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방글라데시 집단학살
1. 개요
1971년 방글라데시 집단학살은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기간 동안 파키스탄군과 그 협력자들이 저지른 대규모 인권 유린 사건을 의미한다. 이 사건은 동파키스탄의 독립 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군사 작전인 '서치라이트 작전'을 통해 시작되었으며, 벵골인, 특히 힌두교도와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조직적인 학살, 강간, 고문, 약탈이 자행되었다. 피해 규모는 30만에서 300만 명의 사망자와 수십만 명의 강간 피해자로 추정되며, 힌두교도와 비하리인에 대한 박해도 발생했다. 국제 사회는 미국의 소극적인 태도와 조지 해리슨 등의 인도적 지원으로 대응했으며, 방글라데시는 전후 진상 규명과 책임 추궁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 국제 범죄 재판소를 설립하고 관련자들을 기소했다. 파키스탄 정부는 집단학살을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있으며, 시민 사회 일각에서는 사과와 진실 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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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칭 | 한국어: 방글라데시 집단 학살, 벵골인 집단 학살 벵골어: একাত্তরের গণহত্যা벵골어 (Ēkātturēr Gôṇôhôtyā), বাঙালি গণহত্যা벵골어 (Bāṅāli Gôṇôhôtyā) |
|---|---|
| 시기 | 1971년 3월 25일 – 1971년 12월 16일 |
| 장소 | 동파키스탄 (현재의 방글라데시) |
| 목표 | 벵골인, 특히 벵골 힌두교도 |
| 동기 | 힌두교 혐오 및 반벵골 인종 차별 |
| 유형 | 대량 살인 및 집단 학살적 강간을 통한 인종 청소 |
| 희생자 | 사망자: 300,000–3,000,000명 강간 피해 여성: 200,000–400,000명 이주민: 30,000,000명 |
| 가해자 | 파키스탄 |
| 가담 세력 | 파키스탄군 라자카르 알바드르 알샴스 나가리크 샨티 위원회 자마티 이슬라미 |
| 주요 사건 | 다카 대학교 학살 샹카리파라 진지라 아키라 자티방가 뎀라 추크나가르 마디아파라 바크라바드 부룽가 |
|---|---|
| 체계적 사건 | 아가르탈라 음모 지식인 학살 강간 임시 정부 인도 난민 파키스탄 항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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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학살 부정 -
사사키 고조
일본 사회당의 핵심 인물이었던 사사키 고조는 가난한 농민 가정 출신으로 노동 운동에 참여하여 11선의 중의원 의원을 지냈으며, 일본 사회당 위원장, 중일 국교 정상화 기여, 나리타 공항 건설 반대 운동 참여 등의 활동을 했다. -
1971년 방글라데시 -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은 1971년 동파키스탄이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벌인 무력 투쟁으로, 파키스탄군의 탄압과 인도군의 개입 끝에 파키스탄군의 항복으로 종결되어 방글라데시가 독립했다. -
1971년 학살 -
존 에밀 리스트
존 에밀 리스트는 1971년 가족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미국의 살인범으로, 도피 생활 끝에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며, 그의 사건은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배경
1948년, 파키스탄 건국 직후 무하마드 알리 진나 총독은 우르두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4%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우르두어를 국어로 선언했다. 그는 동벵골 주민들이 지방 언어를 선택할 수 있다고 언급했지만, 우르두어를 국어로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공산주의자, 반역자, 국가의 적으로 규정했다. 정부가 벵골어를 제2 국어로 인정하지 않자 벵골어 운동이 일어났고, 이는 동부에서 아와미 연맹의 지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952년 다카에서 벌어진 시위는 강제로 진압되었고, 여러 시위대가 사망했다. 벵골 민족주의자들은 이들을 순교자로 간주했고, 이러한 폭력은 분리 독립 요구로 이어졌다.
