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최부잣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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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주 최부잣집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최진립을 시조로 하여 17세기부터 1960년대까지 12대에 걸쳐 존속한 명문가이다. 최부잣집은 3대 최국선 때부터 빈민 구제를 실천하고, 육훈을 통해 사회적 책임을 다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으며, 해방 후에는 전 재산을 교육 사업에 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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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부잣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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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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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
창건 | 조선 중기 |
주요 인물 | 최진립 |
가훈 |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재산은 만 석 이상 모으지 마라.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마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시집온 며느리들은 3년간 벙어리처럼 지내라.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
2. 역사
경주 최부잣집은 조선 중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약 300년간 부를 유지한 가문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 공을 세운 최진립이 가문의 기틀을 마련했고, 그의 후손들은 선진 농업 기술 도입, 소작인 배려, 빈민 구제 등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했다.
3대 최국선은 "재물은 거름과 같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여 흉년에 빚 문서를 불태우고 쌀을 나누어 주는 등 빈민 구제에 힘썼다. 이러한 나눔의 전통은 최준 대까지 이어져 조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예로 꼽힌다.[1]
19세기 말, 조선이 혼란에 빠지면서 최부잣집도 위기를 맞았지만, 소작인과 빈민들의 도움으로 활빈당의 공격을 막아냈다. 12대 최부자 최준은 일제강점기에 백산무역주식회사를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해방 후에는 전 재산을 교육 사업에 기부하여 300년 역사의 막을 내렸다.[2]
2. 1. 성립과 발전 (17세기 ~ 18세기)
최진립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하여 공을 세우고, 오위도총부도사, 공조참판, 삼도수군통제사 등의 관직을 지내며 부를 쌓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전사하기 전까지 아들 최동량을 교육시켜 최부잣집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1]최동량은 물려받은 재산으로 큰 땅을 구입하고, 시비법, 이앙법 등 선진 농업 기술을 도입하여 수확량을 크게 늘렸다. 특히 소작인들에게 수확량의 절반만을 소작료로 받고, 중간 관리자인 마름을 두지 않아 소작인들의 부담을 줄였다. 이는 당시 일반적인 관행과는 다른 파격적인 조치였다.[1]
3대 최국선은 "재물은 거름과 같다"는 불교 승려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빈민 구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671년 흉년에는 빚을 갚지 못하는 농민들의 담보 문서를 불태우고, 보릿고개에는 쌀 100석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소작 수입의 1/3을 빈민 구제에 사용하는 전통을 세워 200년 후 최준 대까지 이어지게 했다.[1] 이러한 최부잣집의 나눔은 조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예로 존경받았다.[1]
2. 2. 사회적 책임과 가문의 철학 (18세기 ~ 19세기)
최국선 때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나눔이 시작되었다. 어느 불교 승려가 "재물은 거름과 같습니다. 재물을 나누면 세상을 이롭게 하지만, 움켜쥐면 썩습니다."라고 말한 것을 듣고 나눔을 실천했다고 한다.[1] 최국선은 1671년 조선 현종 때 흉년으로 농민들이 쌀을 빌려 간 것을 갚지 못하게 되자, 아들 최의기 앞에서 담보 문서를 모두 불태웠다.최국선은 죽을 쑤어 거지들에게 푸짐하게 나눠주었으며, 보리가 여물지 않은 3월과 4월의 보릿고개엔 100석의 쌀을 이웃에게 나눠주었다.
최국선 대부터 소작 수입의 1/3을 빈민 구제로 쓰는 풍습이 생겨 200년 후인 최준 대까지 이어졌다.
이렇듯 후손을 엄격하게 교훈하며 탐욕을 줄여갔던 최부잣집은 조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예로 여겨지며, 세간의 존경을 받았다.
육훈#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 1년에 1만 섬 이상 재산을 모으지 말라.
#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사지 말라.
# 집에 온 손님은 융숭하게 대접하라.
#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 가문에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 동안 무명옷을 입도록 하라.
