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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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형욱은 일제강점기 황해도 신천군 출신으로, 육군사관학교 8기를 졸업하고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5.16 군사정변에 참여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을 지냈으며, 이후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했다. 3선 개헌을 반대하여 해임된 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를 폭로했다. 1979년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되었으며, 그의 사망과 관련된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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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욱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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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김형욱 |
한자 | 金炯旭 |
로마자 표기 | Gim Hyeonguk |
매큔-라이샤워 표기 | Kim Hyŏnguk |
출생일 | 1925년 1월 16일 |
사망일 | 1979년 10월 7일 (54세) |
출생지 | 일제 강점기 조선 황해도 신천 |
사망지 | 프랑스 파리 (실종 (김형욱 납치 암살 사건)), 사망 장소 숲 |
본관 | 김해(金海) |
호 | 봉산(鳳山) |
별명 | 남산 멧돼지 |
종교 | 불교 |
배우자 | 신영순 |
자녀 | 김정한(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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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 |
지휘 | 육군 제6관구사령부 정보참모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정축재처리위원장 중앙정보부 부장 |
국가 | 대한민국 |
직책 | 중앙정보부 부장 |
의장 | 박정희 대한민국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
임기 | 1963년 7월 12일 ~ 1969년 10월 20일 |
대통령 | 김현철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 |
총리 | 김현철 대한민국 내각수반 최두선 대한민국 국무총리 정일권 대한민국 국무총리 |
군복무 | 대한민국 육군 |
정당 | 무소속 |
복무 기간 | 1949년 ~ 1963년 10월 13일 |
계급 | 준장 |
근무 | 육군 제6관구사령부 국가재건최고회의 중앙정보부 |
참전 | 한국 전쟁 |
기타 경력 | 제6대 대한사격연맹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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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린 시절
황해도에서 태어난 김형욱은 고등학교 졸업 후 남한으로 내려와 1949년 김종필과 함께 육군사관학교 8기로 졸업했다. 한국 전쟁 당시 보병 소대장으로 복무했으며, 1955년에는 미국 조지아 주 포트 베닝에 있는 미 육군 보병학교에 다녔다.[42]
2. 1. 생애 초반
1925년 1월 16일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과 입대하기 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1977년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김형욱이 밝힌 바에 따르면 소련군이 고향에 진주함에 따라 공산학정을 견디지 못해 1946년에 월남했다고 한다.[40] 육군사관학교 8기생으로 입학하여 약 6개월의 교육과정을 이수한 뒤 1949년에 졸업하였으며, 김종필이 동기생이다. 1963년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4년 후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적극적이고 말없이 열심히 일하는 스타일로, 일찍이 박정희에게 발탁되어 신뢰를 받았다. 육사 동기인 김종필과 친밀했지만, 군 복무 시절 특정 조직의 하수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소신을 지키다가 박정희를 만나면서 신뢰관계를 구축하였다. 육군 제6관구사령부 정보참모, 육군 제6관구사령부 작전참모 등을 지냈으며, 진급은 늦은 편이었다.
1960년 5월 김종필, 길재호, 오치성 등 육사 8기생 중령 8명을 비롯한 고급 장교들과 함께 선배 장교들을 타도하려는 하극상 계획을 세웠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41] 그러나 위기를 넘기고 1961년부터 박정희와 군사 정변을 기획하였다.
1963년 야당의 윤보선 대선 후보가 민주공화당 대선 후보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여순 반란사건에 관련되어 있다는 발언을 하였으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반박하였다.[42]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남한으로 내려와 김종필과 함께 1949년 육군사관학교 8기로 졸업했다. 한국 전쟁 당시 보병 소대장으로 복무했으며, 1955년에는 미국 조지아 주 포트 베닝에 있는 미 육군 보병학교에 다녔다.
2. 2. 5.16 군사 정변 전후
1961년 5·16 군사 정변 당시 중령으로 참여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이 되었고, 내무분과 위원장과 운영기획 위원장을 지냈다.[43] 이후 5월 동지회 지도위원, 부정축재 처리위원을 역임했다. 1963년 7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김형욱을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했으며,[43] 같은 해 10월 13일 육군 준장으로 예편했다.
