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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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무현은 1946년 경상남도 김해에서 태어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성장했다.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로 활동하며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김영삼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하여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퇴임 후 고향 봉하 마을로 돌아갔으나, 2009년 검찰 수사 과정에서 자살했다.

노무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한글 이름노무현
한자 이름盧武鉉
로마자 표기No Muhyeon
출생일1946년 9월 1일
출생지미 군정 조선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
사망일2009년 5월 23일
사망지대한민국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범어리 양산부산대학교병원
사망 원인자살 (투신 자살)
배우자권양숙
자녀2명
노무현
본관광주(光州)
종교불교 (민주당 연등회 부회장 역임, 천주교 (세례명: 유스토)불교신문 → 무신론 (대통령 공식 프로필)뉴스 파워 → 불교경향신문
부모노판석(부), 이순례(모)
자녀아들 노건호, 딸 노정연
친족노영현(장형), 노건평 (차형), 의질(조카사위) 연철호
복무 기간1968년–1971년
계급상병
복무대한민국 육군
근무제12사단 을지부대
정치 경력
정당무소속 (2007–2009)
기타 정당통일민주당 (1987–1990)
민주당 (1990–1991)
민주당 (1991–1995)
새정치국민회의 (1995–2000)
민주당 (2000–2003)
우리당 (2003–2007)
대통령 재임 시작2003년 2월 25일
대통령 재임 종료2008년 2월 24일2004년 3월 12일부터 5월 14일까지 탄핵 소추로 권한 정지
국무총리고건
이해찬
한명숙
한덕수
대통령 이전 직위김대중
대통령 다음 직위이명박
해양수산부 장관 재임 시작2000년 8월 7일
해양수산부 장관 재임 종료2001년 3월 25일
해양수산부 장관 이전 직위이항규
해양수산부 장관 다음 직위정우택
국회의원 재임 시작1998년 7월 22일
국회의원 재임 종료2000년 5월 29일
국회의원 이전 직위이명박
국회의원 다음 직위정인봉
선거구종로구
국회의원 재임 시작1988년 5월 30일
국회의원 재임 종료1992년 5월 29일
국회의원 이전 직위박찬종
김정길
국회의원 다음 직위허삼수
선거구부산 동구
학력
학교부산상업고등학교 졸업
기타 정보
별명노짱, 노공이산
링크사람사는세상
훈장
훈장무궁화대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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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통령이 되기 이전

1988년 김영삼의 초청으로 통일민주당에 입당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같은 해 부산 동구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국정감사에서 정치 부패 의혹에 대한 정부의 답변을 추궁하며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국회 노동위원회에서 이해찬, 이상수 의원 등과 함께 '노동위원회의 3총사'로 불렸으며, 제5공화국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장세동, 안현태, 이종원, 정주영 등을 상대로 증인 신문에서 차분하고 논리적인 질의와 치밀한 추궁으로 '청문회 스타'가 되었다.

1990년 김영삼이 민주정의당과 민주자유당을 창당했을 때, 노무현은 한나라당의 전신인 이 당에 참여하지 않고 "민주화 운동에 대한 배신"이라고 비판했다.

1991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주간조선에 노무현이 막대한 재산을 은닉했다는 기사가 게재되었으나, 명예훼손 소송에서 승소했다. 그러나 선거에서는 패배했다.

1992년 국회의원 선거와 1995년 부산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96년 서울 종로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이명박에게 패배했다. 이부영, 이철, 김원기, 김정길 등과 새로운 정당을 창당했으나, 대선을 앞두고 신한국당자유민주연합이 합당하자 김대중과의 화해를 통해 "군사정권과 그 정치적 후계자들을 심판하겠다"고 결정했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김대중과 화해했고, 이명박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사퇴하면서 열린 보궐선거에서 승리하여 1998년 국회의원에 복귀했다.

2000년 부산 북구·강서구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한국 정치의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운동을 펼쳤으나 낙선했다. 그러나 이 패배는 노사모 결성의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 김대중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2002년 당내 대선 후보 경선에서 초반 이인제 후보에게 뒤졌으나, 울산에서의 인상적인 연설 등으로 지지율을 높여갔다.

2.1. 생애 초반

노무현은 1946년 9월 1일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가난한 농부 노판석과 이순례 사이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광주 노씨 매죽와공파 31세손으로, 6대조부 노벽수가 1780년경 경상도 함양에서 김해 장유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1953년 진영대창초등학교에 입학하여 학업 성적이 우수했으나 가난으로 결석이 잦았다. 6학년 때 담임교사의 권유로 전교 학생회장을 맡았다. 1959년 진영중학교에 진학했으나, 입학금이 없어 외상으로 입학했다. 1학년 말 이승만 대통령 생일 기념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 백지동맹을 주도하다 정학당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1년간 휴학 후 부일장학회 장학금으로 복학하여 1963년 졸업했다. 1966년 부산상업고등학교(현 개성고등학교)를 졸업했다.

2.2. 청년기

1968년 육군에 입대하여 제12보병사단 을지부대에서 상병으로 만기 전역하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농업협동조합 입사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어망 제조업체에 취직하였으나 저임금과 열악한 근무 환경에 실망하여 퇴사했다. 이후 막노동과 사법시험 공부를 병행하였다. 1972년 권양숙과 결혼하였고, 1973년 아들 건호, 1975년 딸 정연을 낳았다.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고졸 출신 유일한 합격자였다. 19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었으나, 5개월 만에 사직하였다.

2.3. 인권 변호사 시절

1978년 5월, 노무현은 판사직을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하여 세무·회계 전문 변호사로 명성을 쌓았다. 그는 주로 조세 및 회계 사건을 맡아 높은 수임료를 받았으며, 동료 변호사들과 마찬가지로 지역 경제인들과 교류하며 요트를 즐기는 등 여유로운 생활을 했다.

그러나 1981년, 민청학련 사건 변호로 유명했던 김광일 변호사의 권유로 부림 사건 변호를 맡게 되면서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노무현은 훗날 이 사건이 자신의 인생을 바꾸었다고 회고하며, 당시 학생들이 고문으로 인해 공포에 질린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밝혔다.

1982년에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변론에 참여했고, 1984년에는 부산 공해문제 연구소 이사를 맡았다. 1985년에는 부산 민주시민 협의회 상임위원장을 맡으며 시민운동에 참여했고, 자신의 사무실에 노동법률 상담소를 개설하기도 했다.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부산 본부 상임 집행위원장을 맡아 6월 항쟁에 앞장섰다. 같은 해 8월,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가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자, 이상수 등과 함께 진상 규명 활동을 벌이다가 제삼자 개입 및 장례 방해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후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을 받았다.

1987년 부산 추도회에서 연행된 노무현에 대해 부산지방법원 한기춘 판사가 도주 및 증거인멸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을 기각했으나, 검찰이 밤중에 판사들을 찾아다니며 영장 발부를 종용하는 사건이 발생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2.4. 안기부 직원을 가르치다

노무현은 자신을 감시하던 안기부 직원 이화춘에게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비디오와 노동운동 관련 자료를 보여주며 강의했다. 이화춘은 "이러면 내가 당신을 잡아가야 한다"며 놀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노무현은 태연히 관련 자료들을 보여주었다.

노무현이 보여준 자료에 안기부 직원들은 당황했다. 이화춘은 "나중에 잡아가더라도 일단 읽어보라"는 노무현의 권유에 독후감을 묻는 전화까지 받았다. 이화춘은 "광주사태의 참혹상에 충격을 받아 밤을 꼬박 새웠다"고 답했다. 이후 이화춘과 안기부 직원들은 문재인과 함께 운영하던 '노동문제연구소' 겸 변호사 사무실을 드나들었고, 사무실은 늘 학생과 노동자로 붐볐다. 이화춘은 '기관원 의식'이 무뎌졌고, 노무현과 서로의 애환을 챙기는 관계로 발전했다.

2.5. 정치 입문

1988년 김영삼의 초청으로 통일민주당에 입당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같은 해 부산 동구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국정감사에서 정치 부패 의혹에 대한 정부의 답변을 추궁하며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1990년 김영삼이 민주정의당과 민주자유당을 창당했을 때, 노무현은 한나라당의 전신인 이 당에 참여하지 않고 "민주화 운동에 대한 배신"이라고 비판했다.

