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기 무네노리
1. 개요
아카기 무네노리는 1904년 이바라키현에서 태어난 일본의 정치인이다.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우에노촌장을 거쳐 중의원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공직 추방 이후 정계에 복귀하여 농림상, 내각관방장관, 방위청 장관 등을 역임했으며, 특히 소련과의 어업 문제 해결에 기여했다.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정무조사회장 등을 역임했고, 1990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1993년 사망했으며, 중세사 연구에도 관심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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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아카기 무네노리 |
|---|---|
| 원어 이름 | 赤城 宗徳 |
| 로마자 표기 | Akagi Munenori |
| 출생일 | 1904년 12월 2일 |
| 출생지 | 일본 제국 이바라키현 마카베군 우에노촌 (현재 쓰쿠바미라이시) |
| 사망일 | 1993년 11월 11일 |
| 학력 | 도쿄 대학 법학부 |
| 칭호/훈장 | 정3위 훈1등 욱일대수장 감수포장 중의원 영년재직의원 법학사 |
| 배우자 | 아카기 히사 |
| 친족 (정치가) | 손자 아카기 노리히코 |
| 소속 정당 | 무소속 익찬정치회 호국동지회 일본협동당 무소속 자유당 일본민주당 자유민주당 (기시파 → 시이나파 → 가와모토파) |
|---|---|
| 농림대신 | 제25대 제32대 ~ 34대 제42대 |
| 농림대신 재임 내각 | 제1차 기시 개조 내각 제2차 이케다 제3차 개조 내각 제3차 이케다 내각 제3차 이케다 개조 내각 제1차 사토 내각 제3차 사토 개조 내각 |
| 농림대신 임기 시작 | 1957년 7월 10일 1963년 7월 18일 1971년 7월 5일 |
| 농림대신 임기 종료 | 1958년 6월 12일 1965년 6월 3일 1972년 7월 7일 |
| 방위청 장관 | 제11대 |
| 방위청 장관 재임 내각 | 제2차 기시 개조 내각 |
| 방위청 장관 임기 시작 | 1959년 6월 18일 |
| 방위청 장관 임기 종료 | 1960년 7월 19일 |
| 내각관방장관 | 제17대 |
| 내각관방장관 재임 내각 | 제2차 기시 내각 |
| 내각관방장관 임기 시작 | 1958년 6월 12일 |
| 내각관방장관 임기 종료 | 1959년 6월 18일 |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3구 →) 구 이바라키 3구 |
| 중의원 당선 횟수 | 15회 |
| 중의원 임기 시작 | 1937년 4월 30일 1942년 4월 30일 1952년 10월 1일 1979년 10월 7일 |
| 중의원 임기 종료 | 1938년 2월 14일 1945년 12월 18일 1976년 12월 9일 1990년 1월 24일 |
| 이바라키현 의회 의원 임기 시작 | 1935년 |
| 이바라키현 의회 의원 임기 종료 | 1944년 |
| 우에노촌 촌장 임기 시작 | 1931년 |
|---|---|
| 우에노촌 촌장 임기 종료 | 1945년 |
|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 제13대 |
|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재임 총재 | 사토 에이사쿠 |
|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임기 시작 | 1965년 |
|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임기 종료 | 1966년 |
|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 제8대 |
|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재임 총재 | 이케다 하야토 |
|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임기 시작 | 1961년 |
|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임기 종료 | 196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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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간 -
미키 다케오
미키 다케오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제66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록히드 사건 조사와 정치 개혁을 시도했으나, 정치적 이상과 현실 간 괴리, 강직한 성격 등으로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
아베 간 -
기시 노부스케
일본의 정치가이자 관료인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국에서의 경력을 바탕으로 도조 히데키 내각의 상공대신을 거쳐 총리대신을 역임하며 미일안전보장조약 개정을 추진했으나 안보투쟁으로 사임했고, "쇼와의 요괴"라는 이명과 함께 여러 논란에 휩싸였다. -
감수포장 수훈자 -
시부사와 에이이치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도쿠가와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일본 근대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한 실업가이자 사상가로, 500개가 넘는 기업 설립 및 경영에 참여하며 "도덕경제합일설"을 주창했고 사회 및 교육 사업에도 헌신했다. -
감수포장 수훈자 -
마쓰시타 고노스케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파나소닉의 창업자로서, 독창적인 디자인과 경영철학으로 일본 전기 제조 및 소매업계에 큰 영향을 미치며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고, 인재 육성에도 기여했다. -
일본의 방위청 장관 -
우노 소스케
우노 소스케는 자유민주당 소속의 일본 정치인으로, 외무대신 등 요직을 거쳐 제75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으나 여성 스캔들로 인해 69일 만에 사임하며 최단명 내각 중 하나를 이끌었고, 시베리아 억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저서를 출판하기도 했다. -
일본의 방위청 장관 -
나카소네 야스히로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1918년 군마현 출생으로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본 제국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행정 개혁, 국철 민영화 등을 추진하다가 2019년 사망했다.
