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4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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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84부대는 1968년 1·21 사태에 대한 보복 작전의 일환으로, 북한의 김일성 주석 암살을 목표로 창설된 공군 소속의 특수 부대이다. 31명의 민간인으로 구성되어 실미도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으나, 1971년 작전 취소 후 가혹한 처우에 반발하여 부대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1971년 8월 23일, 교관 등을 살해하고 버스를 탈취하여 서울로 향하던 중 군경과 교전 끝에 대부분 자폭하고, 생존자들은 사형되었다. 이후 정부는 이 사건을 은폐해오다 2003년 영화 《실미도》 개봉으로 알려졌으며, 유족들은 진상 규명과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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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4부대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
부대 정보 | |
부대 명칭 | 2325부대 209파견대 |
별칭 | 684부대, 실미도 부대 |
소속 | 대한민국 공군 |
종류 | 특수부대, 북파공작원 |
역할 | 북한 침투, 김일성 암살 |
규모 | 31명 |
주둔지 | 실미도 |
지휘 체계 | 제20특무전대 |
창설 및 해체 | 1968년 4월 1일 – 1971년 8월 23일 |
임무 및 활동 | |
주요 임무 | 김일성 암살 |
작전 종류 | 블랙 오퍼레이션, 폭탄 처리, 근접 전투, 직접 행동, HUMINT, 비정규전, 장거리 침투, 인간 사냥, 특수 작전, 특수 정찰, 추적 |
2. 창설 배경
1968년 1월 2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조선인민군 124부대 소속 김신조 등 31명이 대한민국에 침투하여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시도한 1·21사태(청와대 습격 사건)가 발생했다.[13]
1968년 4월, 1·21사태에 대한 보복으로 중앙정보부의 지시에 따라 공군 2325부대 산하 209파견대가 창설되었다. 이 부대는 '684부대'라는 위장명으로 불렸으며, 청와대를 기습한 북한 특수부대원 31명과 같은 수의 인원으로 구성되었다.[13] 684부대는 김일성 암살을 목표로 조선인민군식 실전 훈련을 받았다.
1969년 닉슨 독트린 발표 이후, 대한민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비롯한 공산주의에 맞서 스스로 안보를 지켜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서 대북 작전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13] 1971년 국제적인 긴장 완화와 남북적십자회담 등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684부대의 작전 자체는 불확실해졌다.[13]
이에 대한 보복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정보부(KCIA)에 보복 작전을 지시했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각 군에 보복 부대 창설을 지시했고, 공군 2325부대 209파견대로 684부대가 창설되었다.[13] 대한민국 국방부에 따르면, '684부대'는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공군 제2325부대의 파견대였으며, 부대 창설일(1968년 4월)에서 명칭을 따왔다.[3]
684부대는 청와대 습격 사건을 일으킨 북한 124부대와 동일하게 31명으로 구성되었으며, 북한 김일성 주석 암살 임무를 맡았다.[8]
3. 부대 구성 및 훈련
684부대원은 주로 민간인, 경범죄자, 실업 청년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실미도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3] 훈련 과정에서 7명이 사망하였다.[14] 1969년 10월, 선발대가 백령도로 파견되어 북파 침투를 준비했으나, 중앙정보부장이 김형욱에서 김계원으로 교체되고, 1969년 7월 25일 닉슨 독트린 발표로 인해 국제 정세가 변화하면서 복귀 명령을 받았다.[14]
훈련 기간은 당초 약속된 6개월에서 무기한 연장되었고, 급식 등 처우는 매우 열악해졌다.[14]
4. 실미도 사건 (1971.8.23)
당초 훈련 기간은 6개월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무기한 연장되었고, 급식마저 개밥이나 돼지밥 수준으로 열악해지는 등 684부대원들의 처우는 나빠졌다.[14] 가혹한 훈련, 장기간 대기, 열악한 처우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 1971년 8월 23일 부대원 24명이 반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13]
4. 1. 사건 당시 상황
1971년 8월 23일, 가혹한 훈련과 장기간의 기다림에 불만을 품은 684부대원들은 교관 및 감시병 18명을 살해하고 인천에서 시내버스(현대 R-192)를 탈취하여 청와대로 향했다.[13] 서울로 향하던 중 버스 타이어가 터져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수원-인천간 태화상운 시외버스(신진 FB100L)를 다시 탈취하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대방동까지 진입하였다. 이곳에서 군의 방어에 막히자 부대원 거의 대부분이 유한양행 앞에서 수류탄으로 자폭하였고, 생존자 4명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1972년 3월 10일 사형이 집행되었다.[13]
4. 2. 피해 규모
684부대원 20명이 사망했고, 4명은 생포되어 군사 재판 후 처형되었다.[4] 경비병은 18명이 사망했다.[4] 민간인 피해는 언론 보도에 따라 다르다. 당시 ''뉴욕 타임스''는 684부대원들이 서울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보도했지만,[5] 정확한 피해 규모는 불명확하다.