일제강점기 황해도 신천군 출신으로, 본관은 김해 김씨이다.[27] 1949년 육군사관학교 8기를 졸업하고, 한국 전쟁 중에는 수도사단 중대장을 역임했다. 1961년 5월 16일, 김종필 등 육사 8기 동기들과 함께 5·16 군사정변에 핵심 인물로 참여하여, 같은 해 5월 27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에 취임하여 내무분과위원장, 운영기획위원장을 역임했다.
3. 정치 활동
김형욱은 1961년 5·16 군사정변에 대령으로 참여하여 장면 총리를 체포하는 데 병력을 이끌었다.[2] 군사정권 하에서 2년간 내무부 장관을 지냈으며, 1963년 3월부터 1969년 10월까지 중앙정보부(KCIA) 부장을 역임했다. 중앙정보부장 재임 시절, 그는 잔혹함과 부패로 악명이 높았으며, '날으는 돈가스', '공포의 삼겹살', '남산 멧돼지' 등의 별명으로 불렸다.[2][3]
5월 16일, 김종필 등 육사 8기 동기들과 함께 5·16 군사정변에 참여, 5월 27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에 취임하여 내무분과위원장, 운영기획위원장을 역임했다.[4] 1963년 7월 제4대 중앙정보부(KCIA) 부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10월 육군 준장으로 예편했다. 경희대학교 정경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에는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27][28] 인민혁명당 사건(1964년), 동베를린 사건(1967년), 통일혁명당 사건(1968년) 수사를 지휘했다.
3선 개헌으로 인한 혼란 속에 1969년 10월 20일 KCIA 부장에서 해임되었다.[59] 1971년 제8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유신으로 의원직을 박탈당하면서 박정희를 원망하게 되었다.
1973년 미국으로 망명하여 코리아게이트 발각 후,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와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한 개입을 폭로했다. 1977년 8월 17일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에 제4차 총회 개최를 축하하는 전보를 보냈다.[29]
1977년 6월 22일, 프레이저 위원회에 출석, 코리아게이트 사건과 박통선의 활동에 대해 증언하며 일본 경찰이 김대중 납치 사건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8] 박통선은 증언을 막기 위해 100만달러를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회고록을 출판하지 않기로 하고 50만달러를 받았지만, 약속을 어기고 1979년 4월 일본에서 회고록을 출판했다.
3. 1. 제3공화국 시절
1963년 10월 15일에 치러진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김형욱이 이끄는 중앙정보부는 일반 시민으로 가장하여 야당 후보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사퇴를 막았고, 이로써 야당을 분열시켜 야당 후보 난립으로 박정희 후보를 당선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박정희는 10만여 표 차이의 근소한 차이로 당선되어 질책을 당하기도 했다.[2]1964년 8월 중앙정보부를 시켜 인민혁명당 사건을 수사, 발표하게 하였으며 이때 도예종을 비롯한 혁신계 인사·언론인·교수·학생 등 41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이 사건은 무더기 구속 외에도 이들의 구속, 처벌을 거절한 검사들에 대한 김형욱의 압력에 의한 공안검사의 사표 제출 문제와 고문 문제가 나중에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해 6월부터 한일협정을 둘러싼 6·3사태와 국회 비준 파동 때에도 그의 영향력은 크게 작용했다. 6·3사태를 전후하여 학생운동가들 및 재야인사들, 학원 동태를 수집, 파악하였으며 또한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을 움직여서 김종필에게 2차 외유를 권고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인혁당 사건 조사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인민혁명당 사건은 바로 6·3사태 배후 인물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회고록에 기록하였다. 또한 한일협정 국회 비준 과정에서도 야당 의원들을 내사, 회유, 협박을 하는 등의 압력을 행사하였다.[2]
1963년 7월 12일, 제4대 중앙정보부(KCIA) 부장에 취임했다. 같은 해 10월, 육군 준장 계급으로 예편했고, 같은 해 경희대학교 정경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에는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27][28] 인민혁명당 사건(1964년), 동베를린 사건(1967년), 통일혁명당 사건(1968년)을 수사했다.
3선 개헌으로 인한 혼란 속에 1969년 10월 20일 KCIA 부장에서 해임되었다.