2.1. 벵골어 국어화 운동
1948년, 파키스탄 건국 직후 무하마드 알리 진나 총독은 우르두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4%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우르두어를 국어로 선언했다. 그는 동벵골 주민들이 지방 언어를 선택할 수 있다고 언급했지만, 우르두어를 국어로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공산주의자, 반역자, 국가의 적으로 규정했다. 정부가 벵골어를 제2 국어로 인정하지 않자 벵골어 운동이 일어났고, 이는 동부에서 아와미 연맹의 지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952년 다카에서 벌어진 시위는 강제로 진압되었고, 여러 시위대가 사망했다. 벵골 민족주의자들은 이들을 순교자로 간주했고, 이러한 폭력은 분리 독립 요구로 이어졌다.
2.2. 1970년 보라 사이클론
3. 서치라이트 작전과 독립 전쟁
서치라이트 작전은 1971년 3월 동파키스탄에서 분리주의 벵골 민족주의 운동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파키스탄군이 계획한 군사 작전이었다. 파키스탄 정부는 3월 초 벵골인들의 비하리 폭력 행위를 근거로 Operation Searchlight를 시작했다.
1971년 3월 25일 밤, 파키스탄 군은 Operation Searchlight를 시작했다. 타임지는 티카 칸 장군을 Operation Searchlight에서의 역할로 "벵골의 학살자"라고 칭했다. 이 작전의 목표는 자간나트 홀 (다카 대학교의 비이슬람교도 학생 기숙사), 라자르바그 경찰 라인, 그리고 필크하나 (동파키스탄 소총대 본부)를 포함했다. 다카 대학교 기숙사에서 약 34명의 학생이 사망했다. 힌두교 인구가 다수인 구 다카 지역도 공격을 받았다. 미국 언론인 로버트 페인은 그날 밤 7,000명이 사망하고 3,000명이 체포되었다고 추산했다. 다카 대학교 교수들이 파키스탄 군에 의해 작전 중 살해되었다.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은 3월 25일 파키스탄 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람나 칼리 만디르는 1971년 3월 파키스탄 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원래 계획은 1971년 3월 26일에 주요 도시를 장악하고 한 달 안에 모든 반대 세력 (정치적 또는 군사적)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파키스탄 계획자들은 벵골인들의 장기적인 저항을 예상하지 못했다. Operation Searchlight의 주요 단계는 5월 중순, 벵골인들의 손에 있던 마지막 주요 도시가 함락되면서 종료되었다.
무지부르 라흐만은 체포되기 직전, 방글라데시 독립을 선언했고, 이는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의 독립 선언은 치타공의 아와미 연맹 지도자 M. A. 한난/M. A. Hannan영어에 의해 라디오로 방송되었고, 다음 날 27일에는 지아우르 라흐만의 성명이 역시 라디오로 방송되었다. 3월 26일은 방글라데시의 독립 기념일이 되었다.
3.1. 파키스탄군의 잔혹 행위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기간 동안 파키스탄군과 그 협력자들은 벵골인, 특히 힌두교도를 대상으로 광범위한 잔혹 행위를 자행했다. 파키스탄군은 조직적인 학살, 강간, 고문, 약탈을 자행했으며, 이슬람주의 정당인 자마아테 이슬라미와 이들이 조직한 민병대인 알 바드르, 알 샴스도 이에 가담했다.
파키스탄 군인들은 힌두교도를 "죽이러 왔다"고 공공연히 말했으며, 힌두교도들은 "무슬림 대중을 약화시킨다"는 혐의를 받았다. 나임 대령은 벵골 문화가 상당 부분 힌두 문화이며, "우리는 그들을 정리하여 토지를 국민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반 힌두교적 인종차별은 학살의 주요 동기 중 하나였다.
자티방가 학살, 추크나가르 학살, 상카리파라 학살 등 힌두교도에 대한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다. 미 국무부 전보에는 힌두교도가 파키스탄 육군의 구체적인 목표가 되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 의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힌두교도들은 토지와 상점을 빼앗기고 체계적으로 학살당했으며, 어떤 곳에서는 'H'라고 표시된 노란색 패치를 칠했다.