1991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주간조선에 노무현이 막대한 재산을 은닉했다는 기사가 게재되었으나, 명예훼손 소송에서 승소했다. 그러나 선거에서는 패배했다.

1992년 국회의원 선거와 1995년 부산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96년 서울 종로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이명박에게 패배했다.

이부영, 이철, 김원기, 김정길 등과 새로운 정당을 창당했으나, 대선을 앞두고 신한국당자유민주연합이 합당하자 김대중과의 화해를 통해 "군사정권과 그 정치적 후계자들을 심판하겠다"고 결정했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김대중과 화해했고, 이명박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사퇴하면서 열린 보궐선거에서 승리하여 1998년 국회의원에 복귀했다.

2000년 부산 북구·강서구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한국 정치의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운동을 펼쳤으나 낙선했다. 그러나 이 패배는 노사모 결성의 계기가 되었다.

2000년 김대중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2002년 당내 대선 후보 경선에서 초반 이인제 후보에게 뒤졌으나, 울산에서의 인상적인 연설 등으로 지지율을 높여갔다. 이회창을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5.1. 정계 입문 초기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던 노무현은 김영삼과의 인연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던 노무현은 김영삼과의 인연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에 입당제의를 받고 1988년 4월 26일 제13대 총선에 부산 동구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국회 노동위원회에서 이해찬, 이상수 의원 등과 함께 '노동위원회의 3총사'로 불렸다. 1988년 11월 제5공화국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장세동, 안현태, 이종원, 정주영 등을 상대로 증인 신문에서 차분하고 논리적인 질의와 치밀한 추궁으로 '청문회 스타'가 되었다.

2.5.2. 청문회 스타로 등극

1988년 11월, 제5공화국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전 국가안전기획부장 장세동, 전 청와대 경호실장 안현태, 전 법무부장관 이종원,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 등을 상대로 증인 신문을 하였다. 이때 차분하고 논리적인 질의와 치밀한 추궁으로 '청문회 스타'가 되었다. 최초로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5공 청문회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명패를 던지는 등의 행동으로 국민들의 관심을 받았다.

2.5.3. 3당 합당 거부와 야당 정치인

1990년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노태우 민주정의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의 3당 합당 선언에 반대하며 민주자유당 합류를 거부했다. 김영삼의 3당 합당 참여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하고 결별했다.

1991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주간조선에 노무현이 막대한 재산을 은닉했다는 기사가 게재되었으나, 명예훼손 소송에서 승소했다. 그러나 선거에서는 패배했다.

1992년 국회의원 선거와 1995년 부산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3. 대통령 선거 출마와 당선

차기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당인 우리당에서는 김근태를 중심으로 민주당과의 재통합(통합신당론)을 모색했으나, 노무현은 이를 지역주의로의 회귀라고 비난했다. 또한 대선 출마가 유력했던 고건의 경쟁력이 약하다고 판단하여 사실상 대선 출마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우리당 친노 세력은 노무현의 뜻을 받들어 당을 사수하려 했으나, 당내 갈등과 현직 의원들의 탈당으로 이어졌다. 결국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 성향의 이명박 후보에게 정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노무현은 역사가 평가해 줄 것이라며 정권 교체를 비교적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3.1. 국민의 정부 시절

1998년 한나라당 이명박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사퇴하자, 서울 종로구 재보궐선거가 치러졌다. 이 선거에서 노무현은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 국회에 복귀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노무현은 당선 가능성이 높은 종로구를 விட்டு, "지역주의 벽을 넘겠다"며 부산 북·강서을 지역구에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네티즌들이 노사모를 조직했고, 노무현은 '바보'라는 별명을 얻으며, 노사모는 그의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2000년 8월부터 2001년 3월까지 노무현은 김대중 정부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3.2. 2002년 대통령 선거

2002년 12월 19일 실시된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근소한 차이(2.3%, 57만여 표)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새천년민주당 당내 국민 경선제에서 초반 지지율은 10%에 불과했으나, 울산 연설 등으로 지지세를 넓혔다.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를 앞서는 결과를 바탕으로 당원과 일반 시민의 지지를 얻었다.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가 된 후,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대선에 출마한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했다. 당내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후단협)는 정몽준으로의 단일화를 요구하며 노무현을 압박했으나, 노무현은 불리한 여론조사 방식을 수용하며 단일화를 성사시켰다.

선거 전날 밤, 정몽준은 노무현의 발언을 문제 삼아 지지를 철회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진보 진영의 결집을 유도하여 노무현 당선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3.2.1. 국민경선제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은 국민 경선제라는 이름으로, 3월 9일 제주를 시작으로 전국 16개 시도를 돌며 당원(50%)과 국민(50%)이 직접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노무현은 김근태, 김중권, 유종근,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 등과 함께 후보로 참여했다.

경선 초기, 이인제가 민주당 내에서 압도적인 1위였고, 노무현은 10% 미만의 지지율로 군소 후보였다. 그러나 노무현은 "영남 후보론"과 이인제를 겨냥한 "정체성 시비"를 통해 20%대 지지율로 올라섰다. 제주 경선에서는 한화갑이 1위, 노무현은 3위를 기록했다. 울산 경선에서는 노무현이 인상적인 연설로 1위를 차지했다.

3월 13일 문화일보SBS의 공동 여론조사에서 노무현은 41.7%의 지지율로, 이회창 (40.6%)을 양자 대결에서 처음으로 앞섰다.

3월 16일 광주 경선은 매우 중요했다. 광주는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이자 새천년민주당의 근거지였기 때문에, 이곳의 결과가 사실상 대선 후보를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 이인제 대세론과 호남 출신 한화갑의 기세 속에서 노무현에게는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노무현은 "이회창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카드"라는 여론조사 결과에 힘입어 승리했다. 광주 경선 승리는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노풍(盧風)'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노무현은 대전, 충청 지역에서 잠시 주춤했으나, 대구 경선에서 종합 1위를 확정지었다. 강원, 전남, 전북, 경남 등 대부분 지역에서 승리하며, 2002년 4월 26일 서울 경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공식 선출되었다. 경선 후 노무현의 지지율은 60%를 기록하며, 이는 당시 역대 대통령 후보 중 최고치였다.

3.2.2. 민주진보세력 대통합론과 위기

1987년 대선에서 양김이 분열되면서 쪼개졌던 민주화 세력을 하나로 묶어내 한국의 미래를 함께 열어젖히겠다는 포부로 '민주 세력 대통합론'(대통합론)을 내놓았다. 이를 위해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나 대통합론의 취지를 전달하고 지방 선거 후보 추천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통일민주당 시절 김영삼으로부터 손수 받은 손목시계를 내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민주 세력 대통합론'은 국민들에게 대선 승리를 위한 정략으로 보이면서 진정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게다가 5월 들어 김대중 대통령의 두 아들인 김홍업과 김홍걸의 비리가 불거지며, 새롭고 신선한 이미지의 노무현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지지율은 본격적인 내림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지방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은 광역 단체장에서 호남과 제주의 4석만 건지며 참패했다. 노무현은 선거 전 약속한 대로 후보 재신임을 물었고, 민주당 당무 회의는 만장일치로 재신임을 의결했다.

3.2.3. 민주당 내분 사태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정몽준이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면서 거센 돌풍을 일으키자, 노무현은 지지율이 하락하고 당내 의원들에게 배척받기 시작했다. 친(親)이인제 성향의 반노(反盧) 및 노무현의 집권 가능성에 회의적이던 비노(非盧) 의원들은 지방 선거 참패를 계기로 집단으로 신당 창당과 후보 사퇴를 주장하며 '노무현 흔들기'에 나섰다.

'노무현 흔들기'는 더욱 노골화되어 '후보 단일화론'은 물론 '후보 교체론'까지 제기되었다. 이는 경쟁력이 없는 노무현 대신 정몽준을 영입하여 대선 새판 짜기를 해야 한다는 정치공학적 판단이었다.

