하는 투쟁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으로 보였다. 동시에 그는 독일 민족주의 국회 파벌을 쿠노 폰 베스타르프의 통제 하에 두기 위한 당내 갈등을 이끌고 있었다.[9] 후겐베르크는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 회사인 UFA를 포함하여 다수의 신문과 뉴스 서비스를 통제했다. 이를 통해 그는 여론 형성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3. 2. 산업계 및 농업계의 입장
영 플랜에 대한 산업계의 입장은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다. 주로 중공업 분야에서 반대했는데, 독일 농업 제국 위원회는 영 플랜을 경제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의 공동 경제적 이익 보호 협회는 영 플랜이 독일 경제에 "견딜 수 없는 부담"을 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7] 그러나 전체 기업계에서는 영 플랜이 재정적 구제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찬성하는 경향이 우세했다.4. '독일 국민 발의를 위한 제국 위원회'
알프레트 후겐베르크를 중심으로 한 독일 우익 세력은 영 플랜에 반대하며 '독일 국민 발의를 위한 제국 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책임을 독일에게만 묻는 베르사유 조약에 반대하며, 영 플랜이 독일 경제에 과도한 부담을 지운다고 주장했다.[5][6][7]
위원회는 영 플랜의 배상 조항 이행을 막고, 전쟁 책임 조항을 명시적으로 거부하며,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헤르만 뮐러 정부를 전복하고 새로운 선거를 치르는 것을 목표로 했다.[12][13] 그러나 파울 로이슈 등 일부 산업계 인사들은 이러한 계획을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며 반대했다.[13]
4. 1. 위원회 구성
알프레트 후겐베르크는 언론 재벌이자 독일 국가인민당(DNVP)의 대표였다. 그는 1928년 국회 선거에서 당이 패배한 후 바이마르 공화국에 반대하는 급진적인 노선을 이끌었다.[8] 1929년 6월, 후겐베르크는 영 플랜과 전쟁 책임론에 반대하는 "독일 국민 발의를 위한 제국 위원회"를 구성했다.제국 위원회 첫 회의에는 범게르만 연맹의 하인리히 클라스, 국가인민당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재향군인회인 강철 투구단의 프란츠 젤트, 농업 연맹을 대표하여 마르틴 쉴레(국가인민당)와 카를 헵(독일 인민당), 그리고 후겐베르크의 초청으로 나치당의 아돌프 히틀러가 참석했다. 후겐베르크는 나치의 역동성과 젊은 열정을 존경하며 그들을 영 플랜 반대 운동의 '북'으로 활용하길 희망했다.[10] 제국 위원회에는 독일 산업 연합의 프리츠 티센, 독일 인민당 (DVP)의 공동 창립자이자 파리 회의에서 전문가 협의에 참여했지만 항의하며 사임한 기업가 알베르트 푁글러도 포함되었다.[10]
첫 회의에서 아돌프 히틀러를 포함한 16명의 실무 위원회(회장단)가 선출되었다. 회장단에는 위에 언급된 주요 대표들 외에도 참여 정당의 구성원들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실제 분위기는 집행 위원회의 두 위원장인 젤트와 후겐베르크에 의해 조성되었다.[11] 위원회는 주로 기업들의 자금으로 운영되었다. 제국 위원회는 관련된 정당과 단체에 자금을 분배했으며, 나치당에 대한 편애는 없었다.
