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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 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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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이 산요는 에도 시대 후기의 일본 역사학자, 사상가, 시인, 서예가, 문인화가이다. 그는 1781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주자학을 기반으로 존왕양이 사상을 고취하며 일본 중심의 역사관을 강조했다. 대표 저서로는 《일본외사》가 있으며, 이 책은 무가 시대를 다루면서 널리 읽혔다. 그는 또한 《일본악부》, 《산요 시초》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1832년 5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생애

Wintry Trees


Title page from the 1874 edition of ''Nihon Gaishi''


라이 산요는 1781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라이 슌스이, 어머니는 라이 바이시이다. 1781년 12월, 아버지 슌스이가 히로시마번 학문소 창설에 관여하여 유학자로 등용되면서 가족이 이주하여, 히로시마 성 아래 후쿠로 정에서 자랐다. 산요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어려서부터 시문에 재능을 보였고,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1788년 히로시마 번 학문소(현 슈도 중학교·슈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20] 아버지 슌스이가 에도에 근무하게 되면서 학문소 교관을 맡고 있던 숙부 라이 교헤이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797년에는 에도로 유학하여 아버지의 학우인 비토 지슈에게서 배웠다.

1800년 9월, 산요는 갑자기 탈번을 시도하여 교토로 상경하였으나, 교토까지 쫓아온 숙부 라이 교헤이에게 붙잡혔다. 번에 소속된 자가 무단으로 탈번하는 것은 불법이었기 때문에, 히로시마로 돌아온 뒤에는 본가에서 폐적되고 자택에 유폐되었다. 이러한 유폐는 오히려 산요가 학문에 전념하는 계기가 되었고, 3년 동안 저술에 몰두했다. 훗날 그의 위대한 저술로 꼽히는 《일본외사》의 초고가 완성된 것도 이때였다고 한다.

1809년, 히로시마번 학문소의 조교로 취임하였다. 같은 해, 아버지의 친구였던 유학자 간 사잔(菅茶山)의 초빙을 받아 빈고에 있던 그의 사숙 렌주쿠(廉塾)의 도강(都講, 학원장)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학자로서 명성을 천하에 떨치고 싶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던 산요는 1811년에 다시금 교토로 가서 그곳에 거처를 짓고 사숙을 열었다. 1816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 유고를 정리해 《슌스이 유고》로 펴냈다. 이듬해(1818년)에는 규슈 지방을 여행하며 히로세 단소(広瀬淡窓) 등과 교류하였다. 1822년 가미쿄구 산본기(三本木)에 히가시야마(東山)를 조망할 수 있는 저택을 짓고 ‘미즈니시 장’(水西荘)이라고 명명했다. 1828년에는 서재를 지어 이전 저택의 이름을 따서 '산자수명처'(山紫水明処)라 명명했다.

산요는 '소사'(笑社, 후의 진사)[23]를 결성하여 교토와 오사카의 문인들과 교류하며 일종의 살롱을 형성했다. 주요 멤버는 아버지와도 관계가 있던 기무라 겐카도와 교류했던 사람들의 자녀가 많았다.

저명한 문인 화가이자 한시 작가인 에마 사이코는 산요의 인생에 주요한 영향을 미친 인물 중 한 명이다. 산요는 1813년에 학자로서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그녀의 아버지를 방문했을 때 그녀를 만났다. 산요는 에마에게 즉시 매료되어 몇 번 만난 후 결혼을 원한다고 말했지만, 에마가 이전에 결혼을 거부했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거절당했거나, 혹은 라이 산요가 그녀에게 청혼하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에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산요는 곧 17세의 하녀 리에와 결혼하여 그녀에게도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법을 가르쳤다. 산요는 1813년에 에마 사이코의 한시 스승이 되었고, 그들은 산요가 죽을 때까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4]

산요는 《일본외사》, 《일본정기》, 《통의》 등의 저술에 힘썼으나, 덴포 연간에 들어간 51세 무렵부터 건강이 나빠져 객혈을 하기도 했다. 병세가 악화되는 중에도 저술을 계속했지만, 결국 1832년에 5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야마다 후타로의 《인간임종도권》(人間臨終図巻)에 따르면, 산요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일터를 떠나지 않았고, 손에서 붓이 떨어진 것은 숨을 거두기 몇 분 전이었으며, 숨을 거둔 그의 얼굴에는 안경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24]

2. 1. 출생과 가계

라이 산요는 1781년 1월 21일(안에이 9년 12월 27일)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라이 슌스이(頼春水)는 히로시마번의 유학자로, 오사카에서 주자학을 연구하고 사숙 아오야마샤(青山社)를 열었다. 아오야마샤 주변에는 시노자키 쇼치쿠, 고토 쇼인, 나미카와 한젠 등 많은 문인과 학자들이 거주했다.[20] 어머니 라이 바이시(頼梅颸)는 유의(儒医) 이이오카 기사이(飯岡義斎)의 장녀이자 시인이었으며, 여동생은 비토 지슈에게 시집갔다.

