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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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0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는 기시 노부스케의 사임으로 인해 치러졌으며, 이케다 하야토, 이시이 미쓰지로,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등이 후보로 나섰다. 선거 과정에서 파벌 간의 치열한 경쟁과 합종연횡이 벌어졌으며, 막판 이케다 지지 세력이 결집하면서 이케다가 승리했다. 이케다의 당선은 보수본류 정치의 안정과 소득 배증 정책 추진으로 이어졌지만, 금권 정치와 파벌 정치의 폐해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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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인조는 2000년 오부치 게이조 총리 뇌경색 입원 후 자민당 주요 인사 5명이 모리 요시로를 후임 총리로 추대하고 아오키 간오를 총리 대리로 결정한 사건을 지칭하며, 밀실 협의라는 비판과 함께 일본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60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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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개요 | |
선거 이름 | 1960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
선거 유형 | 총재 선거 |
진행 여부 | 아니오 |
이전 선거 | 1959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
이전 선거 연도 | 1959년 |
다음 선거 | 1962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
다음 선거 연도 | 1962년 |
선거 날짜 | 1960년 7월 14일 |
선거 제도 | 결선 투표제 |
유권자 수 | 당 소속 중의원 의원: (불명) |
선거 결과 | |
후보 1 | 이케다 하야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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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2 | 이시이 미쓰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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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3 |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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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4 | 마쓰무라 겐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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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5 | 오노 반보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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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6 | 사토 에이사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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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책 계승 | |
직책 | 총재 |
선거 전 | 기시 노부스케 |
선거 후 | 이케다 하야토 |
2. 배경
기시 노부스케가 안보 투쟁의 여파로 1960년 6월 23일 사의를 표명하면서 차기 총재를 선출할 선거를 시행하게 되었다. 당초 기시는 자신이 주도하여 후보자를 일원화하길 원했으나 이케다 하야토, 오노 반보쿠, 이시이 미쓰지로,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마쓰무라 겐조 등 5명이 입후보할 뜻을 밝혔다.[11][12] 합의를 통해 총재를 선정한다면 부총재이던 오노가 총재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이케다는 공선으로 총재를 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어떠한 합의와 대화에도 응하지 않아 오노·이시이와 대립했다. 하지만 공선을 주장한 이케다의 태도가 지나치게 고압적이었기에 언론조차 이케다의 태도를 좋게 보지 않았다.
1960년 6월 23일, 기시 노부스케 총재가 안보 투쟁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을 표명하면서 차기 총재를 선출하는 선거가 열리게 되었다. 당초 기시는 자신이 주도하여 후보를 단일화하길 원했으나, 이케다 하야토, 오노 반보쿠, 이시이 미쓰지로,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마쓰무라 겐조 등 5명이 총재직에 입후보할 뜻을 밝혔다.[11][12]
7월 5일에 이케다가 정식으로 입후보를 표명했으며 8일에 오노가 뒤를 따랐다. 10일에는 기시로부터 입후보 권유를 받았던 후지야마가 오자와 사에키, 에사키 마스미, 엔도 사부로 등의 추천을 받아 입후보했다.[12] 같은 날에 이시이와 마쓰무라도 반주류파의 대표를 내세우며 입후보를 표명했다. 그런데 12일에 기시가 후지야마에게 입후보를 포기하고 이케다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12] 한편 요시다 시게루가 이케다 지지를 선언하면서 오노와 이시이는 연합 전선을 결성했다. 이로써 이케다 대 오노·이시이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 가와시마 쇼지로 간사장 등은 당대회를 7월 13일에 열기로 결정했지만 두 파벌의 대립이 극심하자 가급적이면 공선을 실시하지 않고 합의를 통해 후보를 일원화할 것을 촉구했다.
이케다는 안보 투쟁이 한창일 때 자위대의 치안 출동을 강하게 주장한 적이 있었다.[13] 따라서 이케다가 총재가 되면 기시의 노선이 계승되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강했다. 원로 정치인이던 쇼리키 마쓰타로도 "이런 혼란 속에서 강경한 태도만 내세우는 이케다가 과연 시국을 수습할 수 있을 것인가"라며 우려했다. 『아사히 신문』 논설위원 류 신타로는 이케다의 측근인 미야자와 기이치에게 "지금처럼 사회가 어지러울 때는 치자와 피치자의 대립을 소멸시킬 필요가 있다. 이케다 씨 같은 난폭한 사람은 일은 잘해도 대립을 심화시킬 우려가 있다. 조금 일을 못하더라도 성격이 온건한 사람에게 총재를 양보하길 바란다"라며 이시이를 추천하면서(이시이는 『아사히 신문』에서 20년 넘게 근무한 경력이 있다) 이를 이케다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미야자와 역시 '고압적인 기시에 이어서 방자한 이케다가 총리가 되면 자민당 자체가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온화한 성격인 이시이에게 양보해야 한다고 여겼다. 오히라 마사요시 역시 이케다가 총재 선거에 입후보하는 건 시기상조라 여겼다. 하지만 이케다는 "내 눈에는 정권이라는 게 보인다. 내 앞에는 정권이 있다"라며 지금은 승부를 해야 할 때라는 자신의 직감을 믿고 충고를 일축했다.