1923년 히틀러의 실패한 맥주홀 폭동 이후, 독일 국가 인민당(DNVP)은 국가 사회주의자들과의 관계를 단절했으나, 후겐베르크가 국민투표 위원회에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을 포함시키면서 관계를 회복했다. 후겐베르크는 히틀러의 정당을 이용하여 정치적 이득을 보려 했으나, 히틀러는 이 기회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다. 히틀러는 이전까지 국회에서 겨우 12석을 차지한 비교적 미미한 정당을 이끄는 인물로 여겨졌으나, 위원회 참여를 통해 부르주아 우파의 인정받는 지도자들과 함께 국가 수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4. 2. 위원회의 활동
알프레트 후겐베르크는 언론 재벌이자 독일 국가인민당(DNVP) 대표로서, 1928년 국회 선거에서 당이 패배한 후 바이마르 공화국에 반대하는 급진적인 노선을 추구했다.[8] 1929년 1월, 후겐베르크는 정치적 우익을 결집하려 했고, 영 플랜에 반대하는 투쟁은 이를 위한 유력한 수단으로 보였다.[9]1929년 6월, 후겐베르크는 영 플랜과 전쟁 책임론에 반대하는 "독일 국민 발의를 위한 제국 위원회"를 구성했다.[10] 첫 회의에는 범게르만 연맹의 하인리히 클라스, 강철 투구단의 프란츠 젤트, 농업 연맹 대표 마르틴 쉴레와 카를 헵, 그리고 나치당의 아돌프 히틀러가 참석했다. 후겐베르크는 나치의 역동성과 젊은 열정을 활용하고자 했다.[10] 제국 위원회에는 프리츠 티센, 알베르트 푁글러 등도 포함되었다.[10]
첫 회의에서 히틀러를 포함한 16명의 실무 위원회(회장단)가 선출되었다. 젤트와 후겐베르크가 실질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11] 위원회는 주로 기업들의 자금으로 운영되었으며, 제국 위원회는 관련된 정당과 단체에 자금을 분배했다.[11]
이들의 목표는 영 플랜의 배상 조항 이행을 막는 것뿐만 아니라, 영 플랜 수용이 '전쟁 책임 조항'에 대한 자백을 의미한다고 보고 이를 명시적으로 거부하는 것이었다.[12] 또한, 독일 사회민주당 (SPD)의 헤르만 뮐러 정부를 전복하고 새로운 선거를 치르고자 했다.[13] 그러나 파울 로이슈 등 일부 산업계 인사들은 이러한 계획에 반대했다.[13]
1923년 맥주홀 폭동 이후 독일 국가 인민당(DNVP)은 국가 사회주의자들과의 관계를 단절했으나, 후겐베르크가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을 국민투표 위원회에 포함시키면서 관계를 회복했다.[14] 히틀러는 이를 통해 정치적 이점을 얻을 것으로 예상했다.[14] 요제프 괴벨스는 일기에 이러한 협력을 비판적으로 기록했다.[15]
5. 자유법
알프레트 후겐베르크의 국가인민당, 철모단, 나치스 등 독일 우익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책임을 독일에게만 묻는 베르사유 조약에 반대하며, 조약 서명을 거부하는 '자유법'을 발의했다. 그러나 좌파 및 중도 정당들의 반대로 찬성 82표, 반대 318표로 부결되었다.[18]
1929년 6월, 후겐베르크는 영 플랜과 전쟁 책임론에 반대하는 "독일 국민 발의를 위한 제국 위원회"를 구성했다. 범게르만 연맹, 강철 투구단, 농업 연맹, 나치스 등이 참여했으며, 후겐베르크는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스를 영 플랜 반대 운동에 활용하려 했다.[10] 위원회는 기업 자금으로 운영되었고, 영 플랜 배상 조항 이행 저지, 전쟁 책임 조항 거부, 사회민주당 헤르만 뮐러 정부 전복을 목표로 했다.[12] 그러나 독일 산업계 일각에서는 영 플랜 거부나 정치 위기 초래에 반대하기도 했다.[13]
맥주홀 폭동 이후 국가인민당은 나치스와 관계를 단절했으나, 후겐베르크가 국민투표 위원회에 NSDAP를 포함시키며 관계가 회복되었다. 히틀러는 이를 정치적 기회로 보았다.[14] 요제프 괴벨스는 협력을 타협으로 여겼지만, 히틀러는 전술적 이유로 협력했다.[15]
5. 1. 자유법의 내용

1929년 9월 28일, 영 플랜에 반대하는 발의를 위한 제국 위원회는 알프레트 후겐베르크 주변의 DNVP 우익과 NSDAP가 초안 작성에 참여한 법안을 제국 내무부에 제출했다. 이 법안은 "독일 국민 노예화 반대 법"이라는 제목을 가졌으며, 선전 목적으로 "자유법"이라고 불렸다.[18]
자유법은 4개의 조항으로 구성되어 배상 문제 범위를 넘어섰다.[18]
조항 | 내용 |
---|---|
제1조 | 제1차 세계 대전의 책임이 독일에 있다는 것을 부정.[45] |
제2조 | 베르사유 조약 제231조 폐지 및 라인란트 점령 지역 철수 요구.[45] |
제3조 | 새로운 배상 의무 수용 거부.[45] |
제4조 | 제3조 1항을 위반하여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제국 총리, 제국 장관 및 그 대리인은 반역죄로 처벌.[19][20] |
