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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위는 북제의 제5대 황제이다. 565년 부황 고담으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아 즉위하였으나, 간신들을 신임하여 국력을 쇠퇴시켰다. 이들의 참언으로 중신과 왕족들이 살해되고, 군사력 약화로 인해 진나라에 영토를 빼앗기기도 했다. 575년 북주의 침공으로 영토를 잃고, 577년 장남 고항에게 양위한 후 북주군에게 생포되어 북제는 멸망했다. 이후 고위는 일족과 함께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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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56년 출생 - 주법상
    주법상은 남북조 시대 진나라에서 수나라로 망명하여 진나라 멸망에 공헌하고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에도 참여한 수나라의 장군이다.
  • 577년 사망 - 소장 (양나라)
    소장은 양나라 멸망 후 왕림에 의해 옹립되어 양나라 부흥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북제로 망명하여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다.
고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고위
한자 표기高緯
로마자 표기Gao Wei
신분
직위북제 황제
재위 기간565년 6월 8일 - 577년 2월 4일
즉위천통 원년 4월 24일 (565년 6월 8일)
폐위승광 원년 1월 1일 (577년 2월 4일)
태상황577년 2월 4일 - 577년 3월 8일
온국공577년 5월 8일 ~ 577년 11월
연호천통 (565년 - 569년)
무평 (570년 - 576년)
융화 (577년)
묘호없음
시호없음
생애
출생천보 7년 5월 5일 (556년 5월 29일)
사망건덕 6년 10월 3일 (577년 11월) (21세)
가족 관계
부황무성황제 고담
모후황후 호씨
배우자홀률씨
안정 호씨
목사리
봉소련
자녀고항
고선덕
고매덕
고지건

2. 생애

565년 아버지 고담에게서 황제 자리를 물려받았다. 568년 고담이 사망하면서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 고위는 어리석어 화사개, 고아나굉, 목제파, 한장란 등 간신을 신임했고, 국력이 크게 쇠약해졌다.[7] 이들의 참언으로 곡률광이 숙청되고 난릉왕 고장공이 자결하는 등 중신과 왕족이 살해되어 북제의 군사력은 약화되었다. 이전까지 군사적으로 압도적인 우위에 있던 에게 오히려 영토를 빼앗기는 처지가 되었다.

북제가 쇠약해져 가는 것을 본 북주의 무제 우문옹은 출병을 결심, 575년 북주군의 침공이 시작되어 순식간에 영토를 잃었다. 577년 고위는 장남 고항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고 북주군을 피해 도망쳤으나, 부하들에게 배신당해 3월 청주에서 고항과 함께 북주군에게 생포되어 북제는 멸망했다. 북주는 그에게 온공(温公)이라는 작위를 내렸지만, 577년 그의 일족과 함께 살해했다.[7]

2. 1. 초기 생애

고위는 557년에 태어났으며, 당시 그의 아버지 고담은 그의 형인 문선제 치하의 장광왕이었다. 고위의 어머니는 고담의 부인인 호 공주였으며, 고위는 그녀의 첫 아들이었지만, 아버지 고담의 첫 아들은 아니었다. 고담의 후궁인 이 부인 또한 호 공주와 같은 날 몇 시간 전에 고작(高綽)을 낳았기 때문이다.[1] 그러나 호 공주가 그의 부인이었기에, 고담은 고위가 먼저 태어났다고 공표하고 그를 장자로 대우했다. 그 후, 그는 고담의 황태자로 지명되었다.[1]

561년, 고담의 또 다른 형인 효소제가 사망하면서 고담에게 왕위를 물려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고담은 황위에 올랐다(무성제).[1] 562년, 그는 그의 부인 호 공주를 황후로 책봉하고 고위를 태자로 책봉했다. 고위가 태자였을 때, 그는 핵심 장군인 호률광의 을 아내이자 태자비로 맞이했다.[1]

565년, 천문학적 징후가 황제의 자리를 바꿀 때임을 나타내자, 무성제가 총애하는 신하 화사개와 조정은 호 황후와 고위에게 잘 보이기 위해 무성제가 불운을 피하기 위해 고위에게 왕위를 넘겨줄 것을 제안했다. 무성제는 이에 동의했고, 고위는 여덟 살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지만, 무성제는 태상황의 칭호를 유지하며 실질적인 권력을 유지했다. 무성제는 고위의 아내인 태자비 호률을 황후로 책봉했다.[1]

