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희북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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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개희북벌은 13세기 초 남송의 실권자 한탁주가 금나라에 대항하여 추진한 북벌 계획이다. 한탁주는 권력을 강화하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북벌을 계획했으나, 내부의 반대와 군사적 열세로 인해 실패했다. 북벌은 금나라의 반격과 오희의 배신으로 이어졌고, 결국 한탁주의 암살과 강화로 마무리되었다. 개희북벌은 정치적 명분과 현실적 역량의 괴리, 그리고 동아시아 정세 변화 속에서 남송이 겪은 실패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개희북벌의 배경에는 남송의 정치적 상황, 한탁주의 집권, 그리고 금나라의 정세 변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1204년 (가태 4년)부터 1208년 (가정 원년)까지 남송과 금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초기에는 국경 지역에서 소규모 충돌이 잦았으나, 1206년 (개희 2년) 남송의 영종과 금나라의 장종이 서로 공격 조칙을 내리면서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2. 배경
남송 광종이 신임을 잃자, 조여우는 한탁주와 함께 광종을 퇴위시키고 영종을 옹립했다. 그러나 한탁주는 곧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조여우를 몰아내고, 주희를 중심으로 한 도학을 탄압하는 경원의 당금을 일으켰다.[1][2] 이 과정에서 한탁주는 황제의 측근으로서 인사와 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권력을 강화했다.[3]
이 무렵, 금나라는 북쪽에서 몽골 제국이 성장하면서 정세가 불안해졌다. 남송은 이 틈을 타 장암, 신기질 등을 국경 지역에 파견하여 북벌의 기회를 엿보았다. 금나라도 양양의 각장을 폐쇄하여 정보 유출을 막으려 했다.[4]
가태 4년(1204년) 5월, 금과의 강화에 반대하다 처형된 악비가 악왕으로 추봉되었고,[5] 11월부터 국경에서 충돌이 잦아졌다.
하지만 남송의 여론은 반금 감정이 강했지만, 실제로는 방위력 강화에 중점을 두는 소극적인 입장이 대다수였다. 육유나 신기질 등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문무 관리는 북벌에 소극적이었다.[4]
2. 1. 한탁주의 집권
남송 광종이 신하와 백성의 신임을 잃자 조여우는 한탁주와 함께 광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태자를 영종으로 옹립시켰다. 하지만 곧 한탁주는 조여우를 함정에 빠뜨려 조정에서 추방한 뒤[1] 주희를 중심으로 한 도학을 탄압하는 경원의 당금을 일으켰다.[2] 한탁주는 지각문사였다가 추밀원 승지로 승진했다. 지위는 높지 않았지만 황제의 외척이자 측근으로서 인사·정책 면에서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다.[3] 그 결과 재상 등 조정의 요직은 한탁주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차지했고, 출세를 위해 한탁주에게 아첨하는 사람들도 줄을 이었다. 하지만 한탁주의 권세가 강해질수록 한탁주에 반대하는 세력들도 늘어났다. 가태 3년/태화 3년(1203년) 무렵부터 경원의 당금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자 한탁주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북벌을 준비하기 시작했다.[4]
이 무렵 금나라는 북방에서 몽골 제국이 대두하여 동요하고 있었다. 이에 송나라는 장암·신기질 등을 국경 지대로 파견했다. 송나라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금나라도 양양의 각장을 폐쇄하여 정보가 송나라로 누설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4]