파키스탄군과 그들의 동맹은 벵골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간을 '전쟁의 전리품'으로 간주했다. 파키스탄의 이맘과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은 벵골 힌두교 여성들을 '고니모테르 말'(전쟁 전리품)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여 파키스탄군에 의한 강간을 지지했다. 9개월간의 분쟁 기간 동안 20만 명에서 40만 명 사이의 여성이 강간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파키스탄군은 여성을 성노예로 삼았고, "강간 캠프"를 운영했다는 증언도 있다.
하무두르 라흐만 위원회는 파키스탄 정부가 설치한 위원회로, 파키스탄 군대가 광범위한 방화, 살인, 지식인 및 전문가 살해, 벵골 군 장교 및 병사 살해, 벵골 민간 공무원, 사업가 및 산업가 살해, 수많은 벵골 여성 강간, 벵골 힌두교 소수 민족 구성원 고의적 살해, 집단 매장지 조성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고 언급했다.
3.2. 지식인 학살
파키스탄군과 그 협력자들은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기간 동안, 특히 전쟁 종전 직전에 벵골인 지식인들을 체계적으로 학살했다. 이는 동파키스탄의 미래를 짊어질 지적 능력을 말살하고, 서파키스탄에 대한 종속을 영구화하려는 의도였다.
전쟁 초기 다카 대학교의 많은 교수들이 살해되었고, 전쟁 마지막 며칠 동안에는 교수, 언론인, 의사, 예술가, 엔지니어, 작가 등 더 많은 지식인들이 파키스탄 군과 라자카르 민병대에 의해 다카에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집단 처형되었다. 특히 라예르바자르와 미르푸르에서 이러한 학살이 많이 발생했다. 파키스탄 군과 그 준군사 조직인 알 바드르 및 알 샴스 부대는 의사, 교사, 시인 및 학자들의 명단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9개월간의 전쟁 기간 동안 파키스탄 군은 지역 협력자들의 도움을 받아 약 991명의 교사, 13명의 언론인, 49명의 의사, 42명의 변호사, 16명의 작가, 예술가 및 엔지니어를 체계적으로 처형했다. 12월 16일 전쟁이 공식적으로 종료된 후에도 살해 사건이 보고되었으며, 저명한 영화 제작자 자히르 라이한은 1972년 1월 30일 미르푸르에서 무장 비하리족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방글라데시는 살해된 지식인들을 기리기 위해 12월 14일을 샤히드 부디지비 디보쉬("순교한 지식인의 날")로 기념한다. 학살된 주요 지식인으로는 고빈다 찬드라 데브 (철학), 무니에르 초우두리 (벵골 문학), 무파잘 하이더 초우두리 (벵골 문학), 안와르 파샤 (벵골 문학), 아불 카이르 박사 (역사), 조티르모이 구하타쿠르타 (영문학), 기야수딘 아흐메드, 시라줄 하크 칸, 파이줄 마히, 산토시 찬드라 바타차르야 박사 및 사이둘 하산 (물리학)등 다카 대학교 교수들과, 모하메드 파즐 라비 박사 (심장 전문의), AFM 알림 초우두리 박사 (안과 전문의), 샤히둘라 카이서 (언론인), 니잠딘 아흐메드 (언론인), 셀리나 파르빈 (언론인), 알타프 마흐무드 (작사가 겸 음악가), 디렌드라나트 다타 (정치가), 자히르 라이한 (소설가, 언론인, 영화 감독) , 라나다프라사드 사하 (자선가) 등이 있다.
3.3. 인도 개입과 방글라데시 독립
4. 피해 규모
1971년 방글라데시 집단학살의 피해 규모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다양한 추정치가 존재한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300만 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으나, 이 수치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독립적인 연구자들은 사망자 수를 30만~50만 명으로 추정하기도 하며, 300만 명으로 보는 견해도 여전히 존재한다. 파키스탄 정부의 공식 조사에서는 민간인 사상자가 26,000명으로 나타났다.
사르밀라 보스는 사망자 수를 5만 명에서 10만 명 사이로 추정했지만, 그녀의 연구는 여러 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2008년 영국 의학 저널에 발표된 연구는 분쟁으로 인해 12만 5천 명에서 50만 5천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추정했다. 미국의 정치학자 루돌프 럼멜은 약 150만 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했다.