1781년(덴메이 원년) 12월, 아버지 슌스이가 히로시마 번의 학문소 창설과 관련하여 유학자로 등용되면서 가족은 히로시마 성 아래 부쿠로 정(현 히로시마시 나카구 부쿠로 정)으로 이주했다.[20]

2. 2. 유년 시절과 교육

라이 산요는 1781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라이 슌스이, 어머니는 라이 바이시이다. 1781년 12월, 아버지 슌스이가 히로시마번 학문소 창설에 관여하여 유학자로 등용되면서 가족이 이주하여, 히로시마 성 아래 후쿠로 정에서 자랐다. 산요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어려서부터 시문에 재능을 보였고,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1788년 히로시마 번 학문소(현 슈도 중학교·슈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20] 아버지 슌스이가 에도에 근무하게 되면서 학문소 교관을 맡고 있던 숙부 라이 교헤이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797년에는 에도로 유학하여 아버지의 학우인 비토 지슈에게서 배웠다.

2. 3. 탈번과 유폐

간세이 12년(1800년) 9월, 산요는 갑자기 탈번을 시도하여 교토로 상경하였으나, 교토까지 쫓아온 숙부 라이 교헤이에게 붙잡혔다.[21] 번에 소속된 자가 무단으로 탈번하는 것은 불법이었기 때문에, 히로시마로 돌아온 뒤에는 본가에서 폐적되고 자택에 유폐되었다.[21]

이러한 유폐는 오히려 산요가 학문에 전념하는 계기가 되었고, 3년 동안 저술에 몰두했다.[21] 훗날 그의 위대한 저술로 꼽히는 《일본외사》의 초고가 완성된 것도 이때였다고 한다.[21]

2. 4. 학자로서의 활동

분카 2년(1809년), 히로시마번 학문소의 조교로 취임하였다.[21][22] 같은 해, 아버지의 친구였던 유학자 간 사잔(菅茶山)의 초빙을 받아 빈고에 있던 그의 사숙 렌주쿠(廉塾)의 도강(都講, 학원장)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학자로서 명성을 천하에 떨치고 싶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던 산요는 분카 8년(1811년)에 다시금 교토로 가서 그곳에 거처를 짓고 사숙을 열었다. 분카 13년(1816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 유고를 정리해 《슌스이 유고》로 펴냈다. 이듬해(1818년)에는 규슈 지방을 여행하며 히로세 단소(広瀬淡窓) 등과 교류하였다. 분세이 5년(1822년) 가미쿄구 산본기(三本木)에 히가시야마(東山)를 조망할 수 있는 저택을 짓고 ‘미즈니시 장’(水西荘)이라고 명명했다. 분세이 11년(1828년)에는 서재를 지어 이전 저택의 이름을 따서 '산자수명처'(山紫水明処)라 명명했다.

2. 5. 교류

산요는 '소사'(笑社, 후의 진사)[23]를 결성하여 교토와 오사카의 문인들과 교류하며 일종의 살롱을 형성했다. 주요 멤버는 아버지와도 관계가 있던 기무라 겐카도와 교류했던 사람들의 자녀가 많았는데, 시노자키 산슈의 양자인 쇼치쿠, 교토의 난의(蘭医) 코이시 겐슌의 아들 겐즈이, 오사카의 남화가 오카다 베이산진의 아들 한코, 교토의 우라가미 교쿠도의 아들 슌킨, 오카야마의 타케모토 토토안 등이 있었다. 이외에도 승려 운카, 센다이 출신으로 나가사키에서 온 문인 화가 스게이 바이칸, 오와리 출신의 남화가 나카바야시 치쿠도, 약간 연상의 선배 격인 도공 아오키 모쿠베이, 막부 말기 삼필로 유명한 칸나 소오, 그리고 멀리 규슈에서 온 문인 화가 타노무라 치쿠덴도 참여하여 활발하게 시문서화를 제작했다.

