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릿 피츠제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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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개릿 피츠제럴드는 아일랜드의 정치인으로, 1926년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그는 벨베데레 칼리지와 더블린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에어 링거스에서 근무하며 경제 전문가로 활동했다. 1965년 상원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피네 게일 당에서 활동했으며, 1973년부터 1977년까지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이후 피네 게일 당 대표를 거쳐, 1981년과 1982년 두 차례 총리직을 수행했다. 재임 기간 동안 북아일랜드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으며, 1983년 뉴 아일랜드 포럼을 설립하고 1985년 앵글로-아일랜드 협정을 체결하는 데 기여했다. 2011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아일랜드 정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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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릿 피츠제럴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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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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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함 | 총리 |
별칭 | 선한 개릿 |
총리 (첫 번째 임기) | |
순서 | 8대 |
대통령 | 패트릭 힐러리 |
부총리 | 마이클 오리어리 |
임기 시작 | 1981년 6월 30일 |
임기 종료 | 1982년 3월 9일 |
이전 | 찰스 호히 |
이후 | 찰스 호히 |
야당 대표 (첫 번째 임기) | |
대통령 | 패트릭 힐러리 |
임기 시작 | 1977년 7월 5일 |
임기 종료 | 1981년 6월 30일 |
이전 | 잭 린치 |
이후 | 찰스 호히 |
총리 (두 번째 임기) | |
순서 | 8대 |
대통령 | 패트릭 힐러리 |
임기 시작 | 1982년 12월 14일 |
임기 종료 | 1987년 3월 10일 |
이전 | 찰스 호히 |
이후 | 찰스 호히 |
야당 대표 (두 번째 임기) | |
대통령 | 패트릭 힐러리 |
총리 | 찰스 호히 |
임기 시작 | 1982년 3월 10일 |
임기 종료 | 1982년 12월 14일 |
이전 | 찰스 호히 |
이후 | 찰스 호히 |
피나 게일 대표 | |
부대표 | 피터 배리 |
임기 시작 | 1977년 7월 1일 |
임기 종료 | 1987년 3월 10일 |
이전 | 리암 코스그레이브 |
이후 | 앨런 듀크스 |
외무부 장관 | |
총리 | 리암 코스그레이브 |
임기 시작 | 1973년 3월 14일 |
임기 종료 | 1977년 7월 5일 |
이전 | 브라이언 레니한 |
이후 | 마이클 오케네디 |
국회의원 | |
임기 시작 | 1969년 6월 |
임기 종료 | 1992년 11월 |
선거구 | 더블린 남동부 |
상원의원 | |
임기 시작 | 1965년 6월 23일 |
임기 종료 | 1969년 6월 18일 |
선거구 | 산업 및 상업 패널 |
개인 정보 | |
출생일 | 1926년 2월 9일 |
출생지 | Ballsbridge, 더블린, 아일랜드 |
사망일 | 2011년 5월 19일 |
사망지 | Phibsborough, 더블린, 아일랜드 |
안장지 | Shanganagh Cemetery, 샹킬, 더블린 |
정당 | 피나 게일 |
자녀 | 3, including 존 |
아버지 | 데스먼드 피츠제럴드 |
어머니 | 메이블 맥코넬 |
친척 | Eithne FitzGerald (며느리) |
교육 | 벨베데레 칼리지 |
2. 초기 생애
개릿 피츠제럴드는 1926년 더블린 볼스브리지에서 데즈먼드 피츠제럴드와 메이블 매코넬 피츠제럴드의 아들로 태어났다.[3] 그의 아버지는 1916년 부활절 봉기에 참여하고 신 페인에서 활동하는 등 아일랜드 독립 운동의 주요 인물이었으며, 어머니 메이블 역시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4] 이러한 가정 환경은 피츠제럴드가 정치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피츠제럴드는 1965년 상원 의원으로 선출되며 정계에 입문했다.[16] 1969년에는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곧 피네 게일 당내에서 중요한 인물로 부상했다.[16] 그는 당내 자유주의 세력을 대표하며 당의 현대화와 개혁을 추진했다. 데클런 코스텔로가 작성한 '정의로운 사회'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뭉친 자유주의 세력에 합류했고, 그의 자유주의적 사상은 보수적인 리엄 코스그레이브 당 대표에 대한 균형추 역할을 했다.[16]