사망자 중 다수는 라자카르, 알-샴스, 알-바드르 등 파키스탄 군대에 협력한 준군사 조직의 희생자였다. 방글라데시에는 많은 집단 무덤이 있으며, 1999년 다카의 미르푸르 타나 지역 모스크 근처 우물에서 발견된 무덤과 같이 추가적인 무덤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중 발생한 강간 피해 여성의 수는 20만~4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로 인해 수천 명의 '전쟁 베이비'가 태어났다. 파키스탄군과 그 동맹군은 벵골 여성들을 성 노예로 삼았고, 많은 여성들이 임신했다.
힌두교도들은 파키스탄 군대의 주요 표적이 되었으며, 자티방가 학살, 추크나가르 학살, 상카리파라 학살 등에서 대규모 학살이 발생했다. 인도로 피난 간 벵골 난민의 60% 이상이 힌두교도였다.
수백만 명의 난민이 인도로 피난했고, 국내 실향민도 수천만 명에 달했다.
5. 비하르인 박해
1947년 인도 분할과 파키스탄 건국 당시, 분할 과정에서 발생한 폭력을 피해 많은 비하리 무슬림들이 인도로부터 새로 독립한 동파키스탄으로 이주했다. 이 우르두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벵골어 국어화 운동과 그 이후의 민족주의 운동에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서파키스탄 통치자들에게 충성을 유지했기 때문에 지역 민족주의 벵골인들 사이에 반비하리 감정을 유발했기 때문이다. 1971년 3월 1일 야히아 칸이 국민의회 소집을 연기한 후, 동파키스탄의 반대자들은 서파키스탄을 지지했던 민족 비하리 공동체를 표적으로 삼기 시작했다.
1971년 3월 초, 치타공에서 벵골 폭도들의 폭동으로 300명의 비하리인이 학살되었다. 파키스탄 정부는 악명 높은 작전인 '검색 작전'을 시작하면서 3월 25일 동파키스탄에 군대를 배치하는 것을 '비하리 학살'로 정당화했다. 1971년 전쟁이 발발하자 비하리인들은 파키스탄 군대를 지지했다. 그들 중 일부는 라자카르 및 알-샴스 민병대에 가담하여 벵골인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한 보복으로 벵골인 동포들을 박해하고 학살하는 데 참여했는데, 여기에는 벵골 재산의 광범위한 약탈과 다른 범죄 행위 방조 등이 포함되었다.
위험에 처한 소수자 프로젝트에 따르면, 벵골인에 의해 살해된 비하리인의 수는 약 1,000명으로 보고되었다. 루돌프 럼멜은 150,000명으로 추산한다. 국제적 추정치는 다양하며, 일부는 사망자를 수천 명으로 추정했다. 비하리 대표들은 500,000명의 비하리인이 살해되었다고 주장한다.
전쟁 후 방글라데시 정부는 비하리 인구의 재산을 몰수했다. 1971년 12월 16일 파키스탄 군대의 항복 이후 발생한 비하리인과 혐의자들에 대한 공격에 대한 많은 보고가 있다. 1971년 12월 18일 사건에서, 외국 언론인들이 촬영하고 참석한 가운데, 압둘 카데르 시디퀴는 그를 따라 명명된 카데리아 바히니 게릴라와 함께 라자카르 준군사 조직에 속한 혐의로 포로로 잡힌 그룹을 총검으로 찌르고 총살했다.
6. 국제 사회의 반응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파키스탄을 냉전 시대의 동맹으로 여겨 파키스탄의 행위를 비난하는 것을 거부했다. 백악관 녹음에는 "불신을 품고 있는 국무부가 벵골인 살해와 관련하여 야히야 대통령을 단독으로 비난하지 않도록 대통령이 확인하고 있는 것 같다"라는 내용이 남아 있다. 닉슨과 중국은 동파키스탄에서 발생한 집단 학살에 대한 보고를 억압하려 했다. 닉슨은 또한 미국인들이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에 의존했다. "비아프라는 일부 가톨릭교도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지만, 나는 파키스탄보다 비아프라가 사람들의 마음을 더 흔들었다고 생각한다. 파키스탄 건은 그냥 갈색 이슬람교도 녀석들일 뿐이니까"라고 발언했다.