2. 2. 치세

565년 고담에게서 제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568년 무성제 고담이 사망하면서 친정을 시작했다. 그는 어리석어서, 화사개, 고아나굉, 목제파, 한장란 등의 간신들을 신임하였고, 이로 인해 국력이 크게 쇠약해졌다.[7] 중신과 왕족들이 그들의 참언에 의해 살해되었는데, 특히 곡률광을 숙청하고 난릉왕 고장공을 죽인 사건은 북제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 결과, 이전까지 군사적으로 압도적이었던 에게 오히려 영토를 빼앗기는 처지가 되었다.

북제가 쇠약해져 가는 것을 지켜 본 북주 무제 우문옹은 출병을 결심했다. 575년 북주군의 침공이 시작되면서 북제는 순식간에 영토를 잃었다. 577년 고위는 장남 고항에게 양위하고 북주군을 피해 도피했으나, 결국 부하들에게 배신당하여 같은 해 3월 청주에서 유주 고항과 함께 북주군에게 생포되었다. 이후 북제는 멸망하였고, 북주는 고위에게 온공(温公)이라는 작위를 내렸지만, 577년 그의 일족과 함께 살해하였다.

567년 봄, 고위는 성인식을 치렀다.

고위는 유약한 성격으로 알려졌으며, 황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성제와 태상황후 호씨는 그의 동생 고연 동평왕을 총애하여 고연에게 고위 관직을 주고 황제인 형과 같은 대우를 받도록 했다. 고연은 총명하고 결단력 있는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한번은 무성제에게 "제 형은 성격이 유약합니다. 어떻게 제국을 이끌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기도 했다. 무성제와 태상황후 호씨는 고위를 폐위하고 고연을 황제로 옹립하는 것을 고려했으나,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569년경, 무성제가 심각한 병을 앓다가 허사개(화사개)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고 갑자기 사망했다. 허사개는 처음에는 무성제의 죽음을 알리지 않다가 며칠 뒤에 발표했다. 태상황후 호씨는 태후 칭호를 받았다.

무성제 사후, 고위가 공식적으로 황제 권한을 행사했지만, 실제 정부는 하석개(화사개), 루정원, 조언심, 고문요, 당옹, 기련맹, 고아나굉, 황후 후씨의 사촌 후장찬 등 8명의 고위 관료 집단이 이끌었다. 그러나 곧 내분이 발생했다. 569년 봄, 무성제의 사촌 조군왕 고예, 무성제의 동생 풍의왕 고윤, 무성제의 조카 안덕왕 고연종, 루정원, 고문요가 8명 중 가장 강력한 하석개를 지방 총독으로 임명할 것을 추천했다. 특히 고예는 하석개가 부패하고 부도덕하다고 비판했는데, 하석개와 후씨 황후의 불륜 관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관료들의 압력에 직면한 하석개는 고문요와 함께 지방으로 파견되는 것에 동의했고, 무성제 장례 후 하석개는 연주 자사, 고문요는 서연주 자사(대략 현대의 안양, 허난성)로 임명될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무성제 장례 후, 고예는 후씨 황후가 하석개를 무성제 장례 후 100일 동안 곁에 두고 싶어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석개에게 가능한 한 빨리 예청을 떠나라고 압박했다. 하석개는 루정원에게 뇌물을 주고 후씨 황후와 고위를 다시 만나, 고위 관료들이 자신들을 해치려 하며 자신만이 그들을 믿을 수 있다고 설득했다. 이에 고위는 고예를 질책하는 조서를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예가 하석개를 제거하도록 후씨 황후와 고위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궁궐에 들어갔을 때, 후씨 황후는 고예를 체포하고 경비대장 류도지에게 그를 교살하게 했다. 이후 하석개의 권력은 막강해졌다. 고위가 총애한 다른 측근으로는 고위의 유모 루영선과 그녀의 아들 목제파, 그리고 주정이 있었다.