2. 생애
1904년 12월 2일 이바라키현 마카베군 우에노촌(지금의 지쿠세이시)에서 대대로 나누시를 역임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에 어머니와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
구제 시모쓰마 중학교(지금의 이바라키현립 시모쓰마 제일 고등학교·부속 중학교)와 구제 미토 고등학교(지금의 미토 고등학교)를 거쳐 1927년 도쿄 제국대학(지금의 도쿄 대학) 법학부 법률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정계 입문 과정은 하위 섹션 "=== 정계 입문 (1930년대 ~ 1940년대) ==="에서, 정계 복귀와 자민당 활동 과정은 "=== 정계 복귀와 자민당 활동 (1950년대 ~ 1970년대) ==="에서 상세하게 다룬다.
1964년 6월, 시모야카타시민회관 건설 비용으로 10만 엔을 기부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66년 2월에 감수포장을 수훈했다.
말년의 활동은 하위 섹션 "=== 말년 (1970년대 후반 ~ 1990년대) ==="에서 상세하게 다룬다.
평소 타이라노 마사카도 연구가로도 알려져 있으며, 그에 대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2.1. 정계 입문 (1930년대 ~ 1940년대)
1927년 도쿄 제국대학(지금의 도쿄 대학) 법학부 법률학과를 졸업한 후, 1931년 고향인 이바라키현 마카베군 우에노촌(지금의 지쿠세이시)의 촌장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1937년 제2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이듬해 선거 비용 과다 사용으로 당선 무효 판결을 받고 중의원 의원직을 상실했다.
1942년 제2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익찬정치체제협의회의 추천을 받아 재선되었다. 당선 후, 기시 노부스케가 이끄는 호국동지회에 참여했다가 일본협동당에서 활동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공직 추방을 당했다. 1947년 제1회 통일지방선거에서 아내 아카기 히사가 우에노촌장에 당선되었다. 히사는 1951년 재선되었으며, 1954년 우에노촌이 합병되어 폐지될 때까지 재임했다.
2.2. 정계 복귀와 자민당 활동 (1950년대 ~ 1970년대)
1952년 공직 추방 해제 후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자유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당선되며 정계에 복귀했다. 정계 복귀 후에는 요시다 시게루 정권 타도에 앞장섰으며, 1954년 자유당을 탈당하여 하토야마 이치로를 총재로 하는 일본민주당에 참여했다. 1955년 보수합동에 따라 자유민주당에 참여하여 기시파에 속했다.
1957년 제1차 기시 내각 (개조)에서 농림대신으로 첫 입각했다. 농림대신 취임 후 소련과의 일소어업협상에서 격렬한 협상을 벌였다. 이 어업 협상을 계기로 아카기는 훗날 일소 친선 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제2차 기시 내각에서 내각관방장관을 역임했고, 일미안보조약 개정을 둘러싼 정국에서는 1959년 제2차 기시 내각 (개조)에서 방위청 장관에 취임했다. 1960년 안보 투쟁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국회를 포위하자 기시 노부스케는 자위대의 치안 출동을 건의했지만, 아카기는 "자위대가 국민의 적이 될 수 없다"라며 반대했다.
1961년에는 자유민주당 총무회장이 되었다. 총무회장 시절, 장래 총리가 될 관방장관 오히라 마사요시에게 "법안을 각의 결정하기 전에 자유민주당 총무회에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서한을 보내 현재의 자민당 시스템을 만들었다.
1962년 기시가 파벌을 후쿠다 다케오에게 넘기려 하자 맹렬히 반발하여, 가와시마 쇼지로, 시나 에쓰사부로 등과 가와시마파(교우 클럽)를 결성하여 기시와 결별했다. 가와시마파를 계승한 시나파가 해산된 후에는 반초 정책연구소(미키→가와모토파)에 들어갔다.
1965년에는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으로 1년간 재임했다. 1971년 제3차 사토 내각 (개조)에서도 농림대신을 역임했다. 1975년 봄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훈했다.
2.3. 말년 (1970년대 후반 ~ 1990년대)
아카기 무네노리는 1976년 총선에서 낙선했다가 1979년 총선에서 정계에 복귀했다. 1990년 총선에 불출마하며 정계를 은퇴했고, 그의 지역구는 손자 아카기 노리히코가 물려받았다.
1956년부터 1990년까지 가스미가우라 고등학교장을 지냈으며, 1967년까지는 학교법인 가스미가우라 고등학교의 이사장도 겸임했다.
1993년 11월 11일에 사망했고, 향년 88세였다. 사후 정3위에 추서되었다.
3. 일본-소련 관계에서의 역할
아카기 무네노리는 농림수산대신 재직 중 일본과 소련 간의 여러 분쟁을 조정하는 데 참여했다. 1958년에는 오호츠크 해 연어 조업 문제에 대한 타협을 이끌어냈다. 1965년에는 분쟁 지역인 쿠릴 열도 남부의 어업 문제에 대한 양국 간의 타협을 협상하기 위해 소련에 파견되었다. 1971년에는 오호츠크 해에서 게 조업권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는데, 이 분쟁은 게가 기어다니기만 하는지, 헤엄칠 수도 있는지에 따라 일본 어부들의 조업 허용 여부가 결정되는 문제였다. 게가 기어다니기만 한다면 소련의 대륙붕에 속하게 되어 일본 어부들의 조업이 금지되지만, 게가 헤엄칠 수 있다면 조업이 허용되는 상황이었다. 아카기는 사토 에이사쿠 수상에 의해 다시 한번 모스크바로 파견되어 타협을 이끌어냈다.