미국 정부는 의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으로의 무기 수송을 이란, 터키, 요르단에서 비밀리에 장려하고, 그 비용을 해당 국가에 변제했다. 즉, 파키스탄에 대한 군사적인 지원도 행했다.
미국 정부의 기밀 해제 문서 모음은 주로 워싱턴 D.C.의 미국 관리와 다카 및 인도 주재 대사관 및 USIS 센터 간의 통신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미국 관리들이 당시 이러한 대량 학살을 알고 있었고, 실제로 "피의 전보"에서 "집단 학살" 및 "선별적 집단 학살"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헨리 키신저의 조언을 받은 닉슨 대통령은 파키스탄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이 비밀 내부 조언을 축소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그가 소련과의 인도의 우정을 우려했고, 파키스탄을 지지하는 중국과의 더 긴밀한 관계를 모색했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저서 헨리 키신저 재판에서 키신저가 벵골인의 독립 열망을 훼손하려는 노력을 자세히 설명했다. 히친스는 집단 학살이라는 용어가 그 투쟁의 결과를 설명하는 데 적합하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당시 진행 중이던 만행을 집단 학살로 비난한 다른 사람들을 훼손하려는 헨리 키신저의 노력도 지적했다. 히친스는 "키신저는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을 포함한 수천 명의 사람들을 살해한 책임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몇몇 미국 정치인들이 발언했다. 상원 의원 테드 케네디는 파키스탄이 집단 학살을 저질렀다고 비난하고 파키스탄에 대한 미국의 군사 및 경제 원조를 완전히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방글라데시 국내에서 벌어진 대량 학살 상황은 파키스탄 출신 저널리스트 앤서니 마스카레냐스/Anthony Mascarenhas영어가 1971년 6월 13일 런던의 『선데이 타임스』지에 "제노사이드"라는 제목으로 게재한 기사를 통해 처음으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잉글랜드의 록 뮤지션이자 비틀즈의 전 멤버였던 조지 해리슨은, 시타르 연주의 스승이자 벵골 지방 출신인 브라만 출신인 라비 샹카르로부터 동파키스탄 난민의 참상을 듣고 충격을 받았으며, 미국 정부의 태도와 서구 주류 미디어가 마스카레냐스의 보고서를 접수했음에도 사실을 전부 보도하는 데 소극적인 것에 우려를 표했다. 그는 샹카르와 공동으로 자선 콘서트를 단기간에 기획하여, 콘서트를 위해 "방글라 데시"라는 곡을 작사, 작곡하여 7월 28일에 싱글을 발표했다. 그리고 8월 1일 오후 2시 30분과 8시,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방글라데시 난민 구제 콘서트』가 개최되어, 1부에는 샹카르를 비롯한 인도 음악 뮤지션, 2부에는 해리슨, 같은 비틀즈의 전 멤버였던 링고 스타, 에릭 클랩튼, 밥 딜런 등 유명 록 아티스트가 출연하여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콘서트는 대규모 자선 콘서트의 모델 케이스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움직임 역시, 파키스탄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을 모으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6.1. 한국의 입장 변화
1971년 당시 한국 정부는 냉전 시대 서방 진영의 일원으로서 파키스탄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는 인권과 민주주의 가치를 중시하게 되었고, 방글라데시 집단 학살에 대한 인식도 변화했다.