상황은 10월 들어 더욱 악화되었다. 노무현의 낙마를 바라는 의원들이 탈당하여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후단협)를 결성하고 후보 단일화를 주장했다. 이들은 노무현으로 후보 단일화가 되면 함께 할 수 없다고 발언하며 정몽준 지지 의사를 숨기지 않았다. 후단협은 11월 19일 정몽준에 대한 공개 지지를 선언했고, 심지어 후단협 소속 의원이 정몽준 대표 측에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후단협 해체 후 일부 의원은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12명은 민주당에 복당했다.

이때 김민석이 정몽준국민통합21에 입당하기 위해 탈당한 것은 노무현에게 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그의 탈당은 노무현에게 악재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으나, 답보 상태였던 노무현의 지지율은 20%대를 회복하고 후원금 액수도 크게 늘었다.

3.2.4. 정몽준과의 후보 단일화

2002년 한일 월드컵 바람을 타고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 정몽준이 거센 돌풍을 일으키자, 노무현은 지지율이 하락하고 당내 의원들에게도 배척받기 시작했다. '노무현 흔들기'는 더욱 노골화되었고, '후보 단일화론'은 물론 '후보 교체론'까지 나왔다. 이는 경쟁력이 없는 노무현 대신 정몽준을 영입하여 대선 판을 새롭게 짜야 한다는 정치공학적 판단이었다.

10월 들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노무현의 낙마를 바라는 의원들이 탈당하여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후단협)를 만들고 후보 단일화를 주장했다. 이들은 노무현으로 후보 단일화가 되면 함께 할 수 없다고 발언하며 정몽준 지지 의사를 숨기지 않았다. 11월 19일 후단협은 정몽준에 대한 공개 지지를 밝혔으며, 심지어 후단협 소속 의원이 정몽준 대표 측에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후단협 해체 후 일부 의원은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12명은 민주당에 복당했다.

이때 김민석이 정몽준의 국민통합21에 입당하기 위해 탈당한 것은 노무현에게 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그의 탈당은 노무현에게 악재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으나, 답보 상태였던 노무현의 지지율은 20%대를 회복하고 후원금 액수도 크게 늘었다.

후보 단일화는 정몽준으로의 단일화를 염두에 둔 민주당 내 반(反)노무현, 비(非)노무현 측의 요구에서 비롯되었다. 단일화 방안으로는 국민 경선, 여론 조사, 협상 담판의 세 가지가 있었다. 이 중 협상 담판은 정몽준 후보가 11월 1일에 정식 제안했고, 국민 경선안은 국민 참여 50%, 당원 참여 50%의 민주당 안을 노무현 후보가 11월 3일 정식 제안했다. 여론 조사안은 단일화 여론 조사에서 우위를 점하는 정몽준 후보에게 유리한 안으로, 정몽준 후보가 선호하는 안이었다.

국민통합21은 노무현 측의 제안을 반대하며 "국민 경선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판세는 1강(이회창) 2중(노무현-정몽준)의 구도로 바뀌고 있었고, 국민통합21도 더는 단일화 방안을 놓고 논쟁을 벌일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노무현 후보는 11월 11일 자신에게 불리한 여론 조사를 통한 단일화를 제의하고, 단일화 재협상에서도 마지막 쟁점인 '무효화 조항'을 전격 수용하며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민주당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설문 내용 변경도 단일화를 위해 수용했다. 민주당 김원기 고문은 노무현의 결단은 "이기고 지는 것을 초월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로 인해 노무현 후보의 지지도는 더욱 반등하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토론을 거쳐 2002년 11월 24일, 노무현 후보는 극적으로 단일화 여론 조사에서 승리했다. 24일 시행된 두 곳의 여론 조사 중 리서치 앤드 리서치 경쟁력 조사에서 46.8%를 얻어 42.2%를 얻은 정몽준 후보를 제쳤고, 월드 리서치 조사에서는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조사 유효화 조건인 31.1%에 미치지 못한 28.7%가 되어 무효가 되었지만, 38.8%를 얻어 37%를 얻은 정몽준 후보를 앞섰다. 노무현 후보 측은 이날 승리 원인에 대해 '성실하게 원칙과 정도를 지켜온 것이 국민을 감동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단일화 이후 여론 조사에서 노무현이 이회창 후보를 역전하자, 이인제가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고 이회창 지지 선언을 하는 등 새로운 갈등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2002년 11월 새천년민주당 후보였던 그는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전국 농민대회'에 참석했다가 성난 농부들이 던진 달걀에 얼굴을 정면으로 맞았다.

3.2.5. 정몽준의 후보 단일화 파기

정몽준은 2002년 12월 18일, 대선 투표 전날 저녁 10시에 노무현 후보의 '미국과 북한과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는 발언을 문제 삼아 새천년민주당과의 선거 공조 파기를 선언했다. 국민통합21 측은 "미국은 우리를 도와주는 우방이고, 미국이 북한과 싸울 이유가 없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며 해당 발언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노무현 후보는 정몽준 대표를 설득하기 위해 심야에 자택을 방문했으나, 정대철 선대위원장 등과 함께 자택 앞에서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정몽준 대표는 만나주지 않아 심야 회동은 결렬되었다.

그러나 정몽준의 지지 철회는 결과적으로 진보 진영에게 위기감을 느끼게 하였고, 진보 진영이 민주노동당을 지지하지 않고 노무현에게 표를 몰아주는 예기치 않은 효과를 가져왔다.

3.3. 제16대 대통령 당선

200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57만 표 차이로 이기고 당선되었다. 노무현은 선거 기간 동안 인터넷을 중심으로 선거운동을 전개하여 젊은 층의 표심을 이끌어냈고, 노사모 등 팬클럽의 온라인 활동이 주목받았다. KT에 따르면, 대통령 선거 당일 오후 12시부터 3시까지 집전화 및 휴대전화 사용, 문자메시지 사용량이 폭증했는데, 이는 젊은 층의 투표를 독려하기 위한 캠프 측의 행동이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노무현의 취임을 두고 "세계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이 로그온(Log-on) 했다"고 논평했다.

4. 대통령 재임시 (2003년 2월 25일 ~ 2008년 2월 24일)

2003년 2월 25일, 국회의사당 앞마당에서 제16대 대통령 취임식이 거행되었다. 취임식에는 48,500명이 참석했으며, 온라인으로 응모를 받아 티켓을 배포하여 화제를 모았다. 노무현은 취임식 전 6년간 거주하던 명륜동 자택을 떠나면서 주민들에게 짧은 작별인사를 하고, 국립서울현충원 참배 후 취임식장으로 향했다. 취임식 단상에는 안철수 안철수연구소 사장 등 국민대표 8인과 함께 입장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해 김영삼, 전두환, 노태우, 최규하 등 전직 대통령 전원이 참석했으며, 김석수 국무총리, 박관용 국회의장 등 5부 요인과 전국 광역단체장 전원, 김종필 자민련 총재도 참석했다. 문화계 인사로는 배우 문성근과 방송인 홍석천이 초청되었고, 외국 사절로는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거스 히딩크 감독 등이 참석했다.

국기에 대한 경례는 전통 악기로 연주되었고, 애국가는 팝페라 가수 임형주가 제창했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묵념도 진행되었다. 안숙선 명창과 합창단이 《우리가 원하는 우리나라》를, 남성 바리톤 김남두, 김영환, 김세원, 최승원이 《오 솔레미오》와 《희망의 나라로》를 합창했다. 식전행사에서는 가수 양희은이 《상록수》를 불렀다.

노무현은 자신의 정부를 "참여정부"라고 명명했으며, 북한에 대한 햇볕정책 지속, 동북아시아에서 한국을 비즈니스 허브로 육성, 사회복지 확대, 낙후 지역 지원을 위한 "균형있는 국토 개발", 부정부패 척결, 교육 및 조세 제도 개혁, 노사 관계 개혁, 대중매체 개혁, 미국 및 일본과의 관계 재검토 등 야심찬 정책 어젠다를 가지고 취임했다.