5. 사건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대까지 684부대에 대한 모든 정보를 은폐했다.[6] 1971년 8월 23일 684부대원들이 일으킨 무장 탈영 및 민간인 살상 사건은 오랫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2003년 영화 <실미도>가 개봉되면서 사건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6] 2006년 정부는 공식 보고서를 발표하여 사건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6]
5. 1. 진상 규명 노력
2003년 영화 실미도가 개봉되면서 684부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졌고, 2005년 노무현 정부는 실미도 사건에 대한 공식 조사를 실시하여 사실 관계를 인정했다.[9][11]2009년 684부대원 21명의 유족들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2010년 5월 19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정부가 유족에게 2.73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684부대원들이 훈련의 위험성을 알지 못했고 가혹한 훈련이 기본적인 인권을 침해했으며, 정부가 2006년까지 사망 사실을 유족에게 알리지 않아 정신적 고통을 야기했다고 판결했다.[6][11]
문재인 정부는 2020년 법 개정을 통해 과거사 재조사를 가능하게 했고, 2021년 5월 27일부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와 국방부의 협력 하에 재조사가 시작되었다.[9] 유족들은 진상 규명, 명예 회복, 비밀리에 매장된 유골 수집을 요구하고 있다.[9]
6. 유사 사건 및 북파 공작원
대한민국 정부 자료에 따르면, 1990년대 초까지 약 1만 3,000명이 북파 공작원으로 훈련을 받았다. 1970년대 초까지 임무에 투입된 7,000명 이상이 사망 또는 행방불명되었고, 이 중 수백 명은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12]
참조
[1]
웹사이트
How a plot to kill Kim Il Sung ended in mutiny and murder
https://edition.cnn.[...]
2018-02-18
[2]
뉴스
<군과거사 규명대상 쟁점.전망>-2(끝)
http://media.daum.ne[...]
[3]
뉴스
South Korean Movie Unlocks Door on a Once-Secret Past
https://www.nytimes.[...]
2012-03-10
[4]
웹사이트
Survivors recall tragic Silmido uprising
http://koreaherald.c[...]
2010-04-06
[5]
뉴스
34 dead as Korean prisoners "invade" Seoul
https://www.nytimes.[...]
1971-08-24
[6]
웹사이트
Silmido agents' families get $217,000
http://joongangdaily[...]
Joong Ang Daily
2012-03-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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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과거사 규명대상 쟁점.전망>-2(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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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 Korean Movie Unlocks Door on a Once-Secret P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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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 York Times
2012-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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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シルミド事件の再調査着手へ 50年目の真相究明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21-05-25
[10]
뉴스
“歴史から消された”対北朝鮮特殊部隊
https://www3.nhk.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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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Silmido agents' families get $217,000
http://joongangdaily[...]
Joong Ang Daily
2012-03-10
[12]
뉴스
北朝鮮潜入の元韓国工作員、自転車修理で「暗い過去を払拭」
https://jp.reuters.c[...]
Reuters
2011-09-27
[13]
뉴스
주석궁 대신 청와대로
https://news.v.daum.[...]
한겨레21
2003-12-03
[14]
뉴스
실미도에서 1년반…지옥훈련 뒤 北 보복위해 백령도 간 그들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2020-09-26
[15]
뉴스
"[기고] 故 김종학 PD, ‘모래시계’ 그 후"
http://www.pdjournal[...]
PD저널
2018-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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