특히 제4조는 아돌프 히틀러의 주도로 포함되었다.[21] 이는 최소 2년 이상의 징역형으로 처벌될 수 있는 반역죄를 언급한 조항이었다.[19][20]
5. 2. 자유법을 둘러싼 논란
1929년 9월 28일, 영 플랜에 반대하는 제국 위원회는 국가인민당 우익과 NSDAP이 초안 작성에 참여한 법안을 제국 내무부에 제출했다. 이 법안은 국회에서 거부될 경우 국민투표에 부쳐져야 했다.[18] 초안의 제목은 "독일 국민 노예화 반대 법"이었으며, 선전적으로 "자유법"이라고 불렸다.자유법 초안은 4개의 조항으로 구성되어 배상 문제의 범위를 넘어섰다.[18]
- §1: 전쟁 책임 인정을 거부했다.
- §2: 베르사유 조약 제231조 폐지와 라인란트 점령 지역 철수를 요구했다.
- §3: 새로운 배상 의무 수용을 거부했다.
- §4: "제3항 제1절의 규정을 위반하여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제국 총리, 제국 각료 및 그 대리인은 형법 제92조 제3호에 규정된 처벌을 받는다"고 명시했다. 이 조항은 반역죄를 언급했으며, 최소 2년 이상의 징역형으로 처벌받을 수 있었다.[19][20]
특히 4항은 아돌프 히틀러의 주장으로 포함되었다.[21][22] 이 조항은 제국 위원회 내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알프레트 후겐베르크와 농업 연맹은 이 조항을 난처하게 여겨 삭제하려 했으나, NSDAP는 이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9월 21일 제국 위원회 회의에서 제4항 지지자들이 우위를 점했다.[22]
초안에서 제국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도 처벌 대상에 포함될 뻔했으나, 제국 위원회의 보수적인 위원들의 반대로 제외되었다.[22] 그럼에도 힌덴부르크는 이 발의를 지지하지 않았고, 캠페인에서 자신의 이름 사용을 금지했다.[23]
다음은 자유법의 조문 내용이다.[45]
6. 우익 정당들의 선전
알프레트 후겐베르크가 이끄는 국가인민당을 비롯한 철모단, 나치스 등 독일 우익 정당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책임을 독일에만 묻는 베르사유 조약에 반대하며, 영 플랜에 대한 국민투표를 추진하기 위해 강력한 선전 활동을 펼쳤다.
이들은 영 플랜이 독일 경제에 "견딜 수 없는 부담"을 지우고, 독일 국민들을 빚에 허덕이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태어나면서부터 빚에 허덕이는 손자들"의 모습을 묘사하며 대중의 불안감을 자극했다.[6] 또한, 1918년 11월 11일 휴전에 서명한 정부 지도자들을 "11월의 범죄자들"이라고 비난하며, 등 뒤의 칼날 신화를 다시 불러일으키는 등 과거의 상처를 자극하여 분열된 우익 세력을 결집시키려 했다.[6]
후겐베르크는 자신이 소유한 UFA를 포함한 다수의 신문과 뉴스 서비스를 통해 여론 형성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8]
6. 1. 선전 내용 및 방식
알프레트 후겐베르크를 비롯한 국가인민당 등 독일 우익 세력은 영 플랜에 반대하는 국민투표를 추진하며 대대적인 선전 활동을 펼쳤다. 이들은 "3대까지 노동해야 한다"는 슬로건을 내세웠는데, 이는 봉건 영주에게 무보수로 노동하는 것을 뜻하는 독일어 fronende을 활용한 것이었다.[24] 제국 위원회는 정기 보도 서비스를 চালু하고 "파리 공물 폐지" 시리즈를 발행했다.[24] 이들은 포스터, 전단지뿐만 아니라 후겐베르크 소유 언론 매체를 적극 이용했으며, 영화를 통한 정치 선전도 시도했다.[24]후겐베르크는 등록 기간 처음 2주 동안 이틀에 한 번꼴로 연설하며 독일 전역을 순회했다. 요제프 괴벨스 또한 활발하게 선전 활동을 펼쳤지만, 아돌프 히틀러는 몇 차례만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24] 나치당(NSDAP)은 10월에만 7,000회의 회의를 개최하여 상당한 수의 청중을 동원했다.[24]