4. 중세사 연구
아카기 무네노리는 중세 일본사 연구자였으며, 특히 10세기 무사인 平将門에 관한 여러 저서를 출판했다.
5. 가족 관계
동생 赤木 正雄일본어는 일본방송협회 전무이사를 지냈다. 손자 아카기 노리히코는 6선 중의원 의원을 지냈으며,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아카기 무네노리의 정치적 유산을 계승했다.
6. 평가
아카기 무네노리는 온건 보수 성향의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1960년 안보 투쟁 당시 자위대의 치안 출동에 반대한 것은 그의 정치적 신념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꼽힌다. 그는 보수적인 관점에서 그러한 행동이 대중적 봉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농림수산대신으로 재직하면서 아카기는 일본과 소련 간의 여러 어업 분쟁 해결에 기여했다. 1958년에는 오호츠크해 연어 조업 문제에 대한 타협을 이끌어냈으며, 1965년에는 쿠릴 열도 남부의 어업 문제에 대한 양국 간의 타협을 협상하기 위해 소련에 파견되었다. 1971년에는 오호츠크 해에서의 게 조업권을 둘러싼 분쟁 해결을 위해 다시 한번 모스크바로 파견되어 협상을 진행했다.
7. 저서
* そのご일본어 (토바서방, 1938)
* 南方圏を見る일본어 (하세 나가츠구 공저, 신일본동지회, 1941)
* パプアの農業建設 ニューギニア開発の方途일본어 (남방건설중앙연구소, 1943)
* 苦悩する農村 農業問題管見일본어 (만유사, 1953)
* 私の農民の記録일본어 (평범사, 1958)
* ラテン・アメリカの旅から일본어 (전국택식농업협동조합연합회, 1958)
* 平将門일본어 (산업경제신문사, 1960; 각와선서, 1970)
* 将門記 真福寺本評釈일본어 (산케이신문출판국, 1964)
* ふるさとの心일본어 (공동통신사개발국, 1966)
* 記者席からみた国会 十年の側面史 安保から安保まで일본어 (스즈키 타카노부 공편, 산케이신문사출판국, 1969)
* あの日あの時일본어 (문화종합출판, 1971)
* 将門私記일본어 (매일신문사, 1972)
* いまこそいう일본어 (문화종합출판, 1973)
* 初心生涯일본어 (문화종합출판, 1975)
* 赤城宗徳と平将門일본어 (니레노키카이, 1976)
* 水面下のソ連邦일본어 (독마서점, 1980)
* 日ソ関係を考える 激動の大正・昭和を生きぬいて일본어 (신시대사, 1982)
* わが平将門일본어 (룬서방, 1983)
* わが農民の記録 日本の農業と農村を考えつつ일본어 (츠쿠바서림, 1985), 소책자
8. 역대 선거 기록
| 선거명 | 선거일 | 회차 | 직책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표) | 득표율 (%) | 순위 | 당선 여부 | 비고 |
|---|---|---|---|---|---|---|---|---|---|---|
| 1937년 중의원 총선 | 1937년 | 20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3구 | 무소속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 1942년 중의원 총선 | 1942년 | 21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3구 | 대정익찬회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 1952년 중의원 총선 | 1952년 | 25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3구 | 자유당 | 44,086 | 14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53년 중의원 총선 | 1953년 | 26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3구 | 자유당 | 38,311 | 12.5 | 4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55년 중의원 총선 | 1955년 | 27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3구 | 일본민주당 | 47,112 | 14.9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58년 중의원 총선 | 1958년 | 28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3구 | 자유민주당 | 67,953 | 21.2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60년 중의원 총선 | 1960년 | 29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3구 | 자유민주당 | 58,348 | 18.1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63년 중의원 총선 | 1963년 | 30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3구 | 자유민주당 | 74,318 | 23.8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67년 중의원 총선 | 1967년 | 31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3구 | 자유민주당 | 68,647 | 21.49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69년 중의원 총선 | 1969년 | 32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3구 | 자유민주당 | 63,849 | 18.4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72년 중의원 총선 | 1972년 | 33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3구 | 자유민주당 | 65,297 | 17.58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76년 중의원 총선 | 1976년 | 34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3구 | 자유민주당 | 44,466 | 10 | 6위 | 낙선 | 중선거구제 |
| 1979년 중의원 총선 | 1979년 | 35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3구 | 자유민주당 | 92,267 | 22.09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80년 중의원 총선 | 1980년 | 36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3구 | 자유민주당 | 74,154 | 16.29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83년 중의원 총선 | 1983년 | 37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3구 | 자유민주당 | 67,977 | 14.56 | 4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86년 중의원 총선 | 1986년 | 38회 | 중의원 의원 | 이바라키현 제3구 | 자유민주당 | 62,625 | 12.62 | 5위 | 당선 | 중선거구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