570년 여름, 고위의 후궁 목사리가 그의 첫 아들 고항을 낳자, 고위는 대사면령을 선포했다. 루영선 부인은 고항이 황태자가 되어 황제가 되기를 원했지만, 후려 황후가 반대할 것을 우려하여 고항을 후려 황후에게 맡겨 키우도록 했다. 570년 겨울, 고위는 고항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무성제와 고위의 통치 기간 대부분 동안, 경쟁국 북주는 점차 북제 영토를 침략하여 국경에서 소규모 이득을 얻었다. 570년 겨울, 곡률광은 반격을 시작하여 분수(汾水, 현대의 린펀, 산시성을 흐름) 북쪽의 상당한 영토를 점령하고, 힐양(宜陽, 현대의 뤄양, 허난성)에서 북주 군대를 격파했다. 수도 예청(鄴城, 현대의 한단, 허베이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고위는 많은 병사들이 보상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군대에 해산 명령을 내렸다. 호율광은 고위에게 비밀 상소를 올려 황제가 군대에 황실 사자를 보내 병사들을 기리도록 요청했으나, 고위는 즉시 행동하지 않았다. 군대는 황제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한 채 예청에 접근했고, 고위는 호율광이 군대를 수도 가까이로 데려온 것에 불쾌감을 느껴 군인들을 기리고 해산시키는 사자를 보내기 전에 호율광을 궁궐로 소환했다.

571년 후반, 하석개의 권력에 분노한 고위의 동생 낭야왕 고엄은 그를 죽이고 권력을 장악하는 한편, 권력을 잡은 루영선 부인과 그의 아들 목제파를 죽일 것을 고려하며 군대를 동원했다. 호율광은 고엄이 하석개를 죽인 것은 인정했지만, 황제에게 충성하며 황제를 옹호하여 고엄의 군대에 해산 명령을 내렸고, 고엄의 군대는 붕괴되었다. 호율광은 고엄을 체포하여 궁궐로 압송했다. 호율광의 권고에 따라 고위는 처음에는 고엄을 살려주었지만, 571년 겨울 류도지에게 고엄을 질식시켜 죽게 했고, 고엄의 4명의 아들들 역시 살해되었다. 같은 해 겨울, 후씨 황후가 불교 승려 담헌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고위는 담헌을 처형하고 후씨 황후를 가택 연금하여 귀족들의 방문을 금지했다. 그러나 572년 봄, 고위를 달래기 위해 고엄에게 "추의 공애 황제"라는 이례적인 시호를 추증하고 고엄의 아내 이 공주에게 "추 황후"라는 시호를 내렸다. 주정과 루영선 부인은 루영선을 후씨 황후 대신 황태후로 만들려고 했지만, 고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후씨 황후는 아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오빠 호장인의 딸을 궁궐로 불러들여 좋은 옷을 입혔고, 고위는 그녀를 보고 반하여 후궁으로 삼았다.

572년, 후려 황후가 딸을 낳자, 고위는 호율광을 기쁘게 하기 위해 처음에는 아들을 낳았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이 무렵 호율광은 강력한 관료 주정, 목제파와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호율광은 주정을 싫어했고, 주정이 군 장군들과 거의 상의하지 않는다고 자주 불평했다. 어느 날, 호율광이 정부 건물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무성제 통치 기간 투옥되어 눈이 먼 주정이 호율광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를 지나쳐 가면서 당시 관습에 따라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 호율광은 화가 나서 "저 인간이 자기가 누군 줄 아는 거야?"라고 말했다. 주정은 호율광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호율광의 하인에게 뇌물을 주고 호율광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하인은 "당신이 권력을 잡은 이후로, 재상 공자 [호율광을 지칭, 호율광은 선양 공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음]는 매일 밤 한숨을 쉬며 '눈먼 자가 권력을 잡으면 제국은 틀림없이 파멸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라고 답했다. 한편 목제파는 호율광의 첩이 낳은 딸과 결혼을 요청했지만, 호율광은 거절했다. 또한 목제파가 고위에게 진양의 국토를 자신에게 부여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호율광은 군대의 말 방목에 해롭다며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이처럼 주정과 목제파는 모두 호율광을 멸시했다. 그들은 황제의 마음에 호율광에 대한 의심을 품게 했고, 후려 황후가 고위의 총애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이러한 의심을 더욱 키웠다.

같은 시기, 북주 장군 위소관은 고위의 의심을 이용하여 호율광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인상을 주려고 했다. 그는 두 개의 대구로 된 노래를 지었는데, 그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백 개의 ''성'' [(升, 측정 단위 -- 100 ''성''은 하나의 ''후'' (斛)를 구성)]가 하늘로 날아갈 것이고,''

:''밝은 달 [(明月, ''mingyue'', 호율광의 )]이 장안 [북주의 수도]을 비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다음과 같다.