정부 내 부정부패 척결 정책은 많은 행정 개혁을 포함하여 강한 반대에 직면했다. 검찰 개혁 과정에서 반대를 해소하기 위해 TV 토론을 제안했고, 검찰은 노무현이 인사위원회와 상의 없이 검찰청 주요 보직을 임명했다고 주장했다. 노무현은 "현 인사위원회 구성원 자체가 바뀌어야 할 기존 검찰을 대변하고 있으며, 지금 바꾸지 않으면 최소한 몇 달 동안 기존 검찰을 유지하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 대통령 취임 3개월 만에 그는 반대 문제에 대해 "이 정도 반대를 받으면 대통령직을 계속할 수 없을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보수 언론에 의해 부분적으로 인용되었고('대통령직을 계속할 수 없다') 노무현은 그의 능력과 경험에 대한 회의론에 시달렸다.

취임 첫해에 한국의 자유무역협정 정책 로드맵을 발표했다. 노무현은 전통적인 좌파 지지층과 시장 개방에 반대하는 다양한 집단의 국내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유무역협정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서울에 집중된 부를 분산시키려는 균형적인 국가 발전 캠페인의 일환으로 충청남도로 수도를 이전하는 계획을 추진했으나, 많은 논란 끝에 헌법재판소는 수도 이전이 위헌 판결을 내려 노무현의 계획을 무효화시켰다. 이후 '행정수도' 건설로 수정되었지만, 이 계획 또한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

수도 이전 논란과 함께 경제 방치 및 관리 부실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었다. 수출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경제가 성장했지만, 성장률은 이전 정부와 세계 경제 성장률보다 낮았고 국내 경제는 침체되었다. 동시에 규제가 확대되고, 투자 자본이 해외로 유출되었으며, 실업률(특히 청년 실업률)이 증가하고, 서울의 집값은 평범한 시민의 구매력을 훨씬 넘어섰다. 노무현은 이러한 비판을 "파렴치한 흑색선전"으로 일축하고, 국가 경쟁력 강화, 경제 강화 등 정부의 성과를 자랑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한국은 론스타 펀드의 외환은행 매각에 대한 검찰 수사로 인해 해외 사업계에서 부정적인 여론에 시달렸고, 외국인 투자자들이 국내 투자자들과 함께 한국을 떠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집값 폭등을 막기 위해, 일본 자산 버블 사태와 같은 투기적 거품을 방지하기 위해, 노무현은 6억 원(약 600)을 초과하는 부동산에 대해 1~3%의 추가 재산세를 도입했다. 이는 거품을 효과적으로 억제했지만, 더 높은 세금을 내야 했던 부유층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동시에 노무현은 복지 지출을 연간 18% 증가시켰고, 공무원 수를 95,700명 이상(하루 약 60명) 증원함으로써 지출을 급격히 늘렸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의 수개월간의 협상 끝에 2007년 4월에 체결되었다.

2005년 4월 30일 실시된 재보궐선거에서 23개 선거구 모두 패배하며 국회에서 과반 의석을 상실하자, 노무현은 대연정을 제안했다. 노 대통령의 논리는 지지율이 20% 정도에 불과한 상황에서 대통령직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참여하는 대연정이 바람직하며, 양당의 정치적 목표 차이는 사실상 미미하다는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대연정이 성공적으로 출범하면 자신의 권력 상당 부분을 내려놓고 심지어 사퇴할 수도 있다고 약속했다.

노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은 또 다른 전국적인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은 반복되는 정치적 논란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통받는 국민들의 심정을 무시하는 "무모하고 완전히 무지한" 계획이라고 비판했다. 한나라당은 연정 협상을 시작하는 것을 계속 거부했다. 열린우리당은 대통령의 제안을 마지못해 지지했지만, 한 의원이 노 대통령의 계획에 항의하며 당에서 탈당했고, 2005년 10월 26일 재보궐선거에서 또다시 전패를 당하며(이번에는 당의 텃밭 지역구까지 포함) 인기 하락을 실감했다. 노 대통령의 계획은 양당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무산되었다.

다음은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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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발언 내용
1월 25일“한국 국민 감정을 고려해야 한다”며 야스쿠니 신사 참배 중단을 요구. “대북 압박·붕괴 해결책이라면 한·미 간에 차이가 생길 것”이라고 발언.
1월 28일미국의 대북 압력에 대해 공식 경고.
3월 1일일본은 인류의 이치에 따라 행동하고 국제사회의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고 발언.
4월 14일“한국인은 실패한 적이 없다”고 발언.
4월 29일“북의 핵무기 개발은 방어용이지 선제 공격용이 아니다”라고 발언.
5월 3일“일본은 중국을 모방해 천황을 만들었고, 그 아래에 왕이 필요해 류큐와 한국을 왕으로 삼고 형님 행세를 했지만, 중국을 형님으로 여겨온 우리에게는 엄청난 일이다”라고 발언.
5월 8일“한국 경제인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발언.
5월 9일북한에 상당한 양보를 하고 싶다…만나서 이야기하자”고 제안.
5월 14일“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발언. 두바이 경제인들과의 만찬에서 “만리장성이나 피라미드도 결국은 전쟁에 의한 억압과 착취의 결과로, 타인의 고통을 담보로 한 부도덕한 유적”이라고 발언.
5월 16일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 앞에서 “독도는 일본이 러일전쟁 당시 강제로 점령한 것”이라며 일본을 비판.
5월 18일“상대방을 존중하고 양보함으로써 합의를 이루는 관용의 문화를 키워야 한다”고 발언.
5월 19일“우월감과 열등감이 혼재하는 일본의 행동이 동북아 질서에 불안 요인”이라고 발언.
5월 29일“북한이 을 개발하는 것은 선제 공격용이 아니라 방어용”이라고 발언.
6월 2일“선거에서 졌을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라고 발언.
6월 12일(지방선거 책임 문제에 대해)“내가 평정심을 유지함으로써 국민이 안심하지 않을까”라고 발언.
6월 16일“남북 통일은 연방제보다는 경제·문화에서부터”라고 발언.
6월 22일해양경찰청 경찰관들을 격려하며 “일본이 도발할 수 없는 국방력을 가지고 있다”, “동해에서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수준의 전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언급.
6월 25일“한국 전쟁이 일어나면 일본의 침략을 떠올린다”, “남북 관계에서는 안전과 평화가 최우선”이라고 발언.
7월 11일“일본의 태도는 동북아시아 평화에 비상사태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미사일 발사는 미국에 양보를 요구하는 정치적 행위”, (미국의 금융 제재 조치에)“달러 위조 증거 없이 장부를 요구하는 것과 같다”고 발언. (북한에 대한 태도) “미국은 우방이라 심하게 비난할 수 없지만, 일본과는 대결해야 한다”고 발언.
7월 13일“친일파 재산 조사는 늦었지만 다행”이라고 발언.
7월 15일“미국이 한국을 동북아 평화 책임 자리에 세워준다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발언.
7월 19일(미·일 추가 제재 움직임에)“과도한 대응으로 불필요한 긴장과 대결 국면을 만드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발언.
7월 25일“미국이 실패했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라고 발언.
8월 6일“나를 무시하지 마라, 내가 부활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발언.
8월 9일“일본만을 모델로 성장할 수는 없다”, “전시 작전 통제권 이양 시기는 2009~2012년 사이, 당장이라도 상관없다”고 발언.
8월 10일“미국 말대로 한국 대통령이 ‘예, 예’ 하는 것을 한국 국민이 바랄까”라고 발언.
8월 13일“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부시 대통령은 나를 좋아한다”, “미국이 북한을 보는 시각은 문명이 야만을 보는 시각과 같다”고 발언.
8월 15일“미군의 작전 통제권 행사는 위헌”이라고 발언.
8월 27일(보수 언론대통령 비판에)“언론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다”고 발언.
8월 29일“(취임 후)3년 반이 되었지만 내 기억에는 세상이 시끄러웠다는 기억밖에 없다”고 발언.
9월 26일인공위성 성공에)“지구를 정복한 듯한 쾌감이 있다”고 발언.
9월 28일“6자 회담은 미국의 금융 제재 때문에 중단되었다”고 발언.
10월 9일(햇볕 정책에 대해)“재검토해야 한다”(후에 철회)고 발언.
10월 10일(북한 핵실험에 대해)“이렇게 작은 문제”라고 발언.
11월 20일(북한 남침에 대해)“우리는 식민지 지배, 내전까지 치르는 격동의 길을 걸어왔다”고 발언.
12월 7일“북한이 패전을 걸기는 어렵다”고 발언.
12월 22일 관계자 작전통제권 이양 반발에)“전화기도 도 잘 만드는데, 왜 작전통제권만 행사할 수 없는가”, “나는 아내와 이틀에 한 번은 말다툼한다. 아내가 신문을 읽으라고 한다”, “고 총리 임명은 나와 노무현 정권 참여자들이 따돌림당하는 체제가 되었다”고 발언.
12월 24일“(징병 제도에 대해) 사람을 썩게 한다”고 발언.