한편 사토 에이사쿠도 입후보를 검토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시다가 "이런 시대의 총재에는 정직한 사람을 우선하는 게 좋다"라며 이케다가 정권을 취해도 단명으로 끝날 것이니 지금은 자중하고 이케다를 지지해줄 것을 설득해 왔다. 사토파는 "이케다가 총리가 되면 사토의 시대는 멀어지는 게 아닌가"라며 의문을 던지면서도 당인파에게 정권을 넘기는 것을 꺼려해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기시 역시 친동생인 사토를 지지했지만 형의 뒤를 이어 곧바로 동생이 정권을 차지하는 건 모양새가 좋지 못하니 대신 맹우인 후지야마가 총재가 되길 바랐다. 하지만 후지야마는 당내 세력이 약했기에 사토파는 후지야마 대신 이케다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기시는 겉으로는 중립을 지켰지만 요시다, 가야 오키노리와 상담하여 비밀리에 이케다를 지지했다는 얘기도 있다.
파벌 대립에 기반한 격심한 투쟁은 사실상 분열 상태로 만들었을 정도로 자민당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기시파는 파벌 단위에서도 분열해 기시와 후쿠다 다케오 등은 사토파와 함께 이케다를 지지했으며 가와시마, 아카기 무네노리 등은 오노를 지지했고 아야베 겐타로, 난조 도쿠오, 다케치 유키 등은 후지야마를 지지했으며 이치마다 히사토는 이시이를 지지했다. 당대회 이틀 전인 11일에 고노 이치로는 오노, 이시이, 가와시마, 이치마다, 다카사키 다쓰노스케, 쇼리키와 회담해 기시 아류 정권 반대, 관료 정치 반대를 내세우며 당인파의 결집을 결의했다. 하지만 고노가 내세운 당인파의 결집은 양날의 칼이었다. 지지 범위를 넓히는 효과가 있었지만 중심 인물이던 고노와 미키 다케오가 안보 투쟁 당시 본회의를 결석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안보에 정치 생명을 걸었던 기시에게는 용서하기 힘든 행위였다. 기시는 특히 미키를 매우 싫어했다. 이케다 지지 세력의 참모는 사토였고 이시이 지지 세력의 기동력은 고노였지만 실제로 사토파를 견인해 이케다 지지로 이끌어 모은 건 다나카 가쿠에이였다. 기무라 다케오,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아이치 기이치, 마쓰노 라이조 등 4명은 사토파 내에서도 반이케다 세력이었지만 다나카는 사토파가 분열하면 고노에게 기회를 주게 된다며 위기감을 불러일으켜 파벌을 결집하는 데 성공했다. 당대회 날짜가 다가오면서 합의는 사실상 물 건너갔고 이케다파, 이시이파, 오노파는 각자 자신들이 이길 거라며 시뮬레이션을 하고 있었다.[14]
그런데 12일 밤에 사태가 급변했다. 이케다파의 공작에 의해 이시이파에 속한 참의원 의원들이 분열하여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게 된 것이다. 나다오 히로키치는 이시이의 지시를 받고 오노파 참모인 미즈타 미키오, 아오키 마사시, 무라카미 이사무와 만나 "오노파가 2·3위 연합에 기대해도 이시이파가 기대에 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며 상황을 전달했다.[14] 이시이파 참의원 의원들이 분열한 건 고노가 오노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사실을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이시이파와의 2·3위 연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오노에게도 승산은 없었다. 늦은 시각이었지만 가와시마, 고노, 고다마 요시오는 오노를 중심으로 선거 판세를 재검토했다. 그리고 고노가 오노를 설득해 13일 6시 30분경에 오노가 입후보를 사퇴했다.[12] 오노파는 결속력이 두터웠기에 오노가 입후보를 포기해도 이시이파를 지원할 수 있지만 이시이가 사퇴하면 이시이파의 표가 이케다에게 흘러갈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오노가 입후보를 포기한 것이었다. 소식을 들은 마쓰무라도 출마를 취소했고 미키·마쓰무라파는 이시이 지지를 표명해[15] 기시, 이케다, 사토의 관료파 연합에 대항해 당인파 연합 후보를 이시이로 일원화했다.[14] 이렇게 최종적으로 총재 선거는 이케다, 이시이, 후지야마 등 세 사람의 경쟁이 되었다.
