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조의 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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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조의 정변은 1009년 고려 목종 시기에 일어난 사건으로, 강조가 김치양 일파를 제거하고 목종을 폐위시킨 후 대량원군 왕순을 현종으로 옹립한 사건이다. 목종의 모후인 천추태후가 섭정하며 김치양을 등용하고 그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목종은 강조에게 김치양의 음모를 막고 대량원군을 후계자로 삼아달라고 부탁했다. 목종이 위독하다는 소문을 들은 강조는 개경으로 진격하여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즉위시켰으며, 김치양 일파를 제거했다. 이 사건을 구실로 거란은 1010년에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을 일으켰으며, 강조는 목종을 살해하고 천추태후를 귀양 보냈다.
997년 고려 목종이 즉위하자 모후인 천추태후가 섭정을 하였고, 천추태후는 귀양 보냈던 정부(情夫) 김치양을 불러들여 요직에 임명하며 권세를 잡게 하였다.[1][2] 후사 없이 병석에 누운 목종은 김치양과 천추태후가 그들 사이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알고, 채충순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대량원군을 후계자로 삼아 줄 것을 부탁했다.[3]
1009년 1월, 목종은 강조에게 개경 궁궐 수비를 명했다. 당시 김치양 일파가 나라를 빼앗으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3] 목종이 죽었다는 헛소문이 퍼지자, 강조는 군사 5,000명을 이끌고 개경으로 향했다.[1] 평주에서 목종이 살아있음을 알았으나, 김치양 일파 제거를 위해 왕의 폐위를 결심했다.[4] 1009년 2월 3일, 목종을 퇴위시키고 왕순(현종)을 왕위에 올렸다.[3] 강조는 김치양 부자를 죽이고 천추태후와 목종을 귀양 보냈으며, 목종을 양국공이라 칭하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했다.[2]
2. 배경
2. 1. 천추태후의 섭정과 김치양의 발호
997년 고려 목종이 18세에 즉위하였으므로 모후인 천추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고, 귀양보냈던 천추태후의 정부(情夫) 김치양을 불러 들였다.[1] 김치양은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에 임명되고 뒤이어 우복야겸삼사사(右僕射兼三司事)에 임명되는 등 권세를 잡았다.[2] 목종이 후사가 없이 병석에 눕게 되자, 김치양과 천추태후는 그들 사이에 낳은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삼으려고 음모하였다.[1] 이를 눈치 챈 목종은 중추원 부사(副使) 채충순에게 김치양의 음모를 말하고 대량원군을 후계자로 삼아 사직을 타성(他姓)에 넘기지 않도록 부탁했다.[3]
2. 2. 목종의 후계 문제
997년 고려 목종이 18세에 즉위하자 모후인 천추태후가 섭정을 하였고, 귀양 보냈던 천추태후의 정부(정부) 김치양을 불러들였다.[1] 김치양은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에 임명되고 뒤이어 우복야겸삼사사(右僕射兼三司事)에 임명되는 등 권세를 잡았다.[2] 후사가 없이 병석에 눕게 된 목종은 김치양과 천추태후가 그들 사이에 낳은 아들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1] 이에 목종은 중추원 부사(副使) 채충순에게 김치양의 음모를 알리고 대량원군을 후계자로 삼아 사직을 타성(他姓)에 넘기지 않도록 부탁했다.[3]
3. 경과
3. 1. 강조의 거병과 개경 진입
1009년 1월, 목종은 급변하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중추사 우상시 겸 서북면 도순검사인 강조에게 개경의 궁궐을 수비하게 하였다. 이때 세간(世間)에서는 목종이 위독한 틈을 타 김치양 등이 나라를 빼앗으려 한다는 풍문이 돌았다.[3]
이윽고 목종이 죽었다는 헛소문이 전해지자 강조는 별장(別將)을 시켜 대량원군 왕순(후일 현종)을 맞게 하고,[3] 자기는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향했다.[1] 강조는 평주(평산)에 이르러 왕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한때 주저하다가, 목종이 살아 있는 한 천추태후와의 관계로 김치양 일파를 제거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왕을 폐위할 것을 결심하고 개경으로 들어갔다.[4] 그리하여 1009년 2월 3일 목종에게 퇴위를 강권하여 왕순을 왕으로 세웠다.[3]
3. 2. 목종 폐위와 현종 즉위
1009년 1월, 목종은 급변하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중추사 우상시 겸 서북면 도순검사인 강조에게 개경의 궁궐을 수비케 하였다. 이때 세간에서는 목종이 위독한 틈을 타 김치양 등이 나라를 빼앗으려 한다는 풍문이 돌았다.[3]
목종이 죽었다는 헛소문이 전해지자, 강조는 별장(別將)을 시켜 대량원군 왕순(후일 현종)을 맞게 하고,[3]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향했다.[1] 강조는 평주에 이르러 왕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한때 주저하다가, 목종이 살아 있는 한 천추태후와의 관계로 김치양 일파를 제거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왕의 폐위를 결심하고 개경으로 들어갔다.[4] 1009년 2월 3일, 강조는 목종에게 퇴위를 강권하여 왕순을 왕으로 세웠다.[3] 그는 김치양 부자를 죽이고 천추태후와 목종을 귀양 보냈다. 강조는 목종을 양국공(讓國公)이라 하고 사람을 보내어 지키게 하였다.[2]
4. 결과
대량원군 왕순이 현종으로 즉위하였고, 거란은 이 사건을 구실로 1010년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을 일으켰다. 강조는 목종과 천추태후를 충주로 추방한 뒤, 이들이 적성현에 이르렀을 때 사람을 보내 목종을 살해했다. 천추태후는 황주로 도망가 여생을 마쳤다.[2]
4. 1. 현종 즉위와 고려 정세 변화
대량원군 왕순이 현종으로 즉위하였으며, 거란은 이 사건을 트집 잡아 1010년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을 일으켰다. 목종과 천추태후는 귀법사를 거쳐 충주로 추방되었는데, 강조는 불안을 느껴 모자가 적성현에 이르렀을 때 사람을 보내어 목종을 살해했으며, 천추태후는 황주로 도망가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2]4. 2. 제2차 고려-거란 전쟁 발발
거란은 강조가 일으킨 정변을 구실로 1010년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을 일으켰다. 대량원군 왕순은 현종으로 즉위하였다. 강조는 목종과 천추태후를 귀법사(歸法寺)를 거쳐 충주(忠州)로 추방하였으나, 불안을 느껴 이들이 적성현(積城縣)에 이르렀을 때 사람을 보내 목종을 살해하였다. 천추태후는 황주(黃州)로 도망가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2]4. 3. 목종과 천추태후의 최후
대량원군 왕순이 현종으로 즉위하였으며, 거란은 이 사건을 트집잡아 1010년에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목종과 천추태후는 귀법사(歸法寺)를 거쳐 충주로 추방되었는데, 강조는 불안을 느껴 모자가 적성현(積城縣)에 이르렀을 때 사람을 보내어 목종을 살해했으며, 천추태후는 황주(黃州)로 도망가 거기에서 여생을 마쳤다.[2]참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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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의 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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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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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의 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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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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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중세사회의 발전 > 고려의 발전과 제도 정비 > 고려의 대외정책 > 강조의 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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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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