가태 4년/태화 4년(1204년) 5월, 금나라와의 강화에 반대하다 처형된 악비를 악왕으로 추봉했으며,[5] 11월부터 송나라와 금나라의 군대가 국경에서 충돌을 빚기 시작했다. 개희 원년/태화 5년(1205년) 7월, 고위직에 오르는 것을 계속 피했던 한탁주가 평장군국사에 임명되어 명실상부 송나라의 최고 실세가 되었으며, 심복 소사단을 지각문사에 임명했다. 소사단은 등우룡과 함께 한탁주에게 북벌을 권했던 인물 중 하나였다. 개희 2년/태화 6년(1206년) 4월, 금 장종은 그때까지의 태도를 바꿔 송나라를 공격하라는 조칙을 내렸다. 5월 7일에는 송 영종도 금나라를 공격하라는 조칙을 공표했다.[4][6]
한탁주는 정강의 변 이래 지속된 송나라의 반금(反金) 감정과 유학자들 사이에서 뿌리 깊던 대의명분론을 통해 북벌이 지지받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이를 위해 경원의 당금 때 추방된 인물들 중 섭적·설숙사 등을 복직시키는 공작도 추진했다. 하지만 육유·신기질 등 소수만이 북벌을 지지했고, 많은 문무관리들은 북벌에 참여하는 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송나라의 여론은 방위력을 강화해 강남을 지키는 데 그쳤던 셈이다. 전황도 좋지 못해 본격적인 전쟁 이전에 있었던 국지전에선 대체로 송나라가 우세했지만, 송나라와의 전쟁에 신중하던 이전의 태도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공세로 돌아서자 금나라 군대가 송나라 군대를 무찔렀다. 특히 금나라의 측면을 노릴 수 있는 사천을 끝내 빼앗지 못했으며, 한탁주가 주요 전력으로써 기대했던 오희가 금나라와 내통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송나라에 악재가 연이어 터져나왔다.[4][7][8]
결국 북벌을 시작한 지 반년이 지난 11월, 송나라와 금나라는 강화 교섭을 시작했다. 금나라는 개전의 책임자인 한탁주의 인도를 요구했다. 깜짝 놀란 한탁주는 이번 전쟁은 소사단이나 등우룡이 꾸민 것이지 자신은 무관하다고 항변했으나, 금나라는 한탁주를 인도하거나 한탁주의 목을 베는 것이 강화의 조건이라며 강경하게 나왔다. 초조해진 한탁주는 교섭 담당자를 바꾸고 전선의 지휘관도 교체하여 사태를 반전시켜 보고자 했으나 실패했고, 송나라 내에서도 한탁주가 이번 전쟁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4]
개희 3년/태화 7년(1207년) 11월 3일, 예부시랑 사미원 등이 주도하여 한탁주가 암살되었고,[9] 4일 뒤 소사단 역시 살해당했다.[10] 한탁주의 수급은 금나라에 인도되었고, 이후 강화 교섭은 급물살을 타서 가정 원년/태화 8년(1208년) 강화가 성립되었다. 그 해 9월 22일 강화가 정식으로 선포되었다.[4][11]
2. 2. 북벌 추진 배경
남송 영종 대의 권신 한탁주는 정강의 변 이후 남송 내에 팽배했던 반금(反金) 감정과 유학자들 사이에서 뿌리 깊던 대의명분론을 이용하여 북벌을 추진하려 했다.[4] 이를 위해 경원의 당금 때 추방된 인물들 중 일부를 복직시키는 등 여론 조성에 힘썼다.[4]
당시 금은 북방에서 몽골이 부상하면서 정세가 불안정했다.[4] 남송은 이러한 금의 상황을 틈타 장암, 신기질 등을 국경 지대에 파견하여 북벌의 기회를 엿보았다.[4] 금 역시 남송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상양의 교장을 폐쇄하는 등 정보 누설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4]
그러나 남송의 여론은 금에 대한 적개심은 강했지만, 이는 방위력 강화에 중점을 둔 소극적인 입장이었다.[4] 실제로 육유나 신기질 등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문무 관리는 북벌에 소극적이었다.[4]
3. 전개 과정
전쟁 초반, 국지전에서는 송나라 군대가 우세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금나라가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서면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특히, 금나라의 측면을 노릴 수 있는 사천 지역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 송나라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이는 한탁주가 가장 큰 전력으로 기대했던 오희가 금나라와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4][7][8]
결국, 북벌을 시작한 지 반년 만인 1206년 11월, 송나라와 금나라는 강화 교섭을 시작하게 된다.
