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정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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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정계비는 고려 예종 2년(1107년) 윤관이 여진 정벌 후 동북 9성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고려사, 고려사절요에는 공험진에 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선춘령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비석의 내용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 지리지에 언급되어 있으며, 비석의 4면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나 훼손되었고, '고려지경'이라는 글자가 있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고려정계비는 동북 9성의 위치를 추정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지만, 실물이 발견되지 않아 위치 비정에 대한 논쟁이 있으며, 비실존설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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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정계비 | |
---|---|
고려정계비 | |
![]() | |
종류 | 비석 |
용도 | 국경선 확정 |
건립 시기 | 10세기 (고려) |
위치 | 함경남도 김화군 비무장지대 |
좌표 | 알려지지 않음 |
관련 문화재 | 선춘령비 |
비문 정보 | |
내용 | 고려의 국경을 확정하고 여진족의 침입을 경고 |
글자 수 | 120자 |
서체 | 해서 |
역사적 배경 | |
배경 | 고려의 북진 정책과 여진족과의 관계 |
관련 사건 | 선춘령의 위치 논쟁 |
현재 상황 | |
위치 | 대한민국의 실효 지배 비무장지대 내 |
보존 상태 | 비무장지대에 위치하여 접근이 어려움 |
추가 정보 | |
관련 인물 | 서희 |
참고 문헌 | 고려사 동국여지승람 |
관련 문서 | 선춘령비 |
2. 역사적 기록
예종 2년 (1107년) 고려는 북진 정책의 일환으로 윤관, 오연총을 중심으로 여진을 공격하여 영토를 점령하고 동북 9성을 쌓았다. 윤관은 새로 점령한 영토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비석을 세웠다.[2][3]
2. 1.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
1107년(예종 2년) 고려는 북진 정책의 일환으로 윤관, 오연총을 중심으로 여진을 공격하여 영토를 점령하고 동북 9성을 쌓았다. 윤관은 새로 점령한 영토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비석을 세웠으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이 비의 위치가 동북 9성의 최북단인 공험진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2][3]2. 2. 세종실록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고려정계비의 정확한 위치가 함경도 거양성에서 서쪽으로 60리 떨어진 선춘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其東北七十里有土城基卽巨陽城 (중략) 城本高麗大將尹瓘所築自巨陽西距六十里先春峴卽尹瓘立碑處|기동북칠십리유토성기즉거양성 (중략) 성본고려대장윤관소축자거양서거육십리선춘현즉윤관입비처|그 동북쪽으로 70리에 토성기가 있으니, 곧 거양성이다. (중략) 그 성은 본래 고려 대장 윤관이 쌓은 것이다. 거양에서 서쪽으로 60리를 가면 선춘현이니, 곧 윤관이 비를 세운 곳이다.중국어(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길주목 경원도호부)[4]이 기록에 따르면 고려정계비는 두만강 북쪽에 위치하는데, 이는 동북 9성의 두만강 이북 가설을 지지하는 증거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7] 하지만 세종실록 지리지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공험진과 선춘현의 위치는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공험진과 고려정계비가 두만강 북쪽이 아니라고 보는 관점도 있다.[5]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비석의 내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언급이 존재한다. 이 이외에 전해지는 고려정계비의 내용은 없으며, 세종 시기 비석을 찾아 비문을 옮기려고 시도하기도 했으나[6] 전해지는 결과물은 없다. 其碑四面有書爲胡人剝去其字後有人堀其根有高麗之境四字|기비사면유서위호인박거기자후유인굴기근유고려지경사자|그 비의 4면에 글이 새겨져 있었으나, 호인이 그 글자를 깎아 버렸는데, 뒤에 사람들이 그 밑을 팠더니,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는 4자가 있었다.중국어(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길주목 경원도호부)[4]
3. 내용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비석의 내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이 외에 전해지는 고려정계비의 내용은 없으며, 세종 시기 비석을 찾아 비문을 옮기려고 시도하기도 했으나[6] 전해지는 결과물은 없다.