제국 위원회와 각 지역 위원회는 때때로 터무니없는 음모론을 퍼뜨리기도 했다. 예를 들어, 정부가 베르사유 조약의 모든 조항을 공개하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이나, 독일 시민들이 "채권국 식민지에서 노동하기 위해" 해외로 팔려갈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유포되었다.[24]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비판은 반유대주의적 주장과 결합되었으며, 요제프 비르트 전 제국 재상이 유대인 여성과 결혼했다는 허위 주장도 제기되었다.[24]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은 "우리 민족의 모든 위험한 경향의 전형"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명예가 훼손되었다.[25] 특히 나치당은 극단적인 입장을 내세웠는데, 루르 지역에서 발행되는 "''새로운 전선''"은 "슈트레제만에 대한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투쟁은 그의 무덤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동했다.[27] 1929년 제국 당 대회에서 나치당은 "비독일인"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독일의 미래를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했다.[27]
6. 2. 선전의 문제점
우익 정당들은 유권자들의 참여를 호소하기 위해 강력한 선전을 펼쳤다. 특히 효과적인 슬로건 중 하나는 "3대까지 노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봉건 영주를 위한 무보수 노동을 의미하는 독일어 fronen|프로넨de을 사용한 것이다. 제국 위원회는 정기적인 보도 서비스를 설립하고 "파리 공물 폐지" 시리즈를 발행했다.[24] 그들은 또한 포스터와 전단지와 같은 일반적인 광고 매체를 사용했지만, 주로 알프레트 후겐베르크 언론에 의존했다. 영화관에서 광고 영화를 사용하여 정치 선전을 하는 것은 비교적 새로운 시도였다.[24]알프레트 후겐베르크는 등록 기간 처음 2주 동안 격일로 연설을 했고, 독일 전역의 수많은 도시를 방문했다. 요제프 괴벨스도 마찬가지로 활동적이었지만, 아돌프 히틀러는 몇 차례 공개석상에만 모습을 드러냈다.[24] 나치당은 10월에 7,000번의 회의를 열었고, 예상외로 많은 청중을 끌어모았다. 그러나 영 계획 반대 캠페인은 여러 주 및 지방 선거와 겹쳤고, 이들이 당의 우선순위였다.[24]
제국 위원회 외에도 다양한 정도로 활동한 지역 위원회가 있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데트몰트 인근의 헤르만 기념비에서 9월 1일에 열린 대규모 집회였다.
위원회는 때때로 터무니없는 음모론을 사용했는데, 예를 들어 정부가 베르사유 조약의 모든 조항을 발표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채권국 식민지에서 일하기 위해 임금 노예와 같은 존재로 해외에 팔려야 하는 독일 시민"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 베르사유 비판은 반유대주의적 주장과 결합되었으며, 독신 전 제국 재상 요제프 비르트가 유대인 여성과 결혼했다는 완전히 거짓된 주장도 포함되었다.[24]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은 "우리 민족의 모든 위험한 경향의 전형... 그의 심리적 쇠퇴는 그의 정치적 쇠퇴에서 명백하게 파생되었다"며 명예를 훼손당했다.[25] 특히 나치당은 이 이니셔티브가 시작되기 전 기간 동안 극단적인 입장을 밀어붙였다. 루르 지역에서 발행된 "''새로운 전선''"에서는 "슈트레제만에 대한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투쟁은 그의 무덤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27] 1929년 제국 당 대회에서, 그들은 "비독일인"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27] "이 이니셔티브는... 두 범주의 [사람]을 만듭니다. 독일의 미래를 믿는 사람들, 독일인, 그리고 어떤 이유로든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 비독일인."[27] 나치당과 후겐베르크의 극단적인 입장은 제국 위원회 내에서 갈등을 초래했다. 독일 국가인민당 내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점점 회의적인 세력이 있었다. 농업 연맹과 같은 원래 지지자 중 일부가 등을 돌렸다. 젊은 독일 기사단과 심지어 전 자유군단의 주요 구성원들도 이 이니셔티브에 반대했다. 폭력적인 조직 콘술의 전 지도자 헤르만 에르하르트 대위는 이 행동을 "우스꽝스러운 장난"이라고 불렀으며, 결국 민족주의 진영에 역효과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27]
7. 정부의 대응
헤르만 뮐러의 5당 연립 정부는 영 플랜 반대 운동에 대해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초기에는 영 플랜과 관련된 헤이그 협상 때문에 자제해야 했다.[10] 1929년 8월 헤이그 회의가 끝난 후에야 정부는 대응 조치를 시작했다.
