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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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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린인은 아코번의 가로 오오이시 요시오의 아내이자, 오오이시 요시카네의 어머니이다. 1669년, 타지마국 토요오카번의 가로 이시즈카 츠네요시의 장녀로 태어났으며, 1687년 오오이시 요시오와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두었다. 남편의 복수와 관련된 아코 사건 이후, 남은 아이들을 양육했으며, 이후 출가하여 코우린인이라 칭하며 히로시마번에서 은거료를 받았다. 1736년 사망했으며, 히로시마 원자 폭탄 투하로 묘가 소실되었다가 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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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젠인은 빈고국 미요시번 초대 번주 아사노 나가하루의 딸로, 겐로쿠 아코 사건과 관련된 인물이며, 남편 아사노 나가노리의 할복 후 출가하여 아코 낭사들을 지원하고 유족들의 사면 운동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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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인
위치
사원 정보
이름고린인 (香林院)
종파조동종
창건1532년
개산세키야쿠젠
본존석가여래
문화재오와리아사히시 지정 유형 문화재
주소일본 아이치현 오와리아사히시 인바초 가미가이토 3419
기타 정보
비고신주쿠 구에도 같은 이름의 사원이 있다.

2. 생애

조쿄 4년 (1687년), 하리마국 아코번 아사노가의 필두가로인 오오이시 요시오와 결혼하여 아코성 내 오오이시 저택으로 이주하였다. 겐로쿠 원년 (1688년) 장남 마츠노쇼 (훗날의 오오이시 요시카네), 겐로쿠 3년 (1690년) 장녀 쿠우, 겐로쿠 4년 (1691년) 차남 요시치요, 겐로쿠 12년 (1699년) 차녀 루리를 낳았다.

겐로쿠 14년 (1701년) 3월 14일, 에도성에서 칙사 향응역을 맡고 있던 주군 아사노 나가노리하타모토 키라 요시히사에게 칼로 상해를 입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사노 나가노리는 당일 할복하고, 아코번개역되었다. 5월, 아코성 개성 이후, 오오이시 요시오가 개성 잔무 처리를 하는 동안 리쿠는 네 자녀들과 함께 타지마 토요오카의 친정으로 돌아갔다. 이후 오오이시 요시오가 야마시나에 거처를 정하자, 7월 초 리쿠도 야마시나로 옮겨 다시 함께 살았다. 이들 부부생활에서 리쿠는 또 한명의 아이를 가졌다.

겐로쿠 15년 (1702년) 4월 15일, 오오이시 요시오는 맹약에 가담한 동지들 사이의 밀담과 "처자에게도 말하지 않는다"는 맹약의 원칙을 지키고, 연좌를 우려하여 리쿠와 다른 아이들을 다시 토요오카로 돌려보냈다. 또한 연좌되지 않도록 리쿠와 절연하였다. 그해 7월 5일, 리쿠는 친정에서 3남 오오이시 다이사부로를 낳았다.

12월 15일, 남편 오오이시 요시오와 장남 오오이시 요시카네를 중심으로 한 아코 낭사들이 원수 키라 요시히사에게 복수하고, 이듬해 2월 4일 할복하였다. 남겨진 리쿠는, 오오이시 요시오의 남겨진 아이를 양육했다. 장녀 쿠우와 차남 요시치요는 각각 젊은 나이에 사망했지만, 차녀 루리와 3남 다이사부로는 무사히 성장했다.

호에이 6년 (1709년) 도쿠가와 이에노부가 쇼군에 취임하면서, 아코 사건으로 희생된 의사(義士)들의 남겨진 아이들에게 대사면이 이루어졌다. 아키국 히로시마번의 아사노 본가는 오오이시 요시오의 아들을 가신으로 원했고, 쇼토쿠 3년 (1713년) 9월에 다이사부로는 아사노 본가에 사관했다. 이후 오반가시라(御番頭|오반가시라일본어)라는 번의 직책을 맡았고, 아버지 요시오와 같은 1500석을 받았다. 차녀 루리도 히로시마번사이자 아사노 가문인 아사노 나오미치와 결혼했다.

리쿠는 출가하여 코우린인 (香林院|코우린인일본어, 세이린인(青林院|세이린인일본어)이라고도 함)이라고 칭하고, 히로시마번으로부터 은거료로써 100석을 지급받았지만, 겐분 원년 (1736년) 11월 19일에 향년 68세로 사망했다. 히로시마의 코쿠타이지에 묻혔다.

쇼와 20년 (1945년) 8월 6일, 원폭 투하로 리쿠의 묘는 소실되었다. 쇼와 53년 (1978년)에 코쿠타이지가 히로시마시 니시구의 코이로 이전했을 때 재건되었지만, 현재의 묘는 유해 매장을 동반하지 않는 위령탑이다.