저명한 문인 화가이자 한시 작가인 에마 사이코는 산요의 인생에 주요한 영향을 미친 인물 중 한 명이다. 산요는 1813년에 학자로서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그녀의 아버지를 방문했을 때 그녀를 만났다. 산요는 에마에게 즉시 매료되어 몇 번 만난 후 결혼을 원한다고 말했지만, 에마가 이전에 결혼을 거부했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거절당했거나, 혹은 라이 산요가 그녀에게 청혼하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에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산요는 곧 17세의 하녀 리에와 결혼하여 그녀에게도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법을 가르쳤다. 산요는 1813년에 에마 사이코의 한시 스승이 되었고, 그들은 산요가 죽을 때까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서신을 통해 그녀의 시를 수정하고 그녀에게 서예 연습을 위한 자신의 시를 보냈다.[4]

2. 6. 만년과 죽음

산요는 《일본외사》, 《일본정기》, 《통의》 등의 저술에 힘썼으나, 덴포 연간에 들어간 51세 무렵부터 건강이 나빠져 객혈을 하기도 했다.[24] 병세가 악화되는 중에도 저술을 계속했지만, 결국 1832년(덴포 3년)에 5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야마다 후타로의 《인간임종도권》(人間臨終図巻)에 따르면, 산요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일터를 떠나지 않았고, 손에서 붓이 떨어진 것은 숨을 거두기 몇 분 전이었으며, 숨을 거둔 그의 얼굴에는 안경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24] 또한 산요의 유고로 여겨지는 「남북조정윤론」(《일본정기》 수록)의 자서에는 이 저술을 결의한 것은 산요 자신이 숨을 거두기 열흘 전인 9월 12일 밤이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유해는 교토 마루야마 공원·조라쿠지(長楽寺)에 묻혔다.

3. 창작 활동

라이 산요는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의 《사기》를 모방하여 저술 체계를 구상했다. 《사기》의 '본기', '표', '서', '세가', '열전' 대신 '3기', '5서', '9의', '13세가', '23책'으로 구성하려 했으며, 《일본외사》가 '13세가'에 해당한다. 《일본외사》는 열전체 형식이기에 《사기》의 '열전'을 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시음, 검무에 자주 등장하는 '말채찍 소리도 죽인 채 밤중의 강을 건너도다'(鞭声粛粛夜河を過る)로 시작하는 가와나카지마 전투 관련 한시 《제불식암격기산도》(題不識庵撃機山図)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그의 작품은 사후에 출간된 『산요 시초』(전8권)에 수록되어 있다. 상고시대부터 쇼쿠호 시대까지의 역사적 사건을 가요풍으로 읊은 《일본악부》(전1권)도 저술했다. 《일본악부》의 첫머리는 역성혁명으로 멸망한 (영씨)과 (유씨) 등 중화 왕조와 달리, 일본 왕실은 「일관된 왕통」을 지녔다는 '국체의 정화(精華)'를 강조하는 시로 시작한다.

3. 1. 《일본외사》

《일본외사》(日本外史)는 라이 산요의 대표작으로, 일본 무가의 시대사를 다루고 있다. 사마천의 《사기》를 모방하여 기전체 형식으로 구성하려 했으나, 실제로는 세가와 열전을 합친 22권의 열전체로 완성되었다.

간명하고 열정적인 문체로 인해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유신 시기에 걸쳐 널리 읽혔지만, 군기물어 등 군담소설을 사료로 사용했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과 다른 부분도 있어 역사소설의 원류 중 하나로 평가받기도 한다.

3. 2. 《일본악부》

《일본악부(日本楽府)》는 고대부터 오다, 도요토미 시대까지의 역사적 사건을 가요풍으로 읊은 시집이다. 책의 첫머리에서는 역성혁명에 의한 (영씨, 서초패왕에 의해 멸망), (유씨, 의 섭황제에 의해 멸망)으로 대표되는 중화 왕조의 쇠퇴와 대비되는 일본 왕실의 「일관된 왕통」에 근거한 '국체의 정화(精華)'를 강조하고 있다.

시음(詩吟), 검무(剣舞)에서도 친숙한 '말채찍 소리도 죽인 채 밤중의 강을 건너도다'(鞭声粛粛夜河を過る)로 시작되는 가와나카지마 전투를 그린 한시 《제불식암격기산도》(題不識庵撃機山図)는 이 책에 수록되어 있다.[14]

3. 3. 기타 저작


  • 《일본정기》(日本政記): 일본 통사. 미완성.
  • 《통의》(通議): 정치, 경제, 사회 문제에 대한 논의.
  • 《산요 시초》(山陽詩鈔): 라이 산요의 한시집. 사후 간행. 가와나카지마 전투를 그린 한시 《제불식암격기산도》(題不識庵撃機山圖) 등이 수록.[25]
  • 《일본악부》(日本楽府): 고대부터 쇼쿠호 시대까지의 역사 사건을 가요풍으로 읊은 시집.[14]


라이 산요는 수묵화에도 능하여 문인화가로서의 작품도 남겼다.