당시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파키스탄을 냉전 시대의 동맹으로 여겨 파키스탄의 행위를 비난하는 것을 거부했다. 미국 정부는 의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으로의 무기 수송을 이란, 터키, 요르단에서 비밀리에 장려하고, 그 비용을 해당 국가에 변제했다. 미국 정부의 기밀 해제 문서에 따르면, 미국 관리들은 "피의 전보"에서 "집단 학살" 및 "선별적 집단 학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당시 이러한 대량 학살을 알고 있었다. 헨리 키신저의 조언을 받은 닉슨 대통령은 소련과의 인도의 우정을 우려했고, 파키스탄을 지지하는 중국과의 더 긴밀한 관계를 모색했기 때문에 파키스탄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이 비밀 내부 조언을 축소하기로 결정했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저서 헨리 키신저 재판에서 키신저가 벵골인의 독립 열망을 훼손하려는 노력을 자세히 설명했다. 히친스는 "키신저는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을 포함한 수천 명의 사람들을 살해한 책임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몇몇 미국 정치인들이 발언했는데, 상원 의원 테드 케네디는 파키스탄이 집단 학살을 저질렀다고 비난하고 파키스탄에 대한 미국의 군사 및 경제 원조를 완전히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현대 한국의 관점에서 이 사건은 명백한 반인륜적 범죄이며, 피해자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진실 규명과 정의 실현을 위한 노력을 지지해야 한다.
7. 전후 진상 규명 및 책임 추궁 노력
인도 육군은 1971년 12월 22일부터 다카에서 지식인 학살과 관련된 파키스탄 육군 고위 장교들을 전범으로 재판에 회부하기 위한 충분한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조사를 진행했다. 이들은 당시 지휘관 직책에 있었거나 군사 심사 위원회와 관련된 장교들의 명단을 작성했다. 종전 직후인 1971년 12월 24일, 방글라데시 내무부 장관 아불 하스낫 무함마드 카마루자만은 "전쟁 범죄자는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살인과 강간에 연루된 파키스탄 군인은 법정에서 심판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과 인디라 간디의 회담 이후 발표된 공동 성명에서 인도 정부는 전쟁 범죄자를 법으로 처벌하는 데 필요한 모든 지원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1972년 2월, 방글라데시 정부는 아미르 압둘라 칸 니아지 장군을 포함한 4명의 장군 등 파키스탄 고위 장교와 관료 100명을 집단 학살 혐의로 재판에 회부할 계획을 발표했다.
전쟁 후, 인도군은 92,000명의 파키스탄 포로를 구금했으며, 이 중 195명은 전쟁 범죄 혐의를 받았다. 1974년 4월,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인도 간의 3자 델리 협정에 따라, 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를 인정하는 대가로 이들 195명은 모두 석방되어 파키스탄으로 송환되었다. 방글라데시가 이들의 인도를 허용한 배경에는 파키스탄이 이들에 대한 재판을 진행할 것을 시사했고, 파키스탄에 억류된 40만 명의 벵골인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2년, 파키스탄군에 협력하고 지원한 방글라데시인들을 재판에 회부하기 위해 "방글라데시 협력자(특별 재판소)령"이 공포되었다. 이 법령에 따라 재판에 회부된 사람의 수에 대해서는 10,000명에서 40,000명까지 다양한 보고가 있다. 당시 이 재판은 정치적 보복을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여 지역 및 외부 관찰자들에게 문제가 되었다. 재판을 참관했던 영국 하원 의원 R. 맥레넌은 "피고인석의 피고인들에 비해, 마찬가지로 파키스탄 정부에 봉사했지만 진정한 충성심은 추방된 방글라데시 정부에 있었다고 맹목적으로 맹세하도록 (88세의 변호인에 의해) 유도되는, 혼란스러운 검찰 측 증인들이 훨씬 더 불쌍해 보였다"고 말했다. 1973년 5월, 파키스탄 정부는 방글라데시가 전쟁 포로를 집단 학살 혐의로 재판하려는 시도에 대응하여 파키스탄에 갇힌 벵골인 공무원과 그 가족들을 구금했다. 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가 "집단 학살"이라는 용어를 적용하는 것에 대해 국제사법재판소에 5번이나 이의를 제기했지만 실패했다.
1973년 11월 30일, 방글라데시 정부는 일반 사면령을 발표하여 강간, 살인, 살인 미수 또는 방화로 처벌받거나 기소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적용했다. 1972년 협력자령은 1975년에 폐지되었다.