:''높은 [(高, ''gao'')] 산은 저절로 무너질 것이고,''

:''다이묘 참나무 [(槲, ''hu'')]는 저절로 똑바로 설 것이다.''

위소관은 간첩을 보내 예청 근처에 노래를 퍼뜨렸고, 노래는 곧 인기를 얻었다. 주정은 이 상황을 이용하여 두 줄을 더 추가했다.

:''눈먼 자가 큰 도끼를 들 것이고,''

:''수다스러운 여자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주정과 루영선 부인은 모두 그 노래를 고위에게 보고하여 호율광에 대한 의심을 더욱 키웠다. 고위는 다른 총신 한장란과 상의했는데, 한장란은 호율광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으므로 고위는 처음에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정은 물러서지 않고, 호율광의 부하 봉사양에게 호율광이 571년에 군대를 예청 가까이 가져왔을 때 쿠데타를 계획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비밀 상소를 올리게 했다. 고위는 이번에 그것을 믿었고, 주정의 제안에 따라 호율광에게 말을 하사했다. 호율광이 황제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궁궐에 도착했을 때 류도지에게 호율광을 체포하여 교살하게 했다. 호율광의 일족은 거의 모두 학살당했는데, 그의 형제이자 동료 장군인 호율현과 그의 아들 호율무도, 호율세웅, 호율항아가 포함되었다. 몇 살 안 된 손자 호율종만이 살아남았다. 후려 황후는 폐위되어 별궁에 갇혔다.

2. 3. 북제의 멸망

575년 북주무제 우문옹(宇文邕)이 북제가 쇠약해진 틈을 타 침공을 시작하자, 북제는 순식간에 영토를 잃었다. 577년 고위는 장남 고항에게 양위하고 도피했으나, 부하들의 배신으로 3월 청주(青州)에서 고항과 함께 북주군에게 생포되면서 북제는 멸망했다.[7] 북주는 고위에게 온공(温公)이라는 봉작을 내렸지만, 577년 그의 일족과 함께 살해했다.[7]

무평 6년(575년), 북주 무제가 출병하여 침공을 시작하자 북제는 순식간에 국토를 잃었다. 수도였던 진양마저 함락 직전에 이르자, 고위는 진양 수비를 안덕왕 고연종에게 맡기고 도망쳤다.[7] 고연종은 군대의 추대를 받아 황제(안덕왕)가 되어 진양을 방어하려 했으나, 결국 패배하여 북주에 붙잡혔다.[7]

한편, 고위는 승광 원년(577년) 장남 고항(유주)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도망 다녔으나, 부하에게 배신당해 고립되었다.[7] 같은 해 3월, 청주에서 고항과 함께 북주군에 포로로 잡혀 북제는 멸망했다.[7] 이후 북주로부터 온공에 봉해졌지만, 건덕 6년(577년) 전 측근 목제파와 반란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살해되었다.[7]

2. 4. 최후

565년 부황인 고담에게서 제위를 물려받아 즉위하였다. 568년 무성제 고담이 사망하자 친정을 시작했다. 그는 어리석어서 화사개, 고아나굉, 목제파, 한장란 등의 간신들을 신임했고, 이로 인해 국력이 크게 쇠약해졌다.[7] 이들의 참언으로 중신들과 왕족들이 살해되었으며, 특히 곡률광이 숙청되고 난릉왕 고장공이 자결한 후 북제의 군사력은 약화되었다. 이전까지 군사적으로 압도적인 우위에 있던 에게 오히려 영토를 빼앗기는 처지가 되었다.

북제가 쇠약해져 가는 것을 본 북주의 무제 우문옹은 출병을 결심했다. 575년 북주군의 침공이 시작되어 순식간에 영토를 잃었다. 577년 후주는 장남 고항에게 양위하고 북주군을 피해 도피했으나, 결국 부하들에게 배신당해 3월 청주에서 유주 고항과 함께 북주군에게 생포되었다. 이로써 북제는 멸망했다. 북주는 그에게 온공(温公)이라는 작위를 내렸지만, 577년 그의 일족과 함께 살해되었다.[7]

3. 가족 관계

고위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 '''조부''' : 고조(高祖) 신무황제(神武皇帝) 고환
  • '''조모''' : 무명황후(武明皇后) 누소군(婁昭君)
  • '''부친''' : 세조(世祖) 무성황제(武成皇帝) 고담
  • '''모친''' : 황후(皇后) 호씨(胡氏)


고위는 여러 명의 황후와 후궁을 두었으며, 슬하에 여러 명의 아들과 딸을 두었다.