나카바야시 지쿠도의 “산수도”. 라이 산요의 찬이 붙어 있다. 1825년작.

4. 평가

라이 산요는 에도 시대 후기를 대표하는 역사학자이자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저작들은 일본 근대 역사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1] 1827년에 완성한 《일본외사》는 미나모토 씨의 출현부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통치까지 일본 역사를 다룬 22권 분량의 책으로, 이 분야의 최초의 포괄적인 연구였다.[1] 이 책은 쇼군의 승인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천황의 권력 강화를 옹호했기 때문에 여러 번에서 금지되기도 했다.[1] 《일본외사》는 존왕양이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그러나 그의 역사관은 일본 중심적이고 국수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에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5. 관련 시설


  • 라이 산요 사적자료관 - 히로시마시 나카구 후쿠로마치의 옛집. 라이 산요가 탈번으로 유폐된 집이다.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라이 산요 거실"이 있다.
  • 산자수명처 - 교토시 가미교구 히가시산본기의 서재.
  • 라이 이세이 옛집 - 히로시마현 다케하라시에 있는 할아버지 라이 이세이가 염색점을 운영했던 집. 아버지 라이 슌스이가 어린 시절에 살았으며, 라이 산요도 몇 번 방문하여 시를 남겼다.
  • 산요 분토쿠덴 - 사후 100주년 기념을 계기로 건설. 히로시마시 미나미구 히지야마.
  • 아메미야의 나룻터 - 가와나카지마 전투와 관련된 사적으로서, 라이 산요의 한시 비석이 건립되었다. 나가노현 치쿠마시 아메미야.

6. 계보

라이 산요의 조상은 빈고국 요리카네 성(頼兼城)의 성주였던 오카자키 요리카네(岡崎頼兼)로, 모리 씨의 칸나베 성(神辺城) 공격에 참여하지 않아 멸망했다고 전해진다. 요리카네 성터에는 '라이 산요 선생 원조 요리카네 성터'(頼山陽先生遠祖頼兼城址)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소헤이 마사시게 ― 미시치로 도키 ― 미에몬 요시히로 ― 마타지로 고이키요 ― 미타로 고이칸 ― 큐타로 ―

슌스이  산요


참조

[1] 서적 Sources of East Asian Tradition, the Modern Period (vol.2) https://books.google[...] Google Books
[2] 서적 Sources of Japanese Tradition: Volume 2, 1600 to 2000, Volume 2 https://books.google[...] Google Books
[3] 서적 Early Modern Japanese Literature: An Anthology, 1600–1900 https://books.google[...] Google Books
[4] 서적 Breeze through bamboo : kanshi of Ema Saikō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8
[5] 서적 Breeze through bamboo : kanshi of Ema Saikō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8
[6] 서적 頼山陽 詩魂と史眼 岩波新書 2024
[7] 백과사전 頼山陽 平凡社「世界大百科事典 第二版」
[8] 웹사이트 https://web.archive.[...]
[9] 웹사이트 http://soutairoku.co[...]
[10] 서적 笑社論集(笑社記解説) 文人画研究会 2021-09-26
[11] 서적 人間臨終図巻 上巻 徳間書店 1986
[12] 간행물 叙任及辞令 {{NDLDC|2945805/1}} 官報 1891-12-18
[13] 간행물 叙任及辞令 {{NDLDC|2957891/3}} 官報 1931-09-25
[14] 문서 山陽外史頼襄(山陽)
[15] 문서 楽府
[16] 서적 頼山陽「日本楽府」を読む
[17] 서적 昭和文学全集 22 小学館 1988
[18] 간행물 叙任及辞令 {{NDLDC|2945805/1}} 官報 1891-12-18
[19] 간행물 叙任及辞令 {{NDLDC|2957891/3}} 官報 1931-09-25
[20] 백과사전 頼山陽 世界大百科事典第2版
[21] 웹사이트 http://www.geocities[...]
[22] 웹사이트 http://soutairoku.co[...]
[23] 서적 笑社論集(笑社記解説) 文人画研究会 2021-09-26
[24] 서적 人間臨終図巻 上巻 徳間書店 1986
[25] 서적 頼山陽「日本楽府」を読む
[26] 서적 昭和文学全集 22 小学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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