피츠제럴드는 예수회 학교인 벨베데레 칼리지와 더블린 대학교 (UCD)에서 교육받았다. 1946년 UCD에서 역사, 프랑스어, 스페인어로 명예 학위를 받으며 졸업했고, 1968년에는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9]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은 "아일랜드의 계획"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대학 졸업 후, 1947년 피츠제럴드는 아일랜드 국영 항공사인 에어 링거스에 취업하여 교통 부문의 경제 전문가로 활동했다.[9] 그는 ''이코노미스트''의 아일랜드 통신원으로 활동하고, ''아이리시 타임스''에 경제 관련 글을 기고하는 등 언론 분야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4] 1958년까지 에어 링거스에서 근무했다. 피츠제럴드는 킹스 인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고,[10]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11]
3. 정치 경력
1969년 총선에서 더블린 사우스이스트 선거구에서 하원에 당선되었고, 같은 해에 "아일랜드의 계획"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정치 입문 전에는 TV3의 프로그램 ''The Political Party''에서 어슐라 할리건과의 인터뷰를 통해 정치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친조약 성향이었지만, 피아나 페일 당원들로부터 입당 제안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 데스몬드 피츠제럴드가 창립 멤버였던 피네 게일에 합류했다.[16]
피츠제럴드는 북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폭격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정치적 견해 차이와 피츠제럴드의 당 대표직에 대한 야망으로 인해 코스그레이브와 긴장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1972년 코크에서 열린 피네 게일 Ardfheis에서 코스그레이브는 당에서 뿌리 뽑아야 할 "잡종 여우"를 언급했는데,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피츠제럴드를 겨냥한 발언으로 해석되었다.
1977년 총선 패배 이후, 피츠제럴드는 1977년 7월 1일 피네 게일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20] 그는 당 조직을 정비하고 현대화하여 당의 지지 기반을 확대하였다.
1981년 총선에서 피네 게일은 65석을 얻어 노동당 및 무소속 의원들의 지지를 받아 소수 연립 정부를 구성, 1981년 6월 30일에 티셔흐로 선출되었다.[20] 그는 두 차례 총리직을 역임하면서 북아일랜드 문제와 경제 위기 해결에 주력했다. 1981년 7월 H-블록 단식 투쟁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20]
1982년 2월 총선에서 피네 게일은 권력을 잃었지만, 1982년 11월 총선에서 다시 승리하여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그는 피네 게일-노동당 연립 정부를 이끌며 경제 불황에 대처해야 했다. 높은 국가 부채를 줄이기 위해 공공 지출을 억제하려 했으나, 노동당과의 의견 차이로 어려움을 겪었다.
1984년 3월 15일, 피츠제럴드는 아일랜드 지도자로서는 네 번째로 미국 국회 합동 회의에서 연설했다.
3. 1. 외무부 장관 (1973-1977)
1973년 총선 이후, 피네 게일은 노동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했으며, 리엄 코스그레이브가 총리가 되었다. 피츠제럴드는 조지 콜리 당시 재무부 장관과의 토론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 재무부 장관직을 희망했으나, 리치 라이언에게 돌아갔고, 외무부 장관이 되었다.[18] 그의 아버지 데스몬드 피츠제럴드는 50년 전 W. T. 코스그레이브 정부에서 같은 직책을 맡았었다. 이브아 하우스(외무부 본부)로의 임명은 피츠제럴드의 경력과 피네 게일의 미래에 큰 영향을 주었다. 코스그레이브는 피츠제럴드의 진보적인 사상을 의심하고 당 대표 자리를 노린다고 생각했지만, 외무부 장관 재임 동안 좋은 관계를 발전시켰다.[16]
아일랜드는 1973년 유럽 경제 공동체(EEC, 현 유럽 연합)에 가입하면서 외무부 장관의 역할은 크게 변화했다. 피츠제럴드는 유럽 문제에 대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아일랜드의 위상을 높였고, 1975년 유럽 이사회 첫 번째 아일랜드 의장직의 성공을 이끌었다.[16]
하지만,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의 헌법 개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갈등을 빚었다. 1972년 국민투표 이전까지 헌법에 명시되었던 교회의 "특별 지위"는 물론, 이혼 및 피임 금지, 북아일랜드 내 종교 혼합 결혼과 통합 교육에 대한 낙인 등 가톨릭적인 법률을 삭제하고자 바티칸에 제안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아일랜드는 가톨릭 국가이며, 그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며 반대했다.[17]
3. 2. 피네 게일 당 대표 (1977-1987)
1977년 총선 패배 이후, 개릿 피츠제럴드는 피네 게일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20] 그는 당 조직을 정비하고 현대화하여 당의 지지 기반을 확대하였다.