3. 2. 주요 활동
1961년 5·16 군사정변에 참여하여 병사들을 이끌고 장면 총리를 체포했다. 군사정권에서 2년 동안 내무부 장관을 지냈고, 1963년 3월부터 1969년 10월까지 중앙정보부(KCIA) 부장을 역임했는데, 잔혹함과 부패로 악명이 높았다. 그의 별명은 '날으는 돈가스'(날으는 돈가스|Nareuneun Dongaseu한국어), '공포의 삼겹살'(공포의 삼겹살|Gongpoui Samgyeopsal한국어)[2], '남산 멧돼지'(남산 멧돼지|Namsan metdwaeji한국어)[3]이다.5월 16일, 김종필 등 육사 8기 동기들과 함께 5·16 군사정변에 참여하여, 5월 27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에 취임[4]하여 내무분과위원장, 운영기획위원장을 역임했다.
1963년 7월 12일, 제4대 중앙정보부(KCIA) 부장에 취임했다. 같은 해 10월, 육군 준장 계급으로 예편했고, 경희대학교 정경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에는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27][28] 인민혁명당 사건(1964년), 동베를린 사건(1967년), 통일혁명당 사건(1968년)을 수사했다.
1965년 대한사격연맹 제6대 회장에 피선되었다. 1967년 운동권 단체인 민족주의 비교연구회를 적발하고 이적행위를 수사하였으며, 같은 해 봄에는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일명 동백림 간첩단 사건)을 수사, 7월 8일에 발표하면서 국내외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정부운동가들의 동태를 면밀히 감시하는 한편 이들의 행위를 비판하는 한편 반정부운동에 대해 강하게 탄압하였다. 1968년에는 통일혁명당 사건의 수사를 주관하였다.
3선 개헌으로 인한 혼란 속에 1969년 10월 20일 KCIA 부장에서 해임되었다. 1971년 5월 제8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972년 발생한 유신으로 의원직을 박탈당하면서 유신의 주모자인 박정희를 원망하게 되었다.
1973년 4월, 타이완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망명했다. 코리아게이트 발각 후,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와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한 개입을 잇달아 폭로했다. 2021년 연세대학교 김대중 도서관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김형욱이 1977년 8월 17일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에 제4차 총회 개최를 축하하는 전보를 보내 격려의 말을 전한 것으로 드러났다.[29]
1977년 6월 22일, 프레이저 위원회에 출석하여 코리아게이트 사건과 박통선의 활동에 대해 증언했다. 그는 또한 일본 경찰이 김대중 납치 사건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8] 박통선은 그에게 증언하지 않도록 100만달러를 제안했지만 김형욱은 거절했다. 회고록을 출판하지 않기로 하고 50만달러를 받았지만, 약속을 어기고 1979년 4월 일본에서 회고록을 출판했다.
3. 3. 3선 개헌과 경질
김형욱은 박정희의 3선 연임을 위한 3선 개헌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67년 6.8 부정선거를 통해 개헌선을 확보한 박정희 정권은 이듬해부터 3선개헌 분위기를 조성하였다.[44] 김형욱은 공화당 내부의 반대, 특히 차기 대권을 노리던 김종필계의 반발을 무력화하기 위해 국회의원들을 사찰하고 비리를 캐냈으며,[45] 필요할 때는 함정을 파서 약점을 잡은 뒤 협박, 회유, 공갈을 통해 반대파를 제거했다.[46]1968년 5월에는 '국민복지회 사건'을 일으켜 여당 국회의원인 김용태와 최영두를 중앙정보부로 연행하여 고문했다.[47] 이는 정치적인 이유로 현직 국회의원을 고문한 최초의 사건이었다.[48][49] 이 사건으로 김종필계는 큰 타격을 입었고, 김종필은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항의했다.[53] 1969년에는 3선개헌에 반대하는 이만섭 의원을 암살하려 시도하기도 했다.[56] 김성곤 의원의 제보와 박정희의 개입으로 암살 시도는 중단되었지만,[57] 김형욱의 무자비함과 권력 남용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3선 개헌이 통과된 후, 1969년 10월 20일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장에서 전격 경질되었다.[59] 이는 김형욱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며, 박정희의 연막 작전에 속았다고 회고했다.[60] 그는 오랫동안 박정희에게 충성했지만, 경질된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게 되었다.