프로이센 공무원들은 이 계획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징계를 받을 수 있었다. DNVP는 이 정책에 대한 소송을 제기했다. 프로이센 주 법원은 처음에는 이 안을 기각했지만, 선거 후에야 발표된 최종 결정에서, 법원은 공무원의 합법적인 계획에 참여할 권리를 인정했다. 목표의 적극적인 옹호만이 공식적인 비위로 해석될 수 있었다.
정부 연립 정당들은 비교적 자제했다.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의 정당인 DVP가 이 계획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는 사망 직전, 다가오는 계획을 이유로 DVP와 후겐베르크가 이끄는 DNVP 간의 협력을 배제했다. 그러나 이러한 거부는 정당의 정치적 공간을 좁혔다. "나는 독일 우익의 일부가 미쳐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좌익과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31] 이 입장은 슈트레제만의 죽음 이후 오래가지 못했다. 대신 정당은 우익으로 기울었다.
7. 1. 정부의 대응 전략
헤르만 뮐러의 5당 연립 정부는 영 플랜 반대파들의 선동에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1929년 8월 헤이그 회의가 끝난 후에야 정부는 대응 조치를 시작했다. 정부는 독일 제국 정부 및 외무부의 연합 언론부를 활용했고, 국내 봉사 제국청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주 정부 부서들은 영 플랜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지시받았고, 정부는 특별 언론 사무실을 설치했다. 후겐베르크 언론의 강력한 입장 때문에 제한적인 성공만을 거두었다.[10][26]독일 제국 정부는 반선전에 상당한 액수의 돈을 썼다. 1929년 9월, 정부와 가까운 정당, 노동 조합 및 기타 조직을 활용하여 1,000명의 연사를 확보하고 의 비용을 예상했다.[27] 총 의 비용이 예상되었으며, 이 중 일부는 외무부와 제국 총리실의 예산에서 나왔지만, 대부분의 돈은 루돌프 힐퍼딩(사민당)이 관리하는 재무부의 예산 외 자금에서 나왔다.[10][28] 프로이센 주 정부도 이 노력에 참여했다.[29]
연설과 인쇄 매체 외에도, 라디오와 영화가 반선전에 사용되었다. 당시까지 비교적 비정치적이었던, 국가가 통제하는 라디오의 사용은 정부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비판을 받았다. 내무부 장관 카를 세베링(사민당)은 라디오를 중요한 선전 도구로 여겼다.[30] 방송국들은 소위 "지침 토론"(Auflagevorträgede)을 변경 없이 방송해야 했다. 등록 기간 동안 총 6개가 방송되었다. 일부 방송국에서는 눈에 띄는 간섭이 있었지만, 사보타주 혐의는 입증될 수 없었다.

세베링은 이 계획에 대해 가장 명확한 입장을 취했으며, 그 결과 대중들은 이 논쟁을 세베링과 후겐베르크 간의 싸움으로 보았다. 세베링은 "독일 국민에게"라는 제목의 독일 제국 정부의 공개 호소를 시작했다.[32][33][34] 이 호소에서 이 계획의 내용은 "가장 최악의 선동 시도"로 묘사되었다. 이는 공화국과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의 화해 정책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35] 이 호소에는 얄마르 샤흐트, 로베르트 보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막스 플랑크,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토마스 만 등 영향력 있는 공인들이 서명했다. 카를 프리드리히 폰 지멘스, 한스 루터, 카를 뒤스베르크 등은 서명을 거부했다.