3. 3. 총리 (1981-1982, 1982-1987)
1981년 총선에서 피네 게일은 65석을 얻어 노동당 및 무소속 의원들의 지지를 받아 소수 연립 정부를 구성, 1981년 6월 30일에 티셔흐로 선출되었다.[20] 그는 첫 임기 동안 북아일랜드 문제와 경제 위기에 직면해야 했다. 특히, 1981년 7월 H-블록 단식 투쟁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20]
경제 위기는 예상보다 심각했다. 피네 게일은 감세 계획을 철회하고 긴급 예산을 도입해야 했다. 존 브루턴이 제안한 두 번째 예산안은 1982년 1월 27일 의회에서 부결되었다.[21] 피츠제럴드는 패트릭 힐러리 대통령에게 의회 해산을 요청했고, 힐러리는 이를 승인했다.[21]
1982년 2월 총선에서 피네 게일은 권력을 잃었지만, 1982년 11월 총선에서 다시 승리하여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그는 피네 게일-노동당 연립 정부를 이끌며 경제 불황에 대처해야 했다. 높은 국가 부채를 줄이기 위해 공공 지출을 억제하려 했으나, 노동당과의 의견 차이로 어려움을 겪었다.
3. 3. 1. 북아일랜드 문제
피츠제럴드는 북아일랜드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1983년 뉴 아일랜드 포럼을 설립하여 아일랜드 공화국의 헌법 정당 대표들과 북아일랜드의 민족주의 정당인 SDLP를 한자리에 모았다.[24]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가 연합주의자 정당들의 참여 요청을 거절했고, 포럼에서는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공화국 간의 다양한 형태의 연합을 제안했지만, 대처 총리가 이를 즉각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 아일랜드 포럼은 아일랜드와 영국 정부 간의 진지한 협상을 재개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는 1985년 11월 앵글로-아일랜드 협정으로 이어졌다. 이 협정은 영국 정부가 북아일랜드 통치와 관련하여 아일랜드 공화국과 협의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제공했다.[24]
앵글로-아일랜드 협정은 연합주의자들에게는 거부되고 비난받았지만, 정부 간의 신뢰와 공동 행동을 발전시키는 기반이 되었으며, 이는 결국 1993년 다운 스트리트 선언과 그 이후의 공화주의 및 왕당파 휴전으로 이어졌다고 평가받는다.[18]
북아일랜드의 연합주의자들은 앵글로-아일랜드 협정에 격렬하게 반대했고, 이들의 국회의원들은 항의 표시로 영국 의회에서 모든 의원직을 사퇴했다. 북아일랜드에서 새로운 선거가 치러졌고, 이 선거에서 연합주의자들은 뉴리 앤드 아르마 선거구에서 SDLP의 세이머스 멜론에게 의석을 내주었다.
1984년 3월 15일, 피츠제럴드는 아일랜드 지도자로서는 네 번째로 미국 국회 합동 회의에서 연설하도록 초청받았다.