4.1. 국정 방향

노무현은 자신의 정부를 "참여정부"라고 명명했으며, 야심찬 새로운 정책 어젠다를 도입할 의지를 가지고 취임했다. 참여정부의 정책 목표에는 북한에 대한 햇볕정책의 지속, 동북아시아에서 한국을 비즈니스 허브로 육성, 사회복지 확대, 낙후 지역 지원을 위한 "균형있는 국토 개발" 추진, 부정부패 척결, 교육 및 조세 제도 개혁, 노사 관계 개혁, 대중매체 개혁, 미국 및 일본과의 관계 재검토 등이 포함되었다.

4.2. 외교 정책

2004년 노무현 대통령과 부인 권양숙 여사가 인도를 방문하여 만모한 싱과 아브둘 칼람 대통령을 만나는 모습
2004년 노무현 대통령과 부인 권양숙 여사가 인도를 방문하여 만모한 싱과 아브둘 칼람 대통령을 만나는 모습

노무현은 동북아 균형자론을 표방했다. 그리스, 루마니아, 핀란드, 영국, 스페인 등 국빈 방문과 동남아시아, 남미, 러시아, 프랑스, 폴란드, 이탈리아, 바티칸 순방 등 총 49개국을 방문했다. 이집트, 나이지리아, 알제리, 아제르바이잔, 아랍에미리트, 스페인 등 6개국은 한국 대통령으로서 처음 공식 방문했다. 취임 첫해에 한국의 자유무역협정 정책 로드맵을 발표했다.

노무현 정부의 정책 목표에는 햇볕정책 지속, 동북아시아에서 한국을 비즈니스 허브로 육성, 미국 및 일본과의 관계 재검토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한국을 아시아 국제 비즈니스 허브로 만들겠다는 초기 약속은 취임 직후 곧 사라졌다.

다음은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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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발언 내용
1월 25일“한국 국민 감정을 고려해야 한다”며 야스쿠니 신사 참배 중단을 요구함. “대북 압박·붕괴 해결책이라면 한·미 간에 차이가 생길 것”이라고 발언.
1월 28일미국의 대북 압력에 대해 공식 경고.
3월 1일일본은 인류의 이치에 따라 행동하고 국제사회의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고 발언.
4월 14일“한국인은 실패한 적이 없다”고 발언.
4월 29일“북의 핵무기 개발은 방어용이지 선제 공격용이 아니다”라고 발언.
5월 3일“일본은 중국을 모방해 천황을 만들었고, 그 아래에 왕이 필요해 류큐와 한국을 왕으로 삼고 형님 행세를 했지만, 중국을 형님으로 여겨온 우리에게는 엄청난 일이다”라고 발언.
5월 8일“한국 경제인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발언.
5월 9일북한에 상당한 양보를 하고 싶다…만나서 이야기하자”고 제안.
5월 14일“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발언. 두바이 경제인들과의 만찬에서 “만리장성이나 피라미드도 결국은 전쟁에 의한 억압과 착취의 결과로, 타인의 고통을 담보로 한 부도덕한 유적”이라고 발언.
5월 16일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 앞에서 “독도는 일본이 러일전쟁 당시 강제로 점령한 것”이라며 일본을 비판.
5월 18일“상대방을 존중하고 양보함으로써 합의를 이루는 관용의 문화를 키워야 한다”고 발언.
5월 19일“우월감과 열등감이 혼재하는 일본의 행동이 동북아 질서에 불안 요인”이라고 발언.
5월 29일“북한이 을 개발하는 것은 선제 공격용이 아니라 방어용”이라고 발언.
6월 2일“선거에서 졌을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라고 발언.
6월 12일(지방선거 책임 문제에 대해)“내가 평정심을 유지함으로써 국민이 안심하지 않을까”라고 발언.
6월 16일“남북 통일은 연방제보다는 경제·문화에서부터”라고 발언.
6월 22일해양경찰청 경찰관들을 격려하며 “일본이 도발할 수 없는 국방력을 가지고 있다”, “동해에서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수준의 전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언급.
6월 25일“한국 전쟁이 일어나면 일본의 침략을 떠올린다”, “남북 관계에서는 안전과 평화가 최우선”이라고 발언.
7월 11일“일본의 태도는 동북아시아 평화에 비상사태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미사일 발사는 미국에 양보를 요구하는 정치적 행위”, (미국의 금융 제재 조치에)“달러 위조 증거 없이 장부를 요구하는 것과 같다”고 발언. (북한에 대한 태도) “미국은 우방이라 심하게 비난할 수 없지만, 일본과는 대결해야 한다”고 발언.
7월 13일“친일파 재산 조사는 늦었지만 다행”이라고 발언.
7월 15일“미국이 한국을 동북아 평화 책임 자리에 세워준다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발언.
7월 19일(미·일 추가 제재 움직임에)“과도한 대응으로 불필요한 긴장과 대결 국면을 만드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발언.
7월 25일“미국이 실패했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라고 발언.
8월 6일“나를 무시하지 마라, 내가 부활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발언.
8월 9일“일본만을 모델로 성장할 수는 없다”, “전시 작전 통제권 이양 시기는 2009~2012년 사이, 당장이라도 상관없다”고 발언.
8월 10일“미국 말대로 한국 대통령이 ‘예, 예’ 하는 것을 한국 국민이 바랄까”라고 발언.
8월 13일“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부시 대통령은 나를 좋아한다”, “미국이 북한을 보는 시각은 문명이 야만을 보는 시각과 같다”고 발언.
8월 15일“미군의 작전 통제권 행사는 위헌”이라고 발언.
8월 27일(보수 언론대통령 비판에)“언론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다”고 발언.
8월 29일“(취임 후)3년 반이 되었지만 내 기억에는 세상이 시끄러웠다는 기억밖에 없다”고 발언.
9월 26일인공위성 성공에)“지구를 정복한 듯한 쾌감이 있다”고 발언.
9월 28일“6자 회담은 미국의 금융 제재 때문에 중단되었다”고 발언.
10월 9일(햇볕 정책에 대해)“재검토해야 한다”(후에 철회)고 발언.
10월 10일(북한 핵실험에 대해)“이렇게 작은 문제”라고 발언.
11월 20일(북한 남침에 대해)“우리는 식민지 지배, 내전까지 치르는 격동의 길을 걸어왔다”고 발언.
12월 7일“북한이 패전을 걸기는 어렵다”고 발언.
12월 22일 관계자 작전통제권 이양 반발에)“전화기도 도 잘 만드는데, 왜 작전통제권만 행사할 수 없는가”, “나는 아내와 이틀에 한 번은 말다툼한다. 아내가 신문을 읽으라고 한다”, “고총리 임명은 나와 노무현 정권 참여자들이 따돌림당하는 체제가 되었다”고 발언.
12월 24일“(징병 제도에 대해) 사람을 썩게 한다”고 발언.

4.2.1. 대미 관계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대북 정책에서 입장 차이를 보이며 갈등을 빚었다. 당시 대한민국 국민들은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불평등 SOFA 협정 등으로 인해 미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아, 노무현은 "미국에 할 말은 한다"며 대미 관계에 있어 독자 노선을 걸을 것처럼 보였다.