3. 3. 1. 국민복지회 사건
1967년 6.8 부정선거를 통해 개헌선을 확보한 박정희 정권은 이듬해부터 3선개헌 분위기를 조성하였다.[44] 개헌 논의 초기에는 여당인 공화당 내부에서도 반대가 있었다. 특히 차기 대권을 노리며 공화당 내 주류파에 속했던 김종필계의 반대가 심했다. 김형욱은 이 시점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국회의원들을 사찰하여 비리를 캐냈고,[45] 필요할 때는 함정을 파서 약점을 잡은 뒤 협박, 회유, 공갈을 통해 반대파를 무력화했다.[46] 1968년 5월 '국민복지회 사건'이 터지자 여당 국회의원인 김용태와 최영두를 중앙정보부로 연행하여 고문하였다.[47] 이는 정치적인 이유로 현직 국회의원을 고문한 최초의 사건이었다.[48][49] 최영두 의원은 고문 후유증으로 3년도 못 가 사망하였다.[50]국민복지회 사건은 아직도 진실을 정확히 알기 어려운 정치 스캔들이지만,[51] 당시 김형욱은 송상남이 작성한 '시국판단서'를 근거로 복지회가 김종필을 차기 후계자로 추대, 모의한 반국가단체라고 결론지었다. 박정희 신봉자였던 김형욱에게 후계자를 논하는 것 자체가 용서할 수 없는 불충이었다. 김용태 등은 '농촌 근대화운동'을 위한 조직이라고 항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김용태, 최영두 등 김종필계 당원 다수가 공화당에서 제명되면서[52] 개헌을 반대한 김종필계는 큰 타격을 입었다. 독재자 밑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후계자 문제를 거론하며 역린을 건드린 대가는 혹독했다. 5월 30일, 울분에 찬 김종필은 정계은퇴를 선언하며 항의의 뜻을 표현했다.[53]
3. 3. 2. 이만섭 암살 시도
1969년 여당인 공화당은 박정희에게 김형욱과 이후락의 해임을 '3선개헌의 선행조건'으로 제시하였다.[54] 1969년 7월 29일, 3선개헌에 관한 논의차 비공개로 진행된 영빈관 의원총회에서 이만섭 의원이 이 제안을 하여 당의 공식입장으로 결정되었다. 도청을 통해[55] 이 소식을 접한 김형욱은 이만섭 암살지령을 중앙정보부 간부 두사람에게 내렸다.[56] 김성곤 의원이 제보를 받고 뒤늦게 박정희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며 박정희가 개입하면서 암살시도는 제지당했다.[57] 한편 박정희는 이만섭의 제안한 3선개헌 조건부 찬성에 대해 처음에는 불같이 화를 내며 거부했으나,[58] 거듭된 공화당 지도부의 설득과 개헌 필요성 때문에 이를 수용하는쪽으로 돌아섰다.3. 3. 3. 몰락의 시작
3선 개헌이 날치기로 통과된 후 국민투표로 확정되자, 1969년 10월 20일에 김형욱은 전격적으로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경질되었다.[59] 김형욱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박정희가 유임시킬 것처럼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연막작전을 펴다가 갑자기 해임했기 때문이다.[60] 훗날 김형욱은 "갑자기 당한 일이라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비밀서류 한 장도 못 갖고 나왔다."고 회고했다.[61] 또한 지난 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박정희의 그림자가 되어 밤낮없이 온갖 비난을 받으며 충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경질된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같은 날 함께 경질된 이후락은 박정희 신봉자답게 김형욱과는 정반대로 처신했다.[62][63] 그 때문인지 이후락은 곧 주일본 대사로 발령받았으나,[64] 김형욱은 한동안 무직 상태로 지냈다. 이후에도 이후락은 중앙정보부장으로 복귀하여 권력 실세가 되었지만,[65] 김형욱은 본격적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3. 4. 미국 망명
1973년 4월 15일, 김형욱은 대만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72] 이는 치밀하게 계획된 것으로, 중앙정보부장 시절 비서실장이었던 문학림과 함께 대만으로 출국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대만 학술원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 위함이었으나, 실제로는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기 위한 것이었다.[72]1971년 제8대 총선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 후보 5번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66] 1972년 유신 선포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의원직을 잃었다.[73][67] 1973년 3월, 사실상 대통령이 임명하는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 명단에서도 제외되었다.[73][67] 이는 과거 중앙정보부장에서 경질된 이후 야당 지도자인 김대중과 비밀리에 자주 접촉하며 협력했던 것 때문으로,[68][69][70] 이 일로 청와대로 불려가 추궁당했으며,[71] 총선 공천 후보 명단에서도 탈락했다. 이후 박정희에게 깊은 원망을 품고 망명을 결심하게 되었다.