1973년, 국제범죄(재판소)법은 국적에 관계없이 평화에 대한 범죄, 반인도적 범죄, 전쟁 범죄, "1949년 제네바 협약에 명시된 무력 충돌에 적용되는 인도주의 규칙 위반" 및 "국제법에 따른 기타 범죄"를 저지른 혐의를 받는 모든 사람을 기소하기 위해 공포되었다. 1973년 일반 사면령으로 석방되지 않은 1972년 협력자령에 따라 구금된 사람들은 이 법에 따라 재판을 받게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재판은 열리지 않았고, 1975년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 암살 이후 이 법과 관련된 모든 활동이 중단되었다.
1971년 전쟁 당시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는 사람들이 방글라데시 외에서 형사 수사 또는 재판을 받은 사례는 알려진 바 없다. 1995년에 방영된 채널 4 다큐멘터리 영화에 따르면,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는 영국 거주 개인을 조사하기 위한 초기 단계가 경찰청에 의해 진행되었지만, 기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991년 12월 29일, 1971년 전쟁에서 파키스탄과 협력한 혐의를 받았던 굴람 아잠이 자마트-에-이슬라미의 의장(아미르)이 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이 사건은 작가이자 정치 운동가인 자하나라 이맘의 제안에 따라 '1971년 살인자 및 협력자 저항을 위한 국민 위원회' 창설을 촉구했다. 모의 인민 법정이 구성되었고, 1992년 3월 26일, 광범위한 비판을 받은 재판에서 굴람 아잠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그는 결국 2014년 감옥에서 사망했다.
2006년 9월 20일, 파키스탄군과 그 협력자들의 1971년 당시 집단학살, 전쟁 범죄,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법원에 소송이 제기되었다. 원고인 솔레이만 씨를 대리한 레이몬드 솔레이만 & 어소시에이츠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언론 성명을 발표했다.
2007년 5월 21일, 신청인의 요청에 따라 2006년 9월 20일에 제출된 신청을 중단할 수 있는 허가가 신청인에게 부여되었다.
2009년 7월 30일, 방글라데시 법무부 장관은 1973년 국제범죄(재판소)법에 따라 파키스탄인은 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결정은 1971년에 저지른 대부분의 범죄에 궁극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일반적으로 간주되는 파키스탄 군 사령관에게 사실상 면책특권을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제 법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국제 범죄 재판소(ICT)는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당시 1971년에 파키스탄군과 그 지역 협력자인 라자카르, 알 바드르, 알 샴스에 의해 저질러진 집단 학살 혐의자들을 조사하고 기소하기 위해 2009년에 방글라데시에 설립된 전쟁 범죄 재판소이다. 2008년 총선에서 아와미 연맹(AL)은 전쟁 범죄자들을 재판할 것을 약속했다.
정부는 2008년 12월 총선에서 아와미 연맹이 의회에서 3분의 2 이상의 과반수를 얻어 승리한 후 재판소를 설립했다. 증거를 조사하고 찾기 위한 임무를 맡은 전쟁 범죄 사실 조사 위원회는 2008년에 보고서를 완료하여 1600명의 용의자를 식별했다. ICT가 설립되기 전에, 유엔 개발 계획은 2009년에 재판소 설립에 대한 지원을 제공했다. 2009년 의회는 이러한 재판소를 권한 부여하는 1973년 법을 개정하여 업데이트했다.
수년에 걸쳐, 여성들을 포함한 수만 명의 대부분 젊은 시위대들이 전쟁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에게 사형을 요구했다. 이 입장을 지지하는 비폭력 시위가 전국 다른 도시에서도 발생했으며, 방글라데시는 재판을 면밀히 주시했다. 첫 번째 기소는 2010년에 발부되었다.
2012년까지, 국가에서 가장 큰 이슬람 정당인 자마아테 이슬라미의 지도자 9명과 방글라데시 국민당 지도자 2명이 전쟁 범죄 용의자로 기소되었다. 자마아테 이슬라미의 지도자 3명이 처음으로 재판을 받았으며, 각각 여러 건의 전쟁 범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처음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아불 칼람 아자드였으며, 그는 국외로 도주했기 때문에 부재 중 재판을 받았고, 2013년 1월 사형을 선고받았다.