7. 2. 정부의 어려움
1929년 8월 헤이그 회의 이후, 후겐베르크 언론의 강력한 영향력으로 인해 독일 제국 정부의 대응은 제한적인 성공에 그쳤다.[10][26] 정부는 독일 제국 정부 및 외무부의 연합 언론부를 활용했고, 국내 봉사 제국청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주 정부 부서들은 영 플랜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지시받았고, 정부는 특별 언론 사무실을 설치했다.7. 3. 카를 제베링의 역할
카를 제베링 내무장관은 영 플랜에 대해 가장 명확한 입장을 취했으며, 그 결과 대중들은 이 논쟁을 후겐베르크와의 싸움으로 인식했다. 제베링은 "독일 국민에게"라는 제목의 독일 제국 정부 공개 호소를 시작했다.[32][33][34] 이 호소문에는 영 플랜의 내용이 "가장 최악의 선동 시도"라고 묘사되었으며, 공화국과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의 화해 정책에 대한 지지가 담겨 있었다.[35]제베링은 라디오를 중요한 선전 도구로 여겼으며[30], 방송국들은 "지침 토론"(Auflagevorträgede)을 변경 없이 방송하도록 지시했다.
8. 국회 논의와 자유법 부결
알프레트 후겐베르크 남작의 국가인민당을 비롯한 철모단, 나치당 등 독일 우익 세력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책임을 독일에게만 묻는 베르사유 조약에 반대하며 '자유법'을 발의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인정을 바라던 좌파 및 중도 정당들의 반대로 1929년 11월 30일 국회에서 찬성 82표, 반대 318표로 부결되었다.[36]
이에 우익 세력은 서명운동을 벌여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10월 29일 등록 마감 결과, 유권자 자격이 있는 사람들의 10.02%가 명부에 이름을 올려 국민투표 실시 요건을 충족했다. 독일 동부 주에서 특히 성공적이었는데, 동프로이센, 포메라니아, 메클렌부르크에서 전체 투표의 3/4을 차지했다.
8. 1. 국회 토론
1929년 11월 29일, 헌법 조항에 따라 국회에서 자유법 법안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졌다.[36] 제국 위원회는 자유 법에 대한 설명서를 제출하여 다시 한번 그들의 견해를 제시했다.[37]DVP 소속 외무부 장관 율리우스 쿠르티우스는 제버링을 대신하여 정부를 위해 연설했다. 쿠르티우스는 이 분쟁이 제버링과 후겐베르크의 싸움, 또는 마르크스주의와 반마르크스주의자의 싸움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발의안 주창자들을 "헌법 질서와 제국의 정치 권력 분리를 완전히 혼란에 빠뜨렸다"고 비난하며, 이 캠페인이 "국가의 권위에 대한 공격"이라고 말했다.[17]
DNVP를 대표하여 연설한 사람은 9년 동안 국회에서 연설하지 않았던 후겐베르크가 아니라 에른스트 오버포렌과 악셀 폰 프라이타크-로링호벤이었다. 고트프리트 페더는 NSDAP를 대표하여 연설했으며, 토론 중에 NSDAP 대표는 정당의 발의 참여가 "합법적인 수단으로 시스템을 폐지"하는 문제임을 분명히 했다.