2. 1. 출생과 가문

타지마국 도요오카번 쿄고쿠가의 가로 이시즈카 츠네요시의 장녀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삿사 시나노노카미 야스니시의 딸이다. 이시즈카가는 대대로 쿄고쿠가의 필두가로를 맡아, 1200석을 받는 쿄고쿠가 중 가장 명문가였다. 몸집이 컸다고 하며, 키는 6척 (180cm)이었다고도 한다.

2. 2. 결혼과 아코에서의 삶

조쿄 4년 (1687년), 아코번의 필두가로인 오오이시 요시오와 결혼하여 아코성 내에 있던 오오이시 저택으로 이주하였다. 겐로쿠 연간에 걸쳐 4명의 자녀를 두었다.

요시오에게는 첩이 있었고, 겐로쿠 14년 (1701년) 2월 17일, 첩이 낳은 딸이 4살로 요절했다는 기록이 카가쿠지 자료에 남아있다.

같은 해 3월 14일, 주군 아사노 나가노리에도성에서 키라 요시히사에게 칼로 상해를 입히는 사건이 발생했고, 아사노 나가노리는 당일 할복, 아코번개역되었다. 아코성 개성 이후, 요시오가 개성 잔무 처리를 하는 동안 리쿠는 네 자녀들과 함께 타지마 토요오카의 친정으로 돌아갔다. 이후 요시오가 야마시나에 거처를 정하자, 7월 초 리쿠도 야마시나로 옮겨 다시 함께 살았다. 이들 부부생활에서 리쿠는 또 한명의 아이를 가졌다.

그러나 요시오가 맹약에 가담한 동지들과 밀담을 나누면서, '맹약은 처자에게도 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겐로쿠 15년 (1702년) 4월 15일, 맹약에 동참하기를 원했던 장남 요시카네를 제외하고 리쿠와 다른 아이들을 다시 토요오카로 돌려보냈다. 또한 연좌를 우려하여 리쿠와 절연하였다. 그해 7월 5일, 리쿠는 친정에서 3남 오오이시 다이사부로를 낳았다.

2. 3. 아코 사건과 야마시나 은거

겐로쿠 14년 (1701년) 3월 14일, 에도성에서 칙사 향응역을 맡고 있던 주군 아사노 나가노리하타모토 키라 요시히사에게 칼로 상해를 입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사노 나가노리는 당일 할복하고, 아코번은 개역되었다.[1] 아코 사건의 발발이었다.

5월, 아코성 개성 이후, 오오이시 요시오가 개성 잔무 처리를 하는 동안 리쿠는 네 자녀들과 함께 타지마 토요오카의 친정으로 돌아갔다.[1] 이후 오오이시 요시오가 야마시나에 거처를 정하자, 7월 초 리쿠도 야마시나로 옮겨 다시 함께 살았다.[1]

그러나 오오이시 요시오의 맹약에 가담한 동지들 사이에서 밀담이 진행되는 가운데, 맹약의 "처자에게도 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겐로쿠 15년 (1702년) 4월 15일, 오오이시 요시오는 맹약에 동참하기를 원했던 장남 요시카네를 제외하고 리쿠와 다른 아이들을 다시 토요오카로 돌려보냈다.[1] 또한 연좌되지 않도록 배려하는 마음으로 리쿠와 절연하였다.[1]

2. 4. 남편과 아들의 복수, 그리고 사별

아코 사건에서 남편 오오이시 요시오와 장남 오오이시 요시카네가 복수에 성공하고 이듬해 1703년 2월 4일 할복하자, 리쿠는 남겨진 아이들을 양육해야 했다. 장녀 쿠우와 차남 요시치요는 젊은 나이에 사망했지만, 차녀 루리와 3남 다이사부로는 무사히 성장했다.[1]

도쿠가와 츠나요시에서 도쿠가와 이에노부로 쇼군이 바뀌면서, 1709년 이에노부가 쇼군 선하를 하자 의사(義士)의 남겨진 아이들에게 대사면이 이루어졌다. 아키국 히로시마번의 아사노 본가는 요시오의 아들을 가신으로 원했고, 1713년 9월에 다이사부로는 아사노 본가에 사관하여, 이후 오반가시라(御番頭)라는 번의 직책을 맡아 아버지와 같은 1500석을 받았다. 차녀 루리도 히로시마 번사인 아사노 나오미치와 결혼했다.[1]