3. 1. 북벌 준비
남송 광종이 신하와 백성의 신임을 잃자 조여우는 한탁주와 함께 광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태자를 영종으로 옹립시켰다. 하지만 곧 한탁주는 조여우를 함정에 빠뜨려 조정에서 추방한 뒤 주희를 중심으로 한 도학을 탄압하는 경원의 당금을 일으켰다.[1][2] 한탁주는 지각문사였다가 추밀원 승지로 승진했다. 지위는 높지 않았지만 황제의 외척이자 측근으로서 인사·정책 면에서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 결과로 재상 등 조정의 요직은 한탁주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차지했고 출세를 위해 한탁주에게 아첨하는 사람들도 줄을 이었다. 하지만 한탁주의 권세가 강해질수록 한탁주에 반대하는 세력들도 늘어났다. 가태 3년(1203년) 무렵부터 한탁주는 경원의 당금으로 인해 상처 입은 자신의 명예 회복을 위해 북벌을 계획하기 시작했다.[4]
마침, 금이 북방에서 몽골의 대두에 동요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와, 장엄·신기질 등을 국경 지대에 파견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금 측도 감지하여, 상양의 교장을 폐쇄하여 정보 누설을 방지하는 조치를 취했다.[4]
가태 4년(1204년) 5월, 금과의 강화에 반대하다 처형된 악비를 악왕으로 추봉했으며,[5] 11월부터 송과 금의 군대가 국경에서 충돌을 빚기 시작했다. 개희 원년(1205년) 7월, 고위직에 오르는 것을 계속 피했던 한탁주가 평장군국사에 임명되어 명실상부 남송의 최고 실세가 되었으며 심복 소사단을 지각문사에 임명했다. 소사단은 등우룡과 함께 한탁주에게 북벌을 권했던 인물 중 하나였다. 개희 2년(1206년) 4월, 그동안 송군의 침입에 대해 자중을 계속해 온 금의 장종이 남송을 공격하라는 조칙을 내렸고, 5월 7일에는 남송의 영종도 대금 전쟁의 조칙을 공식적으로 발했다.[4][6]
한탁주는 정강의 변 이래 지속된 송나라의 반금(反金) 감정과 유학자들 사이에서 뿌리 깊던 대의명분론을 통해 북벌이 지지받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이를 위해 경원의 당금 때 추방된 인물들 중 섭적·설숙사 등을 복직시키는 공작도 추진했다. 하지만 육유·신기질 등 소수만이 북벌을 지지했고 많은 문무관리들은 북벌에 참여하는 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송나라의 여론은 방위력을 강화해 강남을 지키는 데 그쳤던 셈이다.[4]
3. 2. 군사적 충돌
1204년(가태 4년/태화 4년) 11월부터 송나라와 금나라 군대가 국경에서 충돌하기 시작했다.[5] 초기 국지전에서는 송나라가 우세했지만, 금나라가 공세로 전환하자 각지에서 송군을 격파했다. 특히 사천 지역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 큰 타격이었는데, 이는 한탁주가 신뢰했던 오희가 금나라와 내통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4][7][8]
3. 3. 북벌 실패와 강화
개희북벌은 실패로 끝났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우선, 한탁주는 정강의 변 이후 남송 사회에 팽배했던 반금(反金) 감정과 유학자들 사이의 대의명분론을 통해 북벌이 지지를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육유나 신기질과 같은 소수의 인물들만이 북벌을 지지했을 뿐, 대다수의 문무 관리들은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4] 이는 남송의 여론이 금나라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곧 적극적인 북벌로 이어지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전황 역시 좋지 않았다. 초기 국지전에서는 송나라 군대가 우세했지만, 금나라가 적극적인 공세로 전환하자 각지에서 송나라 군대가 패배했다. 특히, 금나라의 측면을 공격할 수 있는 사천 지역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 뼈아팠다. 설상가상으로, 한탁주가 가장 큰 전력으로 기대했던 오희가 금나라와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키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4][7][8]