고위의 아들은 고항을 포함하여 고각, 고선덕, 고매덕, 고질전 등이 있었다. 고항570년에 태어나 578년에 사망했으며, 어머니는 황후 목씨이고, 북제의 제6대 황제였다.[13]

고위의 딸 중에는 572년에 태어난 호율황후 소생의 딸이 있으며, 남양공 한흥에게 시집갔다.

3. 1. 황후

목황화(穆黄花)는 572년부터 573년까지 황후였다가 이후 573년부터 577년까지 우황후(右皇后)로 불렸다. 경소(輕霄)라는 별칭이 있었다.[13]

풍소련은 573년부터 577년까지 좌황후(左皇后)였다.[14]

3. 2. 후궁

고위의 후궁은 다음과 같다.

봉호별칭성씨이름생몰년도비고
좌아영(左娥英)이씨이조아의 동생 이조흠의 딸
우아영(右娥英)배씨
소의(昭儀)동씨동현의의 딸
소의(昭儀)조씨
부인(夫人)조씨
부인(夫人)모씨모사안의 여동생
부인(夫人)팽씨
부인(夫人)왕씨
부인(夫人)소왕부인왕씨
부인(夫人)예호녀이씨
부인(夫人)이씨이효정의 딸



고위의 정실은 다음과 같다.


  • 호율황후 (폐위)
  • 호황후 (폐위)
  • 황후 목황화, 좌황후
  • (숙비) 풍소련


고위 후궁들의 자녀는 다음과 같다.

어머니봉호이름생몰년도비고
황후 목씨황제고항570–578장남
왕씨아들
불명동평왕고각? - 572차남
불명고선덕셋째 아들
불명고매덕넷째 아들
불명고질전다섯째 아들
불명한흥(남양공)에게 시집감
호율황후572년 출생


3. 3. 황자

순서봉호시호이름생몰년도생모별칭비고
1황태자(皇太子)고항570년 ~ 578년황후 목황화제6대 황제 유주.
2동평왕(東平王)고각(高恪)[15]
3고선덕(高善德)
4고매덕(高買德)
5고질전(高質錢)


3. 4. 황녀

황후 호율씨가 572년에 딸을 출산하였다. 이 딸은 남양공(南陽公) 한흥(韓興중국어)에게 시집갔다.[1]

봉호이름생몰년도생모부마별칭비고
공주(公主)황후 호율씨남양공(南陽公)
한흥(韓興)
공주(公主)572년 ~ ?폐황후 곡률씨


4. 평가

고위는 무성 황제가 사망한 후 황제의 권한을 직접 행사했지만, 실질적인 정부 운영은 하석개, 루 딩위안(婁定遠), 조오 옌선(趙彥深), 가오 원야오(高文遙), 탕 융(唐邕), 치롄 멍(綦連猛), 가오 안아공, 후씨 황후의 사촌 후 창찬(胡長粲) 등 8명의 고위 관료들이 이끌었다. 569년, 이들 사이에 내분이 발생하여, 고위 관료들의 압력으로 하석개는 지방으로 파견되었다.[1]

고위의 총애를 받은 또 다른 측근으로는 고위의 유모 루 링쉬안과 그녀의 아들 무 티포가 있었다.[1]

570년, 고위의 후궁 무 셜리비가 아들 가오 헝을 낳자 대사면령을 선포하고, 같은 해 겨울 가오 헝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경쟁국 북주는 북제 영토를 점차 침략했고, 570년 겨울 호율광이 반격하여 분수(汾水) 북쪽 영토를 점령하고 힐양(宜陽)에서 북주 군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고위는 군대에 해산 명령을 내렸고, 호율광은 황제가 군대에 황실 사자를 보내 병사들을 기리도록 요청하는 비밀 상소를 올렸으나, 고위는 즉시 행동하지 않았다.[1]