2. 3. 쇠퇴와 몰락, 그리고 그 이후 (19세기 말 ~ 현재)
19세기 말, 조선은 조정의 부패와 일본의 침략으로 혼란에 빠졌고, 최부잣집도 위기를 맞았다. 11대 최부자 최현식 대에는 활빈당의 공격으로 가문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으나, 최부잣집의 도움을 받았던 소작인과 빈민들이 자발적으로 활빈당을 물리쳐 주었다.[2]12대 최부자 최준 대에 이르러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최준은 일제강점기에도 굴하지 않고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안희제와 함께 운영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그는 임시정부 재정부장을 맡아 독립운동의 자금줄 역할을 했으며,[2] 2018년에는 고택 광에서 그 증거 문서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3]
해방 후, 최준은 전 재산을 대구대학(현재의 영남대학교)과 계림학숙 설립에 기부하여 교육 사업에 헌신했다.[4] 이로써 최부잣집은 12대, 300년에 걸친 역사의 막을 내렸다.
1964년, 삼성그룹 회장 이병철은 차남 이창희와 함께 최준과 최염을 만나 대구대 운영권을 '구두로' 넘겨받았다.[5] 이후 정부 주도로 대구대가 통합되어 영남대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퇴임 후 자리를 위한 것이라는 설이 파다했다. 박근혜는 1980년 29세의 나이로 영남대학교 이사장에 추대되었으나, 학내 반발로 이사장직에서 사퇴하고 이사로 남았다.[5]
1988년, 영남대학교는 사립대학으로서는 초유의 국정감사를 받았고, 박근혜는 이사직을 사임하며 '학교 일에서 완전히 손을 떼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2009년, 박근혜는 7명의 이사 중 4명을 추천하여 영남대학교 이사 추천권을 행사했다.[5] 2013년, 경주 최부잣집 종손 최염은 언론 인터뷰에서 "지금 실질적인 운영 권한은 박근혜 당선인이 행사한다고 봅니다"라고 말했다.[5]
3. 가계도
대수 | 이름 | 생존 년도 | 가족 관계 |
---|---|---|---|
1대 | 최진립 | 1568년 ~ 1636년 | 최신보의 3남 |
2대 | 최동량 | 1598년 ~ 1664년 | 최진립의 3남 |
3대 | 최국선 | 1631년 ~ 1682년 | 최동량의 장남 |
4대 | 최의기 | 미상 | 최국선의 차남 |
5대 | 최승렬 | 1690년 ~ 1757년 | 최의기의 장남 |
6대 | 최종률 | 미상 | 독자 |
7대 | 최언경 | 미상 | 최종률의 아들, 양자 |
8대 | 최기영 | 미상 | 최언경의 장남 |
9대 | 최세린 | 미상 | 자식 없음, 사후 최만희가 양자로 입적 |
10대 | 최만희 | 미상 | 최세린의 양자 |
11대 | 최현식 | 1854년 ~ 1928년 | 최만희의 장남 |
12대 | 최준 | 1884년 ~ 1970년 | 최현식의 장남 |
4. 평가
경주 최부잣집은 오랜 세월 동안 부를 유지하면서도 사회적 책임을 다한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특히, 어려운 이웃을 돕고 지역 사회 발전에 기여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최부잣집은 "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마라"는 가훈을 지키며 과도한 재산 축적을 경계했다. 또한, 흉년에는 소작료를 감면해주고, 주변 사람들에게 쌀을 나눠주는 등 베푸는 삶을 실천했다. 이러한 노력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며, 사회 통합에 기여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최부잣집의 이러한 행보는 단순한 부자를 넘어, 시대적 소명을 다한 가문으로 평가받는 이유이다.
오늘날에도 경주 최부잣집은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부의 사회적 환원과 나눔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며, 진정한 부자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참조
[1]
서적
기독교 사회주의 산책
홍성사
[2]
뉴스
경주 최부자집은 박정희에게 어떻게 몰락했나
http://www.hani.co.k[...]
[3]
Youtube
"200억을…" 독립운동 헌신 최부잣집 신화, 진짜였다 / SBS
https://www.youtube.[...]
[4]
뉴스
"`그들만의 왕국으로 전락한 사립대` 67개교 족벌경영"
https://www.mk.co.kr[...]
동아닷컴
2017-09-27
[5]
뉴스
경주 최부자집은 박정희에게 어떻게 몰락했나
http://www.hani.co.k[...]
한겨레
2013-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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