결국, 북벌을 시작한 지 반년 만인 1206년(개희 2년) 11월, 송나라와 금나라는 강화 교섭을 시작했다. 금나라는 강화의 조건으로 개전의 책임자인 한탁주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다.[4] 이에 한탁주는 자신은 전쟁과 무관하다고 항변했지만, 금나라는 한탁주의 목을 베는 것만이 강화의 조건이라며 강경한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한탁주는 교섭 담당자와 전선의 지휘관을 교체하며 상황을 반전시키려 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남송 조정 내에서도 한탁주가 전쟁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결국 1207년(개희 3년) 11월 3일, 사미원 등이 주도하여 한탁주를 암살하고, 4일 뒤에는 소사단 역시 살해했다.[9][10] 한탁주의 수급은 금나라에 인도되었고, 이후 강화 교섭은 빠르게 진행되어 1208년(가정 원년)에 강화가 성립되었다.[4][11]
4. 결과 및 영향
개희북벌은 남송과 금나라 모두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남송에서는 한탁주가 정강의 변 이후 남송에 퍼져있던 반금(反金) 감정과 유학자들 사이의 대의명분론을 이용하여 북벌을 추진하면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예상했다. 이를 위해 경원의 당금으로 추방된 섭적, 설숙사 등을 복직시키는 등 여론 조성에 힘썼다.[4] 그러나 육유, 신기질 등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 문무 관리는 북벌에 소극적이었고, 남송 여론은 방위력 강화에 머무르는 수준이었다.[4]
전황 역시 남송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초기 국지전에서는 송군이 우세했지만, 금나라가 본격적으로 공세에 나서자 각지에서 송군을 격파했다. 특히 금나라 측면을 공격할 수 있는 사천 지역을 확보하지 못한 데다, 한탁주가 주력으로 기대했던 오희가 금나라와 내통해 반란을 일으키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4][7][8]
결국 1207년 11월, 사미원 등이 주도하여 한탁주를 암살하고 소사단 역시 살해했다. 한탁주의 수급은 금나라에 인도되었고, 1208년 강화가 성립되어 그해 9월 22일 정식으로 선포되었다.[4][11]
13세기 초, 남송 영종 대에 몽골 제국이 북방에서 급부상하면서 금나라는 큰 위협에 직면했고, 이러한 국제 정세 변화는 남송에게 북벌의 기회로 여겨졌다.[4] 그러나 남송의 개희북벌은 금나라의 강력한 반격과 오희의 배신 등으로 실패했다.[4][7][8]
4. 1. 남송에 미친 영향
한탁주는 정강의 변 이후 남송에 팽배했던 반금(反金) 감정과 유학자들 사이의 대의명분론을 이용해 북벌을 추진하면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예상했다. 이를 위해 경원의 당금으로 추방된 섭적, 설숙사 등을 복직시키는 등 여론 조성에 힘썼다.[4] 그러나 육유, 신기질 등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 문무 관리는 북벌에 소극적이었고, 남송 여론은 방위력 강화에 머무르는 수준이었다.[4]전황 역시 남송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초기 국지전에서는 송군이 우세했지만, 금나라가 본격적으로 공세에 나서자 각지에서 송군을 격파했다. 특히 금나라 측면을 공격할 수 있는 사천 지역을 확보하지 못한 데다, 한탁주가 주력으로 기대했던 오희가 금나라와 내통해 반란을 일으키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4][7][8]