571년, 하석개에 분노한 고위의 동생 낭야왕 가오 옌이 그를 죽이려 했으나, 호율광이 황제를 옹호하여 가오 옌의 군대를 해산시키고 체포했다. 고위는 가오 옌을 살려주려 했으나, 결국 류 타오즈(劉桃枝)에게 가오 옌을 죽이게 했다. 같은 해 겨울, 후씨 황후가 불교 승려 탄시안(曇獻)과 불륜을 저지른 사실이 밝혀져 탄시안은 처형되고 후씨 황후는 가택 연금되었다.[1]

572년, 호율광과 주, 무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었다. 주와 무는 호율광을 멸시하고 황제에게 호율광에 대한 의심을 품게 했다. 북주 장군 위 샤오콴은 호율광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노래를 퍼뜨렸고, 주와 루 부인은 이를 고위에게 보고하여 의심을 키웠다. 결국 고위는 호율광에게 말을 하사하고, 그가 감사를 표하러 궁궐에 왔을 때 류 타오즈를 시켜 호율광을 체포하고 죽였다. 호율광의 일족은 거의 모두 학살당했다.[1]

폐위된 후씨 황후 대신 루 부인은 무씨를 황후로 만들려 했으나, 호태후는 자신의 조카딸을 황후로 만들고 싶어했다. 루 부인은 주 팅과 함께 호 황후 책봉을 제안했고, 고위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루 부인은 무씨를 황후로 만들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고위에게 계속 요청했다. 결국 572년 겨울, 고위는 무씨를 "좌 황후"로 책봉하고 호 황후에게 "우 황후" 칭호를 부여했다. 573년 새해 무렵, 루 부인은 호태후에게 호 황후가 그녀를 비방했다고 거짓으로 말했고, 호태후는 호 황후를 궁궐에서 쫓아냈다.[1]

루 부인과 무 티포는 매우 강력하고 부패하여 공개적으로 뇌물을 받고 황실 관직을 팔았다. 573년 봄, 무 티포, 고 아나공, 한 장롼은 "삼귀"로 불리며 정부를 장악했고, 부패 문제는 심각해졌다. 고위는 사치를 누리며 궁궐을 짓고 허물기를 반복하여 북제 황실 재정을 고갈시켰다.[1]

573년 봄, 고위는 우 황후 무씨를 유일한 황후로 책봉했다. 같은 해, 주 팅은 문림관(文林館)을 설립하고 리 더린과 옌 즈투이(顏之推)를 책임자로 임명하여 ''수문전어람''(修文殿御覽)을 저술했다.[1]

573년 여름, 진나라 선제는 우 밍처를 보내 양쯔강을 건너 공격했다. 고위는 소극적으로 저항했고, 양쯔강과 화이강 사이의 북제 영토는 모두 진나라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무 티포는 "수양에 대해 왜 걱정해야 합니까?"라며 고위의 향락적인 생활을 옹호했다.[1]

진나라의 공격 중에 고위는 고장공을 독살했고, 추이 지슈(崔季舒)와 장 됴(張雕) 등 관리들을 처형했다.[1]

574년 봄, 남안왕 고 스하오(高思好)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고위는 무 황후 대신 펑 샤오롄(馮小憐)에게 매혹되어 그녀를 황후로 만들었다.[1]

역사가 쓰마 광은 ''자치통감''에서 고위의 치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1]


  • 고위는 말을 잘하지 못하고 정부 관리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광대와 하인 외에는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 무성 황제의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을 물려받아 궁궐의 모든 여자들과 환관들은 최고의 비단을 입고 진미를 먹었다.
  • 훌륭한 궁궐과 정원을 건설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건물은 허물어지고 다시 지어지기를 반복했다.
  • 불상 조각을 위해 예성 궁궐을 낮처럼 밝게 비추었다.
  • 자연 재해, 불길한 징조, 농민 반란이 있을 때마다 불교와 도교 승려들을 대접하여 어려움이 지나가도록 신의 축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었다.
  • ''무슈곡''(無愁曲)을 작곡하고 수백 명의 하인들과 함께 노래하여 사람들은 그를 "걱정이 없는 천자"라고 불렀다.
  • 화림원(華林園) 안에 "빈민 소년 마을"을 세우고 빈민 옷을 입고 구걸하는 것을 즐겼다.
  • 중요한 국경 도시의 모형을 만들고 군인들이 북주 군인처럼 행동하여 공격하게 하고, 환관들과 함께 공격을 막았다.
  • 루 링쉬안, 무 티포, 고 아나공, 한 장롼 등이 정부를 장악하고, 환관 덩 창융(鄧長顒)과 첸 더신(陳德信), 흉노 허 홍전(何洪珍) 등이 중요한 의사 결정에 참여했다.
  • 관리의 승진은 뇌물의 양에 달려 있었고, 판사들도 뇌물에 따라 판결을 내렸다.
  • 황실 재정이 고갈된 후, 사령부와 현을 상으로 사용하여 하인들이 지사 및 현감 관직을 경매에 부치고 수익을 챙겼다.