집권 정당의 입장은 가톨릭 중앙당의 토마스 에세르가 제시했다. 그는 이 발의안이 "협상과 이해의 정책"을 "파괴와 도발의 정책"으로 대체하려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독일이 단순한 항의만으로 전쟁 배상금의 부담을 벗어던지고, 라인란트와 자르 지역을 즉시 완전히 해방할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냅니다."라고 비판했다.[17]
8. 2. 자유법 부결
알프레트 후겐베르크 남작의 국가인민당을 비롯한 철모단, 나치당 등 독일 우익들이 제안한 '자유법'은 1929년 11월 30일 국회에서 두 번째 심의를 거쳐 압도적인 표 차이로 부결되었다.[36] 찬성 82표, 반대 318표로 부결되었는데,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책임을 독일에게만 묻는 베르사유 조약에 반대하는 우익 세력의 주장이 국제사회의 인정을 바라던 좌파 및 중도 정당들의 반대에 부딪힌 결과였다.후겐베르크는 당내 반대파의 반발로 인해 국가인민당(DNVP) 의원들의 지지를 온전히 얻지 못했다.[38] DNVP 의원 72명 중 52명만이 자유법에 찬성표를 던졌는데, 이는 법안의 네 번째 단락에서 장관에 대한 반역 혐의를 언급한 것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38] 쿠노 폰 베스타르프 의장을 중심으로 한 당내 비판가들은 후겐베르크가 다른 중산층 정당과의 협력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38]
9. 국민투표 실시와 결과
알프레트 후겐베르크의 독일 국가인민당 등 우익 정당들은 '자유법' 제정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했지만, 투표율이 15%에 불과하여[44] 부결되었다. 독일 제국 정부는 이 법안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단하여, 통과를 위해서는 투표 자격자 50%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실제 찬성률은 13.8%에 그쳤다.[39]
이 과정에서 나치당과 아돌프 히틀러는 대중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효과를 얻었고, 이는 이듬해 총선에서 나치당이 제2당으로 부상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1930년 제국 의회 선거에서 국민투표 지지율이 높았던 지역과 NSDAP의 지지율이 높았던 지역은 서로 연관되어 있었다.
1930년 3월 12일, 국회는 270 대 192로 영 플랜을 비준했다.
9. 1. 국민투표 실시
알프레트 후겐베르크 남작의 국가인민당을 비롯한 철모단, 나치당 등의 독일 우익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책임을 독일에게만 묻는 베르사유 조약을 부정하며, 이에 서명하기를 거부하는 '자유법'을 발의했으나, 국제사회의 인정을 바라던 좌파 정당들과 중도 정당들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이에 우익들은 서명운동을 벌여 국민투표를 실시한다.국민투표 발의자들은 국민투표를 요구했고, 독일 제국 정부는 투표율을 낮추기 위해 크리스마스 직전 마지막 일요일인 12월 22일로 투표일을 의도적으로 정했다.[39] 국민투표 발의자들은 선전을 강화했다. 그들은 국가은행 총재 얄마르 샤흐트가 정부에 비판적인 발언을 했다는 점과 공무원의 투표 참여를 허용한 국가 법원의 판결을 활용할 수 있었다. 반면, 국민투표 반대자들은 이 문제에 거의 대응하지 않았다.[39]
9. 2. 국민투표 결과
1929년 독일 국민투표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찬성 | 반대 | 무효표 | 유권자 수 |
---|---|---|---|
5,838,890 표 | 338,195 표 | 131,493 표 | 42,323,473 명 |
유효 투표의 94.5%가 찬성했지만, 투표율은 15%에 불과하여[44] 투표는 무효 처리되었다. 이는 투표 자격자의 50% 이상이 찬성해야 하는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일 제국 정부는 이 국민투표의 대상 법안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헌법 개정이 필요했고, 국민투표 통과를 위해서는 투표 자격자의 50% 이상 찬성이 필요했다. 만약 헌법에 부합했다면 투표자의 과반수 찬성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39] 결과적으로 투표 자격자의 13.8%만이 찬성하여, 우익 정당의 목표는 달성되지 못했다.
10. 결과 및 영향
1929년 독일 국민투표는 저조한 투표율로 인해 부결되었다. 베르사유 조약 조인 거부에 대한 찬성은 94.5%였지만, 투표율은 14.9%에 불과했다.[40]
이 국민투표는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NSDAP)이 대중 매체에 노출되며 인지도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이듬해 총선거에서 나치당이 제2당으로 부상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에버하르트 콜브에 따르면, 나치당은 국회 위원회의 재정 지원을 받아 20만 명 규모의 당 대회를 개최하고, 2만 명의 돌격대(SA) 대원을 제복화할 수 있었다.[41] 게르하르트 슐츠는 히틀러가 자신의 협력을 기회주의가 아닌 혁명적 급진주의로 보이도록 연출했다고 평가했다.[42]
10. 1. 바이마르 공화국의 안정성 확인?