그의 정부는 또한 1987년 범죄인 인도에 대한 법을 개정했다. 이전까지는 북아일랜드나 영국에서의 폭력 행위가 정치적 범죄라는 주장을 통해 용의자 인도를 막을 수 있었으나, 개정된 범죄인 인도법은 이러한 방어 수단을 종식시켰다.[25]
3. 3. 2. 경제 정책
피츠제럴드 정부는 심각한 경제 불황에 직면했다. 높은 국가 부채를 줄이기 위해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려 했고, 이를 위해 공공 지출을 줄이는 정책을 추진했다.[22] 하지만 이러한 긴축 정책은 노동당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노동당은 공공 서비스 유지를 위한 지지층의 압력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22]
타너스터였던 딕 스프링과 피츠제럴드 총리는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4년 이상 연립 정부를 유지했지만,[22] 다른 장관들 사이에서는 긴장이 있었다. 피네 게일은 공공 지출을 통제하고 공공 예산 적자를 줄여 경제를 살리려 했다. 그러나 피츠제럴드의 재무부 장관 앨런 듀크스가 제안한 조치는 노동당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2]
결국 두 정당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22] 금융 위기가 더 심해지는 것은 막았지만, 경제 성장을 위한 결정적인 조치는 취하지 못했다. 경제 성장은 거의 없었고 실업률은 높았기 때문에 피츠제럴드 정부는 인기가 없었다.[22]
4. 총리 퇴임 이후
피츠제럴드는 1987년 아일랜드 총선에서 피네 게일이 크게 패한 후, 총리직에서 물러나자마자 피네 게일의 대표직에서 물러났고,[26] 1992년 아일랜드 총선에서 완전히 정계에서 은퇴했다.[27] 1991년에는 자서전 All in a Life영어를 출간하여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정계 은퇴 후에도 피츠제럴드는 ''아이리시 타임스''에 매주 토요일마다 주간 칼럼을 기고하고, 국내외에서 공공 문제에 대해 널리 강연했다.[28] 2002년에는 EU의 니스 조약에 대한 두 번째 아일랜드 국민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지기 위해 잠시 정계에 복귀하기도 했다. 1997년부터 2009년까지 아일랜드 국립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피츠제럴드는 2009년 EU의 리스본 조약에 대한 두 번째 국민투표 캠페인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아일랜드가 유럽 통합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아이리시 타임스'' 칼럼을 통해 켈트 호랑이 시대의 경제 정책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마지막 20년 동안 아일랜드 철도 보존 협회의 부회장을 역임했다.[31]
5. 사망
개릿 피츠제럴드는 2011년 5월 19일 더블린의 마터 사립 병원에서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0] 그는 폐렴을 앓고 있었다.[38] 사망 전 5월 5일에 피츠제럴드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졌고,[35] 5월 6일에는 인공호흡기를 달았다.[37]
아일랜드 대통령 메리 매컬리스는 성명을 통해 피츠제럴드를 "아일랜드 역사에 깊이 관여하며 모든 국민을 위해 더 나은 아일랜드를 만들려고 끊임없이 노력한 사람"이라고 칭송했다.[41] 당시 총리였던 엔다 케니는 "아일랜드에 진정으로 놀라운 기여를 한 정말 훌륭한 사람"에게 경의를 표했다.[42] 1970년대 피츠제럴드와 대척점에 있던 전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그를 "조국에 헌신한 지적이고 유쾌한 사람"이라고 회고했다.[43]
피츠제럴드의 사망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아일랜드 공화국 국빈 방문 셋째 날에 발생했다. 이 방문은 1985년 마거릿 대처와의 힐스보로 협정을 통해 그가 "토대를 구축"했던 북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의 완성을 기념하기 위해 기획되었다.[44] 여왕은 개인적인 메시지를 통해 애도를 표했고,[45] 당시 아일랜드를 방문 중이던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역시 피츠제럴드의 "평화 프로세스에 대한 엄청난 기여"에 경의를 표했다.[46][47]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애도를 표하며, 피츠제럴드를 "교육의 힘을 믿었던 사람, 젊은이들의 가능성을 믿었던 사람, 무엇보다도 평화의 가능성을 믿고 그 평화가 실현되는 것을 보았던 사람"이라고 말했다.[48]
피츠제럴드는 샨가나 묘지에 안장되었다.[49]
6. 유산
피츠제럴드는 아일랜드 정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온건하고 합리적인 정치인으로, 아일랜드 사회의 자유화와 북아일랜드 문제 해결에 기여했다. 특히, 앵글로-아일랜드 협정 체결은 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경제 정책에 있어서는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26][27]
1991년 자서전 ''All in a Life''를 출간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92년 총선에서 정계 은퇴 후, ''아이리시 타임스''에 주간 칼럼을 기고하고 국내외에서 공공 문제에 대해 강연했다.[28] 니스 조약에 대한 두 번째 아일랜드 국민투표(2002년)에서 찬성표를 던지기 위해 정계에 복귀하기도 했다.
아일랜드 국립대학교 총장(1997년~2009년)을 역임했으며, 2000년에는 세계 최초의 인터넷 공개 선거인 애리조나 민주당 예비 선거를 실시한 ''Election.com''의 이사회에 참여했다.[29]
리스본 조약에 대한 두 번째 국민투표(2009년) 캠페인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유럽 통합 지지를 주장했다. 피아나 페일 정부의 경제 정책과 켈트 호랑이 시대의 과도한 재정 지출을 비판하기도 했다.[30] 2010년에는 RTÉ의 "아일랜드인 40인" 목록에 선정되었다.
아일랜드 철도 보존 협회 부회장(20년)을 역임했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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