북주 무황제는 북제를 멸망시키려 575년 가을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으나, 요새를 포위하던 중 병이 나서 철수했다. 576년 겨울, 북주 무 황제는 다시 공격하여 핑양(平陽)을 점령했다. 고위는 군대를 모아 핑양으로 향했으나, 북주군은 핑양을 방어했다. 북제군은 핑양을 포위하고 성벽을 돌파했으나, 고위는 공격을 중단하고 펑 후궁을 불러 도시 함락을 목격하게 했다. 핑양이 포위되자 무 황제는 다시 공격했고, 고위는 무 황제와 직접 교전하기로 결정했다. 577년, 전투 중 작은 후퇴로 펑 후궁과 무 티포는 공황 상태에 빠져 퇴각을 제안했고, 고위는 군대를 버리고 예성으로 도주했다.[1]

고위는 사촌 고 얀종에게 예성을 방어하게 하고 자신은 북쪽으로 도주하려 했으나, 장군 메이 셩랑(梅勝郎)의 설득으로 예성으로 돌아갔다. 무 티포는 고위를 버리고 북주에 항복했고, 그의 어머니 루 부인은 자살했다. 고 얀종은 스스로 왕위를 차지하라는 설득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북주군은 예성을 포위하고 점령했다.[1]

고위는 군대에 참여할 사람들에게 높은 보상을 게시했지만, 자신의 궁궐 소유물에서 보물을 기여하려 하지 않았다. 점성가들이 황실 자리가 바뀔 것이라고 지적하자, 고위는 577년 봄 아들 고 헹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태상황''이 되었다.[1]

5. 기타

고위는 스스로 비파를 연주하여 "무수의 곡"을 만들었다. 측근들이 일제히 화답했기에 민간에서는 "무수 천자"라고 불렸다.[8]

고위는 이복 형제인 고작에게 "임지에 있을 때 무엇이 즐거웠느냐?"고 물었다. 고작은 "전갈을 많이 넣은 구덩이에 사람을 넣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라고 대답했다. 고위는 똑같은 짓을 시키고는 고작을 꾸짖으며 "어째서 이렇게 재미있는 짓을 숨기고 있었는가"라고 말했다.[8]

고위는 함락된 평양을 탈환하러 갔을 때,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함락시킬 수 있었지만, 풍숙비와 함께 함락되는 모습을 구경하려고 공격을 멈추게 했다. 풍숙비가 화장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바람에 결국 평양을 함락시키지 못했다.[8]

진나라에 침략당했을 때 고위는 안색을 잃었지만, 신하에게 "아직 회하 이남을 잃었을 뿐입니다. 황하 이남을 잃더라도 우리나라에는 구자 정도의 국력이 있습니다. 평생 놀고먹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까"라는 말을 듣고 그대로 납득해 버렸다.[8]

참조

[1] 서적 History of the Northern Dynasties
[2] 웹사이트 Chinese-Western Calendar Converter http://sinocal.sinic[...]
[3] 서적 Zizhi Tongjian
[4] 서적 Zizhi Tongjian
[5] 간행물 Bei Shi
[6] 문서
[7] 학술지 北斉の文林館と修文殿御覧 https://koara.lib.ke[...] 三田史学会 2023-09-07
[8] 웹사이트 通鑑記事本末 http://www2.ktarn.or[...]
[9] 학술지 北魏における渤海高氏 https://koara.lib.ke[...] 慶應義塾大学附属研究所斯道文庫 1963-03
[10] 문서 황태자비(皇太子妃)
[11] 문서
[12] 문서 홍덕부인(弘德夫人)/좌소의(左昭儀)
[13] 문서 홍덕부인(弘德夫人)/사리태감(舍利太監)/우황후(右皇后)/태상황후(太上皇后)
[14] 문서 숙비(淑妃)
[15] 문서 낭야왕(琅邪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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