이라크 전쟁 파병, 주한미군 용산 기지 이전, 한미 FTA 추진 등에서 부시 행정부의 요구를 수용하면서도 실리를 챙기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2007년 9월 호주에서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노무현은 부시에게 "평화조약에 대해 더 분명히 말해 달라"고 여러 차례 외교적 결례에 해당하는 요구를 하여, 부시가 짜증을 내는 상황이 발생했다. 워싱턴 정가의 소식을 전하는 넬슨리포트는 "노 대통령의 의전상 결례에 대해 부시 대통령뿐 아니라 현장의 (미국) 기자들도 놀란 것 같았다"라고 전했다. 양국의 외교관들이 서둘러 진화에 나섰지만, 두 정상 간의 불편한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2008년 2월 마이클 그린 전 미 NSC 선임보좌관은 인터뷰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한미 동맹에 대한 기여는 전두환·노태우 이상이다. 그가 퇴임하는 2008년 2월 현재 한미 동맹은 훨씬 강하고 좋아졌다. 노 대통령은 미국·영국 다음 가는 대규모 이라크 파병에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주한미군 용산 기지 이전 등 정책적으로 한미 동맹에 크나큰 기여를 했다"라고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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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APEC 갈라 만찬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중앙),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로라 부시 여사(우측)
2006년 APEC 갈라 만찬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 러시아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중앙),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로라 부시 여사(우측)

4.2.2. 대일 관계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 출범 이후 일본의 우경화와 맞물려 노무현 정부와 일본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2004년 3·1절 기념사에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관련하여 일본 지도자를 강하게 비판했다. 2005년 야치 쇼타로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이 노무현 정부의 대북 유화 정책을 비판하자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이 공식 항의하기도 했다.

2006년 일본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제정 등 독도 문제로 긴장이 고조되자, 4월 25일 특별 담화를 발표하여 일본에 경고했다. 아베 신조 정권 출범 이후에도 일본과 마찰을 빚었다. 2006년 11월 APEC 정상회의에서 아베 신조 총리에게 동해를 '평화의 바다' 또는 '우의의 바다'로 부르자고 제안했으나, 외교·안보 라인과 사전 협의 없는 돌출 발언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당시에는 한일 관계가 비교적 양호했으나, 위안부 보상 문제, 일본 역사 교과서의 식민지배 미화, 독도 분쟁 등 여러 분야에서 일본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특히,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반복 방문은 한국에서 강하게 비난받았으며, 노무현 대통령은 고이즈미 총리가 신사 참배를 중단하지 않는 한 더 이상의 만남은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2003년 한일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표현하여 파문이 일기도 했다.

4.3. 취임 1년차 (2003년 2월 25일 ~ 2004년 2월 24일)

2003년 2월 25일,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참여정부가 출범했다. 취임식은 국회의사당 앞마당에서 거행되었으며, 김대중, 김영삼, 전두환, 노태우, 최규하 등 전직 대통령 전원이 참석하였다. 외국 사절로는 콜린 파월 미국 국무장관, 첸지천 중국 부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등이 참석하였다. 취임식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는 전통 악기로 연주되었고, 애국가는 팝페라 가수 임형주가 제창했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묵념도 진행되었다.

취임식 당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졌고, 5월 15일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부시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하였다.

2003년 5월 14일, 미국 방문 당시 백악관에서 노무현과 부시 미국 대통령이 정상회담 직후 기자 회견하는 모습
2003년 5월 14일, 미국 방문 당시 백악관에서 노무현과 부시 미국 대통령이 정상회담 직후 기자 회견하는 모습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 출범 이후 악화된 한일 관계야스쿠니 신사 참배, 독도 문제 등으로 더욱 경색되었다. 2003년 한일 정상회담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노무현은 독도를 '다케시마'로 언급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민주노동당은 이를 비판했고, 청와대는 기자의 질문을 받아 대답하는 과정에서 나온 표현이라고 해명했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함께 한 노무현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함께 한 노무현


3월 9일, 강금실 법무부 장관과 일선 검사들이 함께하는 '대통령과 전국 검사와의 대화'를 통해 검찰 개혁을 추진했으나, 검사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이 과정에서 "이쯤 되면 막 하자는 거죠"라는 발언이 논란이 되었다.

3월 20일, 이라크 파병이 '전략적 선택'이라고 표현한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3월 24일, 특별 교부금 개선을 명령했다. 4월 18일, 청남대를 개방하고 관리권을 충청북도로 이관했다.

5월 21일, "이러다가 대통령직 못해 먹겠다는 생각이, 위기감이 생긴다"며 국정 운영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9월,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했다.

10월, 청와대 총무비서관 최도술 비리 의혹,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 해임 건의안 가결, 윤성식 감사원장 임명 동의안 부결 등의 문제로 재신임을 선언했다.

12월 29일, 국회에서 신행정수도법이 통과되었다. 2004년 1월 14일, 연두 기자 회견에서 "정치와 권력, 언론, 재계 간 특권적 유착 구조는 완전히 해체될 것"이라고 말했다. 1월 16일, 신행정수도법을 공포했다.

2004년 1월, 며느리 배정민의 '유모차 해프닝'이 있었다.

4.4. 취임 2년차 (2004년 2월 25일 ~ 2005년 2월 24일)

2003년 2월 25일 노무현은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참여정부가 출범하였다. 취임식에는 김대중, 김영삼, 전두환, 노태우, 최규하 등 전직 대통령 전원이 참석했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등 외국 사절도 다수 참석했다. 취임식에서는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묵념이 있었다.

고이즈미 정권 출범 이후 일본의 우경화로 인해 한일 관계는 악화되었다. 2004년 3·1절 기념사에서 노무현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를 강하게 비판했다. 2005년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의 대북 유화 정책 비판에 대해 청와대가 공식 항의하기도 했다. 2006년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제정으로 독도 문제를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자, 노무현은 특별 담화를 통해 일본에 경고했다.

신행정수도특별법은 2003년 12월 국회를 통과했고, 2004년 1월 공포되었다. 그러나 2004년 10월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로 수도 이전은 무산되었다.

2003년 3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자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에 파병을 요청했고, 노무현은 "국익을 위해 파병해야 한다"며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다.

2003년 9월, 노무현은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했다. 10월에는 측근 비리 의혹과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 해임 건의안 가결 등으로 인해 "국민에게 재신임을 묻겠다"고 선언했다.

2004년 1월, 노무현의 며느리 배정민의 '유모차 해프닝'이 있었다.

4.4.1. 탄핵

2004년 2월 25일, 민주당은 참여정부 출범 1주년을 맞아 '실패한 1년, 잃어버린 1년'이라는 제목의 국정 평가 보고서를 배포했다. 이 보고서에는 참여정부의 7대 비리 의혹과 노무현 대통령의 11가지 자질 부족 사례를 포함하여 총 43가지의 부정적 평가가 담겨 있었다.

3월 3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노무현의 열린우리당 지지 발언이 공직선거법 상 공무원의 선거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고 결정했다. 이에 한나라당, 민주당, 자민련 등 야3당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를 추진했다.

같은 달, 노무현의 형 노건평이 대우건설 사장 남상국에게서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남상국은 투신 자살했다.

3월 12일, 국회는 야당 주도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가결했다. 탄핵 찬성 193표, 반대 2표였으며,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표결에 불참했다. 이로 인해 노무현의 대통령 직무는 정지되었고, 고건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았다.

탄핵안 가결에 반대하는 촛불 집회가 전국적으로 열렸다. 2004년 3월 12일부터 3월 27일까지 '국민운동본부'를 중심으로 탄핵 반대 시위가 이어졌고, 3월 13일 하루에만 5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탄핵 정국 속에서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152석을 얻어 과반 의석을 확보하며 제1당이 되었다.

5월 14일, 헌법재판소는 탄핵 심판 사건을 기각했고, 노무현은 대통령 직무에 복귀했다. 이후 노무현은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여 여당 대표가 되었다.

4.4.2. 새로운 여당의 탄생

열린우리당 창당 이후, 2004년 5월 20일 노무현은 "수석 당원"으로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여 열린우리당이 공식적인 여당이 되었다.

2004년 8월, H씨는 노무현에게 숨겨놓은 딸이 있다는 악성 댓글을 올려 징역 1년 3개월을 선고받았다.

2004년 10월 21일, 헌법재판소는 신행정수도특별법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려 수도 이전이 무산되었다.

2004년 12월 16일, 노무현은 FTA 추진 지시를 내렸다.