2. 5. 말년과 죽음

호에이 6년 (1709년) 도쿠가와 이에노부가 쇼군에 취임하면서, 아코 사건으로 희생된 의사(義士)들의 남겨진 아이들에 대한 대사면이 이루어졌다.[4] 아키국 히로시마번의 아사노 본가는 오오이시 요시오의 아들을 가신으로 삼기를 원했고, 쇼토쿠 3년 (1713년) 9월에 다이사부로는 아사노 본가에 사관했다.[4] 다이사부로는 이후 오반가시라(御番頭일본어)라는 번의 직책을 맡았고, 아버지 요시오와 같은 1500석을 받았다.[4] 리쿠의 차녀 루리도 히로시마번사이자 아사노 가문인 아사노 나오미치와 결혼했다.[4]

리쿠는 출가하여 코우린인 (香林院일본어, 세이린인(青林院일본어)이라고도 함)이라고 칭하고, 히로시마번으로부터 은거료로써 100석을 지급받았다.[4] 겐분 원년 (1736년) 11월 19일에 향년 68세로 사망하여,[4] 히로시마시 코쿠타이지에 묻혔다.[4]

쇼와 20년 (1945년) 8월 6일 원폭 투하로 리쿠의 묘는 소실되었다. 쇼와 53년 (1978년)에 코쿠타이지가 히로시마시 니시구의 코이로 이전했을 때 재건되었지만, 현재의 묘는 유해 매장을 동반하지 않는 위령탑이다.

3. 리쿠의 유산과 관련된 장소

도요오카 시립 도서관 정면 도로 옆에는 리쿠의 탄생비가 있다. 쇼후쿠지에는 리쿠의 유발총이 남아있다.

4. 평가

오이시 리쿠(大石りく)는 에도 시대의 무가 여성으로, 아코 사건(赤穂事件)으로 유명한 오이시 요시오(大石良雄)의 아내이다. 남편과 아들 오이시 요시카네(大石良金)의 복수를 돕고, 이후 유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워낸 인물로 평가받는다.

리쿠는 주군 아사노 나가노리(浅野長矩)의 할복(切腹)과 아코 번(赤穂藩)의 몰락 이후, 오이시 요시오(大石内蔵助)가 기라 요시나카(吉良義央)에게 복수할 것을 결심하고 맹약을 맺을 때, 맹약의 "처자에게도 말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아들 요시카네를 제외한 다른 아이들과 함께 친정으로 보내졌다. 요시오는 연좌를 우려하여 리쿠와 절연하였고, 리쿠는 이후 친정에서 삼남 오이시 다이잔(大石大三郎)을 낳았다.

아코 낭사(赤穂浪士)들의 복수 이후, 리쿠는 요시오의 유자녀들을 양육했다. 장녀와 차남은 젊은 나이에 사망했지만, 차녀 루리와 삼남 다이잔은 무사히 성장하여 각각 히로시마 번(広島藩)사와 결혼하거나 사관하였다. 리쿠는 출가하여 고린인(고린인)이라 칭했고, 히로시마 번(広島藩)으로부터 은거료를 받으며 여생을 보냈다.

리쿠는 남편과 가문을 위한 헌신, 그리고 자녀 양육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보여준 인물이다. 특히, 아코 사건(元禄赤穂事件)이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의리를 지킨 점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5. 대중문화 속의 리쿠

오오이시 요시오와 그의 아내 리쿠(본명: 이시즈카 츠네요시의 장녀)는 여러 연극, 영화, 드라마에서 중요한 인물로 묘사된다. 특히 아코 사건(츄신구라)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 이들 부부의 이야기는 핵심적인 줄거리 중 하나이다. 다음은 주요 작품 목록이다.

작품명유형오오이시 요시오 역리쿠 역
가나데혼 츄신구라(1748년)닌교조루리, 가부키오보시 유라노스케오카루
츄신구라(1958년 영화)영화하세가와 카즈오야마모토 후지코
츄신구라(1962년 영화)영화이치카와 우타에몬사쿠라 쿄코
아코 낭사(1964년)NHK 대하드라마하세가와 카즈오야마다 이스즈
겐로쿠 요란(1999년)NHK 대하드라마이시자카 코지오하라 레이코



이 외에도 수많은 작품에서 오오이시 요시오와 리쿠가 등장하며, 아코 사건의 비극성과 충절을 상징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참조

[1] 문서 かつて出身地の豊岡市で「大石りくまつり」が開催されていたなど
[2] 웹사이트 大石りく遺髪塚【香林(こうりん)会館】 https://www.city.toy[...] 2024-10-29
[3] 뉴스 「大石りくまつり」の歴史に幕 実行委高齢化で決断 https://www.kobe-np.[...] 神戸新聞NEXT 2017-10-31
[4] 뉴스 大石吉之進の墓回収へ 産経新聞但丹版 2021-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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