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진정책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북진정책은 고려 태조가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려는 의지로 추진한 정책이다. 태조는 평양을 서경으로 삼아 중시하고, 훈요 10조를 통해 서경을 강조하며 거란을 적대시하는 등 북진정책을 펼쳤다. 이후 고려는 서희의 강동 6주 획득, 윤관의 동북 9성 개척으로 영토를 확장했으나, 여진족의 침입과 이자겸의 금나라 굴복,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실패 등으로 인해 북진정책은 쇠퇴했다. 원나라의 간섭으로 영토를 상실하기도 했으나, 공민왕 때 쌍성총관부를 탈환하고 요동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명나라의 압박으로 요동에서 철수하면서 북진정책은 더 이상 추진되지 못했다.

북진정책
📚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고려의 대외 관계 - 강동 6주
    강동 6주는 993년 서희의 담판으로 고려가 요나라로부터 확보한 압록강 동쪽의 여섯 지역으로, 과거 고구려 영토였으나 여진족이 거주하던 곳을 고려가 외교 및 군사적 정복을 통해 편입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거란의 침입을 막아 영유권을 확고히 한 지역이다.
  • 고려의 대외 관계 - 강조의 정변
    강조의 정변은 1009년 고려 무장 강조가 목종을 폐위하고 대량원군 왕순을 옹립한 사건으로, 왕위 계승 혼란 속에 강조가 군사를 이끌고 개경에 진입하여 발생했으며, 이후 거란의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의 빌미가 되었다.
  • 고려-여진 관계 - 한국-여진 국경 분쟁
    한국-여진 국경 분쟁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 한반도 북방에서 한국과 여진족 간에 발생한 영토 및 주권 분쟁으로, 고려의 영토 확장 시도와 조선의 무력·회유 정책에도 불구하고 후금의 침략을 야기했다.
  • 고려-여진 관계 - 동북 9성
    동북 9성은 고려 예종 때 윤관이 여진족을 정벌한 후 쌓은 9개의 성으로, 여진족의 반격과 유지의 어려움으로 인해 반환되었으며, 이후 여진족은 금나라를 건국하여 고려와 긴장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 고려의 정치 - 삼별초의 항쟁
    삼별초의 항쟁은 최씨 무신정권의 군사조직인 삼별초가 원종의 친몽 정책과 해산 명령에 반발하여 1270년 강화도에서 시작, 배중손을 중심으로 왕족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며 진도와 제주도에서 3년간 고려-원 연합군에 맞서 싸웠으나 1273년 진압되어 고려의 몽골 지배 강화와 원의 제주도 직접 통치를 가져왔으며, 민족적 저항의 상징으로 평가되지만 무신정권의 잔재라는 비판도 있다.
  • 고려의 정치 - 묘청의 난
    묘청의 난은 1135년 묘청이 서경 천도와 금나라 정벌을 주장하며 일으킨 반란으로, 개경 문벌 귀족 세력과의 갈등 속에 발생했지만 김부식의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고려 시대 정치와 사상적 갈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2. 변천

고려의 북진정책은 시대에 따라 변화를 겪었다.

태조 때 활발히 추진된 북진정책은 전기에도 이어져 고려-거란 전쟁을 통해 강동 6주를 획득하고 압록강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윤관별무반동북 9성을 개척하기도 했지만, 곧 반환하였다.

중기에는 이자겸금나라와의 군신관계를 수용하고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 실패하면서 북진정책은 퇴조하였다.

후기에는 원나라의 간섭으로 영토를 상실하기도 했으나,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탈환하고 요동 지역을 일시 점령하면서 다시 추진력을 얻는 듯했다. 그러나 명나라의 압박으로 요동에서 철수하면서 북진정책은 더 이상 추진되지 못하고 고려는 멸망을 맞이했다.

2.1. 태조

태조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의지로 북진정책을 추진하였다. 건국 얼마 후 고구려의 옛 도읍인 평양을 평양대도호부로 삼았다가 곧 서경(西京)이라 명명하고 수도인 개경에 버금가게 중시하였다. 태조는 자주 서경에 직접 행차하여 국경을 살펴보았는데, 이러한 노력의 결과 청천강에서 영흥만에 이르는 지역까지 영토를 넓힐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유훈인 훈요 10조에서도 "서경(西京)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니 만대 왕업의 땅이다. 마땅히 사계절의 중월(仲月)에는 행차하여 백 날이 넘도록 머물러 나라의 안녕(安寧)을 이루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또 태조는 북진정책의 일환 중 하나로 발해를 멸망시킨 원흉이자 북진정책 추진의 걸림돌인 거란을 적대시하였다.

2.2. 전기

태조 사후 북진정책은 고려의 대외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1차 고려-거란 전쟁서희소손녕과 담판하여 강동 6주를 획득하고 압록강까지 영역을 확대하였다. 그 후 윤관이 조직한 별무반의 활약으로 동북 9성을 개척하는데 성공했으나, 수비가 어렵고 여진족이 반환을 부탁하여 1년 만에 여진족에게 반환하였다.

2.3. 중기

여진족이 강성해지면서 완안아골타가 금나라를 세우고 고려에 군신 관계를 강요해 왔다. 당시 집권자였던 이자겸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군신관계 요구를 수용하면서 북진정책은 큰 타격을 입었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이후 서경의 분사제도가 폐지되면서 북진정책은 퇴조해 갔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이후 태조가 훈요 10조에서 중시하라고 강조한 서경이 역적의 땅으로 취급받게 된 사회 분위기도 한몫했다. 문벌귀족 사회가 보수화되면서 옛 고구려 영토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옅어지면서 북진정책은 큰 손상을 입었다.

2.4. 후기

원나라의 간섭으로 서경동녕부, 제주도탐라총관부, 철령 이북에 쌍성총관부가 설치되는 등 오히려 영토를 상실하기도 하였다. 이후 동녕부탐라총관부충렬왕 때 고려의 간청으로 반환되었지만, 쌍성총관부는 존속하였다. 공민왕은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탈환하고 옛 고조선고구려, 발해의 영토였던 요동 지역을 잠깐 점령하였다. 이로써 태조 이래 추진되던 북진정책이 빛을 발하는가 싶었지만 이내 고려는 명나라의 압박으로 요동에서 철수하였다. 이후 멸망 때까지 북진정책은 추진되지 않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