그 비의 4면에 글이 새겨져 있었으나, 호인이 그 글자를 깎아 버렸는데, 뒤에 사람들이 그 밑을 팠더니,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는 4자가 있었다.[4]
4. 위치 비정 논쟁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고려정계비의 정확한 위치가 함경도 거양성에서 서쪽으로 60리 떨어진 선춘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4] 이 기록에 따르면 고려정계비는 두만강 북쪽에 위치하는데, 이는 동북 9성의 두만강 이북 가설을 지지하는 증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7]
하지만 세종실록 지리지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공험진과 선춘현의 위치는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공험진과 고려정계비가 두만강 북쪽이 아니라고 보는 관점도 있다.[5] 고려정계비는 동북 9성의 최북단에 있다는 특성으로 인해, 동북 9성의 위치를 추정할 때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주제이나, 실물은 발견된 적이 없기 때문에 연구에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4. 1. 동북 9성 위치와의 연관성
고려가 북진 정책의 일환으로 윤관과 오연총을 중심으로 여진을 공격하여 영토를 점령한 후, 점령지에 동북 9성을 축조하였다. 윤관은 새로 점령한 영토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비석을 세웠으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이 비의 위치가 동북 9성의 최북단인 공험진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2][3]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고려정계비의 정확한 위치가 함경도 거양성에서 서쪽으로 60리 떨어진 선춘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고려정계비는 두만강 북쪽에 위치하는데, 이는 동북 9성의 두만강 이북 가설을 지지하는 증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7] 하지만 세종실록 지리지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공험진과 선춘현의 위치는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공험진과 고려정계비가 두만강 북쪽이 아니라고 보는 관점도 있다.[5]
고려정계비는 동북 9성의 최북단에 있다는 특성으로 인해, 동북 9성의 위치를 추정할 때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주제이나, 실물은 발견된 적이 없기 때문에 연구에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세종은 1439년 김종서에게 '선춘점에 윤관이 세운 비'를 포함해 동북 9성의 위치를 조사할 것을 지시했으나,[6] 그 결과는 전해지지 않는다.
조선 중기 한백겸은 함경남도 마운령에 있는 돌단을 고려정계비의 흔적으로 보아, 동북 9성의 위치를 길주 이남으로 보았으나, 1929년 최남선은 이 비석이 사실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로, 고려정계비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였다.[7]
4. 2. 조선 시대의 탐색과 논쟁
세종은 1439년 김종서에게 '선춘점에 윤관이 세운 비'를 포함하여 동북 9성의 위치를 조사할 것을 지시했으나,[6] 그 결과는 전해지지 않는다.조선 중기 한백겸은 함경남도 마운령에 있는 돌단을 고려정계비의 흔적으로 보아, 동북 9성의 위치를 길주 이남으로 보았으나, 1929년 최남선은 이 비석이 사실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로, 고려정계비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였다.[7]
5. 비실존설
고려정계비를 찾으려는 여러 시도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위치나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각에서는 '고구려의 옛 비석'을 가리키는 말이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비를 세웠다는 이야기로 변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 주장은 동북 9성의 두만강 이남 가설과 관련이 있다.[8][9]
참조
[1]
웹인용
고려정계비
http://thesaurus.his[...]
2024-02-02
[2]
인용
윤관이 여진 평정을 하례하는 표문을 올리다
https://db.history.g[...]
2024-02-02
[3]
인용
윤관이 표를 올려 칭하하고 공험진비를 세우다
https://db.history.g[...]
2024-02-02
[4]
인용
세종실록 155권, 지리지 함길도
https://sillok.histo[...]
2024-02-02
[5]
저널
公嶮鎭과 先春嶺碑의 위치 재검토
https://www.kci.go.k[...]
2023
[6]
웹인용
김종서에게 공험진의 위치·비 등 동복지방에 대해 아뢰라고 전지하다
https://sillok.histo[...]
2024-02-02
[7]
저널
고려 윤관이 개척한 동북9성의 위치 연구
https://www.kci.go.k[...]
2017
[8]
저널
고려말 東北面 영토개척과 영토의식: 公嶮鎭 두만강북설의 출현 배경
https://s-space.snu.[...]
2019
[9]
저널
고려 동북 9성의 범위와 ‘公嶮鎭 立碑’ 문제
https://scholarworks[...]
20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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