국민투표의 실패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놀라운 안정성을 보여주는 듯했다. 하지만 수개월 동안 의회 민주주의의 평판을 깎아내리려 했던 선전은 정치 문화를 영구적으로 바꿔 놓았다. 결국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을 옹호하며 보수 세력을 약화시키는 변화가 정치 우파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40] 공화국이 얼마나 불안정한지는 불과 몇 달 후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이어진 NSDAP의 부상과 의회 민주주의의 최종적인 붕괴로 분명해졌다.1930년 독일 국회 선거에서, 프로테스탄트 보수 우파는 분열되었고, 독일 국가인민당(DNVP)은 7%의 득표율을 얻는 데 그쳤다. 캠페인 기간 동안 강조되었던 NSDAP와의 친밀함은 DNVP를 포함한 중산층 블록의 형성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는 중산층 정당 전체의 쇠퇴에 기여한 발전의 시작을 알렸다.[40]
돌이켜보면 NSDAP가 진정한 승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1930년 1월 튀링겐에서 빌헬름 프리크는 독일 최초의 NSDAP 장관이 되었다. 1930년 국회 선거에서 이 당의 의석수는 2.6%에서 18.3%로 증가했다.[40]
10. 2. 나치당의 부상
1923년 실패한 맥주홀 폭동 이후, 독일 국가 인민당(DNVP)은 나치당과의 관계를 단절했으나, 후겐베르크가 국민투표 위원회에 나치당을 포함시키면서 관계를 회복했다. 히틀러는 이로부터 정치적 이점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여 참여했다.[14] 그 전까지 히틀러는 국회에서 겨우 12석을 차지한 비교적 미미한 정당을 이끄는 인물로 여겨졌으나, 이제 그는 부르주아 우파의 인정받는 지도자들과 함께 국가 수준에서 역할을 하게 되었다.[15]나치당 내부에서는 보수 우파와의 연합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14] 히틀러는 순전히 전술적인 이유에서 협력했다.[15] 국민투표 참여는 나치당이 이전의 정치적 고립을 깨는 데 성공하게 했다.[40] 1923년 이후 처음으로 히틀러는 독일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40]
많은 연구에 따르면, 국민투표 참여는 히틀러를 중산층 정치 우파의 잠재적 동맹 파트너로 만들었다. 캠페인 기간 동안과 이후, 나치당은 산업계로부터 많은 자금을 받았으며,[40] 후겐베르크 언론 또한 히틀러의 수중에 있었다.
10. 3. 독일 우익의 분열
후겐베르크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청년 안 계획 반대 운동을 통해 독일 정치 우파를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목표는 실패했는데, 그의 당이 분열되고 보수 인민당, 기독교 사회 인민 봉사와 같은 새로운 정당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41] 1930년 독일 국회 선거에서 프로테스탄트 보수 우파는 분열되었고, 독일 국가인민당(DNVP)은 7%의 득표율을 얻는 데 그쳤다. 이는 중산층 정당 전체의 쇠퇴에 기여한 발전의 시작이었다.[41]10. 4. 공산당의 민족주의적 입장 선회
요제프 스탈린은 청년 안 계획에 반대하는 캠페인이 NSDAP의 갑작스러운 성공 요인이라고 보고, 1929년 9월 독일 공산당(KPD)에 배상 문제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입장을 취할 것을 요구했다.[43] 코민테른은 민족주의적 포퓰리즘적 입장으로의 전환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이었지만, NSDAP의 추가적인 성공에 직면하여 1930년에 이러한 입장을 철회했다. 그 해 8월, KPD 신문 ''디 로테 파네''는 당이 강력한 민족주의적 언어를 사용한 "국가 및 사회 해방을 위한 프로그램 선언"을 게재했다. 그러나 민족주의적 슬로건으로 NSDAP로부터 항의 투표자를 빼앗으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1930년 국회 선거에서 KPD는 거의 득표율을 얻지 못한 반면, NSDAP는 95석을 추가하며 KPD를 넘어섰다.[43]11. 한국적 관점에서의 평가
1929년 독일 국민투표는 당시 독일 정치 상황과 국제 관계에 대한 한국적 관점에서의 평가를 제공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한국적 관점이나 평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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