1977년 6월 22일, 프레이저 위원회에 출석하여 코리아게이트 사건과 박통선의 활동에 대해 증언하면서, 일본 경찰이 김대중 납치 사건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8]
3. 5. 박정희와의 갈등
박정희는 3선 개헌의 1등 공신인 김형욱을 중앙정보부장에서 해임하고,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에서도 제외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김형욱은 미국으로 망명하여 김대중 납치 사건 등 박정희 정권을 폄훼하는 활동을 했다.[74][73]1973년 4월, 박정희는 김형욱을 설득하기 위해 정일권, 김종필 등 정부 고위급 인사들을 미국에 특사 형식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김형욱은 귀국을 거부하고, 1977년 6월 2일 뉴욕타임스와 기자회견을 갖고 박정희 정권의 내부 비리를 폭로했다.[73]
1977년 6월 22일, 김형욱은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하여 코리아게이트 사건과 박통선(Tongsun Park)의 활동에 대해 증언하고,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한 일본 경찰의 사전 인지 의혹을 제기하는 등 박정희를 강력히 비판했다.[8][75]
3. 6. 생애 후반
1973년 4월, 타이완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망명했다.[4][5][6][7] 코리아게이트 발각 후,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와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한 개입을 잇달아 폭로했다. 2021년 연세대학교 김대중 도서관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김형욱이 1977년 8월 17일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에 제4차 총회 개최를 축하하는 전보를 보내 격려의 말을 전한 것으로 드러났다.[29]1976년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터지자 1977년 6월 22일 김형욱은 미국 연방 하원의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가 박정희 정부의 비밀스러운 사건들을 거침없이 폭로하였다.[75] 프레이저 위원회에서 코리아게이트 사건과 박통선(Tongsun Park)의 활동에 대해 증언했고, 일본 경찰이 김대중 납치 사건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8] 박통선은 증언을 막기 위해 100만달러를 제안했지만 김형욱은 거절했다. 이후 일본으로 가서 김경재(필명 박사월)가 쓴 회고록을 출판했는데,[76] 이 책은 1980년대의 밀리언셀러가 되었다. 김형욱은 회고록을 출판하지 않기로 하고 50만달러를 받았지만, 약속을 어기고 1979년 4월 일본에서 회고록을 출판했다. 이에 박정희는 김형욱을 겨냥한 '반국가행위자의처벌에관한특별조치법'을 1977년 12월 31일에 제정했다.
회고록 출판과 관련하여 중앙정보부 차장보였던 윤일균은 박정희 정부와 중앙정보부가 《김형욱 회고록》 출판을 막고자 자주 접촉했고, 김형욱도 몇 십만 달러를 대가로 합의하여 회고록 원본을 중앙정보부에 넘겨주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남겨둔 회고록 사본을 일본 출판사가 김형욱과 합의 없이 출판했다는 주장이 있다.[77]
1979년 10월 1일, 에어프랑스 콩코드기를 타고 케네디 공항을 출발하여 혼자 파리로 향했다. 리츠 파리에서 10월 7일 아침까지 머물렀고, 같은 날 오전 10시경 웨스트엔드 호텔에 체크인했다. 체류 중 김형욱은 매일 카지노 "르 그랑 세르클"에 다녔다. 7일 오후 7시경 동양인과 함께 카지노를 나서는 모습이 목격된 것을 마지막으로 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행방에 대해서는 파리 교외 살해설, 납치 귀국설 등이 제기되었으나,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27]
4. 사망
김형욱은 1979년 10월 7일 프랑스 파리의 한 카지노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후 실종되었다.[9]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청와대 지하에서 직접 사살당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10]