4.5. 취임 3년차 (2005년 2월 25일 ~ 2006년 2월 24일)

2005년 2월 14일, 청와대 업무관리시스템 'e지원'이 특허를 취득했다. 3월 2일, 행정도시 특별법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3월 7일, 동북아 역사재단 설립을 지시했다. 3월 13일, 리움 미술관을 방문하여 이건희 회장 내외와 함께 미술관을 관람했다. 6월 29일, 헌법재판소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탄핵 심판에서도 소수 의견 공개가 의무화되었다. 8월 3일, 국가보훈처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47명을 포함한 214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에게 서훈을 추서했다.

4.6. 취임 4년차 (2006년 2월 25일 ~ 2007년 2월 24일)

2006년 3월 23일, 노무현은 네티즌들과 "국민과의 인터넷 대화"를 갖고 온라인 생중계로 대국민 토론회를 진행했다. 2006년 5월 8일, 스승의 날을 앞두고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담임 선생님으로 모시고 싶은 전·현직 대통령 3위를 차지했다. 2006년 6월 3일, 딸 노정연 씨가 딸을 출산해 노무현은 외할아버지가 되었다.

2006년 11월 30일, 여당 내 신당 창당 움직임에 대해 "나는 신당을 반대한다. 말이 신당이지 지역당을 만들자는 것이기 때문이다"라며 반대했다. 2006년 12월 6일, 노무현의 지지도는 5.7%로 매우 낮았다. 2006년 12월 8일, 기자 회견에서 "한국에 미국의 핵무기는 없다"고 말했다.

2007년 1월 9일, 노무현은 4년 연임제로 헌법 개정을 제안했다. 2007년 2월 22일, 열린우리당 탈당을 선언했다.

4.7. 취임 5년차 (2007년 2월 25일 ~ 2008년 2월 24일)

2007년 1월 23일, 노무현은 신년 연설에서 "권력형 비리는 없고 밀실, 측근 가신 이런 말도 사라졌다"라고 말했다. 2007년 2월 28일, 열린우리당을 탈당했다. 2007년 6월 3일, 참여정부 평가포럼 특강에서 "어느 정부와 비교해서 실패라는 얘기냐"라며 한나라당과 이명박, 박근혜 대선 주자를 비판했다. 2007년 6월 8일, 참여정부 평가포럼에서 한나라당 후보들에 대한 내용을 발언하여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선거 중립 위반 결정을 받았다. 2007년 6월 10일, 6월 민주항쟁 기념식에서 "민주 세력 무능론까지 들고 나와 민주적 가치와 정책이 아니라 지난날 개발 독재의 후광을 빌려 정권을 잡으려 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2007년 9월 12일, '제주 혁신도시 기공식'에 참석하여 "균형 발전 정책은 참여정부의 상징적인 국가 발전 전략"이라고 말했다.

2007년 10월 2일, TV방송으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차량 행렬이 청와대를 출발하여 군사분계선을 도보로 넘었다. 2007년 10월 4일, 평양에서 남북 정상 회담을 개최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 관계 발전 및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을 발표했다.

2007년 11월 8일, 광주-전남 주요 인사 오찬 간담회에서 "호남 뭉치자는 말만 하며 저급한 말만 쓰는 호남지역 국회의원들과는 답답해서 일을 못해먹겠다"라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2007년 11월 12일, 서울지역 7개 대학 학생 대상 설문조사에서 대학생의 65.4%가 노무현이 국정수행을 잘못했다고 답했다.

5. 대통령직 퇴임 이후

2008년 2월 25일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후 경상남도 김해 봉하마을로 귀향했다. 퇴임 후 고향으로 내려간 첫 대통령으로, 봉하마을은 주요 관광 명소가 되었다.

2008년 7월, 국가기록원과 뉴라이트 전국연합은 대통령 기록물 무단 유출 혐의로 노무현 측 전 비서관과 행정관들을 검찰에 고발했다. 노무현 측은 청와대의 목적이 기록 회수가 아닌 참여정부 흠집 내기라고 주장했다.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제17조 5항에 따르면 전직 대통령은 대통령 기록물을 열람할 수 있으나, 외부 반출은 기록물 관리 및 보안상 유출 우려가 있어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법학자들의 다수 견해였다. 2009년 10월 29일 노무현의 자살로 인해 검찰에서 불기소 종결되었다.

2008년 5월, 미국산 쇠고기 협상 반대 시위와 광우병 괴담 파동으로 이명박 정부가 위기를 맞자, 이명박 정부는 친노세력을 배후로 지목하고 박연차를 비롯한 노무현 주변 측근들에 대한 세무조사를 지시했다. 2008년 10월, 박연차의 정관계 로비 의혹이 제기되었고, 이상득 의원이 로비 상대로 거론되었다. 2008년 12월 4일 노무현의 친형 노건평이 세종증권 매각 비리 의혹으로 구속 수감되었다.

2009년 4월 7일 노무현은 자신의 개인 공식 홈페이지에 부인 권양숙이 박연차로부터 돈을 받아 사용했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게재했다. 그는 자신은 퇴임 전까지 해당 금전 거래 사실을 몰랐다고 주장했다. 이후 검찰은 권양숙과 아들 노건호를 소환 조사하고, 노무현에게 서면 질의서를 발송했다.

2009년 4월 30일 노무현은 대검찰청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여 조사를 받았다. 그는 검찰 조사에 앞서 대중에게 다시 사과하며 "수치심에 압도당했다"고 말했다. 2009년 5월 13일 권양숙이 노무현 회갑 선물로 받은 1억 원짜리 시계 두 개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비판 여론이 형성되었다.

2009년 5월 23일 노무현이 자살함으로써 검찰 수사가 종료되었다. 노무현의 가족은 미국 유학 생활비 지출 등 개인적인 용도로 친구로부터 약 1.5의 돈을 빌려 썼는데, 이는 약 5억 달러에 달하는 불법 자금을 정치 자금과 가족 활동에 사용했다고 알려진 이전 대통령들의 스캔들과는 대조적이다.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 뒷산에서 투신하여 서거하였다. 부산대학교 병원 측은 사망 원인이 두부 외상이라고 발표했다. 경찰은 노무현 대통령의 사망 원인을 투신 자살로 최종 확인했다.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유서를 남겼다고 밝혔다.

이명박 대통령은 "참으로 믿기 어렵고 비통한 일"이라며 애도를 표했다. 후진타오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아소 다로 일본 총리,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반기문 국제 연합 사무총장 등 세계 각국 지도자들도 애도를 표했다.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추도식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추도식

길을 봉쇄하고 있는 경찰 버스에 붙여 있는 국화와 경향신문 호외
길을 봉쇄하고 있는 경찰 버스에 붙여 있는 국화와 경향신문 호외

2009년 7월 8일 서울시청 맞은편에 설치된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분향소
2009년 7월 8일 서울시청 맞은편에 설치된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분향소


2009년 5월 23일부터 29일까지 국장이 거행되었으며, 전국에 설치된 분향소에는 수십만 명의 조문객이 찾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택 컴퓨터에 유서를 남겼다. 유서는 가족에게 남기는 짧은 내용으로,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 드렸다"며 사과하고 시신을 화장하여 집 근처에 작은 묘비만 세워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너무 많은 분에게 빚을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한국어

김대중 전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은 그 어떤 대통령보다 한국 국민들을 사랑했다"면서, "부당한 조사 과정에서 그는 모욕과 좌절, 기만, 중상을 당했고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국민들 앞에서 자살이라는 선택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애도했다.

5.1. 퇴임 직후

2008년 2월 25일,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후 경상남도 김해 봉하마을로 귀향했다. 퇴임 후 고향으로 내려간 첫 대통령으로, 봉하마을은 주요 관광 명소가 되었다.

5.2. 기록물 이관 논란

2008년 7월, 국가기록원과 뉴라이트 전국연합은 대통령 기록물 무단 유출 혐의로 노무현 측 전 비서관과 행정관들을 검찰에 고발했다. 노무현 측은 청와대의 목적이 기록 회수가 아닌 참여정부 흠집 내기라고 주장했다.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제17조 5항에 따르면 전직 대통령은 대통령 기록물을 열람할 수 있으나, 외부 반출은 기록물 관리 및 보안상 유출 우려가 있어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법학자들의 다수 견해였다.