하지만 당인파들 사이에서 이시이가 이케다에게 패배할 거란 우려가 많았고 결국 당인파는 잘못된 전략을 채택하게 된다. 예정대로 이날에 선거가 시행됐다면 이시이가 당선됐을 거란 얘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 밤 후지와라 요시에의 음악회가 예정되어 있어 산케이 홀을 오랫동안 빌리지 못하자 당인파는 선거를 하루 연기할 것을 제안했다. 그렇게 하루라는 시간을 벌게 된 이케다파는 기시, 사토 등과 함께 체계를 다시 세우는 데 성공했다. 이케다와 친분이 있었고 고노를 경계했던 재계 주류파를 기시가 설득하는 것에도 성공했다.[16] 재계의 지지를 얻어내자 기시는 기시파 60명을 모아 다시 한번 재결집하여 이케다를 지지할 것을 설득했다.[17] 이 전략이 유효해 당인파의 산파역 중 한 명이었던 가와시마도 이케다 지지로 선회했다. 마쓰노는 이 상황을 두고 "기시는 이케다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먼 친척이기도 한 요시다로부터 이케다를 도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라고 설명했다. 후지야마는 책임을 다하겠다며 입후보를 사퇴하지 않았지만[12] 결선 투표에선 이케다 지지를 명확히 하는 등 하룻밤 사이에 이케다 지지 세력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3. 전개 과정
부총재였던 오노가 총재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이케다는 합의가 아닌 공선으로 총재를 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오노, 이시이와 대립했다. 그러나 이케다의 고압적인 태도는 언론의 비판을 받았다.
7월 5일 이케다가 정식으로 입후보를 표명했고, 8일에는 오노가, 10일에는 후지야마, 이시이, 마쓰무라가 입후보했다.[12] 12일, 요시다 시게루가 이케다 지지를 선언하면서 오노와 이시이는 연합 전선을 결성했다. 간사장 가와시마 쇼지로 등은 당 대회를 7월 13일에 열기로 결정했지만, 두 파벌의 대립이 극심해지자 후보 단일화를 촉구했다.
이케다는 자위대의 치안 출동을 강하게 주장한 전력이 있어, 이케다 정권이 기시 노선을 계승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13] 쇼리키 마쓰타로는 이케다의 강경한 태도를 우려했고, 아사히 신문 논설위원 류 신타로는 미야자와 기이치에게 온건한 성격의 이시이를 추천하며 이케다에게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미야자와와 오히라 마사요시 역시 이케다의 입후보가 시기상조라고 생각했지만, 이케다는 자신의 직감을 믿고 충고를 일축했다.
사토 에이사쿠도 입후보를 검토했지만, 요시다의 설득으로 이케다를 지지하기로 했다. 사토파는 이케다가 총리가 되면 사토의 시대가 멀어질 것을 우려했지만, 당인파에게 정권을 넘기는 것을 꺼려 이케다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기시는 겉으로는 중립을 지켰지만, 요시다, 가야 오키노리와 비밀리에 이케다를 지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파벌 간의 격렬한 투쟁으로 자민당은 혼란에 빠졌다. 기시파는 분열되었고, 고노 이치로는 당인파 결집을 시도했지만, 안보 투쟁 당시 본회의를 결석한 전력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이케다 지지 세력의 참모는 사토였지만, 실제로 사토파를 이케다 지지로 이끈 것은 다나카 가쿠에이였다.
7월 12일 밤, 이시이파 참의원 의원들이 이케다파의 공작으로 분열하면서 오노-이시이 연합은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13일 새벽, 오노가 입후보를 사퇴하고, 마쓰무라도 출마를 취소하면서 이시이로 후보가 단일화되었다.[14][15]
그러나 당인파는 선거를 하루 연기하는 전략을 채택했고, 이 하루 동안 이케다파는 세력을 재결집했다. 재계의 지지를 얻어내고, 기시파와 가와시마 쇼지로까지 이케다 지지로 돌아서면서,[16][17] 하룻밤 사이에 이케다 지지 세력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이케다 캠프는 선거 기간 동안 재계 주류의 지원을 받아 총액 10억엔에 달하는 거액을 마련했다. 이에 비해 오노 캠프가 마련한 비용은 겨우 3억엔에 불과했다.
3. 1. 후보자
통상산업대신 (1959년~현재)중의원 의원 (4선, 후쿠오카현 제3구)
부총리 (1957년~1958년)중의원 의원 (초선, 가나가와현 제1구)
외무대신 (1957년~현재)굉지회 (이케다파) 수요회 (이시이파) 애정회 (후지야마파) 히로시마현 후쿠오카현 도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