인권 단체와 다양한 정치 단체가 처음에는 재판소 설립을 지지했지만, 그 이후로는 공정성과 투명성 문제, 그리고 피고인을 대변하는 변호사와 증인에 대한 괴롭힘 보고에 대해 비판해 왔다. 자마아테 이슬라미 지지자들과 그 학생 단체인 이슬라미 찻라 시비르는 2012년 12월 4일에 재판에 항의하여 전국적으로 총파업을 벌였다. 시위 지도자들은 재판소를 영구적으로 폐지하고 지도자들을 즉시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가장 유명한 판결 중 하나는 2013년 2월에 유죄 판결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은 자마아테 이슬라미의 사무 부총장 압둘 카데르 몰라에 대한 것이었고, 이는 대규모 샤바그 시위로 이어졌다. 정부는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결국 대법원에 판결에 대해 항소했고, 대법원은 몰라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압둘 카데르 몰라는 2013년 12월 12일 목요일에 전쟁 재판 청문의 정당성에 대한 논란 속에 처형되었으며, 미국, 영국, 터키, 유엔 등 여러 국가로부터 광범위한 비판을 받았다. 혼란스러운 시기가 뒤따랐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형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델와르 호세인 사예디는 대량 살인, 강간, 방화, 약탈 및 힌두교도의 이슬람교 강제 개종에 대한 연루로 전쟁 범죄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교수형을 선고받았지만; 그의 형량은 나중에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모티우르 라흐만 니자미는 16건의 집단 학살, 강간 및 고문 혐의로 2015년 5월 11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살라후딘 카데르 초우두리와 알리 아흐산 모하마드 무자히드는 집단 학살과 강간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2015년 11월 22일 자정 직후 다카 중앙 교도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2016년 12월 3일, 방글라데시 해방주의자들을 고문하고 살해한 혐의로 인류에 반하는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재벌 미르 카셈 알리가 카심푸르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2016년, 디지털 보안법 초안이 최종 확정되어 내각 승인을 위해 제출되었다. 이 법은 해방 전쟁에 대한 모든 선전을 기소 가능하고 보석 불허로 선언할 것을 제안했다.
7.1. 파키스탄의 입장
파키스탄 정부는 1971년 방글라데시(당시 동파키스탄)에서 발생한 집단학살을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파키스탄 언론은 집단학살을 보도한 언론인들을 "적의 첩자"로 비난하며, 잔혹 행위의 규모를 축소하려 하고 있다.
1974년 델리 협정에서 방글라데시는 파키스탄에 전쟁 범죄, 반인도적 범죄 및 집단학살 혐의로 군 장교 195명을 기소할 것을 요구했으나, 파키스탄은 "저질러졌을 수도 있는 모든 범죄에 대해 깊이 유감"이라고 답변했을 뿐, 가해자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줄피카르 알리 부토와 페르베즈 무샤라프 등 파키스탄 지도자들은 1971년의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지만, 집단학살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2009년 방글라데시가 설립한 국제 범죄 재판소는 파키스탄 정치 및 군사계에서 강력한 비판을 받아왔다. 2015년 나와즈 샤리프 총리 정부는 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의 잔학 행위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집단학살 부인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하무두르 라흐만 위원회(Hamoodur Rahman Commission)는 파키스탄 정부가 전쟁 이후 설치한 위원회로, 파키스탄 군대가 저지른 광범위한 방화, 살인, 강간, 집단 매장 등의 만행을 기록했다. 특히 코밀라 주둔지 학살(Comilla Cantonment massacre)에서는 벵골 장교와 병사 900여명이 살해되었다. 위원회 보고서는 오랫동안 은폐되었으나 2000년에 유출되었고, 낮은 사망자 수는 비판을 받았다. 1971년 전쟁에 참전했던 일부 파키스탄 군 장교들은 자국 군대의 만행을 인정하기도 했다.
하미드 미르, 후세인 하카니, 아스마 자한기르, 아스가르 칸, 살리마 하슈미, 무하마드 알리 에산 등 파키스탄 시민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방글라데시에 대한 사과와 집단학살 인정을 요구하고 있으며, 유엔의 독립적인 조사를 촉구하기도 한다. 파키스탄 역사가 야쿠브 칸 방가시는 파키스탄 군대의 행동을 "광란"이라고 묘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