2005년 2월 월간조선은 김형욱이 고용된 여성 연예인에 의해 뉴저지에서 파리로 유인된 후, 한국 정부의 지시를 받은 프랑스 범죄 조직에 의해 납치되었다고 보도했다.[11] 그리고 닭 농장의 분쇄기에 갈려 닭 사료로 만들어졌다고 한다.[12]
2005년 5월 국가정보원 진실·화해위원회는 김형욱이 후임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의 지시로 살해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보고서에 따르면 김형욱은 소음기가 장착된 권총으로 사살되었고 시체는 파리 외곽 숲에 유기되었다.[9][13] 김형욱 실종 3주 후,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했다.[14]
4. 1. 미하원 청문회 증인의 실종
1977년 6월 22일, 김형욱은 미국 하원 프레이저 위원회에 출석하여 코리아게이트 사건과 박통선의 활동에 대해 증언했다. 그는 또한 김대중 납치 사건을 일본 경찰이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8] 박통선은 그에게 증언하지 않도록 100만달러를 제안했지만 김형욱은 거절했다. 김형욱은 회고록을 출판하지 않기로 하고 50만달러를 받았지만, 약속을 어기고 1979년 4월 일본에서 회고록을 출판했다.4. 2. 사후
1982년 검찰은 김형욱에게 '반국가행위자의처벌에관한특별조치법'을 적용해 기소하였으며 궐석재판으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 김형욱의 사망설이 나돌자 1984년 10월 8일에 그의 가족들은 사망신고를 했다. 민주화 이후 김형욱 유족은 특별조치법 중 상소권 제한에 대해 위헌이라고 헌법재판을 신청하여 헌법재판에서 승소하였고, 진행된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이 나왔다. 또한 특별조치법 다수 조항에 대한 위헌제청신청도 받아들여져 특별조치법 전체가 위헌이라는 결정으로 폐지되었다.[30]2009년 5월 초, 미국 뉴저지주의 한 공동묘지에서 김형욱의 묘가 발견되었다고 재미 한국인 안치용이 2009년 9월 21일 밝혔다. 묘비에 따르면 김형욱의 사망 날짜는 10월 7일이다.[79] 그러나 시신이 산산조각 났다는 진술이 있고, 묘비상의 사망일자는 실제로는 김형욱의 실종 일자이므로 정확한 사망일자는 아니다. 김경재 전 의원은 브레이크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김형욱의 아들 김정한이 2002년 가을 사망한 후 아들의 묘지 앞에 가족묘를 조성하기 위해 김형욱의 추모비 성격을 지닌 가묘를 조성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80]
1982년 서울형사지방법원은 결석재판에서 김형욱에게 반국가행위처벌에관한특별조치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과 자격정지 7년을 선고했다. 또한 서울 성북구 삼선동의 토지 1369m2를 포함한 부동산과 주식 등의 재산도 몰수했다. 1991년 서울가정법원은 “1984년 10월 8일에 사망한 것으로 본다”는 실종선고 판결을 내렸다. 1996년 반국가행위처벌에관한특별조치법이 위헌이라는 결정에 따라 형사재판에서 김형욱은 무죄가 선고되었다. 김형욱의 유족은 1995년부터 소송을 거쳐 대부분의 몰수 재산을 되찾았지만, 삼선동 토지의 소유권은 국가에서 건설회사로 이전된 후, 그곳에 건설된 연립주택의 입주자들에게 다시 이전되었다. 유족은 소유권을 되찾을 수 없게 되자 1999년 국가와 건설회사를 상대로 18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30]
2004년 김형욱의 부인과 차남은 2001년 48세로 사망한 장남의 미망인과 손자를 상대로 뉴저지주 지방법원에서 장남 일가가 살고 있는 집의 소유권 51%를 주장하며 지분을 되찾으려는 소송을 제기했다. 그 결과 법원은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고, 장남의 아내는 2004년 말에 집을 매각했다. 2005년, 한국의 많은 언론은 장남의 아내에게 김형욱에 대해 질문했지만, 유족의 재산 소송에는 관심이 없다는 점에 장남의 아내는 불만을 표시했다. 장남의 아내에 따르면, 장남은 중학생 시절 김형욱과 함께 사냥을 나갔다가 지뢰를 밟아 다리를 다친 적이 있어, 김형욱은 생전에 장남을 매우 아꼈다고 한다.[31]
5. 진상 규명
