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고원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고원도는 고구려 왕족 출신으로, 759년 일본 견당사들을 당나라에서 데려오는 역할을 맡았다. 759년 제13차 견당사로 당나라에 파견되어, 체류 중이던 후지와라노 키요카와를 귀국시키려 했으나, 안사의 난으로 인해 고원도 등 일부만 귀국했다. 그는 당나라로부터 활 제작에 필요한 소의 뿔을 일본에 요청받아, 조정은 소뿔을 공납하게 했으며, 고원도는 귀국 후 종5위상으로 승진했다. 이후 미카와노카미, 사헤이준레이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나라 시대의 귀족 - 후지와라노 후히토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나라 시대 초기 귀족이자 정치가로서, 후지와라 씨 번영에 기여하고 율령 제정 역할 수행, 딸들을 황실에 시집보내 외척 지위를 공고히 하는 등 업적을 남겼으나, 권력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존재하는 인물이다.
  • 나라 시대의 귀족 -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는 758년에 태어나 에미시 정벌에서 활약하고 청수사 창건에 기여했으며, 사후에는 헤이안쿄의 수호신으로 숭배받은 헤이안 시대 초기의 무관이다.
  • 8세기 일본 사람 - 지토 천황
    지토 천황은 덴지 천황의 딸이자 덴무 천황의 아내로, 덴무 천황 사후 즉위하여 아스카기요미하라령 제정, 후지와라쿄 조영 등을 통해 율령 국가의 기틀을 다졌으며, 섭정 및 양위를 거쳐 태상천황이 되었다.
  • 8세기 일본 사람 - 사가 천황
    사가 천황은 809년에 즉위하여 823년까지 재위한 일본의 제52대 천황으로, 문치주의를 장려하고 정치 개혁을 시도했으며, 한시와 서예에 능하고 구카이를 지원하여 진언종 발전에 기여했다.
  • 고구려 유민 - 고선지
    고선지는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당나라의 장군이 되어 서역에서 활약했으며,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하여 당나라의 서진을 종식시키고 안사의 난 진압 중 처형되었다.
  • 고구려 유민 - 보장왕
    보장왕은 연개소문의 난으로 즉위하여 연개소문 사후 권력 다툼으로 혼란을 겪다 고구려 멸망 후 부흥을 시도하다 유배되어 사망했다.
고원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씨명고씨 (무성)
시대나라 시대
인물 정보
생년미상
몰년미상
관위종5위・좌평준령
주군준닌 천황
가족 관계
부모미상
형제미상
배우자미상
자녀미상
기타 정보
개명미상
이명미상
시호미상
신호미상
계명미상
묘소미상
특기 사항미상

2. 생애

고원도는 고구려 왕족계 출신으로, 759년에 일본 견당사를 당나라에서 영입하는 역할을 맡았다.[1]

2. 1. 견당사 영입 및 당나라 체류

덴표호지 3년(759년) 정월, 고구려 왕족계인 고원도는 준닌조에 의해 제13차 견당사의 영입당대사사(입당대사를 맞이하는 사자)로 임명되어 외 종5위하에 서임되었다.[1] 당시 견당사는 '요츠노후네'라고도 불리며, 전성기에는 400명 이상, 배 4척 규모였으나, 이 제13차 견당사는 1척, 총 99명으로 비교적 소규모였다.

2월, 귀국하는 발해사 양승경과 함께 견당사 일행은 발해로 건너갔으나,[1] 안사의 난으로 당나라가 혼란스러워 총 99명 중 고원도 등 11명만이 당나라로 가게 되었고, 판관인 내장전성 등은 10월에 일본으로 귀국했다.[2] 고원도는 발해의 하정사 양방경을 따라 입당하여, 무기 견본으로 갑옷, , , 화살 등을 받았다. 그러나 반란군이 아직 평정되지 않아 후지와라노 키요카와의 귀국은 허락되지 않았고, 고원도 등만이 남로로 귀국하게 되었다.

고원도는 중알자(황제의 측근) 사시화에 이끌려 쑤저우로 향했다. 덴표호지 5년(761년) 8월, 사시화는 쑤저우 자사 이호와 협의하여 길이 24m의 배 1척을 건조하고, 9명의 사공과 30명으로 고원도를 일본으로 귀국시켰다.[3]

당시 당나라 숙종은 안사의 난 평정으로 많은 무기를 잃었기 때문에, 고원도가 귀국할 때 활을 만들기 위한 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같은 해 10월, 일본 조정은 도카이도, 도산도, 호쿠리쿠도, 산인도, 산요도, 난카이도 등지에서 소뿔 7800척을 공납받아 비축하고, 아키국에서 견당사선 4척을 건조했다.[4] 같은 해 11월, 고원도는 도당의 공로로 외종5위하에서 내위의 종5위상으로 승서되었다.

2. 2. 귀국 및 공로

덴표호지 3년(759년) 정월, 후지와라노 키요카와를 일본으로 귀국시키기 위해 제13차 견당사가 편성되었다. 고원도는 영입당대사(입당대사를 맞이하는 사자)로 임명되어 외 종5위하에 서임되었다.[1]

발해사 양승경과 함께 발해를 거쳐 당나라로 가려 했으나, 안사의 난으로 인해 고원도 등 11명만이 당나라로 가게 되었다.[2] 고원도는 발해의 하정사 양방경을 따라 입당하여 무기 견본으로 갑옷, , , 화살 등을 받았다. 그러나 후지와라노 키요카와의 귀국은 허락되지 않았고, 고원도 등만이 남로로 귀국하게 되었다.

덴표호지 5년(761년) 8월, 고원도는 쑤저우 자사 이호가 건조한 배를 타고 9명의 사공과 함께 일본으로 귀국했다.[3] 당나라 숙종의 요청에 따라, 같은 해 10월 일본 조정은 여러 지역에서 소뿔 7800척을 공납받아 비축하고, 아키국에서 견당사선 4척을 건조했다.[4] 11월, 고원도는 도당의 공로로 외종5위하에서 내위의 종5위상으로 승서되었다.

이후, 미카와노카미, 사헤이준레이를 역임하였다.

2. 3. 이후 관력

天平宝字|덴표호지일본어 3년(759년) 1월 30일: 외위 종5위하, 당나라 대사 영입[4]

天平宝字|덴표호지일본어 4년(760년) 1월 16일: 노토노카미[4]

天平宝字|덴표호지일본어 5년(761년) 11월 3일: 내위 종5위상[4]

天平宝字|덴표호지일본어 6년(762년) 1월 9일: 미카와노카미[4]

天平宝字|덴표호지일본어 7년(763년) 7월 14일: 좌평준령[4]

3. 관력

연도직책
天平宝字|덴표호지일본어 3년(759년) 1월 30일외위 종5위하, 영입 당나라 대사[1]
덴표호지 4년(760년) 1월 16일노토노카미[1]
덴표호지 5년(761년) 11월 3일종5위상(내위)[1]
덴표호지 6년(762년) 1월 9일미카와노카미[1]
덴표호지 7년(763년) 7월 14일좌평준령[1]


참조

[1] 서적 『続日本紀』天平宝字3年2月16日条
[2] 서적 『続日本紀』天平宝字3年10月18日条
[3] 서적 『続日本紀』天平宝字5年8月12日条
[4] 서적 『続日本紀』天平宝字5年10月10日条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