1206년 11월, 개전 반년 만에 남송과 금나라는 강화 교섭을 시작했다. 금나라는 개전 책임자로 한탁주를 지목하며 그의 인도를 요구했다. 한탁주는 전쟁 책임을 소사단, 등우룡에게 돌리려 했으나, 금나라는 한탁주의 목을 요구하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4] 결국 1207년 11월, 사미원 등이 주도하여 한탁주를 암살하고 소사단 역시 살해했다. 한탁주의 수급은 금나라에 인도되었고, 1208년 강화가 성립되어 그해 9월 22일 정식으로 선포되었다.[4][11]
4. 2. 한탁주와 역사적 평가
한탁주는 남송 영종 옹립에 공을 세웠으나, 곧 권력을 독점하고 정적들을 숙청하였다. 그는 경원의 당금을 일으켜 주희를 중심으로 한 도학을 탄압하고,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조정을 채웠다.[1][2] 이러한 행태는 안팎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그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북벌을 추진하게 되었다.[4]한탁주는 북벌이 대의명분론에 부합하며, 반금 감정에 호소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남송의 여론은 방어에 치중하는 경향이 강했고, 많은 문무관들은 북벌에 소극적이었다.[4] 전황 또한 불리하게 돌아갔으며, 특히 한탁주가 신뢰했던 오희의 배신은 큰 타격이었다.[4][7][8]
결국 북벌은 실패로 끝났고, 금나라는 강화 조건으로 한탁주의 목을 요구했다. 한탁주는 자신이 전쟁의 책임자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결국 사미원 등에게 암살당했다.[4][9] 그의 죽음 이후 남송과 금나라 간의 강화가 성립되었다.[4][11]
한탁주는 권력을 남용하고 정적을 탄압하는 등 전형적인 권신(權臣)의 모습을 보였다. 그의 북벌 추진은 개인의 정치적 야욕을 위한 것이었으며, 결국 남송에 큰 피해를 입혔다. 이는 권력자의 독단과 무리한 정책 추진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4. 3. 동아시아 정세 변화
13세기 초, 남송 영종 대에 몽골 제국이 북방에서 급부상하면서 금나라는 큰 위협에 직면했다. 이러한 국제 정세 변화는 남송에게 북벌의 기회로 여겨졌다.[4] 남송은 장암, 신기질 등을 국경 지대에 파견하여 금나라의 동태를 살폈고, 금나라는 상양의 교장을 폐쇄하는 등 정보 유출을 막고자 했다.[4]1206년(개희 2년/태화 6년), 금나라 장종이 남송 공격을 명하고, 남송 영종도 금나라 공격 조칙을 발표하면서 양국 간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4][6] 그러나 남송의 개희북벌은 금나라의 강력한 반격과 오희의 배신 등으로 실패로 끝났다.[4][7][8]
개희북벌의 실패는 남송이 몽골의 부상이라는 동아시아 정세 변화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남송은 금나라와 몽골 사이에서 전략적인 선택을 해야 했지만, 내부 분열과 군사적 역량 부족으로 인해 몽골과의 협력보다는 금나라와의 소모적인 전쟁을 선택했고, 이는 결국 남송의 쇠퇴를 가속화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참조
[1]
서적
続資治通鑑 巻154, 慶元元年二月戊寅条
[2]
서적
宋史 巻37, 寧宗紀一 慶元四年五月己酉条
[3]
서적
宋史 巻474, 韓侂冑伝
[4]
서적
衣川、1977年 pp.456-469
1977
[5]
서적
宋史 巻38, 寧宗紀二 嘉泰四年五月癸未条
[6]
서적
宋史 巻38, 寧宗紀二 開禧二年五月丁亥条
[7]
서적
宋史 巻38, 寧宗紀二 開禧二年十二月癸酉条
[8]
서적
続資治通鑑 巻157, 開禧二年十二月条
[9]
서적
宋史 巻38, 寧宗紀二 開禧三年十一月乙亥条
[10]
서적
宋史 巻38, 寧宗紀二 開禧三年十一月己卯条
[11]
서적
宋史 巻39, 寧宗紀三 嘉定元年九月己未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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