2005년 2월 3일, 국가정보원의 "과거사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과거사 진실위)"는 동베를린 사건, 민청학련 사건, 인민혁명당 사건, 김대중 납치 사건, 대한항공 폭파 사건, 정수장학회 문제, 중부지역당 사건과 함께 김형욱 실종 사건을 우선 조사 대상으로 선정했다.[32] 같은 해 5월 25일, 과거사 진실위는 중간 보고서를 발표하여 김형욱이 KCIA 요원에 의해 납치·살해되었다고 결론지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KCIA 부장 김재규의 지시에 따라 이상열 주 프랑스 공사가 계획을 세우고, 프랑스에서 연수 중이던 KCIA 요원 신모(본명 편모)와 이모(본명 김모)가 실행했다. 이들은 동유럽 출신자 2명을 고용하여 김형욱을 납치·살해하고 시체를 인근 야산에 유기했다.[33] 사건의 전모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졌던 이상열은 과거사 진실위와의 면담에서 자신의 연루는 인정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았고, 결국 진실을 밝히지 못한 채 2006년 4월 병사했다.[34][35]
한편, KCIA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대통령 경호실의 연루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다. 김형욱의 회고록을 출판한 김경재 전 민주당 국회의원에 따르면, 당시 민주화 운동 활동가였던 송진섭 전 안산 시장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당시, 박정희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옆방에 수감되었던 박선호 전 KCIA 의전과장으로부터 "김형욱은 경호실에 의해 납치되어 청와대 지하실에서 차지철 경호실장의 손으로 직접 사살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경재 자신은 서울까지 이송하는 것이 어렵다는 이유로 파리에서의 살해에 무게를 두고 있다.[36]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은 사건 당시 KCIA 총무국장이었으며, 박종규 전 경호실장의 연루를 시사했고, 윤일균 해외 담당 차장도 KCIA의 연루를 부인했다.[37]
6. 학력
연도 | 내용 |
---|---|
1949년 | 육군사관학교 8기 |
1950년 | 육군보병학교 수료 |
1951년 | 육군공병학교 수료 |
1951년 | 육군포병학교 졸업 |
1953년 | 육군대학 졸업 |
1963년 |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 학사 |
1967년 | 경희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 석사 |
7. 명예 박사 학위
wikitext
8. 저서
김형욱의 회고록 《혁명과 우상》은 1985년에 대한민국에서 출판되었다.[15]
9. 김형욱을 연기한 배우들
다음은 김형욱을 연기한 배우들이다.
=== TV 드라마 ===
방영 연도 | 작품명 | 방송사 | 배역 |
---|---|---|---|
1993년 | 제3공화국 | MBC | 박상조 |
1993년 | 다큐멘터리극장 - 김형욱 편 | 김복만 | |
1995년 | 제4공화국 | MBC | 백일섭 |
1995년 | 코리아게이트 | SBS | 조경환 |
1998년 | 삼김시대 | SBS | 조경환 |
2003년 | 야인시대 | SBS | 박상만 |
2004년 | 영웅시대 | MBC | 손호균 |
2005년 | PD수첩 - 현장 검증! 김형욱 암살 사건[20][21] | MBC | |
2005년 | 그것이 알고 싶다 - 543회[22] | SBS | |
2020년 | 역사저널 그날[18] | KBS | |
2021년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2 - 12회[19] | SBS |
=== 영화 ===
9. 1. TV 드라마
방영 연도 | 작품명 | 방송사 | 배역 |
---|---|---|---|
1993년 | 제3공화국 | MBC | 박상조 |
1993년 | 다큐멘터리극장 - 김형욱 편 | 김복만 | |
1995년 | 제4공화국 | MBC | 백일섭 |
1995년 | 코리아게이트 | SBS | 조경환 |
1998년 | 삼김시대 | SBS | 조경환 |
2003년 | 야인시대 | SBS | 박상만 |
2004년 | 영웅시대 | MBC | 손호균 |
2005년 | PD수첩 - 현장 검증! 김형욱 암살 사건[20][21] | MBC | |
2005년 | 그것이 알고 싶다 - 543회[22] | SBS | |
2020년 | 역사저널 그날[18] | KBS | |
2021년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2 - 12회[19] | SBS |
9. 2. 영화
10. 역대 선거 결과
연도 | 선거 종류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
1971년 | 대한민국 제8대 국회의원 선거 | 민주공화당 | 6,254,921표 (48.8%) | 당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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