2009년 10월 29일, 노무현의 자살로 인해 검찰에서 불기소 종결했다.

5.3. 뇌물 수수 혐의 검찰 수사

2008년 5월, 미국산 쇠고기 협상 반대 시위와 광우병 괴담 파동으로 이명박 정부가 위기를 맞자, 이명박 정부는 친노세력을 배후로 지목하고 박연차를 비롯한 노무현 주변 측근들에 대한 세무조사를 지시했다. 2008년 10월, 박연차의 정관계 로비 의혹이 제기되었고, 이상득 의원이 로비 상대로 거론되었다.

2008년 12월 4일, 노무현의 친형 노건평이 세종증권 매각 비리 의혹으로 구속 수감되었다.

2009년 4월 7일, 노무현은 자신의 개인 공식 홈페이지에 부인 권양숙이 박연차로부터 돈을 받아 사용했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게재했다. 그는 자신은 퇴임 전까지 해당 금전 거래 사실을 몰랐다고 주장했다.

2009년 4월 9일, 검찰은 박연차가 권양숙에게 10억여 원을 전달한 사실을 확인했다. 2009년 4월 12일, 권양숙과 아들 노건호가 검찰 소환 조사를 받았다. 2009년 4월 22일, 검찰이 노무현에게 서면 질의서를 발송했다.

2009년 4월 30일, 노무현은 대검찰청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여 조사를 받았다. 그는 검찰 조사에 앞서 대중에게 다시 사과하며 "수치심에 압도당했다"고 말했다.

2009년 5월 13일, 권양숙이 노무현 회갑 선물로 받은 1억 원짜리 시계 두 개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비판 여론이 형성되었다.

2009년 5월 23일, 노무현이 자살함으로써 검찰 수사가 종료되었다.

노무현의 가족은 미국 유학 생활비 지출 등 개인적인 용도로 친구로부터 약 1.5의 돈을 빌려 썼는데, 이는 약 5억 달러에 달하는 불법 자금을 정치 자금과 가족 활동에 사용했다고 알려진 이전 대통령들의 스캔들과는 대조적이다.

5.3.1. 사후 수사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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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날짜내용
노정연 100만 달러 불법 송금 혐의 유죄 판결2013년 1월 23일노정연 유죄 판결
노정연 항소 취하2013년 3월 29일노정연 집행유예 확정
경연희 벌금형2013년 9월 4일노정연의 1.3 불법송금 사건에 연루된 재미교포 경연희 1심에서 벌금 1500만원 선고
검찰, 노무현 '공소권 없음' 처분2009년 6월 12일검찰, 노무현 수사 종결
조현오 전 경찰청장 법정구속2013년 2월 20일노무현 차명계좌 발언으로 징역 10월 선고, 법정구속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3심 무죄2009년 9월 9일3심 무죄 판결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항소심 유죄2009년 12월 18일항소심 유죄 판결, 판결문에 노무현이 박연차로부터 돈을 빌렸다는 내용 포함
박연차 1심 유죄2009년 9월 17일뇌물공여죄 혐의로 1심 유죄 판결
노건평 유죄 판결2010년 1월 14일세종증권 비리와 관련하여 유죄 판결

5.3.2. 검찰 수사에 대한 평가

2009년 4월 30일,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600만 달러의 포괄적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대검 중수부에 출두하여 조사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검찰 수사가 형평성을 잃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천정배 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권력기관의 사유화와 보수언론의 탐욕이 만들어낸 재앙이다"라고 말했다. 홍준표 의원은 "전직 대통령 수사를 하면서 모욕감을 주는 행동을 한 셈"이라며 검찰을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 여론 속에서 임채진 검찰총장과 이인규 대검찰청 중수부장이 사퇴했다. 검찰 수사와 관련된 시국 선언이 이어졌다.

2015년 1월,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이인규는 국정원이 피의사실을 과장하여 언론에 흘렸다고 밝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가족은 미국 유학 생활비 지출 등 개인적인 용도로 친구로부터 약 1.5의 돈을 빌려 썼다. 이는 약 5억 달러에 달하는 불법 자금을 정치 자금과 가족 활동에 사용했다고 알려진 이전 대통령들의 스캔들과는 대조적이다.

5.3.3. 입장 표명

2009년 4월 7일, 노무현은 자신의 개인 홈페이지에 "저와 제 주변의 돈 문제로 국민 여러분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 드리고 있습니다.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라는 내용의 사과문을 올렸다. 그는 "더욱이 지금껏 저를 신뢰하고 지지를 표해주신 분들께는 더욱 면목이 없습니다. 깊이 사과드립니다."라고 덧붙였다.

2009년 4월 22일, 노무현은 '사람사는세상'을 폐쇄하며, "더 이상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5.4. 죽음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 뒷산에서 투신하여 서거하였다. 부산대학교 병원 측은 사망 원인이 두부 외상이라고 발표했다. 경남지방경찰청장은 노무현이 경호원을 심부름 보낸 후 투신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경찰은 노무현 대통령의 사망 원인을 투신 자살로 최종 확인했다.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유서를 남겼다고 밝혔다.

노무현의 죽음은 여러 논란을 야기했다. 검찰 수사가 형평성을 잃었다는 비판과 함께, '정치 보복'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또한, 검찰이 피의사실을 공표하여 피의 사실 공표 금지법을 위반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후 검찰 책임론이 거세지자 임채진 검찰총장과 이인규 대검찰청 중수부장은 사퇴했다. 2015년 1월,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이인규는 국정원이 피의사실을 과장하여 언론에 흘렸다고 밝혔다.

5.4.1. 각계 반응 및 애도

이명박 대통령은 "참으로 믿기 어렵고 비통한 일"이라며 애도를 표했다. 후진타오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은 "노 전 대통령은 나의 오래된 친구"라며 "재임 기간에 중국과 한국의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 수립 및 발전을 위해 중요한 기여를 했다"라고 조문했다. 원자바오 총리는 노무현의 대(對)중국 관계 중시와 솔직함, 성실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한중 관계 발전을 위한 공헌을 기억하겠다고 애도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긴급 애도 성명을 발표, 노무현 재임 기간 한국과 미국 간의 '강력하고 활기찬'(strong and vital) 관계 형성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아소 다로 일본 총리는 외상 시절 노 전 대통령을 만났던 기억을 떠올리며 애도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청와대에 "2004년 노 전 대통령의 영국 공식 방문은 한·영 양국 관계 증진에 중요한 이정표였다"라는 조문을 보냈다. 반기문 국제 연합 사무총장은 "노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 촉진을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라며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역시 애도의 뜻을 전했다.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추도식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추도식

길을 봉쇄하고 있는 경찰 버스에 붙여 있는 국화와 경향신문 호외
길을 봉쇄하고 있는 경찰 버스에 붙여 있는 국화와 경향신문 호외

2009년 7월 8일 서울시청 맞은편에 설치된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분향소
2009년 7월 8일 서울시청 맞은편에 설치된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분향소


2009년 5월 23일부터 29일까지 국장이 거행되었으며, 전국에 설치된 분향소에는 수십만 명의 조문객이 찾았다.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정치인들도 조문했다. 장례 직후 서울에서 산발적인 폭력 시위가 발생하여 72명이 구금되었다.

5.4.2. 유서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택 컴퓨터에 유서를 남기고 경호원과 함께 봉하마을 뒷산 등산 중 투신하여 서거하였다. 유서는 발견 즉시 공개되었으며, 가족에게 남기는 짧은 내용으로,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 드렸다"며 사과하고 시신을 화장하여 집 근처에 작은 묘비만 세워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너무 많은 분에게 빚을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한국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단순한 개인적 비극을 넘어,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특히, 그의 결백을 믿었던 지지자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8대 대통령 김대중은 "노무현 대통령은 그 어떤 대통령보다 한국 국민들을 사랑했다"면서, "부당한 조사 과정에서 그는 모욕과 좌절, 기만, 중상을 당했고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국민들 앞에서 자살이라는 선택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애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